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편 고구려(高句麗) 전성시대
 

 제 1 장 기원 1 세기초 고구려의 국력발전과 그 원인
 

1. 大朱留王 이후의 고구려 

기원 1 세기 이후로 기원 3, 4 세기까지의 한강 이남 곧 남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아직 초창하여 새로 일어선 때요 , 압록강 이남 곧 중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다 쇠미해지고 , 압록강 이북 곧 북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도 거의 기울어져서 , 가라나 신라나 백제나 남낙랑이나 동 부여의 두 나라들이 다 기록할 만한 일이 별로 없고 , 오직 고구려와 북부여가 가장 강대한 나라로 여러 나라 중에 크게 떨쳤다 . 그러나 대 주류왕 이후 연대가 삭감됨에 따라 사실도 모두 빠져서 그 사적 ( 史積 ) 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고 , 이제 지나사에 의거하여 고구려가 지나와 선비에 대해 정치적으로 관련된 한두 사항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
 
2.고구려 대 支那(지나)의 관계 

고구려가 동부여와 남낙랑과의 관계로 인하여 늘 한 ( 漢 ) 과 다투더니 , 기원 1 세기경에 한의 외족 ( 外族 ) 에 왕망 ( 王莽 ) 이라는 괴걸 ( 怪傑 ) 이 나와서 , 1)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볍 ( 井田法 ) 을 실행하고 , 2) 한 문화 ( 漢文化 ) 로 세계를 통일하여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 지나 본국뿐 아니라 조선의 여러 나라까지도 얼마간의 관계가 발생하였다 . 말하자면 지금의 중화민국 ( 中華民國 ) 이전에 지나는 수천 년 동안 왕조의 변역과 군웅의 쟁탈이 무상하였지마는 , 기실 을의 세력이 갑의 세력을 대신할 때에 , 민중에게는 한때 , `요역 ( 요投 ) 을 면제하고 부세 ( 賦稅 ) 를 감해준다 ( 省요役薄賦稅 ) '하는 6 장의 혜정 ( 惠政 ) 으로 고식적 ( 始息的 ) 인 편안을 주다가 , 오래지 않아 다시 옛 규 정을 회복하여 폭 ( 暴 ) 으로써 폭을 대신하는 극이 되풀이될 뿐이었으니 , 이를 무의식한 내란이라고는 일컬을지언정 , 혁명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는 받을 수 없었다 . 그러나 왕망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담하게 실행하려고 하였으니 , 이는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이제 정전설 ( 井田說 ) 발생의 경과와 왕망의 약사 ( 略史 ) 를 말하기로 한다 . 정전설은 지나의 춘추시대 ( 春秋時代 ) 말 전국시대 ( 戰國時代 ) 초 ( 기원 전 5 세기경 ) 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생한 것인데 , 당시 여러 나라들이 서로 맞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나라마다 귀족이 전권 ( 專權 ) 을 하여 , 사치가 극에 이르고 , 전쟁이 끊일 날 없어서 , 부세가 날로 높아가고 ,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땅을 아울러 가져서 인민의 생활이 말할 수없이 곤란하였으므로 , 유약 ( 有若 ) · 맹가 ( 孟軻 : 孟子 ) 등 일부 학자들이 이를 구제하려고 토지평균설 ( 土地平均說 ) --- 정전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 그들의 말에 의하면 , “지나의 하 ( 夏 ) · 상 ( 商 ) · 주 ( 周 ) 3 대가 다 정전제 ( 井田制 ) 를 행하였는데 , 정 ( 井 ) 자 모양의 9 백 묘 ( 묘 ) 의 땅을 여덟 집에 나누어주어 한 집이 1 백 묘씩을 경작하고 , 그 나머지 l 백 묘는 공전 ( 公田 ) 이라 하여 여덟 집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용 ( 公用 ) 에 바치게 하고 또 각자 경작한 1 백 묘에서 소출의 10 분에 1 을 공세 ( 公稅 ) 로 바치게 하여 이를 십일세 ( 什一稅 )라 일컬었다 .”고 하고 , “선대의 성왕 ( 聖王 ) 은 다시 나지 않고 중국이 분열하여 전국시대가 되매 , 제후와 왕들이 그 백성에게서 세를 많이 받기 위하여 정전을 파괴하는 동시에 , 정전에 관한 문적 ( 文籍 ) 까지 없애버렸다 .”고 하였다 . 

어느 민족이고 그 원시 공산제가 있었음을 오늘날의 사회학자들이 다 같이 공언하는 바이니 , 지나도 그 태고에 균전제도 ( 均田制度 ) 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 ( 有若 · 孟軻 등 ) 이 주장한 정전제는 당시 조선의 균전제를 눈으로 보고 혹은 전해듣고서 이를 모방하려 한 것이고 , 그들이 자인한 바와 같이 자기네의 옛 문적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 다만 조선의 균전은 팔가동전 (八家同田 ) 이 아니고 사가동전 ( 四家同田 ) 이니 , 지금 평양이나 경주에 끼쳐 있는 기자형 ( 器字形 ) 의 고전 ( 故田 ) 이 이를 충분히 증명하는데 , 그 세제는 10 분의 1 을 취하는 `십일세 ( 什一脫 ) 가 아니고 , 20 분의 1 을 취하는 입일세 ( 卄一脫 ) 였다 . 맹자가 , `맥 ( 貊 : 곧 濊 貊 ) 은 20 에서 1 을 취한다 ( 貊 二十取一 ). '고 한 말이 이를 명백히 지적한 것이다 . 

저들이 사가동전제를 파가동전제로 고치고 20 분의 1의 세제를 10 분 의 1의 세제로 고쳐서 조선과 달리하고는 , 자존적 근성이 깊이 박힌 그들이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 함을 꺼려 숨기고 중국 선대 제왕의 유제 ( 遺制 ) 라고 속이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 ( 夷貊 ) 이라 일컫고 , 조선의 정전은 이맥의 제도라고 배척하여 춘추의 공양전 ( 公洋傳 ) · 곡량전 ( 穀梁傳 ) 이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 “십일 ( 什一 ) 보다 적게 받는 자는 대 맥 ( 大貊 ) · 소맥 ( 小貊 ) 이다 ( 少乎什一者 大貊小貊也 ). ”라고 하고 , “맥 ( 貊 ) 은 오곡이 잘 되지 않고 오직 기장만 나는데---백관 ( 百官 ) · 유사 ( 有司 ) 를 먹여 살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20 에 1 만 받아도 족하다 ( 貊 五穀不生 唯?용生之 - - -- - -無百官有司之養 故二十取一而足 ). ”고 하였다 . 후한서 부여 · 옥저 등의 전 ( 傳 ) 에 ,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기름지고 아름다워오곡이 잘 된다 ( 土地平?---肥美---宜五穀 ). ”고 하였고 , 위략의 부여 · 고구려 등의 전에는 , “그 벼슬에는 상가 ( 相加 ) · 대로 ( 對盧 ) · 패자 ( 沛者 ) 등이 있다 ( 其官 有相加對盧沛者 ). ”라고 하였으니 , 맹씨 ( 孟氏) · 공양 ( 公洋) · 곡량 ( 穀梁 ) 등의 말이 근거도 없고 이론에도 맞지 않는 조선 배척론임을 볼 것이다 . 조엽 ( 趙曄 ) 의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에는 “하우 ( 夏禹 ) 의 정전 ( 井田 ) 이 조선 ( 본문의 州愼 ) 의 것을 모방해서 행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다 . 

저들이 정전설을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쳤더라도 본래 민중을 휘동하여 부귀의 계급을 타파하려 한 운동이 아니고 오직 임금이나 부귀의 계급을 설복하여 그 이미 얻은 부귀를 버리고 그 가지고 있는 것을 민중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자는 것이므로 민간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임금이나 귀족들은 바야흐로 권리의 쟁탈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 진시황이 여러 나라를 토멸하여 지나를 통일하고 지나의 모든 재부 ( 財富 ) 를 독점하여 , 아방궁 ( 阿房宮 ) 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다가 2 세에 망하고 , 8 년의 큰 난리를 지나 한 ( 漢 ) 나라가 일어나매 ,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 있어 온 귀족과 토호 ( 土豪 ) 들이 많이 멸망하여 부귀 계급이 훨씬 줄고 , 인구도 난리통에 많이 줄어들어 농토 부족이 근심이 없었으므로 , 문제되어오던 사회 문제가 얼마 동안 잠잠하였으나 , 2 백 년의 태평세월을 지나면서 인구는 크게 번식하고 거농 ( 巨農 ) 과 대상 ( 大商 ) 이 발생하여 , 부자는 여러 고을의 땅을 가진 이가 있는 반면에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사회 문제가 학자나 정치가의 사이에 다시 치열하게 논란되게 되었다 . 그래서 혹은 한전의 ( 限田議 :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의논 ) 를 내어 인민의 땅을 얼마 이내로 제한하자고 하고 , 혹은 주례 ( 周禮 ) 란 글을 지어 , 이것을 지나 고대에 정전제를 실행한 주공 ( 周公 ) 이란 성인이 지은 글이라고 거짓 핑계하여 당시의 제도를 반대하였다 . 

그런데 이때에 한의 제실 ( 帝室 ) 은 쇠약해지고 , 외척 ( 外戚 ) 왕씨 ( 王氏 ) 가 대대로 대사마 ( 大司馬 ) · 대장군 ( 大將軍 ) 의 직책을 가져 정권과 병권을 마음대로 하다가 , 왕망이 대사마 · 대장군이 되어서는 한의 평제 ( 平帝 ) 와 유자영 ( 孺子영 ) 두 황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 ( 新 ) 이라 하였는데 , 왕망은 설로 앞에서 말한 1) 정전제의 실행 2) 한문화 ( 漢文化 ) 의 세계 통일이라는 두 가지 큰 사상을 가진 자였다 . 그래서 주례 ( 周禮 ) 를 모방하여 온 지나의 정전 구획 ( 區劃 ) 에 착수하고 또 사신을 이웃 나라에 보내서 많은 재물을 임금에게 뇌물하여 , 인명과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고 한문을 배우라고 꾀었다 . 이보다 앞서 흉노가 남 · 북 둘로 나뉘어져서 북흉노는 지금의 몽고 북부에 웅거하여 한과 대항하였으나 남흉노는 몽고 남부에 웅거하여 한에 신복 ( 臣服 ) 하였는데 , 이때에 왕망의 사신이 남흉노의 선우 ( 單于 ) 낭아지사 ( 囊牙知斯 ) 를 달래어 `두 글자 이상의 이름은 중국 문법에 어긋나니 , 낭아지사란 이름을 고쳐 `지 ( 知 '라 하고 , 흉노란 `흉 ( 匈 ) '자가 순하지 못하니 `항노 ( 降奴 ) '라 고치고 , 선우란 `선 ( 單 ) '자 가 뜻이 없으니 복우중국 ( 服于中國 ) 이란 뜻으로 `복우 ( 服于 ) '라 고치라 .'고하였다 . 낭아지사가 처음엔듣지 않다가왕망의 재물을 탐내어 한이 준 흉노선우 ( 匈如單于 ) 낭아지사의 인문 ( 印文 ) 을 버 리고 왕망이 새로 주는 항노복우지` ( 降奴服于知 ) '란 인문을 받았다 . 그러나 왕망이 다시 생각하기를 남흉노가 관할하는 부중 ( 部衆 ) 이 너무 많으니 혹 후일에 근심이 되지 않을까 하여 , 그 부중을 12 부로 나누어 열두 복우 ( 服于 ) 를 세우라고 하였다 . 그러니까 낭아지사가 크게 노하여 드디어 왕망에게 대항하여 싸우기에 이르렀다 . 

왕망이 여러 장수를 보내어 흉노를 치는데 , 요동에 조서를 보내고 , 고구려현 ( 高句麗縣 ) 이 군사를 징발하였다 . 고구려현이란 무엇인가 ? 한나라 무제가 고구려국을 현으로 만들려다가 패하여 소수 ( 小水 ), 지금의 태자하 ( 太子河 ) 부근에 한 현을 두고 조선 여러 나라의 망명자 · 포로 등을 끌어모아 고구려 현이라 일컬어서 , 현도군에 소속시키고 , 통솔하는 장관 한 사람을 두어 고구려후 ( 高句麗候 ) 라 일컬은 것이었다 . 그 고을〔縣〕 사람들이 먼 길에 출정함을 꺼리므로 강제로 정발을 행하니 , 고을 사람들이 새외로 나와서 싸움터로 가지 않고 모두 도둑이 되어 약탈을 하였다 . 왕망의 요서대윤 ( 選西大尹 ) 전담 ( 田譚 ) 이 추격하다가 패하여 죽으니 , 왕망이 대장군 엄우 ( 嚴尤 ) 를 보내 그 고을의 후 ( 候 ) 추 ( 騶 ) 를 꾀어다가 목배어 장안 ( 長安 ) 으로 보내고 싸움에 크게 이겼음을 보고하니 , 고구려현을 하구려현 ( 下句麗縣 ) 이라 고치고 조서를 내려 여려 장수들을 격려하여 이긴 기세를 타 조선의 여러 나라와 흉노의 여러 부족을 쳐서 한화적 ( 漢 化的 ) 시설을 재촉하였다 . 이에 조선 여러 나라 , 북부여 · 고구려 등의 나라가 왕망에 대항하여 공수 ( 攻守 ) 동맹을 맺고 , 왕망의 변경을 자주 침노하여 왕망이 이에 대조선 · 대 흉노의 전쟁을 위해 세금을 늘리고 사람을 징발하여 전 지나가 소란해졌다 . 그래서 부유한 백성들만 왕망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 가난한사람들도 떼를지어 일어나 왕망을 토벌하므로 , 왕망이 마침내 패망하고 한나라 광무제 ( 光武帝 ) 가 한나라를 중홍하였다 . 

삼국사기에는 왕망의 침입을 유류왕 ( 儒留王 ) 31 년의 일로 기록하고 , 후·추를 고구려의 장수 연비 ( 延丕 ) 로 하였으나 , 이는 삼국사기 의 작자가 1) 고구려 고기 ( 古記 ) 에 연대가 줄어든 공안 ( 公案 ) 이 있음 을 보고 고기의 연대를 한서의 연대와 맞추고 , 2) 한서의 고구려가 고구려국과 관계없는 한나라 현도군의 고구려현인 줄을 모르고 , 이를 고구려국으로 잘못 알아서 한서의 본문에 그대로 초록하는 동시 에 , 다만 유류왕이 왕망의 장수의 손에 죽어 그 머리가 한 나라 서울 장안 에까지 갔다고 함은 , 저들 사대노 ( 事大奴 ) 의 눈에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인 듯하므로 , `고구려후추 ( 高句麗候騶 ) ' 5 자를 `아장연비 ( 我將延丕 ) '의 4 자로 고친 것이다 ( 김부식이 흐리터분한 잘못은 많으나 턱없는 거짓은 못하는 사람이니 , 연비는 혹 고기의 작자가 위조한 인물인 듯도 하다 . 그러나 유류왕은 분명히 왕망보다 백여년 전 인물이고 , 한서에 말한 고구려는 분명히 고구려국이 아니니 , 설혹 참말로 연비 라는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유류왕 시대 고구려 사람은 아닐 것 이다 ). 

그러니 왕망은 지나의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의식있는 혁명을 행하려 한 사람이다 . 그러나 이웃 나라를 너무 무시하여 남의 언어 · 문자 ·종교·정치 ·풍속·생활 등 모든 역사적 배경을 묻지 않고 , 한문화 ( 漢文化 ) 로 지배하려 하다가 그 반감을 불러일으켜서 얼마간의 민족적 전쟁을 일으키게 해서 , 결과가 내부 개혁의 진행까지 저지하여 , 그 패망의 첫째 원인을 만들었다 . `신수두'교가 비록 태고의 미신이지마는 , 전해내려온 연대가 오래고 유행한 지역이 넓어서 , 한나라의 유교는 이를 대적할 무기가 못 되고 , 이두문이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만든 것이지마는 , 조선의 인명 · 지명 등 명사 ( 고대에는 모두 우리 말로 지은 명사 ) 뿐 아니라 , 노래나 시나 기록이나 무엇이거나 다 이때 조선인에게는 한자보다 편리하였으므로 , 한자로 이두자를 대신 할 가망이 없으니 , 왕망의 한 문화적 동방 침략이 어찌 망상이 아니겠는가 ? 하불며 흉노의 본 이름은 `훈'인데 , 구태여 `훈'을 `흉노'로 쓰는 이는 한인 ( 漢人 ) 이고 , 고구려의 본 이름은 `가우리 '요 , 고구려 ( 高句麗 ) 는 그 이두자인데 , 구태여 고구려를 구려 ( 句麗 ) 혹은 고구려 ( 高句麗 ) 로 쓰는 이도 한인이었다 . 한인의 짓도 괘씸하거늘 하물며 게다가 본명과 얼토당토않은 글자를 가져다가 `항노 ( 降奴 ) '라 `하고려 ( 下高麗 ) '라 함이랴 ? 왕망의 패망함이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
 
3.鮮卑(선비) 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이 충돌하는 사이에 서서 ,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 한을 도우면 한이 이겨 , 두 나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일걷는 종족이 그것이었다 . 선비가 조선의 서북쪽 ,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가, 흉노 모돈에게 패하여 그 본거 지를 잃고 내외 흥안령 ( 內外興安領 ) 부근으로 옮겨갔음은 이미 제 2 편 제 3 장에서 말하였거니와 , 그 뒤에 선비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그대로 선비라 일컫고 , 하나논 `오환 ( 烏桓 ) '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 목축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서 각기 읍락 ( 邑落 ) 을 나누어 사는데 , 부족 전체를 통솔하는 대인 ( 大人 ) 이 있고 , 읍락마다 부대인 ( 富大人 ) 이 있어 그 부족들은 다 그 대인이나 부대인 의 명자 ( 名子 ) 로 성을 삼으며 ,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젊은 사람을 존중 하고 , 늙은 사람을 천대하며 , 문자가 없으므로 일이 있으면 나무에다 새긴 것으로 신표 ( 信標 ) 를 삼아서 무리를 모으고 , 모든 분쟁은 대인에게 판결을 받아서 지는 자는 소나 양으로 배상을 하였다 .

조선이 모돈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다 조선에 복종하지 않고 , 도리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므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 ( 扶芬奴 ) 의 계략을 쫓아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왕이 친히 거느리고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 다른 한부대는 부분 노가 거느리고 가만히 사잇길로 하여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가서 , 왕이 먼저 교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 선비가 그 소혈 ( 巢穴 ) 을비워두고 다투어 추격하므로 , 부분노가 이에 소혈을 습격 점령하고 , 왕의 군사와 함께 앞뒤에서 쳐서 , 드디어 선비를 항복받아 속국을 삼았다 . 오환은 한의 무제 ( 武帝 ) 가 위우거 ( 衛右秉 ) 를 토멸한 뒤에 이를 불러 우북평 ( 右北平 ) · 어양 ( 뺑陽 ) · 상곡 ( 上용 ) · 안문 ( 確門 ) · 대군 ( 代那 )---지나의 서북부 지금의 직예성 ( 直匠省 ) · 산서성 ( 山西省 ) 일대에 옮겨 살게 하여 흉노의 정찰을 맡아보게 하였다 . 그 뒤 소재 ( 昭帝 ) 때에 오환이 날로 불어나므로 , 당시 한의 집권자 곽광 ( 곽光 ) 이 훗날의 걱정거리가 될까 하여 , 오환의 선조 가운데 모돈에게 패하여 죽은 참혹한 역사로써 , 오환을 선동하여 모돈의 무덤을 파헤쳐 조상의 원수를 갚게 하니 , 흉노의 호연제선우 ( 壺衍제單于 ) 가 크게 노하여 날랜 기병 2 만 명으로 오환을 치매 오환은 한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 한이 3 만 군사를 내어 구원한다 일컫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흉노가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오환을 습격해서 수없이 학살하여 오환이 아주 쇠약해져서 다시 한에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 왕망의 때에 이르러서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라 하고 그 처자들을 여러 고을에 볼모로 삼고 오환을 휘몰아서 흉노를 전멸시키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니 , 오환이 분하게 여겨 배반하고 달아나는 자가 많았다 . 왕망이 이에 그 볼모로 한 처자를 죄다 죽이니 , 그 참혹함이 또 한 심하였다 . 

왕망이 망하고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지니 , 고구려의 모본왕 ( 募本王 ) 이 이를 기회로 하여 , 요동을 회복하여 양평성 ( 襄平城 ) 의 이름을 고쳐 고구려의 옛 이름대로 오열흘 ( 烏列忽 ) 이라 일컫고 선비와 오환과 협력하여 자주 지나를 치니 , 한의 광무제가 한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 ( 遼東郡 ) 을 지금의 난주 ( 難州 ) 에 옮겨 설치하고 ,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장군 채동 ( 蔡동 ) 으로 요동 태수를 삼았다 . 그러나 채동이 자주 전쟁에 지고 , 금백 ( 金帛 ) 으로 선비의 추장 ( 酋長 ) 편하 ( 偏何 ) 를 달래어 서 오환의 추장 흠지분 ( 歆志분 ) 을 살해하게 하니 ,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을 타일러서 공동작전을 취하였다 . 한은 계책이 궁하여 해 마다 2 억 7 천만 전 ( 錢 ) 을 고구려 · 선비 · 오환 세 나라에 바치기로 약조하여 휴전이 되었다 . 

모본왕이 한을 이기니 몹시 거만해져서 , 몸이 아플 때에는 사람으로 누울 자리를 삼고 , 누울 때는 사람으로 베개를 삼아서 꼼짝만 하면 그 사람을 목베어 죽여 , 그렇게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 시신 ( 待臣 ) 두로 ( 柱魯 ) 가 왕의 베개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일찍이 친구에게 울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하니 , 그 친구가 말하기를 , “우리를 살게 하므로 우리가 임금을 위하는 것인데 , 우리를 죽이는 임금이야 도리어 우리의 원수가 아닌가 ? 원수는 죽이는 것이 옳소 .” 하였다 . 이에 두로가 칼을 품었다가 왕을 죽였다 . 모본왕이 죽은 뒤에 신하들이 모본왕의 태자는 못났다고 하여 폐하고 종실에서 맞아다가 세우니 이가 태조왕 ( 太祖王 ) 이다 . 

고구려 본기가 대주류왕 이후는 확실히 연대가 줄어들었으므로 모본왕 본기 부터서야 비로소 근거할 만한 재료가 될 것이지마는 ,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함은 그 연대가 줄어든 자취를 숨기려는 거짓 기록이다 .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3 세나 혹은 4세가 됨이 옳 고 ,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 태조왕 3 년 ( 기원 55 년 ) 에 요서와 10 성을 쌓았으니 , 요동은 그 전에 한 번 회복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 후한서 동이열전 ( 東吏列傳 ) 에 ,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 ( 右北平 ) · 어양 ( 漁陽 ) · 상곡 ( 上谷 ) · 태원 ( 太原 ) 등지 를 침략하다가 채동 ( 蔡동 ) 에 은혜와 믿음으로 불러다 다시 항복하였다 . ”고 하였으나 , 세출전 ( 歲出錢 ) 2 억 7 천만 전이 채동전 ( 蔡동傳 ) 에 기록되어 있으니 , 이는 세공 ( 歲貢 ) 이요 , 은신 ( 恩信 ) 이 아니다 . 

제 2 장 太祖·次大 두 대왕의 文治  

1. 太祖 · 次大 두 대왕의 世系의 잘못  

왕조의 세계 ( 世系 ) 에 틀리고 안 틀린 것은 사학가가 아는 체할 것이 아니지만 , 고대사는 세대의 사실이 매양 왕조의 보첩 ( 譜牒 ) 에 딸려 전하므로 , 그 틀리고 안 틀림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 이제 먼저 태조왕 의 세계를 말하기로 한다 . 

전사 ( 前史 ) 에 태조왕을 유류왕 ( 儒留王 ) 의 아들 , 고추가 ( 古鄒加 ) 재사 ( 再思 ) 의 아들 , 대주류왕의 조카라 했으나 , 유류왕은 이미 말한 바 와 같이 연대가 줄어진 동안에 든 제왕이고 , 광개토경호태왕 ( 廣開土 境好太王 ) 의 16 대조이니 , 모본왕 (募本王 ) 에게는 3 대조가 될 것이요 , 태조왕에게는 4 대조가 될 것이다 . 그러니 유류왕을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의 아버지로 한것은 잘못된 기록이 아니면 속인 기록이다 . 재사는 그 벼슬 이름이 고추가 ( 古鄒加 ) 요 , 고추가는 곧 `고추가'를 이두자로 기록한 것이다 . `고주'는 묵은 뿌리 〔古根〕 란 뜻이요 ( 지금 속어에도 묵은 뿌리를 `고주박'이라 함 ) `가'는 신 ( 神 ) 의 씨란 뜻으로 , 당시 5 부 ( 部 ) 대신의 칭호가 된 것이니 , `고주가'는 당시 종친 대신의 벼슬 이름이다 ( 지금의 속어에도 먼 동족을 `고죽지 먼 등그러기 '라 함 ). 재사가 `고주가'의 벼슬을 가졌으므로 종친 대신임이 분명하고 , 후한서나 삼국지에 , “처음에는 연나 ( 涓那 ) 는 왕 될 권리를 잃었으나 그 적통 ( 嫡統 ) 대인 ( 大人 ) 이 오히려 고추가라 일컬어 종묘 ( 宗廟 ) 를 세움을 얻었다 .”고 하였으나 연나는 서부 ( 西部 ) 의 이름이고 , 계나 ( 桂那 ) 는 중부 ( 中部 ) 의 이름이니 , 고구려의 정치체제에 중부가 주가 되고 4 부가 이에 복속하였으므로 , 어느 임금 때에도 중부를 두어두고 서부인 연나 에서 왕이 나왔을 리가 없으니 , 이는 태조왕이 연나의 우두머리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서 , 왕이 되고 모본왕의 태자가 계나를 차지하였던 `신한'의 아들로서 물러나 연나의 고추가가 되었음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 본기에는 태조왕 이후에 다시 대주류왕의 후예로서 들어가 왕위를 이은 이가 없고 , 광개토경호태왕의 비에 대주류왕이 그 직조 ( 直祖 ) 로 씌어 있으니 ,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가 대주류왕의 조카가 아니라 3 세손이 될 것이다 . 

이제 또 차대왕 ( 次大王 ) 의 세계 ( 世系 ) 를 말하고자 한다 . 전사 ( 前史 ) 에 차대왕은 재사의 아들이요 , 태조왕과 한 어머니 아우라 하였으나 태조왕 당시에 차대왕은 왕자라 일컬었으니 , 차대왕이 태조왕의 아우라면 어찌 왕제 ( 王弟 ) 라 아니하였는가 ? 현재의 왕의 아들은 아니지마는 전왕의 아들이므로 또한 왕자라 일컬었다면 재사가 왕의 아버지요 왕이 아니니 , 왕부 ( 王父 ) 의 아들도 왕자라 일컬은 예가 있는가 ? 태조왕이 즉위할 때에 나이 겨우 7 살이요 , 생모되는 태후가 섭정하였 으니 , 이때에 재사가 생존해 있었을지라도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것이 여자나 어린아이만도 못할 만큼 노쇠하여 7 살된 아들에게 왕위를 내 주고 , 아내가 섭정함에 이른 것인데 , 그 뒤에 어찌 다시 굳세어져서 차대왕과 신대왕 ( 新大王 ) 과 인고 ( 仁固 ) 의 3 형제를 낳음에 이르렀으랴 ? 재사가 정치상에는 싫증이 났으나 , 아들을 낳을 만한 생식력은 강하였다 하더라도 차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6 살이었으니 , 태조 왕이 19 년이 그가 난 해요 , 신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7 살이었으니 , 태조왕 37 년이 그가 난 해다 . 태조왕 원년에 많이 늙은 재사가 19 년만에 또 차대왕을 낳고 그 뒤 또 20 년만에 신대왕을 낳았다 함이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랴 ? 대개 차대왕 · 신대왕과 인고 세 사람은 태조 왕의 서자이고 , 차대왕에게 죽은 막근 ( 莫勤 ) 과 막덕 ( 莫德 ) 두 사람은 태조왕의 적자이므로 , 신대왕과 인고가 비록 차대왕 ( 왕자시대의 ) 의 전천 ( 專擅 ) 을 미워하였으나 , 초록 ( 草綠 ) 은 동색 ( 同色 ) 이라 , 그 반역의 음모를 고발하지 않은 것이고 , 차대왕도 그 즉위한 뒤에 막근 형제는 살해하였으나 , 신대왕과 인고는 그대로 둔 것이니 , 후한서에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들로 기록한 것이 실록 ( 實錄 ) 이요 , 본기에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우라고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거나 혹은 거짓 기록이다 . 본기 ( 本紀 ) 에 태조왕의 소자 ( 小字 ) 를 어수 ( 於漱 ) 라 하고 이름을 궁 ( 宮 ) 이라 하였으나 , 어수는 이두문으로 `마스'라 읽을 것이고 , 궁 ( 宮 ) 이라는 뜻이다 . 전자나 후자가 둘 다 태조왕의 이름이니 , 어수는 소자이고 , 궁은 이름이라고 나눌 것이 아니다 .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 ( 遂成 ) 이니 수성으로 읽을 것인데 , 더러운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짚몽둥이 '를 가리키는 말이요 , 태조왕을 전사 ( 前史 ) 에는 시호라고 하였으나 고구려는 처음부터 시호법을 쓰지 아니하고 생사에 그 공적을 찬양하여 , `태조 ( 太祖 ) ' 혹은 `국조 ( 國祖 ) '라고 하는 존호 ( 尊號 ) 를 올렸으며 , 차대왕은 그 공적이 태조왕 다음 간다는 뜻으로 올린 존호이다 . 

2. 太祖王 · 次大王 시대의 `선배'제도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 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 그 창설한 연대는 전사에 전해지지 아니하였으나 , 조의 ( 조衣 : 다음에 자세히 설 함 ) 의 이름이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였으니 , 그 창설이 태조 · 차대 두 대왕 때가 됨이 옳다 .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 ( 先人 ) ' , `선인 ( 仙人 ) '이라 쓴 것으로써 , `선 ( 先 ) '과 `선 ( 仙 ) '은 `선배'의 `선'의 음 을 취한 것이고 , 인 ( 人 ) 은 `선배'의 `배'의 뜻을 취한 것이니 , `선배' 는 원래 `신수두'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 태조왕 때에 와서 해 마다 3 월과 10 월 신수두 대제 ( 大祭 ) 에 모든 사람을 모아 혹은 칼로 춤을 추고 , 혹은 활도 쏘며 , 혹은 깨끔질도 하고 , 혹은 태껸도 하며 ,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 혹은 노래하고 춤을 추어 그 잘하고 못함을 보며 , 혹은 크게 사냥을 하여 그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도 보아서 , 여러 가지 내기에 승리한 사람을 `선배 '라 일걷고 , `선배 '가 된 이상에는 나라에서 봉급을 주어서 그 처자를 먹여 집안에 누가 없게 하고 ,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자고 먹으며 , 앉으면 고사 ( 故事 ) 를 강론하거나 학예를 익히고 , 나아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 성곽을 쌓거나 , 길을 닦거나 , 군중을 위해 강습을 하거나 하여 , 일신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모든 곤란과 괴로움을 사양치 아니한다 . 그 가운데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긴다 .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 ( 조帛 ) 을 허리에 두르고 ,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두대형 ( 頭大兄 ) ' 혹은 `태대형 ( 太大兄 ) '이라 일컫고 , 그 다음은 `마리'---`대형 ( 大兄 ) '이라 일컨고 , 맨 아래는소형 ( 小兄 : 본래의 말은상고할수없음 ) 이라 일컬었다 .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를 모아 스스로 한단체를 조직하여 싸움터에 나아가서 ,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싸우다가 죽기를 작정하여 ,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은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사람과 같이 영광스러운 일로 보고 , 패하여 물러나오면 이를 업신여기므로 , `선배 '들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하였다 . 당시 고구려의 여러 가지 지위는 거의 골품 ( 骨品 : 명문 ) 으로 얻어 미천한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였지마는 , 오직 `선배 '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하므로 , 이 가운데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 왔다 . 

지금 함경북도의 재가화상 ( 在家和尙 ) 이라는 것이 곧 고구려 `선배 ' 의 유종 ( 遺種 ) 이니 , 고려도경 ( 高麗圖經 ) 에 , “재가화상 ( 在家和尙 ) 은 화상 ( 和尙 : 중 ) 이 아니 라 형 ( 刑 ) 을 받고 난 사람으로 , 중과 같이 머리 를 깎았으므로 , 화상이라 한다 .”고 하였는데 , 이는 실제와 맞는 말이다 . 그러나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서긍 ( 徐兢 : 고려도경 의 저작자 , 지나 宋人 ) 이 다만 지나 한대 ( 漢代 ) 의 죄인을 머리를 깎고 , 노 ( 奴 ) 라 일컬은 글로 인하여 드디어 재가화상을 형벌받은 사람이라 억지의 판단을 한 것이다 .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 '의 남은 무리들이 오히려 구 유풍 ( 遺風 ) 을 유지하여 , 마을에 숨어서 그 의무를 수행하여왔는데 , `선배 '란 명칭은 유교도에게 빼앗기고 , 그 머리를 깎은 까닭으로 하여 재가화상이란 가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고 , 후손이 가난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 

송도 ( 松都 : 開城 ) 의 수박 ( 手拍 ) 이 곧 `선배 ' 경기의 하나이니 , `수박'이 지나에 들어가서 권법 ( 拳法 ) 이 되고 , 일본에 건너가서 유도 ( 柔道 ) 가 되고 ,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무풍 ( 武風 ) 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였다 .
 
3. 太祖王 · 次大王 때의 제도 

고구려가 추모왕 때에는 모든 작은 나라들이 늘어서 있을 뿐 아니라 , 모든 규모가 초창이라 나라의 체제를 채 갖추지 못하였는데 , 태조 왕 때에 와서 차대왕이 왕자로서 집정하여 각종 제도를 마련하였다 . 그러나 그 제도가 대개 왕검조선 ( 王儉朝鮮 ) 이나 삼부여 ( 三扶餘 ) 의 것 을 참작하여 대동소이하게 만든 것이고 , 그 뒤 대 ( 代 ) 마다 다소 변경 이 있었으나 , 대개 차대왕이 마련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 `신 · 말 · 불' 삼한 ( 三韓 ) 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부에 재상 세 사람을 두었으니 , 가로되 `신가' · `팔치 ' · `발치 '다 . `신가'는 태대신 ( 太大臣 ) 이란 뜻이니 , 이두자로 `상가 ( 相加 ) '라 쓰고 , `신가'의 별명이 `마리'로 머리〔頭〕란 뜻이니 , 이두자로 대로 ( 對盧 ) ( 대는 옛 뜻으로 마주 ) 라 쓰고 , `신가'나 `마리 '를 한문으로는 국상 ( 國相 ) 혹은 대보 ( 大輔 ) 라 썼다 . 팔치는 `팔꿈치 ( 肱 ) '란 뜻이니 , 이두자로 `평자 ( 評者 ) '라 쓰는데 , 한문으로는 `좌보 ( 左輔 ) · 우보 ( 右輔 ) '라 썼다 . 위의 세 가지 를 만일 한문으로 직역하자면 `두신 ( 頭臣) ' · `굉신 ( 肱臣 ) ' · `고신 ( 股臣 ) '이라 할 것이지마는 , 글자가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대보·좌보·우보'라 했다 . 삼한고기 ( 三韓古記 ), 해동고기 ( 海東古記 ), 고구려고기 ( 高句麗古記 ) 등의 책에 혹 앞의 것을 좋아 `대로 ( 對盧 ) · 패자 ( 沛者 ) · 평자 ( 評者 ) '로 기록하고 , 혹은 뒤의 것을 쫓아 `대보 · 좌보 · 우보'라 하였는데 , 김부식 ( 金富軾 ) 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 이두와 한역 ( 漢譯 ) 의 이동 ( 異同 ) 을 구별하지 못하고 철없는 붓으로 마구 빼고 마구 넣고 마구 섞고 마구 갈라놓았으므로 , “좌우보 ( 左右輔 ) 를 고쳐 국상 ( 國相 ) 을 만들었다 . ” “패자 ( 沛者 ) 아무로 좌보를 삼 았다 .” 하는 따위의 웃음거리가 그 사기 가운데 가끔 있다 . 

전국을 동·서 ·남·북·중 5 부 ( 部 ) 로 나누어 동부는 `순라' , 남부 는 `불라' , 서부는 `열라' , 북부는 `줄라' , 중부는 `가우라'라 하니 , 순나`順那' · 관나 ( 灌那 ) · 연나 ( 椽那 ) · 절나 ( 絶那 ) · 계안나 ( 桂安那 ) 는 곧 `순라·불라· 열라·줄라· 가우라'의 이두자인데 , 관나의 `관 ( 灌 ) '은 뜻을 취하여 `불 ( 灌은 본래 부을관 ) '로 읽을 것이고 , 그 별명인 `비류나 ( 沸流那) '의 비류 ( 沸流 ) 는 음을 취하여 `불'로 읽을 것이 니 , 지나사의 `관나 ( 灌那 ) '는 곧 고구려의 이두자를 직접 수입한 것인데 , 삼국사기에는 관 ( 灌 ) 을 관 ( 貫 ) 으로 고쳐 그 뜻을 잃었다 . 그 밖의 순 ( 順 ) · 연 (涓 ) · 절 ( 絶 ) · 계 ( 桂 ) 의 네나 ( 那 ) 는 다음으로 쓴 것이니 , 중부 ( 中部 ) 는 곧 `신가'의 관할이요 , 동 · 남 · 서 · 북 네 부는 중부에 딸려 각각 `라살'이란 이름의 높은 관리를 두었는데 , 이것을 이두자로 `누살'이라 쓰고 , 한문으로 `도사 ( 道使 ) '라 썼다 . 도사는 `라살' 곧 누살 ( 누薩 ) 이니 도사의 도 ( 道 ) 는 `라'의 의역이요 , 사 ( 使 ) 는 음역인 데 , 신당서에 , “큰 성에는 누살을 두니 당 ( 唐 ) 의 도독 ( 都督 ) 과 같고 , 그 밖의 성에는 도사를 두니 당의 자사 ( 刺史 ) 와 같다 .”고 하였음은 억지의 판단이다 . `신가'는 정권뿐 아니라 내외 병마 ( 兵馬 ) 를 관장하여 , 권위가 대단해서 대왕과 견줄 만하나 , 대왕은 세습으로 흔들리지 않는 높은 자리에 있고 , `신가'는 3 년마다 대왕과 4 부의 `라살'과 그 밖의 중요한 관원들이 대회의를 열고 적당한 이를 골라 맡겼고 , 공적이 있는 사람은 중임을 허락하였다 . `라살'은 대개 세습이지만 , 왕왕 왕과 `신가'의 명령으로 파면되었다 . 5 부는 다시 각각 5 부로 나누고 부 마다 또 3 상 ( 相 ) · 5 경 ( 卿 ) 을 내고 , 벼슬 이름〔官名〕 위에 부의 이름을 더하여 구별하니 , 이를테면 동부에 속한 `순라'는 `순라의 순라'이고 , `불라'는 `순라의 불라'이며 , 그 밖의 것도 이와 같으며 , 동부의 `신가'는 `순라의 신가'라 일컫고 , 남부의 `신가'는 `불라의 신가'라 일 걷고 , 그 밖의 것도 이와 같았다 . 

이 밖에 `일치 '라는 것은 도부 ( 圖簿 ) 와 사령 ( 辭令 ) 을 맡아보는데 , 이두자로 `을지 ( 乙支 ) ' 혹은`우태 ( 優台 ) '라 쓰고 , 한문으로 주부 ( 主簿 ) 라 쓰며 , `살치 '란 것은 대왕의 시종이니 이두자로 사자 ( 使者 ) 라 쓰고 , 그 밖의 중외대부 ( 中畏大夫 ) · 과절 ( 過節 ) · 불과절 ( 不過節) 등 은 그 음과 뜻과 맡은 직무를 알 수 없다 . 삼국지 , 후위서 ( 逅魏書 ), 양서 ( 梁書 ), 후주서 ( 後周書 ), 당서 ( 唐書 ) 등에 12 급 ( 級 ) 의 벼슬 이름을 실었으나 , 조선어를 모르는 지나의 역사가들이 그 전해들은 것을 번역한 것이므로 , 삼국지에 주부 이외에 또 우태를 실은 것은 주부가 곧 우태의 의역임을 모른 때문이고 , 신당서에 누사 ( 騙奢 ) 이외에 또 누살 ( 누薩 ) 을 실은 것은 누사가 곧 누살의 와전임 을 모른 때문이 다 . 통전( 通典 ) 에 고추가 ( 古鄒加 ) 를 빈객 ( 賓客 ) 맡은 자라고 한 것은 다시 고구려의 종친대관 ( 宗親大官 ) 인 고추가가 외교관 된 것을 보고 마침내 고추가를 외교관 벼슬로 잘못 안 것이요 , 구당서 ( 舊唐書 ) 에 , “조의두 대형 ( 조衣頭大兄 ) 이 3 년만큼씩 바뀐다 .”라고 하였음은 `선배'의 수석 을 대신의 수석으로 잘못 안 것이다 . 

제 3 장 太祖 · 次大 두 대왕의 漢族 驅逐 ( 한족 구축 )과 옛 땅 회복 

1.漢의 국력과 東侵 

모본왕 ( 幕本王 ) 이 한때 요동을 회복하였음은 이미 제 1 장에서 말하였거니와 , 모본왕이 살해된 뒤에 태조왕이 7 살에 즉위하여 국내의 인심이 의아해 하므로 요서에 10 성을 쌓았으나 , 이때에 한 ( 漢 ) 의 부강이 절정에 이르러 지나 유사 이래의 일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 맹장 반초 ( 班超 ) 가 서역도호 ( 西域都護 ) 가 되어 , 지금 서아시아의 거사 ( 車師 ) · 비선 ( 鄙善 ) 등의 나라를 토멸하고 , 지중해 ( 地中海 ) 에 다다라 대진 ( 大秦 ), 지금의 이태리 ( 伊太利 : 이탈리아 ) 와 소식을 통해서 피부가 희고 몸이 큰 인종과 양피지에 쓰는 해행문자 ( 蟹行文字 : 게가 기어가 듯 옆으로 써나가는 서양글자 ) 의 이야기가 후한서에 올랐고 , 두헌 ( 竇憲 ) 이 5 천여 리 원정의 군사를 일으켜 , 지금 외몽고 등지에 나아가 북 흉노를 크게 격파하여 북흉노가 흑해 ( 黑海 ) 부근으로 들어가서 동 ( 東 ) 고트 족 ( 族 ) 을 압박하여 , 서양사상 ( 西洋史上 ) 에 민족 대이동의 시기를 이루고 이로부터 2 백여 년의 흉노대왕 `아틸라'가 유럽 전체를 뒤흔드는 원인을 이루었다 . 한이 이만한 국력을 가진 때였으니 , 어찌 요동을 고구려의 예사 땅이라 하여 영구히 내어놓으랴 ? 어찌 고구려나 선비에게 영구히 2 억 7 천만의 굴욕적 세폐 ( 歲幣 ) 를 바치고 말랴 ? 이에 세폐를 정지하고 경기 ( 耿夔 ) 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6 현을 다시 빼앗고 , 경기로 요동태수를 삼아 동쪽 침략할 기회를 기다렸다. 

2.王子 遂成 ( 수성 : 차대왕) 의 遼東 恢復( 회복 ) 

후한서에는 당시 한을 침략한 중심 인물을 잘못 알았으나 , 실은 태조왕은 당시 고구려에 군림한 제왕일 뿐이고 , 전쟁에 대하여는 거의 차대왕인 왕자 수성 ( 途成 ) 이 도맡았었다 . 전쟁이 처음에는 한이 주동자가 되어 , 요동을 침략하여 빼앗는 동시에 고구려를 침노하매 , 고구려는 이에 반항하는 피동적 ( 被動的 ) 지위에 있었고 , 그 다음에는 고구려가 주동자가 되어 , 요동을 회복하는 동시에 나아가 한의 변경을 잠식하매 , 한이 이에 반항하는 피동적 지위에 있었는데 , 요동 회복의 전쟁은 기원 lO5 년에 비롯하여 121 년에 마치니 , 전후 17 년이었다 . 이 전쟁의 초년 , 기원 105 년은 왕자 수성의 나이가 34 살이었는데 , “고구려가 비록 땅의 넓이와 인구의 수는 한에 미치지 못하나 , 다만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의 나라이므로 웅거하여 지키기에 편리하여 적은 군사로도 한의 많은 군사를 방어하기에 넉넉하며 , 한은 평원광야 ( 平原廣野 ) 의 나라이므로 침략하기가 용이하여 , 고구려가 비록 한꺼번에 한을 격파하기는 어려우나 자주 틈을 타서 그 변경을 시끄럽게 하여 , 피폐하게 한 뒤에 이를 격멸해야 할 것이다 .” 하고 드디어 장기의 소란작전을 한에 대한 전쟁의 방략으로 정하고 , 정예한 군사로 요동에 들어가 신창 ( 新昌 ) · 후성 ( 候城 ) 등 여섯 현 ( 縣 ) 을 쳐서 수비병을 격파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 그 뒤에 예와 선비를 꾀어서 해마다 한의 우북평 · 어양 · 상곡 등지를 잇달아 침략하여 , 한은 17 년 동안 인축 ( 人畜 ) 과 재물의 소모가 대단하였다 . 

기원 121 년 정월에 한의 안제 ( 安帝 ) 는 고구려의 침입을 걱정하여 , 유주자사 ( 幽州 刺史 ) 풍환 (馮煥 ), 현도군수 ( 玄도郡守 ) 요광 ( 姚光 ), 요 동태수 채풍 ( 蔡諷 ) 에게 명하여 유주 ( 幽州 ) 소속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라 하였다 . 이에 수성이 태조왕의 명령을 받아 , `신치' 총사령이 되어 , 2 천 명으로 험한 곳에 웅거하여 , 풍환 등을 막게 하고 3 천 명으로 사잇길을 좇아 요동 · 현도의 각 고을을 불 질러서 풍환 등의 후방 응원을 끊게 하여 드디어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 같은 해 4 월에 수성이 다시 선비의 군사 8 천 명으로 요동의 요대현 ( 遙隊縣 ) 을 치는데 , 고구려의 날랜 군사를 신창 ( 新昌 ) 에 잠복시켰다가 요동태수 채풍의 구원병을 습격하여 , 채풍 이하 장수 1 백여 명을 베어 죽이고 수없이 많은 군사를 살상하거나 또는 사로잡아 드디어 요동군을 점령 하고 , 그 해 l2 월에 또 백제와 예의 기병 1 만을 내어 현도 · 낙랑 두 군을 점령하여 , 이에 위우거가 한에게 잃었던 옛 땅 ---조선의 옛 오열홀 ( 烏 列忽 ) 의 전부를 완전히 회복하니 , 한이 여러 해의 전쟁에 국력이 피폐 한데다가 또 이처럼 크게 패하니 , 다시 싸울 힘이 없어서 드디어 요동 을 내어주고 다시 세폐 ( 歲幣 ) 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고구려에 화의를 요청하였다 . 그리고 포로는 한 사람에 대해 겸 ( 겸 : 합사로 찬 명주 ) 40 필 , 어린아이는 20 필로 속환 ( 贖還 ) 하였다 . 

요동 · 낙랑 등의 회복이 태조왕 본기나 후한서에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 당 ( 唐 ) 의 가탐전 ( 賈耽傳 ) 에 가탐의 , “요동과 낙랑이 한의 건안 ( 建安 ) 때에 함락되었다 ( 遙東樂浪 陷於漢 建安之際 ). ”고 한 말을 실었는데 , 가탐은 당나라 때의 유일한 사이 ( 四夷 ) 의 고사 ( 故事 ) 연구가이니 , 그 말이 반드시 출처가 있을 것이나 , 다만 건안은 기원 l96 년 한 나라 헌제 ( 獻帝 ) 의 원년이니까 , 고구려가 중간에 쇠미한 때이므로 , 건안은 곧 건광 ( 建光 ) 의 잘못이요 , 건광은 곧 기원 121 년 한나라 안제 ( 安帝 ) 의 연호다 . 왕자 수성이 채풍을 죽이고 한의 군사를 격파한 때이니 , 이때에 고구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한 현도 · 낙랑 등의 군을 회복하였음이 의심없다 .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자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70 리에 환도성 ( 丸都城 ) 을 쌓아 서방 경영의 본거지로 삼고 , 국내성과 졸본성과 아울러 삼경 ( 三京 ) 이라 일컬었다 . 

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는 후세 사람의 논쟁이 분분하여 혹은 환인현 ( 桓仁縣 ) 부근---지금의 혼강 ( 渾江 ) 상류인 안고성 ( 安古城 ) 이라고도 하고 , 혹은 집안현 ( 輯安縣 ) 홍석 정자산 ( 紅石頂子山 ) 위라고도하지마는 , 앞의 것은 산상왕 ( 山上王 ) 이 옮겨가 설치한 제 2 의 환도성이요 , 나중 것은 동천왕 ( 東川王 ) 이 옮겨가 설치한 제 3 의 환도성이다 . 이것은 제 6 편에서 다시 서술하려니와 , 태조왕의 환도성은 곧 첫 번째 옮겨 쌓은 제 1 의 환도성이니 , 삼국사기 지리지 ( 地理志 ) 에 , “안시성은 혹 환도성이라고도 한다 .”고 하였고 , 삼국유사에는 , “안시성은 일명 안촌흘 ( 安寸 忽 ) 이라고 한다 .”고 하였는데 , 환 ( 丸 ) 은 우리말로 `알'이 라고 하니 , 환도 ( 丸都 ) 나 안시 ( 安市 ) 나 안촌 ( 安寸) 은 다 `아리'로 읽 을 것이므로 , 다같이 한 곳---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70 리의 옛 자리 임이 분명한데 , 후세 사람들이 앞 뒤 세 환도성을 옳게 구별하지 못하고 매양 환도성을 한 곳에서만 찾으므로 , 아무리 환도성의 고증에 노력하여도 환도성의 위치는 여전히 애매하였던 것이다 . 

제4장 次大王의 왕위 빼앗음 

1.太祖王의 가정불화 

왕자 수성이 이미 요동을 회복하고 한나라의 세폐 ( 歲幣 ) 를 받으니 태조왕은 그 공을 상주어 `신가'에 임명하고 군국 ( 軍國 ) 대사를 죄다맡겼다 . 이에 위엄과 권세가 한봄에 모이고 명성과 인망이 천하에 떨치니 , 수성이 만일 이 명성과 인망을 이용하여 나아가 요서를 쳤으면 삼조선의 서북 옛 땅을 전부 회복하기가 쉬웠겠지마는 , 수성은 가정에 대한 불평이 공명 ( 功名 ) 에 대한 열심을 감쇄하여 , 요동을 회복한 이튿날 한의 화의 요청을 허락 ( 앞 장에 보임 ) 하고 귀국하였다 . 수성의 가정에 대한 불화란 무엇인가 ? 수성은 태조왕의 서자요 , 막근 · 막덕 형제가 태조왕의 적자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막문은 고구려 왕실의 가법 ( 家法 ) 에 의하여 왕위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고 , 수성은 그 빛나는 무공에 의하여 또한 태자가 되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 그래서 수성은 요동의 싸움을 마치자 급히 돌아와 원정할 생각을 끊고 밖으로는 정치에 힘쓰며 , 어진 신하 목도루 ( 穆度婁 ) · 고복장 ( 高福章 ) 을 기용하여 `팔치'와 `발치'를 삼아서 인심을 거두고 , 안으로는 사사로운 무리를 길러 태자의 자리 얻기를 도모하였는데 , `불라〔沸流那〕 '의 `일치 ' 미유 ( 彌儒 ) 와 , `환라〔桓那 〕 '의 `일치 ' 어지류 ( 어支留 ) 와 `불라'의 조의 ( 조衣 : 당시의 선배 수령 ) 가 수성의 뜻을 알고 이에 。 아부하여 태자의 자리 빼앗기를 몰래 모의하였다 .
그런데 태조왕은 수성으로 태자를 삼자니 가법 ( 家法 ) 에 걸리고 , 막근으로 태자를 삼자니 수성에게 걸려서 오랫동안 태자를 세우지 못하였다 . 수성이 정치를 오로지 한지 10 여 년에 태자의 자리를 얻지 못하자 원망하는 기색이 이따금 얼굴에 보이고 , 모의하는 흔적이 때때로 곁에 드러나니 막근은 태자의 지위를 빼앗길 뿐 아니라 수성에게 죽을까 두려웠으나 , 병권도 없고 또 위염과 명망이 수성에게 미치지 못하므로 그 대항할 방책은 오직 태조왕의 마음을 돌리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 이때에 고구려의 `신수두'에 신단 ( 神檀 ) 의 무사 ( 巫師 ) 는 비록 부여처럼 정권을 가지지는 못 하였으나 , 복술 ( 卜術 ) 로써 남의 길흉 화복을 예언한다 일컬어서 일반의 신앙을 받아 귀천의 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의심나고 어려운 일을 이 무사에게 결정을 청하는 때였으므로 , 막근은 무사에게 뇌물을 주고 도움을 빌었다 . 기원 142 년에 환도성에 지진이 일어나고 , 또 태조 왕은 꿈에 표범이 범의 꼬리를 물어 끊는 것을 보고 , 마음이 좋지 못하여 , 무사를 불러 해몽해보라고 하니 , 무사는 수성을 참소할 좋은 기회로 여기고 , “범은 온강 짐승의 어른이요 , 표범은 범의 씨요 , 범의 꼬리는 범의 뒤니 아마 대왕의 작은 씨가 대왕의 뒤 ( 후예란 말 ) 를 끊으려는 자가 있어 꿈이 그러한가 합니다·”고 하여 , 넌지시 서자 수성이 적자 막근을 해치리라는 뜻을 보였다 . 그러나 태조왕이 수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갑자기 무사의 말에 기울어지랴 다시 `불치' 고복장을 불러 물으니 , 고복장은 수성의 무리는 아니지마는 아직 수성의 음모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 “선을 행하면 복이 내리고 불선을 행하면 화가 이릅니다 . 대왕께서 나라를 집안같이 걱정하시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시면 비록 재난과 변괴와 악몽이 있을지라도 무슨 화가되겠습니까 ? ” 하고 무사의 말을 반대하여 태조왕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 

2. 遂成(수성)의 음모와 太祖王의 禪位(선위) 

수성이 40 년 동안이나 정권을 잡아 위염과 복을 오로지 하여 , 매양 마근을 죽여서 왕위 상속의 권한을 빼앗으려고 했지마는 , 다만 태조 왕이 이미 늙었으므로 그 돌아감을 기다려서 일을 행하려고 하였는 데 , 태조왕은 두 사람의 감정을 조화시켜서 자기가 죽은 뒤에도 아무 런 변란이 없도록 만든 뒤에 태자를 봉하려 하여 긴 세월을 그냥 지내왔다 .

기원 146 년은 태조왕이 왕위에 있은 지 94 년이요 , 나이 100 살 되는 경사스러운 해인데 , 수성도 이때에 나이 76 살이라 , 백살 노인인 태조왕의 건강함을 보고 혹 자기가 태조왕보다 먼저 죽어 막근에게 왕위가 돌아가지나 않을까 하여 , 그 해 7 월에 왜산 ( 倭山 : 연혁 미상 ) 에서 사냥하다가 지는 해를 돌아보며 탄식하니 , 좌우가 그 뜻을 알고 모두 힘을 다하여 왕자의 뒤를 따라 행동할 것을 맹세했는데 , 그 중 한 사람 이 홀로 , “대왕께서 성명 ( 聖明 ) 하시어 백성이 공경하여 받드는데 , 왕자가 좌우의 소인들을 데리고 성명하신 대왕을 폐위하려고 하는 건 한 가닥 실로 만 근의 무게를 끌려 함과 같을 뿐입니다 . 만일 왕자께서 생각을 고치셔서 효도로써 대왕을 섬기시면 , 대왕께서 반드시 왕자의 선함을 아시어 양위하실 마음이 였으시겠지만 , 그렇지 아니하면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 .”고 하여 반대하였다 . 수성이 그의 말을 못마땅해 하니 , 좌우가 수성을 위해 그를 살해하고 , 음모가 더욱 급히 진행되 었다 . 고복장이 눈치채고서 태조왕에게 들어가 고하고 수성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 태조왕은 신하로서의 부귀로는 수성의 마음을 달래지 못할 줄을 깨달았으나 , 차마 죽이지 못하여 고복장의 청을 거절하고 ,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별궁 ( 別宮 ) 으로 물러가고 , 수성은 자리에 올라 차대왕 ( 次大王 ) 이라 하였다 . 

고구려 본기에 , “태조왕 80년에 좌보패자 ( 左輔沛者 ) 목도루 ( 穆度婁 ) 가 , 수성이 딴 뜻이 있음을 알고 , 병을 일컫고 벼슬하지 않았다 ( 左輔沛者 知遂成有異志 稱病不仕). ”고 기록되었고 , 차대왕 2 년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났다 ( 左輔穆度婁稱病退老 ). ”고 기록되었으니 , 이에 이미 15 년 전에 병을 일컫고 벼슬하지 아니한 목도루가 어찌 15 년 후에 차대왕 2 년에 또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났다고 할 수 있으랴 ?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여러 가지 고기 ( 古記 ) 에 대하여 아무런 선택 없이 마구 수록하였음이 이같이 심하였다 . 하물며 좌보 ( 左輔 ) 나 패자 ( 沛者 ) 가 다 `팔치'의 번역인데 , 좌보패자라는 겹말의 명사를 글에 올렸으니 ,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 ? 또 태조왕 본기 에 , “ 94 년 8 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 ( 西安平 ) 을 습격하여 대방 ( 帶方 ) 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았다 ( 九十四年 八月 王遺將 襲遼東西安平 殺帶方令 량得樂浪太守妻子 ). ”라 하였는데 , 이는 후한서에 , “고구려왕 백고 ( 伯固 ) 가---질환 ( 質桓 ) 의 어간에 다시 요동의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았다·( 高句麗王伯固 質桓之間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량得浪太守妻子 ). ”고 한 글을 그대로 초록한 것이다 .

질환의 어간이란 질제 ( 質帝 ) 와 환제 ( 桓帝 ) 의 사이를 가리킨 것이니 , 그것은 태조왕 94 년이므로 , 김부식이 이 해에다 기록해 넣은 것이고 , 백고 ( 伯 固 ) 는 신대왕 ( 新大王 ) 의 이름이니 , 이때는 신대왕 원년 전 20 년이므 로 , 김부식이 `고구려왕 백고 ( 高句麗王伯固 ) '의 여섯 글자를 `견장 ( 遺將 ) '의 두 글자로 고친 것이다 . 그러나 이때 태조왕의 가정에 차대왕 과 막근의 다툼이 있어 외부의 일을 물을 사이가 없는 때였으므로 , 후한서의 질환의 어간은 환령 ( 桓靈 ) 의 어간---환제 ( 桓帝 ) 와 영제 ( 靈帝 ) 의 사이 , 신대왕 때로 개정함이 옳은데 , 김부식이 이를 태조왕 94년의 일로 적어넣음이 이미 망령된 조작임에도 불구하고 , 게다가 친절하게도 달까지 박아 ` 8 월'이라고 하였음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국내외의 기록을 뽑아 넣을 때에 모호한 것은 아무 근거 없이 연윌 ( 年月 ) 을 스스로 정하고 자구를 가감한 것이 많았던것이다 . 

제 5 장 次大王의 피살과 明臨答夫(명림답부)의 專權(전권) 

1. 次大王의 20 년 專制(전제) 

차대왕이 양위를 받아 20 년 동안 고구려에 군림하여 전제를 하다가 연나 ( 緣那 ) 의 조의 ( 조衣 ) 명림답부 ( 明臨答夫 ) 에게 살해당하였다 . 그러나 차대왕의 본기 ( 本紀 ) 가 간략하고 허술하여 , 그 전제 ( 專制 ) 의 정도와 살해당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다 . 이에 본기의 전문을 여기에 번역해 싣고 나서 논평하고자 한다 .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 ( 遂成 ) 이니 , 태조왕의 동모제 ( 同母弟 : 동모 제 3 字는 서자로 고칠 것임 ) 로 용감하고 위엄이 있었으나 , 인자 ( 仁慈 ) 가 적었다 . 태조왕의 양위 ( 讓位 ) 로 왕위에 오르니 , 나이 76 살이었다 . 2 년 봄 정월에 관나 ( 貫那 : 灌那 ) 의 패자 ( 沛者 ) 미유 ( 彌儒 ) 로 우보 ( 右輔 ) 를 삼았다 . 3 월에는 우보 고복장 ( 高福章 ) 을 죽였는데 , 그가 죽을 때에 , “원통하고 원통하다 . 내가 당시에 선조 ( 先朝 ) 의 근신이 되어 어찌 난을 일으킬 사람을 보고 말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 선군께서 나의 말을 듣지 않으시어 이에 이르렀거니와 , 지금 임금이 왕위에 올라 마땅히 정 ( 政 ) 과 교 ( 敎 ) 를 새로이 하여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 , 이제 불의로 충신을 죽이니 내가 무도한 세상에서 사느니보다 죽는 것이 낫다 .” 하고 형을 받으니 , 모두들 이 소식을 듣고 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가을 7 월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가니 , 환나 (桓那 : 椽那로 고칠 것임 ) 의 우태 어지류로 좌보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대주부 ( 大主簿 ) 를 삼았다 . 겨울 10 월에 비류나 ( 沸流那 ) 의 조의 ( 조衣 ) 양신 ( 陽神 ) 으로 중외대부 ( 中畏大夫) 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우태를 삼았다 . 이상은 다 왕의 옛날 친구였다 . 11 월에 지진이 있었다 . 

3 년 여 름 4 월에 왕이 사람을 시켜 태조왕의 원자 ( 元子 ) 막근을 죽이니 , 그 아우 막덕이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스스로 목매어 죽 었다 . 가을 7 월에 왕이 평유원 ( 平偏原 ) 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 흰 여우가 따라오며 , 울므로 왕이 이를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 왕이 무사 ( 巫師 ) 에게 물으니 , “여우는 요망한 짐승이니 , 길한 상서가 아닌데 게다가 흰 여우니 더욱괴이한 변입니다 . 천제 ( 天帝 ) 께서 인간의 임금에게 맞대해서 순수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요괴를 보여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반성하게 함이니 대왕께서 만일 덕을 닦으시면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 왕이 , “흉한 것이면 흉할 것이고 길한 것이면 길할 것인데 , 이제 이미 흉하다고 하고 또 길하다고 하니 어찌 속이는 말이 아니냐 ? ” 하고 드디어 무사를 죽였다 . 

4 년 여름 4 월 정묘 (丁卯 ) 그믐날 일식 ( 日食 ) 이 있었다 . 5 월에 다섯 별이 동쪽에 모였는데 , 일관 ( 日官 ) 은 왕의 노함을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 “이는 임금의 덕이요 나라의 복입니다 .”고 하니 , 왕이 크게 기뻐 하였다 . 겨울 12 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

8 년 여름 6 월에 서리가 내려 쌓였다 . 겨울 12 월에 천둥하고 지진이있었다 . 그음날 객성 ( 客星 : 彗星 ) 이 달을 범하였다 .

13 년 봄 2 월에 꼬리별 〔패星 ) 이 북두 ( 北斗 ) 를 범하였고 5 월 갑술 ( 甲戌 ) 그믐날에는 일식이 있었다 .

20 년 봄 정월에 일식이 있었다 . 3 월에 태조왕이 별궁에서 돌아가니 , 나이 119 살이었다 . 겨울 l0 월에 연나의 조의 명림답부가 왕이 백생들 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므로 왕을 죽이고 , 그 호 ( 號 ) 를 차대왕이 라 하였다 . ” 

이상이 차대왕 본기의 전부다 . 맨 끝에 , “명림답부가 백성들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므로 왕을 죽였다 .”고 했으나 , 그 이전의 기록을 상고해보면 , 차대왕이 백성에게 차마 하지 못할 정사를 한 일이 하나 도 없다 . 고복장 ( 高福章 ) 은 차대왕의 음모를 고발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 목도루는 차대왕과 막근의 중간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한 사람이므로 내쫓은 것이고 , 무사는 태조왕의 꿈을 야릇하게 풀어 차대왕을 해치려 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 막곤 형제는 차대왕과 맞선 적이므로 죽인 것이니 , 이것을 아무리 참혹하고 불인 ( 不仁 ) 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사로운 원한의 보복이고 , 인민에게는 이해 관계가 없는 일일 뿐더러 , 또 이것이 모두 차대왕 2 년 내지 3 년까지의 일이니 , 18년 후인 차대왕 20 년에 반란을 일으킨 , 명림답부의 유일한 구실이 될 수 없으며 , 그 이외의 기사는 일식 · 지진 · 성변 ( 星變 ) 등뿐이니 , 이 같은 천문 지리의 변화는 차대왕의 정치의 잘잘못에 관계가 없는 일이라 이로써 인민에게 차마 못할 일을 한 증거로 삼을 수 없다 . 

그러면 차대왕이 패망하고 명림답부가 성공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 차대왕이 패한 뒤에 좌보 어지류가 여러 중신과 더불어 차대왕의 아우 백고 신대왕에게 왕위 계승을 권진 ( 勸進 ) 하였는데 , 어지류는 처음부터 차대왕을 도와 왕위 찬탈을 계획한 괴수요 , 그 여러 중신이 란 대개 미유 · 양신 등일 것이니 , 이로 미루어보면 차대왕의 패망은 곧 자기 당의 이반 ( 離反 ) 에 의한 것일 것이다 . 차대왕의 즉위 이전 10여 년 동안에 차대왕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왕위 찬탈을 계획한 그 무리들이 차대왕과 20 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도리어 왕을 배반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 그 원인은 찾기 쉬운 것이다 . 고구려는 원래 일인전제 ( 一入專制 ) 의 나라가 아니라 벌족공치 ( 閔族共治 ) 의 나라이니 , 국가의 기밀 대사는 왕이 전결 ( 專決 ) 하지 못하고 , 왕과 5 부의 대관들이 대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 형별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의 결정으로 행하였다 . 그런데 차대왕은 부왕을 가두고 당시 신앙의 중심인 무사를 죽인 사람으로서 , 비록 어지류 등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 무리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군권 ( 君權 ) 이 오직 제일임을 주장하여 모든 일을 자기 독단으로 행하므로 , 연나의 `선배' 우두머리 명림답부가 그 본부 ( 本部 ) 의 `선배'로서 밖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어지류 등이 내응 ( 內應 ) 하여 , 태조왕이 돌아간 뒤를 기회하여 차대왕을 죽이고 벌족 공치의 나라를 회복한 것이다 . 

어떤 이는 명림답부를 조선 사상 처음으로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라고 하지마는 , 혁명은 반드시 역사상 진화의 의의를 가진 변동을 일컫는 것이니 , 벌족 공치를 회복한 반란이 어찌 혁명이 되랴 ? 명림답부는 한때 정권 쟁탈의 효웅 ( 梟雄 ) 이라 함은 옳지마는 혁명가라 함은 옳 지 않다 . 

2. 明臨答夫의 專權과 외교 정책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죽이고 차대왕 당년에 해를 피하여 산중에 숨어 있던 백고 ( 伯固 ) 를 세워 신대왕 ( 新大王 ) 이라 하고 , 국내에 사면령 ( 敬免令 ) 을 내려 , 차대왕의 태자 추안 ( 鄒安 ) 까지도 용서하여 양국군 ( 讓國君 ) 으로 봉하고 , 차대왕의 준엄한 형법을 폐지하니 ,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 이에 명림답부가 `신가'가 되어 ,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아 처리하고 , `팔치'와 `발치'를 겸하고 , 예량 (濊梁 ) 여러 맥 ( 貊 ) 의 부장 ( 部長 ) 을 다 차지하니 , 그 위엄과 권세가 태조 왕 때의 왕자 수성보다 더하였다 . 본기에는 , “명림답부가 국상 ( 國相 )으로 패자 ( 沛者 ) 를 겸하였다 . ”고 하였고 , 또 “좌우보 ( 左右輔 ) 를 고쳐 국상으로 한 것도 이때에 비롯된 것이다 .” 하였는데 , 이는 국상이 곧 `신가'인지를 모르고 , 패자가 `팔치' 곧 좌보인지를 모르고서 함부로내린 주해이다 . 

태조왕 때에 한이 요동을 지금의 난주 ( 난州 ) 에 옮겨다 설치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기원 169 년에 한이 요동을 회복하려고 경림 ( 耿臨 ) 으로 현도태수를 삼아서 대거하여 침입하였다 . 명림답부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신대왕 앞에서 회의를 열고 싸우고 수비할 계책을 논의 하였는데 모두들 나가 싸우기 를 주장했으나 , 명림답부는 , “우리는 군사는 적으나 험한 땅을 가졌고 한은 군사는 많으나 군량을 대기가 힘드니 , 우리가 우선 수비를 하여 한의 병력을 지치게 한 뒤에 나가 싸우면 , 백번 싸워 백번 이길 것입니다 .”고 하여 먼저 지키고 나중에 싸우기로 계책을 정하고 각 고을에 명하여 인민과 양식과 가축들을 거두어 성이나 산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게 하였다 . 한의 군사가 침입한지 여러 달을 노략질했으나 , 얻는 것이 없고 싸우려고 해도 응하지 아니하므로 , 양식이 떨어져서 배고프고 피로하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 명림답부가 좌원 ( 坐原 ) 까지 추격 하여 한의 군사는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 명림답부는 한의 침입군을 격파하자 국토를 개척하려고 먼저 선비의 이름난 왕인 단석괴 ( 檀石塊 ) 를 꾀어서 한의 유주 ( 幽州 ) · 병주 (幷州 ) 두 주 ---지금의 직예 · 산서 두 성을 침략하게 하고 , 그 뒤를 이어서 고구려의 군사로 한을 치려고 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죽으니 나이 113 살이었다 . 신대왕이 친히 가서 통곡을 하고 왕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엔 신대왕 4 년 ( 기원 l68 년 ) 에 , “한의 현도태수 경림 ( 耿臨 ) 이 와 침범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으므로 , 왕이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하였다 .”고 하고 , 신대왕 5 년 ( 기원 l69 년 ) 에 , “왕 이 대가 ( 大加 ) 우거와 주부 ( 主簿 ) 연인 ( 然人) 등을 보내서 요동태수 공손도 ( 公孫度 ) 를 도와 부산 ( 富山 ) 의 적을 치게 하였다 . ”고 하고 , 8 년 ( 기원 172 년 ) 에 , “한이 대병 ( 大兵 ) 으로 우리를 공격해왔으므로--- 명림답부가 좌원 ( 坐原 ) 까지 추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려 한의 군사가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고 하였는데 , 앞의 두 기록은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 뒤의 한 기록은 고기 ( 古記 ) 에서 뽑아 쓴 것이다 . 그러나 조선 사략 ( 朝鮮史略 ) 에는 , “신대왕 5 년에 한의 현도태수 경림이 대병으로 침략해오므로 ,명림답부가 좌원 ( 坐原 ) 에서 이를 크게 격파하여 ---.”라고 하여 그 연조가 후한서의 , “영제 ( 靈帝 ) 건녕 ( 建寧 ) 2 년 ( 기원 169 년 ) 에 현도태수 경림---백고 ( 伯固 ) 가 항복하였다 ( 靈帝 建寧二年玄도太守耿臨---伯固降 ). ”고 한 것과 부합하므로 경림의 침략군이 명림답부에게 패하였음이 분명한데 , 김부식이 이것을 그릇 두 번의 사실로 나누어 , 하나는 신대왕 4 년의 또 하나는 신대왕 8 년의 조항에 기록한 것이고 , 공손도는 삼국지에 의하면 , 한의 헌제 ( 獻帝 ) 영평 ( 永平 ) 원년에 비로소 요동태수가 되었는데 , 영평 원년은 기원 l90 년이요 , 신대왕 5 년에서 20 년 후이니 , 신대왕이 20 년 후에 요동태수 공손도를 도울 수 없었음이 또한 분명한데 ,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한 김부식이 그대로 신대왕 본기 가운데 잘못 기록한 것이다 . 그러나 패해 달아나 경림을 크게 이겼다고 하고 , 연대도 닿지 않는 공손도를 신대왕의 종주국으로 기록하였으니 , 이런 곳에서 지나사의 거짓이 많음을 보겠거니와 , 동국통감 ( 東國通鑑 ) 에는 현도태수 경림이 침략해왔다가 명림답부에게 패한 것을 신대왕 8 년의 일로 기록하여 또 조선사략과 다르다 . 대개 이조 초기에는 삼한고기 ( 三韓古記 ) 해동고기 ( 海東古記 ) 등 몇 가지가 있어 삼국사기 이외에도 참고할 만한 책이 더러 있었는 데 , 그 고기 ( 古記 ) 들이 각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 

제 6 장 乙巴素(을파소)의 엽적 

1.王后의 정치 간여와 左可慮(좌가려)의 난 

기원 179 년에 신대왕 ( 新大王 ) 이 죽고 고국천왕 ( 故國川王 ) 이 즉위하여서는 , 왕후 우씨 ( 于氏 : 椽那于素의 딸 ) 의 뛰어난자색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 왕후의 친척 어비류 ( 於卑留 ) 는 `팔치'가 되고 , 좌가려 ( 左可慮 ) 는 `발치'가 되어 정권을 마음대로 하니 그 자제들이 교만하고 난폭하여 남의 아내와 딸을 빼앗아다가 첩 으로 삼고 , 아들과 조카들을 잡아다가 종을 만들며 남의 좋은 밭과 훌륭한 집을 빼앗아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 왕이 이것을 알고 죄주려고 하니까 , 좌가려 등이 마침내 연나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 왕이 기내 ( 畿內 ) 의 군사와 말을 징집하여 이를 쳐 평정하고 , 왕후 친족의 정치 간여를 징계하고 , 4 부 ( 部 ) 대신에게 조서를 내려 , “근자에 벼슬을 총애로써 임명하고 지위가 덕으로써 승진하지 못하여 , 덕이 백성에 행해져서 왕실을 움직였으니 이는 다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다 . 너희 4 부는 각기 그 관하의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 .”고 하였는데 , 4 부가 의논하고 동부의 안류 ( 晏留 ) 를 천거하였다 . 

2.을파소의 등용

고국천왕 ( 故國川王 ) 이 안류를 써서 국정을 맡기려고 하니 안류가 자기의 재능은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하고 , 서압록곡 ( 西鴨綠谷 ) 의 처사 ( 處士 ) 을파소 (乙巴素 ) 를 처거하였다 .

을파소는 유류왕 때의 대선 을소 (乙素 ) 의 후손인데 , 고금의 치란 ( 治亂 ) 에 밝고 , 민간의 이로움과 폐단을 잘 알고 학식이 넉넉하였으 나 , 세상에서 알아주는 자가 없으므로 초야에서 밭갈아 살아가고 벼슬할 뜻이 없었는데 , 고국천왕이 말을 낮추고 후한 예로 맞아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고 , 중외대부 ( 中畏大夫 ) 를 삼아 `일치 '의 작위를 더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

을파소는 자기가 받은 벼슬과 작위가 오히려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없으므로 굳이 사양하고 , 다시 다른 어질고 유능한 이를 구하여 높은 지위를 주어 큰 사업을 성취하기를 정하였다 . 왕이 그의 뜻을 알고 을파소로 `신가'를 삼아서 모든 관리의 위에 있어 국정을 처리하게 하였다 . 여러 신하들은 을파소가 초양의 한미 ( 寒微 ) 한 처사로서 하루아 침에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시기하여 비난이 자자하니 , 왕이 조서를 내려 “만일 `신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일족을 멸할 것입니다 .” 하고 더욱 을파소를 신임하였다 . 을파소는 자기를 알아주고 크게 대우해주는 데 감격하여 지성으로 국정을 처리하였다 . 상과 벌을 신중히 하고 , 정령 ( 政令 ) 을 밝혀 나라 안이 크게 다스려져서 , 고구려 9 백 년 동안 첫째가는 어진 세상으로 일컬어졌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 “고국천왕 ( 혹은 國襄이라 함 ) 의 이름은 남무 ( 男武 : 혹은 伊夷謨 ) 로 ,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 ( 拔奇 ) 는 불초하다고 , 함께 이이모를 세워서 왕을 삼았는데 , 한의 헌제 건안 초에 발기는 자기가 형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소노가 ( 消奴加 ) 와 함께 각각 딸린 민호 ( 民戶 ) 3 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 沸流水 ) 상류에서 살았다 ( 故國川王 ( 或云國襄) 諱 男武 ( 或云伊夷謨 ) 新大王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不得立 興消奴加各將不戶 三萬餘口 지公公孫康 還住沸流水上 ). ”고 하였으나 , 이는 김부식이 삼국지 고구려전의 본문을 그대로 떠다가 옮겨 쓴 것으로 , 발기 ( 拔奇 ) 는 곧 산상왕 ( 山上王 ) 본기 ( 本紀 ) 가운데의 발기 ( 發奇 ) 요 , 이이모 ( 伊夷謨 ) 는 곧 산상왕 연우 ( 延優 ) 이니 , 삼국지의 작자가 발기 ( 發奇 ) · 연우 ( 延優 ) 두 사람을 신대왕의 아들로 잘못 전한 것인데 , 김부식이 경솔하게 믿고 고국 천왕 남무 ( 男武 ) 를 곧 이이모라 하였고 , 남무를 곧 발기 ( 技奇 ) 의 아우라고 하였으니 ,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 삼국지 공손도전 ( 公孫度傳 ) 에 의하면 , 공손강의 아버지 공손도가 한의 헌제 초평 원년 ( 기원 190 년 ) 에 요동태수가 되어서 건안 9 년 ( 기원204년 ) 에 죽고 , 공손강이 뒤를 이었는데 , 한의 헌제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 년이니 , 고국천왕 즉위 초에는 공손강은 고사하고 그 아버지 공손도도 아직 요동태수를 꿈꾸지 못한 때인데 , 김부식이 이를 고국천왕 즉위 원년의 일로 기록하였으니 ,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 앞에서 말한 신대왕 5 년에 , “공손도를 도와 부산 ( 副山 ) 의 적을 쳤다 ( 助---公孫度 討富山賊 ). ”고 한 것과 아울러 보면 , 김부식이 곧 공손도를 어느 때의 사람인 줄을 모른 듯하니 또한 기괴한 일이다 .

                                                                                   제6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