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재판을 모면한 사람들

2.일왕 히로히토의 전쟁책임과 동경재판

가.개관

(1) 성역, 히로히토의 전쟁책임

올봄 대학입시에서 지방대학인 시마네(島根)대학이 출제한 논술시험문제를 둘러싸고 최근 일본내에서 일대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 2월 25일 이 대학의 법문학부가 "일왕의 전쟁책임과 전후정치""국제화시대의 상징 왕제의 존재"등을 논한 헌법학자의 글을 소개한 뒤 자신의 견해를 밝히도록 논술시험문제를 출제한 것. 이를 한달 뒤 우익잡지가 기사화, 일방적인 설문이라고 비난하고 나섰고 잇따라 인근 오사카의 우익단체회원들이 전화와 편지등으로 대학당국에 항의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며칠뒤 우익단체의 가두선전차량 8대가 학교에 몰려가 시위를 벌였고 우익정치단체 간부들이 학장을 면담한 자리에서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 에피소드는 일본사회에서의 우익단체의 활동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줌과 동시에 이들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일왕의 존재가 어떠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히로히토 일왕의 전쟁책임은 아직도 객관적으로 논의될 수 없는 정신적 상황에 일본은 처해있다. 터부시 되던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이 1989년 그의 죽음으로 공개적인 토론의 장으로 올려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히로히토의 측근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일기와 회고록이 공개되면서 히로히토가 결코 정당정치의 옹호자가 아니었으며 실질적 군최고사령관이었다는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오히려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은 구미에서 더욱 잘 알려져 있거나 잘 추궁되고 있다. 1971년 10월 12일 히로히토 일왕부처가 독일의 본을 방문하였을 때 다수의 독일인 학생들과 다른 아시아인 유학생들이 일왕의 방문 반대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이 내걸은 프랑카드에는 "히틀러는 6백만명의 유태인을, 히로히토는 5천만명의 아시아인을 (살해하였다)"라고 씌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 11명이 체포되고 몇명은 재판까지 받았다.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은 생전의 그 뿐만아니라 그의 아들 아키히토조차 세계 어느 곳이나 자유스럽게 여행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원죄이다. 아키히토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 어디에서도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는 항의의 목소리가 드높았다. 아직도 여전히 일본이 일으킨 전쟁책임으로 수많은 아시아인 희생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아니라 그 책임에 대한 사죄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일본의 상징으로서 일왕의 방문길에 언제나 항의와 분노의 시위가 잇따를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2)최상의 방어

전쟁의 종료가 가져온 가장 첨예한 문제는 바로 왕제 자체의 존립이었다. 개인 히로히토의 운명 보다도 왕제의 미래 자체에 보다 더 많은 일본인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은 아들 아키히토에 대한 히로히토의 양위가 일왕의 전쟁책임을 진정시키는 유효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왕족인 梨本宮守正이나 측근 木戶幸一등이 전범용의자로 구금되면서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일본정부와 관리들은 연합국이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려는 의지와 암시가 분명하였다면 퇴위를 보다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것을 고려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는 동경재판의 피고인으로 기소되기는 커녕 증인으로 등장하는 일까지 피할 수 있었다. 더구나 비록 신격화된 신분에서 인간의 지위로 내려오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왕관을 벗는 것조차 모면하였다. 일본제국의 동맹국이자 파트너였던 독일의 제3제국이 완전히 붕괴하고 제3제국을 움직였던 나치당등의 조직이 불법조직으로 해체되었으며 그 지도자들이 처벌받게 된 것과는 참으로 대비되는 일이었다. 히틀러가 만일 자살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그를 살려두고 전후 독일의 점령정책을 시행하는데 활용하였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전전의 히로히토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그 어두운 시대의 기억을 가진 사람은 줄어들었다. 그 반면 일본 뿐만아니라 지구상의 사람들은 히로히토가 수동적이고 내향적인 군주 과학자, 해상 생물학자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히로히토는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면서 엘리자베스 여왕, 포드 대통령등 세계의 군주들과 정치지도자들의 영접을 받았다. 1989년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영국과 스페인의 왕가 이상으로 안정적인 입헌군주로서 그 영예를 누렸다. 일본 국민들로부터 전쟁을 종식시킨 일왕으로 존경받으면서 세상을 마칠 수 있었다. 히로히토는 단순히 살아남아 마지막 황제가 되지 않은데 지나지 않을 뿐만아니라 현대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가장 장수 군주가 되었다. 그는 분명 행운의 사나이였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전후 일본의 왕가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방어를 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물론 당시 일본점령의 책임을 지고 있던 미국의 공모와 합동에 의해 가능하였다. 미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왕의 보호와 왕제의 유지를 결정해 놓고 그 실현에 노력하였다. 당초에는 일본의 효과적인 점령정책을 위해서, 나중에는 냉전의 격화에 따른 소련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로서 일본의 안정과 부흥을 위해 미국은 왕제의 유지와 보호를 통해 일본과 밀월관계를 계속할 수 있었다.

나.히로히토 전쟁책임의 진상과 그 논쟁

(1) 일왕의 법적 지위와 전쟁의 권한

일왕은 대일본제국의 유일최고의 통치권자이자 대일본제국 군대의 유일최고의 통수권자였다. 그 뿐만아니라 일왕은 일본국 창조의 신의 萬世一系의 자손이라고 칭해지는 신적 권위였다.( 당시 시행중이던 '대일본제국헌법'의 제1조는 "대일본제국은 萬世一系의 일왕이 통치한다", 제 3조는 "일왕은 神聖하여 침범할 수 없다.", 제 4조는 "일왕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의 조항에 의하여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 최고의 권력과 신적 권위인 일왕의 명령과 통수없이는 일본국과 그 군대의 대외전쟁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일왕이 일본 군대의 최고의 통수권자임은 明治일왕이 1882년 일본의 근대적 육해군을 창설하면서 일본군대와 군인의 모랄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이른바 軍人勅諭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일본군대는 일왕자신이 통수하고 일왕은 모든 군인의 대원수이며 생명은 새털처럼 가벼우나 일왕에 대한 충절은 태산처럼 무겁다는 것등을 가르치고 있다. 일왕은 일본의 모든 국민과 군인들에게 신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더구나 일왕의 권위에 관한 이같은 지위는 단순히 윤리에 그치지 않고 법률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른바 대일본제국헌법 제11조는 일왕은 육해군을 통수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육해군을 통수하는 것은 오직 일왕일 뿐 정부도, 제국의회도 전혀 관여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참모총장을 장으로 하는 육군, 군령부총장을 장으로 하는 해군의 군령부가 일왕의 명을 받아 실무를 행하는 기관으로서 이들은 일왕에 직속하고 정부로부터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정부나 국민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오직 일왕의 명령을 받아 작전계획, 통수에 관한 제규정, 명령과 안을 만들고 일왕에게 보고하며 그 재가를 받아 육해군성, 부대의 사령관 기타 필요한 육해군기관에 일왕의 명령으로 전달되고 실시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왕이 전쟁의 결정과 추진, 그 결과에 대해 면책될 수는 없다.

*명령체계*

그만큼 일왕의 군대에 대한 통수권은 완벽하면서도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2) 책임면책의 이론과 허구

이 지위에 있었던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은 논의의 여지조차 없는 일이었다. 이 의문의 여지없는 사실이 일본에서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었다 . 그 책임을 부정하는 견해를 하나 예를 들어본다.

"히로히토는 예외적으로 단 두번에 걸쳐 機關說的 성격을 버리고 親政을 행사하였다. 그것은 2.26사건과 종전의 때였다. 앞의 경우 잠시 정부의 기능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사이에만 이니셔티브를 쥐었고 정부의 기능을 회복시켰다.뒤의 경우 정부가 스스로 기능을 포기하고 일왕의 이니셔티브를 호소하였다. 그 당시 일왕은 자신의 기관설적 성격을 버림으로써 자신에게 강제된 통수권적 성격을 극복하였다. - - -(그러나) 開戰 당시에는 정부의 기능이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왕이 친정을 행사할 여지가 없었다.- - -파국의 수년전에 일왕이 종전당시와 같이 이니셔티브를 가졌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종전의 때와 달리 아직 미래에 무수한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책임자를 무시하고 친정을 행사하지 않은 것을 책망 하는 것은 사후의 예언이 될 뿐이다 "

이상의 주장을 요약하면 일왕은 2.26사건과 종전 당시에만 친정적 기능을 행사하였던 바 이것은 일왕의 통수권적 기능이었다. 또한 이것은 일왕의 기관설적 기능을 버린 경우였다. 그러나 개전 당시에는 정부의 기능이 확립되어 있어 일왕의 친정이 발동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 책임은 모두 정부, 즉 東條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나아가 일왕이 친정적 기능을 왜 개전 당시에 행사하지 않았는가 하는 비판은 미래의 여러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는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편리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좋은 것은 모두 일왕이, 나쁜 것은 東條에게라는 원칙이 그 해석에 관철되어 있다. 그러나 일왕의 헌법상 권한이 통수권적 기능이었다는 사실은 위 견해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일왕이 "통수권적 기능"을 버리고 "기관설적 기능"에 만족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히로히토는 입헌군주로서 명목상의 권한만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그렇지만 히로히토가 당시 모든 전쟁의 결단과 그 수행의 과정에서 헌법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을 행사하였다는 점은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자료와 증언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에 의해 히로히토가 침략전쟁의 과정에서 어떻게 권한을 행사하였는지 몇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3) 일왕의 절대적 권력 행사의 사례들

i) 2.26사건과 일왕의 위력

일왕 히로히토는 일상적으로는 詔勅에 의해 직접적으로 국가와 국민을 통치하는데 그치지 않고 필요하다고 여길 때는 정부나 통수부 기타 그 어느 보좌기관의 발의도 필요없이 또는 그 반대를 무시하고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다. 가장 현저한 사례가 바로 2.26사건이었다. 1936년 2월 26일 동경의 일부 육군장교가 반란을 일으켜 일왕의 중신들인 내대신 齊藤實을 살해하고 시종장 鈴木貫太郞을 상해하는가 하면 수상관저등을 포위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군사행동으로 육군수뇌부를 통하여 일왕을 움직여 국가의 유신을 단행하려 한다는 명분이었다. 당시의 육군대신 川鳥義之는 일왕의 군사 최고고문기관인 군사참의관을 소집하여 반란군을 설득하여 군대로 복귀시키는 한편 이들의 뜻을 이해한다는 포고와 함께 계엄령을 내려 이들도 계엄군의 일부로 편입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은 히로히토는 처음부터 반란으로 단정하고 이들의 체포를 지시하여 반란 4일째 반란군의 지도자들의 일부는 자살하거나 체포 또는 자수함으로써 모든 사태가 끝이 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히로히토는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에 따라 주변의 권고와 조치와는 별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명석하고도 단호하게 결정하고 지시한 사실이 정확히 드러났다.

ii) 중국침략과 히로히토의 개입

히로히토는 아직 일왕이 되지 않은 채 섭정으로서 있을 당시인 1925년 12월 일본의 만주침략의 지주로서 만주 군벌 張作霖을 보호하고 그 반군인 郭松齡을 압박하기 위하여 본국 및 조선으로부터 3만5천의 병력을 파견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가 일왕이 된 후 중국내 일본인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1927년과 1928년 두해에 걸쳐 4번이나 수천 내지 수만명의 일본군을 중국 산동성등에 출병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출병은 중국의 항의를 받았고 일본을 지지하던 장작림마저 일본에 등을 돌리자 일본군은 1928년 6월 은밀히 그를 폭사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그 해결과정의 책임을 물어 수상 田中義一을 해임하였다.

1931년 중국 봉천에 가까운 柳條溝에서 남만주철도선로를 폭파하고 이것을 중국군이 한 것으로 가장한 다음 이를 구실로 봉천시를 점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만주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사령관과 관동군 사령관이 원래 관할구역 밖으로 출동할 때 받아야 하는 奉勅命令을 위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기고 독자적으로 출동하였음에도 히로히토는 모두 이를 사후 승인함으로써 당시 중국에 주둔한 현지 사령관이 사실상 마음놓고 중국 침략을 계속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였다.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는 미국의 항의까지 받은 중국의 錦洲점령을 치하하는 勅語를 내렸다. 이 칙어를 통하여 히로히토는 자위의 필요상 각지의 비적을 토멸하고 경비의 임무를 완수한 충열을 찬양하고 이로써 동양평화의 기초를 확립하도록 부탁하고 있다. 결국 동양침략을 적극 지지하면서 이 침략정책을 주도한 장교들을 부추김으로써 이들이 점차 침략의 범위를 만주와 내몽고, 나아가 중국의 상해등 본토로 확대한 것이다.

1937년의 蘆溝橋 사건은 중국의 본격적 침략을 야기하였다. 다급해진 중국측의 책임자처벌등의 약속과 함께 잠시 휴전이 성립되었지만 일본의 군부는 계속 본격적인 중국 침략의 준비를 하였다. 이른바 대군의 華北파견을 추진하면서 참모총장 閑院宮이 일왕을 만났을 때 히로히토는 배후에 있는 소비에트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을 정도로 세심한 고려끝에 참모본부의 안을 재가하였다. 중국 침략의 승기를 잡은 군부는 조기 화평론을 제시하였으나 내각은 이를 반대하였다. 히로히토는 철저한 침략정책을 주장한 내각에 동의함으로써 자신의 중국침략에 대한 책임을 의문의 여지없이 만들고 말았다 .

iii) 東條戰時內閣수립과 진주만공격의 책임

토조 히데유키의 전시내각을 불러온 1941년 10월의 고노에 수상의 사임은 바로 히로히토 자신의 전쟁에 대한 의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고노에가 개전반대론을 펴다가 결국 사임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히로히토 자신이 개전의 편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육군대신 토조에게 수상의 직위를 부여한지 7주가 되지 않아 히로히토는 진주만 공격을 허가하였다. 히로히토는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토조에게 그 전쟁의 명분이 무엇인지 묻기도 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작전의 타당성에 관하여 상세한 질문을 하기도 하였다. 작전의 연구를 함께 한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히로히토는 독일을 미국과의 전쟁에 협력케 한다든가 로마 법왕청을 통하여 외교사절 채널을 확보하는등의 전쟁종결의 경우의 수단을 처음부터 확보해 두는 일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12월 1일 미국과의 전쟁을 최종 결정한 御前會議는 바로 히로히토가 주재한 것이었다. 곧이어 그해 12월 8일 미국과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의 詔勅을 내려 모든 제군육군과 해군이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고 제국의 영광과 위신을 향상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東條는 일왕인 히로히토를 개전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의사를 대단히 존중한 것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후 4년의 태평양전쟁기간 동안 히로히토는 말과 행동으로써 일본의 전쟁목적의 성공적인 달성을 위해 일본의 국가원수로서 활동하였다

iv) 전쟁수행의 구체적 책임

히로히토가 군최고사령관으로서 야전군의 구체적 작전을 지시하고 전쟁수행의 전 영역에서 감독을 수행한 사실은 분명하다. 이른바 야마다 문서는 히로히토 일왕이 전쟁수행을 지도하는데 개입한 11가지의 중요한 예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대본영에 바탕 반도를 포함하여 필리핀에 대한 조기 공격을 명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또한 구아달카날 전투에서 육군항공부대의 투입을 명하거나 뉴기니아의 공격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중앙 솔로몬제도로부터의 철수를 비판하였으며 알류샨 열도에서 입은 손해에 대하여 미국에 대한 해상전투를 명하였다. 사이판섬의 재장악과 오키나와전투의 공격준비도 그의 고집에 의한 것이었다. 히로히토의 재가나 승인없이 이루어진 중요 전략과 전투의 결정이 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진주만기습공격의 성공, 말레이 반도와 필리핀에의 상륙, 버마 침공과 일본군의 공세작전이 순조롭게 진전되는 상황에서는 히로히토의 작전에 관한 발언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전황을 방관하고 있지 않았고 전황을 독자적으로 검토하고 통수부를 격려하거나 때로는 구체적으로 지시하였다. 통수부로서도 일왕의 기대에 응하기 위해 그 지시를 작전계획에 포함시켰다. 1942년 1월 6일 히로히토는 남방작전은 기존 계획보다 상당히 진도가 앞서나가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없는가라고 물어 杉山참모총장이 신작전계획의 수립을 담당 부장에게 지시하기도 하였다. 일왕의 이름으로 발령되는 대본영의 명령뿐만 아니라 남방군이 각 방면군이 예하부대에 내리는 명령에도 개입한 사례들도 있다. 1942년 5월 19일에는 필리핀에 있는 16사단을 만주에 주둔시킬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이어 남방작전이 거의 끝난 이 시점을 이용하여 중경을 공략하도록 지시한 것도 바로 히로히토였다.

다. 終戰前 미국과 연합군의 일왕 처리방침

(1) 미국의 대일점령정책과 왕제 문제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의 대일본점령정책은 왕제를 존속시키는 전제 위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원래 미국은 대일선전포고 직후인 1942년 2월 세계대전의 종료후의 전후계획에 관하여 헐 국무장관을 장으로 하는 전후대외정책에 관한 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 on Post-War Foreign Policy)를 새로이 설치하고 이어 그해 여름에는 극동반(Far Eastern Group)을 조직하여 전후 대일점령정책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연구의 결과 일본국파괴론에서부터 일본제국온존론까지 6가지의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극단적 입장보다는 점차 서양적인 의회민주주의의 수립이 아니라 타국의 권리를 존중하는 비군국주의적 정부의 수립을 연합국의 대일목적으로 한다는 개입신중론이 득세하였다.

미국 국무성은 1944년 2월 국무성 간부들로 구성된 전후계획위원회(Committee on Post-War Programs)에서 대일점령정책을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일본에 정통한 온건한 전문가들은 행정관료들의 협력을 얻고 점령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일본국민의 협력을 얻어야만 한다는 점을 먼저 강조하였다. 이들은 왕제를 폐지함으로써 이들의 협력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저항을 불러 일으키게 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일왕의 실권을 박탈하면 그만이며 명목적 의례적인 일왕의 역할만 남겨두면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정부의 최고권력을 점령군정이 장악하고 군정실시는 일왕의 이름을 이용하자는 실용론을 폈다. 이러한 실무자들의 의견은 당초 간부들에 의해 거부되었으나 전 주일대사였던 그루(Grew)가 그러한 실무자들에 동조함으로써 실용노선이 대세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제의 존속 그 자체는 인정하더라도 그 존속의 형태와 히로히토 개인의 책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었다. 그루 대사는 일왕 히로히토와 왕제를 구분하는 입장이었다. 설사 히로히토 개인이 전쟁에 반대하였다 하더라도 일왕의 이름 아래 전쟁이 행해진 이상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히로히토는 퇴임하여야 하지만 전후 민주적 평화적인 전후일본을 재건하는데 왕제는 자산이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왕제가 존속되더라도 그 실질적 권한은 정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설득력을 가졌다. 왕제의 일부정지라고 볼수 있는 이 견해가 1944년 12월 말 국무.육군.해군 3성의 차관보로 구성된 3성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에 의해 그대로 승계되어 대일정책의 기본이 되었다.

(2) 포츠담선언의 수용을 둘러싼 일본과 연합국의 관계

원폭의 투하와 소련의 참전은 일본지도자들에게 항복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은 항복을 준비하였다. 1945년 8월 9일 열린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몇명은 여전히 국체유지, 전범, 무장해제, 점령의 범위에 관하여 조건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만약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결사항전의 길 밖에 없다고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이 4조건은 포츠담선언을 거부하는 것이어서 연합국이 수용할 리가 없었다. 긴박한 논의 가운데 왕제의 존속을 도모하는 이른바 "國體護持"만이라도 요청해 보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리하여 중립국 스위스를 통하여 일왕의 존재 그 자체는 인정해 달라는 취지의 뜻을 연합국측에 전달하였다.

미국은 이미 유럽의 전장에서 독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 냈을 뿐만아니라 전선이 아시아태평양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루스벨트 대통령 이래 미국의 원칙적 입장이었다. 일본의 본토결전과 미국의 본토상륙이 예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트루만의 미국은 위에서 본바와 같이 내부적으로는 일본 통치에 왕제의 존속이 유효하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그당시 미국 당국자들의 일왕에 대한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남방전선 또는 오끼나와 전투등을 통하여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을 경험한 미국이 일본 본토작전을 실행하는 데에는 큰 저항과 희생이 따른다고 판단하고 일본 국민의 여망에 따라 철저한 무조건 항복 보다는 왕제의 형식적 존속을 허용하는 방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직접 왕제의 존속 여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항복하는 때로부터 일왕 및 일본국 정부의 국가통치의 권한은 항복조항실시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연합국최고사령관의 제한 아래 두도록 한다. 일본국의 최종적인 정치형태는 포츠담선언에 있는 것과 같이 일본국 국민이 자유로이 표명하는 의지에 의해 결정한다고 대답하였다. 이 모호한 회답 속에는 왕제 존속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나 언질이 없다. 이 회답은 바로 일본의 속국화를 의미한다는 이유로 강경한 육군지도자들은 반대하고 나섰으나 대세가 기울은 것을 깨달은 여러 중신의 조언과 히로히토 자신의 결정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이와같이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 왕제의 운명에 대한 명확한 보장없이 항복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항복후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구태혀 포츠담선언의 내용이 반드시 왕제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왕제의 존속을 획책하려 들었다. 항복 직후 시게미츠 외상은 히로히토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시게마츠: 프츠담선언에 담겨있는 민주주의는 이 나라의 제도(왕제도)와 본질적으로 불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심지어 오히려 이 제도아래에서 그 선언이 더욱 발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그 선언을 충실하고도 완전하게 지킨다면 우리나라의 행복된 운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로히토: 완전히 그대 생각에 동의한다. 내가 평소 지닌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게 고무해 주어 대단히 기쁘다.

이러한 생각은 연합국의 민주화 요구는 왕제의 폐지 없이도 단지 명치헌법의 부분적 손질과 정치적 개혁만으로도 충족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나타내 주고 있다.

라. 종전 직후 일본의 國體護持 정책

(1) 종전 전후의 히로히토 퇴위론

전쟁말기부터 항복에 이르기까지 히로히토에게 전쟁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내각이나 중신들 사이에 일반화되어 있었다. 특히 내대신 키도와 고노에 전 수상등은 이미 패전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종전의 여러 구상을 논의하면서 전쟁책임을 지고 있는 히로히토의 퇴위를 상정하였다. 東久邇宮과 키도와의 회담에서도 패전의 책임을 둘러싸고 육해군 사이에 논쟁이 일어날 경우를 예상하고 히로히토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이러한 논쟁을 해소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東久邇宮과 고노에 사이의 회견에서는 정전과 함께 히로히토가 퇴위하고 황태자가 그 지위를 이어받아 高松宮이 섭정하는 것을 검토하였다.

이러한 퇴위의 논의는 그후 종전에 이르기까지 여러사람들 사이에 논의된 기록이 있다. 항복 당시의 수상 鈴木貫太郞 역시 히로히토의 퇴위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폐하로서는 전쟁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오늘 혼란에 이른 일본의 현상에 있어서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일본을 부흥시킬 수 없다.- - - 퇴위를 생각할 수 없다. 퇴위에 관하여 나는 찬성할 수 없다. 재위하면서 전쟁책임을 지지 않으며 안된다". 이 말은 당시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아니라 퇴위의 논의까지 활발히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그러나 퇴위가 능사가 아니었던 점은 그당시 히로히토를 포함하여 당시 일본정계 지도자들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하였다. 종전 직후인 8월 29일, 필리핀등지에서의 전범재판의 진행등에 긴장된 히로히토가 퇴위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질 수 없는지를 內大臣木戶幸一에게 물었다. 그러나 木戶는 대단히 감동적인 성단(聖斷)이지만 연합국이 그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며 퇴위는 왕제 자체의 위협할 것이며 공화제와 민주주의의 도입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木戶는 항복 이전에도 일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기소로부터 더욱 안전할 것이며 퇴위는 죄의 시인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2) 東久邇宮 내각의 國體護持 작전

왕제의 유지, 즉 國體護持가 곧 전후 일본 정계의 최대의 현안이 되고 말았다. 항복과 동시에 수립되었던 東久邇宮(히가시쿠니) 내각의 최대의 과제 역시 國體護持였다. 연합군이 진주한 바로 그날 東久邇宮 수상은 다음과 같이 그 내각의 과제를 기자들에게 설명하였다.

國體의 護持라고 하는 것은 이론이나 감정을 초월하는 단단한 우리의 신앙이다. 조상 전래의 우리들의 혈액 속에 흐르고 있는 일종의 신앙이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비바람에 의해서도 결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현재로서는 내려진 (포츠담선언수락의) 詔書를 奉體하고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국체를 호지하는 것이다. - - -이 때 나는 군관민, 국민전체가 철저하게 반성하고 참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전국민 총참회하는 것이 우리 나라의 재건의 제1보이며 우리 국내단결의 제1보라고 믿는다.

여기서 전쟁의 책임은 모든 일본 국민에게 돌리고 그대신 국체의 호지, 즉 왕제의 유지야말로 불변의 신앙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한 국체호지를 위해서는 바로 포츠담선언을 철저히 이행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연합군의 점령을 받아들이고 그 점령정책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그에 대한 대가로 왕제의 존속을 얻어내겠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른바 一億總懺悔 주장 역시 일본의 일반국민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하면서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을 희석시키려는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동시에 사실상 일본의 침략전쟁이 일부의 전쟁 지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온 일본국민의 지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전쟁 그 자체를 미화하는 이론이기도 하였다.

히로히토의 장래는 연합국 뿐만아니라 일본국민 그 자신의 여론에 의해서도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 종전 이전에 군국주의의 피해를 입은 공산당등 좌익에서는 왕제의 폐지와 히로히토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었다. 항복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반 히로히토 시위가 동경시내에서 일기도 하고 반 히로히토 사설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압력으로부터 왕제와 히로히토의 안전을 도모하는 데에는 위의 일억총참회론만으로는 부족하였다. 항복선언을 하는 과정에서 히로히토가 국민과 제국의 장래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전쟁지도자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결행한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나마 본토결전의 큰 피의 희생없이 종전된 것을 히로히토의 공덕으로 돌리는 여론을 일으키는데 안간힘을 썼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東久邇宮 수상은 패배나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으며 전쟁이 끝난 것이 연합국의 승리의 결과라기 보다는 히로히토의 위대한 결단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자 하였다. 뿐만아니라 종전 직후 취해진 등화관제의 해제나 서신 검열의 해제등을 모두 히로히토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보도하게 함으로써 그 조치들이 과거의 군국주의시대하의 조치를 모두 다른 지도자들의 소행으로, 한편 일왕은 민주주의 시대의 지도자로 인식되도록 하였다.

(3) 히로히토의 자력갱생에의 길

1945년 8월 30일 맥아더는 일본의 운명을 손에 쥔 점령군의 사령관으로 일본땅을 밟았다. 9월 2일 미주리 함상에서의 항복문서 조인이 이루어졌고 9월 18일 맥아더의 본부가 요코하마에서 대본영 자리가 있었던 다이이치 빌딩으로 옮겨졌다. 히로히토가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기 위하여 미대사관을 방문한 것은 종전된지 얼마되지 않은 9월 27일 오후의 일이었다.

그날 오전 외무대신 시게마츠가 맥아더사령부를 아 일왕의 방문의사를 알렸고 이에 맥아더는 황거(皇居)도, 연합국사령부도 아닌 제3의 미국대사관을 접견장소를 정한 것이었다. 이날의 만남은 처음 잠시 어색하였으나 화기애애한 가운데 끝났다. 서로 끔찍한 예의를 지켰고 존경의 의사표시를 했다. 앞으로 일본과 극동아시아 국민들을 위한 가장 바른 길을 일본이 가도록 자주 서로 만날 것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이 만남 자체가 히로히토의 장래의 안전을 보장하는 징표였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맥아더가 전범재판에 처해질 히로히토를 만나 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안전을 상당한 정도 확인한 히로히토는 9월 4일 의회에 나가 국민들에게 불필요하게 복잡한 일을 초래할 감정의 폭발을 극도로 자제하고 혼란을 가져오거나 세계의 신임을 상실할 그 어떤 내부 논쟁이나 투쟁을 지양할 것을 호소하였다. 의원들로부터 아무런 열광도 없는 연설이었으나 맥아더에게는 일왕의 항복선언 이행의 결의를 보이는 것이었다.

(4) 일왕의 무책임을 결정한 일본정부

그러나 왕족인 72세의 梨本宮守正이 전범리스트에 포함되어 구속된 것에 이어 1948년 12월 16일 일왕의 최측근이었던 近衛公爵과 內大臣木戶幸一侯爵의 구속은 히로히토의 안전에 위기감을 가중시켰다. 한편 그해 12월 4일 AP통신은 워싱톤에서 일왕의 전쟁범죄자 리스트에 넣는 문제를 토론하고 있음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의 弊原 내각은 일왕의 전쟁범죄, 특히 대영미전쟁에 관한 책임의 선을 정할 필요를 느껴 이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이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은 당시 일본정부의 공식견해이기도 하였다. 이 때 결정된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른바 대동아전쟁은 자위전쟁임을 일왕이 믿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침략과 태평양전쟁이 결코 자위적 전쟁이 아니라 침략전쟁인 사실은 동경재판의 판결 자체가 입증하는 바이며 히로히토가 군대의 통수권자로서 일일이 개입하였음은 이미 자세히 검토한 대로이다. 둘째, 일왕은 대미 교섭과정에서 평화적 타결을 원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히로히토가 개인적으로 평화적 타결을 바랬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의 유일한 통치권자로서 무력을 선택하여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하였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었다. 세째, 일왕은 보필책임기관의 결정을 일본의 헌법운용과 정치의 관례에 따라 형식적으로 재가한 것 뿐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전혀 사실이 아님은 위에서 본대로이다. 히로히토는 법률상으로나 사실상으로 자신의 고유한 통수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였던 것이다.

그 뿐아니라 이번에는 일왕 자신도 일본정부의 위와같은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여 자신의 무죄를 강변하고 나섰다. 1946년 2월 그는 시종장 藤田尙德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번의 전쟁에 관해서도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피하려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나의 힘이 닿는한 노력을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전쟁에 돌입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입헌군주제하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절대군주의 권력을 누리고 있던 히로히토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마.미국과 연합국사령부의 일왕보호정책

(1)연합군사령부의 일왕보호와 지지

맥아더 연합국사령관은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 29일 이미 미국으로부터 미국의 항복 직후 일본에 대한 초기정책(United States Initial Post-Surrender Policy for Japan)이라는 점령정책의 가이드라인을 통고받았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최고사령관은 미국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한 일왕을 포함하여 일본의 정부기관을 통하여 그의 권한을 행사한다. - - - 이 정책은 일본의 현존하는 정부형태를 이용하는 것이고 그것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에 의하여 이루어진는 중세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부형태의 변화는 허용되고 장려된다"

일단 왕제의 존속과 그 활용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왕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왕제를 점령정책의 목적에 이용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왕제의 폐지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원래 미국과 맥아더는 군정을 실시하여 직접적인 통치를 계획하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항복후 점령정책의 효율적인 실시에 기존의 일본정부의 기구를 활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측으로서는 연합국사령부에서 내려지는 모든 종류의 명령을 왜곡하거나 사보타지 할 수 있는 도구를 확보한 것이었다.

아무튼 곧 이어 "일왕에 대해서 특별한 별도의 명령을 받지 않고서는 그를 전범으로 처리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명령이 1945년 10월 6일 미국정부가 연합국최고사령부에 내려보내 졌다. 히로히토에 대한 전범으로서의 조사가 일단 유예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일본내에서도 맥아더와 히로히토 사이에는 점령정책의 수행과 새로운 일본의 건설을 위한 동반자관계의 인식과 우정이 형성되고 있는 상태였다. 전범처벌의 선을 정하고 일왕을 보호하는데 히로히토와 맥아더 사령부 사이의 공모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비록 히로히토에 대한 사실상의 체포나 조사는 유예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전범으로서의 책임이 완전히 면제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 국무성은 1945년 11월 29일에도 미국 정부의 입장은 히로히토가 전범으로서 체포,재판,처벌받는 것을 면제받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점령정책이 그가 없이도 만족스럽게 진행된다면 그의 재판문제는 제기될 것이다. 또한 그가 최종적으로 재판을 받던 안받던 간에 증거를 수집하는데 지연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지시를 맥아더에게 하고 있었다.

미국 국무성의 내부에는 왕제의 유지와 히로히토의 면책을 주장하는 다수의 온건파가 이에 반대하는 강경파와 대립하고 있었지만 맥아더는 비교적 처음부터 일왕에 대한 유화적인 입장을 보였다. 원래 보수적인 성격에다 보수적인 보좌진을 거느리고 있었던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제거하고 근본적인 일본의 민주화를 기도하기 보다는 점령정책에 활용하고자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필리핀 총독으로서의 경험은 이러한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맥아더 사령부의 보수성은 오랜 세월동안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물로 옥중생활을 해야 했던 많은 정치범들의 더딘 석방에서도 아볼 수 있었다. 맥아더가 진정으로 일본을 민주적으로 재편하려 하였다면 군국주의의 화신인 히로히토와 손맺는 대신 그 희생자들이며 일본의 민주적 재건에 앞장세워야 할 정치범들의 석방을 그토록 지연시킬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 맥아더는 히로히토에 대한 전범으로서의 면책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1946년 元旦에 발표된 히로히토의 인간선언의 詔書는 그러한 관계의 상징이었다.여기에 맥아더 사령관은 파격적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예찬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화답한다. 이미 수차레의 비밀회동을 통하여 맥아더는 히로히토에게 미국의 대통령처럼 국민 앞에 나서 신성한 신이 아니라 국민의 왕임을 보여줄 것을 권고한 바 있었다. 인간선언의 詔書는 바로 이와같은 맥아더의 인간화의 프로그램(The Program to Humanize)의 일환이었다.

1월 8일 맥아더의 중요한 보좌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에치슨은 국무성에 대한 보고에서 히로히토가 전범으로부터 면제되어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전범으로서의 대우는 우리의 일본에서의 전면적 목적과 분리될 수 없다면서 히로히토의 재판은 주둔군의 강화, 점령경비의 증대등이 초래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다시 1월 24일 幣原 수상과 장시간에 걸친 회담을 한 그 다음날인 25일, 맥아더는 워싱톤의 트루만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친다.

"일왕을 전쟁범죄인으로 지명할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일왕을 전범으로 몰게 되면 예측할 수 없는 동요와 혼란이 초래될 것임이 명확하고 일본은 분해되고 말 것이다. 일본인은 연합국이 포츠담선언의 약속을 배신하였다고 느끼고 영구히는 아닐지라도 수세기동안에 걸쳐 해소되지 않을 상호복수의 연쇄반응이 시작되며 게릴라전으로 저항하고 모든 민주화의 희망이 소멸되어 일본은 공산화하고 말 것이다. - - - 만약 일왕을 전범이라고 결정하면 적어도 백만명의 점령군과 수십만의 민생위원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맥아더의 이 노력은 아직은 히로히토의 면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있지 못하던 국무성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데 유효하였다. 한편 1월 19일 발표된 극동국제군사재판소조례에는 피고인의 책임항에 피고가 국가의 원수이거나 책임있는 관리의 지위에 있는 것으로 처벌의 책임을 배제하거나 경감할 이유로 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는 뉴른베르크재판소의 조례와 달리 국가의 원수라는 단어가 삭제되고 시기의 여하를 묻지 않고 피고인이 보유한 공무상의 지위라고 수정되고 있다. 이 수정에 따라 일왕은 이 재판으로부터 배제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2) 일본과 미점령당국의 일왕보호정책의 현실적 전개

히로히토를 전범의 이미지로부터 탈각시키는 데에는 두가지 전술이 동원되었다. 평화주의자(pacifist)로서의 이미지와 방관자(by-stander)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일왕을 전범으로 법정에 내세우기를 포기하고 점령정책 수행의 동반자로서 활용하기 위한 맥아더 사령부의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다. 이것은 과거 전쟁중에 야만적이고 인종적이라는 반 히로히토(anti-Hirohito) 선전이 이제 민주적이고 평화애호적이며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군사적 모험에 끌려든 불운의 인간으로 묘사하도록 대체되었다.

먼저 일왕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부터 새로운 평화주의의 상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하였다. 위에서 본 인간선언의 詔書 발표가 그 첫번째 노력이었다. 1946년 2월부터 1954년까지 지속된 일왕의 지방나들이는 2단계 노력의 일환이었다. 1946년 3월 가와사키 공장의 방문은 2단계 이미지 개선책의 출발이었다. 일본 국민의 복지에 대한 히로히토의 관심을 보여주기 위해 이루어진 이러한 나들이는 미국의 지원하에 전개된 일본국민에 대한 부끄러운 음모에 다름아니었다. 한편 맥아더 자신은 푸른 눈을 가진 일왕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맥아더 사령부가 히로히토의 神性의 신화를 파괴하고 인간성을 전시하려 한 반면에 맥아더는 자신을 대중으로부터 격리시켰다. 자신을 만나는 일본인의 숫자를 극히 제한하여 그의 재임기간 중 일왕조차도 10회, 수상은 시케루 요시다를 단 한번 만났을 뿐이었다. 맥아더는 여행한 적이 없으며 일본인이 가까이서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히로히토가 처와 아들과 함께 평범한 식당에서 하챦은 음식을 즐기며 미군 신문인 The Stars and Stripes를 읽고 있거나 정원에서 물을 주고 있는 사진등이 공개되었다. 미카사 왕자는 다른 학생과 꼭같이 허름한 옷을 입고 동경대학을 다니고 있었으며 타카마츠 왕자는 그 자신의 야채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면밀하게 연출된 것이었다. 1946년 7월의 SNWCC(3성조정위원회)는 맥아더에게 일왕을 '인간화하고(humanize) 인기있게(popularize)' 만들도록 일본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히 도울 것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히로히토는 이러한 연출로 인해 대단히 민주적 군주로 되었고 일본인들 사이에도 신으로서의 일왕보다 더욱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1946년에 이루어진 어떤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90% 이상이 히로히토를 좋아한다고 응답하였고 당시 등록된 89개 정당 가운데 4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를 지지하였다. 그의 생일날에는 38만명의 시민이 공개된 궁정의 일부를 방문하여 경의를 표하였다.

전쟁의 항복을 유도, 결정한 것이 일왕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히로히토가 평화의 옹호자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른바 聖斷神話는 본질적으로 국가의사의 결정주체가 일왕이었던 명치헌법하에서 당연한 일이었으나 이를 통하여 궁중.중신그룹은 전후 일왕을 기축으로 한 보수권력의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종전의 결단으로 평화일왕으로 변신한 새로운 일왕을 상징의 형식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국민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했다는 것은 곧바로 히로히토가 전쟁의 결정하고 지도한 전쟁범죄자로서의 책임을 상쇄시키거나 부정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일왕은 점차 군국주의의 피해자이자 새로운 민주화의 상징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히로히토가 그 긴 전쟁의 와중에서 단순히 군부지도자들의 호전적 게임을 바라보고만 있던 방관자였다는 사실을 애써 입증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이같은 주장에는 권위있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보태어지기도 하였으나 중요한 전쟁의 개시와 확전에 개입하고 서명한 그의 역할은 지울 수가 없었다.

뿐만아니라 히로히토가 군인과 재벌의 포로 또는 꼭둑각시로서 이용되었던 대단히 위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부각하였다. 질질 끌리는 구두, 잘 맞지 않는 양복, 촌놈같은 행동등이 모두 면밀하게 계산된 방어 메카니즘이었던 것이다. 그가 일반 시민들과 접촉하면서 나눈 대화는 언제나 서투르고 바보같은 것이었다. 이 연출을 통하여 대부분의 외국 특파원들과 히로히토를 직접 대면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던 언론과 국민들은 히로히토가 충분히 토조를 비롯한 군인들의 협박과 술수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히로히토를 전범처벌로부터 보호하려는 맥아더의 노력은 여론몰이를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맥아더는 히로히토에 대한 전범 재판이 준비중이라는 정보를 일본언론에 흘리게 하고 일본언론을 통하여 히로히토에 대한 광범한 지지와 연합국의 포츠담선언 위반의 여론을 모으게 하였다. 미국과 세계 언론에 동경 특파원을 통하여 이러한 일본국내의 여론을 반영되게 함으로써 히로히토 처벌의 부당성을 유포하였다.

한편 맥아더 사령부는 히로히토에 대한 비판과 부정적 선전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원래 히로히토는 태평양 전쟁 기간동안에 히틀러나 무쏠리니와 함께 추축국의 침략전쟁과 잔혹행위의 상징으로 내내 묘사되었다. 전쟁 초기의 영화들에서 히로히토는 일본 군국주의와 민족주의 종교적 광신집단의 상징이었다. 1942년에 제작된 영화 Prelude to War'에서 히로히토는 전쟁의 선동자로서 악마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1943년 제작된 'The Nazis Strike'는 토조가 아닌 히로히토를 중국에서의 일본 침략정책의 배후인물로 언급하고 있다. 1944년도의 The Battle of China'에서 말을 탄 히로히토는 웅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야만적 일본을 상징하고 있다. Know Your Enemy: Japan'은 일본의 일왕 숭배와 역사적 및 심리적 배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는 일왕신(God-Emperor)이 일본의 독재와 광란의 군국주의의 원천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이러한 히로히토에 대한 묘사는 1944년 완성된 같은 시리이즈 Why We Fight'의 배포 금지로 일단 중단된다. 이 영화는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묘사하고 있었던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제 히로히토가 질서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결정에 따라 정책의 변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1946년 8월 일본인의 비극(The Japanese Tragedy)라는 영화의 상연을 금지하였다. 이 다큐멘타리는 후미오 카메이라는 사회주의자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로서 일본의 15년 침략을 묘사하고 있었는데 처음에 미군정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여 일부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다가 갑자기 상연 금지조치가 취해졌던 것이다. 그 이유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당시 영화 전문가들은 이해하였다.

(3)미국내의 여론과 정책의 향방

한편 미국 국내에는 일왕의 전범재판 회부를 주장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전시 중에도 미국변호사협회 이사회는 일왕을 포함하여 일본의 전범들을 재판하는 연합국 법정을 개최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는가 하면 상원 육군위원회에서도 일왕의 전범으로서의 책임을 묻는 결의안이 죠지아주 출신의 리챠드 러셀 상원의원에 의해 제출되기도 하였다. 1943년경 갤럽이 조사한 여론에 따르면 일왕의 사형을 주장하는 미국인이 43%였으며 무죄라는 주장이 4%에 지나지 않았다. 1944년 2월 미국의 교회협의회에서는 일왕을 신격화하는 일본 국민의 맹신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대표적 神社를 폭격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진주만 공격, 미군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등으로 인하여 전쟁이 끝나기 전후에 걸쳐 미국민의 일본에 대한 반감, 일왕의 책임 추궁에 대한 여론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국무성 내에도 일왕에 대한 처리 문제가 말끔히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위에서 본대로 대체로 왕제의 존속이 정책의 골격으로 자리는 잡아갔지만 반대론이 만만치 않게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벤스 국무장관 때의 차관 애치슨의 브레인으로 일했던 오엔 라티모아는 일왕과 황위 계승의 자격이 있는 남자는 모두 국외에 추방하여 유엔의 감시하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전 대사 그루가 우파였다면 애치슨 그룹은 좌파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무성 내의 미묘한 갈등이 현지의 점령군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4)미국의 일왕보호정책의 배경

이러한 미국의 여론을 바꾼 것은 무엇보다도 종전시에 보여준 일왕의 위력이었다. 미국의 군부는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초래되어야 할 것인가를 염려하고 있었다. 이미 神風特攻隊라든가 玉碎將兵에 의한 광신적 공격형태를 경험한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일본 본토 점령을 위해 1백만명에 달하는 미군의 희생을 예상하는 견해도 있었다. 원자폭탄의 투하로 전쟁의지는 꺾이고 있었지만 여전히 본토점령은 큰 희생을 요구할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항복은 너무도 쉽게 왔다. 5백만 일본 장병에게 일왕은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아무런 파란없이 무기를 버리게 하였다. 이것을 미국이 목격하면서 일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왕에 대한 신상의 변화가 어떤 저항을 야기할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맥아더가 워싱턴에 보낸 비밀보고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간에 모든 일본인이 이것(히로히토의 처벌)에 대해 저항할 것이다. 그들은 무장해제되었고 훈련받고 장비를 갖춘 군대에 특별한 위협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정부기관은 붕괴될 것이고 문명화된 관행이 중단될 것이다. 산악지대나 변방에서는 게릴라전에 상당하는 지하의 혼란과 무질서가 초래될 것이다.근대적 민주적 방식을 도입하려는 모든 희망은 사라지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미국은 일왕의 처리에 관하여 깊은 논의와 고민을 하였다. 전범으로서의 구속, 기소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고 그 대응책을 강구해 본 극비문서가 있다. 미군의 정보기관인 G-2에서 만들어진 이 문서는 일왕의 체포가 가져올 결과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히로히토가 일왕직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전범으로 체포된다면 일본인들은 이것을 왕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다음과 같은 심각한 충격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a) 내각과 대량의 공무원의 사퇴와 거의 모든 정당의 새로운 조각의 참여 거부

(b) 일본인들은 연합국이 종전당시 합의된 내용과 달리 악의에 의해 행동하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다. 1945년 8월 11 일본 정부가 포츠담 선언이 절대적 통치자로서의 일왕의 대권을 훼손하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다는 이해하에 승인한다는 각서와 연합국의 일본 정부의 최종적인 형태는 포츠담선언에 합치되고 일본 국민의 자유로이 표현된 의사에 의해 수립될 것이라는 답신이 일왕의 체포에 의해 무효화되었다고 다툴 것이다.

(c) 연합국의 점령 프로그램이 훨씬 더 힘들게 되고 아마도 적지 않은 생명의 대가까지 치러야 하는, 그리고 일본 경찰에 의해서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질 반연합국적인 다수의 총돌이 나타날 것이다. 연합국의 일본 진주 그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할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일본인들의 수동적 또는 능동적 저항은 훨씬 많은 숫자의 군대와 군정요원들의 사용을 불가피하게 할 것이고 연합국의 일본 점령 목적 달성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d) 일왕에 대한 공격은 일본인들 사이에 확고한 저항운동을 형성할 것이다. 그 저항을 압도할 연합국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연합국의 군대나 권위에 대해서도 일본인의 전열을 정비하는 으뜸가는 요소로서 오랫동안 남게 될 것이다.

(e) 일본의 종래 지배계층은 왕제의 존속과 점령당국과의 선린관계 유지로써 지배적인 위치를 계속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왕의 즉각적인 퇴위와 자살이 몇가지 어려운 선택 가운데 하나라는 권고를 하려고 할 것이다. 체포의 사전 통고가 있다면 히로히토가 살아서 연합국에 인계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히로히토의 퇴위 또는 처벌이 과연 맥아더나 그 휘하 관리들의 보고처럼 그토록 심각한 혼란이나 저항이 발생하였을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아키히토에게 양위케 하고 치치부, 타카마츠, 미키사등 히로히토의 세 형제 가운데 한사람을 섭정의 자리에 임명해 두었다면 어떠한 우려할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일본 역사가들의 논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본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고 이제 일본을 손아귀에 넣은 미국의 관심은 오직 어떻게 효율적인 점령정책을 실시하고 미래의 일본을 미국의 영향권 아래 묶어둘 것인가에 쏠렸다. 히로히토의 처벌 또는 양위로 인한 위험부담을 각오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과거의 일본이 자행한 죄악과 그 범죄자들을 아내 처벌하는 일은 이차적 과업에 속했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무익한 것인데다가 비생산적인 것이었을 뿐이다.

더구나 냉전의 시작과 확대 역시 미국의 일왕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1947년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냉전은 미국의 점령정책의 역전을 가속화시켰다. 미국은 일본내에서의 공산주의 세력이 부상하는 것을 견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일본이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거쳐 남하해 오는 공산세력의 방파제가 되어 주기를 바랬다. 한 때 아시아 전역의 지배를 꿈꾸었고 어느 정도까지는 현실화시켰던 일본의 잠재력을 소련의 팽창과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삭감시키는 데 이용하려 들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긴장과 한국전쟁은 그런 미국의 정책이 정당하엿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소련등 공산권에 대한 방어선으로서의 일본의 안정과 강화, 여기에 히로히토의 존재가 필요하였다.

바.극동위원회와 연합국의 입장

(1) 극동위원회의 논의와 미국정책의 추인

공식적으로 보면 당시 일왕을 전범으로 처리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1945년 11월에 설치된 연합국의 전범조사위원회가 결정권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보다 더 근본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기구는 연합국으로 구성되어 워싱톤에 설치된 극동위원회라고 할 수 있다.

1946년 1월 초 오스트레일리아는 런던에 있던 전범위원회(War Crimes Commission)에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공식적 요구를 해 왔다. 같은해 2월 26일 제1회 극동위원회가 워싱톤에서 개최되었을 때 참석한 소련대표는 일본에 공화제를 실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제안에 중국, 필리핀,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등이 동조할 태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극동위원회의 주도권은 미국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1946년 4월 3일 극동에서의 전범의 확인, 재판 및 처벌(Apprehension, Trial and Punishment of War Criminals in the Far East)에 관한 정책결정을 통과시켰다(FEC-007/3). 이것은 일왕의 전범 간주를 금지한 미국정부의 1945년 10월 6일자 명령과 내용 자체는 유사하였으나 일왕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이 정책결정에 근거하여 미국정부가 연합국최고사령관에게 보내는 명령에는 어떠한 직접적인 허가없이는 일왕을 전범으로 기소하지 않도록 문구가 만들어지는 것을 양해하였다.(FEC-007/4). 이에 따라 1946년 4월 23일 미국의 합참본부가 연합국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명령에는 극동위원회의 결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이 명령의 세번째 문장은 일왕을 전범으로 하는 어떠한 행동도 허가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귀관은 일왕의 처리에 관한 특별한 지시없이는 그를 전범으로 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FEC-054/9)

이 결정은 이제 일왕을 더 이상 전범으로 기소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견제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왕을 기소하기 위해서는 극동위원회의 별도의 결정을 얻어야 하는데 극동위원회가 미국의 의사에 반하여 그러한 결정을 하기는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1949년 2월 24일 극동위원회는 일본 전범의 재판에 관한 정책결정을 승인했다. 더 이상 A급 일본전범 재판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이 결정에는 필리핀과 소련이 기권했다. 이 결정은 미국의 국무장관을 통해 당연히 연합군최고사령관에게 명령으로 전달되었다(FEC-314/8).

다시 1949년 3월 31일 극동위원회는 일본전범의 재판에 관하여 각 회원국 정부에게 1949년 6월 30일 이전에 모든 조사를 완료하고 그리하여 같은해 9월 30일 이전에 모든 재판이 종료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권고를 승인했다(FEC-314/16). 이 결정에는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인도, 뉴질랜드, 영국, 미국 6개국이 찬성하였고 필리핀이 반대하였으며 캐나다, 중국,네들란드, 소련이 기권했다.

(2) 일왕의 처벌을 요구한 연합국들

미국은 일왕의 면책을 미국 단독이 아니라 연합국 전체의 의사에 의한 것이라는 방향으로 몰고 가는데 극동위원회를 이용하였다. 필리핀과 소련등 미국의 일왕에 대한 정책에 반대하는 나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극동위원회 회원국들은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이들 연합국 가운데 일왕의 수사와 단죄를 강력히 요구한 것은 소련과 중국,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였다. 소련은 처음부터 왕제가 일본에서의 공산혁명에 가장 큰 장애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왕제 폐지를 시종일관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합국들은 일왕의 처벌에 관해서 극동위원회에서 그토록 강경한 입장을 보이지는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당초의 강경한 입장을 포기하거나 유연하게 변경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의 경우 당초 일왕의 처벌 문제에 유연한 입장을 보이다가 종전이 임박하면서부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중국의 여론은 종전 전후에 걸쳐 일왕이 일본군국주의의 근거이므로 폐지하여야 하며 히로히토는 히틀러나 뭇솔리니와 동열에 있으며 정치적으로든 법적으로든 전범임이 명백하므로 처벌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중국인들에게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아시아 지역밖의 국가로서 일본의 공습을 받은 유일한 국가였다. 1942년 2월 인도네시아의 안폰섬이 함락되면서 8백명의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이 포로로 되는등 2만명이상이 일본군의 포로로 학대받았다. 일본군에 영국의 친 히로히토 정책에 대단히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성은 64명의 전범 리스트에서 히로히토를 일곱번째 순서에 올려 놓고 있있다. 이미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히로히토가 미주리 함상의 항복문서에 직접 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의 주 오스트레일리아 공사관은 1945년 8월 13일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입장을 본국의 국무성에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국가의 원수로서 또한 육해군 통수권자로서 일왕은 일본의 침략행위 및 전쟁범죄에 관하여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히로히토 처벌의 방침은 그들의 포로들에 대한 일본군의 학대에 기한 국민의 반감 때문이었다. 뉴질랜드 역시 오스트레일리아에 동조하였다. 맥아더의 온건한 점령정책과 히로히토의 면책에 대하여 단호히 반대하면서 뉴질랜드 수상은 1945년 9월 20일 미국 대사를 불러 다음과 같이 그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온건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일본은 그 전쟁 잠재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민주적 정부가 확립될 때까지 필요한 한 연합국에 의해 점령되어야 한다. 일왕은 전범으로 재판받아야 한다.

소련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들이 히로히토의 면책을 주장하는 미국의 입장에 동조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처벌이 가져올 점령정책의 차질과 일본의 혼란에 대한 우려였다. 이에 대한 맥아더의 위의 보고는 영국 수상 에틀리, 전범위원회의 회원국등에도 열람되었고 게릴라전까지 예상된다는 사실에 이들이 구태혀 히로히토 면책에 반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동경재판과 일왕

(1)동경재판의 아킬레스건, 일왕의 처리

동경재판의 전과정을 통하여 일왕의 단죄문제가 끝없이 떠올랐다. 그만큼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일왕의 위치와 책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고 이러한 상황이 연합국과 국제사회로 하여금 일왕의 처단 여론을 환기시키게 하였던 것이다. 일왕의 전범으로서의 기소는 일왕의 퇴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나아가 왕제 자체의 폐지 논의로 연결되게 마련이었다. 피고인과 변호인, 일본 정부와 국민들이 一喜一憂하면서 동경재판의 추이를 지켜 보았다.

동경전범재판의 수사와 기소를 위해 지명된 미국측 검사들은 동경으로 출발하기 전 히로히토가 전범 리스트의 맨 꼭대기에 두는 것에 관한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출발하면서 공항에서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키난이 서신을 전달받았는 바 히로히토는 말할 것도 없고 일왕의 가족 누구도 손대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차피 히로히토의 운명은 실무적인 검사들이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12월 6일 일본에 도착한 키난 수석검사는 기자회견에서 일왕의 전범문제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면서 일본의 역사를 단죄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자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일단 큰소리는 쳤다. 그러나 미국이 점차 맥아더의 권고를 받아들여 히로히토의 면책을 굳혀간 경과는 이미 살펴본 대로이다.

한편 일부 연합국들은 재판중은 말할 것도 없고 재판이 끝난 뒤 조차도 일왕의 재판문제를 물고 늘어짐으로써 미국과 일본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예컨대, 1950년 2월 소련대표는 일왕이 세균전의 주범으로서 재판에 회부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중국출신 판사는 일왕이 영구히 재판을 받지 않는다고 결정된 바는 없다. 새로운 사실과 증거가 나오면 언제라도 재판에 회부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소련안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연합국들의 태도로 말미암아 동경재판이 완전히 끝나고 추가 재판의 계획이 없다는 선언이 있기 전까지 히로히토의 운명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2)재판당사자의 일왕 보호

A급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던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일왕의 보호를 자처하고 나섰다. 특히 東條는 일왕을 보호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東條가 이러한 일왕을 철저하게 옹호하고 나선 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동경재판의) 피고인들의 가족은 어디에서나 따돌림을 당하였다. 토조는 면회온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소식을 듣고 그의 가족에 대한 나은 대접을 요구하였다. 東條는 히로히토가 재판의 속기록을 다 읽고 있음을 알았다.히로히토의 승인없이 저지른 범죄는 전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왕을 어려운 지경에 만들 수 있었던 그는 일왕이 그의 가족에 대한 혜택으로 자신을 입다물게 하도록 하였다. 동조의 가족에게 곧바로 큰 혜택이 돌아갔다. - - -히로히토는 어느 재벌회사에 요구하여 그 가족을 돌보도록 하였다.이 소식을 들은 동조는 히로히토에 관한 옹호를 그의 재판의 전과정, 나아가 사형대에까지 계속하였다."

아무튼 1947년 12월 26일 오후 東條는 직접 증인으로 나서서 여러 변명을 하는 가운데 일본은 처음부터 미국등과 개전할 의도가 없었고 自存自衛를 위하여 불가피하게 개전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일왕은 아무런 전쟁책임을 질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극력 주장하였다. 특히 보필자의 上奏에 대하여 일왕은 거부권을 발동할 입장에 있지 않았고 실제 정치에는 구체적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일왕에게 開戰의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지식하던 그가 일대실수를 하고 만 일도 있었다. 1947년 12월 31일 木戶 피고인을 담당하던 로간 변호사가 증언대에 선 東條의 반대신문을 하고 있었다.

문:일왕이 평화를 희망함에 대하여 목호가 반대의 행동을 취한 것이 있는가

답:그러한 사례는 결단코 없다. 일본국의 신민인 자가 폐하의 의사에 반하여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일본의 고관이야 오죽하겠는가

이 문답을 무심코 듣고 있던 키난 검사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東條의 이 답변에 따르면 만주사변, 진주만 공격등 모든 전쟁범죄가 모두 일왕의 의사에 따른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내세워온 일왕 꼭둑각시론의 파탄이기도 하였다. 급해진 키난은 당일 관련자들과 궁내성 장관까지 동원한 상태에서 이에 대한 대책회의를 열어 東條를 설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동조가 完全了解한 것을 확인한 후인 1948년 1월 6일 법정에서 키난은 東條를 다시 신문하였다.

문:며칠전 당신은 일본 신민인 자는 누구도 일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없다고 하였는데 사실인가

답:그것은 나의 국민으로서의 감정을 말한 것이고 법률적인 일왕의 책임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문:그러나 실제는 미.영.네들란드에 대하여 전쟁을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답:나의 내각이 전쟁을 결의하였다.

문:그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것은 일왕의 의지가 아니었는가

답:나의 진언, 통수부 기타 책임자의 진언에 의하여 마지못해 동의한 것이 사실이다. 폐하는 최후의 일순까지 평화애호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키난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 이와같이 미국과 연합국사령부, 그 영향을 받는 검사측은 히로히토의 전범처벌 논의를 처음부터 봉쇄하기 위하여 동경재판의 전과정에서 히로히토의 무책임을 입증해 두려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히로히토의 책임을 확신하고 있던 웹 재판장과 부딪치기도 하였다. 재판 초기 웹은 왜 히로히토가 기소되지 않았는지 키난에게 물었다. 키난은 전쟁 전의 전기간을 통하여 일왕이 갱들의 권력 속에 있었던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전범의 기소와 공소유지를 맡았던 검사측의 히로히토 보호는 이 재판을 더욱 희극적으로 만들어갔다. 히로히토의 책임 부분이 나오면 황급히 질문을 줄이거나 대답을 가로막기가 일쑤였다. 어느날 平沼騏一郞 전 수상의 증인으로 불려나온 岡田啓介 전 수상의 증인신문과정에서 수석검사 키난은 진주만 공격에 앞서 일왕은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였는가를 물었다. 그가 답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바 일왕 폐하는 전쟁을 싫어하였습니다.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 자체가 싫었던 것입니다. 키난은 이 증인을 통하여 히로히토에게 전쟁책임이 없음을 분명히 해 두고 싶었다. 그러나 웹 재판장은 무관한 사항을 묻지 말라는 식으로 제지하곤 했다. 소추되어 있지 않은 일왕의 유무죄를 다툴 이유가 없다는 의미였다.

키난이 일왕의 보호에 관한 지시를 받았던 것은 이미 재판 시작 이전부터였지만 재판 중간에도 본국으로 소환되어 동일한 지시를 거듭 받았다. 그 무렵 웹 재판장 역시 이례적으로 본국을 방문하고 돌아 왔는 바 웹의 태도와 관련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와 일정한 조율을 위한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대부분이었다.연합국에 의해 내려진 징벌의 철퇴가 일본의 급소를 피해간 것은 일본 뿐만 아니라 연합국의 행복이라는 어느 일본인의 당시 긴박한 재판 이면에 대한 평가는 일왕의 동경재판 출연(出演)을 위한 숨가쁜 공작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은 변호인들 조차 일왕의 책임은 언급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정해 두고 있었다. 피고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왕의 책임에 대한 추궁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절대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일왕에게 전쟁의 개시와 확대의 최종적인 결정권이 있었다면 그만큼 동경재판의 피고인들은 책임을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46년 4월 24일 변호인회가 발족하였고 이것이 동경재판의 개정 그 다음날인 5월 4일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일본변호단으로 확대 개칭되었다. 일본정부는 변호의 방침으로서 ⓐ일왕의 책임을 미치지 않도록 할 것, ⓑ국가를 변호하는 것,ⓒ전 2항의 범위내에서 개인을 극력 변호할 것을 결정하여 변호단에 그 방침을 수용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동경재판의 피고인들은 개인적 지위로 기소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그들의 사적인 연고에 의해 변론을 맡은 변호사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론방침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이론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당시 변호인들은 이 재판을 개인을 위한 변론이라기 보다는 일왕과 일본이라는 국가를 변론의 우선 대상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전범을 기소하여야 할 검사측, 자신의 고객을 위해 주범 히로히토의 책임을 지적하여야 할 피고인들과 변호인측이 함께 공모하여 일왕의 면책을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증인소환을 둘러싼 쟁점]

이와함께 동경재판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는 히로히토의 증인출석 여부였다. 동경재판의 재판장이었던 웹은 재판 진행중에도 진정한 책임자인 히로히토를 증인으로 불러내지 않고서는 공정한 판결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개인의견으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히로히토를 증인으로 불러내지 않기로 하는 결정을 웹이 불출석한 자리에서 해 버렸다.

그러나 검찰측의 에드워드 모나한에 의해 다시 히로히토가 동경재판의 출현 여부가 논의되었다. 모나한은 히로히토가 어릴 때부터 일기를 썼으며 이것이 진주만 공격에 중대한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 일기를 법정에 제출하도록 소환장을 보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키난은 비밀스런 쪽지를 통해 이같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연합군사령부의 최고 당국으로부터 구체적 명령이 있은 뒤에야 가능하다면서 그 주장을 일축했다.

(3)일왕면책과 동경재판에 대한 평가

히로히토의 불기소와 면책은 동경재판이 가진 정치적 성격 또는 소추의 불공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동경재판 자체의 정치성과 편파성, 불균형성을 입증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히로히토가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경재판 자체에서 그의 유무죄가 언급될 수도 없었다. 단지 소수의견 가운데 프랑스 출신 판사 앙리 베르나드는 전쟁선포에서 현재의 피고인들은 단지 종범에 불과한 것이고 기소를 면한 주범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재판의 재판장이었던 웹은 판결 직후 개인적 의견을 발표하면서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은 명백하며 그의 불기소는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일왕의 권위는 일왕이 전쟁을 종결할 당시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전쟁을 개시할 때에도 일왕이 보인 현저한 역할이 검찰측으로부터 제시되었지만 동시에 검찰측은 일왕을 기소하지 않을 것을 명확히 하였다.

2.일왕이 재판을 면제받은 것은 동경재판의 법정이 형의 선고를 내릴 때 당연히 고려해야 할 일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3.전쟁개시에는 일왕의 권위가 필요하였던 것인데 일왕이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면 일왕은 당연히 그 귄위를 유보하였어야 마땅했다.

4.일왕은 평소 주변의 진언(進言)을 받아들여 행동했어야 한다는 견해는 증거에 반한 것이지만 설사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일왕의 책임은 경감되지 않는다.

5.나는 일왕이 처형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관할밖이며 일왕이 재판을 면한 것은 모든 연합국의 최선의 이익에 기한 결정이었다.

재판의 전과정을 재판장으로 심리한 웹으로서는 사실관계와 증거, 해당 법률이론에 가장 정통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사람으로서의 위와같은 논평은 무게있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 재판의 변호인단의 한사람이었던 오웬 커닝헴은 가장 혹독한 비판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검찰측에서 개인의 책임에 관하여 진실을 원하였다면 왜 일왕을 증인석에 부르지 못하였던가라고 그는 반문하였다. 이어 그는 아무도 일왕이 토조의 꼭둑각시였다고 믿을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였다. 동경재판의 결과에 대해서 그 재판을 담당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지켜 본 언론도 일왕의 면책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 없었다. 뉴욕타임스지는 당시의 동경재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동경재판의 피고인석에는 결석자가 1명 있다. 그것은 일왕이다. 일왕은 재판에 기소되지 않아 법정의 권한 밖에 놓여졌지만 이것이 잘되었는지 어떠한지는 먼 장래에 판단될 일이다. 이 결정에 의해 인명이 구해지고, 점령을 보다 용이하게 하고, 또한 일본의 민주화가 용이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현명한 조치였는지 모른다. 그 어느것이건 간에 이것은 장래의 판단에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토조의 변호사는 토조가 일왕에게 해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안도했다고 전하였다. Kokusai Times는 일왕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감출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일본국민에 대한 사죄로서 퇴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방신문들도 있었다. 공산당의 기관지 赤旗는 가장 혹독한 비판을 가하였다.

아무튼 이미 재판은 끝났다. 미국과 일본은 더욱 긴밀해 지고 있었고 추가재판은 물 건너가 버린 상태였다. 소련과 미국, 그리고 중국등 연합국 진영 내부의 갈등은 냉전으로 한껏 깊어졌으며 서로가 적이 되었다. 히로히토의 범죄와 그에 대한 재판의 관심은 사라져갔다. 세월은 히로히토의 편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히로히토는 살아났으며 동시에 동경재판의 정의와 형평은 사라졌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