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교과서 왜곡파문의 전말
 

 2001년4월 일본 교과서 왜곡파문의 교과서 수정 내용,문제점,<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정체와 성격 일본 교과서 왜곡의 역사,이에 대응 하여야 할 우리의 자세등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 모음>입니다.
                           <운영자>

[日교과서 파문]'새 교과서…모임' 교과서 수정 내용

우익계열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출판사 후소샤. 扶桑社)측의 역사교과서 신청본이 137군데의 수정을 거쳐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이는 `새 교과서…모임'이 당초 제작, 편집한 교과서 신청본의 내용이 일선학교에서 교재로 채택하기에는 매우 부적합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음에도 불구, 검정기준의 구미를 맞추는 방법을 통해 제도권 진입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편집자측은 중학교 교과서 시장의 10% 확보를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대폭적인 칼질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번 검정합격에 매달렸던 셈이어서 4년 후에도 검정기준의 허점만 파고든다면 제2, 제3의 우익교과서 출현이 가능함을 시사하고 있다.

후소샤 교과서의 수정내용 가운데 100여 군데가 근·현대사에 집중됐다는 점은 `새 교과서…모임'측이 이른바 기존교과서에 실렸다는 `자학(自虐)사관'을 털어내려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후쇼샤 교과서는 검정의견을 수용, 독소적인 내용을 상당부분 탈색시켰지만 애초부터 일제의 가학을 상징하는 군대위안부 문제를 다루지 않는 등 목표로 삼았던 `자학사관' 타파에 일정부분 성공한 측면도 있다.

결과적으로 후쇼샤 교과서는 나머지 7개 기존교과서가 일제의 가해사실을 삭제, 축소기술하는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된다.

▲군대위안부 = 처음 신청본 제출 당시부터 다루지 않음. 따라서 다뤄진 내용만을 심의, 수정을 요구하는 검정절차에 따라 최종수정본에도 전혀 다뤄지지 않았음.

▲한일합방 = 신청본에서는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다. 이것은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려는 정책으로서 구미열강의 지지를 받았다'고 기술했다. 또 `한국병합은 국제관계의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뤄졌으며, 한국내에서는 당연히 병합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편집자들은 1차 수정과정에서 `구미열강의 지지를 받았다'든가 `합법적으로 이뤄졌다'는 표현을 드러내고 `한국내 반대를 제압하고 병합을 단행했다'는 내용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여전히 검정의견이 부정적으로 나오자 `한국병합 후 일본은 식민지화한 조선에 철도, 관개시설을 정비하는 등의 개발을 하고 토지조사를 개시했다', `일본어 교육 등 동화정책이 진행됐기 때문에 조선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강화했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식민지 지배사실과 동화정책 등으로 검정의 칼날을 비켜간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철도, 관개시설을 정비하는 등의 개발을 했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근대화에 기여했음을 암시하는 집요함도 드러냈다.

▲일본의 조선 군제개혁지원 = 조선을 둘러싸고 청일간에 대립하고 있을 때 일본이 조선의 군제개혁을 지원했다는 신청본의 내용은 검정과정에서 무수정 통과됐다.

문제 부분은 `일본은 조선 개국후 근대화를 돕기 위해 군제개혁을 지원했다.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하지 않는 자위력있는 근대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중요했다. 그런데 군제개혁에 소외당한 일부 조선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는 대목이다.

▲동남아 침략미화 = 일본의 동남아 침공이 백인들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이웃국민을 `해방'시켰다는 논조를 유지, 침략사실을 미화한 흔적이 역력하다.

당초 신청본에는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의 승리가 `동남아시아인, 인도인, 아프리카인들에게까지 독립의 꿈과 용기를 심어주었다'고 했다가 검정의견을 받아들여 아프리카인 부분은 삭제했으나 여전히 동남아의 `은인'인 양 하는 표현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최종수정본에는 `일본의 전쟁목적은 자존자위와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전쟁의 희생자 입장 강조 = 교과서는 가해사실은 최소화하면서도 태평양전쟁의 피해자입장에서 일본의 전쟁참화를 부각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의 비극'이라는 부분에서 `많은 일본 병사와 민간인이 희생됐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은 만주에 침입해 일본의 일반시민에 대해 살해, 약탈, 폭행을 반복했다. 포로를 포함한 약 60만명의 일본인을 시베리아로 연행해 가혹한 노동에 종사시키고 약 1할을 죽게 했다. 또 미군에 의한 무차별 폭격이나 원폭투하로 막대한 사상자가 나왔다'는 등의 내용이 그것이다.

▲난징(南京)대학살 = 이 부분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이라는 대목에서 당초 신청본의 `난징사건'이라는 제목이 `평화에 대한 죄'라는 타이틀로 수정된 상태에서 기술됐다.

신청본은 난징공략전에서 중국민중 20만명 이상이 살해됐다는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홀로코스트와 같은 종류는 아니었다고 강변했다.

검정의견을 반영한 최종수정본은 `도쿄재판에서는 일본군이 1937년 일·중전쟁에서 난징을 점령했을 때 다수의 중국인민을 살해했다고 인정했다'로 바뀌었다. 또 `이 사건의 실태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료상 의문점도 제기돼 여러가지 견해가 있고,오늘날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며 난징대학살을 논란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고대사 = 한일 양국 고대사학자간에 논란이 있는 부분을 기정 사실(史實)인 양 기록한 부분이 적지 않다.

최종본은 `고구려가 돌연 야마토(大和)조정에 접근했으며, 신라와 백제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기술했으며, `야마토 조정은 반도(한반도) 남부의 임나라는 곳에 거점을 둔 것으로 여겨진다'며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또 `동아시아중 중국으로부터 배웠으면서도 독자적인 율령을 만들어낸 국가는일본 외에는 없다. 일본의 율령과 연호의 독자성은 우리나라가 중국에 복속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립된 국가로서 나아가고자 한 의사를 국내외에 드러낸 것'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보완된 부분 = 검정을 통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만큼 독소적인 내용이 상당부분 완화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중국의 난징대학살 사건을 기술하는 데는 인색한 반면 한국의 독립운동 등을 보완한 측면이 강해 한중 분리대응의 속셈도 엿보인다.

먼저 강화도 조약과 관련, 최종본에는 이 조약이 `조선에 불평등한 조약이었다'는 부분을 넣었다. 신청본에서 한국을 자극했던 `조선반도는 일본에 끊임없이 들이대고 있는 흉기가 될 수 밖에 없는 위치관계에 있었다'는 내용은 전면 삭제됐다.

또 `일러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중국이나 조선 등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국가로 하여금 민족주의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했다'는 부분도 검정과정에서 사라졌다.

3.1 독립운동의 경우에는 신청본에 간략히 소개됐으나, 최종수정본에는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는 `성의'를 보였다. `조선에서는 1919년 3월1일 구(舊) 국왕의 장례식에 모인 지식인들이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데모행진을 벌임으로써 독립운동은 순식간에 조선 전토로 퍼져나갔다'고 당시 상황을 기술했다.

또 `대동아 공영권 하에서는 일본어 교육과 신사참배가 강요돼 현지인의 반발이 강해졌다. 또 전황이 악화돼 일본군에 의해 현지의 사람들이 가혹한 노동에 종사하게 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고 황민화 정책을 인정하는 대목도 가미됐다.

이와 함께 전시 국민동원이라는 대목에서는 `다수의 조선인과 점령하의 중국인이 일본의 광산 등에 끌려가 가혹한 조건하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는 사실도 포함시켰다.  

 '새로운 역사교과서 모임' 역사교과서 수정 내용
 

◇개선된 부분

 

항목(괄호 안은 역사적 사실)

최초 신청본

수정 합격본

▽임나일본부
(4세기 후반 일본 야마토 왜군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해 백제 신라 가야를 지배했으며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설.‘일본 서기’에서는 자주 언급되지만 한국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아 존재 여부가 의심됨)

야마토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곳에 세력권을 가졌다. 나중에 일본의 역사서에서 이곳에 설치된 일본의 거점은 임나일본부로 불려졌다.

야마토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지역에 거점을 구축한 것으로 생각된다.

▽강화도사건 및 한일보호조약
(1875년 일본 군함의 불법적인 강화도 침입으로 발생한 조선군과 일본군의 충돌사건.일본은 오히려 침입을 한국의 책임으로 몰아 1876년 대일문호개방을 골자로 하는 보호조약 체결)

한편 이에 앞서 일본군함이 조선의 강화도 부근에서 조선군과 교전한 사건(강화도사건, 1875년)을 계기로 일본은 재차 조선에 국교수립을 강하게 요구했다. 청조가 조선에 일본과의 국교교섭의 개시를 허가한 결과, 1876년 일조수호조규(條規)가 체결됐다. 이로써 오랜 현안이었던 조선과의 국교문제도 해결됐다.

한편 이에 앞서 일본군함이 조선의 강화도에서 측량하는 등 시위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군대와 교전한 사건(강화도 사건,1875년)을 계기로 일본은 재차 조선에 국교수립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그결과 1876년 일조수호조규가 맺어졌다. 이는 조선측에 불평등한 조약이었으나 오랜 현안이었던 조선과의 국교가 수립됐다.

▽조선반도와 일본의 안전보장

배후지가 없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반도는 일본에 끊임없이 들이대고 있는 흉기가 될 수밖에 없는 위치관계에 있었다.

배후지가 없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해진다고 생각했다.

▽한일합방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에 들어간 일본이 1910년 강압적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해 식민화 침략을 완성한 사건.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지배는 무단통치(1910∼1919), 문화정치(1919∼1931), 전시동원(1931∼1945) 등 3기로 구분)

일―러 전쟁후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를 두고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1910년(메이지 43년)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였다(한국병합). 이것은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려는 정책으로서 구미열강의 지지를 받았다. 한국병합은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는 데 필요하였으나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반드시 이익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실행한 당시로서는 국제관계의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한국 국내에는 당연히 병합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어, 반대파의 일부로부터는 격렬한 저항도 일어났다.

1910년(메이지 43년) 일본은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내의 반대를 누르고 병합을 단행했다(한국병합).한국국내에서는 일부에서 병합을 수용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으나,민족의 독립상실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일어나 그후에도 독립회복의 운동이 끈질기게 이뤄졌다.한국병합후 일본은 식민지화한 조선에 철도 관개시설을 정비하는 등의 개발을 하고, 토지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 토지조사 사업에 의해 경작지에서 쫓겨난 농민도 적지 않았고, 또한 일본어교육 등 동화정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강화하였다.

▽3.1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수천명의 지식인과 학생 등이 모인 가운데 독립 선포를 했으며 이후 조선 전역과 만주 미주 일본 등지로 독립선언운동 확산. 전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

한편 조선에서는 1919년 3월 1일,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3.1독립운동).

조선에서는 1919년3월1일, 구(舊) 국왕의 장례식에 모인 지식인들이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데모행진을 함으로써 이 독립운동은 순식간에 조선전역으로 퍼져나갔다(3.1독립운동). 조선총독부(일본이 조선지배를 위해 설치한 통치기관)는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그때까지의 통치방식을 바꾸었다.

▽관동대지진
(1923년 일본 간토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이에 따라 발생한 한국인 학살사건. 일본 정부는 계엄령 선포를 위해 ‘한국인들이 혼란을 조장한다’는 유언비어 살포. 일본 군경과 자경단에 의해 2000∼6000명의 한국인 피살)

언급 없음

1923년 9월 1일에는 관동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쿄, 요코하마 등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고 약 70만호가 피해를 보았으며 사망자 행방불명자가 10만명을 넘었다(관동대지진). 이런 혼란중에서 조선인 및 사회주의자 사이에 불온한 책동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주민 자경단 등이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쟁목적
(1941년 조선 만주 대만을 전진기지로 중국본토와 인도차이나 인도네시아 등 침략, 아시아 대륙의 식민지화)

일본의 전쟁목적은 자존자위와 아시아를 구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대동아 공영권하에서는 일본어교육,신사참배가 강요되어 현지인의 반발이 강해졌다. 또한 전황이 악화되면서 일본군에 의해 현지인들이 가혹한 노동에 종사당하게 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났다…패전후 일본은 이런 국가들에 배상을 실시했다. 그리고 대동아공영권 구상도 일본의 전쟁이나 아시아의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워진 것이라고 비판받았다.

▽강제연행 및 황민화정책
(1941년 미국이 참전,전황이 악화되자 조선 중국 베트남 등에서 전쟁에 강제로 동원하고 민족정신 말살)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징용이 이뤄지고 중학 3학년 이상의 학생은 근로동원, 미혼여성은 여자정신대로서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또한 대학생이나 고등전문학교생은 징병유예가 취소되어 아쉬움이 있었지만 조국을 생각하며 출정했다(학도출진).

이러한 징용이나 징병 등은 식민지에서도 행해져 조선이나 대만의 다수의 사람들이 여러 가지 희생이나 고통을 강요당하게 됐다. 그 외에도 다수의 조선인과 점령하의 중국인이 일본의 광산 등에 끌려가 가혹한 조건하에서 노동에 종사했다. 또한 조선이나 대만에서는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황민화정책이 강화되어 일본식 이름 사용 등이 추진됐다.


새로운 역사교과서 모임' 역사교과서의 문제점 '

◇문제점 및 논쟁부분

항목

최초 신청본

수정 합격본

▽종군위안부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적노예가 된 아시아 여성)

언급 없음

언급 없음

▽삼국조공
(일본과의 교류를 위해 일본에 파견된 문화교류사절단)

고구려가 돌연 야마토조정에 접근해서 조공을 바쳤다. 이어 신라와 백제도 조공을 바쳤다.

고구려가 돌연 야마토정권에 접근하고 이어 신라와 백제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

▽한중일의 현실인식

양국(한국 중국)은 전통적인 중화사상의 입장에서 일본을 얕보는 감정마저 갖고 있어 열강의 위협에 일본과 같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중국 조선 양국은 문관이 지배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열강의 위협에 대하여 충분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있다.

▽조선의 군제개혁
(외세 배격과 자주권확립을 위해 국왕친위대를 설치하고 상비군을 신설하는 등 군사조직의 근대화 단행)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근대화를 도와주기 위해 군제개혁을 원조했다. 조선이 외국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는 자위력이 있는 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1882년 군제개혁으로 남겨진 일부 조선군인의 폭동이 발생했다(임오사변).

수정 없이 통과(조선의 군제개혁 지원이 조선의 근대화와 독립을 위한 것으로 기술)

▽한일합방

상당 부분 수정했으나 한국 내에 한일합방을 수용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는 점과 조선에 철도 관개시설 등의 ‘개발’을 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일본 내에 뿌리 깊은 ‘식민지 시혜론’ 주장을 일부 수용.

▽태평양전쟁의 피해자 입장 부각
(전쟁을 발발시킨 가해자라는 사실 대신 피해사실만을 강조)

1945년 3월, 미군은 334기의 B29 폭격기로 도쿄의 강동지구를 공습했다. 우선 동서 5㎞, 남북 6㎞에 걸쳐 소이탄을 투하하여 화벽(火壁)으로 사람들의 퇴로를 차단한 뒤 융단폭격으로 약 10만명을 살해했다. 미군은 나아가 인구가 많은 순으로 전국 64개도시를 불살랐다. 일본의 사망 행방불명자는 군인 군속 약 186만명, 민간인 약 66만명이었다.

1944년(쇼와 19년) 가을부터 미군의 일본공습이 개시됐다. 1945년 3월 미군은 B29폭격기 편대로 도쿄의 강동지구를 공습하여 약 10만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도쿄대공습), 미군은 나아가 인구가 많은 순으로 전국의 도시를 불살랐다.(일본 자신이 식민지에 준 피해기술보다 상세히 기술)

▽아시아국가와 일본
(아시아국가 대부분은 자치 혹은 독립 추진과정)

그래도 일본은 구미제국이 수백년 동안 결코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미얀마 필리핀 인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독립을 승인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전전(戰前)부터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 일본군의 남방진출은 아시아국가들의 독립을 앞당기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7종 교과서의 항목별 개정부분과 추가내용

 

출판사

97년도판

개정판




도쿄서적

군위안부로서 강제적으로 전장에 보내진 젊은 여성도 다수 있었다.

삭제

오사카서적

(A)조선 등의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서 전장에 연행하고 있습니다.
(B)또, 정부간의 보상 뿐만 아니라 강제적으로 징병당한 병사나 군위안부에의 개인보상을 요구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C)(사진설명)일본정부에 전후보상을 요구하며 데모행진을 하는 한국의 전 군위안부들.

삭제

교육출판

(A)또, 다수의 조선인여성 등도 군위안부로서 전지에 보내졌다.

(A)더욱이, 많은 조선인여성 등도 공장 등에 보내졌다.

(B)전후 50년이 경과한 현재, 전쟁피해의 보상을 요구하는 아시아인들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전 군위안부 외에 학살이나 강제연행 강제노동 등의 피해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
(C)1994년 현재 위 사진의 전 군위안부 외에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당한 사람 등으로부터 20여건의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재판이 제기돼 있다.

(B)(C)삭제

일본문교출판

위안부로서 전쟁의 군에 수행당한 여성도 있었다.

삭제

제국서원

(A)전쟁에는 남성은 병사로, 여성은 군위안부 등으로 내몰려 참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습니다.
(B)이들 지역의 출신자 중에는 군위안부였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A)(B)삭제. (주)전시중 위안시설에 보내졌던 사람들이나, …등의 보상문제가 재판으로 넘겨지게 됐습니다.




도쿄서적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 한국에서는 민족적 저항운동이 확산됐다. 해산당한 병사들은 농민과 함께 일어섰고, 의병투쟁이라고 불리는 무력투쟁으로 발전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민족적 저항운동이 확산됐고 일본에 의해 해산당한 병사들은 농민과 일어섰습니다.

의병전쟁-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조선인들은 무기를 들고 싸웠습니다.

삭제

오사카서적

(제목)제국주의 제국(諸國)의 세계와 일본의 아시아침략

(제목)일청·일로전쟁과 아시아의 정세

일본은 조선침략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삭제

이렇게 하여 일본은 조선지배를 계기 삼아 나중에 중국침략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또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는 계기를 잡아 나중에 중국에의 진출도 엿보게 됐습니다.

(제목)제국주의 제국(諸國)의 중국침략

(제목)제국주의 제국(諸國)에 분할되는 중국

일본의 군부나 국가주의자 등은 만저우를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주장하며 침략을 기도해서 불황에 고생하면서 정쟁으로 지새는 정당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국민의 관심을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일본의 군부나 국가주의자 중에는 만저우를 ‘일본의 생명선’이라고 외쳐 그 지배를 기도함에 따라 불황에 고생하면서 정치에 불만을 갖고 있는 국민의 눈을 만저우로 향하게 하려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제목)중국에 대한 전면침략과 전시체제

(제목)일중전쟁확대와 국민생활

국민정부도 결국 공산당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을 만들어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게 되었습니다.

국민정부도 공산당과의 싸움을 멈추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조직해서 함께 일본과 싸울 것을 결정했습니다.

(제목)일본의 동남아시아침략과 태평양전쟁

(제목)아시아와 태평양에의 전쟁

일본은 진전없는 일중전쟁을 타개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침략해서 자원을 손에 넣어 연합국의 중국지원 루트를 차단하려고 했습니다.

일본군은 진전없는 일중전쟁을 타개하기 위해 남진해서 자원을 손에 넣고 동시에 아메리카나 영국의 중국에의 지원루트를 차단하려고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의 시점에 약 355만명의 일본병사가 침략전쟁을 위해 해외에 출병하고 있었습니다.

삭제

교육출판

(제목)일본의 중국침략

(제목)제2차세계대전과 일본

일본서적

(제목)제국주의 제국(諸國)의 중국침략

(제목)삭제. 본문에 ‘중국침략’은 남아있음.

(제목)15년에 걸친 전쟁의 시작

(제목)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의 시작

일본문교출판

(제목)유럽각국의 아시아침략

(제목)구미열강의 아시아진출

중국은 일본의 침략이라고 국제연맹에 제소했으나 일본은 1932년 만주국을 만들었다. 연맹은 조사단을 파견해 실정을 조사하고 만주국의 부인을 결의했다.

1932년 일본은 만주국을 만들었다. 국제연맹은 중국의 제소를 받고 조사단을 파견해서 실정을 조사해 만주국의 부인을 결정했다.




일본문교출판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중국 전토로 전선을 확대하자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이 협력해(국공합작)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일본군의 중국침략에 대해 항전을 계속했다.

중국에서는 전쟁이 시작된지 얼마안돼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력해서(국공합작)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됐다.

(제목)동남아시아의 침략

(제목)전쟁의 확대

시미즈서원

(절(節)의 제목)근대일본과 중국 조선침략

(절의 통합으로) 제목 삭제

제국서원

(제목)열강의 중국침략

(제목)삼국간섭과 북지(北支)사변

이처럼 강국의 침략에 고통받는 사람들 중에서 외국세력을 중국으로부터 쫓아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중에 중국에서도 외국세력을 쫓아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일로전쟁의 영향) 그러나 아시아인들은 곧바로 일본의 침략행위에 환멸을 맛보았습니다.

삭제

(제목)군부의 대두와 중국침략

삭제

(제목)일본의 만저우침략

(제목)만저우사변과국제연맹탈퇴





도쿄서적

조선의병사진

삭제

(칼럼)조선인 강제연행(1페이지)

삭제

(사진)조선진구(神宮)에 참배하는 조선의 학생들. 일중전쟁 이후 ‘황민화’를 철저히 하기 위해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제했다. 마을 하나에 신사 하나를 설치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에 신사수가 급증했다.

삭제. 참배 사진 대신에 ‘지원한 조선 젊은이들’사진 게재. 조선에서는 1938년에 육군 지원병제도가 생겼다.

오사카서적

이 때문에 조선 지배를 노리고 있던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립이 깊어졌다.

이 때문에 조선에 세력을 뻗치려던 일본은 러시아와의 대립이 깊어졌다.

(제목)한국병합과 조선민중의 저항

(제목)한국병합과 조선인들

(제목)일본의 조선지배

삭제

조선의병사진

삭제

교육출판

(테마학습)조선 중국으로부터 강제연행된 사람들. 탄광의 김씨 등을 2쪽에 걸쳐 취급

(테마학습)조선 중국으로부터 강제연행된 사람들. 1쪽으로 줄이고 내용도 부실해졌다.

제국서원

조선의병 사진

삭제

정부는 많은 조선인과 중국인을 강제적으로 연행해와 탄광 등에서 가혹한 노동을 시켰다.

삭제






도쿄서적

이런 중에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 계속됐다. 항일조직이 다수 만들어져 국외에 탈출했던 사람들 중에도 만저우에서 게릴라부대를 만드는 등 싸움을 계속한 사람들도 있었다.

삭제

오사카서적

그후 조선의 농민등은 항일운동을 일으켰지만….

삭제

‘3.1운동’ 일본정부는 헌병 경찰뿐만 아니라 군대까지 동원해서 진압을 하려했고 조선민중 8000명 정도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3.1운동’ 일본정부는 경찰이나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했습니다.



도쿄서적

일본 침략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나 식량이 강제적으로 몰수 당해 생활이 힘들어졌다. 또 일본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심하게 탄압당해 많은 사람이 처형당했다.

삭제


오사카서적

(제목)관동대지진과 조선인학살

(제목)관동대지진

제국서원

(관동대지진 항목의 소제목) 조선인의 학살

삭제






교육출판

(테마학습)아시아 내의 일본. 전후보상문제를 2쪽에 걸쳐 취급. 전후보상문제는 정부가 아시아 여러나라 국민의 피해사실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그 책임을 명확히 하고 확실하게 사죄함과 동시에 우리국민이 그러한 사실을 정확히 배워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앞으로 아시아인들과의 교류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테마학습)아시아 내의 일본. 전후보상문제를 1쪽으로 줄여 취급. 이 문제는 우리 국민이 그러한 사실을 정확히 배워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앞으로 아시아인들과의 교류를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사죄표현 삭제)


                                                ▼개선되거나 추가된 내용▼

도쿄서적

이순신장군 설명 추가.
신설 칼럼에서 김대중대통령 방일 연설 소개, 과거 반성과 미래 구축 중요성 언급.

오사카서적

이순신장군 설명 추가.
조선 지배를 비판한 일본인 소개.
관동대지진 당시 재일 조선인 노조선언 소개.

교육출판

재일한국인의 유래(강제연행) 설명.

시미즈서원

‘한국에서 애국자로 불렸던 안중근’을 ‘애국자 안중근’으로 표현 변경.
군위안부 시설이 비인도적이었음을 지적.

제국서원

안중근, 유관순 소개.

일본서적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함께 온 승려가 목격한 왜군의 잔악상 기술.
민비암살사건 언급. 식민통치 저항과 탄압 사진 추가. 안중근 의사 기념우표 게재.
‘조선 여성 등 강제 집합당해 일본병의 위안부로 전쟁에 보내졌다’ 명시.

 

[日우익교과서 검정통과]내용 어떻게 달라졌나

▼'새 역사 모임'측 교과서▼

3일 검정을 통과한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모임)이 만든 역사교과서와 기존 7종의 역사교과서의 내용은 한국측에서 보면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다. 한국에 대한 가해사실이 많이 삭제되거나 축소됐기 때문이다.

다만 모임측이나 문부과학성이 한국 및 중국으로부터 비판받은 부분을 일부 고치려한 의지를 보인 흔적은 엿보인다. 일본의 모든 교과서는 4년마다 수정본을 제출할 수 있어 문제가 된 ‘모임 교과서’도 2004년에 다시 수정본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모임’ 교과서〓모임측은 검정통과라는 최대 목표를 달성했다. 검정과정에서부터 국내외의 관심을 독점함으로써 ‘선전효과’도 거뒀다.

한국관련 중 가장 문제가 됐던 한일합병이나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3·1운동, 강제연행 및 황민화정책, 강화도사건과 한일수호조약 등에서는 ‘강제성’을 추가했다. 그러나 2차대전 전범재판인 극동군사재판의 정당성을 부정하면서 ‘태평양전쟁’ 대신 ‘대동아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아시아 각국의 독립에 간접적인 도움을 줬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반면 일본의 가해사실은 다루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을 전혀 하지 않은 것. 일본군위안부의 기술을 교과서에서 없애자는 것이 이 단체의 설립목적 중의 하나여서 그들로서는 성과를 거둔 셈이다.

집필자인 ‘모임’ 회장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전기통신대 교수는 최근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문부성의 수정요구에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물론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기존 7종 교과서▼

▽기존 7종 교과서〓기존 7종 교과서도 국내외의 관심이 모임측 교과서에 쏠려있는 동안 슬그머니 한국관련 기술 중 가해사실을 많이 빼거나 줄였다. 처음 출판되는 ‘모임’ 교과서와는 달리 7종 교과서는 이미 일선학교에서 ‘기득권’을 누려왔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교육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현행 7종 교과서는 모두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나 이번에 4종이 이 내용을 완전히 삭제했다. 2종은 “비인도적인 위안시설에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이나 대만 등의 여성도 있었다”고 고쳐 가혹성이나 강제성을 약하게 표현했다. 또한 모든 교과서가 썼던 ‘침략’이라는 표현도 6종이 삭제했다. ‘일본군위안부’와 ‘침략’이라는 표현은 82년 한국과 중국의 비판을 받고 모든 역사교과서가 기술하게 된 것이다.

문부성은 한국에 대한 가해사실이 삭제되거나 줄어든 이유에 대해 2002년부터 중학교의 토요 전일휴무제가 실시되고 역사시간이 주 4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또 일본군위안부에 대해서는 중학생에게 가르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일선학교의 의견이 많았기 때문에 출판사들이 자발적으로 고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모임측의 끈질긴 공격이 이들 교과서에 영향을 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日교과서 파문]'새 교과서…모임'은 어떤 단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일명 쓰쿠루카이)은 지난 1997년 1월 도쿄(東京)대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 교수와 전기통신대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교수 등이 중심이 돼 만든 단체이다.

이 단체는 기존의 중학교과서가 일본의 치부를 기록하고 있다며 건전한 내셔널리즘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밝은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명분 아래 `자학(自虐)사관'이 제거된 새로운 교과서 집필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 지배 사실을 중학교 교과서에 담는 것은 일본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역사교과서에 난징(南京) 대학살과 종군위안부 문제 등은 삭제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들의 사상은 니시오 간지의 `국민의 역사',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善紀)의 `전쟁론' 등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특히 니시오 간지의 `국민의 역사'는 일본의 역사가 얼마나 훌륭한 지를 선전하는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쓰쿠루카이가 자신들의 사상과 논리를 일반인에게 전파하고, 급기야 이번 문부과학성 검정에 통과하기까지는 자민당내 우파 정치인 및 언론의 지원과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민당은 쓰쿠루카이의 태동기인 지난 96년 8월 당내에 `역사검토위원회'를 만들었고,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 등 현 내각의 각료다수가 이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쓰쿠루카이에게 자생할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또 산케이신문은 지난 96년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역사'라는 연재물을 통해 이른바 `자학사관'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사관' 옹호론자들의 발언대를 마련해 주었다.

쓰쿠루카이는 이런 산케이(産經)신문의 계열사인 후소샤(扶桑社)를 출판사로 정해 이번에 자신들만의 사관을 담은 역사교과서를 편집했고, 문부성 검정과정에서 표현의 양보를 통해 제도권에 진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日 교과서 문제 일지]

▲1949년 4월: 일본, 검정 교과서 사용 개시

▲ 55년 8월: 민주당(자민당 전신), 교과서 역사 편향 기술 공격 개시

▲ 65년 6월: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현 도쿄 교육대 교수) 문부성 검정 항의 소송 제기

▲ 82년 6월: 문부성, 고교 역사 교과서 검정에서 중국 `침략'을 `진출'로 바꿔쓰도록 지시한 것이 문제화

▲ 7월: 한국, 중국 정부가 시정 요구

▲ 8월: 모리 요시로(森喜朗) 당시 자민당 문교 제도 조사회 부회장, 당 특사로 방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관방장관, 일본 정부 책임으로 교과서 기술 시정 약속 담화 발표.

▲ 11월: 문부성, 근린제국 조항 검정기준에 추가

▲ 84년 1월: 이에나가 3차 소송

▲ 86년 7월: `일본을 지키는 국민 회의'의 고교 교과서 `신편 일본사' 검정을 둘러싸고 한국, 중국이 반발, 문부성의 이례적인 수정 지시를 거쳐 최종 합격

▲ 89년 4월: 검정제도 전면 개정

▲ 93년 8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 위안부 동원 일본군 관여 인정 담화 발표

▲ 96년 6월: 중학교 역사 교과서 전부에 위안부 기술 등장

▲ 97년 1월: 위안부 기술 등의 삭제를 요구하는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발족

▲2000년 9월: 침략 미화, 황국 사관 중심의 `새 교과서…모임' 교과서 검정 신청본 내용 공개돼 파문

▲2001년 2월: 한국, 중국 `새 교과서…모임' 교과서 문제 정식 제기

[이태진교수가 본 日교과서]'잘못된 사관' 활개칠 우려

일본 역사교과서 검인정 심사가 끝났다. 관심의 초점은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신청본에 대한 ‘수정 합격’ 결과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2002학년도 중학교 역사교과서이다. 이 영역에는 종래 7종의 검인정 교과서가 있었다. 이번에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1종을 추가했는데 그것이 국수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교과서에서 한국과 관련해 문제가 된 것은 크게 뭉뚱그려 대여섯 대목 정도 된다. 고대사에서 임나일본부와 조공 문제, 근대 이후의 강화도사건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한국병합 등에 대한 시혜적 해석, 3·1운동 탄압 문제, 간토(關東)대지진 때의 조선인 피해, 강제징용, 일본군위안부 등에 대한 무언급 또는 소극적 서술, 한반도가 일본 안전 보장에는 흉기와 같다는 적대적 표현 등이 그것이다. 이번에 ‘합격’ 판정을 받은 몇 개의 예를 보자. 임나일본부의 경우 노골적으로 한반도 남부를 일본 세력의 거점으로 서술했던 것을 “임나(가라)라는 지역에 거점을 구축한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고쳤다. 임나일본부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문제가 된 3국의 조공 문제에 대해서는 “고구려는 야마토정권에 돌연 접근하고 신라와 백제는 조공을 바쳤다”고 했다. 우리 기준에서 보면 무수정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근대로 넘어와서는 여러 곳에서 수정의 성의를 보인 듯하나 역시 시늉에 불과하다. 최초 신청본이 워낙 노골적으로 잘못을 범해 웬만큼 고쳐도 역사의 진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신청본은 조선이 청나라의 허가를 받고 조일수호조규 체결에 나섰다고까지 썼다. 처음 듣는 소리다. 수정 지시를 받고 이를 지운 뒤 일본군함의 무단 측량 시위 행동, 불평등조약 등의 문구를 넣어 침략성을 표했지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시혜적 위상은 그대로 살아 있다.

한국병합 서술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들, 즉 동아시아 안정과 일본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했다든가, 구미 열강 지지와 국제법적 합법성 등은 사라졌다. 그러나 철도와 관개시설 정비 등 개발에 관한 것을 넣어 시혜론에 대한 미련을 남겨 두고 있다.

3·1운동과 대동아공영권에 관한 서술은 많이 수정했다. 공영권 하에서의 일본어 교육, 신사참배 강요 등에 대한 반발, 일본군에 의한 가혹한 노동 징발 등을 서술했다. 그러나 대동아공영권 자체에 대해서는 “아시아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워진 것이라고 비판받았다”고만 해 반성을 회피했다. 그리고 패전 후 피해 국가들에 대한 배상을 실시한 점을 굳이 드러냈다.

문제는 수정 작업이 이렇게 그간 문제가 되었던 것에만 한정된 점이다. 사실 역사서술은 부분적 수정으로 역사상(歷史像)이 바뀌어질 수 없다. 역사관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모임’의 신청본은 한국과 관련되는 부분 외에 전편에 걸쳐 극도의 국수주의 성향을 보였다. ‘일본의 역사는 세계 4대 문명권 이상으로 유구하며 태초부터 최고(最高) 최고(最古)의 문명국이다, 신화와 천황은 국민 속에 있는 성스러운 존재이다, 일본은 선하고 타국은 악이다’라는 식의 역사관을 바닥에 깔고 있다. 이런 부분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궁금하다.

역사학에 종사해 본 경험으로는 이런 것은 부분 수정으로 도저히 고쳐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근본적 한계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모임’의 제출본은 처음부터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었어야 마땅했다. 이 점에서 특정 부분에 대한 수정 확인만으로 합격 처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이태진(서울대 교수·한국사)

['새 역사…모임' 성격]"日 중심사관 교육" 일관되게 주장

이번 일본 역사교과서 검정과정에서 관심의 대상이 됐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두 차례나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처음에는 최초 수정본의 내용이 너무나 자국 중심의 사관(史觀)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예상외로 많은 부분을 수정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문부과학성이나 시민단체 등은 모임측이 문부과학성의 대폭 수정 요구를 받으면 ‘원칙’을 지키기 위해 검정 신청을 철회할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했다. 검정 신청을 철회하면서 이를 ‘훈장’으로 삼아 세력 확대를 꾀할 것이라는 그럴듯한 설도 나돌았다.

그러나 모임측은 137곳에 대한 수정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회장은 “그래도 우리의 정신은 살아있다”고 주장했지만 기술된 내용으로만 본다면 기존의 7종 교과서와 비슷한 교과서가 되고 말았다.

이는 일단 검정을 통과해 ‘제도권 교과서’의 위치를 확보한 뒤 점진적인 수정을 통해 ‘독자적인 색깔’을 강화해 나가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또 지금까지 투자했던 경비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비록 검정을 통과하긴 했지만 당초 지향했던 교과서 수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면서 모임측의 내부에서 원칙고수파와 현실인정파 사이의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활동

1996년

12월

‘현행 역사교과서는 자학적’이라고 비판하며 창립 기자회견

1997년

1월

설립 총회

3월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회 심포지엄 개최

1998년

9월

전국 9개 블록에서 강연회 심포지엄 개최하고 지부 설립에 착수

1999년

6월

교과서 채택과정에서 교육위원의 권한 강화하라며 지방의회 상대로 청원 시작

2000년

10월

역사교과서의 원본인 ‘국민의 역사’ 발간, 47개 도도부현에 48개 지부 설립

12월

회원 1만명 돌파 발표

3월

2000년 3월 전 도도부현에 이사 등 파견해 강연회 의원세미나 요인면담 간담회 등 개최

4월

중학교 역사교과서와 공민교과서 검정 신청

5월

‘국민의 방심’이라는 책자 만들어 교육위원들에게 무료 배부

7월

제3차 총회 열어 ‘위안부 기술이 줄어든 것은 우리 운동의 성과’라고 보고

8월

검정 신청중인 교과서 내용을 보도한데 대해 항의하며 아사히와 마이니치신문에 공개질의서

2001년

4월

2001년 4월 역사교과서와 공민교과서 합격 결정


모임측은 1997년 1월 출범하면서 설립 취지문을 통해 “전후 역사교육은 일본인이 계승해야 할 문화와 전통을 잃어버리고 일본인의 긍지를 빼앗아 왔다”며 “특히 근현대사는 일본은 자자손손 사죄만 해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죄인처럼 취급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어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일본의 어린이들을 위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역사교육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겠다”고 밝혔다.

이 단체 결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기존 7개 역사교과서에 모두 종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들은 기존 교과서들이 ‘자학사관’에 빠져있다며 종군위안부 기술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이 단체는 자신들의 역사관을 ‘자유사관’이라고 부르며 “학생들에게는 좋은 점을 가르쳐 일본에 대한 긍지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임은 창립 총회 이후 수차례에 걸쳐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강연회, 심포지엄, 요인면담 등을 열어 자신들의 주장을 선전했다. 지부결성에도 착수해 99년 10월까지 도쿄(東京)의 두 곳을 포함해 47개 도도부현(都道府縣) 전체에 지부를 만들었다. 회원은 1년 전에 1만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이 모임은 회장인 니시오 전기통신대 교수(독일문학)를 포함해 13명의 이사가 이끌고 있다. 니시오 회장은 99년 이번에 문제가 된 교과서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국민의 역사’를 집필했다.

후지오카 노부가쓰(藤岡信勝·교육학) 도쿄대 교수는 모임의 이론가로 활약하고 있고 니시베 스스무(西部邁·평론가)는 이번에 공민교과서를 집필했다.

‘전쟁론’과 ‘대만론’으로 유명한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도 이사로 활약하고 있다. 국학원대 강사인 다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신도학)가 사무국장이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

2001/04/12 18:42

"위안부는 화장실 역사"…새교과서 집필 日교수 망언

역사를 왜곡한 교과서를 펴낸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모임)의 집필자 중 한 사람인 사카모토 다카오(坂本多加雄) 가쿠슈인(學習院)대 교수가 과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화장실’에 빗대 표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97년 5월 우익 잡지 세이론(正論)과 오키나와의 류큐신문 등 지방지 등에 기고한 글에서 “위안부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화장실 구조에 관한 역사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인만큼 교과서에 쓸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제 교과서 중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는 부분을 집필했다.

그의 주장에 대해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의 마쓰이 야요리 대표는 “전쟁 때 일본군 병사들이 위안소를 ‘공중변소’라고 불렀던 것을 떠오르게 한다”면서 “여성을 성노예로 삼았던 군국주의의 여성 멸시 의식이 뿌리깊이 박혀 있음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이 단체와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 등 시민단체 회원들은 다음달 1일 도쿄에서 ‘화장실 역사’ 운운한 망언과 역사 왜곡 교과서를 비판하는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에 대한 국제적인 반발도 커지고 있다.

중국 외교부 왕이(王毅) 부부장은 11일 아나미 고레시게(阿南惟茂) 주중 일본대사를 불러 “교과서 기술의 잘못을 바로잡을 것”을 요구했다고 지지통신이 보도했다.

또 북한도 역사 왜곡에 항의하는 뜻으로 방북 예정인 일본단체의 입국을 전면거부하기로 했다고 도쿄신문이 전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회, 미주 광복회 등 미국의 50여개 한인단체는 11일 역사왜곡을 규탄하는 성명을 내고 항의시위와 일제 상품 불매운동 등을 벌이기로 했다.

<도쿄〓이영이특파원>yes202@donga.com


2001/04/13 18:31


[사설]日교과서, 적당히 타협해선 안돼

한국 정부와 국회의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강경한 비판과 재수정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은 요지부동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한술 더 떠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등 네 후보는 모두 ‘교과서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일본은 흔들리지 말자’는 식으로 외치고 있다.

문제의 왜곡 교과서 집필자 중 한 사람인 사카모토 다카오(坂本多加雄)교수는 더 기막힌 망언으로 반일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군위안부를 역사 교과서에 기술하는 것은 화장실 구조에 관한 역사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한국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일본을 방문해 12일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문부과학상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외상을 만났으나 두 장관은 재수정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마치무라 장관은 “명백한 잘못이 있으면 재수정을 권고할 권한이 있으나 이번에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고노 외상도 “내각 차원에서 재수정을 검토한 바가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한마디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대응 논리를 살펴보면, 민간이 기술한 교과서 검정에 정부가 ‘중립’을 지키고 ‘정치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아예 정부의 검정(檢定)제도가 없다면 몰라도 문부과학성 주도로 교과서 검정을 행하는 한, 그 ‘왜곡’내용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회피할 길은 없다. 더욱이 종전의 기술보다 더 우익(右翼)성향으로 검정 기준을 낮춰 사실상 왜곡을 유도한 것 또한 일본 정부 아니던가.

나아가 한국과 중국의 항의가 ‘내정 간섭적’이라는 반응도 깔려 있다. 그러나 한중은 ‘일본 내에서 벌어진 일본인들만의 문제’를 다룬 교과서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나 침략전쟁의 피해 당사자 자격으로 거짓 기술을 고쳐 쓰라고 하는 것이므로 결코 내정간섭일 수 없다.

일본은 젊은 세대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일본의 전쟁범죄를 미화하면서 그 대가로 이웃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은 감내하겠다는 위험한 선택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 정부가 뒤늦게나마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재수정을 관철하겠다고 나선 것은 잘한 일이다. 정부는 혹시 일본이 마지못해 지엽적인 단어 몇 개 고치는 정도의 수정을 수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본질적인 내용이 수정되기 전에는 어떤 타협도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정부] 日교과서 수정요구안 주요내용     2001/05/08 09:06   동아일보


8일 우리 정부가 일본정부에 전달한 35개 항목의일본 교과서 왜곡 수정요구안은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측의 후소샤(扶桑社)교과서를 중심으로 주로 근현대사 부분의 시정요구가 많았다.

근현대사 부분에서는 특히 한반도 위협설이나 한국강제병합 정당화, 강화도 사건의 계획성 은폐, 동학농민전쟁 오도 등이 대표적인 왜곡 사례로 지적됐고 군대위안부 문제 누락.축소도 별도 항목으로 다뤄졌다.

고대사, 중세사 부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의 기정사실화, 임진왜란 정당화 등이 지적됐고 중국과의 관계에서 한국에 대해 조공, 속국 등의 용어를 사용해 일본사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부분도 곳곳에 보였다.

◇한반도 위협설 = 후소샤 교과서는 한반도를 일본을 향해 대륙에서 돌출돼 있는 `팔뚝'으로 묘사, 일본의 한국 침략.지배를 합리화하는 논리인 `한반도 위협설'을 분명히 드러냈다.

후소샤 교과서 최종본은 "일본은 유러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바다에 떠있는 섬나라이다. 이 일본을 향하여 대륙에서 한개의 팔뚝이 돌출돼 있다. 그것이 조선이다. 조선반도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는 절호의 기지가 되어 배후지가 없는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해진다고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후소샤는 수정전 검정신청본에서는 "조선반도가...절호의 기지가 되어" 뒷부분에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반도는 일본에 끊임없이 들이대고 있는 흉기가 될 수 밖에 없는 위치관계에 있다"고 까지 기술했었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일본 방위를 위해 한국을 침략.지배했다는 한반도 위협설을 강조하는 것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자위전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수정을 요구했다.

◇한국강제병합 = 후소샤 교과서는 "일본 정부는 한국병합이 일본의 안정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국, 미국, 러시아 3국은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서로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않았다", "한국 국내에서는 일부에서 병합을 수용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등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한국병합과정에서의 침략행위와 강제성을 은폐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합법적인 것으로 기술한 것으로 지적돼 수정이 요구됐다. 수정요구 의견에는 극소수친일파를 일부러 부각해 기술했다는 지적도 포함됐다.

일본문교출판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빈에서 암살했다.그래서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며 식민지로 지배했다"며 한국강제병합이 안중근의 이토사살 때문인 것으로 기술해 일본의 계획성을 은폐, 역시 수정요구대상이 됐다.

◇임진왜란의 침략성 정당화 = 후소샤 교과서는 임진왜란 부분을 기술하면서 제목을 `조선출병'으로 달아 일방적 침략사실을 숨긴 것으로 수정대상으로 요구됐다.

또 "히데요시는 명을 정복... 인도까지 지배하려는 거대한 꿈에 빠져들어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는 부분도 임진왜란의 원인을 명나라 정복과 히데요시의 개인적 망상으로 돌려 기술한 것으로 지적돼 역시 수정 요구대상이 됐다.

기존 7종 교과서 중 하나인 일본 문교출판의 이 부분 기술도 "조선이 (명을 공격하기 위한) 일본군의 통행허가를 거절하자...대군을 조선에 보냈다"고 적어 전쟁발발의 책임을 조선에 전가했다.

7종 교과서 곳곳에 사용되고 있는 "군대를 보냈다","바다를 넘는다"는 기술도침략성을 은폐하기 위한 표현으로, 고쳐야 할 부분으로 지적됐다.

◇임나일본부설 = 후소샤 교과서는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출병...임나라는 곳에 거점을 둔 것", "고구려는 백제와 임나를 지반(地盤)으로 한 일본군의 저항으로 인해", "임나로부터 철퇴하고, 반도 정책에 실패한 야마토 조정..." 등의 내용을 담아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은 한국과 일본의 50여년간 연구결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설이므로 명백한 오류라는 지적이며 임나에서 철수한 것을 전제로 기술한 것은 오류이므로 삭제해야할 것이라는 수정요구의견이 제시됐다.

도쿄(東京)서적 등 6개 기존 교과서도 "6세기에 야마토국이 한반도에서 세력을잃었다", "세력이 약해졌다",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에 세력을 뻗쳤다"등으로 기술해 허구인 임나일본부설에 근거한 기술부분이 발견됐다.

◇한국사 폄하 = 고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사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비교대상으로 한국사를 거론하고, 한국사를 언급할 때 조공, 종속, 속국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곳곳에 수정대상이 발견됐다.

후소샤 교과서는 "고구려가 돌연 야마토 조정에 접근했고, 이어 신라와 백제가일본에 조공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한국과 중국의 사서에는 없는 내용이며 6세기 이후 삼국이일본보다 정치.문화적 우위에 있었다는 것이 한.일학계의 통설이기 때문에 잘못된내용이라고 수정요구안에서 지적했다.

후소샤 교과서는 또 조선의 서구 열강에 대한 인식과 국제적 지위 부분에서 "중국의 복속국이었던 조선도 마찬가지..."라고 운운, 조공체제하에서의 속국과 근대식민지와의 차별성에 대한 설명없이 조선을 중국의 `복속국'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또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관련된 부분에서도 "조선과 베트남은 완전히 그내부에 들어가 중국 역대 왕조에 복속됐다", "일본은 중화질서 바깥에서 자유롭게행동했다"고 적어 당시 국제관계를 왜곡했고, 조선과 대비해 일본이 자주독립국이었던 것처럼 기술했다.

도쿄 서적 등 4개 기존 교과서도 "중국의 속국으로 위치지워져 있던 조선은 ...

일본과의 국교도 거절했다"고 기술, 역시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표현했다.

◇군대위안부 누락 = 후소샤 교과서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가혹행위의 상징인군대 위안부 관련 내용을 고의로 누락시켜 잔혹행위의 실체를 은폐, 수정요구 대상이 됐다.

이는 최근 유엔인권위원회에 보고된 바 있는 국제보고서의 내용과 지난 93년 일본 관방장관의 담화에서 위안부의 강제성과 일본군의 개입사실을 시인했던 것과 배치된다.

도쿄서적 등 4개 기존 교과서도 군대위안부 관련 내용을 누락시킨 채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일반 사람들도 많은 희생을 했다"로만 기술, 역시 고의누락으로 수정요구를 받았다.

◇동학농민운동 오도 = 후소샤 교과서는 동학농민운동을 "동학의 난이라 불리는 농민 폭동...동학당은 서양의 기독교에 반대하는 종교를 믿는 집단"등으로 묘사했다.

이는 반봉건, 반외세운동을 `동학의 난'이나 `폭동'으로 표현한데다 농민운동을 종교집단 운동으로 한정함으로써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오사카(大阪)서적 등 2개 기존 교과서도 "동학을 믿는 농민들이 큰 반란을 일으켜..."로 기술, 동학농민운동을 `반란'으로 규정지어 `항쟁'이나 `농민운동'등 객관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정한론 = 후소샤 교과서는 "1873년, 개국 권유를 거절한 조선의 태도가 무례하다고 하여...정한론이 터져나왔다"고 기술, 일본이 기존의 교린 체제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려 했기 때문에 조선이 조약체결을 거부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일본 입장에서 편파적으로 기술했다.

도쿄서적 등 4개 기존 교과서도 "일본정부는 조선에 국교를 열 것을 요구했으나 조선이 응하지 않아 국내에 정한론이 일어났다"고 기술해 역시 정한론의 발생원인을 조선측에 떠넘겼다.

◇강화도사건 계획성 은폐 = 후소샤는 강화도 사건을 "일본 군함이 조선의 강화도에서 측량하는 등 시위 행동을 했기 때문에 조선군대와 교전한 사건"이라고 기술했다.

이는 강화도사건이 조선의 발포를 유도한 계획적인 군사작전이었다는 사실 등도발의 주체, 목적, 경위를 은폐한 것으로 수정요구 대상이 됐다.

데이코구(帝國)서원 등 2개 기존 교과서도 "일본의 군대가 강화도에서 포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적어 조선의 포격을 유도한 일본측의 저의를 은폐하고 강화도사건의 원인을 조선측에 전가했다. [연합뉴스]

 *일본 교과서 왜곡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모음

 *KBS역사스페셜 <철저분석, 일본역사교과서> 5월12일 방송분 - - - <동영상보기>

         일본 역사왜곡,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