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죽음을 향한 경외심

고인돌

우리나라는 거의 전세계에 걸쳐 퍼져 있는 고인돌의 밀집분포지역이다. 하지만 고인돌은 아직까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많은 의문점을 안고 있다. 정확한 축조 시기와 기원, 목적 등 고인돌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성격을 깊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남 영광군 홍농읍 성산리 고인돌군

인돌은 일반적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거석문화의 일종이다. 거석문화는 자연석이나 가공한 돌을 사용한 건조물로, 고인돌 외에 선돌[立石]ㆍ열석(列石)ㆍ 환상열석(環狀列石)ㆍ돌널무덤[石棺墓]ㆍ돌무지무덤[積石墓] 등이 있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혹은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로도 부르고,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 하며, 기타 지역에서는 돌멘(Dolmen)이나 거석(巨石, Megalith)으로 부른다.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일본에서는 죠몽(繩文) 만기에서 야요이(彌生) 중기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초기까지, 동남아시아에서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거석숭배 사상에 의해 만들어졌다.

 

북방 문화를 융합한 한반도의 고인돌 문화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에 대해선 크게 자생설, 남방설, 북방설 등 3가지 설이 있다. 자생기원설은 고인돌이 우리나라에 가장 밀집 분포하고 형식도 다양하며, 주변의 고인돌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것이다. 이 설은 고인돌이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세계적인 밀집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고 또 오랜기간 축조되어 어느 지역의 고인돌보다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남방기원설은 동남아시아로부터 해로를 통해 도작(稻作)문화와 함께 중국 동북해안 지방과 한반도에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이 학설은 우리나라에서 평안도ㆍ황해도ㆍ전라도 등 서해안을 따라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고, 남방문화의 요소인 난생설화와 고인돌의 분포 지역이 일치한다는 점에 근거한다. 하지만 중국 동해안 지역 가운데 고인돌이 분포하는 곳은 절강성뿐이고 그나마 40여 기에 지나지 않는데다 형태도 다르기 때문에 고인돌의 기원과 이 지역을 관련 짓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전남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고인돌군

 북방기원설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일돌이 북방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요녕지방의 돌널무덤에서 발전했다고 본다. 돌방무덤의 뚜껑돌이 1매석으로 대형화되면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이 되고, 지하의 무덤방이 지상에 드러나면 북방식 고인돌이 된다는 것이다. 형태의 유사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지만, 중국 요령지방 주변과 시베리아 등 북방 지역에서 서유럽 사이에는 고인돌이 분포하지 않는다.

 고인돌은 농경문화, 세골장(洗骨葬) 풍습, 난생설화 등 남방문화의 요소가 보이는 한편 북방문화의 요소인 비파형 동검 등 청동기문화의 유물이 껴묻거리(부장품)로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 기원을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이제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아시아 지역의 중심 분포지가 우리나라이고, 형식도 북쪽에는 북방식이, 남쪽에는 남방식이 많으며, 돌널무덤과 유사한 개석식 고인돌이 중국 요녕성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남ㆍ북방의 문화를 융합한 독자적인 고인돌문화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인돌 축조의 중심 시기는 청동기시대

 고인돌의 축조 시기는 출토 유물의 연대에 따라 추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의 상한 연대에 대해 신석기시대 축조설과 청동기시대 축조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신석기시대 축조설은 고인돌이 씨족 공동무덤의 성격을 띠며 그 주변에서 뗀석기(타제석기), 빗살무늬토기편 등이 출토된다는 점에 근거한다. 청동기시대 축조설에는 다시 기원전 2000년대 말과 1000년대 초기ㆍ중기설이 있다. 기원전 200년대 말설은 중국 요녕지방의 고인돌 연대에 비기는 것이며, 기원전 1000년대 초설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형성과 관련 짓는 입장이다. 기원전 1000년대 중기설은 1960년대 초까지 북방식 고인돌의 연대로 제시된 주장이다. 일반적으로는 기원전 8세기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한 연대에 대해서는 청동기시대 전기 말설, 후기설, 기원후설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 말설은 세형동검 문화보다 앞선 기원전 4세기 전후의 비파형동검 문화 시기로, 후기설은 기원전 3~2세기 또는 서력 기원전후인 세형동검 문화 시기로 본다. 기원후 1세기와 4세기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 기원후설은 금석병용기 시대 혹은 가야계 수혈식무덤방과 연결시켜 보는 입장이다. 대체적으로는 기원전 3~2세기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자연환경 조건이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던 선사시대 사람들은 영원불멸의 자연물, 즉 돌에 대한 숭배나 신앙심에서 거대한 바위를 이용한 기념물을 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시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은 사람이 다시 활동할 수 없게끔 시체를 매장한 뒤 큰 돌로 덮은 것이다. 주로 큰 강이나 하천변의 평지, 구릉 위, 산기슭, 고갯마루 등 사람이 활동하는 주변에 세웠는데, 이는 무거운 돌을 얻고 옮기기 쉽게 하려는 선택이었다.

영국 남부 월트셔에 있는 거석 기념물 스톤헨지(Stonehenge). 대표적인 선사시대의 유적으로 기원전 3100~110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은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연안, 인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등 거의 세계 전역에 분포하며, 그 분포 지역은 바다에 인접한 곳에 밀집해 있다. 그 중 동북아시아의 중국에는 절강성에 40여 기와 요령성에 300여 기가 있으며, 일본에는 600여 기, 한반도에는 3만여 기가 분포한다. 대동강 유역의 1만여 기와 전남 지방의 2만여 기가 그것이다. 이는 5만 5000여 기의 거석물 가운데 순수 고인돌은 수천 기뿐인 유럽과 거석물이 수백 기에 불과한 동남아시아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다.

 

북방식ㆍ남방식ㆍ개석식, 지역 따라 다른 형태

 고인돌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는 각 지역마다 독자적 전통과 문화 속에서 고인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고인돌은 크게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 등 3종류가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잘 다듬은 판석 3~4매로 짜맞춘 석실을 지상에 축조하고 그 위에 편평하고 거대한 판석상의 돌을 얹는 것으로, 책상을 닮았다 하여 탁자식으로도 부른다. 대형 북방식은 요동반도와 한국 대동강 유역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구릉이나 산중턱에 1기씩만 세운다.

강화도 부근리 소재 북방식 고인돌(사진 왼쪽, 사적 제 137호)과 전북 부안 구암리 소재 남방식 고인돌(사적 제 103호).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고임돌의 형태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의 구분이 가능하다.

 남방식 고인돌은 판석을 세우거나 깬돌로 쌓은 무덤방[墓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4~8개의 받침돌을 놓은 뒤 커다란 돌로 덮는 것으로, 바둑판 모양이라 하여 기반식(碁盤式)으로도 부른다.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을 한 것은 호남과 영남 지방에서만 보이며 무덤방은 없는 것이 많다.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의 고인돌은 소형의 덮개돌에 받침돌을 괴었다.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돌을 놓은 형식으로 요동반도, 한반도, 일본 구주 지역에 널리 분포한다. 이는 지석이 없는 남방식으로 분류하여 무지석식이라고도 한다.

 고인돌의 무덤방은 돌널형[石棺形]ㆍ 돌덧널형[石槨形]ㆍ 구덩형[土壙形]ㆍ독널형 [饔棺形]이 있으며, 평면은 긴 네모꼴이 대부분이다. 돌널형과 돌덧널형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보이지만 지역에 따라 약간씩 형태가 다르다. 특히 돌널형은 일본 구주 지역의 지역적 특징을 갖고 있다.

 

전남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 고인돌의 돌덧널형 무덤방

 

동북아는 개인묘, 서유럽은 공동묘가 많아

 고인돌의 출토 유물에는 크게 석실 안에 부장했던 의례용 유물과 석실 주변에서 발견되는 실생활용 유물이 있다. 의례용 유물은 무기류, 공렬토기류, 장신구류 등이며, 가장 많은 것은 무기류인 간돌검과 돌화살촉[石鏃]이다. 간돌검은 보통 1점씩 출토되나 돌화살촉은 여러 점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당시 특수계층만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는 비파형동검이 많고 뚜겁창이나 청동도끼, 청동촉도 있다. 비파형동검은 한반도 남단, 특히 여수반도에서 많이 출토되며, 공렬토기로는 붉은간토기[紅陶]와 가지문토기[彩文土器]가 출토된다.

전남 여수시 오림동 고인돌에 새겨진 인물상

 고인돌에서는 출토된 인골을 보면 하나의 무덤방에 한 사람만을 묻은 것이 보통이지만, 한쪽 단벽의 개폐가 쉬운 북방식 고인돌의 경우는 무덤방 안을 몇 개의 칸막이로 막은 공간에 인골이 흩어져 있어 여러 사람을 묻은 특수한 예다. 서유럽의 고인돌은 여러 사람을 매장한 공동묘가 대부분이며, 중국 요녕성에는 바로펴묻기[伸展葬]와 굽혀묻기[屈葬]가 많으나 한 무덤방 안에 여러명의 시신을 화장한 예도 있다.

 

 

많은 인력 동원이 가능한 사회의 산물

 고인돌의 덮개돌은 보통 10톤 미만이지만 대형의 북방식과 남방식은 20~40톤에 이르며, 100톤 이상 되는 초대형 덮개돌도 있다. 때문에 고인돌 축조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작업이 덮개돌이 채석과 운반이다. 덮개돌은 주변 산에 있는 바위나 암벽에서 떼어낸 바위를 이용했는데, 덮개돌의 측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멍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해 떼어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떼어낸 돌은 고인돌을 축조할 장소로 옮겨지게 되는데, 1톤의 덮개돌을 1마일(1.6km) 옮기기 위해선 16~20명이, 32톤의 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려면 200여 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것은 한 사람당 100kg의 힘을 들여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둥근 통나무 여러 개를 엇갈리게 깔고 덮개돌을 옮겨 놓은 후 끈으로 묶어 끌거나 지렛대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운반해 온 덮개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또는 받침돌에 흙을 경사지게 돋운 위로 끌어올린 후 흙을 제거했다고 추정된다.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할 만큼의 인력 동원은 북방 유목사회보다는 정착 농경사회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에서는 씨족사회설, 부계제사회설, 부족사회설, 족장사회설, 공동체사회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고인돌이 혈연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집단의 가족공동묘라는 씨족사회설과 부계제사회설은 1960년대 이전의 학설이다. 부족사회설은 고인돌을 평등한 공동체사회의 연장자나 유능한 지도자의 무덤으로, 족장사회설은 선사시대 사회 발달 과정에서 전문인이 출현하여 지역간 문화전파 및 교역을 촉진하면서 농경을 바탕으로 계급이 발생하게 된 사회의 산물로 본다.

고인돌 운반 과정 재현. 고인돌을 운반하기 위해선 그 크기에 따라 적게는 16~20명, 많게는 200여 명의 힘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사회설은 고인돌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여러 개의 군집으로 수십 기씩 여러 곳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일정한 지역 안에서 집단간의 상호 협동체계에 의해 혈연 혹은 지연으로 뭉친 공통체사회의 공동무덤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공동체사회가 집단간 전투를 통한 흡수 통합 과정에서 유력한 집단과 지배자가 출현하여 소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그 과정에서 숨진 전사자의 공헌묘로 고인돌을 축조했다는 견해도 있다.

글 / 이영문(목포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