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 (金基昶, 1914∼2001년)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선전' 추천작가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 추천작가

화풍만 아니라 친일행각까지 스승의 길 따라

김기창은 여러 면에서 친일화가의 선두주자였던 김은호*의 수제자격이다. 섬세한 사실 묘사 위주의 일본화식 채색화법을 고스란히 배웠을 뿐 아니라 친일 행각까지도 착실히 스승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 김기창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청각장애를 일으켜 정상적으로 학교 과정을 마치지 못하였다. 그는 어머니 한윤명(韓潤明)의 정성으로 한글과 일어, 한문 등을 익혔고, 그림에 대한 재능이 일찍 발견되었다. 김기창의 어머니는 감리교 신자로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개성의 정화여학교 교사를 지낸 바 있는 신여성이었다. 김은호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한 것도 어머니의 배려 덕택이었다.

그의 나이 17세 때(1930)의 일이다. 김기창은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선 지 6개월 만에 제10회 '선전'(朝鮮美術展覽會)에 [널뛰기](板上跳舞)를 출품하여 입선하는 기량을 발휘하였다(1931). 이 때 어머니로부터 '운포'(雲圃)라는 아호를 받게 된다. 이후 계속해서 '선전'에 입선하다가 24세 때인 제16회 '선전'(1937)에 할머니의 옛얘기를 듣는 아이들을 담은 [고담](古談)을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다음해에는 [여름날](夏日)로 '총독상'을 받고, 18·19회 '선전'에 계속 특선으로 입상되어, 연 4회 특선 경력으로 추천작가가 되었다. 약관의 27세였다. 16회와 17회 때에는 스승인 김은호가 직접 심사원으로 참여하였고, 19회때에는 주변의 시샘과 방해가 있었으나 김은호의 주선으로 무난히 무감사 특선에 올라 추천작가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이러한 김기창의 '선전' 출품작들은 대부분 향토적 내용에 장식적인 색채 감각과 호분의 사용, 섬세한 필치 등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한 것이었으며, 스승인 김은호의 일본식 채색 화풍을 전수받은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김기창의 뛰어난 묘사력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1938년에는 일본인 화가(失澤弦月, 野田九浦 등)를 만나 본토의 정통 채색화풍을 익히러 도쿄에 잠시 다녀오기도 했다. '선전'에 추천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파 대열에 합류한 김기창은 자신의 탁월한 회화 기량으로 젊은 나이에 '추천작가가 된 영광'을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갚았다. 그 영광을 가져다 준 스승 김은호가 밟은 길을 따라 총독부의 전시 문예정책에 부역한 것이다.

  화가로서 개인의 명예를 한몸에 얻게 되었으니 척박한 민족현실이 안중에 있을 리 만무다. 김기창은 '조선남화연맹전'(1940. 10)과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 1)를 비롯하여 김규진, 김은호*, 이상범, 이한복, 허백련 등 대가급 친일 미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기금마련 전람회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그는 김은호, 이상범이 심사위원 으로 참여한 일제 말 친일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1942∼44). 자연스레 친일파의 나락에 빠져든 것이다.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한 선전 작업에도 앞장 섰다. 이는 우선 신문·잡지류의 대중매체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 게제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 8. 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완전군장의 [총후병사](1944. 4)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는 '축 입영(祝 入營)……'이라는 어깨띠를 두른 학도병 좌우에 갓 쓰고 안경 낀 연로한 아버지와 수건을 쓴 어머니가 수묵소묘풍으로 그려진 삽화이다.

이는 1943년 8월부터 시행된 조선 청년 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종군하게 되어 감격스러운 듯한 학도병의 진지함과 장한 아들을 굽어보는 아버지의 표정에 선전효과를 높이려는 의도가 다분히 배어 있다.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는 펜화에 담채를 가한 삽화이다. 완전군장으로 간이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또한 제21회 '선전'(1942)에 출품한 채색화 [모임]은 마을 부녀회의 반상회 광경을 연상시켜 주는데, 전시 후방에서 지원할 수 있는 여러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가증스런 점진적 식민잔재 극복론

젊은 나이에 '선전'의 추천작가가 된 '영예'와 기량으로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에 부화뇌동하였다. 김기창의 작업들은 당시 일본인 화가들의 전쟁선양 작품들에 버금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친일 경향과 활약으로 김기창은 광복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스승인 김은호를 비롯하여 이상범,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당연히 제외당했다. 그러나 그 역시 미군정과 이승만 친미 파쇼정권의 등장 이후 친일행적은 감추어진 채 제도권 미술계의 중심으로서 일제 때 친일 하면서 누렸던 명예와 인기를 유지하게 된다. 김기창은 광복후 나름대로 '눈 뜬 장님으로' 친일파가 된 자기 변명과 극복론을 폈다.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환경지배론과 점진적 식민잔재 극복론이 그것이다.

원로화가가 된 김기창은 최근 한 일간지 기자와의 대담에서 친일의 변으로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물론 의지가 강한 자기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평범한 인간이면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겠지요"({경향신문}, 1991. 8.3)라고 피력한 바 있다. 친일파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자기 반성치고는 너무나 안일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 대담에서 "내 살속의 과거를 깎아 내며 민족적인 것에 이르고자 신체적 장애를 딛고 끊임없이 정진해 왔다"는, 전혀 '평범한 인간'의 논리와 걸맞지 않는 발언에 이르면 가증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화가로 출세하기 위해 '선전'에 출품해서 추천작가의 영예를 안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더 출세하기 위해 스스로 친일행각을 벌였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광복직후 어머니가 지어 준 아호인 '운포'(雲圃)의 '포'(圃)에서 '口'를 떼어 내고 '운보(雲甫)'로 바꾼 이유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는 얘기와도 맞물려 있다. 어차피 형식적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

그의 형식주의적 경향은 점진적 식민잔재 청산론과 광복후 변모가 큰 화풍에서도 찾아진다. 이런 논리는 광복이듬해 화단활동을 본격화하면서 쓴 아래의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문화면은 오랜 왜정 압박하에 자유를 속박당하며 가사상태에 빠져 그 향상력이 저지되어 왔고, 특히 미술에 있어서 그 영향을 지독히 흡수한 것이 동양화였다. 그야말로 눈 뜬 장님처럼 예술관념을 인식치 못한 제작을 했고, 그 작품에서 예술의 대명사의 대접을 받아 떳떳이 내놓을 무엇이 있었던가. 결국 환경적으로 왜놈의 탈을 쓰고 그들의 유행성을 모방만 하느라고 급급했기 때문이었으니, 일종의 고질적인 우리들의 비예술관념과 깊이 뿌리 박힌 일본적인 습관을 현재에 있어서 여하히 처리할 것인가. 단지 지금 와서 일본적인 것을 이탈하려고 성급한 초조를 하더라도 안 될 것이니, 차라리 그것이 일본적이라 하더라도 서서히 이탈하도록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자기 실력을 가다듬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광복기분으로 가뜩이나 어리뻥뻥한 모호한 제작태도를 지닌 우리들이 '조선적, 조선적' 하기만 하고 날뛴다면 자신을 더욱 방황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게 될 것이요, 그 작품이란 죽도 밥도 아닌 엉터리 작품이 될 것이니, 우리는 그런 태도를 청산하고 제일 먼저 화안(畵眼)의 양성, 즉 그림을 바로 인식할 줄 아는 교양을 쌓을 것이오…….(김기창,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 {조형예술} 1호, 1946).

이 점진론은 결국 식민지 시절 벌인 반민족적 행각에 대한 반성의 핵심은 간과한 채 '현실'이 아닌 '그림을 바로 인식할 수 있는 교양'을 쌓자는 주장만 담긴 것이다. 그런데 그의 '그림 교양'은 또다시 광복후 격변하는 시대현실과 무관하게 형식실험적 태도로 바뀌었고, 개인주의적 작업과 사회활동 그리고 화단정치에서도 점진론과는 정반대로 맹활약을 벌였다. 특히 다양한 화풍의 변화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김기창은 '운보적이고 민족적인 것을 찾기 위해, 야성적이고 생명감 넘치는 격정적인 힘찬 화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분방하고 '줄기찬 자기연소'(이구열, 1979) 과정을 거쳤다. 그 자신의 고백대로 김은호를 배우면서 형성된 일본식 채색화풍을 벗고, 1952년 전후로는 형상 변형이 반추상적인 입체파풍의 시기였고, 1964∼65년은 문자를 변용하거나 완전 추상에 빠진 시기, 1970년대는 수묵의 강한 선을 쓰는 시기, 그리고 1975년부터는 민화류 소재를 이용한 바보산수 시기 등으로의 변모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그런데 이런 화풍의 변모는 개인적 갈등과 창작욕구에 의한 것이지만, 실제는 이후 우리 미술계에 물밀듯이 유입된 모더니즘의 조형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데 불과하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화풍에 매몰되었듯이 광복후에는 또 다른 서구 제국주의 미술에 기대어 자기 회화세계를 변모시켜 낸 결과이다.

왕성한 활동력과 정치력으로 친일행위 은폐

광복후 김기창의 회화적 변모에는 여성화가로서 추상주의를 지향한 박래현의 영향도 있었다. 광복다음해 결혼한 박래현과는 17회의 부부전을열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자유신문}의 미술기자, 민속박물관의 미술부장을 잠시 지낸 것(1947∼48)을 제외하고는 작업과 화단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미협과 국전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국전과 민전의 심사위원으로서 꾸준히 화단의 세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백양회 창립 주도, 해외전에 한국 대표로 적극 참여, 해외 여행, 홍익대 미술과 교수(1954)와 수도여사대(지금의 세종대) 교수(1962∼74) 역임 등 그의 정치력에 걸맞는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또한 왕성한 활동으로 상복도 많아 여타의 친일 인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12회 3·1 문화상(1971)을 받았고 3·1 문화상 심사위원(1972, 1977)에 위촉된 바도 있다. 이외에도 은관 문화훈장(1977), 국민훈장 모란장(1981), 예술원 정회원(1981), 중앙일보 중앙문화예술상 본상(1982),예술원상(1983), 5·16 민족상과 서울시 문화상(1986), 색동회상(1987) 등 관민단체의 상을 두루 받았다. 한편, 화단과 사회활동도 국제적이어서 한독미술가협회 회장(1981), 후소회 회장(1985)을 비롯해서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지부 실행위원(1967), 한국농아복지회 창립과 초대 회장(1979), 세계농아연맹 문화예술분과 부위원장(1985), 아시안게임 동남아채묵(彩墨)전 추진위원장(1986)을 역임하였으며, 88 올림픽 아트포스터 제작작가로 선정되는 등 다채롭고 의욕적인 면모를 과시하였다.

또한 박정희 군사 정권 아래서는 초상화나 기록화 제작을 도맡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호와 의병장 조헌의 영정(1974), 을지문덕과 신숭겸 영정(1975), 그리고 신라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 영정(1974)을 제작하여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받은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공공건물의 벽화나 그림제작도 많았고 성화집 {예수의 생애}에서는 한복을 입은 기독교화를 그려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현재는 1979년에 착공한 청주 교외의 화실에서 노년의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간행위원회를 발족시켰는데, 63년 동안의 작품활동을 총망라해서 초대형 화집을 발간할 예정인 모양이다. 그 간행위원회에 참여시킨 문화계·미술계 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역시 김기창의 정치력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운보 화백이 한국 미술에 있어서 도저(到底)한 거봉이요, 또한 그의 작업이 장강처럼 맥맥히 이어져 왔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즉, 운보의 80년 생애와 그 방대한 작품이……특히 그의 삶이나 예술은 육체적 이중고를 초극한 실로 '위대한 실존상'으로 우리 모두의 삶의 귀감이 될 것이다.(구상 시인의 글, 발간위원회 두번째 소식지, 1993. 1) 이 글을 쓴 시인 구상은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발간위원장이다. 아직도 우리는 김기창의 친일활동은 철저히 밀쳐놓은 채 그를 '삶의 귀감'으로 삼자는 주장이 공공연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글은 그가 죽기전인 1994년경 씌어진 글임을 감안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운영자>-

                             ■ 이태호(전남대 교수·미술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참고문헌

김기창, {나의 사랑과 예술}, 정우사, 1977.
화집 {운보 김기창}, 경미문화사, 1980.
{한국근대회화선집} 한국화 9권,'김기창/박래현', 금성출판사, 1990.

참고 작품사진

김기창,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매일신보, 1943년 8월 6일자 삽화.
김기창, <총후병사>, 조선식산은행사보 {회심}지, 1944년 4월호 속표지화.

 

 

아래는 2001년 1월 23일 운보의 사망 당시 신문 기사다(한국일보).신문 기사만을 보면 그는 전혀 친일파가 아니다.어디에도 친일했다는 기사는 없다.그는 오로지 애국자요 훌륭한 예술가이다.죽으면 미운 마음도 누그러지는 것은 우리네 인정이긴 하지만 건망증이 너무 심하다.헷갈린다.독립운동가 분들이 작고하셨을 때도 이렇게 대서특필을 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는 정부나 언론이나 기려야 할 사람이 누군지를 도대체 모르고 있다.한심하다. 참고로 보아두자.                                   -<운영자>-

운보 김기창 화백 '별세'

향년 88세…청록산수등 2만여점의 작품 남겨

한국화의 거두 운보 김기창 화백이 23일 오전 9시 35분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운보의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운보의 아들 완씨는 이날 "어제(22일)까지만 해도 비교적 건강하시던 아버님이 새벽에 의식이 끊기고 호흡이 사실상 멎는 등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면서 "이후급거 서울 삼성의료원으로 옮겨 확인한 결과 타계하신 것으로 최종진단됐다"고 전했다.

1914년(호적은 1913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7살 때 후천성 농아가 됐으나 넘치는 정열과 예술적 투혼으로 이를 극복하고 한국회화의 대가로우뚝 섰다.

김 화백은 17살 때 이당 김은호 화백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받아 이듬해 제10회 조선예술전람회에서 <판상도무(板上跳舞)>가 입선하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광복한해 뒤 평생의 반려이자 화우(畵友)였던 우향 박래현과 결혼한 그는 수차례에 걸쳐 부부전을 개최하는 등 금실을 과시했지만 1976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만년을 외롭게 지냈다.

김 화백은 청록산수, 바보산수 등 독자적 예술영역을 개척해가며 2만여점의 작품을 남겼으나 1996년 자신이 창립한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뒤 뇌출혈로 쓰러져 그동안 긴 투병생활을 해왔다.

한국전쟁 때 동생들과 헤어진 그는 지난해 11월의 제2차 남북이산가족상봉 때북에서 온 동생 기만(基萬.72.공훈화가) 씨와 50년만에 병상해후를 해 민족분단의아픔을 또다시 실감케 한 바 있다.

대표작은 <정청> <군마도> <가을> <갓 쓴 예수> <흥락도> <문자도> <점과 선 시리즈> 등.

유족으로는 아들 완(完.52)씨와 딸 현(玄.54.미국 거주), 선(璇.49.미국 거주),영(瑛.45.수녀.세례명 아나윔) 씨 등 1남 3녀. 북한에는 여동생 기옥(75.의사) 씨와남동생 기만 씨가 생존해 있다.

빈소(☎(02)3410-3151∼3)는 삼성의료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27일 오전 9시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원로시인 구상 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미사와 예술인장으로 치러질 예정.

이에 앞서 오전 8시에는 운보가 오랫 동안 살았던 서울 성북동자택을 잠시 들르게 한다. 장지는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있는 운보의집이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기자

운보 김기창의 생애와 작품세계

23일 타계한 운보 김기창 화백은 왕성한 실험정신으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변신을 거듭한 한국화단의 거목이다. 타고난 예술혼과 활화산같은 창작열로 호평받았으며 청각 장애로 인한 침묵의 고통을 딛고 우뚝선 의지의 인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914년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난 김씨는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한 7살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신경이 마비돼 후천성 귀머거리 (전농)가 됐다.

그는 12살에 복학했으나 강의를 듣지 못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공책에 새,꽃, 사람, 개 등을 그렸다. 아들의 소질을 알아본 어머니는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사사하도록 주선했고, 이는 그의 일생에 결정적 전환점이됐다.

이당에게 그림을 배운 지 6개월만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할 기회가생기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운보(雲 口에甫)라는 아호까지 지어줬다.

이때문인지 운보는 1931년 선전에 <판상도무(板上跳舞)>라는 널뛰기 소재의 작품으로 입선해 일찍이 대가의 소질을 보였다.

당시 신문에는 귀먹고 말못하는 18살소년이 선전에 입선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이듬해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자 이당이 후견인 역할을맡는 등 어려운 젊은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털고 선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해 추천작가가 되는 등승승장구했다. 1937년 선전에서는 할머니에게서 옛이야기를 듣는 아이들 모습을 그린 <고담>으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광복 후 아호 운보 (雲 口에甫)에서 口자를 없애 장애의 굴레를 벗고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과 의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듬해 동료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했는데, 이는 그의 삶과 예술에 일대 전기가 됐다. 필담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데 한계를 느낀 그는 우향에게서 입으로 말하는 구화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아내의 작품세계에서도 크게 영향받았다.

한국전쟁은 그에게도 뼈아픈 고통이었다. 기만, 기옥 씨 등 동생이 사상 차이로월북한 것. 그는 피난지 군산에서 조선시대 한국인의 모습으로 예수의 일대기를 그린 <성화> 연작을 2년에 걸쳐 제작했다.

전통 한국화의 평면구성에서 탈피해 입체 구성의 <노점>, <구멍가게> 등 대표작을 제작, 입체파 선두로 나선 것도 이때였다. 야생마의 움직임이 격정적 구도로 나타나는 대작 <군마도>와 전통 가면극을 작품화한 <탈춤> 등 춤 연작으로 힘찬 운필을 구사했다. 나아가 완전 추상인 <문자도> 제작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밖에 1천여 마리의 참새 떼가 양편에서 날아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담은대작 <군작>은 운보의 표현적 특징과 스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60년대 들어 해외 화단에 나선 운보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가장 뚜렷한 변화를보이는 완전추상 <태고의 이미지>, <청자의 이미지> 등 이미지 연작으로 한국화의새 가능성을 제시했다.

부인이 60년대 후반 미국에 유학하자 적색, 황색이 주를 이루는 <태양을 먹은새> 등을 발표하는 등 천변만화하는 작품세계를 과시했다. 이어 장식적 산수화 <청록산수>를 선보이고, 민화풍 산수화인 <바보산수>와 해학성이 돋보인 <장생도>도 차례로 발표해 호평받았다.

그러나 수차례 부부전을 가진 화업의 친구이자 인생의 반려인 부인이 1976년에타계하자 그는 말할 수 없는 허탈에 빠졌다. 일생에서 가장 활발한 작업을 했던 게바로 그 이후로,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그의 안간힘을 느끼게 한다.

아내를 기려 성북동에 운향미술관을 세운 그는 성화집 「예수의 생애」 발간을 기념해 예수생애 연작으로 `운보 김기창 성화전'을 갖는 등 미친듯이 화면에 빠져들었고, 만년에는 대걸레 작업인 <심상> 연작을 내놓기도 했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운보 김기창 팔순기념 대회고전'을 계기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발간위원회가 작품 4천여점으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전 5권)을발간했다. 전작도록이 발간된 것은 그가 최초.

이 과정에서 그가 제작한 작품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30-40년대 작품 32점이 북한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음도 이 무렵 확인돼 화제가 됐다.

운보는 90년대 중반 서울 롯데화랑에서 `운보 김기창 예술 60년-미공개 작품전'을 갖는 등 `붓을 움직일 힘이 있는 한 그림을 그린다'는 신념으로 제작한 작품들을속속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갤러리현대 등에서 미수기념전이 개최돼 병상의 그에게말할 수 없는 감격을 안겼다.

전농인 운보는 농아복지에 남달리 관심이 컸다. 세계 스케치여행중 선진국의 농아복지시설을 돌아보고 낙후된 국내 농아복지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회장으로있던 한국농아복지회를 국제농아연맹에 가입시켰다.

80년대 중반 외가가 있던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운보의 집'을 세우고그 옆에 운향미술관과 도예전시관, 운보공방 등 문화공간을 조성했다. 이중 운보공방은 농아들에게 도자기 기술을 가르쳐 자립기반을 닦도록 한 곳으로, 청각 장애인의 권익옹호에 앞장선 운보의 자상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거구였던 운보도 79세 때 심장질환으로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는등 만년에 건강문제로 고생을 했다.

그러다 지난 96년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에참석한 뒤 뇌출혈 증세를 보이며 더이상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연말 제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는 월북했던 동생 기만 씨를 극적으로 만나 가슴아픈 가족사와 민족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인간승리 교훈 안기고 간 운보

한국현대미술의 `미스터리'로 일컬어지는 운보김기창 화백이 한국화단에 불멸의 족적을 남기고 23일 떠났다.

`미스터리'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그의 삶 자체가 워낙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7살에 청각을 잃은 운보는 타고난 생명의지와 폭발하는 정열로 누구도 범접키 힘든독보적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인류사에서 장애를 이기고 우뚝 선 위인들이 간헐적으로 나왔다.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였던 미국의 헬렌 켈러와 농아작곡가였던 베토벤 등이 그렇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 고야도 농아라는 장애를 뛰어넘어 근대미술사의 거장으로 성장했다.

이중 헬렌 켈러는 운보에게 큰 힘을 주었다. 운보는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온헬렌 켈러가 금강산을 여행하고 판소리를 감상한 뒤 정상인보다 더 즐거워 하더라는얘기를 꺼내 들려주곤 했다.

그는 자신의 귀에서도 가끔 칸타타같이 장엄한 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온다며 흥분과 함께 눈가에 이슬같은 눈물을 맺혀놓곤 했다는 것. 고막을 상실한 그에게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베토벤과 고야도 그가 예술의 거장으로 부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청각마비에 생활고까지 겪은 베토벤은 자살을 결심하고 `가을에 낙엽이 땅 위에 떨어지듯 내희망도 사라졌다'는 내용의 유서를 썼으나 마침내 <제5교향곡 운명> <제6교향곡 전원> <제9교향곡 합창>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고야는 또 어떠했던가. 나이 46살에 청각을 잃은 그는 불타는 투혼으로 불운을털고 일어나 <성 앤토니오 데 라 프로리다 성당의 천장화> <마야>같은 대작을 만들어 인류문화사에 기여했다. 그가 농아가 된 것은 궁정수석화가라는 최고명예에 오른뒤였다.

물론 운보가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예술의 샘으로 이끌어준어머니와 젊은 날 그를 건사해준 외할머니 그리고 사랑으로 감싸준 동료화가이자 평생반려인 아내의 뜨거운 사랑과 배려가 있었다.

어머니 한윤명은 타계 한해 전에 아들을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에 넣어 예술의 길을 가게 했고, 외할머니 이정진은 77살까지 살면서 오갈 데 없는 운보를 친히 거두었다. 아내 박래현이 남편 뒷바라지한얘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 설명이 필요치 않을 정도다.

그러나 아무리 주변도움이 많다고 할지라도 본인이 이를 수용하지 못하면 별무소용일 수밖에 없다.

그는 18살 때 <판상도무>가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것을 계기로 미술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국과 동양미술의 전통적 정체성을 추구한가운데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돼 있는 바보산수가 바로그렇다. 모두 피나는 노력 뒤에 거둔 결실들이었다.

그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박애정신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농아자로서 아픔을 뼈저리게 체험한 운보는 특히 80년대를 전후해 갖가지 장애사업을 펼쳐나갔다.

한국농아복지회 초대회장(1979년)과 한국농아복지회 회장(81년), 서울 서계동농아복지회관 개관(82년), 경기 남양주 운보복지원 개원(85년), 한국청각장애자복지회 창립(86년), 충북 청원의 장애자시설 `운보의공방' 개원(88년) 등이 그의 궤적을잘 말해준다.

이같은 삶을 산 그에게 `천연기념물' `바보 인간' 등의 별칭이 따라 다닌다. 모두 범인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생명력과 예술혼 그리고 박애실천을 두고 하는 찬사의 또다른 표현일 것이다. 새해의 벽두에 그를 보내는 감회는 그래서 더욱크다. 경희대 최병식 교수가 "슬픔과 고뇌의 삶과 예술에는 재치와 익살이 넘쳤다.

그래서 그를 만나면 눈물부터 났다. 이제 그는 고통이란 고통을 다 안고 우리 곁을떠나갔다"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기자

운보 김기창 화백 연보

▲1914년 =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출생

▲1920년 = 장티푸스로 인한 청신경 마비로 후천성 귀머거리가 됨

▲1930년 = 승동보통학교 졸업후 이당 김은호 화백 문하로 입문

▲1931년 = 조선예술전람회서 < 판상도무(板上跳舞) > 입선해 데뷔

▲1936년 = 김은호 화백 후학모임인 후소회(後素會) 창립

▲1940년 =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

▲1946년 = 동료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

▲1947년 = 첫 `운보- 우향 부부전' 개최.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1950년 = 전북 군산으로 피난해 월북한 동생 기만 씨 등과 헤어짐

▲1952년 = 예수 일대기 그린 작품 30점 제작

▲1954년 = 군산생활 청산하고 상경. < 오수 > 등 인물과 풍속화 시리즈 제작

▲1955년 = 대작 < 군마도 >와 < 탈춤 > 시리즈 제작. 홍익대 강사로 강단에 섬

▲1960년 = 참새 1천여 마리 그린 < 군작 > 제작

▲1962년 = 수도여자사범대(세종대 전신) 회화과 학과장

▲1968년 = 부인 우향 미국으로 건너가 7년간 헤어짐

▲1970년 = 청록산수 첫선

▲1971년 = 3.1문화상 수상. 서울 인사동에 `운향화실' 개설

▲1976년 = 우향 타계. 민화에 바탕 둔 바보산수 제작

▲1977년 =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 수상. 운향미술관 성북동 자택에 건립

▲1979년 = 한국농아복지회 초대회장 취임

▲1981년 = 예술원 정회원 위촉. 국민훈장 모란장. 한독미술가협회 회장

▲1982년 = 예술원상 수상. 농아복지회관 서울 서계동에 개관

▲1984년 = 충북 청원에 `운보의 집' 완공

▲1985년 = 가톨릭으로 개종. 김수환 추기경에게서 영세

▲1988년 = 자서전 `침묵의 심연에서' 출간

▲1989년 = 국립현대미술관서`운보전' . 대걸레작업 < 걸레수묵 > 발표

▲1993년 =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서`운보 김기창 팔순 기념 대회고전'

▲1994년 =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전5권) 발간

▲1996년 =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쓰러진 후 투병생활

▲1997년 = 롯데화랑서 `운보 김기창 예술 60년-미공개 작품전'

▲1999년 = `천연기념물이 된 바보' 출간.

▲2000년 = 갤러리현대 등서 미수(米壽) 기념특별전. 월북동생 기만 씨와 상봉

▲2001년 = 타계

운보 화백 장례는 어떻게 치러지나

운보 김기창 화백은 한국화단의 거물인 만큼 그 장례도 미술계를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이 두루 참석한 가운데 뜻깊게 치러진다.

23일 구성된 `운보 김기창 화백 예술인장 장례위원회'(위원장 시인 구상)는 고인의 뜻을 살려 장례를 치르되 외적 화려함을 지양하고 내적 충실성에 역점을 둘 방침이다.

일정은 5일장으로 확정됐고, 빈소는 충북 청원에 있는 운보의집과 서울 삼성의료원에 동시에 마련됐다. 운보 화백이 예술원 회원인 만큼 대한민국 예술원(회장 차범석) 차원에서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인은 27일 오전 7시께 삼성의료원을 떠나 자신이 삶의 대부분을 보냈던 서울 성북동 자택을 둘러본 뒤 오전 9시 명동성당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미사와 예술인장이 차례로 이어질 예정. 미사는 운보 화백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주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의 장례절차를 마친 운보 화백은 곧바로 청원으로 내려가 1976년에 타계한 아내 우향 박래현 옆에 묻히게 된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