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 金允植, 1835∼1922 )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한 노회한 정객
1908년 중추원 의장.
1910년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 5만 원을 받음
1915년 조선인 최초로 일본 학사원에 가입.
1916년 경학원 대제학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교언으로 민족을 팔다
김윤식은 대체로 '소심하고 나약한 지식인' 혹은 '노회한 정치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당시 일제측으로부터는 '학발은염(鶴髮銀髥)의 선인(仙人)과 같은 유학자이자 중정온건(中正穩健)한 정치가'로 평판이 나 있었다. 그러나 김윤식의 구체적인 생애에 대한 이해는 별로 없는 편이다. 개항기에 영선사를 이끌고 청나라를 다녀오기도 한 동도서기론자(東道西器論者) 정도로만 알려져 있으나, 대제학이라는 유림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한일'합병'에 찬성한 반민족적 측면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합병 때의 공로로 작위까지 받은 그가 3·1 운동 때에는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며, 죽은 뒤에도 이른바 '김윤식 사회장 문제'를 야기시켜 급기야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하였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근대사의 격동 속에서 영욕을 거듭한 김윤식의 삶과 성향을 함축하는 한마디는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한일'합병'이 선포되기 열흘 전인 1910년 8월 19일의 어전회의 때, 한일'합병'에 대해 내놓은 김윤식의 의견이다. 이 말은 곧 '옳지않다, 옳지않다'(不可 不可)는 뜻에서 '합병'에 반대한다는 의미로도, 또 '어쩔 수 없이 찬성한다(不可不 可)'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일한병합조약에 즈음하여 누구보다 먼저 여론의 가운데 서서 원로들의 의향을 통일시킨 공적이 적지 않다"거나 혹은 "병합조약 조인 찬성자의 한 사람으로서 병합을 원만히 수행하게 했다"는 일제측의 기록에서 그의 진의를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일제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합병'과 동시에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며, 후에 경학원 대제학에 임명된 사실을 보면 '합병'에 대한 그의 진의는 분명해진다. 조선에서 손꼽히던 대문장가가 아니었다면 감히 생각하기 어려웠을 '불가불가'라는 이 수수께끼 같은 교언(巧言) 한마디야말로 정치가이자 학자로서의 김윤식의 인간됨을 함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온건개화파의 정치적 우여곡절
김윤식은 자가 순경(洵卿), 호가 운양(雲養)이고, 청풍 김씨 익태와 전주 이씨 사이의 1남 3녀 중 독자로 1835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양근에 살던 숙부 김익정(김육의 7대 봉손인 김만선의 양자) 밑에서 성장했다(숙모는 연암 박지원의 손녀). 16세 때부터는 노론의 대표적 학자였던 유신환과 박규수의 문하에서 서응순, 민태호, 민규호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이 때 유신환의 문하에서 닦은 경학과 문장력, 박규수의 가르침에 힘입은 북학적 소양은 동문수학했던 인맥과 더불어 이후 김윤식의 정치활동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또한 이 때부터 그의 문장은 인정을 받아 후일 대제학 감으로 지목되었으며, 이러한 문장력은 나중에 그가 외교·통상 관계의 요직에 발탁되는 발판이 된다. 30세가 되는 1864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나, 10여 년을 초야에서 보내다가 대원군이 하야하고 고종의 친정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1874년에 40세의 나이로 대과에 합격한다. 당시 대과의 시관은 박규수였으며, 그의 합격은 대원군 하야 이후 정권을 잡은 민씨정권의 후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민씨정권의 총애를 받은 김윤식은 이후 황해도 암행어사(1876, 42세), 순천부사(1880)를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린다. 1881년에는 영선사로 임명되어 학도와 공병 등 38명을 이끌고 톈진의 기기창 등 근대문물을 시찰하는 한편, 이홍장과 만나 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문제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청국으로 갔다. 김윤식이 청국에 가 있는 동안 국내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조선 정부로부터 청나라에 군대를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라는 밀명을 받고 청군의 향도관이 되어 귀국한다. 그 공으로 민비의 신임을 받게 되고 승진을 거듭, 강화유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의 요직과 신설 통리기무아문의 요직을 거치며 초기 개화정책에 깊이 관여한다. 이 무렵 조선은 점증해 오는 외세의 압박을 맞아 강제로 문호개방을 당하는 등 커다란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정부내에서도 이른바 개화론이 대두하고 있었다. 개화론은 그 방법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급진(혹은 변법)개화파로서 기술문명뿐만아니라 서양의 우수한 법과 제도까지도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이 속한다. 다른 하나는 기술문명은 도입하되 법과 정치체제 등 사회질서의 근간은 전통적 주자학에 의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온건(혹은 시무)개화파로서 김윤식을 비롯하여 김홍집, 유길준, 어윤중 등이 이에 속한다. 김윤식은 온건개화파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민씨정권이 수행한 개화정책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김윤식의 개화론은 이른바 '동도서기론'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는 개화 는 곧 시무(時務)라고 단정하고 나라마다 그때그때 해야 할 특정한 일, 즉 시무가 있다고 말한다. 서양의 시무는 "개인의 사사로움을 부수고 공상(工商)의 길을 확장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살게 하여 그 능력을 다하고 그 권리를 보전케 함으로써 나라가 부강해지도록 하는 것"이고, 중국의 시무는 "법의 대체를 세우고 세목을 세우며 적임자를 선발하여 관리로 임용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기계를 발전시키는 것"인 반면, 조선의 시무는 "청렴을 숭상하고 가난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휼하는 데 힘쓰며 조약을 잘 지켜 우방과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갑신정변에 대해 "갑신정변의 역적들은 서양을 높이고 요순과 공맹을 폄하(貶下)하고, 이륜지도(彛倫之道)를 야만이라 하고 그 도를 바꾸려 하면서 매번 개화라 칭했으며, 천리를 멸절시키고 갓과 신발을 도치하는 격이다"라고 비난했다. 민씨정권의 총애를 받으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실권을 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1886년 4월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의 아버지 박원양을 장사 지낸 일과 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되어 청에 납치·억류되어 있던 대원군의 귀국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김윤식이 왜 이런 실족을 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박영효와의 학연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김윤식은 박규수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인연도 있어서 이른바 온건개화파 중에서도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와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다. 이것은 그가 갑신정변중에 새로 조각된 내각에 예조판서로 피임된 사실이라든가, 수십 년 뒤의 회고담이긴 하지만 그 스스로도 '김옥균 등이 자기와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정변을 단행한 데 대해 아쉽다'고 한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그는 이 사건으로 실권하고 1887년 6월 충청남도 면천으로 유배되어 6년 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유배중에도 1891년까지는 영탑사에서 지내고, 1891년 7월 17일부터는 절 아래 화정리로 이주하여 서울과 연락도 하고 젊은이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했다. 이 때의 일기가 그의 문집 {속음청사}(續陰晴史) 중의 [면양행견일기](沔陽行遣日記)이다.
동요하는 동도서기론다의 친일 경로
1894년 갑오개혁을 맞아 김홍집 내각에 외부대신으로 입각하여 복권한 김윤식은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의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다시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1896년 아관파천 후 그와 함께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 어윤중 등이 비명횡사한 가운데, 친러내각으로부터 민비시해사건을 사전에 알고도 묵인했다는 혐의를 받아 1897년 제주도로 종신유배형에 처해진 것이다. 김윤식이 이 사건과 얼마나 깊은 관련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의병전쟁이 본격화되었으며, 비록 척사론적 성향이기는 했지만 당시 유림을 대표하던 의병장 최익현이 김윤식에 대해 "왜적을 불러들여 나라와 임금을 내맡긴 역적이므로 능지처참해야 한다"고 한 사실에서 저간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01년 6월 제주도 농민항쟁(이재수의 난) 때문에 전라남도 지도로 이배, 1907년 사면될 때까지 11년 간 귀양살이를 했다. 이 기간중에 일본측과 친일파인 일진회 등에 의한 사면운동이 있었으나 고종에 의해 거부당하였고, 을사조약 후에 일제의 앞잡이 송병준도 통감부에 그의 사면을 건의한 바 있으나 역시 거부당하였다. 그가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1907년이다. 이완용 친일 내각에 농상공부대신으로 들어간 송병준이 다시 이완용에게 권고하여 '70세 이상의 고령자는 방석한다'는 명분으로 사면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그의 행각은 눈여겨 볼 만하다. 7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또 두 차례에 걸친 유배의 쓴맛을 본 뒤끝임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1908년에는 중추원 의장으로 임명되어 영친왕 이은을 문안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동행하여 일본에 가서 그 곳 정계와 친교를 맺고 돌아왔으며,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관련자들의 모임인 강구회(講舊會) 회장, 기호학회와 흥사단의 회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나철을 도와 대종교에 들어가기도 한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외손녀를 개가시키고 아들이 죽자 적장자가 아닌 서종질을 입양하는 등 개화사상가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 무렵의 그의 행동은 그가 관계한 단체의 성격이 다양한 데서도 드러나듯 매우 복잡한 성향을 보여, 후일 '불가불가'론을 예견케 한다. 특히 일본에 다녀온 이후 그의 행각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친일적 성향이 노골화된다는 점이다. 동도서기론의 입장에서 일본을 왜적이라 할 만큼 친청적 입장이 강했던 그가 친일로 경도되는 것은 이미 첫번째의 유배 후 갑오개혁에 가담하고 을미사변을 거치면서부터이지만, 이 시기가 되면 자신의 입으로 역적이라고 비난했던 인물들과 깊이 유착하며 친일적 입장을 분명히 해간다. 여기에는 그의 사면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와의 교분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두 차례에 걸친 오랜 유배의 쓴맛을 경험한 그 스스로 더욱 더 대세에 순응하는 기회주의적이고 노회한 정객으로 변신해 갔기 때문인 듯하다. 대제학 겸 중추원 의장으로서 조선 유학계의 대표격이며 중요한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그가 한일'합병' 당시 조약 체결의 주모자인 이완용과 조중응이 조약의 초안을 의논할 때 그 대상자였다는 점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고마스의 기록에 따르면 "일한병합을 맞아 먼저 우리들의 최후의 각오를 정하기 위해 이완용과 내(조중응----인용자 주)가 특히 상담상수(相談相手)한 이는 중추원 의장 김윤식이었다. 협의 결과, 김윤식이 우리들의 일치된 결단을 기술한 것이 있다.(小松綠, {朝鮮倂合之裏面}, 中外新論社, 1920, 198면)"라고 했듯이 망국의 조약에 그가 어느 정도 관여했음을 보여 준다. 이 때 김윤식이 쓴 초안이 '역사적기초비안'(歷史的起草秘案)으로 '동양평화'와 인민을 '구제'한다는 논리로 망국을 합리화시킨 것이다. 이처럼 김윤식은 한일'합병'이라는 매국의 전면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실은 이면에서 매국노들과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런 공로 덕택에 몰라도 그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 5만 원을 받았다. 또 10월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김윤식은 중추원 부의장직은 끝내 사양하였지만 작위와 은사금은 국왕인 고종이 사여한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지 않았다. 이것은 김윤식과 유사한 처지에 있던 유길준, 한규설, 홍순형, 민영달, 조경호, 윤용구, 김석진 등이 작위를 사퇴한 점과 비교되며, 이 시기 김윤식의 입장을 잘 보여 주는 하나의 예다.
침실에서 외친 만세와 몰아적 독립청원
'불가불가'라는 '교언'을 발명하여 한일'합병'에 찬성을 표하였던 김윤식은 나이 탓인지(76세) 합병과 함께 그 공로로 주어진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직도 마다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 후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학사원에 가입하여(1915) 1914년에 발간한 자신의 문집 {운양집}으로 학원상을 받은 일, 그리고 1916년 7월에 박제순의 후임으로 경학원 대제학에 선임된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은거하다시피한다. 김윤식이 10여 년의 은거생활을 청산하고 정국의 표면에 등장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가히 극적인 점이 있다. 이미 을미사변 때부터 역적으로 규탄받았고, 10여 년 전의 한일'합병' 시에도 어김없이 찬성을 표하여 반민족행위를 주저하지 않았던 김윤식이 이번에는 조선의 독립을 청원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른 지 한 달 뒤쯤인 3월 28일, 김윤식은 [독립청원서]를 작성, 그의 서자인 김기수, 그의 문하생인 이계태, 이계태의 사위의 아버지(사돈)인 이건태 등과 함께 논의한 뒤 자작 이용직(1852∼1932)과 연명으로 조선총독, 일본내각 총리대신, 그리고 동경의 조일신문, 시사신보, 보지신문, 대판의 매일신문 및 서울의 각 신문사 앞으로 독립청원서를 보낸 것이다. 일제측의 재판기록에는 [독립성명서]로, 그의 일기인 {속음청사}에는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라는 제목으로 씌어진 이 청원서는 약 850여 자로 되어 있은데, 그 중 한 대목을 적어보자. "그대의 노예 김윤식, 이용직은 불행히 운이 아닌 때에 나왔고 또한 다한 나이가 많으므로 처사에 불민하여 합병시에 일본의 작위를 받아 면목에 수치스럽게 되었노라. 그러하나 오늘 죄 없는 자녀들이 물, 불에 휩싸인 것을 보고 침묵키 불능하여 그대의 노예들도 대한독립을 위하여 침실에서 만세를 외쳤노라."([독립성명서]) 자신의 반민족행위에 대해 얼마나 수치스럽게 생각했는지, 침실에서 외친 만세소리를 누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노예'의 결심으로서는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이 청원서의 내용처럼 '민족적' 차원에서의 고뇌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이 무렵 그의 결심과 관련이 있을 법한 몇 가지 사정을 살펴보자. 먼저 독립선언과 관련하여 최남선이 그를 찾아와 참여할 것을 권유한 일이다. 이 때가 2월 9일이었는데, 김윤식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 이유는 독립선언이란 독립이 된 것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윤식은 최남선에게 독립청원을 해볼 것을 권한 바가 있다. 다음으로 청원서 제출 직전에 임시정부수립을 계획하던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작위 사퇴와 독립선언서 참여를 촉구받은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이들 독립운동가들이 3·1 운동을 계기로 준비해 가던 임시정부 가운데 김윤식을 요인으로 추대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막 탄생되던 5, 6개의 임시정부 중 조선민족임시정부와 대한민간정부에서는 김윤식을 각각 내무경, 외무부장관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3·1 운동을 전후하여 독립선언이나, 임시정부 수립 등으로 민족운동이 활발해진 분위기, 더구나 그 일부에서는 단순히 이용가치 때문일 수도 있지만 김윤식을 요인으로 '인정'해 주고 있었다는 사정도 그의 독립청원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일'합병'에 대한 찬성이라는 반민족행위가 그러했듯이 독립청원 역시 기본적으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몰아적인 문제의식의 발로였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3월 초 일제는 국민대회의 이름으로 씌어진 격문 하나를 적발했다. 거기에는 고종의 독살이 암시되어 있었으며, 일제가 파리강화회담에 제출하려는 독립불원증명서에 "귀족대표 이완용, 종척(宗戚)대표 윤택영, 사회대표 조중응·송병준, 교육대표 신흥우 등과 함께 김윤식이 유림대표로 서명하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전파되었다. 이 소문이야말로 김윤식으로 하여금 독립청원서를 제출케한 기본 동인이 되었다. 그것은 그 스스로도 재판 당시의 일기에서 "독립불원서에 자신이 서명했음을 부인하기 위해 드디어 백 마디 말보다 청원서를 쓰려 한다"({속음청사})라고 심경을 밝힌 데서 분명히 확인된다.
죽어서도 민족운동의 분열에 '기여'하다
김윤식은 이 사건으로 2개월간 투옥되었다가, 85세의 고령이라는 이유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대제학직에서 면직되고 자작은 박탈당한 채 서울의 봉익동(창덕궁 남쪽)에서 칩거하다가 1922년 1월 22일 88세의 나이로 죽는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민족을 배반하고 한일'합병'에 찬성을 했던 김윤식도 죽어서 남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민족운동의 분열이었다. 김윤식이 죽자 그의 사회장 문제를 둘러싸고 민족운동 내부에 의견대립이 생긴 것이다. 동아일보계와 민족주의 우파에서는 사회장을 고집하였고 이에 대해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반대했다. 특히, 내부의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고 청년운동의 통일체를 형성하고 있던 조선청년연합회는 결국 이 문제를 계기로 사회장위원회에 참가하였던 장덕수, 오상근 등의 서울청년회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어렵게 이루어진 합동전선이 분열되고 말았던 것이다. 김윤식의 독립청원이 알려지자 일부에서는 "만절(晩節)이 더욱 향기롭다"는 평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독립청원서에서 했듯이 불가불(어쩔 수 없이) '불가 불가'(옳지 않은)한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어서까지 민족에 해를 끼치는 '불가 불가'한 것이었다.
■ 배항섭(고려대 강사·한국사)
■참고문헌 김윤식
{속음청사}(續陰晴史).
小松綠, {朝鮮倂合之裏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