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이 해국(害國)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이 그 사람의 대(代)에서 끝나는 행위였다면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문인이거나 역사가(歷史家)였을 때의 파급 효과는 엄청난 것이다. 파급의 영향이 가장 큰 것이 문학이지만, 문학작품은 완곡하게 돌리는 부분도 있고, 또 독자가 접어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사가(史家)였을 때 문제는 다르다. 역사란, 그것이 비록 편견된 사료를 사용했을지라도 물적 증거가 뒷받침되기 때문에 직격탄이 되어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을 심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다. 붓끝이 매국으로 흐른 한 권의 책은 수많은 매국노들에게 자기 방어의 자료가 되어 주며 수많은 애국자들의 입을 틀어 막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역사의 날조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며 한 권의 오염된 역사서는 전시(戰時)에 살포된 세균처럼 빠르게 국가와 민족을 부식시켜 간다.
이선근, 그는 호상(虎相)에 무인풍이 역력한 80kg이 넘는 거구의 소유자이다. 그 스스로가 자신을 '백 년 묵은 구렁이'에 비유한 적이 있듯이, 카리스마적인 위풍까지 갖춘 학자, 언론인, 군인, 행정관, 정치인으로서 다채로운 경력을 자랑하며 78세라는 천수(天壽)를 다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어느 한 해(1977년)의 직함만 예를 들더라도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동국대 총장, 한국문화재위원회 위원장, 국사(國史)교양총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고, 비공식적인 강연이나 시간 쓰임새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도 권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 어떤 자리에 있든, 그는 한사코 사학자라는 이름을 항상 앞세웠으며 스스로 사학자의 신분으로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평생에 남긴 저서 24종 56권이라는 방대한 책이 거의 모두 국사라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해방된 정국에서는 자잘한 많은 지식을 가진 학자보다도, 지식은 비록 많지 않지만 방향이 정확하고 큰 물줄기를 잡을 수 있는 학자가 앞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역사는 그렇지 못하였다.
우리 사학계의 두 거두(?)라 할 수 있는 이병도(李丙燾)와 이선근은 가장 많은 자잘한 지식을 가진 사람에 해당한다. 이 두 사람은 공통점이 아주 많다. 두 사람 다 일제 시대에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사학과를 나왔으며, 해방 정국에서는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이승만 시대에는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고, 박정희(朴正熙) 시대에는 모두 5·16민족상을 수상하였다.
이들이 학자였고 서울대 교수를 했다는 것은, 민족 정신과 유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병도는 사학과 교수로, 이선근은 정치학과 교수로 우리 정신 세계에 가장 중요한 방향을 제시할 위치에 처해 있었다. 그들이 제시한 역사의 조류가 지금도 그대로 면면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병도는 특히 고대사 부문에서 실증사학이라는 미명 아래 사상을 제외한 사실(史實)만을 나열함으로써 민족허무주의를 심어 주었으며, 이선근은 국방사학(國防史學)을 주창하여 특히 근현대사 부문에서 역사를 왜곡 굴절시켰다. 이제 여기서 이선근의 행적을 더듬어 그 실상을 기록해 보려 한다.
이선근의 증조부가 세상을 떠나자 연백(延白 황해도) 군수의 탐오를 피하여 그의 할머니가 땅문서를 감추고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지현리로 이사하니 이곳이 이선근의 출생지가 된다. 부(父) 교윤(敎潤)이 그곳에 쌍빈의숙(雙斌義塾)을 세우자, 거기서 한학을 공부했고, 뒤에 휘문고보를 졸업했으며, 1923년에 와세다 대학 제1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927년에는 와세다 대학 서양사학과에 진학하였다.
와세다에서 그는 일생에 걸쳐 존경했던 케무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 서양사 전공) 교수와 쓰다 소오키찌(津田左右吉, 동양사 전공) 교수를 만나고 그들의 총애를 받는다. 특히 케무야마는 이선근에게 큰 영향을 끼친 교수이다. 서양사학과 학생으로는 이선근과 일본인 두 명 밖에 없었는데 그들이 이따금 학교를 빼먹어 일 대 일로 수업을 받은 일도 많았다. 케무야마는 《최근 세계사》를 일본에서 최초로 출간하였고 외국어만 10개 국어 이상을 읽어 냈으며 학문적으로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융통성을 발휘했다. 2학년 후학기에 들어가자 케무야마는 학생을 한 사람씩 불러 졸업 논문 테마를 묻기 시작했다. 이선근은 '러시아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비교 연구'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케무야마는 껄걸 웃으며 왜 조선사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다. 서양사학과에서 조선사를 하여도 괜찮겠느냐는 이선근의 질문에 케무야마는 "무슨 상관이야, 와세다는 자유 학원이야"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하여 이선근은 졸업 논문으로 《대원군 집정 10년의 연구》를 쓰게 됐고, 이것을 기초로 평생 동안 우리 국사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큰 파문을 남기게 된다.
그런데 이 케무야마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동경(東京)제국대학 철학과를 나와서 와세다에서 서양정치사 및 현대사를 전공하며 강의를 시작한 사람인데 조선사에 대해서도 무척 관심이 많았다. 관심이 많은 정도가 아니고 케뮤야마야말로 열렬한 조선 침략 주창자였다. 그는 자기의 저서 《정한론실상(征韓論實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공황후(신공황후)의 정한(征韓) 이래, 그들(한국-필자)은 전부 우리(일본-필자)의 속국으로 되어, 세력이 한남(韓南)에 미친 지 450여년에 되었지만, 후에 우리 내국 사정이 힘을 반도의 일에 전념할 수 없게 만들었고, 당(唐)이 지나(支那) 대륙에 발흥함에 이르러서는 끝내 구제(驅除) 당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의 조공(朝貢)은 차후로도 끊이지 않았으며……(煙山專太郞 《征韓論實相》 早稻田大學, 1907, 88쪽).
즉 일본에서 날조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과 신공(神功)의 정한론(征韓論)을 그대로 말하고 있으며, 나당(羅唐) 연합군이 침략할 때까지 무려 450여 년 간이나 '남조선경영(南朝鮮經營)'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일본에 끊임없이 조공을 바쳤단다. 그뿐인가. 그는 당시인 명치(明治)기에만 정한론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면서, 그들을 '우리 옛날의 정한론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명치 초기)에 발흥한 정한론에 대하여 말하려면 끝이 없겠지만, 우리 옛날의 정한론자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인류학적으로, 지리학적으로, 더욱이 사학적으로 한국은 일본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반도를 적어도 타국의 세력하에 부수(附隨)케 할 수는 없다. 이는 실로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옛날부터 우리 국민의 여망(輿望)으로 가슴에 회포(懷抱)하여 온 바…… (앞의 책, 153∼154쪽).
그의 무지와 독단에 대하여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이선근은 항상 그를 존경스러운 스승으로 거론한다.
이선근이 또 하나 존경하는 쓰다라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쓰다의 스승은 우리의 역사를 심하게 왜곡시킨 바로 조선사 전공의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이다. 쓰다 역시 그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 《만선(滿鮮) 지리역사 연구》 등에서 우리의 역사를 자기 멋대로 굴절시킨다. 특히 그는 1939년부터 만철(滿鐵) 조사부의 연구원이 되어 만주에서 활약한다. 이선근이 1937년부터 8년간 만주에서 친일활동을 하던 시기와 맞물리고 있다.
이선근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그해에 {조선일보}에 입사한다. 정치부 기자로 들어가 사설(社說)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자기의 학부 졸업논문을 부연하여 《조선최근세사》를 연재하였다(속편은 {동아일보}에 연재). 그는 여기서 기자가 된지 1년 반 만에 국장없는 국장대리가 되었으니 약관 25세에 실제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이 된 셈이다.
이선근은 3년 반 만에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1932년부터 송도고보에서 교편 생활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말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 그는 학교 생활이 조용해지자 좀이 쑤셔서 마침 9년 동안의 구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공진항(孔鎭恒)을 들쑤셔 주간 {고려시보(高麗時報)}를 창간, 주필을 맡는다. 그때 한성도서(漢城圖書) 시설을 이용한 인연으로, 후일 한성도서가 운영난에 빠지자 공진항은 이선근이 상무로 취임하는 조건으로 출자하게 된다.
공진항은 프랑스에서 8년, 영국에서 1년간 유학을 하고 돌아온 개성 백만장자의 아들로서 시베리아, 만주를 경유하여 귀국하면서 만주에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여 우리 동포의 노동력을 활용할 구상을 한 것 같다. 창립한 만몽산업주식회사(滿蒙産業株式會社)의 불입자금은 50만 원이었다. 이 가운데 반은 공진항이 내고 나머지는 이선근이 끌어들인 이진교(李鎭敎), 이홍근(李洪根) 등이 냈다. 황해도 부자로 개성으로 옮겨와 이선근의 뒷집에 살던 이진교가 전무, 식산은행 개성지점 간부로 있던 홍이표(洪利杓)와 이선근의 맏형이 상무, 서울에서 서화 골동을 제일 많이 갖고 있는 이홍근과 이선근이 평이사였다.
만몽산업은 만주의 하얼빈(哈爾濱) 길림(吉林) 간 지선(支線)인 안가참(安家站) 근처 황무지 약 5천 정보를 사 들여 유랑 동포 농민들을 모아 개간 정착 사업을 벌인다는 명목이었다.
현지에 가 있던 이진교 전무, 홍이표 상무와 이선근의 맏형이 현지 채용 간부 이 아무개의 권총 위협을 받고 모두 도망쳐 왔다. 이선근이 이 아무개를 배짱으로 굴복시키고 오히려 그들의 협조를 얻어 수용한 농가는 2천5백 가구가 되었으며, 수년 후에 4천 가구로 늘어난다. 만몽산업의 본부사무실은 처음에는 아예 공주령(公州嶺)에 있던 일본군 군부(軍部)에 있었고, 후에 본부를 하얼빈 난깡(南崗)으로 옮긴다. 이선근은 이곳에서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만주국 국회격인 만주제국 협화회(協和會) 협의원이 된다. 또한 1942년에는 안가농장에 2년제 중등 과정인 대동농사학원(大東農士學院)을 설립하고 자기가 원장이 된다.
안가 농장이 잘 되어감에 따라 만몽산업의 사업 규모도 커져 나중에도 농장도 동만(東滿)으로는 목단강 일대에서 간도성(間島省)까지, 북으로는 치치하르까지 확장되어 총 2만 정보(6천만 평)을 헤아리게 되어다. 만척(滿拓)이 요하(遼河) 지류의 벌판을 막아 약 5천 정보의 수전을 개간할 때에는 만주 제1의 국책 회사인 만주토지개발이 세 번을 시도해 실패로 끝난 보축(洑築) 공사를 이선근의 만몽팀이 성공해 기세를 올린 일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본의 괴로 정부인 만주 제국에서 이런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하고 협화회 협의원이 된다는 것 자체가, 당시 상황에서는 친일 주구가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란 것쯤 상식적인 얘기라는 것이다.
아래의 빈강성(濱江省) 대표 협화회 협의원 이선근의 협화회 연설을 들어보자.
정부 당국에서 누누이 설명하신 바와 같이, 국가 비상시에 임해서 제반 물자를 획득하는 최대 자원으로써의 농산물을 공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책임 또한 우리 농촌이 짊어지고 있으며, 또한 긴급한 경우에는 하시(何時)라도 몇 백만 명의 노무자를 공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중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출하 촉진 운동의 경우 정부 당국에서는 고관(高官) 각위가 대(隊)를 지어 성(省)의 각지를 순회함을 신문에서 배견(拜見)합니다만, 협화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부의 고위 분들이 할 일이 없는 건가, 농촌의 곡물을 내는 정도는 협화회원인 우리가 한덩어리가 돼서 책임을 갖고 해도 되는 게 아닌가? 이건 협화회로서 수치로 여기지 않으면 안되는 바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만주제국협화회 의사록>, 《친일논설선집》, 실천문학사, 1987, 150∼153쪽).
협화회란 일(日), 선(鮮), 만(滿), 한(漢), 몽(蒙)의 5족 협화를 의미하고, 만주 건국의 정신인 일만 일덕 일심(日滿一德一心), 왕도낙토(王道樂土)의 이상을 실현하여 흥아대업(興亞大業)의 목적을 달성하자는 것이다. 이선근이 위 연설에서 강조하였듯이 일본을 위한 그의 농산물 공출은 놀랄 만한 성적을 보인다. 한때 안가 농장에서만도 정백미 10만 석을 공출했는데, 이는 전체 하얼빈 시민이 먹는 쌀 소비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후기 참조).
그는 만주에서 많은 친일파들과 관계를 맺는다. 당시 만주에는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존경스러운 독립 운동가들이 많은가 하면, 일본인도 감복할 만한 친일파들도 득실대고 있었다. 이선근이 말하는 소위 '저명 인사'라고 하는 친일파들로는, 동경제국대학을 나와 만주국 폴란드 총영사로 간 박석윤(朴錫胤), 간도성장(間島省長)을 지낸 이범익(李範益), 흥농부 외청인 개척청 참사관을 지낸 윤상필(尹相弼), 생필품회사 상무를 지낸 진학문(秦學文), 건국대학교 교수 최남선(崔南善, 박석윤의 처남이기도 하다), 만보산 사건 때 {조선일보} 신의주 특파원을 지낸 간도성 협화회 사무장 신영우(申榮雨), 만몽산업 중역으로 있었던 서범석(徐範錫) 등이 있었다. 일본 사람으로 오상현(五常縣) 협화회 사무장을 지낸 사카모토 도루(坂本徹)와는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사카모토는 토쿠가와 막부(德川幕府) 말기의 소위 선각(先覺), 쾌남우국지사(快男憂國之士)로 일본인들의 신앙적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피를 이어 받은 자였다. 이 사카모토와 이선근은 죽을 때까지 편지 왕래를 하였다.
이선근은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중국인들은 즉시 일본인이나 친일파에 대한 보복 습격을 시작하였다. 친일 안가 농장은 재빨리 자위단을 조직하여 방어에 나선다. 그런데 웬일인가. 서울에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결성되었는데 거기에 이선근의 이름이 끼여 있는 것이 아닌가. 위원장은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으로 이전에 공진항을 통해 만난 적이 있고, 부위원장은 바로 자기가 {조선일보}에 있을 때 부사장이던 안재홍(安在鴻)이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선근은 자기의 행동 대원이 될 백여 명의 만몽 청년들을 데리고 당당히 귀국한다. 서울에 와서는 물론 건준 일은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지만.
1946년 초 안재홍은 양재하(梁在廈) 등과 {한성일보(漢城日報)}를 창간하고 이선근에게 주필을 맡게 했다. 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할 때 안재홍과 이선근은 번갈아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반공 이론을 폈다. 그때 소위 우익 진영에는 유진산(柳珍山), 김두한(金斗漢) 등의 대한민주청년동맹, 오정방(吳正邦)의 건국청년회, 오광선(吳光鮮), 채택용(蔡澤龍) 등의 광복청년회, 서북청년회, 독립촉성 국민회 청년부 등 청년 단체가 40여 개나 되었다. 이 40여 개 청년 단체를 규합, 좌익 파업 방지를 위한 파업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서로의 파벌 때문에 위원장은 뽑지 못하고 난항에 부딪치자 자파(自派)가 아닌 사람을 추천하자는 명목하에 이선근에게 위원장직이 떨어졌다. 대어(大魚)를 물게 된 이선근은 파업중이거나 파업 움직임이 있는 용산역 등에 청년들을 매일 몇 천명 씩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그는 1946년 12월 조선청년당(朝鮮靑年黨)을 창당했다. 그리고 1947년 8월에는 40여 개 단체를 통합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고 총재에 이승만(李承晩), 부총재에 김구(金九), 단장에 이청천(李靑天)의 이름을 내걸고, 오광선, 이성주(李成株)와 함께 그는 부단장이 되고 기획위원장을 겸했다. {한성일보} 주필을 그만둔 그는 공진항한테서 5백만 원을 얻어 {대동신문(大東新聞)}을 인수한다. 부사장 겸 주간으로 취임한 이선근은 {대동신문}을 대동청년단의 기관지로 만들고 극우의 논설을 편다. 그의 대동청년단과 {대동신문} 장악은 이승만과 더 밀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며, 그의 잘못된 사관(史觀)에 의하여 작성된 《화랑도 연구》 등이 공인을 받는 기반이 된다.
1948년 7월 10일 오전 10시에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는 대동청년단 제1차 각급단장회의가 열린다. 이성주가 개회사와 경과 보고를 하고, 이선근이 국내외 정세 보고를 하며, 이청천이 훈사를 한 데 이어, 긴급 동의로 신정보의 급속 수립과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를 추대하는 별항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 가결하였다(대동신문, 1948년 7월 11일자).
우리는 역사적인 5·10총선거와 이 결과로 탄생된 민주 국회에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현국회는 급속히 신정부를 수립하기 바라며 우리 민족적 지도자 이승만 박사를 신정부의 원수로 추대하기를 결의한다.
단기 4281년 7월 10일
대청(大靑)전국단장 회의
열흘 후에는 재석 의원 196명 중 180표를 얻어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대동신문}에 연재된 [화랑도 연구]는 5장, 9장 이하를 덧붙여 1949년 말경 단행본으로 나오게 된다. 그는 서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 화랑도는 대한 청년 운동, 학도 운동, 나아가 우리 국민 운동의 역사적 배경이요 연원(淵源)이며 화랑들의 일체(一切) 행동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불멸의 귀감이요 또 도표(道標)인 것이다.
제2판이 출간된 것은 이선근이 국방부 정훈국장(政訓局長)으로 있을 당시, 1950년 10월로서 한국전쟁의 포화가 한창일 때이다. 그 서문을 당시 육해공군 총사령관이던 33세의 정일권(丁一權) 육군소장이 쓴다.
역사를 회고하여 군인의 귀감될 인물, 사업, 주의를 더듬어 볼 때 우리는 역사의 유재(遺財)로서 짐짓 화랑도를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화랑도야말로 모든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 기간 정신이며 우리 조국이 영원히 발전할 수 있는 '의지'인 것이다.
제3판이 출간된 것은 휴전이 성립된 후인 1954년 5월이다. 이선근은 제3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라건대 휴전이라는 두 글자에 이 나라 청년과 학도들이 추호도 흔들리지 말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 소책자이나마 다시 들추어 우리들의 독립 정신과 '건국 이념'이 무엇인가 함을 재확인 재파악하여 준다면 저자로서의 기쁨은 그 이상이 없을 것이다.
이상의 서문들을 보면 이 책을 펴낸 목적을 알 수 있다. 즉 한국의 청소년들을 화랑 정신으로 무장시키려는 것이고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을 화랑도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청소년 특히 군인들의 정신 무장으로 삼으려는 의도는 1971년도판 부록에 강재구 소령(파월 훈련중 수류탄 투척시 사병을 구하고 자기가 희생), 박광부 대위(파월서 돌아와 경계 근무중 순직), 박은주 상병(신병교육대 조교로 수류탄 투척시 훈련병 구하고 순직)을 기록하고 '화랑 정신의 분화'니 '화랑도 정신에 입각한 강인한 정신' 등으로 극찬하고 있는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 1971년도판 머리말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전화(戰火)가 강토를 휩싸는 꼴을 보고 스스로 다짐한 것은 우리가 오늘 이 시대의 화랑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었다"고. 그는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국선 화랑(國仙花郞)이라도 되는 양 '화랑도의 조직을 오늘의(한국전쟁 때) 청년 단체 조직과 대비(對比)'하여 책에 도표를 그려 이해를 돕고 있다.
국선화랑 ---- 화랑(혹은 선랑) ---- 문호(門戶) ---- 낭도(郎徒)
(총단장) (각급 단장) 단부(團部) (단원)
역사적으로 여진 정벌을 한 윤관(尹瓘)도 화랑 정신을 지녔으며, 이순신 장군도 임전무퇴의 화랑 정신의 발로라 하며, 동학도 화랑의 계승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이 책의 '결론'에서 소제목을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과 금후 방향'이라 쓰고 아주 분명히 말한다.
그렇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은 확실히 3·1정신의 계승이니 3·1정신은 곧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이요 신앙인 화랑도……
이는 무서운 독단이라고 말해야겠다. 《화랑도 연구》의 제목은 화랑도이지만 실은 우리 나라의 통사(通史)를 쓰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이것이 바로 신라 중심 사상으로, 일제가 주창하던 타율성론의 식민사관이었던 것이다.
정체성론은 물론 제국주의자들이 자기 정당화의 수단으로 상대방을 비하하기 위하여 만든 이론인데,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복고주의, 순환론 등을 강조하고, 특히 신라 중심 사상을 고취함으로써 우리의 바다 너머 대륙까지 뻗치던 기상을 무시하고 역사를 반도의 한 구석으로 축소시키려 시도한다. 일찍이 1892년 일본인 역사학자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가 그의 《조선통사》에서 '신라의 통일'로 정의한 이래, 일제의 식민 사학자들은 그것은 '신라의 반도 통일' 등으로 정리하였고, 우리의 친일 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의 미명 아래 비판없이 그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그것은 일제의 당면한 전략 목표였던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키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또한 삼국 중에서 가장 약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신라를 예찬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立志)를 찾으려는 목적이었다. 넓은 만주 벌판을 다 차지하고 중원까지 호령하던 고구려나, 중국에 영향력을 끼침은 말할 나위도 없고 일본도 속국처럼 통제하던 백제 같은 거대한 기상을 강조해서는 안 되었다. 그 대신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을 살상하고 거대한 조국을 하루아침에 반도의 소국으로 전락시킨 신라를 예찬하여야만 자기들의 취지와 맞았다.
이선근은 이 화랑도 정신을 전군(全軍), 전국(全國)에 보급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경주한다. 그는 1954년에 출간한 《건국 이념과 학생》이라는 책에서 자기의 화랑도 연구를 전군의 정훈 교재로 사용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조국이 어떠한 이념하에 재건되었나 하는 것을 알아야 되고 멸공성존(滅共聖戰)에 참가…… 이 점에 느낀 바있어 필자는 정훈국장으로 재직할 때에 졸저 《화랑도 연구》에서 그 요점만을 간추려 건국 이념에 대한 교재로 사용하여 왔고…… 이 소책자(건국이념과 학생)의 …… 건국 이념에 대한 소론은 전술한 대로 졸저 《화랑도 연구》 중의 요점만을 간단히 추려 군(軍) 정훈교재로 사용하던 그대로이기 때문에…….
《화랑도 연구》라는 책으로 1953년 서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으며, 다시 이 책은 약간 형태만 바꾸어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장관들을 교육하는 교재가 된다. 1976년 4월 {조선일보} 기자가 그를 방문하고 쓴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박사(이선근)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마지막 사업은 '민족사관의 정립에 신명을 바치겠다'는 것. 지난 1974년 5월부터 국무회의가 끝나는 자리에서 국무위원들을 상대로 특강을 해오고 있는 '국난 극복사'는 이제 40회가 끝나고, 45회로 마감, 단행본으로 남김으로써 진단학회의 '한국사'로 시작된 그의 저술에 매듭을 짓겠다고 했다({조선일보}, 1976년 4월 25일자).
1977년 새해, 기자가 이선근을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올해는 나에게 퍽 중요한 해가 될 것 같아요. 평생을 일단락 짓는 정리 작업으로서 《국난 극복의 민족사(가칭)》을 발간합니다."
그동안 국무회의와 육본(陸本)에서 특강한 것을 정리한 것인데 거의 손질이 됐다고 한다. 2백자 원고지로 3천5백장이 되니 묵직한 분량이다({조선일보}, 1977년 1월 14일자).
이 책은 결국 《한민족의 국난극복사》란 이름으로 부록까지 합하여 8백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 된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10월 유신'을 극찬하며 끝을 맺는다.
10월 유신이 역사적으로 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1961년에 일어난 5·16군부 쿠데타……. 1971년 12월의 비상 사태 선언과 1972년 10월 유신은 결코 두 개의 사태가 아니고 하나의 시대적 연속……. "역사가로서 당신은 이번 비상 사태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막연하게 허송세월만 하고 있었다면 후세의 역사가들은 틀림없이 박 대통령에 대해서 "1970년대에 있어서의 대한민국 국가 원수는 무위무능(無爲無能)하여 자기의 중대한 직책을 다하지 못하고 국가를 오도(誤導)했다"고 비난할 것임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출판과 10월 유신의 찬양은 곧바로 1978년 정신문화연구원의 탄생과 연결된다. 한 기자가 정신문화연구원 원장 이선근을 방문하고 난 후 적은 솔직한 의견을 들어 본다.
이선근 박사가 노구를 무릅쓰고 그동안 국무회의와 육본을 드나들며 부지런히 펼친 '국난 극복의 민족사' 특강이 어떻게 보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탄생을 예고한 것 같다. 연구원 설립 목적의 하나가 민족사관의 정립일진대 이 박사가 어느 좌석에서나 입버릇처럼 말해 왔고 또한 그의 마지막 사학연구의 총정리라고 공언해 왔던 '주체적인 민족사관의 정리' 그것과 공교롭게 맞아 떨어진다.(조선일보,1978년 6월 29일자)
그래서 우리 나라의 또 한 명의 친일학자인 신석호(申奭鎬)는 이선근을 극도로 치하하고 있다.
이박사(이선근)는 일찍이 박 대통령께 국사(國史)를 진강(進講)하고, 또 국무위원 일동에게도 국사를 강론하여 민족의 주체사관에 입각한 국사교육을 강화하는 국책 수립에 적극 찬동하였고,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새로운 국가관과 유신 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70노구를 무릅쓰고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여 이 나라 이 민족의 나갈 길을 밝혔다({霞城李瑄根博士 古稀紀念論文集}, 형설출판사, 1974, 8쪽).
서울대학교가 국립 대학으로 된 것은 사실 잘못이었다. 어떻게 식민지 시대의 대학이 해방된 조국의 국립 대학이 될 수 있을까. 서울대학교는 상징적으로라도 폐쇄되었어야 옳다. 그런데도 미군정 당국은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발표하고 미국인 해리 B. 앤스테드를 초대 총장으로 임명하고 주요 요직을 차지하는 등, 시대착오적인 오판을 하고 있었다. 이에 좌익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소위 국립대학교설치안(國大案)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9월 전문학교 학생들은 국대안 반대 학생 공동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운영의 비민주성, 시설의 축소, 교수의 대량 감소와 혹사 등의 이유를 들어 문교 당국에 국대안을 번의(飜意)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문리대, 법대, 상대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고 여타의 대학에도 파급되었다. 한편 학생들의 행동에 동조하는 교수들의 불합작(不合作) 성명 및 반대 운동과 미군정 당국의 이해 없는 강경책은 사태 수습을 더욱 곤란하게 하였다. 1947년 2월부터는 중등학교와 각급 학교에까지 파급되어 동조 동맹 휴학을 하였다. 3월에 가서야 겨우 국대안 수정안이 입법회의에서 통과되고 총장이 한국인으로 바뀌고 〔이춘호(李春昊) 총장이 부임한 것은 10월〕 제적 학생들도 복교되었다. 그러나 근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 여파는 심상치 않았다. 그런데 이 서울대학교의 사태를 완전 수습할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학도의용대(學徒義勇隊)를 창설하여 총지휘관이 되어 전국 학생 활동을 장악한 것이 또한 이선근이다.
1947년 9월, 그가 대동청년단 부단장 겸 기획원장을 맡고 있을 때, 미국인 다음으로 서울대 총장의 임명을 받은 이춘호는 이선근에게 겸직도 좋으니 서울대 학생처장을 맡아 이 난국을 수습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리하여 이선근은 학생처장 겸 문리대 정치학과 주임교수로 부임한다. 이선근은 스스로 학생들을 진정시킨 경험을 다음과 같이 영웅담처럼 술회하고 있다.
학동(學同) 세력은 의외로 강해 나는 부임하자마자 그들의 '열성자대회'라는 것을 요리해야 할 처지에 빠졌다. …… 학처장 회의가 소집되어 대책이 논의되었지만 뾰족한 방안이 나오지 않았다. "긴 소리 짧은 소리 할 것 없다"고 나는 대회장으로 달려갔다. 회장 입구를 지키고 있던 학생들이 막는 것을, "나는 하나고 너희들은 수백 명이다. 무엇이 두려워서 막느냐"고 뿌리치고 들어가…… 두세 시간 끌었더니, 그동안 에 학생들은 삼삼오오 빠져나가 나중에는 30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나의 이력서- 한국일보,1975년3월5일자)
6,7백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이선근의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질문과 지연 작전에 말려 해산했던 것이다. 그 뒤 1948년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安浩相)의 주창으로 학도호국단이 조직되자 학원 문제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든다. 하여튼 그는 서울대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1949년에는 법대 학장 서리까지 겸하게 되어 세 명의 총장을 모시는 학생처장의 자리를 누린다.
1950년 2월에는 신성모(申性謨)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국방부 정훈국장과 육군 정훈감(政訓監)의 자리가 모두 비어 있으니 와 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신성모는 영국 시절, 프랑스에 유학중이던 공진항의 경제적 원조를 받아왔고 또 그의 아들을 이선근이 만주 안가 농장에서 데리고 있었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대령으로 국방부 정훈국장이 된 이선근은 한국전쟁이 돌발하자 육군본부 정훈감도 겸하게 되었다.
정부가 대전으로 옮긴 다음날인 6월 28일, 정훈국은 수원 서북쪽 변두리에 사무실을 내어 학도의용군 모집에 나섰다. 29일에 '비상학도대'를 조직하였고, 7월 1일에는 '의용학도대'로 개편하였다가 7월 중순에 대구에서 '대한학도의용대'로 합세 개편하여 이선근의 지휘 하에 훈련을 받고, 무장을 갖추어 일선으로 향하게 하였다. 학도의용대는 중고등학생까지 합하여 30만 명에 달하였으며, 유엔군의 참전으로 승리가 확실시되자 학도호국단으로 통합된다.
그는 군복을 입은 지 2년 만에 준장으로 예편되어 다시 서울대 정치학과로 복직한다. 그가 문교부 장관(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겸임)으로 발탁된 것은 1954년 4월이다. 그는 장관으로 재직시 이승만의 비위에 맞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1956년 5·15 정·부통령 부정 선거에 대담하게 뛰어든다. 대통령 후보 신익희(申翼熙)의 선거사무장 이영준(李榮俊)의 명의로 된 고소장 안에 있는, 대전시 각 중고등학교에서 행한 그의 연설 한 토막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李) 대통령은 위대한 국부적(國父的) 존재다. 금번 정·부통령 선거에 있어서 이 대통령을 갈아야 한다는 것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를 갈려는 것과 같다. 벼룩이 문다고 하여 아버지를 갈고, 빈대가 문다고하여 어머니를 간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동아일보, 1956년 4월 25일자)
1956년 6월 5일 국회에서 통과된 이선근 문교부 장관에 대한 불신임안은 30여 개 항목에 달한다. 부정 선거 개입을 제외한 중요한 항목만도 ① 한글 파동을 야기, ② 중고등학교를 분리 폐합함으로써 학제(學制)에 혼선을 초래, ③ 불교 내의 비구승과 대처승간에 파동을 야기, ④ 미국의 원조 물자를 부정 처분, ⑤ 인사 발령에 있어서 2종 3종의 발령을 함(무자격 교장의 발령), ⑥ 잡종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켜 만여 명에 달하는 학생을 징집에서 보류케 함 등이다.
2년 3개월 동안의 문교부 장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 한 기자가 그를 방문하고 쓴 기사는 이선근의 인물됨을 여실히 들여다보고 있어서 재미있다.
초라한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권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정평있는(?) 이씨, '태풍 일과(一過)의 심정'이라 전제하며 '편히 쉬겠다'고 되풀이하는 말 속에 '편히 쉬고 나면 다시 그 무엇을 위하여!'의 야심을 아직도 넉넉히 엿볼 수 있었다(동아일보, 1956년 6월 22일자).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있어 그는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 화려하게 데뷔를 하며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이선근은 천성적으로 권력지향적 특성을 가졌다. 아니라면 어떻게 그가 처한 모든 정권에 빠짐없이 다 아부를 일삼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자기의 사상에 의하여 어느 한 정권과 밀착되었다면 다른 정권과 손을 잡기란 무척 어렵다. 친일을 했던 사람이 어떻게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 정권과 야합할 수 있으며, 전혀 성질이 다른 박정희, 전두환 군사 정권과 밀착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1976년 6월 22일 대한교련(大韓敎聯) 회장의 자격으로, 전국교육회장 대회에서 '유신 정신의 심화와 주체적 민족사관의 정립'이라는 특별 강연을 한 내용을 보면 얼마나 박 정권을 잘 보필하였나 짐작이 간다. 그는 여기서 우리 민족이 외적의 침략에 항거해 온 역사적 발자취를 소개하면서 '유신 체제는 민족 공동체의 안보와 발전 그리고 통일을 확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체제적 결단'이라고 역설한다.
우리가 오늘날 유신 체제를 확립시키지 못할 경우, 역사상 더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할 것이며 대한민국의 존립도 위협당할 것이다. 유신체제의 확립은 민족 모두에게 맡겨진 사명이며 우리 교육자들은 이를 위한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유신 체제의 성공 여부가 교육에 달려 있음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것이다(서울신문, 1976년 6월 23일자).
참으로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다음은 '제9대 취임 박 대통령께 드립니다'라는 소제(小題)의 '겨레 앞에 열린 새 역사의 장(章)'이라는 글이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 27일 9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온 국민과 함께 80년대를 지향하는 새 역사의 장을 열게 되었습니다. 지나간 17년 동안 대통령 각하께선 국내외의 숱한 도전에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그런가 하면 이러한 물량적인 성장에만 만족하지 않고 대통령 각하께선 이를 균형있게 뒷받침할 수 있는 국민 정신의 개발에도 깊이 유의하여 우선 '국민 교육 헌장'을 선포하고 문예 진흥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동시에 지난 6월 30일에는 한국학의 총본산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개설하였습니다.……({서울신문}, 1978년 12월 25일자).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국민교육헌장'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란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은 박종홍(朴鍾鴻)이 초안한 것인데, 알고 보면 일제의 교육칙어를 상기케 하는 것으로, 거기에 반공사상을 첨가한 것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정신문화연구원의 설립은 이선근의 절대적인 공로가 가미된 것으로, 유신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다. 단 그 표방하는 바가 학술 연구인 만큼 이 뒤로도 우리의 국학(國學)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심한 독초가 된다. '민족혼의 진작(振作)과 지도 이념의 정립' '유신 이념의 한국 사상사적 체계화' '국가 지도 이념(유신, 새마을, 통일, 안보)의 확립' '새 역사 창조의 소명감(召命感) 제고(提高)' 등 제3공화국 정부가 표어처럼 사용해 온 말들이 연구원의 설치와 운영의 요지에 밝혀 있는 것만 보아도 설립 취지가 유신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느닷없이 연구원 설립 준비위원장을 맡게 된 김태길(金泰吉)의 말을 들어 본다.
그 '설치운영안'에 따르면, 그 연구원의 설립 목적은 "우리 고유의 문화, 사상 및 윤리를 재발견하고, 민족의 슬기로운 얼을 되살려, 이를 국민 지도층에게 고취함으로써, 주체성이 희박한 국민 정신을 고무·발양·심화하며, 나아가 민족 중흥의 기운을 진작케 함"으로 되어 있었다. 이 '설립 목적'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연구원'이 학술 연구를 위한 기관이 아니라 이른바 '지도층'의 정신 교육을 위한 연수원이라는 사실이다(김태길, <정신문화연구원과의 어려운 인연>, 《체험과 사색》하, 128쪽).
많은 토론 끝에, 크게 연구부와 연수부 두 부서를 두기로 하고, 또 연수부를 연찬부(硏鑽部)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대치하기는 하였으나, 원래 취지가 어디로 갈리는 없는 일이었다.
정신문화연구원은 박정희가 직접 발기한 것이지만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과연 누구의 말을 듣고 그가 그런 발상을 했을까 하는 문제이다. 당시 대통령 특별 보좌관으로 있던 박종홍도 평소에 우리 나라의 전통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연구 기관 설치를 역설하기도 했다지만, 직접 박정희에게 국사 강의를 하고 있던 이선근의 입김이 가장 가깝게 작용했으리란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가 기회 있을 때마다 대만의 중앙연구원과 같은 연구 기관이 우리 나라에도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는 것을 상기해 볼 때 더욱 심증이 가는 것이다. 다시 김태길의 말을 들어 보기로 한다.
이상주 교수와 함께 이선근 선생을 동국대 총장실로 찾아간 것은 12월 중순이었다.…… 그 분이 이 연구원의 원장으로서 적합할까를 탐색……. 그는 "학자들의 호응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사람과 손잡고 일하면 그만이지, 싫다는 사람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기성의 학자들이 외면할 때는 새 학자들을 길러내는 길이 있어요" 라는 말도 하였다. 그는 정신문화연구원의 설립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었고, 어쩌면 청와대측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인상을 풍겼다. 나는 이선근 선생의 말을 통하여 정신문화연구원에 대한 그의 주인 의식을 강하게 느꼈다(김태길,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다>, 앞의 책, 174쪽).
그가 연구원 원장이 되자 한국의 수많은 역사가 일시에 유신으로 무장된다. 그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안으로는 '유신 체제'와 밖으로는 '민족 통일'이라는 대업을 위하여 협동 단결했기 때문이라 하며, 고려에서도 인종(仁宗) 때에 15조의 '유신 정책'을 선포했다고 하며, 조선조 때에도 대원군이 '함여유신(咸與維新)'을 외치고 내정 개혁을 단행했단다(이선근, 《한민족의 국난극복사》, 794∼769쪽). 이리하여 박정희는 무(武)를, 이선근은 문(文)을 각각 담당하며 부창부수(夫唱婦隨), 종횡무진하게 된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한 사람은 일본의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또 한 사람은 그 만주국협화회 의원을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이 두 문·무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조국의 산야를 뒤덮고 있던 검은 구름은 더 짙어만 가고 있었다.
10·26으로 박정희가 쓰러지고 모처럼 하늘 끝에서 밝은 서광이 비추이기 시작하나, 곧이어 또다시 무서운 군화 소리가 산천을 울리고 있었다.
전두환(全斗煥)! 그는 신군부를 이끌고 광주 대학살을 저지르며 내일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선근은 구세주를 만난 듯 새국가 지도자로 곧바로 전두환을 지적하면서 '전 장군(全將軍)은 위기 상황 극복의 최적임자'라고 힘주어 말한다.
전(全) 장군을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해야 한다는 데 국민의 여망이 모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이 같은 올바른 판단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지극히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서울신문, 1980년 8월 20일자).
이상으로 이선근의 생애를 추적하여 보았다. 여기서 느낀 것은, 그가 차라리 자기 개인이나 가족을 위해서 실컷 부귀영화나 누리다가 갔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는 조국과 민족의 정신 세계를 너무나 크고 깊게 병들게 하였다. 그에 의하여 오염된 무수한 한국의 젊은이들과 소위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그릇된 사관(史觀)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 조국의 산야에 배어 있는 그의 독소를 해독(解毒)시키려면 어쩌면 그가 활동하던 전 생애보다도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할는지 모른다.
필자는 본고(本稿)를 작성한 후에 만몽산업 안가농장을 직접 탐방하였다. 1994년 1월 22일부터 2월 2일까지 12일간, 우리 선조들의 아픈 역사를 체험하기 위해서 가장 추운 겨울을 택하였다. 신경(장춘)의 길림성 당안관이며 하얼빈의 시립도서관 등을 거쳐 안가에 들러 민박을 하며 각 마을 고로(古老)들과 얘기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다.
중국인을 거의 강제로 쫓아내고 차지한 안가벌을 조선 농민은 실제 선금도 받지 않고 개간하였다. 개간한 땅은 4년 연부로 지었으나 실제는 4년만에 그 땅을 차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세금은 4대6제라 하지만 이것저것 제하면 농민이 차지하는 양은 수확량의 절반도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그곳 고로들은 이선근, 공진항을 그다지 나쁘지 않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나마라도 조선인에게는 고마웠단다. 단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르뻔꾸이쯔(日本鬼子, 일본놈) 다음의 얼꾸이쯔(二鬼子, 제2의 일본놈)로 백안시하며 벼르고 있었고, 해방이 되자 즉시 반격과 보복이 뒤따른다. 이선근은 농장 경영의 명목을 항상 "우리의 관동군의 군량을 댄다"고 표방하며 중국인들을 억압하였다.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를 다시 대하며 필자는 얼굴이 달아 올랐다.
당시 안가는 현재 안가참 철로를 중심으로 동쪽은 오상현 안가지(安家鎭), 서쪽은 오상현 민락 조선족 자치향(民樂朝鮮族自治鄕, 보통 民樂鄕이라 함)으로 되어 있다. 안가진에는 만몽산업 안가농장 건물만 있었고, 현재의 민락향이 바로 안가농장의 본거지이다. 이곳은 현재 13개 툰(屯, 자연부락) 6개 촌(村, 里에 해당)으로 되어 있고 농장은 20km 길이의 둑으로 둘러싸여 있다.
구양근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