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편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제 1 장 열국의총론  

  1.列國의 연대의 正誤  

삼조선이 무너지고 신수두님 ·신한·말한·불구래 등의 참람 ( 僭濫 ) 한 칭호를 일컫는 자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 열국 분립의 판국을 만들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열국사 ( 列國史 ) 를 말하려면 전사 ( 前史 ) 에서 열국의 연대를 줄여버렸으므로 이제 그 연대부터 말 해야겠다 . 어찌하여 열국의 연대가 줄어졌다 하는가 ?  먼저 고구려 연대가 줄어진 것부터 말하리라 . 고구려가 신라 시조 혁거세 ( 赫居世 ) 21 년 , 기원전 37 년에 건국하여 신라 문무왕 ( 文武王 ) 8 년 ( 기원 668 년 ) 에 망하니 나라를 누리기를 도합 705 년이라고 일반 역사가들이 적어왔다 .

그러나 고구려가 망할 때에 , 9 백 년에 마치지 못한다 ( 不及九百 年 ). ”라고 한 비기 ( 秘記 ) 가 유행했는데 , 비기가 비록 요망한 글이라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비기가 인심 동요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 이때 ( 문무왕 8 년 ) 에 고구려의 연조가 8 백 몇십 년 되었음이 명백하므로 , 본기 ( 本紀 ) 의 705 년이 의문됨이 그 하나요 , 고구려 본기로 보면 광개 토왕이 시조 추모왕 ( 鄭후王 ) 의 13 세손밖에 안 되는데 광개토왕의 비 문에 , “ 17 세손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에게 전하였다 ( 傳之十七世孫 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고 한 문구에 의거하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3 세손이 아니라 , 17 세손이다 . 이같이 세대가 빠진 본기라 , 그 705 년 이라고 한 연조는 믿을 수 없음이 그 둘이요 , 본기로써 상고하면 고구 려 건국이 위우거 ( 衛右渠 ) 가 멸망한 지 72 년만이지마는 , 북사 ( 北史 ) 고려전 ( 高麗傳 ) 에는 막래 ( 莫來 ) 가 서서 부여를 쳐 크게 깨뜨리고 이를 복속시켰는데 , 한 ( 漢 ) 의 무제 ( 武帝 ) 가 조선을 토멸하고 사군 ( 四郡 ) 을 둘 때에 고구려를 현 ( 縣 ) 이라고 하였다 . 막래는 해동역사 ( 海東繹史 ) 에 , “모본 ( 慕本 ) 의 잘못인가 ? ” 하였으나 , 막래는 `무뢰'로 읽을 것이니 , 우박〔雹 〕이라는 뜻이고 , 신 ( 神 ) 이라는 뜻이다 .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의 이름 `무휼 (憮恤 ) '과 음이 같을 뿐더러 , 본기에도 동부여를 정복한 이가 곧 대주류왕이니 , 막래는 모본왕 ( 幕本王 ) 이 아니라 대주류왕일 것이요 , 막래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뒤에 한나라 무제가 사군을 설치하였으니 , 고구려 건국이 사군 설치보다 약 백 몇십년 전이 될 것이 의심없음이 그 셋이다 . 고구려 당시의 비기 ( 秘記 ) 와 그 자손 제왕의 건립으로 된 비문이 먼저 분명히 증명하고 , 비록 외국인이 전해 들은 기록이지마는 북사 ( 北史 ) 가또한 증명하니 , 고구려 연대의 백 몇십 년 줄어들었음이 더욱 확실하다 .

안순암 ( 安順庵 : 安鼎福 ) 선생이 고구려 족자 ( 族子 ) 인 안승 ( 安勝 ) 을 봉한 신라 문무왕의 말에서 , “햇수 거의 8 백년 ( 年將八百年 ) ”이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연조가 줄어 들었음을 일정하였으나 , 실은 8 백을 9 백으로 하는 게 옳을 것이다 . 대개 고구려의 연대를 줄인 뒤에 9 백을 8 백으로 고쳐 고구려의 향국 ( 享國 ) 이 705 년이라는 위증을 만든 것이다 . 어찌하여 고구려의 연대가 줄어들었는가 ? 이는 고대 건국의 선후 ( 先後 ) 로 국가의 지위를 다투는 풍기 ( 風氣 : 鄒牟와 松讓이 서울 세운 앞뒤를 다툰 따위 ) 가 있으므로 , 신라가 그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 보다 뒤짐을 부끄러이 여겨 , 두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기록상의 세대 와 연조를 줄여 모두 신라 건국 이후의 나라로 만든 것이고 , 동부여 · 북부여 등의 나라는 신라와 은혜나 원수가 없는 앞선 나라이지만 이미 고구려의 연조를 백 몇십 년이나 줄였으니 , 사실의 관계상 고구려 · 백제의 부조 ( 父祖 ) 뻘인 동부여의 연대와 고구려 ·백제의 형제뻘인 가라 ( 加羅 ) ·옥저 ( 沃沮 ) 등의 나라의 연대까지 줄여버린 것이다 . 그래 서 이제 전사 ( 前史 ) 에 보인 고구려 건국 원년에서 백 몇십 년을 넘어 , 기원전 190 년경의 전후 수십 년 동안을 동부여 ·북부여와 고구려의 분립한 시기로 잡고 , 그 이하 모든 나라도 같은 시기로 잡아 열국사 ( 列 國史 ) 를 서술하고자 한다 .

2. 열국의 강역 ( 列國의 疆域 ) 

여러 나라의 연대만 줄였을 뿐 아니라 , 그 강역도 거의 다 줄여서 , 북쪽의 나라가 수천 리를 옮겨 남쪽으로 온 것이 한둘이 아니다 . 강역은 또 어찌하여 줄여졌는가 ? 신라 경덕왕 ( 景德王 ) 이 북쪽의 땅을 잃고 , 그 북쪽의 옛 지명과 고적을 남쪽으로 옮김이 첫째 원인이 되고 고구려가 쇠약해져서 압록강 이북을 옛 땅으로 인정하지 못하여 전대 ( 前代 ) 의 지리를 기록할 때에 북쪽의 나라를 또한 남쪽으로옮긴 것이 많음이 둘째 원인이 되어 , 조선의 지리 전고 ( 典故 ) 가 말할수 없이 뒤바뀌어 , 비록 근세의 한구암 ( 韓久庵 : 韓百謙 ) ·안순암 등 여러 선유 의 수정을 거쳐서 얼마쯤 회복이 되었으나 , 열국 시대의 지리는 그 퇴축 ( 退縮 ) 됨이 전과 마찬가지다 . 이제 그 대략을 말할 것이다 .

첫째는 부여다 . 신조선이 최초에 세 개의 부여로 나뉘었으니 , 하나 는 북부여이다 .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하였다 . 삼국지에 “현도의 북 쪽 천 리 ( 玄0x08 graphic之北千里 ) ”라 하였으니 , 지금의 합이빈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개원 ( 開原 ) 이라고 하였다 . 또 하나는 동부여인데 , 동부여는 갈사나 ( 曷思那 ) 에 도읍하였다 . 대무신왕 ( 大武神王 ) 이 동부여를 칠 때 , `북벌 ( 北伐 ) 한다 . '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북 --지금의 훈춘 ( 揮春 ) 등지가 동부여인데 , 선유들은 지금의 강릉 ( 江陵) 이라고 하 였다 . 다른 하나는 남부여다 .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뒤에 동부여가 둘로 나누어져 하나는 옛 갈사나에 머물렀으니 , 곧 남부여다 . 동 부여는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투항하매 , 국호가 없어지고 남부여는 문자왕 ( 文姿王 ) 3 년 ( 기원 494 년 ) 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 동부 여 ·남부여는 곧 함흥인데 , 선유들은 그 강역을 모를 뿐 아니라 , 그 명칭조차 몰랐다 .

둘째는 사군 ( 四郡 이다 . 위만 ( 衛滿 ) 이 동으로 건너온 패수가 위략 의 만반한 ( 滿潘汗 ),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 選東郵 ) 문번한 ( 沈睡규 ), 곧 지금의 해성 ·개평 등지이니 헌우란 ( 0x08 graphic  ) 이 옳다 . 한나라 무제 ( 武帝 ) 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 부근 , 위만의 옛 땅이니 , 그가 설치한 사군만 삼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한 것인 데 , 선유들은 매양 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강원 ·함경 등 여러 도와 고구려의 서울인 지금의 만주 환인 ( 桓仁 ) 등지에서 찾았다 .

셋째는 낙랑국 ( 樂浪國 ) 이다 . 낙랑국은 한 ( 漢 ) 의 낙랑군 ( 樂浪郡 ) 과 각각 다른 , 지금의 평양에 나라를 세운 것인데 선유들은 이를 혼동하였고 , 그 밖에 고구려 ·백제의 초대의 서울과 신라·가라의 위치는 선유들의 수정한 것이 대략 틀림이 없으나 , 주군 ( 州那 ) 혹은 전쟁을 한 지점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에 옮겨다 설치한 지명을 그 대로 써서 착오가 생겼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교정하여 열국사를 서술해 나가고지자 한다 .  

제 2 장 列國의 分立  

1. 東扶餘의 分立  

1) 解夫婁(해부루)의 東遷(동천)과 解幕漱(해모수)의 일어남

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의 네 나라는 신조선의 판도 안에서 나라를 세웠다 . 그러나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 시 나누어져서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 부여는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라는 왕조가 없이 신조선으로 부터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 이는 상고할 길이 없거니와 , 신조선이 흉노 모돈 ( 冒頓) 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 경이요 , 동 ·북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00 년경 이니 , 나중의 설이 혹 근사하지 않을까 한다 .

전사 ( 前史 ) 에 동 ·북부여가 분립한 사실을 기록하여 ,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다니며 기도하여 아들 낳기를 구하다가 곤연 ( 鯤淵 : 鏡泊湖 경박호 ) 에 이르러서는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뒤집으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는지라 왕이 말하기를 , “이는 하늘이 주신 내 아들이다 .” 하고 데려다 길러서 이름을 금와 ( 金蛙 ) 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 그 뒤 얼마만에 상 ( 相 ) 아란불 ( 阿蘭弗 ) 이 왕에게 , “요사이 하늘이 저에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는 장차내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려고 하니 , 너희들은 동해변의 가섭원 ( 迦葉原 ) 으로 가거라 , 그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 되느니라고 하더이다 .” 하고 서울을 옮기기를 청하므로 , 왕이 그의 말을 쫓아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고 고도 ( 故都 ) 에는 천제 ( 天帝 ) 의 아들 해모수 ( 解募漱 ) 가 오룡거 ( 五龍車 ) 를 타고 , 종자 백여 명은 흰 고니〔白鳥〕를 타고 웅심산 ( 熊心山 , 일명 阿斯山 , 또 일명은 鹿山이니 지금 哈爾濱의 宗達山 ) 에 내려와서 , 채운 ( 彩雲 ) 이 머리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울리기를 10 여일 만에 , 해모수가 산 아래로 내려와 , 새깃의 관을 쓰고 용광 ( 龍光 ) 의 칼을 차고 , 아침에는 정사 ( 政事 ) 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 사람들이 천제의 아들이라 일컬었다 .”고 하였다 .

어떤 이는 ,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라 믿을 수 없다 .”고 하지마는 , 어느 나라이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 후세 역사가들이 그 신화속에 서 사실을 캐내게 되는 것이다 . 이를테면 ,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 렸다' `하늘이 아란불에게 내려왔다 . '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 에서 내려왔다 . '고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 해부루가 남의 집 사생 아인 금와를 주워다가 태자를 삼았음도 사실이요 ,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화에 의하여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요 ,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일컫고 고도 ( 故都 ) 에 웅거하였음도 사실이니 , 통털어 말하면 우리 북부여의 분립은 역사상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

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 이것이 북부여인이나 동부여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 한갓 고구 려인이 그 시조 추모왕 ( 鄒牟王 ) 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 이므로 겨우 해부루 ·해모수 두 대왕이 동 ·북부여로 분립한 약사를 말했을 뿐이고 ,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의 내력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 하였음이 그 하나요 , 또한 그나마 고구려인이 기록한 원문이 아니라 신라 말엽의 한학자인 불교승이 개찬 ( 改撰 ) 한 것이므로 , 신가를 고구려의 이두문대로 `상가 ( 相加 ) '라 쓰지 않고 한문의 뜻대로 상 ( 相 ) 이라 썼으며 ,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갈사나 ( 曷思那 ) '라 쓰지 않고 불경 ( 佛經 ) 의 명사에 맞추어 가섭원 ( 加葉原 ) 이라 써서 본래의 문자가 아님이 그 둘이다 .

당시의 제왕 ( 帝王 ) 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 ( 祭司長 ) 이며 , 당시의 장상 ( 將相 ) 은 장상인 동시에 무사 ( 巫師 ) 요 , 복사 ( 卜師 ) 였으니 , 해부루는 제사장 ---대단군의 직책을 세습한 사람이고 아란불은 강신술 ( 降神術 ) 을 가진 무사와 미래를 예언하는 복사의 직책을 겸한 상가 ( 相加 ) 였다 . 대단군과 상가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지만 , 신조선의 습관엔 내우외환 같은건 물론이요 , 천재지변 같은 것도 그 허물이 대단군에게로 돌아간다 ( 삼국지에 홍수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고 오곡이 잘 익지 아니하면 곧 그 허물이 왕에게로 돌아가서 왕을 바꿔야 한다고 하고 , 혹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水早不調 五穀不登 輒歸輒於 或 言當易 或言當殺 ) 고 하였다 .

천시 ( 天時 ) 나 인사 (人事 ) 에 불행이 있으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치 않고 내쫓았는데 , 이때가 흉노 모돈과 전쟁을 치른지 오래지 않았으니 , 아마 패전의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인민의 신망이 짧어져서 대단군의 지위를 보전할 수 없으므로 아란불과 모의해 갈사나 --지금의 훈춘 등지로 달아나서 새 나라를 세운 것이고 , 해모수는 해부루 와 동족이며 고주몽 ( 高朱蒙 ) 의 아버지다 . 삼국유사 왕력편 ( 王歷篇 ) 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 대개 해모수가 해부루의 동천 ( 東遷 ) 을 기회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 스스로 일걷고 왕위를 도모한 것이고 , 부여는 불 곧 도성 ( 都城 ) 혹은 도회를 일컬음이므로 , 해부루가 동부여라 일컬으매 , 해모수는 북부여라 일컬었을 것이니 , 북부여라는 명칭이 역사에 빠졌으므로 최근 선유들이 두 가지를 구별 하기 위하여 비로소 왕 노릇한 부여를 북부여라 일컬었다 .  

2) 南北曷思·南北 沃沮의 두 東扶餘의 분립(남북갈사·남북옥저의 두 동부여의 분립)

해부루가 갈사나 --지금의 훈춘에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 갈사나란 무엇인가 ? 우리 옛말에 숲을 `갓' 혹은 `가시'라 하였는데 , 고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만주 길림의 동북부와 소련 연해주의 남쪽 끝에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의 바다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을 `가시라'라 일컬었으니 , `가시라'란 삼림국 ( 森林國 ) 이라는 뜻이다 .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갈사국 ( 曷思國 ) ·가슬라 ( 加瑟羅 ) ·가서라 ( 迦西羅 ) ·아서량 ( 阿西良 ) 등 으로 적는데 ,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고 , 또 혹`가섭원기 ( 迦葉原記 ) '라고도 하였으니 , 이는 대각국사 ( 大覺國師 ) 의 삼국사 ( 三國史 ) 에 보인 것이다 .

지나사에서는 `가시라'를 `옥저 ( 沃沮 ) '라고 적었는데 ,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에 의하면 옥저는 `와지'의 번역이고 , `와지'는 만주어의 숲이니 , 예 ( 濊 ) 곧 읍루 ( 輯婁 ) 는 만주족의 선조요 , 읍루가 당시 조선 열국 중 말〔言〕이 홀로 달라서 삼국지나 북사에 특기하였으니 , 우리의 `가시라'를 예족 ( 濊族 ) 은 `와지'라 불렀으므로 지나인들은 예어를 번역하여 옥저라고 한 것이다 .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 ( 北曷思 ) 라 일컫고 , 이남을 남갈사 ( 南曷思 ) 라 일컬었는데 , 북갈사는 곧 북옥저 ( 北沃沮 ) 요 , 남갈사는 곧 남옥저 ( 南沃沮 ) 이니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된다 .

고사에 남·북옥저를 다 땅이 기름지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 지금의 함경도는 메마른 땅이니 , 혹 옛날과 지금의 토질이 달랐던 것이 아닌가한다 . 두 `가시라'의 인민들이 순박하고 부지런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가 다 아름다우므로 ,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 ( 豪民 ) 들이 이를 착취하여 어물과 농산물을 천 리 먼 길에 갖다 바치게 하고 ,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다가 비첩 ( 婢妾 ) 을 삼았다고 한다 .

해부루가 북 ` 가시라' --지금의 훈춘으로 옮겨가 동부여가 되어 , 아들 금와를 거쳐 손자 대소 ( 帶素 ) 에 이르러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에게 패하여 죽고 , 아우 모갑 ( 某甲 ) 과 종제 ( 從弟 ) 모을 ( 某 乙 ) 이 나라를 다투어 모을은 구도 ( 舊都 ) 에 웅거하여 북갈사 ( 北曷思 ) 혹은 남동부여 ( 南東扶餘 ) 라 하였는데 , 그 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말하려니와 지금까지의 학자들이 , a) 동부여가 나뉘어 북동 ·남동의 두 부여로 되었음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만 기록하고 , b) 옥저가 곧 갈사 ( 曷思 ) 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를 찾으려 하고 , c)북동 ·남 동의 두 갈사가 곧 남 ·북의 두 갈사 ( 兩加瑟羅 ) 요 , 남북의 두 갈사가 곧 남북의 두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 ·갈사 ·옥저를 각각 다른 세 지방 으로 나누고 , d) 강릉 ( 江陵 ) 을 `가시라' --기슬나 ( 加瑟那 ) 라 함을 신라 경덕왕이 북쪽 땅을 잃은 뒤에 옮겨 설치한 고적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기슬나가 동부여의 옛 서울이라고 하였다 . 그래서 지리가 문란하고 사실이 흔란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거니와 , 이제 갈사 ( 曷思 ) ·가슬 ( 加瑟) ·가섭 ( 迦葉 ) 이 이두문으로 다 같이 `가시라'임 을 알고 , 대소의 아우 모갑과 그 종제 모을이 나뉘어 있는 두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서 두 `가시라'가 곧 남·북 옥저임을 알고 ,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남으로 달아났다 ( 南奔 ). '는 말과 , 주류왕 ( 朱留王 ) 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 `북쪽을 쳤다 ( 北伐 ). '는 말로써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아서 위와 같이 정리하였다 .

3)北扶餘의 문화

북부여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가 도읍을 세운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국 ( 黃龍國 ) 이 고구려 유류왕 ( 備留王 ) 본기에 한번 보이고는 다시 북부여에 대한 말이 우리 조선인의 붓끝으로 전해진 것이 없고 , 만일 전해진 것이 있다 하면 다 지나사에서 초록한 것 이다 . 북부여의 서울은 `아스라' --부사량 ( 扶斯樑 ) 이니 , 곧 대단군 왕검의 삼경 ( 三京 )-- 세 왕검성의 하나요 , 지금의 소련령 ( 領 ) 우수리[烏蘇里〕는 곧 `아스라'의 이름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 그 본래의 땅은 지금의 합이빈이니 , 망망한 수천 리의 평원으로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되고 , 종횡으로 굴곡 ( 屈曲 ) 한 송 ( 松 : 古名 아리라 ) 이 있어 교통의 편의를 주고 , 인민이 부지런하고 굳세며 , 대주 ( 大珠 ) ·적옥 ( 未玉 ) 의 채굴과 그림 비단과 수놓은 비단의 직포와 여우 ·삵·원숭이 ·담비 등의 가죽을 외국에 수출하며 , 성곽 ·궁설의 건축과 , 창고 저축의 많음이 다 옛 서울의 문명을 자랑했다 .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홍수 다스라는 법을 가르쳤다 운운하는 금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보관되어 있고 , 신지 ( 神志 ) 라 일컫는 이두문의 역사류며 , 풍월 ( 風月 ) 이라 일컫는 이두문의 시가집 ( 詩歌集 ) 도 대개 이 나라에 수집해 있었다 .

해모수 이후에 북부여는 예와 선비를 정복하여 한때 강국으로 일컬어 지다가 뒤에 예와 선비가 반 ( 叛 ) 하여 고구려로 돌아가자 , 국세가 마침내 쇠약해져서 조선 열국의 패권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렸다 .

2. 고구려의 일어남  

1) 鄒牟王(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 추모 ( 鄒牟 : 혹 朱蒙 ) 는 천생으로 용맹과 힘과 활 쏘는 재주를 타고나서 , 과부 소서노 ( 召西奴 ) 의 재산으로 영웅호걸을 불러 모아 교묘하게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 하늘의 알에서 강생 ( 降 生 ) 하였다 자칭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 안으로 열국의 신임을 받아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 그의 기이한 행적의 이야기를 지나 각지에 퍼뜨려서 그 제왕과 인민들이 교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으므로 , 신라 문무왕 ( 文武王 ) 은 , `남해에 공을 세우고 , 북산에 덕을 쌓았다 ( 立功南海 積德北山 ). ' 하는 찬사를 올렸고 , 지나 2 천 년 이래의 유일한 공자 반대자인 동한 ( 東漢 ) 의 학자 왕충 ( 王充 ) 이 그 사적을 기록함에 이르렀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기원전 58 년이 출생한 해요 , 기원전 37 년이 그 즉위한 해이지만 , 이는 줄어든 연대라 의거할 것이 못 되고 , 추모 ( 鄒牟 ) 가 곧 해모수의 아들이니 기원전 200년 경 동 · 북부여가 분립하던 때가 출생한 때일 것이고 , 위만과 같은 때 일 것이다 .

처음에 아리라〔松花江〕의 부근에 있는 장자 ( 長者 ) 가 , 유화 ( 柳花 ) · 훤화 ( 萱花 ) ·위화 ( 葦花 ) 의 세 딸을 두었는데 , 다 절세의 미인이요 , 유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 북부여왕 해모수가 나와 다니다가 유화를 보고 놀라 사랑하여 야합해서 아이를 배었다 . 그러나 이때 왕실은 호족과만 결혼하고 서민과는 결혼을 하지 아니했으므로 해모수가 그 뒤에 유화를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는데 ,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되기를 두 번 , 세 번 간곡히 빌어서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서 결혼하고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해 , 그 집의 머슴이 되어 3 년의 고역을 치르고야 딴 살림을 차려 자유로운 가정이 되었으므로 유화의 실행이 발각되매 그 부모가 크게 노하여 유화를 잡아 우발수 ( 優渤水 ) 에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 그러나 어떤 어부가 그녀를 건져 동부여왕 해금와 ( 解金輕 ) 에게 바쳤다 .

금와왕이 유화의 아름다운 자색을 사랑하여 후궁에 두어 첩을 삼았는데 , 오래잖아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와 야합한 결과였다 .

금와왕이 유화를 힐문하니 유화가 이를 , “해 그림자에 감응하여 낳은 천신 ( 天神 ) 의 아들이고 , 자기가 아무 잘못을 범한 일이 없다 .”고 했다 . 금와왕이 그 말을 믿지 않고 ,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우리에 넣어도 보고 말에 밟혀 죽으라고 길에 내던져도 보고 , 산짐승의 밥이 되라 하여 깊은 산속에 버려도 보았으나 , 다 아무 소용이 없으므 로 이에 유화에게 거두어 기르기를 허락하였다 . 그 아이가 자라니 그 또래에서 기운이 뛰어나고 활 잘 쏘기가 짝이 없으므로 이름을 추모 ( 鄒牟 ) 라고 하였다 .

위서 ( 魏書 ) 에는 추모를 주몽 ( 朱蒙) 이라 쓰고 ,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컬은 것이라고 풀이하였으며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에는 ,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奔阿〕'이라 하니 , 주몽은 곧 `주릴무얼'이다 . '라고 하였다 .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으며 , 문무왕 ( 文武王 ) 의 조서 ( 詔書 ) 에는 `중모 ( 中牟 ) '라 하고 `주몽'이라고 하지 않았다 . 주몽이라 하였음은 지나사에 전해오는 것을 신라의 문사들이 그대로 써서 고구려 본기에 올리게 된 것인데 추모 · 중모는 `줌' 혹은 `주모'로 읽을 것이니 , 이는 조선어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다 . 이는 예어 ( 濊語 )-- 만주족 시대의 말로 , 지나사의 주몽은 예어를 말한 것이니 , 원류고에 말한 바가 이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 이 책에서는 비문에 따라 추모 ( 鄒牟 ) 라고 한다 .

금와왕이 아들 7 형제를 두었는데 , 맏아들이 대소이다 . 대소가 추모의 재주를 시기하여 왕에게 권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 늘 유화의 주선으로 화를 면했다 . 추모가 19 살이 되자 대궐에서 기르는 말 먹이는 일을 맡아보았는데 말을 다 살찌고 튼튼하게 잘 먹였으나 오직 준마 하나를 골라 혀에 바늘을 꽂아놓아 말이 먹지 못해서 날로 여위어 졌다 . 왕이 말들을 돌아보고는 추모의 말 잘 먹인 공을 칭찬하고 , 그여윈 말을 상으로 주었다 . 추모는 바늘을 뽑고 잘 길러서 신수두의 10 월 대제 ( 大祭 ) 에 타고나가 사냥에 참여하였는데 , 왕은 추모에게 겨우 화살 하나를 주었지마는 , 추모는 말을 잘 달리고 활을 잘 쏘아 그가 쏘아 잡은 집승이 대소 7 형제가 잡은 것보다 몇 갑절이 더 많았다 . 이 에 대소는 더욱 그를 시기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음모를 꾸였다 . 추모가 이를 알고 예씨 ( 禮氏 ) 에게 장기들어 표면으로 가정생활에 안심하고 있음을 보이고 속으로는 은밀히 오이 ( 烏伊 ) ·마리 ( 摩離 ) ·협부 ( 0x08 graphic父 ) 세 사람과 공모하여 비밀히 어머니 유화에게 작별을 고하고 아내를 버리고는 도망하여 졸본부여 ( 卒本扶餘 ) 로 갔는데 , 이때 추모의 나이 22 살이었다 .

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 ( 召西奴 ) 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 ( 延陀渤 ) 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 해부루왕의 서손 ( 庶孫 ) 우태 ( 優台 ) 의 아내가 되어 비류 ( 沸流 ) ·온조 ( 溫祚 )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 나이 37 살이었다 .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 ( 扶芬奴 )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 흘승골 ( 0x08 graphic升骨 ) 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 `가우리'는 이두자 ( 吏讀字 ) 로 고구려 ( 高句麗 ) 라 쓰니 , 중경 ( 中京 ) 또는 중국 ( 中 國 ) 이라는 뜻이었다 .

졸본부여의 왕 송양 ( 松讓 ) 과 활쏘기를 겨루어 이를 꺾고 이어 부분노를 보내 그 무기고를 습격해서 빼앗아 마침내 그 나라를 항복받고 , 부근의 예족 ( 濊族 ) 을 내쫓아 백성들의 폐해를 없앴으며 , 오이 ( 烏 伊 ) ·부분노 등을 보내어 태백산 ( 太白山 ) 동남쪽의 행인국 ( 荇人國 : 지점 미상 ) 을 토멸하여 성읍 ( 城邑 ) 을 삼고 , 부위염 ( 扶慰0x08 graphic) 을 보내어 동부여를 쳐서 `북가시라'의 일부분을 빼앗으니 <광개토왕비문에 , “동 부여의 옛 것이 추모왕의 속민이 되었다 ( 東扶餘 舊是 鄒牟王 屬民 ) ”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킴인 듯 >, 이에 고구려가 섰다 .
전사 ( 前史 ) 에 왕왕 송양 ( 松讓 ) 을 나라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 이상 국집 ( 李相國集 ) 동명왕편 ( 東明王篇 ) 에 인용한 구삼국사 ( 舊三國史 ) 를 상고해보면 비류왕 송양 ( 沸流王松讓 ) 이라고 하였으니 , 비류는 곧 부여로 졸본부여를 일컬은 것이므로 , 송양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졸본 부여왕의 이름이다 . 또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녀에게 장기들었는데 , 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에게 장가 든 사람은 추모의 아들 유류 ( 備留 ) 요 , 추모가 장가든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다 . 추모왕을 본기 ( 本紀 ) 에 `동명성왕 ( 東明聖王 ) '이라 하였으나 , 동명 ( 東明 ) 은 `한몽'으로 읽을 것이니 , `한몽'이란신수두 대제 ( 大祭 ) 의 이름 이다 . 추모왕을 신수두 대제에 존사 ( 尊祀 ) 하므로 한몽 --동명이라는 칭호를 올린 것이고 , 성왕의 성 ( 聖 ) 은 `주무'의 의역 ( 義譯 ) 이다 .

2) 東扶餘와 고구려의 알력

추모왕 다음으로 아들 유류왕 ( 儒留王 ) 이 왕위를 잇고 , 유류왕 다음 에 그 아들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이 왕위를 이었다 .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 ( 琉璃明王 ) 유리 ( 類利 ) 이니 , 유류 ( 儒留 ) ·유리 ( 琉璃 ) ·유리 ( 類 利 ) 는 다 `누리'로 읽을 것으로 세 ( 世 ) 라는 뜻이고 명 ( 明 ) 이라는 뜻이 요 , 대주류왕은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 大武神王無恤 ) 이니 , 무 ( 武 ) · 주류 ( 朱留 ) ·무홀 ( 無恤 ) 은 다 `무뢰'로 읽을 것으로 우박〔雹〕의 뜻이고 신 ( 神 ) 의 뜻인데 , 이제 유리 ( 琉璃 ) 와 명 ( 明 ) 은 시호로 쓰고 , 유리 ( 類利 ) 는 왕의 이름을 쓰며 , 무 ( 武 ) 와 신 ( 神 ) 은 시호로 쓰고 , 무홀 ( 無恤 ) 은 이름으로 쓴 건 본기의 망령된 판단이다 . 이제 여기서는 비문을 쫓아 유리 ( 琉璃 ) 를 유류 ( 儒留 ) 로 , 대무신 ( 大武神 ) 을 대주류 ( 大朱留 ) 로 쓴다 .

유류왕 때에 동부여가 강성하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 ( 帶素王 ) 은 왕위를 이어받자 고구려에게 신하 노릇하기를 요구하고 볼모[質子〕를 보내라고 하여 , 왕이 그대로 하려고 하다가 두 태자를 희생하기에 이르렀다 . 첫째 태자는 도절 ( 都切 ) 인데 , 유류왕이 동부여에 볼모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 도절이 듣지 아니하자 왕이 크게 노했으므로 도절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 둘째 태자는 해명 ( 解明 ) 인데 그는 용맹이 뛰어났었다 . 유류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해 국내성 ( 國內 城 )-- 지금의 집안현 ( 輯安縣 ) 으로 서울을 옮기니 , 해명이 이를 겁약 ( 怯弱 ) 한 일이라 하여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 북부여왕 (北扶餘王 : 본보기의 黃龍國王 ) 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보내어 그 힘을 시험해보려고 하자 해명이 그 자리에서 그 활을 당겨서 꺾어 북부여 사람의 힘 없음을 조롱하였다 . 왕이 이 말을 듣고 해명은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에 보내서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하였으나 , 북부여왕이 해명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 유류왕은 더욱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해명에게 칼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

두 태자의 죽음은 혹 대궐 안 처첩들의 질투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 겠지마는 그것은 대개 동부여와의 외교상 관계에서 온 것이었으니 , 유류왕이 동부여를 얼마나 두려워했던가를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 동부여왕 대소가 여러 번 수만 명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를치다가 다 성공치 못하였으나 , 고구려는 몹시 피폐해져서 동부여왕 대소가 또 사자를 보내 조공을 하지 아니함을 꾸짖자 , 유류왕은 두려워서 애걸하는 말로 사자에게 회답해 보내려고 하였다 . 그러니까 왕자 주류 ( 朱留 : 본기의 無恤 ) 는 이때 아직 어렸으나 , 죽은 해명의 기개가 있어 부왕이 비굴하게 구는 것을 부당하다 하고 스스로 거짓 부왕의 명이라 하여 동부여의 사자에게 금와가 말 먹이는 비천한 직책으로 추모왕을 천대하고 , 대소가 추모왕을 죽이려 한 일들을 낱낱이 들어서 죄를 나무라고 동부여의 임금과 신하의 교만함을 꾸짖어서 사자를 쫓아보냈다 .

동부여 대소왕이 사자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또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노해왔다 . 유류왕은 왕자 주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매우 노하였으나 , 이제 노경 ( 老境 ) 에 있어 주류를 도절이나 해명처럼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나라의 병마 ( 兵馬 ) 를 모두 주류에게 내어 주어서 나가 싸우게 하였다 . 주류는 생각하기를 동부여는 군사의 수효가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마병 ( 馬兵 ) 이고 고구려는 보병 ( 步兵 ) 이니 , 적은 보병으로 많은 마병과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하고 , 동부여의 군사가 지나갈 학반령 ( 鶴盤嶺 ) 의 골짜기에 복병시켰다가 동부여의 군사를 돌격하니 , 길이 험하고 좁아서 마병이 불편한지라 동부여의 군사가 모두 말을 버리고 산 위로 기어올라갔다 . 주류가 군사를 몰아서 그 전군을 섬멸하고 많은 말을 빼앗으니 , 동부여의 정예가 이 싸움에서 전멸하여 다시는 고구려와 겨루지 못하였다 . 싸움이 지나니 주류를 봉하여 태자로 삼고 , 겸하여 병마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맡겼다 .

3)大朱留王의 東扶餘 정복

대주류왕이 학반령의 싸움에서 동부여를 크게 무찌르고 유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4 년에 5 만의 군사로 북벌 ( 北伐 ) 의 싸움을 일으켜서 동부여를 쳐들어갔는데 , 도중에 창을 잘 쓰는 마로 ( 麻盧 ) 와 칼을 잘 쓰는 괴유 ( 怪由 ) 를 얻어 앞잡이를 삼아서 `가시라'의 남쪽에 이르러 진구렁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 대소왕이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의 진을 바로 침범하다가 , 말굽이 진구렁에 빠지자 괴유가 칼을 들어 왕을 베었다 .

대소왕이 죽었으나 동부여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대소왕의 원수 를 갚으려고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 마로는 전사하고 괴유는 부상하여 고구려의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대주류왕은 여러번 포위를 뚫고나오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이레를 굶기에 이르 렀다 . 그런데 마침 큰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 지라 대주류왕이 풀로 사람을 만들어 진 가운데 세워두고 나머지 군사 를 이끌고 사잇길로 도망하였다 . 이물림 ( 利勿林 ) 에 이르러서는 전군 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 신히 귀국하였다 .

이 싸움은 동부여가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서 대소왕의 여러 종형제가 왕위를 다투어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 졌다 . 계제 ( 季弟 ) 모갑 ( 某甲 ) 은 종자 백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 ( 南沃沮 ) 로 나와 사냥하고 있는 해두왕 ( 海頭王 ) 을 습격해서 죽이고 , 군사 를 모아 남가시라를 완전히 평정하니 , 이는 남동부여 ( 南東扶餘 ) 이고 , 종제 모을 ( 某乙) 은 고도 ( 故都 ) 에서 스스로 서니 이는 북동부여 ( 北東扶餘 ) 이다 .

그러나 그 밖의 여러 아우들이 제각기 군사를 모아 모을을 쳤으므로 모을은 군사 1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여 대주류왕은 마침 내 북동부여를 전부 토평하였고 국호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 역사에 보인 갈사국은 곧 남동부여이고 , 동부여는 곧 북동부여이며 , 후한서 , 삼국지 등의 옥저전 ( 沃沮傳 ) 에 보인 불내예 ( 不耐濊 ) 도 북동부여이고 , 예전 ( 濊傳 ) 에 보인 불내예 ( 不耐濊 ) 는 남동부여이다 .

4) 大朱留王의 樂良

최씨 ( 崔氏 ) 가 남낙랑을 차지하여 , 낙랑왕 ( 樂浪王 ) 이라 일컬었음은 제 3 편 제 4 장에 말하였거니와 , 그 끝의 임금 최이 ( 崔理 ) 의 대에 이르니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때였다 . 최이는 고구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미인 딸 하나를 미끼로 삼아 고구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 이때 갈사국 ( 曷思國 : 남동부여 ) 의 왕이 그 손녀를 대주류왕의 후궁으 로 바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 얼굴이 기묘하고 풍신이 썩 좋아 이름을 호동 ( 好童 ) 이라고 하였다 . 호동이 외가인 남동부여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나게 되었는데 , 최이가 출행 ( 出行 ) 하다 그를 만나보고 놀라 , “그대의 얼굴을 보니 , 북국 ( 北國 ) 신왕 ( 神王 ) 의 아들 호동이 분명하구나 .” 하고 , 드디어 호동을 데려다가 그 딸과 결혼시켰다 .

낙랑국의 무기고에 북과 나팔이 있는데 , 소리가 멀리까지 잘 들리 므로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매양 이것을 울려 여러 속국의 군사를 불러서 적을 막았다 . 호동이 그 아내 최녀 ( 崔女 ) 를 꾀어 ,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거든 그대가 그 북과 나팔을 없애버리시오 .” 하고 귀국하 여 대주류왕에게 권해서 낙랑을 쳤다 . 최이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보니 북과 나팔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 북과 나팔 소리가 나지 아니하니 속국이 구원을 오지 않았다 . 최이는 그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인 뒤에 나가서 항복하였다 .

호동은 이런 큰 공을 세웠으나 , 왕후가 적자 ( 嫡子 ) 의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대주류왕에게 호동이 자기를 강간하려 하였다고 참소하여 , 호동은 자살하기에 이르렸다 . 이에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의 말로가 다 같이 비극으로 되고 말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 대주류왕 즉위 4 년 여름 4 월에 대소의 아우가 갈사왕 ( 曷思王 : 남동부여왕 ) 이 되었음을 기록하였고 , 즉 위 15 년 여름 4 월에 호동이 최이의 사위가 되었음을 기록하였으며 , 그 해 11 월에 호동이 왕후의 참소로 자살하였음을 기록하였다 . 그러나 갈사왕이 있은 뒤에야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 수 있고 , 또 그런 뒤에야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 호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 설혹 대주류왕 4 년 , 남갈사 건국 원년 4 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어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이듬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 15 년에는 겨우 11 살의 어린아이니 , 11 살 어린아이가 어찌 남의 남편이 되어 그 아내와 멸국 ( 滅國 ) 의 계획을 행할 수 있었으랴 ? 11 살 난 어린아이가 어찌 적모 ( 嫡母 ) 강간의 참소로 부왕의 혐의를 받아 자살하기에 이르렀으랴 ?

동부여가 원래 북갈사에 도읍하였으니 , 소위 갈사왕은 분립하기 전의 동부여를 가리킴이 아닌가하는 이도 있겠지마는 그러면 이는 대소 왕 ( 帶素王 ) 때가 되니 , 대소왕이 그 딸을 대주류왕에게 준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

대개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줄이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겨 고쳤으므로 이같이 모순되는 기록이 생겼거니와 , 대주류왕 20 년이 또 ,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 ( 伐樂浪滅之 ). '고 하였으니 , 한 낙랑을 두 번 멸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 호동이 장가 들고 자살함이 다 20 년의 일이 아닌가 한다 . 이상에 말한 북부여 ·북동부여 ·고구려 세 나라는 다 신조선 옛 강토에서 일어난 것이다 .

3. 백제의 견국과 마한의 멸망

1) 召西奴 女大王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 ( 百濟本紀 ) 는 고구려 본기보다 더 심하게 문란하다 . 백 몇십 년의 감축은 물론이고 ,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린다 . 그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 ( 召西奴女大王 ) 이니 하북 ( 河北 ) 위례성 ( 慰禮城 ) --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 그가 죽은 뒤에 비류 ( 沸流 ) ·온조 ( 溫祚 ) 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 ( 彌鄒忽 : 지금의 仁川 ) 에 , 또 한사람은 하남 ( 河南 ) 위례홀 ( 慰禮忽 ) 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 본기에는 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 ( 篇 ) 첫머리에 비류 ·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 온조왕 13 년에 하남 위례홀에 도읍하였음을 기록하였으니 , 그러면 온조가 하남 위례홀에서 하남 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아니랴 ?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 비류 ·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남편인 부여사람 우태 ( 優台 ) 이므로 , 비류 ·온조의 성도 부여요 , 근개루왕 ( 近蓋婁王 ) 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 본기에는 비류·온조를 추모 ( 鄒牟 ) 의 아들이라 하였음이 둘째 잘못 이다 .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서술한다 .

소서노가 우태의 아내로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울여서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를 정궁 ( 正宮 ) 으로 대우하고 , 비류·온조 두 아들을 친 자식같이 사랑하였는데 , 유류 ( 橋留 ) 가 그 어머니 예씨 ( 禮氏 ) 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 예씨가 원후 ( 元后 ) 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 ( 小后 ) 가 되었으며 ,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 ·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자식 됨이 드러났다 .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의논하여 ,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 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하고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 많은 금 ·은 ·주보 ( 珠寶 ) 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 ·온조 두 아들과 오간 ( 烏干 ) ·마려 ( 馬黎 ) 등 18 사람을 데라고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 .
마한으로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 왕은 기준 ( 箕準 ) 의 자손이었다 .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 리의 땅 미추홀 --지 금의 인천과 하북 위례홀 --지금의 한양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을 일컫고 ,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 그런데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 ( 濊族 ) 과 손잡아 압박이 심하므로 소서노가 처음엔 낙랑국과 친하고 예족만 구축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핍박이 낙랑국이 시켜
서 하는 것임을 깨닫고 ,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을 다했다 . 백제 본기에 낙랑왕 ( 樂浪王 ) 이라 낙랑태수 ( 樂浪太守 ) 라 기록되어 있는데 , 이것은 백 몇십 년의 연대를 줄인 뒤에 그 줄인 연대를 가지고 지나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 ( 漢郡 ) 이라 하여 낙랑태 수라고 쓴 것이며 , 예 ( 濊 ) 라 쓰지 않고 말갈 ( 靺鞨 ) 이라 썼는데 , 이것은 신라 말엽에 예를 말갈이라고 한 당 ( 唐 ) 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 ( 古記 ) 의 예를 모두 말갈로 고친 것이다 .

2)召西奴가 죽은뒤 두아들의 分國과 그 흥망

소서노가 재위 l3 년에 죽으니 ,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 아니라 ,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 · 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 ( 聖德 ) 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 하고 , 이에 형제가 오간 · 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 ( 負兒岳 ) --지금 한양의 북악 ( 北岳 ) 에 올라가 서울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

오간 · 마려 등이 비류에게 간하기를 , “하남 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 남은 기름진 평야를 안고 , 동은 높은 산을 끼고 , 서는 큰 바다 를 둘러 천연의 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겠는데 ,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려고 하십니까 ? ”라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형제가 땅과 인민을 둘로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 온조는 하남 위레홀로 가니 , 이에 백제가 나뉘어 동 · 서 두 백제가 되었다 .

본기에 기록된 온조의 13 년은 곧 소서노의 연조요 , 그 이듬해 14 년 이 곧 온조의 원년이니 , l3 년으로 기록된 온조 천도의 조서는 비류와 충돌된 뒤에 온조 쪽의 인민에게 내린 조서이고 , 14 년 곧 온조 원년 의 ,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 ( 分漢城民 ). ”고 한 것은 비류 · 온조 형제가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각기 자기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 미추홀 은 `메주골'이요 , 위례홀은 `오리골' ( 본래는 아리골 ) 이다 . 지금의 습속에 어느 동네이든지 흔히 동쪽에 오리골이 있고 서쪽에 메주골이 있는데 그뜻은 알 수 없으나 , 그유래가 또한오래다 .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 많이 흩어져 달아났지마는 ,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수토가 알맞고 오곡이 잘 되어 인민이 편안히 살아가므로 비류는 부끄러워서 병들어 죽고 그 신하와 인민은 다 온조에게로 오니 , 이에 동 ·서 두 백제가 도로 하나로 합쳐 졌다 .

3) 溫祚의 馬韓 襲滅 ( 온조의 마한 습멸 )

백제가 마한의 봉토 ( 封土 ) 를 얻어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공손히 신하의 예로써 마한을 대하여 ,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 나 노루를 마한에 대하여 ,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보내고 전쟁을 하여 얻은 포로를 마한에 보냈는데 , 소서노가 죽은 뒤 에 온조가 서북쪽의 예와 낙랑의 방어를 핑계하여 , 북의 패하 (浿河 ) ---지금의 대동강으로부터 남으로 웅천 ( 熊川 )--- 지금의 공주 ( 公 州 ) 까지 백제의 국토로 정하여달라고 해서 마침내 그 허락을 얻고 그 뒤에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왔을 때에 발 디딜 땅이 없어 내가 서북 백 리 땅을 떼어주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 인데 ,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 니 , 어찌 의리있는 짓이냐 ? ” 하고 꾸짖었다 .

온조는 짐짓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이고 성책을 헐었으나 , 좌우에게 , “마한왕의 정치가 옳은 길을 잃어 나라의 형세가 자꾸 쇠약해지니 , 이제 취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돌아갈 것이다 .” 하고 오래지 않아 사냥한다 핑계하고 마한을 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 그 50 여국을 다 토멸하고 , 그 유민으로서 의병을 일으킨 주륵 ( 周勒 ) 의 온 집안을 다 목베어 죽이니 , 온조의 잔학함이 또한 심하였다 .

기준 ( 箕準 ) 이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 ( 韓氏 ) 라 하여 자손에게 전해내려오다가 이에 이르러 망하니 , 삼국지 에 , “기준의 후예가 끊어져 없어지고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 準後滅絶 馬韓人 復自立爲王 ). ”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인데 , 온조를 마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지나인이 매양 백제를 마한이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 (儒留 ) ·대주류 ( 大朱留 ) 두 대왕과 같은 시대 이니 , 온조 대왕 이후에 낙랑의 침략을 기록한 것이 없음은 대주류왕 이 이미 낙랑을 토멸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

제 3 장 漢武帝의 침략

1. 漢나라 군이 고구려에 패한 사실


조선의 남북 여러 나라가 분립하는 판에 지나 한나라 무제 ( 武帝 ) 의 침략이 있었다 . 이것은 다만 한때 정치상의 큰 사건일 뿐 아니라 , 곧 조선 민족 문화의 소장 ( 消長 ) 에도 비상한 관계를 가진 큰사건이었다 . 고대 동아시아에 불완전한 글자이나마 이두문을 써서 역사의 기록 과 정치의 제도를 가져 문화를 가졌다고 할 민족은 지나 이외에 오직 조선뿐이었는데 , 당시에 조선이 강성하여 매양 지나를 침략하고 혹은 항거하였으며 , 지나도 제 ( 齊 ) ·연 ( 熊 ) ·진 ( 奏 ) 이래로 조선에 대하여 방어하고 혹은 침략해왔음은 제 2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잦았거니와 , 진 ( 奏 ) 이 망하고 한 ( 漢 ) 이 일어나서는 북쪽 흉노의 침략에 시달림을 받아서 한나라 고조 ( 高祖 ) 가 흉노 모돈 ( 冒頓 ) 을 공격하다가 백등 ( 白登 : 산서성 大同府부근 ) 에서 크게 패하여 세폐 ( 歲幣 ) 를 바치고 황녀 ( 皇女 ) 를 모돈의 첩으로 바치는 등 굴욕적 조약을 맺고 , 그 뒤에 그대로 시행하여 고조의 증손 무제 ( 武帝 ) 에 이르렀다 . 무제는 야심이 만만한 제왕이라 , 백 년 태평한 끝에 나라가 부강해지자 흉노를 쳐서 선대의 수치를 씻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도 또한 이름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민족적 혈전을 벌였다 .

그런데 무제가 침입한 조선이 둘이니 , 한서 ( 漢書 ) 식화지 ( 食貨志 : 史記平準書도 같음 ) 에 , “무제가즉위하고 수 년만에 팽오 ( 彭吳 ) 가 예맥조선 ( 濊貊朝鮮 ) 을 쳐서 창해 ( 滄海 ) 라는 군 ( 郡 ) 을 설치하였으니 , 곧 연 ( 燕 ) 과 제 ( 齊 ) 지방이 크게 소란해졌다 ( 武帝卽位數年 彭吳 穿濊貊 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 騷然騷動 ). ”고 한 예맥조선이 그 하나 요 , 사기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 “누선장군 ( 樓船將軍 ) 양복 ( 楊僕 )--- 좌장군 ( 左將軍 ) 순체 ( 筍체 )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 ( 四那 )을 만들었다 ( 樓船將軍楊僕 左將軍 筍체遂定朝鮮爲四郡 ). ”라고한 조선이 또 하나이다 . 뒤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으로 인하여 위씨 ( 衛氏 ) 의 조선인 것은 사람들이 다 알거니와 , 앞의 조선은 식화지나 평준서에 이렇게 간단히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전기 ( 傳記 ) 에서는 다시 발견되지 아니하므로 종래의 사학가들이 이를 어떤 조선인지를 말한 이가 없다 .

그러나 나는 전자의 조선은 곧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니 , 한무제가 위우거 ( 衛右渠 ) 를 토멸하기 전에 동부여를 저희 군현 ( 郡縣 ) 이라 하여 고구려와 9 년 동안 혈전하다가 패하여 물러난 일이 있은 것으로 생각 한다 .

무엇으로 증거하는가 ? 후한서 ( 後漢書 ), 예전 ( 濊傳 ) 에 , “한나라 무제 원삭 ( 元湖 ) 원년에 예의 남려왕 ( 南閭王 ) 등이 모반하여 , 우거가 28 만 호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항복하여 ,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창해군 ( 滄海郡 ) 으로 만들었다 ( 漢武帝元朔元年 滅君南閭等叛 右案率 二十八萬口詣遼東降漢 以其地爲滄海郡 ). ”고 하였고 , 한서 본기 ( 本紀 ) 에 , “원삭 3 년 봄에 창해군을 폐지하였다 ( 元朔三年春罷滄海郡 ). ” 고 하였으며 , 사기 공손홍전 ( 公孫弘傳 ) 에는 , “공손홍이 여러번 간하여 창해군을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 ( 朔方 ) 만 받들게 하기를 청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 弘數諫---願罷---滄海 而專奉朔方 --- 上乃許之 ). ”고 하였으니 , 종래의 학자들이 위 세 가지 책과 앞에 말한 `식화지 ( 食貨志 ) 의 본문을 합쳐 , `예맥조선은 예임금 남려의 나라로 지금의 강릉이니 , 강릉이 당시 우거의 속국으로서 모반하고 한에 항복했으므로 한이 팽오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땅으로써 창해군을 삼았다가 그 뒤에 땅이 너무나 멀고 비용이 많이 듦으로 그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 .”라고 단정하였다 . 그러나 이 단정이 잘못임이 다음과 같다 .

1) 지나사에 매양 동부여를 예 ( 濊 ) 로 그릇 기록하였음과 , 남 ·북 두 동부여가 하나는 지금의 훈춘이요 , 또 하나는 지금의 함흥임은 이미 본편 제 2 장에서 서술하였거니와 , 동부여를 지금의 강릉이라 함은 신라가 그 동북계 1천여 리를 잃고 그 잃은 지방의 고적을 내지 ( 內地 ) 로 옮길 때에 동부여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겼음으로 하여 생긴 위설 ( 僞說 ) 이니 , 예의 남려는 함흥의 동부여왕이요 , 강릉의 임금이 아 니며 ,

2) 식화지 ( 食貨志 ) 의 본문에 명백히 , “무제가 즉위한 지 수년에 팽오 ( 彭吳 ) 가 예맥조선을 쳤다 .”고 하였으니 , 후한서에 기록된 창해군을 처음 설치한 해는 무제 즉위 13 년인데 , 13 년을 수년이라 할 수 없을 뿐더러 , 한서 주부언열전 ( 主父偃列傳 ) 의 원광 ( 元光 ) 원년 엄안 ( 嚴安 ) 의 상소에 , “지금 예주 ( 濊州 ) 를 공략하여 성읍 ( 城邑 ) 을 설치하고자 한다 ( 今欲--- 略濊州 建治城邑 ). ”고 하였는데 , 예주를 공략한다는 것은 곧 예맥조선 침략을 가리킨 것이요 , 성읍을 설치하는 것은 창해의 설치 경영을 가리킨 것이며 , 원광 원년 , 곧 원삭 원년의 6 년 전에 엄안이 예에 대한 침략과 창해군 설치를 간하였으니 , 남려의 항복과 팽오의 교통이 벌써 원광 원년의 일이요 , 그 6 년 후인 원삭 원년의 일이 아니고 ,

3) 원광 원년 창해군 설치의 해는 기원전 134 년이요 , 원삭 3 년 창해군 폐지의 해는 기원전 126 년이니 , 그러면 한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려는 전쟁이 전후 9 년 동안이나 걸쳤으니 , 동부여가 만일 우거의 속국이라면 우거가 가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 만일 돌아와 구원하였다고 하면 사기 조선왕 만전 ( 滿傳 ) 에 우거의 한에 대한 관계 , 진번진국 ( 眞番辰國 ) 의 옹알 ( 壅閼 ), 요동 동부도위 ( 東部都慰 ) 의 공격이며 살해 따위를 다 기록하고서 어찌 이보다 더 중대한 9 년 전쟁 의 사실을 빼었으랴 ? 앞에서 말한 개정한 연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이니 , 남려는 위씨 ( 衛氏 ) 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다 .

남려가 고구려의 속국이라면 왜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는가 ? 남려는 대개 남동부여 , 후한서와 삼국지의 예전 ( 濊傳 ) 에 기록된 불내예왕 ( 不耐濊王 ) 에게 시집 보낸 갈사왕이니 , 그러면 남려는 대주류왕의 처조 ( 妻祖 ) 요 , 대주류왕은 남려왕의 손자 사위요 , 호동은 남려왕의 진외증손 ( 眞外曾孫 ) 이니 , 말하자면 붙이가 가까운 터 이다 .

그러나 호동의 장인인 낙랑의 최이 ( 崔理 ) 도 토멸하는 판에 어찌 처 조와 진외증조를 알아보랴 . 고구려의 동부여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 그러니 남려가 지난날 아버지와 형의 원수로든지 , 당장의 압박의 고통으로든지 , 어찌 고구려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 이 없었으랴 . 이에 같은 고구려에 대해 원한을 가진 낙랑의 여러 소국 들과 연합해서 몰래 우거에게 내통하여 고구려를 배척하려 하였으나 , 우거가 고구려보다 미약하여 고구려에 항거하지 못하므로 , 남려는 우거를 버리고 한 ( 漢 ) 에 통하려 한 것이다 .

그러나 한에 통하려면 부득이 위씨 ( 衛氏 ) 의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 데 , 우거는 동부여가 혹 위씨 나라의 비밀을 한에 누설하지나 않을까 하여 국경의 통과를 허락하지 아니했으므로 , 사기 조선 왕만전 ( 朝鮮 王滿傳 ) 에는 , “진번 옆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들어가 뵈려고 하였으나 우거가 또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 ( 眞番旁衆國 欲上書入見天子 右渠又壅閼不通 ). ”고 하였다 .

진번 옆의 여러 나라란 곧 동남부여와 남낙랑 등을 가리킨 것이다 . 그러나 남려는 마침내 바닷길로 한에 통하여 사정을 고하니 , 야욕으로 가득 찬 한무제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치랴 . 드디어 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으로 예정하고 , 팽오를 대장으로 삼아 연제 ( 燕齊 )-- 지금의 직예 ( 直匠 ) ·산동 ( 山東 ) 의 군사와 양식을 총동원하여 ,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워 남동부여와 남낙랑 여러 나라를 구원하다가 고구려의 대항이 뜻밖에 강하여 9 년 동안 혈전을 계속하였는데 , 한이 여러 번 패하여 창해군을 폐지한다는 말을 핑계로 삼아 군사를 거두어 전쟁을
결말 지은 것이다 .

이같이 9 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 혈전이 있었으면 사마천이 어찌하여 사기 조선열전에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하였는가 ? 이는 다름이 아니라 , `중국을 위해 치욕을 숨기다 ( 爲中國諱恥 ). ' 하는 것이 , 공구 ( 孔丘 ) 의 춘추 ( 春秋 ) 이래 , 지나 역사가의 유일한 종지 ( 宗旨 ) 가 되었을 뿐 아니라 , 삼국지 왕숙전 ( 王蕭傳 ) 에 의하면 ,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 ( 景帝 ) 와 무제 ( 武帝 ) 의 잘잘못을 바로 썼더니 , 무제가 이것을 보고 크게 노했으므로 효경본기 ( 孝景本記 ) 와 무제본기 ( 武帝本記 ) 를 삭제하였다 .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 그 뒤에 사마천은 부형 ( 腐刑 : 남자를 去勢하는 형벌 . 宮刑 ) 에 처해졌다 .”고 하였으니 , 만일 한의 패전을 바로 썼더라면 부형은 고사하고 목이 달아나는 참형까지 당했을 것이다 . 그러니 그 사실이 빠졌음이 고의일 것이며 , 평준서에 겨우 그 사실을 비추었으니 , `팽오가 예맥조선을 멸망시켰다 . '고 하여 마치 조선을 토멸한 듯이 쓴 것도 또한 꺼려함을 피한 것일 것이요 , 반고 ( 班固 ) 의 한서 ( 漢書 ) 식화지 ( 食貨志 ) 에는 그 사실이 너무 바르지 못함을 싫어 하여 , 멸 ( 滅 ) 자를 천 ( 穿 ) 자로 고쳤으나 , 그 전부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였음은 사마천과 마찬가지였다 .

그러면 한무제와 싸운 이는 대주류왕 , 곧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 大武神王 ) 일 것이다 . 그러나 본기에는 연대를 줄였기 때문에 한무제 와 같은 시대인 대주류왕이 한의 광무 ( 光武 ) 와 같은 시대가 되고 , 지나사의 낙랑 기사와 맞추기 위해 대주류왕이 한에게 낙랑국을 빼앗 겼다는 거짓 기록을 쓴 것이었다 .

2. 漢武帝의 衛氏 侵滅 ( 한무제의 위씨 침멸 )

한무제가 9 년이라는 오랫동안의 혈전에 패해 물러가서 그 이후 17 년 동안 조선의 여러 나라를 엿보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에야 어찌 동방 침략을 잊고 있었으랴 . 이에 위씨 ( 衛氏 ) 는 비록 조선 여러 나라 중 하나이나 그 왕조 ( 王朝 ) 가 원래 지나족 종자요 , 그 장수와 재상들도 대개 한의 망명자의 자손들이었으므로 이들을 꾀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잠식하는 앞잡이를 만들려고 하는 중에 , 더욱 위씨에게 길을 빌어 동부여를 구원하고 고구려를 치는 편의를 얻으려고 하여 , 기원전 109 년에 한무제는 사신 섭하 ( 涉河 ) 를 보내서 먼저 한과 동부여를 왕래하는 사절이 위씨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여 달라고 우거를 한의 국위 ( 國威 ) 로 워협하고 , 금백 ( 金帛 ) 의 이익으로 꾀었으나 우거가 완강하게 쫓지 않았다 .

섭하가 한무제의 비밀 명령에 의하여 귀국하는 길에 두 나라의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우거가 보낸 전송하는 사자 우거의 부왕 ( 副王 ) 을 쩔러 중이고 달아나 , 한으로 돌아가서 한무제에게 조선국 대장을 죽였다고 큰소리를 하니 , 한무제는 실상 딴 흉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 그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 공으로 섭하를 요통 동부도위 ( 東部都慰 ) 에 임명하였다 .

섭하가 임지 ( 任地 ) 에 이른지 오래지 아니하여 , 우거가 전의 일 ( 副王의 피살 ) 을 분하게 여겨 군사를 일으켜서 섭하를 공격해 죽였다 . 무제는 이것으로 구실을 삼아 좌장군 ( 左將軍 ) 순체 ( 筍체 ) 는 보병 5 만으로 요수 ( 遙水 ) 를 건너 패수로 향하고 , 누선장군 ( 樓船將軍 ) 양복 ( 楊僕 ) 은 병선 군사 7 천으로 발해를 건너 열수 ( 列水 ) 로 들어가서 우거의 서울 왕검성 ( 王儉城 : 조선 고대 세 왕검성의 하나 ) 을 좌우에서 협격 (挾擊 ) 하게 하였는데 , 양복은 열구 ( 列口 ) 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크게 패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남은 군사를 거두어 자신을 보호하고 , 순체는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으나 위씨의 군사가 항거해 지켜서 여의치 못하였다 . 한무제는 두 장수가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신 위산 ( 衛山 ) 을 보내 , 금백 ( 金帛 ) 을 뿌려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이간시켰다 . 위씨의 나라는 원래가 조선과 지나의 도둑들의 집단이었으므로 그 신하들은 위씨에 대한 충성보다 황금에 대한 욕심이 매우 치열하였고 , 그들은 전쟁을 주장하고 화평을 주장하는 두 파로 갈려 서로 다투었는데 , 한의 금백이 비밀히 뿌려지자 화평을 주장하는 파가 갑자기 강해져서 우거로 하여금 그 태자를 한의 군중 ( 軍中 ) 에 보내서 한의 장수에게 사죄하고 군량과 말을 바치기로 하는 조약을 맺게 하려고 하였다 . 그래서 우거는 , “태자는 호위병만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가 한의 장수를 만나보게 하여라 .”고 하였고 , 한의 장수는 , “태자가 1 만의 군 사로 패수를 건너오려면 무장을 갖추지 말고 오라 .”고 하여 양편이 서로 버티어 교섭이 깨어졌다 .

그러나 그 돈과 비단이 효력을 나타내서 우거의 재상 노인 ( 路人 ) · 한음 ( 韓陰 ) · 삼 ( 參 ) 과 대장 왕겹 ( 王겹 ) 이 몰래 한에 내정을 알리고 전쟁에는 힘쓰지 아니하였으므로 , 한의 장수 순체는 패수를 건너 왕검성의 서북쪽을 치고 , 양복은 산에서 나와 왕검성의 동남쪽을 쳤다 . 한 무제는 교섭이 결렬되자 위산 ( 衛山 ) 을 죄주어 참형에 처하고 , 제남태수 ( 濟南太守 ) 공손수 ( 公孫遂 ) 로 사신을 삼아서 전권 ( 全權 ) 을 주어 두 장수를 감독하는 동시에 , 더욱 많은 돈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매수하게 하였다 .

이때에 순체와 양복이 항복하기를 다투어 서로 불화해지니 , 공손수가 순체의 편을 들어 양복을 불러 순체의 군중에 가두고 , 순체로 하여 금 양복의 군사를 합쳐 싸우게 하고 , 한무제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 무제는 , “돈과 비단만 낭비하고 위씨 군신 ( 君臣 ) 의 항복을 받지 못 했다 .” 하고 크게 노하여 공손수를 처형하였다 . 오래지 않아 한음 · 왕 겹 · 노인 등의 뇌물받은 일이 탄로되어 노인은 참형을 당하고 , 한음 · 왕겹 두 사람은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다 . 이듬해 여름에 삼 ( 參 ) 이 우거를 암살하고 ,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 우거의 대신 성기 ( 成己 ) 가 삼을 치니 , 우거의 왕자 장 ( 長 ) 이 삼에게 붙어 노인의 아들 최 ( 最 ) 와 힘을 합하여 성기를 죽이고 성문을 열어 항복해서 위씨가 이에 멸망하고 한무제는 그 땅을 나누어 진번 · 임둔 · 현도 · 낙랑의 네 군을 만들었다 .

이때의 사실은 오직 사기 조선열전에 의거할 뿐인데 , 거기에는 한 이 돈과 비단을 위씨의 여러 신하들에게 뇌물한 기록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 이는 사마천이 무제 본기 ( 無帝本紀 ) 의 화 ( 福 : 앞절에 보 임 ) 로 부형 ( 腐刑 ) 을 당하고 동부여에 대한 한의 패전을 기록하지 못한 일이 있어 , 바로 쓰지 못한 때문이다 .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이 전쟁 에 패하고 뇌물로 성공한 사실이 글 가운데 뚜렷이 보이니 , 이를테면 , “위만은 병위 ( 兵威 ) 와 재물로 그 이웃 작은 고을을 침노하여 항복받아서 나라를 얻었다 ( 滿 得以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 ”고 하여 위만이 병위와 재물 두 가지로 건국을 성취하였음을 기록한 것은 은근하 한무제가 위씨를 당당히 병력으로 멸하지 못하고 재물로 적을 매수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성취하였음을 비웃고 꼬집은 것이다 .

`위산을 보내 병위로써 우거를 타일렀다 ( 遺衛山 因兵威 往諭右渠 ). '고 하여 `병위' 두 자만 쓰고 `재물' 두 자는 빼었으나 , 이때 순체와 양복은 이미 패전하고 후원병도 가지 아니하여서 병위가 도리어 우거의 군사보다 약한 때인데 무슨 병위가 있었으랴 ? 이는 곧 윗글의 `병위 ·재물' 넉 자를 이어받아 , 위산이 가져간 것이 병위가 아니라 재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 위산과 공손수가 다 까닭없이 처형되었음을 기록한 것은 한무제가 재물만 쓰고 성공치 못함에 노음을 표시한 것이고 , 위씨가 멸망한 뒤에 순체와 양복이 하나는 침형당하고 하나는 파면되었는데 , 봉후 ( 封候 ) 의 상을 받은 자는 도리어 위씨의 반역신인 노인 ( 路人 ) 의 아들 최와 왕겹 등 네 사람뿐이었으니 , 이는 곧 위씨의 멸망이 한의 병력에 있지 않고 한의 재물을 받고 나라를 판 간신에게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

3. 漢四郡의 위치와 고구려의 對漢 관계

위씨가 망하매 한이 그 땅을 나누어 진번 ·임둔 ·현도 ·낙랑 네 군 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 사군의 위치 문제는 삼한 ( 三韓 ) 연혁의 쟁론 에 못잖은 조선사상 큰 쟁론이 되어왔다 .

만반한 ·패수 ·왕검성 등 위씨의 근거지가 지금의 만주 해성 개평 동지 ( 이는 제 2 편 제 2 장에 자세히 설명했음 ) 일 뿐 아니라 , 당시에 지금 의 개원 ( 開原 ) 이북은 북부여국 (北扶餘國 ) 이고 , 지금의 흥경 ( 興京 ) 이 동은 고구려이고 ,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국이고 ,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국이었으니 , 이상 네 나라 이외에서 한의 사군 을 찾아야 할 것이므로 , 사군의 위치는 지금의 요동반도 안쪽에서 찾 을 수밖에 없다 . 그러나 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이설 ( 異說 ) 이 백출 ( 百出 ) 함은 대개 다음에 열거한 몇 가지 원인에 의한 것이다 .

첫째는 지명의 같고 다른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를 테면 패수 ·낙랑 등은 다 `펴라'로읽을 것으로서 , 지금의 대동강은 당시의 `펴라'라는 강이고 , 지금의 평양은 당시의 `펴라'라는 서울이니 , 강과 서울을 다 같이 `펴라'라고 한 것은 마치 지금의 청주 ( 淸州 ) `까치내'라는 물 옆에 `까치내'라는 마을이 있는 것처럼 `펴라'라는 강 위에 있는 서울이므로 또한 `펴라'라고 한 것이요 , 패수 ( 浿水 ) 의 ' 패 ( 浿 ) 는 `펴라'의 `펴'의 음을 취하고 , 수 ( 水 ) 는 `펴라'의 `라'의 음 을 취하여 `펴라'로 읽은 것이다 . 그 밖에 낙랑·평양 ·평나 ( 平那 ) · 백아강 ( 百牙岡 ) 등도 다 `펴라'로 읽을 것이다 . 그 해석은 여기서 생략하거니와 , 한무제가 이미 위씨조선 곧 불조선을 토멸하여 요동군을 만들고는 가끔 신 · 말 두 조선의 지명을 가져다가 위씨조선의 옛 지명 을 대신하였으니 , 지금의 해성 ( 海城 ) 헌우란의 본래 이름이 `알티' ( 혹 安地 혹 安市라 한 것 ) 인데 , 이것을 고쳐 패수라 하였고 , 사기의 작자 사마천은 그 고친 지명에 의하여 사군 ( 四郡 ) 이전의 옛 일을 설하였으 므로 , “한이 일어나 물러나서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 ( 漢興---退以浿水爲界 ). ”느니 , “위만--- 동으로 달아나 새외 ( 塞外 ) 로 나가서 패수를 건넜다 ( 滿---東走出塞 漢浿水 ). ”느니 하였으며 , 진번 ( 員畵 ) 이 비록 신 · 불 두 조선을 합쳐 일컫는 것이지마는 , 한은 이를 차지하여 고구려를 진번군으로 가정 ( 假定 : 아래에 자세히 말함 ) 하였다 . 사기의 , “처음에 전연 ( 全燕 ) 때 일찍이 진번조선을 약취 ( 略取 ) 하여 예속시 켰다 ( 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 ”고 하고 , “위만이 잠시 진번조선을 복속시켰다 ( 滿---稍役屬眞番朝鮮 ). ”고 한 진번조선은 신 · 불 두 조선을 가리킨 것이지마는 , “진번 · 임둔이 다 와서 복속하였다 ( 眞番臨屯 皆來服屬 ). ”고 하고 ,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였다 ( 眞番旁衆國 欲上書見天子 ). ”고 한 진번은 다 사군의 하나인 진번을 가려킨 것으로써 , 또한 나중에 고친 지명에 의하여 고사 ( 故事 ) 를 설한 것이다 . 마치 을지문덕 이후에 살수 ( 薩水 ) 의 명칭이 청천강 ( 淸川江 ) 이 되었으니 , 을지문덕 당시에는 청천강이라는 이름이 없었지마는 우리가 , “을지문덕이 청천강에서 수 (隨 ) 나라 군사를 깨뜨렸다 .”고 하는 따위와 같은 것인데 , 종래의 학자들이 이를 모르고 사기의 패수와 진번 등을 사군 이전의 이름으로 아는 동시에 , 헌우란 패수 , 대동강 패수의 두 패수와 두 나라의 이름인 진번과 한 군 ( 郡 ) 의 이름인 진번의 두 진번을 혼동하여 설하였다 .

둘째는 기록의 진위를 잘 분별하지 못한 때문이다 . 이를테면 한서 본기 ( 本紀 ) 무제 ( 武帝 ) 원봉 ( 元封 ) 3 년 진번 · 임둔의 주 ( 註 ) 에 `무릉서 ( 茂陵書 ) 에 진번의 군치 ( 郡治 ) 삽현 ( 삽縣 ) 은 장안 ( 長安 ) 에서 7,640 리 임둔의 군치 동이현 ( 東이縣 ) 은 장안에서 6,138 리 ( 茂陵書 眞番郡治 삽縣 去長安 七千六百四十里 - - -臨屯郡治 東이縣、 去長安 六千 一百 三十 八 里 ). '라 했는데 , 무릉서는 무릉사람 사마상여 ( 司馬相如) 의 저작이라 하나 , 사기 사마상여전에 , “상여가 죽고 5 년에야 천자가 비로 소 후토 (后土 ) 를 제사지냈다 ( 相如旣卒五歲 天子始祭后土 ) · ” 하고 , 사기집해 ( 史記集解 ) 에는 , “원정 ( 元鼎 ) 4 년 비로소 후토를 세웠다 ( 元鼎四年---始立后土 ) ·”고 하였는데 , 원정 4 년은 기원전 113 년이요 , 사마상여가 죽은 것은 그 5 년 전인 원수 ( 元狩 ) 6 년 ( 기원전 117 년 ) 이니 , 상여는 원봉 ( 元封 ) 3 년 ( 기원전 l08 년 ) 진번 · 임둔군을 설치한 해보다 10 년 전에 이미 죽었으니 , 10 년 전에 이미 죽은 상여가 어찌 l0 년 후의 두 군의 위치를 말할 수 있었으랴 . 그러니 무릉서가 위서 ( 僞書 ) 인 동 시에 그 글 가운데 진번 · 임둔 운운한 것은 위증 ( 鴻證 ) 임이 의심없으 며 , 또한 한서지리지에 요동군 군현지 ( 郡縣志 ) 이외에 따로 현도와 낙랑 두 군지 ( 郡志 ) 가 있으므로 , 이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요동반도 이외에서 현도 · 낙랑 두 군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지마는 , 위략의 만 반한이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의 문 ·  번한임과 사기의 패수가 곧 요동 군 번한현 ( 番汗縣 ) 의 패수 (浿水 ) 임이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 지리지의 현도 · 낙랑 운운한 것은 후세 사람의 위증임이 의심없는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것을 모르고 매양 한서 본기의 진번 , 임둔의 주나 지리지의 낙랑· 현도 두 군지를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글로 그릇 믿었다 . 이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사군의 위치에 대한 고거 ( 考據 ) 가 비록 많으나 , 하나도 그 정곡 ( 正鵠 ) 을 얻은 이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 한다 .

사군은 원래 땅 위에 구획을 그은 것이 아니고 종이 위에 그린 일종의 가정 ( 假定 ) 이니 , 말하자면 고구려를 토멸하면 진번군을 만들리라 , 북동부여 --- 북옥저 를 토멸하면 현도군을 만들리라 , 남동부여 ---남옥저를 토멸하면 임둔군을 만들리라 , 낙랑국을 토멸하면 낙랑군을 만들리라 하는 가정인 것이고 , 실현된 것이 아니다 . 한무제가 그 가정을 실현하기 위해 위의 여러 곳에 대하여 침략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 낙랑과 두 동부여는 앞에 말한 것과 같이 고구려에 대한 오래된 원한이 있으므로 한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배척하려고 했을 것이고 , 고구 려는 또 전번에 대주류왕이 승전한 기세로 한과 결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 그 전쟁이 대개 기원전 108 년쯤 , 곧 위씨가 멸망한 해에 비롯하 여 기원전 82 년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 한이 패하여 사군 실현의 희망이 아주 끊어졌으므로 진번 · 임둔 두 군은 그 명칭을 폐지하고 , 현 도 · 낙랑 두 군은 요동군 안에다 붙여서 설치함에 이르렀다 . 한서 본기에는 진번군을 폐지했다고 하였을 뿐이고 , 임둔군을 폐지했다는 말 은 없으나 , 후한서 예전 ( 滅傳 ) 에 , “소제 ( 昭帝 ) 가 진번 · 임둔을 폐지하여 낙랑 · 현도에 합쳤다 ( 昭帝罷眞番臨屯 以井樂浪玄토 ). ”고 하였음을 보면 , 임둔군도 진번군과 한때에 폐지하였던 것이다 .

후한서 예전에는 현도를 구려 ( 句麗 : 한의 고구려현을 가리킨 것 ) 로 옮겼다고 하였고 , 삼국지 옥저전 (沃沮傳 ) 에는 처음에 옥저로 현도성 을 삼았다가 뒤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나 옥저전의 불내예왕 ( 不耐歲王 ) 은 북동부여와 남동부여의 왕을 가리킨 것이요 , 예전의 불내예왕은 낙랑왕을 가리킨 것이니 , 두 동부여와 낙랑국은 다 당시에 독립된 왕국이다 . 그렇다면 현도성이 옥저 , 곧 북동부여에서 요동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 다만 북동부여로 현도를 만들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 비로소 요동---지금의 봉천성성 ( 奉天省城 ) 에 현도군을 붙이기로 설치한 것이고 , 낙랑군도 또한 동시에 붙이기로 설치하였을 것인데 그 위치는 확언할 수 없으나 , 대개 지금의 해성 ( 海城 ) 등지일 것이다 .

어찌하여 진번 · 엄둔을 폐지하는 동시에 현도 · 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였는가 ? 이는 다름 아니라 , 곧 앞서 말한 낙랑국과 남동 부여국이 고구려를 몹시 원망하여 한이 패해 물러간 뒤에도 두 나라가 , 오히려 한에 사자를 보내 몰래 통하고 상민 ( 商民 ) 이 왕래하여 물 자를 서로 사고 팔았으므로 한이 요동에 현도 · 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여 두 나라에 대한 교섭을 맡게 하고 , 혹은 고구려와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두 나라를 이용하였으니 , 이것은 한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고 , 고구려는 매양 두 나라의 한과 통하는 증적 ( 證跡 ) 을 알아내면 반드시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켰다 . 이는 고구려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니 , 수백 년 동안 두 나라로 인하여 , 고구려의 한에 대한 진취 ( 進取 ) 를 방해하였다 . 이 책에서는 두 낙랑을 구별하기 위하여 낙랑국은 남낙랑 ( 南樂浪 ) 이라 하고 한의 요동 낙랑군은 북낙랑 ( 北樂浪 ) 이라 하거니와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인 낙랑국은 다 남낙랑을 가리킨 것인데 , 종래의 학자들이 매양 요동에 있는 북낙랑은 모르고 남낙랑을 낙랑군이라 주장하는 동시에 삼국사기 의 낙랑국 낙랑왕은 곧 한군태수의 세력이 동방을 웅시 ( 雄視 ) 하여 그 형세가 한 나라 왕과 같으므로 나라 또는 왕이라 일컬었다고 단언 ( 斷言 ) 하였으나 , 고구려 와 경계가 닿은 요동태수를 요동국왕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현도태수를 현도국왕이라 일컽지 아니하였는데 , 어찌 홀로 낙랑태수만 낙랑국 왕이라 일컬었으랴 ? 그것이 억설임이 의심없다 .

이즘 일본인이 낙랑 고분에서 혹 한대 ( 漢代 ) 연호를 새긴 그릇을 발견하고 지금의 대동강 남쪽 기슭을 위씨의 옛 서울 곧 뒤의 낙랑의 군 치 ( 郡治 ) 라고 주장하지마는 이러한 그릇은 혹 남낙랑이 한과 교통할 때에 수입한 것이거나 ,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과의 싸움에 이겼을 때 노획한 것일 것이요 , 이로써 지금의 대동강 연안이 낙랑 군치임을 단언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제4장 鷄立嶺(계립령) 이남의 두 새나라

1.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계립령은 지금의 조령 ( 鳥領 : 새재 ) 이다 . 지금 문경읍 ( 聞慶邑 ) 의 북산 ( 北山 ) 을 계립령이라고 하지마는 , 고대에는 조령의 이름이 `저릅 재 '이니 , `저릅'은 삼 ( 麻 ) 의 옛 말이다 . `저릅'을 이두자의 음으로는 `계립 ( 鷄立 ) '이라 쓰고 , 뜻으로는 `마목 ( 麻木 ) '이라 쓰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령이 곧 계립령이다 .

계립령 이남은 지금 경상남북도의 총칭인데 , 계립령의 일대로 지금의 충청북도를 막으며 , 태백산 ( 太白山 : 奉化의 태백산 ) 으로 지금의 강원도를 막고 , 지리산으로 지금의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막으며 , 동과 남으로 바다를 둘러 따로 한 판국이 되었으므로 조선 열국 ( 列國 ) 의 당시에 네 부여 ( 고구려도 혹 卒本扶餘라함 ) 가분립한다 , 고구려가 동부여를 정복한다 , 또 낙랑을 정복한다 , 위씨가 한에게 망하여 그 땅이 사군 ( 四郡 ) 이 된다 , 백제가 마한을 토멸한다---하는 소란이 있었지만 영 ( 領 ) 이남은 그런 풍진 ( 風塵 ) 의 소식이 들리지 않아 , 진한 · 변 한의 자치령 수십 나라가 그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에 의거하여 벼 · 보리 · 기장 · 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 · 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고 철을 채취하여 북쪽 여러 나라에 공급하고 , 변진 ( 弁辰 ) 은 음악을 좋아하여 변한슬 ( 弁韓瑟 : 불한고 ) 이란 것을 창작하여 문화가 매양 발달하였으나 , 일찍이 북방의 유민으로 마한의 봉지 ( 封 地 ) 를 받았으므로 마한의 절제 ( 節制 ) 를 받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절제를 받았다 . 그러나 그 절제는 소극적으로  a) `신수두'의 건설 과  b)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 적극적으로  1) 해마다 의 조알 ( 朝謁 ) 과  2) 토산물의 진공 ( 進貢 ) 을 행할 뿐이었는데 , 나중에 진한 자치부는 신라국 ( 新羅國 ) 이 되고 , 변진 자치부는 여섯 가락 ( 加羅 ) 연맹국이 되어 , 차차 백제에 반항하기에 이르렀다 .

2.加羅(가라) 여섯나라의 건설

지금의 경상남도 등지에 변진의 12 자치부가 설립되었음은 제 3 편 제4 장에 말하였거니와 , 위의 각 자치부를 대개 `가라'라 일컬었다 . `가 라' 란 큰 소〔大沼〕의 뜻이니 , 각 부가 각각 제방을 쌓아서 냇불을 막아 큰 소를 만들고 , 그 부근에 자치부를 설치하여 그 부의 이름을 `가라'라 일컬은 것이었다 . `가라'를 이두문으로 `가라 ( 加羅 ) ' , `가락 ( 駕洛 ) ' , `가야 ( 加耶 ) ' , `구야 ( 狗邪) ' , `가야 ( 伽倻 ) ' 등으로 썼으니 , 야 ( 耶 ) · 야 (邪) · 야 ( 倻 ) 등은 옛 음을 다 `라'로 읽은 것이고 , `가라'를 혹 `관국 ( 官國 ) '이라 썼으니 , `관 ( 官 ) '은 그 음의 초성 · 중성을 떼어 `가'로 읽고 , `국 ( 國 ) '은 그 뜻의 초성 · 중성을 떼어 `라'로 읽은 것이다 . 기원 42 년경에 각 가라의 자치부원 ( 自治部員 ) · 아도간 ( 我刀 干) · 여도간 ( 汝刀干) · 피도간 ( 彼刀干) · 오도간 ( 五刀干 ) · 유수간 ( 留水干) · 유천간 ( 留天干) · 신천간 ( 神天干 ) · 신귀간 ( 神鬼干 ) · 오전간 ( 五天干 ) 등이 지금의 김해읍 ( 金海邑 ) 귀지봉 ( 龜旨峰 ) 위에 모여 대계 ( 大계 : 계는 당시 自治會의 이름 ) 를 베풀고 , 김수로 ( 金首露 ) 6 형제를 추대하여 여섯 `가라'의 임금을 삼았다 .

김수로는 제 1 가라 , 곧 김해를 맡아 `신가라'라 일컬으니 , `신'은 크다는 뜻이요 , 첫째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 `신가라'는 전사 ( 前史 ) 에 금관국 ( 金官國 ) 이라 쓴 것이 옳은데 , 가락 ( 駕洛 ) 혹은 구야 ( 狗邪) 라고 썼으니 , 이 둘은 다 `가라'의 이두자이므로 , 이로써 여섯 가라를 총칭 하는 것은 옳으나 , 다만 `신가라'를 가리켜 일컬음은 옳지 않다 .

둘째는 `밈라가라'니 , 지금 고령 ( 高靈 ) 의 앞내를 막아 가라〔大沼〕를 만들고 , 이두자로 `미마나 ( 彌摩那 ) ' 혹은 `임나 ( 任那 ) '라 쓴 것으로 서 , 여섯 가라 중 그 후손이 가장 강대하였으므로 전사에 대가라 ( 大加羅 ) 혹은 대가야 ( 大加耶 ) 라 기록하였다 .

셋째는 `안라가라'이니 , 지금 함안 (咸安 ) 의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 들고 , 이두자로 `안라 ( 安羅 ) ' , `아니라 ( 阿尼羅 ) ' 혹은 `아니량 ( 阿尼良 ) '이라 기록한 것인데 , 아니량이 나중에 와전하여 `아시라 ( 阿尸羅 ) '가 되고 아시라가 다시 와전하여 `아라 ( 阿羅 ) '가 되었다 .

넷째는 `고링가라'이니 , 지금의 함창 ( 咸昌 : 尙州郡 ) 으로 또한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고령 ( 古寧 ) 이라 기록한 것인데 , `고 링가라'가 와전하여 `공갈'이 되었으니 지금의 `공갈못〔恭儉池〕 '이 그 자리이다 . 여섯 가라 고적 중 오직 이것 하나가 전해져 그 물에는 연꽃 · 연잎이 오히려 수천 년 전의 풍경을 말하는 듯하더니 , 이조 광무 ( 光武 ) 시절에 총신 ( 龍臣 ) 이채연 ( 李采淵 ) 이 논을 만들려고 , 그 둑을 헐어 아주 폐허가 되게 하였다 .

다섯째는 `별뫼가라'이니 , `별뫼가라'는 `별뫼'라는 산중에 만든 가라로서 지금의 성주 ( 星州 ) 다 . 이두자로 `성산가라 ( 星山加羅 ) ' 혹은 `벽진가라 ( 碧珍加羅 ) '로 기록한 것이다 .

여섯째는 `구지가라'니 , 지금 고성 ( 固城 ) 의 중도 ( 中島 ) 이다 . 역시 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 이두자로 `고자가라 ( 古資加羅 ) '라 기록할 것인데 , 여섯 나라 중 가장 작은 나라이므로 또한 `소가야 ( 小加耶 ) '라 일컬었다 .

여섯 가라국이 처음에는 형제의 연맹국이었으나 나중에 연대가 내려갈수록 촌수가 멀어져 , 각각 독립국이 되어 각자의 행동을 취하였는데 , 삼국사기에 이미 육가라 ( 六加羅 ) 본기 ( 本紀 ) 를 빼고 오직 신라 본기와 열전 ( 列專 ) 에서 신라와 관계된 가라의 일만 기록한 가운데 , `신가라'를 금관국이라 쓴 이외에는 그 밖의 다섯 가라를 거의 구별이 없이 모두 가야 ( 加耶 ) 라 써서 그 가야가 어느 가라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게 된 것이 많다 . 이제 이 책에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구별하 여 쓰고 , 여섯 가라의 연대도 삭감당한 듯하므로 신라의 앞에 기술하 였다 .

3.新羅(신라)의 건국

종래의 학자들이 다 , `신라사가 고구려 · 백제 두 국사보다 비교적 완전하다 . '고 하였으나 , 이는 아주 모르는 말이다 . 고구려사와 백제 사는 삭감이 많거니와 , 신라사는 위찬 ( 僞撰 ) 이 많아서 사료로 근거 삼을 것이 매우 적으니 , 이제 신라 건국사를 말함에 있어 이를 대강 논 술하려 한다 .

신라의 제도는 6 부 ( 部 ) 3 성 ( 姓 ) 으로 조직되었는데 , 신라 본기에 의거하면 6 부는 처음에 알천양산 ( 閼川楊山 ) · 돌산고허 ( 突山高墟 ) · 무산 대수 ( 茂山大樹 ) · 자산진지 ( 자山珍支 ) · 금산가리 ( 金山加利 ) · 명활산 고야 ( 明活山高耶 ) 의 여섯 마을이었는데 , 신라 건국 후 제 3 세 유리왕 9 년 ( 기원 32 년 ) 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주었다 . 곧 알천양산은 양부 ( 梁部 ) 라 하고 성을 이 ( 李 ) 로 하였으며 , 돌산고허는 사량부 ( 沙梁部 ) 라 하고 성을 최 ( 崔 ) 로 하였으며 , 무산대수는 점량부 ( 漸梁部 : 一名 弁梁部 ) 라 하고 성을 손 ( 孫 ) 으로 하였으며 , 자산진지는 본피 부 ( 本彼部 ) 라 하고 성을 정 ( 鄭 ) 으로 하였으며 , 금산가라는 한기부 ( 漢祇部 ) 라 하고 성을 배 ( 裵 ) 로 하였으며 , 금산가라는 한기부 ( 習比部 ) 라 하고 성을 설 ( 薛 ) 로 하였다고 한다 .

3 성은 박 ( 朴 ) · 석 ( 昔 ) · 김 ( 金 ) 세 집이니 , 처음에 고허촌장 ( 高墟村長 ) 소벌공 ( 蘇代公 ) 이 , 양산 ( 楊山 ) 아래 나정 ( 羅井 ) 곁에 말이 꿇어앉아 우는 것을 바라보고 쫓아가보니 , 말은 간 곳이 없고 큰 알 하나가 있으므로 , 이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 데려다가 기르고 성을 박이라고 하였는데 , 그가 나온 큰 알이 박만하므로 `박'의 음을 딴 것 이라고 한다 . 이름을 혁거세 ( 赫居世 ) 라고 하였는데 , 혁거세는 그 읽는 법과 뜻이 다 전하지 않는다 . 나이 13 살에 영특하고 숙성하므로 백성이 그를 높여 거서간 ( 居西干) 을 삼았다 . 거서간은 그때의 말로 귀인 ( 貴人 ) 의 칭호라고 한다 . 이것이 신라 건국 원년 ( 기원전 57 년 ) 이고 , 이이가 박씨의 시조이다 .

신라의 동쪽에 왜국 ( 倭國 ) 이 있고 , 왜국의 동북쪽 1 천 리에 다파나국 ( 多婆那國 ) 이 있는데 , 그 국왕이 여국왕 ( 女國王 ) 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이를 밴 지 7 년만에 큰 알을 낳으므로 , 왕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내다 버리라고 하니 , 여자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비단으로 싸고 금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 그 금궤가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니 , 금관국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가지지 아니하였는데 , 진한의 아진포 ( 阿珍浦 ) 포구에 이르니 바닷가의 한 노파가 이를 건져냈다 . 열고 보니까 ,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어 이 노파는 데려다가 길렀다 . 이 때가 박혁거세 39 년 ( 기원전 19 년 ) 이었는데 , 금궤에서 빠져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 ( 脫解 ) 라 하고 금궤가 와 닿을 때에 까치〔鵲〕가 따라오면서 울었으므로 작 ( 鵲 ) 자의 변을 따서 성을 석 ( 昔 ) 이라 하니 , 석씨의 시조다 .

석탈해 ( 昔脫解 ) 9 년 ( 기원 65 년 ) 에 금성 ( 金城 : 신라의 서울 , 곧 慶 州 ) 서쪽 시림 ( 始林 ) 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므로 대보 호공 ( 瓠公 ) 을 보내어 가보게 하였더니 , 금빛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므로 , 그 금궤를 가져다가 열어보니 , 또 한 조그만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데려다가 기르면서 이름을 알지 ( 閼智 ) 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 ( 金 ) 이라 하니 이는 김씨의 시조라 하였다 .

궤에서 나왔다 , 알에서 깨어났다 하는 신화는 그때 사람이 그 시조 의 출생을 신이 ( 神異 ) 하게 장식한 것이거니와 , 다만 6 부 · 3 성의 사적 이 고대사의 원본이 아니고 후세 사람의 보태고 줄임이 많음은 가석한 일이다 . 이를테면 조선 고사의 모든 인명 · 지명이 처음엔 우리말로 짓고 이두자로 기록하였는데 , 그 뒤 한문화 ( 漢文化 ) 가 성행하면서 한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 원래는 `메주골'이라 하고 , `미추홀 ( 彌鄒忽 ) ' 혹은 `매초홀 ( 買肖忽 ) '이라 쓰던 것을 나중엔 인천 ( 仁川 ) 이라 고친 따위인데 , 이제 알천양산 ( 閼天楊山 ) · 돌산고허 ( 突山高墟 ) 등 한자로 지은 여섯 마을의 이름이 6 부의 본 이름이고 , 양부 ( 梁部 ) · 사량부 ( 沙梁 部 )---등 이두자로 지은 6 부의 이름이 여섯 마을의 나중 이름이라 함이 어찌 앞뒤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 아닌가 , 하는 의문이 있음이 그 하나다 .

신라가 불경을 수입하기 전에는 모든 명사를 다만 이두자의 음이나 뜻을 맞추어 쓸 뿐이었는데 , 불교가 성행한 뒤에 몇몇 괴벽한 중들이 비슷만 하면 , 불경의 숙어에 맞추어 다른 이두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 예를 들면 소지왕 ( 炤智王 ) 을 혹 비처왕 ( 毘處主 ) 이라 일컫는데 , 소지 나 비처가 다 `비치 '로 읽은 것이지마는 ,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 소지는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요 , 유리왕 ( 圖理王 ) 을 혹 세리지왕 ( 世利智王 ) 이라 일컫는데 , 유리나 세리가 다 `누리 '로 읽은 것이 지마는 , 유리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 세리는 또한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 . 탈해왕 ( 脫解王 ) 도 그 주에 일명 `토해 ( 吐解 ) '라 하였는데 , 탈해나 토해는 다 `타해' 혹 `토해'로 읽을 것이고 , 그 뜻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 당시의 속어로 된 명사임은 분명하니 , 토해 ( 吐解 ) 는 본래 쓴 이두자이고 , 탈해는 고쳐 만든 이두자로서 , 불경에 해탈 ( 解脫 ) 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토해의 뜻을 탈 ( 脫 ) 로 고쳐 만든 것이다 . 원래는 당시 속어의 음을 취한 것이고 , 탈출 ( 脫出 ) 혹은 해출 ( 解出 ) 의 뜻이 없으니 , 금궤에서 탈출하였으므로 탈해라 하였다고 함이 괴벽한 중들의 부회 ( 附會 ) 임을 단언할 수 있음이 그 둘이다 .

3 성의 시조가 다 큰 알에서 나왔으니 , 그 큰 알은 다 `박'만 할 것인데 , 어찌하여 3 성의 시조가 다 같은 박씨가 되지 않고 , 박씨 시조 이 외에 두 시조는 석씨와 김씨가 되었는가 ? 석 · 김 두 성이 다 금궤에서 나왔는데 어찌하여 같은 김씨가 되지 아니하고 , 하나는 석씨 , 하나 는 김씨가 되었는가 ? 석탈해 ( 昔脫解 ) 의 금궤에 까치가 따라와 울었으므로 , 작 ( 鵲 ) 자의 변을 따서 석씨 ( 昔氏 ) 가 되었으며 , 김알지 ( 金斡智 ) 가 올 때에 닭이 따라와 울었으니 , 계 ( 鷄 ) 자변을 따서 해씨 ( 采氏 ) 가 되어야 옳겠는데 어찌하여 두 사람에게 다른 예를 써써 앞에서는 김씨가 되지 않고 석씨가 되었으며 , 뒤에서는 해씨가 되지 않고 김씨가 되었는가 ? 신화라도 이같이 뒤섞여 조리가 없을 뿐더러 게다가 한자 파자장 ( 破字匠) 의 수작이 섞여서 이두문 시대의 실례와 많이 틀림이 그 셋이다 .

초년 ( 初年 ) 에 초창 ( 草創 ) 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 . '느니 ,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 . '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 `북명인 ( 北溟人 ) 이 밭을 갈다가 예왕 ( 濊王 ) 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 '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듯하다 . 왜냐하면 북명 ( 北溟 ) 은 `북가시라'--- 북동부여의 별명으로 지금의 만주 훈춘 등지이고 , 고구려 대주류왕의 시위장사 ( 待衛壯士 ) 괴유 ( 怪由 ) 를 장사 지낸 곳인데 , 이제 훈춘의 농부가 밭 가운데서 예왕의 도장을 얻어 수천 리를 걸어 경주 한 구석의 조그만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 함이 어찌 사실다운 말이랴 ? 이는 경덕왕 ( 景德王 ) 이 동부여 곧 북명 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당한 말이니 , 다른 것도 거의 믿을 가치가 적음이 그 넷이다 .

신라가 여러 나라중에서 문화가 가장 늦게 발달하여 역사의 편찬이 겨우 그 건국 6 백 년 후에야 비로소 억지로 북쪽 여러 나라의 신화를 모방하여 선대사 ( 先代史 ) 를 꾸였는데 , 그나마도 궁예 ( 弓裔 ) · 견훤 ( 甄萱 ) 등의 병화 ( 兵火 ) 에 다 타버리고 , 고려의 문사들이 남산 · 북산의 검불을 주워다가 만든 것이므로 , 신라 본기의 기록의 진위를 가려냄이 고구려 · 백제 두 나라 역사나 마찬가지인데 , 역사가들이 흔히 신라사가 비교적 완벽된 것인 줄로 알아 그대로 믿었다 .

나의 연구에 의하면 , 신라는 진한 6 부의 총칭이 아니고 , 6 부 중의 하나인 사량부이다 . 신라나 사량은 다 `새라'로 읽을 것이요 , `새라' 는 냇물 이름이니 , `새라'의 위에 있으므로 `새라'라 일컬은 것이고 사량은 사훼 ( 沙喙 : 진흥왕 비문에 보임 ) 라고도 기록하였으며 , 사훼는 `새불'이니 또한 `새라'위에 있는 `불' --들판이기 때문에 일컬은 이름이다 . 본기에 신라의 처음 이름을 `서라벌 ( 徐羅筏 ) '이라 하였으 나 , 서라벌은 `새라불'로 읽을 것이니 또한 `새라'의 `불'이라는 뜻 이다 . 시조 혁거세는 곧 고허촌장 소벌공 ( 蘇伐公 ) 의 양자이고 , 고허촌은 곧 사량부이니 , 소벌공의 `소벌 ( 蘇伐 ) '은 또한 사훼와 같이 `새불'로도 읽을 것이므로 지명이고 , 공 ( 公 ) 은 존칭이니 , 새불 자치회 ( 自 治會 ) 의 회장이므로 `새불공'이라 한 것이다 말하자변 소벌공은 곧 고허촌장이라는 뜻인데 , 마치 사람의 이름같이 씀은 역사가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 새라 부장 ( 部長 ) 의 양자인 박혁거세가 6 부의 총왕 ( 總王 ) 이 되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새라'라 하고 이두자로 신라 ( 新羅 ) . 사로 ( 斯盧 ) · 사라 ( 斯羅 ) · 서라 ( 徐羅 ) 등으로 쓴 것이다 .

3 성의 박씨뿐 아니라 , 석씨 · 김씨도 다 사량부의 귀인의 성이니 , 3 성을 특별히 존숭하는 것은 또한 삼신설 ( 三神說 ) 에 의방 ( 依倣 ) 한 것이다. 본기 석탈해왕 9 년 ( 기원65년 ) 에 비로소 김씨 시조인 영아 ( 영兒 ) 김알지를 주웠다고 하였으나 , 파사왕 ( 婆娑王 ) 원년 ( 기원 80년) 에는 왕후 사성부인 ( 史省夫人 ) 김씨는 허루갈문왕 ( 許婁曷文王 : 추존한 왕을 갈문왕이라 함 ) 의 딸이라 하였으니 , 그 나이를 따지면 허루 ( 許婁) 도 거의 알지의 아버지뻘되는 김씨인 것이니 , 이로 미루어보면 박 · 석 · 김 3 성이 처음부터 사량부 안에 서로 연흔 ( 聯婚 ) 하는 거족 ( 巨族 ) 이었는데 , 같이 의논한 끝에 6 부 전체를 가져 3 성이 서로 임금 노릇하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 이에 진한 자치제의 판국이 변하여 세습 제왕의 나라가 됨에 이르렀다 .

                                                                         제5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