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활란(金活蘭, 창씨명 天城 活蘭 1899~1970)

일제 침략전쟁에 조선 청년 내몬 이화여전 교장 김활란

김활란사진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교육·기독교계 여성지도자의 대명사 김활란

김활란은 일제하에서는 '여성박사 1호,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YWCA 창립자' 등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교육·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 꼽혀 왔다. 그리고 8·15 이후에는 이화여대 총장직과 배화학원, 국제대학, 동구학원, 금란여중고, 영란여중고 등 여러 학교의 이사장직을 맡았으며, 사회단체로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여학사협회, 대한부인회, 주부클럽연합회, YWCA 등 여성단체를 설립하고 회장 등의 임원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정부 수립 직후에는 유엔총회 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고, 6·25 때는 공보처장, 1965∼70년에는 대한민국 순회대사, 한국아시아반공연맹 이사 등 정치·외교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 결과 정부로부터 1963년에는 대한민국장 포상을 받았고, 1970년 사망한 이후에는 대한민국 일등수교훈장을 받았다. 이렇듯 여성명사의 대열에서 김활란은 빼놓을 수는 인물이다. 그러나 교육·여성계에서 그가 누렸던 명성과 지위만큼이나 일제 말기에는 교육·종교계 인물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친일 행각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물론 일제하애서 그가 범한 반민족 행위 때문에 그의 공헌, 그에 대한 찬사가 모두 거짓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반동강이의 우리 국토, 반공 국시를 지키기 위해 왜곡된 우리 역사 속에서 나온 찬사란 점을 직시하면서 그 속에 가려진 '진실'을 밝혀내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자 김활란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단문제가 한창 논의될 때 나온 {친일파군상}에서는 김활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김활란 여사는 본의로써 전쟁에 협력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진의의 여하는 미상이나 당시 왜경찰의 주목과 엄중한 감시하에 있던 이화여전 교장의 직에 있었던 관계로 부득이 본의에 없는 자리에 출석도 하였고 말도 하였을 듯하나 좌우간 그의 언행이 세인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 횟수가 빈번하였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60면) 이렇게 안타까운 표현이 나오기까지는 그의 활동에 대한 기억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민족적 성향을 띠었을 때 그는 어떠한 입장에서 활동을 하였는가. 그가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있을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그는 지하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1920년에는 이화전도대를 만들어 조선 각지를 돌며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 때 기독교는 메시아의 도래라는 면과 관련하여 민족에게 자각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전도활동은 단순한 전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근우회가 창립되기 전까지의 그의 생활은 주로 학교나 종교활동에 머물기는 했지만 강연과 글 등을 통해 여성해방론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그의 민족운동관이 무지로부터의 탈피, 생활개선 등 개량적인 실력양성운동론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던 것처럼, 여성운동의 목표도 여성의 교육권·재산권 확보 등에 두고 있었다. 참정권을 말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가능했던 전형적인 자유주의 여권론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민족문제·계급문제에 대한 치열함은 부족하였으나 민족적 성향은 계속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창립될 때까지이기는 하지만 좌우합작의 근우회에도 관여하였다. 1928년 근우회에서 활동을 끊은 후 주로 종교단체활동만을 계속하다가 193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가 박사학위를 받아 '여성박사 1호'로서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했을 때 민족해방운동의 양상은 크게 변해 여성계의 경우 근우회가 해소된 반면, 사회주의계 여성들은 노농조직 등에서 여성부를 조직하고 혁명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자유주의적 여권론을 주장하던 여성들은 종교단체나 민족개량주의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김활란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농민문제에 관심을 갖고 농촌사업을 벌였다. 박사논문의 주제가 농촌교육이었고 이화여전에 농촌사업가를 양성할 과를 두고자 하는 포부를 가졌을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여전히 활동 방향을 문맹퇴치, 가정경영에 필요한 지식획득, 개인적 차원에서의 경제자립, 봉건적 인습 타파, 의복개량 등에 두고 있었다. 이들의 운동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반에 걸쳐 활발하게 일어났던 브나르도 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가면 그들의 개량적 시도는 농촌진흥운동에서의 개량적 구호, 예를 들면 문맹퇴치, 금주·금연, 절약·저축, 미신타파 등의 구호와 접근하고 있었다. 게다가 김활란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비타협적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저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가 관심을 가진 여성해방도 민족해방 위에서만 꽃 필 수 있었음에도 점차 두 과제를 분리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반민족행위의 시점

1930년대 중반을 넘으면서 일제는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 건설을 위해 민족말살정책·황민화정책을 강력히 시행하여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 낭독 등을 강요하였으며 철저한 통제망을 조직하여 우리 민족을 전쟁수행의 도구로 삼기 위해 광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식인층이 일제에게 굴복하여 반민족적 행위에 나서는 데는 각각의 계기가 있었다. 기독교계 학교에 속한 인물들은 일제가 신사참배 등의 문제로 일제와 선교사들의 입장이 배치되었을 때, 폐교를 무릅쓰고 일제의 정책에 반기를 들 것인가, 아니면 묵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을 맞이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각 교파마다 그리고 각 학교마다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북장로교계에서는 학교 폐쇄를 불사하였다.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 대부분과 광주 수피아고녀, 숭일고 등은 폐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김활란이 몸담고 있던 이화여전은 일제의 각종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일제의 요구에 응하며 이리저리 끌려 다닌 대표적인 이가 바로 김활란이었다. 그가 저지른 친일행각은 교장직을 맡았을 때인 1939년 4월 이후부터가 아니라, 조만간 맡을 가능성이 엿보였던 1936년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즉, 1936년 부교장으로서 그는 총독부 사회교육과가 '가정의 개선과 부인교화운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주최한 사회교화간담회에서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1937년 1월 황민화정책을 철저히 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방송에도 참가하였다. 그리고 1937년부터는 일제와 관련된 일회적인 모임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단체활동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즉, 1937년 1월 말에는 학무국 알선으로 조선부인문제연구회를 결성하였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손정규(孫貞圭)와 더불어 애국금차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사회자로 활약하였다. 애국금차회는 일찍부터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 부인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금비녀를 뽑아 바치자고 조직한 단체였다. 애국금차회의 사업은 '황군의 환송영', '총후가정(銃後家庭)의 위문', '총후가정의 조문(弔問)', '일반가정부인에 대한 시국인식의 강화·철저와 국방헌납과 황군위문금품의 헌납' 등이었다. 이후 그는 이와 같은 목표를 둔 단체나 활동에 약방의 감초처럼 참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곧 '출정가족 간담회'({매일신보}, 1937. 10. 6)에 참가하는 등 친일의 수렁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이전까지의 김활란의 행적에 대해서는, 일제하라는 조건에서 합법적인 계몽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국금차회에 가담한 시기부터는 민족역사상의 분명한 반민족적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38년 3월 칙령으로 내선일체화란 이름하에 조선교육령이 개정되어 사학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해졌다. 수업중 조선어의 사용은 금지되었다. 학생들은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되고 학교과정에서도 우리 문화나 전통에 관한 것은 말살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김활란은 1938년 6월 20일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400명 처녀들로 '총후 보국을 내조'한다는 애국자녀단을 조직하였다. 한편 기독교 여성단체 중 가장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던 조선 YWCA가 1938년 6월 8일 일본 YWCA에 가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이 때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그는 그날 "비상시국에 있어 기독교 여자 청년들도 내선일체의 깃발 아래로 모이지 아니하면 안되겠으므로 시국을 재인식하는 동시에 황국신민으로서 앞날의 활동을 자기(自期)하는 의미에서 금번 '제네바'동맹을 탈퇴……하고 기독교여자청년회 일본동맹에 가담하게 되었다"({매일신보}, 1938. 6. 9)라는 발표를 하고 있었다. 1941년경에 가면 결국 활동이 중지될 것을, 이토록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단체의 목숨을 연장시키고 있었다. 이 때 지방 YWCA에서 활약하던 인물 중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하여 사회적 지위에 초연한 태도를 취한 여성들도 있었다. 조선 YWCA를 구상하고 탄생시킨 김필례(金弼禮)가 바로 그러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김활란의 친일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는 1939년 이화전문학교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에 앞장 섰다. 당시 일제는 중등과정의 학생들에게는 강제로 교복을 입게 했지만 전문학생의 경우는 학교의 재량에 이 문제를 맡겨 놓고 있었다. 그런데 부교장이었던 김활란은 언론({동아일보})과 학생·학부모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체생활상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교복을 입게 하였다. 이것이 학교에서 한복이 사라지게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매일신보}, 1939. 1. 18, 19) 이렇듯 학교의 최종 결정권자인 교장 자리를 맡기 전부터 너무 많은 친일 행위를 했기에 '학교를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친일을 했다'라는 정도의 면책조차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되어 김활란이 교장이 된 데에는 약간의 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이화고녀, 배재고 등 선교사가 경영하던 학교의 교장이 조선인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상태이기는 했어도 아펜젤러 교장이 물러나는 것에 대해 이사회 내에서 약간의 이견이 있었던 것 같다. 김활란이 교장이 되는 데는 당시 이사였고 선교사 대신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배재 교장이 된 신흥우(申興雨)의 힘이 컸다고 한다(최규애, {참다운 크리스챤 김활란 여사}, 나랏말 출판사, 1991, 91면). 김활란이 1939년 4월 정식 교장이 되면서부터는 일제에게 굴복하면서도 학교를 지킨다는 명분 하나만으로 민족사에서 학교가 해야 할 많은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야마기 카쓰란이 되어 학병·징병을 권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연행을 시작하였다. 동시에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선전하기 위해 각종 친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까지 앗아가려는 온갖 책동을 다하였다. 여기에 친일 여성단체를 만들고 여성명사들을 동원하는 등 여성들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김활란은 임전대책협력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국민총력 조선연맹 평의원,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직을 맡았다. 그리고 여성대중에게는 노력동원, 가정의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였다. 그는 1941년말 야마기 카쓰란(天城活蘭)으로 창씨하였다. 그리고 부인궐기촉구 강연, 결전부인대 강연, 방송 등을 통해 일제의 침략정책을 미화하고 내선일체·황민화시책을 선전하며 일반여성이나 여학생들에게 '어머니나 딸·동생으로서' 징병·징용·학병 동원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였다. 확장되는 전선을 일본인 군인으로만 막을 길이 없자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여 조선의 남아들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삼고자 한 결정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하였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러나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 1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은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꼈음도 없었으리라.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 12) 그는 후에 자서전 {그 빛속의 작은 생명}에서 일제 때 가장 안타깝고 분하게 여겼던 일 중의 하나가 1943년말 전시비상조치방책으로 이화전문학교가 농촌지도원 연성소가 된 것을 꼽고 있다. 이것은 사실 그가 친일행각을 중단할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때도 이렇게 말하였다. 아세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 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 12. 25) 이화전문학교가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연성과로 바뀌어, 기존 학생들에게는 3개월간의 교육을, 신입생에게는 1년간의 교육을 시켜 전조선에 설치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로 배치하여 농촌여성을 계몽한다는 일제의 방침대로 되자, 1944년 이화여전 학생 모집에는 150명 모집에 40명밖에 지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재학생들도 격감하였다. 그리고 제자들과 후배들은 그를 외면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래도 그는 그냥 있었다. 아무리 자기 본심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이미 공인으로서의 행동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공인으로서의 책임있는 행동보다는 껍데기뿐인 이화를 잡고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일관했을 뿐이었다. 그가 조선 민족을 향해 내뱉은 그 숱한 반민족적 연설·글·방송을 어떻게 주어 담을 것인가. 이러한 친일적 지식인 여성들의 활동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들 중 많은 수가 과거 민족운동에 참가하였던 까닭에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투쟁은 커녕 안면몰수한 친일행위는 민중에게 분노와 실망만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지식인들에게는 패배주의를 낳게 했다. 김활란과 같이 교육계에 있었던, 특히 서울의 여학교 교장----황신덕*, 송금선, 이숙종, 신봉조, 조동식, 배상명----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같은 길을 갔다. 교육계에 종사한 이들의 친일행위는, 어린 학생들에게는 그저 보고 따르는 스승이었기에 악영향은 상대적으로 더욱 큰 것이었다. 김활란의 측근자였던 김옥길의 {김활란 박사 소묘}에서는 그가 1944년경 악성안질에 걸려 실명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남의 귀한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나가라고 했으니, 장님이 되어도 억울할 것 없지.……당연한 형벌"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진실로 반성하는 구절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친일한 많은 이들이 자서전이나 전기를 남겼지만 대부분 친일행위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는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지도 모르겠다.

반공전선에 서서 활동을 계속

8·15는 우리 민족에게 해방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민족이 분단되고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 국가와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합법공간에서 각종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남한에서 미군정이 실시되자 어제 '적국영미'(敵國英米)를 외치던 이들이, 이제는 기독교인이며 영어를 구사한다는 장점을 이용하여 미군정 당국자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청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는 커녕 항일운동가들을 고문·탄압하던 자들까지 그대로 인수받아 그들에게 권력을 남용할 기회를 주었기에 친일 지식인들의 군정청 접근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이 때 김활란은 이화전문학교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미군정을 열심히 드나들었다. 8·15 직후에는 사회단체 활동에 별로 앞에 나서지 않았지만, 1946년 반탁운동이 고조될 때 그도 우익계열의 독립촉성중앙부인단에 참가하는 등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민정 이양시기에 그를 보호하고 그의 지위를 유지시켜 줄 정치세력으로서 이승만을 선택하였다. 일제하에서는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비난하지 못하였으나, 8·15 이후가 되면 냉전논리와 자본주의국가 건설이라는 사회상황에서 이제는 정치이념적으로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여 반공단체활동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분단을 기정사실화한 제헌의회 선거에 여성의 정치진출을 강조했던 당시 여성계의 입장에서 김활란도 서울 서대문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대한부인회 대표로서 나온 이 선거에서 낙선은 했지만 그의 정치적 활동은 꾸준히 계속되었고 그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확고하게 자리잡혀 나갔다. 경찰이나 군대·행정기관에 소속되어 직접 항일운동가와 민족성원을 탄압한 이들과는 다르지만, 문화·교육가로서의 역할이 결코 가벼울 수는 없는 만큼 그가 민족사에 남긴 오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반민족적 행위를 범한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전에 이렇다 할 반성의 말 없이 갔고, 현재의 우리는 여성계의 대모로서 그를 인식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그를 근우회 활동의 중심인물 내지 회장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근우회 활동에서 도중하차했을 뿐이다. 일제에게 굴복하기보다는 죽음을 무릅쓴 투쟁을 한 이보다 어떠한 이유든 간에 강자의 압박에 못이겨 굴복한 이를 우리는 더 널리 알고 추앙해야 할 인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제 이렇게 된 연유에 대해, 그리고 민족적 자존심·긍지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 강정숙(영남대 강사·여성학)

참고문헌

{동아일보}.
{매일신보}.
김활란, {그 빛 속의 작은 생명}, 여원사, 1965.
김옥길, {김활란 박사 소묘}, 이화여대출판부, 1959.

 


부인 문제도 내선일체로!

요즘 내선 일체라는 것이 매우 활발한 문제로 되고 그를 위한 실제 활동이 행해지고 있습니다마는 이는 매우 좋은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남성들의 활동에 비하여 여성들의 그러한 행동은 아직 뒤쳐져 있는 느낌이 들어서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현재로는 조선의 부인 문제도 내선일체라는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그것만이 옳고 바른 현실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내선 부인 동지가 서로 사랑과 이해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은 천성적으로 아름다운 감정을 갖고 있으니까 이론보다도 마음과 마음으로 서로가 사랑을 나누며 ,서로가 생활적으로 이해를 나누는 일을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현재 국방부인회나 애국부인회 같은 데서 내선 부인들이 함께 섞여 일하고 있지만 그것이 아직은 부인끼리의 인간적인 이해와 감정의 융합이라는 단계에까지 완전히 가 있지 못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조선에서도 부인문제가 내선일체라는 커다란 역사 속에서 훌륭한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하고 저는 믿습니다. 과거 조선의 부인운동은 어쨌든 화려한 시기가 있긴 있었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로 구호에 불과한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내선일체의 대업 속에서 정말로 확고하게 현실성이 있는 부인운동이 전개되어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 나는 조선의 부인들이 내지의 부인들과 서로 손을 마주잡고 진정한 자매로서 사랑을 나누어간다는 일이 중요하며, 이런 것을 통해서 내선 일체의 일로 남성들과 함께 협력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부인들도 이제부터는 커다란 희망과 신념을 갖고서 부인의 입장에서 열심히 사회 봉사 사업에 진출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내선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

         <동양지광, 1939년 6월호>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허둥지둥 감동에만 빠지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지만 어쩔지를 모르 고 눈을 휘동그렇게 뜨고 갈래를 못 찾는 것도 현명한 태도는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 반도여성은 그저 내 아들 내 남편 내 집이라는 범위에서 떠나보지를 못했다. 떠나볼 기회가 없었다. 따라서 자칫 하면 국가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도여성에게 애국적 정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적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戰場)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막연하게 부러워도 했다. 장하다고 칭찬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반도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그 각오와 준비가 있는 것인가? 실제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나라에 바쳐보지 못한 우리에게 는 대단히 막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내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만 일의 경우에는 남편이나 아들의 유골을 조용히 눈물 안 내고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가져야 한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각오가 있을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내지 여성에게 배울 점이 많다. 우리 일본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강한 원인의 하나가 일본 여성의 숨은 힘이라 한다. 말없이 참고 나가는 그 들의 힘은 강한 인(人)의 몇 배의 힘을 가진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러 나가는데 조용한 웃음으로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그저 모방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들을 그렇게까지 만드는 그 근본정신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즉 국가를 위해서는 즐겁게 생명을 바친다는 정신이다.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내 남편도 내 아들도 물론 국가에 속한 것이다. 최후의 내 생명까지 국가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국가에 속한 내 남편이나 아들 또 내 생명이 국가에서 요구될 때 쓰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못 쓰인다 면 오히려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꼬집어 말하자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바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나라의 것을 나라가 쓰는 것이지 내가 바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잠깐 맡았던 내 아들이 훌륭히 자라서 나라가 다시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그 몇 해 동안에 책임을 다한 것이 즐겁고 그동안 그 아들이 많은 즐거움을 준 것이 감사한 것이고 좀더 하면 책임을 다 못하여 나라에 돌려보내서 쓰이지 못했을지도 모를 것을 훌륭히 쓰이게 된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뿐인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내려진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뒷일은 우리가


학도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요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은 총후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남아로 태어나서 오늘같이 생의 참뜻을 느낀 일도 없었으리다.
 
학병제군 앞에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냐. 제군은 오늘 이때를 영구히 잊지 못할 것이다.
 
 
나가라! 전선으로 그 뒤는 우리가 맡겠다. 
 
총후의 여성들은 제군들이 안심할 만큼 만사를 해내일 각오가 굳은 바이니,
 
바라건댄 모쪼록 빛나는 전공을 세워 조선학도의 참다운 일면을 길이 청사에 빛내여라!
 
       <조광, 1943년 12월, pp 56-57>
 


남자에 지지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아시아 10억 민중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결전이 바야흐로 최고조에 달한 이때, 
 
어찌 여성인들 잠자코 구경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날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이미 벌써부터 되어 있었습니다. 
 
내지 학도들과 함께 전문 학교 법문계 반도학도들은 우렁찬 진군을 일으키어 
 
특별지원병으로 오는 1월 20일에는 영예의 입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린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 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 1선에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총후에서도 굳은 각오만 있으면 제 1선 부럽지 않은 활약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학교가 앞으로 여자 특별 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 백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당국으로부터 장차 지시가 있을줄로 
 
압니다만, 대략 현재의 계획을 말씀드리면, 명년 1월부터 3월까지는 지금 재학생들을 
 
단기간에 훈련시키어 지도원으로서 전 조선에 파견시킬 터이며 다음으로 4월부터 
 
1년을 수료기간으로 하여 신입생을 받아들일 계획입니다. 앞으로는 결전하의 국가 
 
목적에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우수한 지도원을 양성하기에 전력을 다할 각오가
 
있을뿐입니다.
 
       < 매일신보, 1943년 12월 2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