영원히 쫓기는 나치범죄자       HOME

                     
               
      나치전범 사냥의 역사

                                                                                               변호사  박원순

 


1.서론

--지연된 정의

"이 처단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이 범죄자들의 몸이 먼지로 변한 이후에도 이 세상에 드리울 사악한 영향 때문이다. 그들은 인종적 증오, 테러리즘과 폭력, 권력의 오만과 잔혹성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그들은 또한 유럽의 세대와 세대를 이어 인간성을 말살하고 주거를 파괴하고 생활을 궁핍으로 몰아넣은 열렬한 민족주의와 군사주의, 전쟁 음모의 상징이다. 우리가 단호하게 처리하지 못하면다시 등장하게 되고 말 이러한 사회적 세력과 문명은 타협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노인이 되었거나 병이 든 나치전범들을 추적하거나 체포된 범죄자를 법정에 세울 때마다 유럽의 각국에서는 왜 50년도 더 지난 일을 이제 와서 이토록 집요하게 다루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일부에서 따랐다. 진실로 이들 범죄자들은 전쟁이 끝난 뒤 곧바로 법정에 세워졌어야 마땅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요란하던 전범처단의 구호는 냉전의 전개와 더불어 여러나라에서 잊혀진 주제가 되었다. 나치 관련자들에 대한 탈나치화정책은 곧 수그러들었고 처벌은 완화되거나 다시 원직에 복귀하였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공산주의자와의 싸움 때문에 그 나라들의 턱밑으로 숨어든 나치전범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지연된 정의는 정의의 부정에 다름아니다. 오랜 세월은 범죄자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소멸시키며 증인은 죽고 기억은 흐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지연이 면책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잔혹한 범죄는 세월의 흐름이 면책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류는 확인해 왔다. 공소시효라는 방패막이를 제거하면서 적어도 나치범죄자들에 관한 한 영원히 피난처를 마련해 주지 않겠다는 규범의 정립과 그 구체적인 적용을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 또는 개별국가 차원에서 확보해 온 것이다. 이 범죄자들을 지구의 끝까지라도 쫓아가 법정에 세우는 일은 그들로 인하여 학살당하거나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희생자들의 정의감을 만족시켜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금과 미래의 세대에 대하여 대량학살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범죄자들이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고 만다는 사실을 교육시키는 것이 된다. 나치의 깃발아래 살인의 범죄를 저질렀던 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신나치의 위험과 싸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치전범의 추적과 처단은 복수(revenge)와는 다르다. 복수란 개인적 감정에서 희생자의 친구와 친척에 의해 선택된 대상에 대해 이루어지는 보복행위이다. 정의란 국가에 의해 공평하게 가해지는 응보이다. 그것은 공정한 재판절차와 불복의 기회를 보장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처벌이다. 따라서 단순히 유태인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근본적 인권의 문제이며 인류 전체의 관심사이다. 사실 수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그 가운데 1백만명의 어린이들이 포함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치의 범죄는 이미 "지상의 정의"(earthly justice)에 의해서는 처단할 길이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떤 엄중한 형벌로도 그 죄악을 벌할 길이 없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이 희생자들이 겪은 참혹한 기억을 지우고 인류의 양심이 지닌 정의감을 빛바래게 할 수는 없었다. 범죄자를 잊고 용서한다는 것은 곧바로 그 희생자들과 그들의 고통을 망각하는 길이 된다. 범죄자의 처벌은 희생자의 어깨로부터 역사적 기록을 확립해야 한다는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된다.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서 법정에서 증명된 사실은 단순한 희생자들의 증언보다 훨씬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온 세계에서 일어나는 국제법위반과 인권침해를 다루는 세계법정을 설치하는 것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지금까지 인류의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 이러한 법정의 설치에 의해 양보하게 될 주권의 상실을 원치 않음으로써 그 소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나치전범을 처벌할 수 있는 국제적 권위를 가진 법정은 뉴른베르크재판 이후 각국에 내맡겨졌다. 비록 세계법정은 아니더라도 국제여론은 나치범죄자들의 우산을 그대로 내버려 두도록 만들지는 않았다. 빗발치는 여론에 따라 여러나라들은 각국에서 나치처벌법을 만들어 직접 처벌하기도 하고 때로는 관련국에 송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나치의 추적과 처단이 가능했던 것은 정의를 추구한 개인과 단체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었다. '나치 헌터'(나치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치밀한 계획과 지속적인 감시, 행동이야말로 전세계로 흩어져 사는 나치범죄자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체포하며, 마침내 법정에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정의는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구체적이고도 집요한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켜 주고 있는 살아 있는 교훈이다.

2.세계로 스며든 나치 전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에는 수백만명의 피난민이 생겨났다. 대부분은 나치의 희생자, 강제수용소의 생존자, 노예노동자, 전쟁포로, 나치에 의해 이주를 강요당한 자들이었다. 비교적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누리고 있었던 서유럽,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등에 의해 이들을 수용해 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유엔의 주도에 의해 설치된 국제난민조직(IRO, International Refugee Organization)에 의하여 지원을 받은 난민들은 거의 1백만명에 이르렀고 이들 가운데 70%가량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영국등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들 속에는 대량학살과 처단을 시행했던 나치 관리들과 이들을 자발적으로 지원한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과 전쟁중의 활동을 은폐하여 나치와 공산권으로부터의 피난민임을 가장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나라가 공산화되면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서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등으로 이주의 길을 가게 되었다. 서방의 여러 국가에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피난처를 갖은 사람들 가운데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발트3국, 폴란드등 동구권국가들의 독일계 주민들이 적지 않았고 이들은 나치전쟁수행기관들에게 적극적인 지원과 동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세계각지로 피신처로 숨어든 나치전범과 비인도적 범죄자들은 그 정확한 숫자조차 확인하기 쉽지 않을 정도이다. 나치헌팅조직과 서독, 미국정부의 관리들에 따르면 제2차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전에 벌어진 비인도적 범죄행위에 책임이 있는 독일인들이 15만명에서부터 2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종전후 미국등 연합국에 의해 기소되어 처단된 나치 범죄자는 3만5천여명에 이르렀으나 이것은 전체 범죄자 가운데 20%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은신처를 찾아 세계로 흩어진 것이다.

당시 일반 난민과 뒤섞인 이들을 분류해 내어 배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엔의 IRO 조차 그 지원을 받는 난민에 대한 신원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이들의 신원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허술한 분류, 심사작업을 통해 나치범죄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무사히 새로운 나라에서 피난처를 구할 수가 있었다. 이들은 전혀 새로운 세상에서 평화스럽게 보통의 이웃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평안과 자유를 누리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도 컸다. 이들을 쫓는 발걸음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3.나치전범을 향한 끝없는 추적

(1) 추적의 경과

①추적의 개시

영국의 외무장관 안소니 에덴은 나치전범의 추적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간사냥"이라고 묘사하였다. 나치전범에 대한 추적은 연합국이 전범재판에 세우기 위해 이루어지거나, 그 희생자와 그 가족, 지역주민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945년 7월 연합국은 7만명에 이르는 <전범 및 용의자 리스트>를 작성하였다. 이 리스트에 속한 사람들은 연합국 점령지역 안에서 언제나 체포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막상 전후의 혼란과 독일의 분할점령, 다수의 피난민 속에서 그 리스트에 속한 다수의 주요 나치전범들조차 유유히 도주할 수 있었다. 한때 연합국에 의해 구금되었다가도 신원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아 다시 풀려나거나, 난민들 속에 섞여 제3국으로 안전한 이민을 가기도 하였다.

1947년말이 되면서 거의 모든 연합국이 나치 사냥을 거의 포기해 버렸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관심은 새로운 위협으로 옮아간 것이다. 아이히만, 마틴 보르만, 죠셉 멩겔레, 하인리히 뮐러등 악명높은 나치범죄자들에 대한 여론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추적이 각국의 정책적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었다. 심지어 일부 서방 정보기관들은 바르비 사건에서와 같이 SS대원들이 소련과의 경쟁에서 유용한 존재들이라고 믿고 이들을 보호하기까지 한 것이다.

처음부터 나치범죄자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은 각국 정부의 정보기구 요원들이 아니었다. 아이히만의 경우만 하더라도 1946년 팔레스타인에 소재한 한 은밀한 조직이었던 '하가나'(Haganah)에서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에 5명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아이히만의 처가 거주하는 집의 하인으로 요원을 들여보내는데까지 성공하였으나 아이히만의 소재를 파악하는데는 실패하였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에 따라 이들은 철수하여 다른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몇몇 요원들은 계속하여 아이히만의 소재 탐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이 아이히만의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단체였다.

②숨바꼭질

"드디어 연합군이 리용 성문을 통과하였다. '인간백정'을 쫓는 일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 일은 40년이나 걸릴 것이다. 바르비는 여러번 잡힐 뻔하였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해서 '쥐새끼'처럼 체포를 피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해바라지족'족의 변신, '야누스의 두얼굴'을 가지고 처음에는 미국첩보기관의 첩자로, 그 이후에는 볼리비아의 '더러운 군사정권'의 협조자로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르비는 리용시의 주민, 프랑스 국민들에게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을 진 채 숨바꼭질을 시작한 것이다."

추적자와 도망자의 숨바꼭질. 그 기나긴 긴장과 인내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연합국과 피해자들의 추적 노력과 더불어 나치 범죄자들 역시 필사적인 탈출과 잠적, 도피의 길을 찾았다. 이들은 대체로 고국을 등지거나 제3국을 찾아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닦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은폐하였다. 때로는 자신의 고국에서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중산층으로 자리를 잡아 "평범한 시민" 또는 "조용한 이웃"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거의 경찰 신세를 지지 않도록 조심하였을 뿐만아니라 대체로 미국의 친나치조직, 반유태인운동, 극우적 정치조직 등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 가운데 몇 명은 반공조직의 회원이기는 하였으나 정치활동에는 무관심한 것이 명백하였다. 분명한 것은 익명으로 남기를 바랬고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치전범들과 그 협력자들의 이러한 변신과 은폐 노력은 추적의 단서를 끊어 놓곤 하였다. 더구나 정작 추적자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대단히 부족하거나 불완전한 것이었다. 잘못된 정보들이 추적의 과정에서 헛탕을 치거나 더디게 만들었다. 유태인이나 점령지 주민들의 학살을 지휘하거나 조종한 중요 전범들은 게쉬타포등 정보기관 종사자로서 자신들의 신분 자체가 비밀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쉽게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피해자들의 기억을 더듬어 수집된 정보들은 엄밀성을 결하고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현상금도 늘어났다. 수배자 리스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멩겔레의 목에는 1985년 8월 그의 사망이 확인될 당시 3백4십만불의 현상금이 붙어 있었다. 아우스비츠 수용소에서 수천명의 생체실험을 감행함으로써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추적과 피신의 숨박꾹질을 거듭하다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치범죄자에 대한 추적은 죽음만이 중단시킬 수 있었던 셈이다.

③ 동서냉전과 나치범죄자

1945년 4월 25일 나치독일을 해방하고 점령하기 위해 진군하던 미군과 소련군이 엘베강에서 환희의 조우를 할 때까지만 해도 공동의 적을 향해 싸웠던 연합군으로서 다시 서로 적으로 갈라서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이후 심각해진 동서간의 냉전은 나치범죄를 둘러싸고도 벌어졌다. 특히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은 서방국가가 나치범죄자들의 천국이 되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베를린이 함락된 후 1947년 11월까지 미국측은 1,292명의 전범을 프랑스에 인도하는 것을 비롯하여 다른 연합국들의 재판에 전범인도, 증인 수색 등의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된 이후에는 점차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은 서방국가들의 나치전범처벌의 의지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음이 명백하였다. 서방국가들은 소련이나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등이 요구하는 전범을 인도한 적이 없었다. 소련은 구데리안, 폰 뢰트비츠, 라이네파르트, 로드, 폰 포르만의 5명의 장군을 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미국은 그들이 뉴른베르크 재판에서 재판받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미국의 국방에 긴요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뿐만아니라 미국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대결에 이용하려는 뜻에서 다수 나치전범을 정보요원으로 충원하거나 미국으로 유입시켜 왔음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예컨대, 벨로러시아(Byelorussia)에서의 나치조직이었던 OUN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미국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소련은 끊임없이 미국을 향해 나치전범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리투아니아도 미국에서 살고 있는 자국 출신의 전범들의 주소까지 제시하며 미국의 나치전범보호정책을 비판했다. 실제로 나치전범의 추적과 처단에 관한 한 공산권이 서방보다 열성적이었다. 1986년 동독은 720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로 드레스덴의 게쉬타포 책임자였던 헨리 슈미트를 체포해 법정에 세워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비난과 경쟁에도 불구하고 나치범죄자를 추적.확인.추방.기소.재판하는 데에는 상호간의 협력이 필수불가결하였다. 범행지, 범죄자의 국적, 범죄자의 현재 거주지, 범행에 관한 각종 자료보관소들이 전쟁의 종료와 더불어 각각 달라지게 되어 관련국들의 협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특히 상호간의 이러한 필요성을 절감하여 일정한 범위안에서 협력하고 있었다. 미국의 법무장관이 소련의 대법원장을 만나 나치전범 처벌에 관한 협력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고 실제로 관련 증인과 문서의 제공등이 이루어져 나치범죄자 송환과 기소에 큰 역할을 다하기도 하였다.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과 캐나다등 서방국가로 이주한 나치범죄자들의 대부분이 동구권 출신이기 때문에 전후 동구권에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 소련의 자료가 전범의 확인에 필수불가결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이 상호 냉전상태에서 정치적 공방에 의해 불신받고 훼손되기도 하였다. 여러 사건에서 소련을 비롯한 동구측에서 제공한 증거들이 정치적 의도로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예컨대, 크로아티아의 나치괴뢰국의 내무 및 법무장관을 지낸 Artukovic의 국적박탈 및 추방사건에서 그의 아들은 "유고슬라비아가 정치적 목적으로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담당변호사조차도 "미국 사법사에서 하나의 비극적인 에피소드"로 단정하면서 미국 법무성의 특별수사대(OSI)가 그 존재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해 만든 큰사건일 뿐이라고 동조하였던 것이다. OSI가 협력을 얻은 소련의 사법당국이라는 것은 실제 KGB이며 소련이 KGB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에 기실 미소대결을 국가안보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는 KGB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소련에서 제공된 증언등은 결국 미국사법절차가 보장하고 있는 제반 적법절차규정이 결핍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 이러한 의문의 제기에 따라 특별수사대의 사건처리의 온당성에 관한 자체내의 조사와 소련에 의한 증거조작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미국의 법률에 의해 검증받고 있다는 내용의 법무성의 반박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동서냉전은 나치범죄자들의 완전한 처단을 불가능하게 한 가장 핵심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④ 5-60년대의 안식 , 70년대의 추적

이와같이 한때 범죄자를 처단하라는 인류 양심의 강한 목소리는 냉전의 시작, 진전과 더불어 점차 조용해 졌다. 그 사이에 유태인 학살과 나치범죄는 이미 과거의 일로 망각의 커텐 뒤로 사라졌다. 70년대 중반에만 하더라도 48건의 나치범죄자에 관한 형사사건이 서독에 계류되어 있었지만 이에 대해 서독의 언론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독은 "나치의 죄값은 이미 치르졌으며 오래전에 그 그림자는 극복되었다"는 의식이 팽배하였다.

이러한 망각의 늪으로부터 다시 나치범죄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서독 형법에 따른 공소시효 만료가 임박함에 따라 서독 내에서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공소시효 제거를 주장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나치전범에게 면책을 줄 수 없다는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언론들은 새롭게 전쟁중의 끔찍한 학살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루기 시작하였다. 1978년 미국의 NBC는 4일간 대학살(Holocaust)를 시리즈물로 방영하여 120만의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자아냈다.

1970년대는 다시 인류의 양심이 부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한 시대였다. 단순히 나치를 경험한 세대 뿐만 아니라 전혀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함께 나치의 범죄에 몸서리치고 그에 대한 대응이 필요함을 공유할 수 있었다. 대학살에 대한 새로운 자각, 양심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치전범을 비롯한 전범들에 대한 공소시효를 제거하는 조약이 유엔의 주선에 의해 채택되었고 공소시효를 무기한 연장하는 조치가 서독에서 취해졌다. 1972년에는 미국에서도 Hermine Braunsteiner에 대한 추방재판의 공판이 나치전범에 대한 추방조치로서는 최초로 열리기 시작하였다. 대중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OSI가 생겨나고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나치전범들에 대한 스토리가 발굴되고 추방조치가 이루어졌다. 이 때는 독일 내에서의 나치전범 보다는 독일의 연합국이었던 발틱, 우크라이나, 크로아티아, 프랑스의 비쉬정권하에서의 나치전범에 대한 관심과 추적에 집중된 시기였다.

⑤파일을 닫을 날

나치범죄자에 대한 추적은 기본적으로 이들을 평화스럽게 죽어가도록 냅버려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그 추적을 벌여온 사람들은 범죄자들이 재판에 회부됨이 없이 나이를 먹고 죽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적어도 자신의 잔혹한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 생전에 그 죄값을 치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나치전범에 대한 추적은 계속될 수는 없다. 대부분의 나치범죄자들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존의 가능성이 희박해 졌을 뿐만아니라 생존해 있더라도 이미 80대 내지 90대에 이르러 처단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희생자들 조차도 점점 사라져 더 이상 범죄를 증명해 줄 사람들도 없어져 갔다

나치전범 추적의 가장 일선에 섰던 "시몬 비센탈 다큐멘테이션 센타"는 관리하고 있던 나치범죄자리스트와 파일을 금세기의 경과와 더불어 폐쇄할 예정이라고 한다. 추적 작업을 중단하겠다는 의사표시이다. 이제 나치전범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그 추적의 열띈 전쟁, 가쁜 호흡에도 긴 안식이 오게 될 것이다.

(2) 세기의 나치재판들

① 아이히만 사건

"나는 의회에 잠시 전 '유태인문제에 관한 최종해결'에 대해 다른 나치지도자와 함께 책임이 있는 가장 악랄한 나치전범 중의 한사람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 - - 그는 이미 체포되어 이스라엘에 있으며 곧 나치 및 나치부역자처벌법에 따라 재판에 처해질 것입니다."

1960년 5월 23일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수상은 의회(Knesset)에 대하여 가장 악랄한 나치전범 중의 하나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했다고 알린 발표문의 일부이다. 이 발표는 즉각 이스라엘과 온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당시 아이히만은 리챠드 클레멘츠라는 가명을 쓰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의 체포는 이스라엘의 자원자 요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이스라엘 정부가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정보기관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는 1960년 5월 11일 납치되어 1주일간 억류되어 심문을 받고 자의에 의해 이송된다는 각서에 날인한 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로 강제로 이송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이에 즉각 항의하여 외교문제로 비화하였으나 이스라엘의 사과로 종결되었다. 명백한 주권침해였으나 6백만명의 동족의 목숨을 잃은 이스라엘의 도덕적 위치를 국제사회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스라엘 경찰에 의해 조사를 받은 후 아이히만은 이미 뉴른베르크 재판에서 범죄조직으로 판정된 SS, SD, 게쉬타포의 구성원이었으며 나치의 유태인 학살 정책의 최고 결정 및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 기소되었다. 원래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자란 아이히만은 독일로 이주하여 나치에 가담한 이후 비교적 일찍부터 유태인 문제 전문가로 자리잡았다. 1934년 베를린의 SD에서 유태인 책임자로 임명된 이래 1937년 말에는 장교로 승진하였고 오스트리아의 병합과 함께 그 지역의 유태인 강제이주 책임을 맡았다. 1941년 게쉬타포의 유태인문제 담당부서인 IV B4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전쟁이 끝날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하였다.

재판은 1961년 4월 11일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의 지방법원에는 6대주로부터 몰려든 수백명의 기자들로부터 북적거렸다. 재판이 진행된 4개월 동안 114회의 공판을 열었고 1천5백건의 문서, 120명의 증인 신문이 있었다. 아이히만의 변호인들은 그가 단지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어떠한 이니셔티브도 없이 제한된 권력을 행사하였을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그가 어떠한 정치적 정책결정에는 무관하며 다른 유럽 여러 지역으로부터 강제수용소로 유태인들을 이송하는 책임을 진 2차적 기관에 불과한 IV B4의 책임자였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칸트의 인식 특히 '범주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을 따르도록 노력하였다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유태인문제 전문가로서 유태인학살에 '영혼과 육체를 함께 바친' 그의 역할을 부정할 도리는 없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 법정의 관할권문제, 납치에 따른 국제법 위반, 공소시효 문제등 수많은 법률적 쟁점이 떠올라 아이히만 재판은 "법률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마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아이히만에게 적용된 죄명은 이스라엘의 '나치와 그 부역자 처벌법'(Nazis and Nazi Collaborators Punishment Law, 5710 of 1950) 위반이었다. 이 법은 중요한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배제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외국에 의해 처벌된 피고인에 대해서도 이스라엘 법원에 의해 처단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아이히만 사건의 판결문을 읽는데 3일간이나 걸렸다. 당연히 예정된대로 사형판결이었다.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이루어진 항소심 판결도 같은 내용이었다. 사면 청원도 기각되었다. 1962년 5월 31일 한밤중 아이히만은 처형되었다. 그의 요구에 따라 화장된 그의 사체는 한 줌의 재로 변하여 지중해 연안에 뿌려졌다.

② 바르비사건

--돌아온 '리용의 도살자'

1983년 2월 24일 프랑스 리용의 검찰관 쟌 베르티에는 바르비(Barbie)에 대해 8개항목의 공소사실을 제시하였다.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비인도적 범죄사실들이었다. 비인도적범죄라는 죄목의 '발명'은 우리 시대가 이룬 성취였다. '외과수술'처럼 전쟁이 가져온 결과였다. 이 공소는 29세의 바르비가 리용에서 SD책임자로 일하면서 저지른 온갖 범죄를 저지른지 40년이 지난 후에서야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8개항목의 공소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바르비의 죄악은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41개의 공소사실로 늘어났다. 그는 새디스트로서 자신과 살던 스위스 여자를 싫증이 나자 총살해 버리고 유태인 어머니 품속에 있는 아기를 뺏어 아우슈비츠행 기차에 던져 버리는 인간이었다. 이러한 냉혈적 행동으로 그는 여러번의 훈장을 나치정부로부터 받는가하면, 그리고 점령하의 프랑스인들로부터 '리용의 도살자'(Butcher in Lyons)라고 낙인찍히게 된다. 클라우스 바르비라는 이름은 프랑스에서 나치 시대의 악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바르비를 그토록 원하였던 이유는 그가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정신적 지주였던 Moulin의 학살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바르비가 볼리비아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1974년 이후 널리 알려져 프랑스 정부가 송환 요구를 해 왔던 상태였다. 특히 나치전문가 Klarsfeld 변호사가 바르비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왔으나 볼리비아 정부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작스런 바르비의 추방은 양국정부의 은밀한 거래를 추측하게 하였다. 실제 라파즈에서 리용으로 바르비를 태우고 온 비행기에는 무기와 3천톤의 밀, 그리고 5백만불이 실려 되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프랑스는 강렬하게 바르비를 원했던 것이다.

바르비재판은 1987년 5월 11일부터 7월 4일까지 열렸다. 당시 73세의 바르비는 인정신문에서 볼리비아에서 쓰던 가명 '클라우스 알트만'이라고 밝혔으며 주소는 라파즈라고 대답하였다. 이 재판동안 리용 시민들은 40년전 자신들의 투옥과 고문과 처형을 담당했던 책임자를 대면하여 증언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바르비와 그 변호인들은 그 전쟁기간 중에 벌어졌던 모든 일의 책임을 바르비에게 돌리려 하고 있다면서 "다음에는 에펠탑을 훔쳤다고 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또한 이 재판은 프랑스의 학생들에게 하나의 좋은 역사교육이 되었고 언론은 이 기간 동안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바르비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한 39명의 변호사들이 유태인단체, 레지스탕스그룹, 개인적 생존자등이 재판의 복잡성을 더하고 있었다. 결국 9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유죄평결을, 3명의 리용형사법원 판사들은 무기형을 선고하였다.

바르비의 존재는 미국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바르비가 아직 프랑스로 송환되기 직전 미국의 CIC 요원으로 근무하던 사람이 우연히 볼리비아 라파즈의 뉴스를 보도하던 NBC 방송을 보다가 화면에서 사업상의 문제로 구속되었다는 바르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선명히 그의 인상을 확인한 그 요원은 NBC에 접촉하여 자신이 CIC 정보원으로 고용된 바르비등을 통제하던 CIC 요원임을 밝혔다. 이 모든 보도가 NBC에 다시 나가자 미국사회는 나치전범을 정보요원으로 사용하였다는 폭로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미국이 주장해 온 전체주의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이 한순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③ 뎀얀유크 사건

뎀얀유크(Demjanjuk)사건은 대단히 극적 반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뎀얀유크에게 가해진 혐의는 소련의 군인이었다가 독일의 포로가 된 후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경비병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유태인 학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었다. 미국 클리블랜드의 포드회사에서 자동차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그를 여러 생존자들이 그 수용소유태인들 사이에 악명을 떨쳤던 '공포의 이반'(Ivan the Terrible)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결국 1986년 미국에서 이스라엘로 추방되어 살인죄로 재판받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그 '이반'인지에 관하여 공방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법정이 그에게 유죄를 인정하여 1988년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뎀얀유크의 변호인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그가 '이반'이 아니라는 증거를 숨기는데 공모하였다고 법정에서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 법무성이 이미 1978년 소련으로부터 그러한 증거를 입수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그 자료들을 제시했다. KGB신문내용과 나치로부터의 노획문서들로 구성된 19가지의 자료들이었다. 이 증거들에서 그 '이반'은 뎀얀유크가 아닌 또다른 우크라이나 경비원 'Ivan Marchenko'라는 증언들이 담겨 있었다. 진짜 문제의 '이반'인 마르첸코는 9살이나 많으며 3.5인치가 더 크다는 주장도 이루어졌다. 결국 뎀얀유크는 소련의 자료가 공개된 이후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오랜 세월의 경과가 만들어낸 역사의 또다른 '비극적 희극'의 하나였다.

④ 안드레야 아르트코빅 사건

안드레야 아르트코빅(Andrija Artukovic)은 제2차세계대전 중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크로아티아정권의 내무장관을 역임하였다. 크로아티아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극우단체에서 활동하던 중 독일이 유고를 점령하여 크로아티아 괴뢰정권을 세우게 되자 그 정권의 내무장관으로서 크로아티아의 적대세력이었던 세르비아인, 티토의 유격대원, 집시 등을 무차별 학살하여 "발칸반도의 살인마", "죽음의 내무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치의 패배에 따라 아르트코빅은 오스트리아, 스위스, 아일랜드등지에서 머물다가 최종의 목적지를 미국으로 잡았다. 1948년 여름, Anich라는 가명으로 미국의 로스엔젤레스로 잠입한 그는 시민권을 청구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그를 전범으로 수배하고 인도를 요청하고 있음을 안 미국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자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1951년 미국 언론에 공개하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전범중의 한명이 살고 있음을 미국의 신문들이 대서특필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를 추방하기 위한 법적 절차가 시작되고 미국에 안주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르트코빅은 냉전의 당사자인 미국과 유고의 갈등과 미국내 사법절차의 지연으로 30여년이나 걸리며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유고로 추방되는 운명을 맞았다. 41년만인 1985년 5월 자신의 범죄의 현장인 유고에서 재판이 열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유고법정은 그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면서 "정의의 승리"라고 밝혔다. 유고에서는 80세 이상의 고령에게 사형을 집행하지 않게 되어 있고 아르트코빅은 86세의 실명상태에 있었지만 크로아티아 정권과 나치즘의 죄악을 심판하는 의미에서 극형을 선고한 것이었다.

⑤ 멘텐 사건

멘텐(Pieter Nicolas Menten)은 1941년 SS부대원으로서 폴란드의 한 마을에서 수십명의 유태인을 살해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949년 나치부역 혐의로 8개월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1950년대 폴란드는 전쟁범죄혐의로 네들란드 암스테르담에서 40개의 방이 있는 맨션에서 호화롭게 살고 있던 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맨텐은 과거를 숨기고 미술품 수집상으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76년 나치 헌터들은 네들란드 정부에 대한 압력을 가중하여 그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였다. 맨텐은 스위스로 도망하였으나 다시 네들란드로 송환되었다.

그후 멘텐에 대한 지리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네들란드 정부로서도 소송비용이 5백만불이나 들어갈 정도였다. 일부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20명의 폴란드계 유태인의 학살사실이 유죄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네들란드 대법원은 법무부가 전후 네들란드에 대한 지원의 공로를 인정하여 1952년 면책을 주었다는 이유로 그 판결을 번복하였다가 다시 정부의 요구로 유죄가 확정되었다. 멘텐은 최종적으로 심신미약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1980년부터 복역을 시작하였다.

⑤슈밤베르크 사건

슈밤베르크는 독일점령 폴란드 지역의 강제수용소등지에서 SS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숱한 유태인 학살사건에 관계된 자였다. 1987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독일로 송환된 "폴란드의 학살자"로 알려진 그는 1945년 오스트리아에서 잠시 체포되었다가 도주하여 1949년 이래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었다. 1987년 서독정부가 50만달러의 현상금을 걸어 곧 경찰에 검거되었다.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의 퇴조와 함께 방패를 잃은 그는 알폰신 정부하에서 국적이 박탈되고 독일로 추방되었다. 그는 시몬 비센탈 센터의 10대 나치전범수배자에 포함되었던 사람이었다. 원래 그 자신이 직접 살해한 40명을 포함하여 3천여명의 유태인 학살에 관계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여러 대륙으로부터 슈트트가르트법정으로 몰려든 희생자들은 50년전의 그를 가리켜 '주인' '판사' '살인마' '신이자 악마', 그 사람이 맞다고 확인하였다. "유태인 사격이 취미"였던 그는 불타는 창고 안으로 들어간 15명의 남녀를 뒤쫓아가 불붙은 사람들을 향해 다시 총을 쏠 정도로 잔인했다고 한다. 변호인조차 그의 범행을 부인하지는 않고 다만 "시간이 진실의 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증거의 혼란과 모순만을 지적하였다. 이미 80세의 노인이 된 그는 허리가 몹시 구부정해지고 무표정하게 재판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범행사실을 부인하면서 전쟁기간 중의 기억을 부정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전쟁전의 일과 SS입대 사실은 기억하였다. 중요 나치범죄자재판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이 사건에서 11개월의 공판 끝에 슈밤베르크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3) 추적을 피한 사람들

① 추적과 입증의 곤란

나치 추적이나 송환이 언제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은밀한 은신처에서 피신에 성공한 나치 범죄자도 적지 않았으며 일부는 공공연하게 그 신원이 밝혀졌음에도 해당 거주지 국가들의 노골적인 보호를 받기도 하였다.

더구나 수십년전에 일어난 범죄의 범죄자를 확인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유죄를 입증하기에 충분한 증거를 수집한다는 것은 "부담스럽고, 시간과 돈, 국제적 협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피해자들은 전후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고 범죄자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범죄를 입증하는데 필요한 증언을 확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또한 증인의 편견, 주변적 환경에 쉽게 영향받는 증인의 민감성, 오랜 시간의 경과등은 증인에 의한 동일인 확인에 가장 큰 장애를 초래하였다. 그 대안으로 사진에 의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United States v. Walus 사건에서 미국정부는 Walus 라는 사람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관하여 이스라엘 시민들에게 그의 사진을 신문에 광고하면서 증언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범죄가 일어난 한참 후의 사진인데다가 사진의 질도 문제가 되는 판에 그 사진에 의한 증언의 유효성이 논란이 되었다. United States v. Kowalchuk 사건에서는 미국정부가 제시한 증거가 피고인이 전쟁범죄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하지 못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전후의 동서냉전은 나치처단에서도 곤란한 상황을 야기하였다. 특히 동구권 지역에서 벌어진 범죄에 대해서는 그곳 피해자들의 진술이 증거로 채택되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에서 나치범죄자들에 대한 국적을 박탈하고 형사재판에서 유죄 판단을 함에 있어서 소련측 증거의 신뢰가 문제되었다. 많은 나치 범죄에 있어서 소련 시민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 시민을 나치범죄자로 판정받는데 대하여 국가적 이익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United States v. Kungys 사건에서 미국의 뉴저지 지방법원은 소련정부의 협력하에 취득된 증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시민권박탈청구를 기각하였다.

그 무엇보다도 나치범죄자 처단에 가장 큰 적은 세월이었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증인들의 기억은 흐려지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을 혼동하였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당연히 나타나게 마련인 이러한 혼동은 증언의 신빙성을 삭감시켜 피의자의 무죄로 연결되곤 하였다.

심지어 증인이 사망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강제수용소에서 몇년을 지낸 사람들이 정상적인 기대여명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나치범죄자들이 강제수용소의 생존자들보다 오래 사는 것은 대단히 흔한 일이었다.

먼저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으면서도 결코 그 신원을 확인하지 못함으로써 체포나 처벌에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끝없는 수색과 추적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인 도주와 은신으로 결국 생전의 체포를 면한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피신자들의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② 죠셉 멩겔레(Joseph Mengele)

--죽음이 그대를 자유롭게 할 때까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무엇보다도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수용소의 수석 의사로서 "아리안족의 특징과 푸른 눈을 가진 아이"를 인공적으로 창조하려 하였던 Joseph Mengele는 그 수용소의 의사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하였다. 수천명의 수용자들을 개스실의 죽음으로 몰거나 갖은 생체실험을 다했던 그는 수용자들 사이에 '죽음의 천사'로 널리 알려졌다.

"1943년 티푸스가 여성 수용소에 크게 번졌다. 2만명 가운데 7천명이 앓아 누웠다. 멩겔레는 먼저 6백명이 거주하는 블록을 먼저 비워 가스실로 보냈다. 그리고 그 블록을 깨끗이 소독한 다음 옆 블록의 수용자들을 들여보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블록이 소독되었다. 그러나 무서운 일은 그 맨처음 블록의 6백명은 가스실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발한 발상에 의한 '티푸스 퇴치'로 그는 훈장을 받기도 한다. 1981년 서독 검찰이 발부한 구속영장에 의하면 "1943년 5월 25일 507명의 집시와 528명의 여자 집시를 개스실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 막상 그 자신이 집시계 외모와 혈통을 지녔으면서도 그토록 집시를 증오하고 학살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뮌헨대학에서 칸트철학을 공부하고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뒤 의사자격을 취득한 그가 가장 비인도적인 범죄자로 돌변하였다는 것은 큰 아이러니였다.

연합군의 진주와 함께 그는 미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신원을 속여 혼란의 와중에 있던 상태에서 무사히 석방된다. 고향인 Gunzberg에 돌아온 그는 아무도 그의 전력을 모르는 상태에서 평온한 5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체실험은 뉴른베르크 재판에서도 증언되었다. 아우슈비츠의 책임자였던 Hoess는 뉴른베르크재판의 피고인 Kaltenbrunner의 변호인 심문에서 "멩겔레에 의해 쌍둥이에 관한 생체실험이 진행되었다"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1946년 12월 미국이 23명의 SS 소속의사를 전쟁범죄, 비인도적범죄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하는 것을 보면서 멩겔레는 위협을 느꼈다.

드디어 피난민을 가장하여 1949년 아르헨티나로 도주하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그는 본명으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였다. 그에게 서독정부가 영장을 발부한 것은 1959년 7월이었다. 영장이 발부되자 아르헨티나에서 파라구아이로, 다시 브라질로 도피행각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에서는 그에 대한 모의재판이 열려 전세계의 텔레비젼이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은 교황 바오르 2세에게 모든 카톨릭 신도들이 멩겔레의 행방을 찾는데 협조해 달라고 청원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각국 정부는 멩겔레의 체포를 위해 다각도로 협의하였다. 1985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독일, 미국, 이스라엘 세 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만나 이 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그러나 바로 그 3주후 독일의 Die Welt지는 멩겔레의 시체가 브라질에서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논란이 일자 사웅파울루 경찰은 멩겔레의 시신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묘지에서 파내 법의학자들에 의해 검증되었다. 공식적으로 그의 주검임을 확인하였으나 일부에서는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죽음이 비로서 그에 대한 추적으로부터 자유를 가져왔다.

③ 마틴 보르만(Martin Bormann)

--"해결되지 않은 최고의 나치 미스테리"

1946년 나치독일의 유명한 지도자들이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뉴른베르크에서 처형되었다. 그 예외는 감옥에서 자살로 처형을 피한 괴링과 제3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져버린 보르만 두사람이었다. 괴링은 뉴른베르크 재판의 과정에서 "총통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은, 특히 헤스가 없어진 이후인 1942년부터는 보르만이었다. 그것은 파멸적으로 강대한 영향력이었다"고 증언하였다. 히틀러의 비서였던 그는 전쟁의 말기에는 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제2인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런 보르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전후 영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의 정보기관들은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보르만의 소재나 심지어 죽은 흔적조차 찾지 못하였다. 뉴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그는 궐석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그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1964년 11월 서독정부는 그를 체포하는데 정보를 주는 사람에 대해 10만마르크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 이전인 1961년 서독의 헤세주 검찰총장인 프리츠 바우어는 보르만이 살아 있다고 확신하면서 그에 대한 조사를 재개한다고 선언하였다. 1965년에는 하이파에 있는 나치전범문서보관소 소장 프리드만은 보르만이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듬해 아이히만의 아들이 보르만에게 "당신의 자리에 대신 서 있는 아버지를 위해 남미의 은신처에서 나와 줄 것"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신문에 실어 관심을 끌었다. 1967년 독일 법무성은 브라질 대법원에 구금영장 및 추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보르만이 생존하고 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1973년 4월 프랑크푸르트 주검찰청은 보르만의 행방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내면서 일단 보르만이 1945년 사망한 것으로 결론 짓고 공식적인 추적을 중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행방불명은 영원히 나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④ 하인리히 뮐러(Heinrich Muller)

뮐러는 독일 게쉬타포의 전 책임자였는데 나치헌터들은 그의 생존을 믿고 있었다. 그는 알바니아로 도주하여 동구에서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존재와 거주지는 결코 밝혀지지 않았다. 1964년 서독 관리들이 그라고 추정되는 사체를 검시하였으나 뮐러라고 단정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⑤ 범죄자를 보호하는 범죄자

한편 그 신원과 존재가 밝혀졌음에도 처단에 실패한 사례들도 있다. 남미를 비롯한 독재국가로 피신한 나치범죄자들은 '안전한 피신처'(safe heaven)를 구할 수 있었다. 나치범죄자는 전체주의 체제의 유지에 전문가들로서 제3세계의 독재자들에게 유용할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 권력자에게 유용하도록 적응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점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제3제국'은 종말을 고했지만 일부 나치 범죄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들 독재자들은 그들의 빈객(賓客)인 나치범죄자들을 함부로 내 주려하지 않았고 이들의 손 안에서 나치범죄자들은 안식처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남미는 이러한 나치범죄자들의 온상이었다. 전통적으로 남미는 정치적 피난처의 강한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추방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갑자기 다른 남미 국가의 대사관에 피신함으로써 피난처를 구하곤 하였던 것인데 나치범죄자들의 추방에 응하였다가 위험한 선례를 남길 것을 두려워하였다. 남미의 국가들은 살인자까지 거의 추방하지 않았으며 '손님'은 언제나 보호되었다. 남미는 나치 이전의 독일과도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1차세계대전 이후 다수의 독일인이 남미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각곳에 정착하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곳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파라구아이의 경우 대통령이 되었던 스트뢰스너는 독일계였다. 이러한 이유로 나치즘과 인종차별주의는 이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나치전범들이 쉽고 자유롭게 안식처를 구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시리아에서 유태인문제에 대한 고문으로 일해 왔던 부룬너(Brunner)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아이히만의 오른팔이었던 부룬너는 10만명의 유태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자였다. 그는 시리아 정부의 고문 역할을 하면서 그 신원이 드러났음에도 송환을 거부한 시리아 정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기소를 면하였다. 우편물에 포장되어 있던 폭탄으로 실명하는 등 끝없는 위험 속에서도 그는 끝내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

4.세계 각국의 나치전범 색출과 처단 노력

나치범죄자를 찾고 이들을 법정에 세우려는 노력은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국가도 나치범죄자를 공개적으로 변호하거나 이들을 보호하려고 할 수는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벌어졌던 참혹한 역사는 그러한 변호와 보호의 여지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열거하는 나라들 외에도 적지 않은 나치범죄자 색출과 처단의 노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나 여기서는 대표적인 국가들의 예만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1)이스라엘과 유태인

① 이스라엘 정부

6백만명의 유태인 희생의 대가로 2차세계대전 직후 창설된 신생국가 이스라엘이 나치전범들의 추적에 나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이스라엘 의회(Knesset)는 1950년 '나치 및 나치협력자처벌법'을 입법하여 나치처단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 법에 따라 이스라엘 법정은 유태인에 대하여 행해진 범죄, 전쟁범죄, 비인도적 범죄에 대하여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

이 법이 적용된 대표적인 케이스는 역시 아돌프 아이히만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는 정열적으로 아이히만을 찾았고 드디어 아르헨티나에서 그를 납치하여 나치처벌법의 15개 범죄사실로 법정에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재판이 시작된지 13개월만에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아이히만 재판은 납치의 위법성, 이스라엘 법률의 소급입법문제, 이스라엘의 관할권등 중요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먼저 납치문제에 관하여 이스라엘법정은 일단 법정에 선 이상 피고인은 그 법정에 서게 된 방법을 탓할 수 없다는 국제법상의 일반 이론을 원용하였다. 아이히만의 변호인들은 소급입법에 의한 처벌임을 주장하였으나 이스라엘 법정은 뉴른베르크에서 나치범죄자들을 처단하는데 사용한 '정의의 보편적 원칙'을 입법한 것에 불과한 나치처벌법이 문제될 수 없다면 그 주장을 배척하였다. 이 재판에 대해서 보편적 관할권의 적용에 관한 독일정부의 항의 외에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판"에 대해 문제를 삼는 국가가 없었다.

② 유태인 단체와 개인

많는 나라와 정부조직 못지 않게 나치전범들의 추적에 성공을 거둔 민간인과 개인들이 있었다. 나치의 범죄를 목격한 증인들과 피해자들로 전세계에 네크워크를 구성한 이들 단체들은 비록 재정과 조직은 정부조직보다 못하였지만 불타는 정의감으로 그 난관을 극복하여 나치추적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러한 조직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한때 나치에 의해 처형대상에 올랐던 피해자들 자신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처형당하거나 고문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그것을 기억할 정도의 나이들이었다.

1936년 제네바에서 구성된 세계유태인총회는 이미 창립시부터 나치의 위험성을 전세계에 경고하고 있었다. 전쟁중에는 나치반대와 유태인구제에 총력을 기울이던 이 단체는 종전과 더불어 난민구제, 재산복구, 배상청구 등에 대한 노력과 더불어 나치범죄자에 대한 추적.처단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였다. 뉴른베르크 재판 당시 세계유태인총회의 유태인문제위원회 위원장이던 로빈슨은 미국의 주임검사 자문역을 맡았다. 이 재판의 진행과정에서 문서와 증인의 제공역할을 다하였다.

그후 세계유태인총회는 나치전범 추적의 제일선에 나섰다. 미국에서 나치사냥을 되살린 것은 1972년 이 총회의 Karbach박사가 미국에 살고 있는 나치전범용의자 59명의 명단을 미이민국에 제출함으로써 가능했다. 1980년대를 통하여 이 총회는 전세계로부터 모여진 정보와 자료들을 제공했다. 일부는 OSI에 직접 전달되었고 또다른 자료들은 영국, 캐나다등 다른 나라 정부에도 전달되었다. 이 총회의 직원이었던 Bessy Pupko는 가장 헌신적인 나치헌터의 한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5개의 파일박스를 관리하면서 전세계의 유태인신문들을 통하여 유태인들에게 나치전범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루에도 여러시간을, 여러 언어로 세계 각지와 통화하면서 특정사건의 증인을 쫓고 자료를 확보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 단체는 또한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쿠르트 발트하임의 나치전력을 찾아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나치의 잔혹한 범죄로 피해를 입었거나 큰 분노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전후에도 나치범죄자 추적에 나선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나치헌터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시몬 비센탈이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나치의 손에 희생되었을 뿐만아니라 그 자신이 간신히 강제수용소를 탈출한 적이 있는 그는 나치범죄자 추적과 처단의 상징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스스로 나치범죄자의 리스트를 확보, 유지하면서 이들을 추적하여 1천여명에 가까운 나치범죄자들을 법정에 세우는데 성공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고하게 되었다.

종전 직후 미국 CIC등에 관여하면서 나치범죄자 색출에 노력하다가 1947년 이후 오스트리아의 린츠, 비엔나등에 Documentation Center를 설치, 운영하였다. 그는 가장 먼저 아직도 생생한 희생자들의 기억이 생생할 때 그것을 기록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전쟁이 끝나면서 나치강제수용소에서 약 10만명의 생존자가 있었고 이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등에 연합국이 세운 피난민센타에서 임시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비센탈은 먼저 이들 피난민센타에 주재원을 두어 네트웍을 형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강제수용소 경비원, 살인과 고문의 경험과 목격담등에 관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게 했다. 이 채록과 사진등 모든 증거자료는 나치범죄, 그 범죄자, 증인별로 인덱스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뉴른베르크 전범재판, 1947년의 Dachau에서의 전범재판등에서도 이용되었을 정도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비센탈이 확보한 나치범죄자의 목록은 22,500이 넘어서고 일단 명성이 나자 계속 관련 자료들이 답지하였다. 1961년에는 1만5천명의 SS대원의 계급, 사진, 특기사항등과 함께 적힌 명단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인쇄된 이 명단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어서 여기에 포함된 자는 자신이 SS대원임을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자신이 독일정부로부터 받은 보상금의 대부분을 이 사업에 투자하였다. 뿐만아니라 전세계의 유태인과 그 조직,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성금이 모여들었다. 대단히 불규칙한 이 돈을 잘 관리하면서 나중에 한달에 1500달러가 넘는 경상비를 충당해 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어느 정부의 돈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열만으로 아이히만, 멩겔레를 비롯하여 악명 높은 나치범죄자의 추적과 확인, 체포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이름은 이미 전세계로 숨어든 나치범죄자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또 그만큼 나치전범들과 신나치조직들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비센탈이 지목한 나치전범 1,100명 가운데 4명은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소송까지 제기하였으나 아무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험한 일을 계속할 그의 후계자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였다.

비센탈의 개인적 노력은 1977년 시몬 비센탈 센타가 설립됨으로써 항구적 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센타는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하여 대학살에 관한 연구와 인종간의 화해를 위한 운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교육과 계몽을 통하여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과 교훈을 전세계에 전달함으로써 동일한 죄악이 인류사에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시몬 비센탈 외에도 나치헌터들이 많이 있었다. 뉴욕의 치과의사 Charles Kremer는 Valerian Trifa의 신원을 밝히고 노출시키는데 주력한 사람이었다. 트리파는 원래 루마니아 태생이었는데 전쟁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로마정교회의 주교가 되어 권세와 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 그는 이른바 Iron Guard의 지도자로서 나치를 위해 일했으며 4천명의 루마니아 유태인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였다. Kremer는 트리파의 과거를 모두 폭로하고 진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 다시 치과의사로 되돌아갔다.

뒤에서 보는 Hermine Braunsteiner Ryan의 경우에도 그를 쫓는 나치헌터가 있었다. 리얀은 폴란드의 Maidanek 강제수용소의 여자 경비원이었는데 천명이 넘는 여자와 아이들의 사망에 관여하였다. 종전후 미국인과 결혼하여 캐나도로 이주한 다음 다시 뉴욕으로 옮겨 미국시민이 되었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그녀에게 재앙이 온 것은 바로 이민국에 근무하던 Anthony J. DeVito때문이었다. DeVito는 전쟁 중 미군으로 복무하면서 강제수용소의 참혹함을 목격한 바 있었다. 그는 이민국에 근무하면서 리얀이 미국에 온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폭로하였다. 수년의 노력끝에 리얀은 폴란드로 강제송환되어 그곳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인종차별과 반유태인주의와 싸우는 중요한 기구로서 이 단체를 빼 놓을 수 없다. 이 기구의 책임자인 Welles와 그의 부인 Ceil도 나치 강제수용소의 수용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계속되는 나치 헌팅을 연구하는 그룹이나 상원 위원회에 증언을 위해 나가기도 하고 나치전범 처단의 당위성을 강연하러 다니기도 한다. 제대로 된 사무실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지만 손으로 쓴 수많은 전화번호와 인명 리스트는 적지 않은 위력을 지니고 있다. 이 리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나치전범 Brunner파일을 찾아냈던 것이다.

(2)독일

기본적으로 나치범죄가 대부분 독일 땅에서 독일인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독일정부가 나치범죄자들에 대한 관할권을 가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1949년까지는 독일인과 무국적자에 대한 범죄행위에 대해서만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49년 이후에야 비로서 독일은 연합국과 그 국민에 대해 저질러진 범죄까지 처벌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서독정부의 나치전범수사본부는 남부독일의 루드비그스부르크에 자리잡았고 유능하고 헌신적인 나치 헌터 알프레드 쉬트라임이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수사와 처단, 추적에 도움을 주고 근거가 된 것은 나치전범의 기록을 보관하는 자료보관소들이이었다. 나치전범추적의 가장 중요한 자료센터는 국무성 산하의 베를린문서센터(Berlin Document Center)였다. 2차대전 전쟁동안의 대학살과 나치작전에 관한 유일하고도 엄청난 규모의 자료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1946년 문을 연 이 센터는 노획된 독일문서의 공식적인 창고였으며 전세계로부터 오는 나치당에 대한 정확한 정보 요청에 응하였다. 연합국에 의해 관리되던 이 센터는 1988년 독일정부에 반환되었다.

이리하여 서독정부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조사한 나치전범용의자는 91,160명에 이르며 그 가운데 6,482명을 기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12명이 사형, 160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기소된 나치전범들의 평균 선고형량은 8년이었으며 실제 복역연수는 4년이었다. 그러나 기소된 전범 숫자의 75%가 독일이 연합국의 점령하에 있을 당시(1945-1949)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1950년 이전에 기소된 5,228명의 전범 가운데 살인등 중대한 범죄에 해당하는 것은 단지 100명뿐이었고 그 가운데 강제수용소에서의 살인은 15명이었다.

1970년대 이후에 기소된 유명한 나치전범들 가운데 SS대위였던 Paulus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71년 함부르크에서 161명의 민간인 살인혐의로 기소되었다. 공소시효 만료로 무죄로 풀려났다가 대법원에서 파기되는 바람에 1986년에 다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 선고결과는 징역4년에 불과하였다. 이에 항소한 Paulus는 20년간에 걸친 재판은 국제인권규약위반이며 81세의 나이와 건강으로 보아 재판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소기각판결을 받고 말았다. 1988년에는 아우슈비츠 SS경비병이었던 Weise라는 자가 5건의 살인혐의로 기소되어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재판장은 Weise가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자들을 장난감처럼 다루었다"고 설명하였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또다른 나치전범은 역시 SS상사였던 Karl Frenzel이었다. 74세의 프렌젤은 Sobibor강제수용소의 유태인학살의 책임자로 기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피고인들 자신이 너무 연로하여 배심원들의 처벌의지를 약화시켜 대부분 경미한 선고를 받게 되었다. 게쉬타포 장교로서 1만5천명의 유태인을 강제송출하고 학살하였던 Helmut Krizons은 재판당시 68세로서 단지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나치군 중위로서 라투아니아 강제노동자를 살해한 Kurt Rahauser는 3년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SS를 포함하여 수십만건의 전범사건이 아예 기소를 면하였다. August Heissmeyer라는 SS 장군은 처음에는 기소를 면하고 있다가 국내외의 압력으로 기소되었으나 그에게 적용된 죄명은 가명사용일 뿐이었다. 감옥은 커녕 그는 나머지 여생을 코카콜라회사의 서독 지사장으로 보냈다. 뒤에서 보는 'Paperclip Project'가 냉전에 협력한 나치과학자들의 면책에 관한 음모라면 나치기업가들에게도 비슷한 종류의 면책이 주어졌다. 나치의 전쟁과 학살의 수단을 제공하고 비인도적 범죄에 직접 가담한 많은 나치기업가들이 종전후에도 그들의 부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1964년 3월 서독정부는 전범으로 분류될 수 있는 독일 최대의 화학재벌 Heinrich Butefisch에게 최고의 훈장인 Grosses Bundesverdientkreuz를 수여하였다.

이와같이 독일에서 나치전범들이 제대로 충분하게 처벌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선 독일의 법체제가 엄격한 실증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새로운 유형의 나치범죄처벌에 장애가 되었다. 미국법정에서 민간인을 다수 살해한 혐의로 미국 시민권을 박탈한 우크라이나 경찰관 Bohdan Koziy에 대해서 독일정부는 독일법하에서 범죄구성이 어렵다는 이유로 송환요청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독일정부의 견해에 의하면 미국법정에서 유죄로 판명된 대부분의 전범들이 면책될 판이었다.

더구나 독일법은 공소시효를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1980년 1월 1일 이후에는 모든 전쟁범죄들이 처벌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과 전세계의 유태인단체들의 항의에 따라 1979년 7월 3일 독일연방의회는 살인과 제노사이드 범죄에 관한 공소시효를 제거하였다. 그러나 이 이후에 처벌된 나치범죄자들은 별로 없었음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한편 2차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다수의 나치범죄자들이 세계 도처로 흘러들어갔고 독일은 이들에 대한 송환 요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독일이 몇가지 사건을 예외로 하고 이러한 송환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독일정부는 비록 나치정부의 권위하에서 벌어진 범죄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독일 영토밖에서 벌어진 비독일인의 범죄인 경우에는 관할권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독일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클라우스 바르비 사건등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났다. 바르비에 대해 관할권을 가지고 있는 독일정부는 볼리비아로부터의 추방을 위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관할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프랑스정부가 최종적으로 추방요구와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면 바르비는 결코 법정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3)캐나다

캐나다의 전범처리 문제가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77년 무렵이다. 캐나다유태인총회가 이민 담당 장관을 초청하여 캐나다에 살고 있을 나치전범의 처리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였고 캐나다홀로코스트생존자협회등에서 의회에 대한 나치전범처벌법 제정에 관한 로비를 하고 있었다. 1978년 Kaplan 의원은 이러한 로비끝에 C-215법안('캐나다에서의 전범에 관한 법')을 의회에 제출하여 1949년의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사람들에 대한 시민권박탈을 골자로 하는 캐나다국적법의 개정을 권고하였다. 다른 동료의원의 무관심으로 이 법안은 무용지물이 되었으나 의회는 몇명의 나치전범용의자들에 관한 자료를 제출하였다. 캐나다 밖에서는 나치 헌터 시몬 비센탈이 나치전범으로 알려진 사람들에 대해 캐나다 정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음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이들에 대한 결정적인 조치가 취해 지기 전에는 캐나다 땅을 밟지 않으리라고 언명했다. 그는 동시에 캐나다 내에 살고 있는 나치전범이 1천여명에 이르며 미국과 같이 대부분 우크라이나 또는 동구권으로부터 이민온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단속적으로 캐나다 의회, 정부, 국민들 사이에 논의되던 이 문제가 추상적인 입법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으로 터져나온 것은 1982년 봄의 Albert Helmut Rauca사건이었다. 73살의 이 사람은 리투아니아에서 수천명의 학살에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독일정부로부터 송환 요청을 받고 있었다. 이 해에는 나치 통치기간 유태인들의 캐나다 이민을 극도로 제한한 조치를 비난한 학문적 연구서 'None is Too Many'라는 책이 나와 대중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 책은 나치전범과 직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캐나다가 피난처를 거부한 유태인의 운명과 전후 기꺼이 피난처를 제공한 나치전범에 관한 모순된 캐나다 정부의 정책을 쟁점화한 계기가 되었다.

계속된 압력으로 캐나다 정부가 마침내 조사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1985년 2월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천사'로서 생체실험을 담당한 나치 의사 멩겔레가 캐나다에 몰래 숨어 살고 있다는 주장은 여론을 극도로 악화시켜 이러한 조사위원회의 구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리하여 멩겔레를 비롯하여 캐나다 내의 전범의 존재를 조사하고, 그리고 이들을 다룰 캐나다 법체제를 연구할 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퀘벡최고재판소 판사 Deschenes가 임명되었다. 그동안 나치전범 처벌을 주장해 왔던 유태인 단체들과 의원들은 전범 용의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재판절차 대신에 단순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그해 4월 10일 처음으로 이 위원회가 열려 활동규칙등이 제정되었고 증인심문과 증거제출에 관한 규정들이 포함되었다. 이 조사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한 이후 나치범죄자로 추정되는 용의자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이해관계를 가진 단체들의 의견진술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치 치하에서 유태인과 폴란드인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나치 점령자와 탄압에 앞장선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비난과 이에 대한 우크라이나 출신자들의 반박이 계속되어 인종집단간의 갈등이 빚어졌다. 유태인과 우크라이나인 사이의 구원(久怨)이 이 위원회의 활동을 사이에 두고 폭발하였던 것이다.

많은 증인들의 증언과 증거자료의 검토가 계속되어 Deschenes위원회의 보고서가 준비되었다. 이 자료속에는 소련으로부터 보내온 것도 포함되었다. 1986년 6월 30일이 보고서 제출의 데드라인이었다. 그러나 사건의 복잡성때문에 1987년 3월이 되어서야 이 보고서는 햇빛을 보았다. 두 파트로 이루어진 이 보고서의 첫번째 부분은 966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으로 위원회의 조사절차와 이 위원회에 제기된 많은 법률적 문제들, 권고안, 8백여명에 이르는 나치전범 용의자들(익명으로 처리되어 있음)에 대한 위원회의 조사내용이 들어 있었다. 두번째 부분은 비공개자료로서 위 8백여명 가운데 구체적 혐의가 드러난 29명의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와 증거의 요약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후에도 이 위원회에 유력한 정보가 쏟아졌으나 이미 조사할 시간이 더 없는 상태였다. 위원회는 20명의 주요혐의자들과 218명의 추가조사를 요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제출하였다. 이로써 캐나다가 아직도 나치범죄 용의자들의 천국임을 이 보고서는 분명히 하였다. Deschenes는 체코,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등 캐나다가 범죄자인도협정을 맺고 있는 나라와는 나치전범을 송환할 것과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보편적 관할권을 인정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OSI와 같은 수사대의 창설은 부적절하며 그것은 캐나다의 다인종 사회를 근저에서 뒤흔들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 보고서의 권고에 기초하여 캐나다 정부는 나치전범 뿐만아니라 모든 전범을 캐나다에서 처벌할 수 있는 형법의 개정 또는 특별법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1987년 9월 드디어 캐나다전쟁범죄법(The Canadian War Crimes Act)이 제정되었다. 캐나다가 2차세계대전에 참여한 1939년 9월 9일 이후 전쟁범죄 또는 비인도적 범죄를 캐나다 밖에서 저지른 캐나다인에 대해서도 캐나다 법원의 관할을 인정하는 법률이었다. 국제법상의 이른바 '보편적 관할권'을 입법화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해서 비록 캐나다 외의 지역에서 범한 나치범죄의 경우에도 그 범죄자가 캐나다 내에 살고 있다면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나치범죄자임이 확인되면 범죄지 국가로 송환하는 미국과는 달리 캐나다 법원이 직접 재판하여 처단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 법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2차세계대전 당시의 나치범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소급입법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범죄가 범해질 당시에 캐나다법에 의해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처벌할 수 없도록 하였기 때문에 소급입법의 논쟁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당시 범죄가 이와같은 보편적 관할권에 해당된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하고 그 범인이 캐나다 국민이거나 캐나다와 교전중에 있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요건이 추가로 요구되었다. 역시 이 법률에 의해 1987년 12월 9일 76세된 헝가리 태생의 Imre Finta가 구속되었다. 강제구금,납치,살인에 관계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Finta에 대한 재판은 미국을 포함한 북미주에서 최초의 직접적인 전범재판이었다.

이 법률에 의해 캐나다가 문명사회에 의해 비난받는 나치범죄자들을 위한 '천국'이 될 수 없게 되었다. 캐나다 의회 의원 한 사람은 "전쟁범죄 또는 비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자를 처벌하는 확고한 정책없이 캐나다를 정의로운 사회 또는 문명화된 곳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법안을 통과하면서 "캐나다인은 이러한 종류의 행위가 불처벌된 상태로 남겨둘 수는 없다"는 강한 메시지를 온 세계에 전했던 것이다.

(4)오스트레일리아

① 오스트레일리아행 피난민 속의 나치

인구밀도가 희박한 오스트레일리아는 제2차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넘쳐나는 유럽의 인구와 피난민을 흡수할 수 있는 적합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스스로도 산업노동력을 확보할 필요성이 있었고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국제적 책임을 다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1947년 이후 4년반에 걸쳐 약 18만명의 난민이 유럽을 떠나 "멀지만 광대하고 인구밀도가 희박한 나라"로 이민의 길을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도 나치범죄자와 그 동조자들이 끼어 있어 1942년 이미 조직되어 있었던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유태인위원회(The Jewish Council)는 이들 오스트레일리아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의 신분을 제대로 조사하는 일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태인위원회가 그당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피난민 가운데 SS대원의 문신을 가진 사람들, SS대원으로서 찍은 사진등을 가진 사람들이 발견되었으나 무시되었으며 도착후 캠프에서 유태인 난민들이 조직적으로 공격받은 사실도 있다고 하였다. 이들이 오스트레일리아의 곳곳에 정착한 후에도 자신들의 과거를 자랑하거나 무의식중에 나치활동을 한 사실을 자인하는 등으로 나치범죄자임을 드러내 지역 신문에 보도되기 조차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오스트레일리아로 들어온 난민 가운데 상당수의 나치범죄자 또는 그 동조자들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알려주고 있으나 그당시에는 대체로 중시되지 않았다. 더구나 냉전의 격화와 1949년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의 미국 편향은 반공주의를 최우선과제로 등장시키면서 더 이상 소수이민자의 나치출신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소멸시키고 말았다. 심지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경찰로서 독일인 보다 더욱 유태인 수용자들을 학대하였던 Bontschek이란 자에 대하여 여러 수용자들의 진술서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정보기관은 증거가 없다면서 조사를 종결하고 네들란드 정부의 송환 요구를 거절하였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더 이상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않게 된 나치협력자 출신들이 1957년초 모임을 결성하여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반볼세비키연합(Anti-Bolshevik Bloc of Nations)의 오스트레일리아지부가 그것이다. 이 조직은 원래 냉전이 격화되면서 서방의 정보기관들이 반공 정보 네트워크로 이용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용가치가 떨어지면서 그에 대한 지원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반소.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이들은 보수 우익의 이념을 실현하는 정치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② 새롭게 깨운 나치범죄자에 대한 경각심

나치에 대한 정치인들과 언론의 오랜 무관심을 일깨워 준 것은 1986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먼저 이 때 5부작으로 방송된 ABC라디오 다큐멘타리 '오스트레일리아의 나치'(Nazis in Australia)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방송은 그당시까지도 오스트레일리아 보수적 정치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Ljenko Urbancic이 슬로베니아 Ljubljana의 "작은 괴벨스"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었다. Urbancic은 독일점령 및 관리하의 슬로베니아 정보부서에서 신문, 방송, 강연등을 통해 나치즘 선전에 광분하였음이 밝혀졌다. 세계적인 나치헌터 시몬 비센탈이 ABC 프로그램에 나와 Arnoldus Pabresha라는 사람은 독일간첩이며 리투아니아 극우폭력집단의 회원으로서 1천3백명이나 죽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나아가 100여명의 나치범죄자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는 침묵과 무관심의 30년을 지나 전세계적으로 나치범죄자들의 색출과 처단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는 이미 그런 바람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러한 물결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쳐 왔다. 오스트레일리아 유태인 협회가 1986년 초부터 이러한 세계적 움직임에 자극받아 자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 협회 회장 Caplan은 당시 수상 Hawk를 만나 나치전범조사와 처벌을 권고하였다. 사방의 압력으로 일단 그해 6월초순 비로서 Andrew Menzies가 비공식적인 조사책임자로 상원에서 임명되었다.

③ 전범처벌법의 개정

Menzies보고서는 특정인에 대한 나치 단정이나 이민유입과정에서의 오스트레일리아 관리들의 고의적 묵살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부에 대하여 "중대한 전쟁범죄를 범한 사람들을 재판에 회부하는 조치를 취할 것"과 전범용의자들을 수사하기 위하여 미국과 같이 법무성 아래 특별수사대를 설치할 것, 그리고 혐의가 분명해진 자들에 대한 시민권박탈, 범죄지로의 추방, 1945년의 전범법개정등을 건의하였다.

1945년의 전범법(1945 War Crimes Act)은 아시아지역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인에 대하여 행해진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만약 나치전범, 그것도 30년이 지난 후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그 법의 개정이 불가피하였다. 특히 전범용의자를 추방하기 보다는 오스트레일리아 내에서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재판할 수 있도록 위 전범법을 개정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법무성 내에 특별수사대(Special Investigation Unit)를 설치하고 그 책임자로 검찰차장까지 지낸 Robert Greenwood를 임명하였다.

1987년 10월 법무장관 Lionel Bowen은 전범법개정안을 하원에 제출하였고 야당조차도 동구권으로부터의 정보를 증거로 쓸 것인가에 대한 논란외에는 별 반대없이 동조하였다. 12월에는 이미 상원에서 이 법안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고 1988년에 이르기까지 350건의 건의서 제출, 17명의 증언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전범법 개정안이 상하양원에 의해 통과되어 나치전범자에 대한 안식처가 이 지구상에서 또하나 사라졌다.

(5)미국

--은신처와 추적자의 두얼굴

① 나치범죄자의 이주와 추방에 관한 미국의 법제

유럽의 피난민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미국에 피난민을 가장한 나치범죄자들이 숨어 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하였다. 미군의 보호하에 독일에 설치된 난민수용소에는 나치협력자들이었고 특히 발트인들의 3분의 1은 게쉬타포나 SS대원이라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질서를 주도하게 된 미국은 일단 난민을 가능한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미국은 당초 할당제를 도입하여 소련에 의하여 병합된 발트 3국이나 동구권에 우선적 비자 발급을 해 주었다. 미국의회는 1948년(DP법)과 1953년(RR법)의 특별 이민법을 개정하여 종래의 이민 할당제도를 제거하고 보다 많은 이민의 유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이민 관련 법률들은 물론 민간인들의 학대와 처단에 조력한 어떠한 나치범죄자도 제외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원과 활동을 숨긴채 나치범죄자들은 쉽게 미국에 이주할 수 있었다. 위 특별이민법에 의해 난민위원회(Displaced Persons Commission)가 설치되고 CIC의 도움을 받아 선별작업에 나섰으나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유럽 전지역으로부터의 난민의 신분을 제대로 확인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할당제에 의해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 독일계 동구권 난민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아볼 수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의 신원에 대한 실질적 심사가 불가능 하였다. DP법이 만료된 1952년까지 40여만명의 유럽 난민이 미국으로 유입되었고 그 가운데 1만명 가량은 나치전범으로 추산되었다. 미국은 완전히 나치전범들의 '안전한 천국'(safe haven)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국내외 여론으로 나치전범들의 신변에 위협이 닥쳐왔다. 유태인조직과 미국내 인권단체들의 나치추방 여론 형성과 나치범죄자 색출운동이 벌어진 이후 미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많은 나치범죄자들이 차례로 확인되었고 대부분이 시민권이 박탈되거나 국외로 추방(deportation)되었다. 이민법(INA)이 이러한 절차의 근거가 되었다. 1978년 의회는 이민법을 개정하여 종래 있던 추방 규정에 나치범죄자의 추방에 관한 규정을 추가하였다.

"1933년 3월 23일부터 1945년 5월 8일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나치정부, 나치정부의 군대에 의해 점령된 지역의 정부, 나치정부의 지원과 협력에 의해 설치된 정부, 나치정부의 동맹국이었던 나라의 정부의 지시 또는 그 연계하에 인종, 종교, 출신국가,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하여 어떠한 사람을 학대하는 일을 지시하거나 선동하거나 지원하거나 참여한 외국인"

이러한 요건에 해당되는 나치전범에 대해서 먼저 시민권이 박탈당하고 이어 국외로 추방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특정국가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지는 송환(extradition)도 취해졌다. 송환은 송환협정이 체결되어 있을 경우에 한하여 가능한 것인데 미국에서 송환된 케이스는 Ryan, Artukovic, Demjanjuk 3건에 불과하였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소련은 미국에 대하여 Maikovskis, Linnas 등에 대한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송환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시민권박탈(denaturalization)절차와 추방(deportation) 절차는 미국법상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시민권박탈절차는 연방지방재판소의 재판과 순회재판소의 항소, 대법원 상고로, 추방절차는 이민담당판사 앞의 청문, 이민항소위원회(Board of Immigration Appeals), 순회항소재판소와 대법원을 각각 거치게 되어 있었다. 이 두개의 절차는 각각 진행되게 마련이었고 그 재판의 내용도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7번의 심급의 모든 절차를 밟는데는 7년여의 세월이 걸리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연 때문에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해당 나치전범이 사망하는 경우조차 생겨났다.

한편 나치범죄자들에 대한 기소나 처벌절차가 미국내에서 개시되지는 않았다. 나치범죄가 미국내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형사재판권의 관할 결정에 있어서 국적주의, 영토주의, 범행지주의의 원칙을 지켜 왔다. 나치범죄는 미국인이 미국에서 미국인에 대하여 범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은 나치전범을 처단하기로 하는 모스크바 선언과 런던협약에 서명하였고 1946년 유엔총회는 모든 국가로 하여금 전범을 체포하고 이들을 범죄지 국가에 송환할 것을 결의하였기 때문에 법률적 송환의무를 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미국이 그러한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또한 현재 발전하고 있는 국제법상의 '보편적관할권이론'에 의해 미국이 직접 나치처벌에 나서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미국은 이미 테러리즘에 대항해야 할 필요성에서 테러리스트에 대한 보편적 관할권을 인정하는 입법을 한 바 있다.

② 나치범죄자 색출운동의 시작

미국내에 나치전범들이 유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국행정부가 이들의 소재를 탐지하거나 기소하려는 노력을 30여년간 거의 한 적이 없었다. 1945년 이후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민국(INS)을 통하여 나치관련자를 확인하고 추방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형식적이거나 비효율적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이민국이 나치협력자에 대해 조사를 벌인 것은 10건이 채 되지 않았고 그 가운데 단 1명만이 추방되었다. 이와같은 무관심과 비효율의 배경에는 당시 냉전의 격화와 더불어 나치즘 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더 강화되었을 뿐만아니라 이민국의 취급이 중앙이 아닌 지방단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나치범죄자에 대한 이민국의 조사는 다른 범죄와 달리 특별한 취급을 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성실한 조사가 따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Hermine Braunsteiner Ryan 사건은 미국 국민의 나치전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42년 폴란드 루블린에 설치된 수용소의 악명높은 여성경비병이었던 Braunsteiner가 뉴욕에서 남편과 함께 가명으로 살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그녀에 대해 1973년 서독정부는 송환을 정식으로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미국 법원도 그 요구에 따랐다. 서독에서 6년동안 재판을 받은 끝에 1981년 서독 법원은 그녀에게 다수 살인죄를 적용하여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여성 하원의원이던 Eilberg와 그를 뒤이은 Holzman이 미국내에서의 나치전범 수색과 추방을 위한 켐페인에 불을 당기고 운동을 이끌었다. 1973년 세계유태인협회의 Otto Karbach 박사는 이민국에 59명의 미국내 나치전범용의자명단을 제출하였고 이민국은 즉각 조사팀을 설치하였다. 뉴른베르크 전범재판 이후 나치범죄자를 조사한 최초의 기구이기는 하였으나 1명으로 구성된 이 조사팀이 그 방대한 조사업무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74년에 이르러 하원 법사위원장 Joshua Eilberg가 국무성의 관심을 촉구하는 서한을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보냄으로써 국무성은 1975년 서독등 관련 국가에 Karbach List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이들 국가로부터의 정보제공과 이민국의 용의자에 대한 국적박탈소송이 시작되었으나 이민국의 불성실한 증거자료준비, 생존한 증언자들의 희소성등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③ OSI와 나치범죄자

1977년 이민국 내에 다시 Martin Mendelsohn변호사를 책임자로 하는 특별소송팀(Special Litigation Unit)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나치관련자들에 대한 수색과 소송등에 큰 진전을 보지 못하자 불만이 의회내에 고조되었다. 나치범죄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가 이루어진 것은 의회의 압력으로 1979년 법무성 산하에 특별수사대(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가 설치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나치전범의 수사와 추방에 관련된 모든 업무가 본격적으로 그리고 단일한 체계하에서 취급되었다. 2백8십만불의 예산도 책정되었고 수사인력도 대폭 증가되었다.

초대 책임자는 뉴른베르크 검사 출신의 Walter Rockler였고 1980년에는 부책임자였던 Allan A.Ryan이 그 뒤를 이었다. 18명의 변호사, 6명의 역사학자등을 포함하여 직원이 47명에 이르렀다. 1981년에는 하원의 100명이 넘는 의원들이 OSI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다하도록 레이건 대통령에게 탄원하였다. 같은해 크리스토퍼 도드 상원의원등 11명의 상원의원이 OSI 예산감축을 반대하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다.

1982년 CBS 텔레비젼의 "60 Minutes"라는 프로에 '나치 커넥션'이 나가자 언론인과 의회, 일반대중의 관심과 여론이 폭발하였다. OSI의 수사관이었던 죤 로프트스는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정보기관이 나치범죄자들을 그들의 요원으로 몰래 채용하여 활용하였다고 폭로하였다. 그는 지난 35년간 아무도 이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으나 실제로 그동안 크고 작은 단체들이 그러한 사실을 고발하였으나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수없이 미국 시내를 활보하고 있을 나치전범들의 존재를 알리려 하였으나 관심을 끌지 못하자 Paul Silton이라는 랍비는 나치의 SS복장을 한 채로 1979년 11월 콩코드호텔에 나타나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④미국의 음모, 나치전범의 은폐와 활용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미국이 나치전범자들을 정보원등으로 고용하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온세상에 드러난 것은 클라우스 바르비 사건때문이었다. '리용의 도살자'로 널리 알려진 바르비는 1983년 볼리비아에서 프랑스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에서 거주하는 동안 미군첩보대인 CIC에 의해 그가 나치전범임을 알면서도 정보원으로 고용하였던 사실이 밝혀져 미국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공식적으로 정중한 사과까지 하였다. 미국군형법(UCMJ)상의 이적행위등에 해당되는 이러한 행위는 공소시효경과등의 이유로 CIC관계자들은 처벌되지 않았다.

미국의 CIC는 전쟁 종료 직전 나치의 SS, SD, 게쉬타포등에 소속된 일부 나치정보장교들을 독일과 점령당국으로부터 분리하여 보호하였다. 이른바 "rat-line"이라는 것을 만들어 수배된 나치전범을 유럽에서 도주하는 것을 돕기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일부는 미국정보기관의 도움으로 미국시민권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한편으로 뉴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벌이면서 나치처단과 인류 정의를 외치면서 미국은 뒷구멍으로 자신의 국익을 위해 전범들을 빼돌리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 후에도 미국은 냉전의 격화와 더불어 나치추적과 처단의 의지 보다 반공의 결의를 더욱 다지게 되었고 과거 공산주의자 탄압에 경험이 있던 나치의 정보장교들을 반공전선의 정보원등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더구나 독일점령을 위해 배치되었던 각국 사이뿐만아니라 미군부대 사이에도 상호간의 정보 경쟁이 치열하여 전쟁 중의 경력을 불문하고 현재의 정보요원으로서의 가치를 따졌다. 바르비의 경우는 과거 전력을 무시하고 정보요원으로 채용된 하나의 예일 뿐이었다. 이들은 현지 물정을 전혀 모르는 미군에게는 대단히 소중한 존재였고 특히 독일의 정보장교들 가운데 일부는 소련의 영향하에 든 동구 여러나라의 공산당과 그 당원, 그 활동등에 정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활용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정보기관이 지난 수십년동안 활용한 나치관련자들이 최소한 156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뿐만아니라 1,558명에 이르는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과학자들이 국방성 및 국무성의 'Project Paperclip'이라고 불리는 작전을 통하여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나치당원이거나 SS대원이었다. Wernher von Braun, Theodor Zobe, Herbert Axter등 유명한 과학자들이 이 그룹 속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탈나치화정책과 전범처벌의 원칙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을 위해 각종 기관에서 종사하고 있었다. 흔히 달로켓, 제트비행기, 그외 상당수의 과학적 성과들이 바로 Paperclip의 유산이라고 말해지지만 동시에 그 유산은 미군을 실험대상으로하여 발전시킨 가공할만한 신경가스등 신경화학무기도 포함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OSI가 다루고 있던 사건 가운데서 적어도 20건 이상은 미국정부가 활용한 나치전범들이었다.

유럽 여러나라에서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나치 전범용의자들의 송환 요구에도 몇차레 미국은 거절하였다. 아직 미국이 그 국가를 승인하지 않았다거나 그 재판의 공정성을 믿을 수 없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유고슬라비의 경우 7백건 가량의 송환요구를 하였으나 미국은 단지 20여건에 대하여만 유고슬라비이에 송환하였다. 미국의 이와같은 나치범죄자의 보호와 이용은 소련이 "서방국가들이 나치전범들을 품안에 넣고 추방을 거절하고 있다"는 비난한 내용과 일치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⑤추방되는 나치전범들

미국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나치범죄자들은 대체로 나치 강제수용소의 경비병, 경찰, 또는 나치 정부 관리들이었다. 강제수용소 경비병이었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자로서는 Feodor Fedorenko, Karl Linnas, Ivan Demjanjuk등이 유명하다. Fedorenko는 80만명의 유태인 가스실에서 학살당한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경비병이었다. 그의 비자에 농부라고 기재했다가 사실이 밝혀져 1981년 미국 대법원 판결에 의하여 시민권이 박탈되고 소련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Linnas는 에스토니아의 타르투 수용소 책임자로 있던 자로서 역시 소련으로 추방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Demjanjuk사건외에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상사였던 Hans Lipschis는 1983년 서독으로 추방되었다.

경찰로서는 전쟁 중 라트비아 경찰책임자였던 Boleslaves Maikovskis가 유명하다. 자신이 라트비아 철도청 서점주인이었다고 속여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나 거짓임이 밝혀져 서독으로 추방되어 재판을 받았다. Serge Kowalchuk는 우크라이나 민병대에서 일했던 사람임이 밝혀져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크로아티아의 내무장관으로 일했던 Artukovic은 자신이 수천명의 세르비아인, 유태인들이 수감된 강제수용소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1984년 유고슬라비아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나치범죄자 추방절차는 너무도 지리한 것이었으며 1980년 OSI 창설 이후 본격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이미 때늦은 것이었다. 추적의 단서를 찾기 쉽지 않았으며 대상자들의 나이는 너무 들어 있었다. 더구나 그것은 상대 국가가 열심히 받아들여 법정에 세우기를 바랄 때 미국은 적극적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스스로의 법정에 이들을 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추방당한 전범 보다는 안전한 피난처를 미국에서 구한 전범이 더 많으리라는 추정은 합리적인 것이다.

5.결론

--정의는 구하고 기억하는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다.

"죽은 사람들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 때문에, 그 보다는 그들의 아이들 그리고 당신의 아이들 때문에 이 재판은 중요합니다. 이 재판은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 재판은 기억의 이름으로 미래에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기억되지 않는 정의란 불완전하고 거짓되며 정의롭지 않은 정의입니다. 망각이란 아우슈비츠가 절대적 범죄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부정의입니다. 망각이란 나치의 결정적인 승리로 이어질 것입니다. - - -물론 어느 것도 죽은 사람들을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 법정에서의 만남과 증언 때문에 피고인은 죽은 사람들을 다시금 죽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가 죽은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죽이게 된다면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입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본재판은 기억에 그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유태인으로서 나치수용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엘리 위젤, 그 처절한 경험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공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엘리 위젤. 그는 기억이야말로 정의라고 단언하고 있다. 망각은 불의이며 기억은 정의라고 외치는 그는 나치의 범죄를 집단의 기억속에, 그리고 역사의 기억속에 남기는 것으로써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되풀이하고 만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이다.

나치범죄자들이 전쟁이 끝난 뒤 반세기에 이르도록 끝없이 추적당하고 처단당하면서 안전한 휴식처, 피난처를 구하지 못했던 것은 이들을 뒤쫓은 집요한 나치사냥꾼들의 존재, 이들을 뒷받침한 전세계의 양심과 여론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바로 그 범죄에 대한 분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같은 사건의 반복에 대한 우려와 재발방지의 염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수십년 전에 있었던 비극에 대한 인류 공동의 망각에 대한 단호한 거부, 끈질긴 기억의 산물이었다.

이 속에서 나치범죄자가 언제 체포될 지 모르는 상태에서 불안해 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거나 결국 체포당하여 범행지로 압송당해야 했다. 체포의 가능성과 공포 속에서의 불안한 생활, 또는 자신이 저질렀던 범행의 현장에서 그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조롱과 손가락질 속에서의 재판이 바로 나치범죄자들이 전쟁의 종료 후 직면해야 했던 운명이었다.

이것은 바로 정의의 실현이었다. 범죄자로 하여금 죄값을 치르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치범죄의 극악함을 드러내는 일은 물론이고 범죄자는 결코 용서받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준 이러한 과정의 뒤에는 고단한 나치범죄추적자들의 추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나치범죄자들과 이들의 공모자들이 더 이상 어둠 속에 남을 수 없게 되었다. 범죄자들의 손에 희생된 사람들과 그 가족, 나아가 전 세계인들이 정의감을 맛볼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들의 노고 때문이었다. 정의는 결국 구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진실을 인류에게 교훈으로 남겨주었던 것이다.

이제 그 끔찍한 세계대전이 끝난지 반세기를 막 넘어 섰다. 그 반세기 동안에도 지구상의 곳곳에서 전쟁의 포성이 멎지 않았다. 대량의 학살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전세계에서 지속되고 있는 나치전범의 추적과 처단의 소식은 이러한 학살의 범죄자에게는 경종이 되었으며 인류에게는 전쟁과 학살에 대한 경각심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다. 최근 보스니아에서의 인종말살정책의 책임자들이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해 설치된 전범재판소에서 기소됨으로써 비인도적 범죄는 전쟁중의 행위라 하더라도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또하나의 선례가 되고 있다. 이제 나치범죄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사망하였고 더이상 추적의 필요성도 사라졌다. 그러나 인류의 정의를 향한 투쟁과 추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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