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사회주의자의 전향문제                HOME   

                                                                            김민철(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전향서는 '종이 한 장'이었지만 전향문제는 틀림없이 '종이 한 장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 '종이 한 장'은 나에게 뼈저린 무력감을 안겼을 것이고, 인간의 능력에 대한 믿음도 사회의 진보에 대한 희망도 빼앗아갔을 것이다. 또 나의 정신에서 젊은 그 자체를 빼앗아갔을 것이다. '종이 한 장'이 굴복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끝없는 나락으로 향하는 변절의 논리의 시작일 수가 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변절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서준식, [전향,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1. 문제제기

일제의 식민지배가 우리 사회에 남긴 악습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로 전향(제도)을 들 수 있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국가권력이 체제 유지를 위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사상을 통제하고 구성원들로부터 동의를 끌어내는 작업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상통제의 차원을 넘어 한 개인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사상을 포기하게 하고 지배권력의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폭력적으로 강요할 때(즉 전향을 강요할 때), 그것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까지 파괴하는 제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향 문제는 세계사 속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기 보다는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과 그 식민지였던 조선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측면이 있다. 그 특징을 정리하면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일본 사회가 갖고 있는 정신(사상) 구조의 특수성이다. 일본에서 전향제도가 실시된 사상적 배경에는 사무라이 정신과 가족주의가 깔려 있다. 즉, "전향을 둘러싼 사법당국의 태도는 일종의 사무라이 정신과 흡사한 것이어서 적대자들끼리 싸우다 졌을 때 항복하면 즉시 동료로 포섭하는 그런 방식"이었던 셈이다. 또한 1937년 사상범에 대한 보호관찰이 실시되자 제국경신회(帝國更新會)의 한 보호관찰위원은 "만일 이것이 관찰을 주로 할 때는 사랑의 법률이 안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보호관찰소의 사명, 보호단체의 활동은 당연히 여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는 인의(仁義)에 입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정의와 인애(仁愛)가 아울러 비로소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는 것"이라 하여 보호관찰의 이념을 설명한 뒤, 이러한 일본적 특수성은 바로 가족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요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주의가 그 외연을 확대하여 국가주의(나아가 황도주의)로 연결되는데 전향의 논리 속에도 이것이 반영되어 있다.

다음은 이러한 전향이 대량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전향이 몇몇 사상범에게만 국한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지도부에서 시작하여 일반 당원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전향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물론 여기에는 국가권력의 집요한 개입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게급의식으로 무장했다는 사회주의자들이 대량으로 적에게 투항하고 자신의 신념을 포기했대고 한다면, 그 배경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 또는 운동상의 문제가 담겨져 있지 않았나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에서의 전향은 일본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면이 있다. 예를 들면, 전향의 동기나 시기, 그리고 전향 이후의 행보나 주장 등에서 그 차별성이 드러난다. 이글은 그 차별성에 촛점을 맞추면서 조선의 전향문제도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상사적인 접근을 위한 단서를 마련하고자 한다.

2. 전향의 개념과 기준

무엇을 전향이라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한 인간의 사상 내면을 다루고 있는 만큼 객관적인 규정을 내리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향은 ① 공산주의자를 믿던 자가 공산주의를 포기함을 뜻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소괄호에 묶을 수 있는 것이다. ② 진보적 합리주의 사상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중괄호에 묶을 수 있는 전향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경우 전향이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외래사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와 다른 한편으로는 천황제로 귀순한다는 의미와 연결되며, 또한 동양적 자연주의로 용해된다는 의미와도 연결되고 있다. ③ 대괄호로 묶을 수 있는 가장 폭넓은 개념으로, 좌우 어느 쪽에 관계없이 일어나는 사상적 회전(回心) 현상 일반을 가리킨다.

이중 ③은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개인의 '양심'에 따라 전향한 것이므로 일본이나 식민지 조선의 전향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문제는 ①과 ②이다. 일본에서는 ①을 중심으로 ②와 관련지워 전향을 파악하는 것이 거의 통설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한가지 조건이 덧붙여져야만 한다. 즉, 鶴見俊輔가 전향을 "권력의 강제로 인해 일어난 사상의 변화"라고 정의했듯이, 국가권력이라는 강제력의 발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강제수단에는 "노골적인 강제로서의 폭력(투옥, 사형, 고문) 뿐만 아니라, 이권의 부여라든가 메스컴에 의한 선전과 같은 간접적인 강제"도 포함된다.

따라서 전향을 '먼저 국가의 강제력, 다음으로 改心, 이것은 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의한 사상변화'로 규정한다면, 이때 전향개념의 기본축은 외부의 강제력과 주체의 결단 두가지로 설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개념을 식민지라는 상황에 놓여있는 조선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김석범은 제국주의(천황제권력)에 대한 독립투쟁을 절대적 가치기준으로 기본축을 삼을 때, "사회주의운동과 결합한 식민지 민족해방투쟁, 또는 민족주의자들의 민족독립투쟁의 과정에서 '친일', '민족반역'행위를 전향이라 정의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단순한 사상의 변화, 이행이 아니라 제국주의국가권력과의 투쟁, 그리고 민족적 절조, 자신의 이익, 출세를 위해 민족을 파는 행위 등등, 즉 강한 윤리성이 담겨져 있다. 전향은 개인의 자의적인 사고의 변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천황제 권력과의 투쟁에서 죽음을 정점으로 하는 모든 불이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비전향의 윤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를 막론하고 일제하의 친일·민족반역행위를 '넓은 의미의 전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권력과의 대립·투쟁을 기본축으로 설정할 때 사회주의나 민족주의자의 '친일'협력행위를 전향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는 전향문제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할 수 있다. 우선, 전향이라는 말 속에는 '사상의 변화'가 일어나기 '이전의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식민통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회주의나 민족주의가 등가일 수는 있으나, 양자는 엄연히 다른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사회주의란 민족주의와는 달리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에 기초한 하나의 완성된 사상체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그 전향의 논리나 배경도 다르게 전개될 것이다. 또한 천황제 권력에 대한 굴복과 협력, 즉 변절과 친일행위는 개인의 윤리성 문제이며 전향은 '사상의 변화'에 대한 문제이다. 사회주의자에게 있어 전향이란 천황제 권력에 대한 굴복일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포기까지를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식민지기의 전향을 '일본제국주의 권력의 강제로 인해 일어난 (조선인)사회주의자의 사상변화'로 규정하여, 그 대상을 사회주의자에 한정시키고자 한다.

그럼 식민통치자는 어떤 기준에서 사회주의자가 전향(사상 변화)했다고 판단했는가. 그 기준은 전향제도가 수립된 이후 몇차례에 걸쳐 바뀌는데, 그 이유는 전향의 "실질적 기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향의 의의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전향 관념은 사상운동의 정세변화, 따라서 사상범 대책에 있어 중점의 변천에 따라 자연히 변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민족해방투쟁의 역량이나 국제정세의 변화, 그리고 일본에서의 파쇼화가 진전되는 정도에 따라 그 기준이 변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전향'이라는 말이 일제 사법당국의 공식문서에 등장하기 시작한 1932년에는 그 기준이 다음과 같았다.

(1) 비합법운동에서 합법운동으로의 전환

(2) 일본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인터내셔날리즘에서 내셔날리즘을 기조로 한 사회주의로의 전환

(3) 일본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그 전술의 변경을 제창하기에 이른 전환

(4) 맑시즘에 근본적 세계관의 차이를 느끼고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에서 정신생활을 기조로 하는 종교의 세계로의 전환

(5) 아직 정확하게 다른 세계관을 가지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에 불만을 느끼고 종래의 운동에서 이탈한 경우

여기서 보듯이 초기에는 전향의 기준이 매우 포괄적이었다. 일본 사법당국의 눈에는 (2)와 (3)을 대표하는 일본공산당의 최고간부 사노(佐野學)와 나베야마(鍋山貞親)가 '민족적(일본적) 공산당'으로 전향을 선언한 것이 여전히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전향이 일본 사회주의자에게 미친 영향, 즉 대량의 전향을 낳게 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상범은 일정한 이즘(이념) 위에 서있고, 그 이즘은 철학이며 철학임과 동시에 수단이며, 수단임과 동시에 인식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론과 실천이 결합된 것이다. 이 일정한 이즘(마르크시즘)에서 다른 방향전환--이것을 전향이라고 한다면 참된 전향은 마르크시즘의 포기이며 혁명사상의 완전한 포기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이밖의 것은 아직 참된 전향이라고 할 수 없다."는 꼬리표는 붙어 있지만 사회주의 이념과 실천에 대한 회의 등과 같은 소극적인 부분까지 전향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1936년 사상범보호관찰법을 제정하면서 일제는 사상범을 전향자, 준전향자, 비전향자로 분류하여 그 기준을 세분화하였다. 즉 전향자는 '혁명사상을 버리고 일체의 사회운동에서 이탈할 것을 맹세하거나 장래 합법적 사회운동에 진출할 자, 혁명사상은 버리되 합법적 사회운동에 대한 태도 미정인 자'로 한정하고, 준전향자는 '가지고 있던 혁명사상에 동요를 느끼고 장래 이를 버릴 가능성이 있는 자, 혁명사상은 버리지 않되 장래 일체의 사회운동에서 이탈할 것을 맹세한 자'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1937년 7월 7일의 중국침략과 더불어 혁명사상의 포기여부만을 문제삼던 전향기준이 이제는 혁명사상을 포기한 후 전향자가 수용해야할 사상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즉 전향은 "일본인으로서의 의식을 자각적으로 파악하는 것, 단지 반국가적 사상을 방기하는 일이 아니다. 일보 전진하여 일본인이 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시체제 하의 전향은 단순히 반국가적인 사상을 포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정신(천황제)을 체득(體得)하고 국가의 전시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데까지 도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기준 강화는 일제가 전향을 단계적 발전과정으로 설명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 전향의 단계적 발전과정 >

제1단계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성을 주장하거나 인정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세분된다.

(1) 현재의 객관적 사회정세가 활동에 불리하기 때문에 일시 중지하려는 자

(2) 성격상 적당하지 못함을 자각하고 단념하려는 자

(3) 가정사정 등에 대한 책임감으로 단념하려는 자

(4) 비합법활동에는 관여하지 않지만 여전히 현재의 사회제도에 대한 결함을 지적하고 불평불만을 내뱉으며, 합법의 범위에서 운동을 계속하려 하는 자

제2단계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완전히 또는 어느 정도 비판적이지만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태도를 부정하지 않는 자

제3단계는 육친애의 가족제도, 동포, 민족정신, 광대무변한 황실의 은택 등을 이해하고, 일본민족으로서의 자각에 서서 보은감사의 생각으로 소생하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의 태도를 가지게 된 자

제4단계는 완전하게 일본정신을 이해하게 된 자

제5단계는 일본정신을 체득하고 실천궁행(躬行)의 영역에 도달한 자

결국 이 시기의 전향기준은 '우리나라에서의 사상전향이란 일본인이라는 자각을 되찾는 데 있는' 이상, 공산주의 사상의 포기 뿐만 아니라 '충량한 신민(臣民)으로서 사회에 유용한 재목이 되는 것'에 있었다.

그런데 중국과의 전쟁이 장기화되어 가자 1940년에는 전향에 대한 적절한 기준이 "그가 천황폐하를 살아 있는 신으로서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가 아닌가"에 두어졌으며, 또한 미국과의 교전상태가 임박해진 1941년엔 전향 기준이 더욱 철저하게 되었다. 즉 "사상범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일본사상을 매일 실천에 옮겨 국체(國體)관념을 완전히 인정하고 이해함으로써, 서양문화 속에 있는, 일본문화에 동화되지 않는 부문(가령, 개인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기타 '질 낮은' 사상)을 버릴 것"으로 강화되었다.

이러한 기준 강화는 비전향자에 대한 규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1941년 2월에 일본보다 1년이나 앞서 조선에서 실시된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은 비전향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수용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 때 예방구금의 대상자인 비전향자를 '① 사상 및 언동에서 하등의 반성이 없는 자'는 물론이고 '② 객관적 정세에 대하여 눈치를 살피는 기회적 태도로서 실천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과거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은 자, ③ 가정 사정, 기타 일신상의 사유로 실천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과거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은 자, ④ 병, 기타의 사유로 실천행동을 하기는 어렵지만 과거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은 자, ⑤ 과거의 사상이 동요되거나 또는 스스로 과거의 사상을 포기하였다고 표명하지만 근저에는 여전히 계급의식(유물사관)을 견지하는 자'로까지 확대하여 규정하였다. 과거의 기준에서 본다면 ③ ④ ⑤는 모두 준전향자에 해당하는데, 이제는 그들까지도 비전향자의 범주에 넣어 강제수용함으로써 사상전향을 더욱 강요하게 된 것이다.

이상이 일본의 사법당국자가 요구하는 전향의 기준이다. 그것은 전쟁의 장기화와 파쇼화의 진전에 따라 더욱 강화되어 가는 추세였다. 즉, 마르크스주의 포기→일본국민으로의 복귀→천황제주의 수용과 실천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리고 이것은 '내선일체'의 논리에 따라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3. 대량전향의 배경--일본과 조선의 차이

전향은 왜 일어나는가. 일차로 국가권력이 개인이 믿는 바를 강제로 포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원인을 국가권력의 부당성과 개인의 윤리성에서 끄집어낼 수 있다. 그러나 전향이 일본에서는 물론 조선에서도 '개별적 현상이라기보다도 사회적 현상으로 되었으며, 개인문제라기보다 사회문제'로 되었을 경우, 즉 사회주의자들이 대량으로 전향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먼저 일본의 경우부터 보자. 일본에서 전향이 본격화한 것은 1933년 6월 10일 사노와 나베야마가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공동 피고 동지에게 고하는 글](共同被告同志に告ぐる書)이라는 제목을 단 이 성명서는 당시 그들이 수용되어 있던 형무소에서 1933년 6월 8일에 쓴 것으로, 옥중에 있는 공산당 피고들에게 돌려 읽히기 위한 것이었으나 사법당국의 허가를 받아 그해 {개조} 7월호에 발표되었다.

그들은 이 성명서에서 ① 코민테른은 소련의 일 기관으로 되고 관료주의화했으며, 천황제에 반대하는 입장은 잘못이다, 따라서 천황제가 일본인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코민테른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각국은 코민테른의 노선에서 분리하여 저마다의 국민성, 역사 상황에 근거하여 '일국 사회주의'를 수립햐야 한다고 비판했다. ② 또한 모든 전쟁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중국군벌에 대한 전쟁은 객관적으로 진보적인 성격을 가짐으로 '패전주의(敗戰主義)'를 취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자기들은 만주에서의 일본의 활동을 완전히 지지한다. ③ 그리고 식민지의 민족해방·민족자결은 형식적인 소국(小國)주의에 빠져 있다. 오히려 일본·대만·조선의 프롤레타리아들이 굳게 결합하여 삼국 일체의 대사회주의국가, 나아가 중국·만주를 포함한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 형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일본 공산당은 천황의 지도 밑에 활동하는 새 공산당으로 자리바꿈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은 주장이었다.

'일본적 공산당'으로의 체질 개선을 주장하는 이 논리는 공산주의 이론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상은 일본공산당의 패배를 선언하는 한편, 이후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국가주의와 천황제로 귀순하는 이론적 단서를 마련해 놓았다.

일본 사회주의자들은 당초 이 패배에 큰 충격을 받았으나, 곧 이어 사노와 나베야마의 뒤를 따랐다. 7월 말까지 전향자는 미결수 1,370명 중 415명(31%), 기결수 393명 중 133명(34%)으로 548명에 이르렀다. 이후 전향은 일반화되어 36년 5월 말 현재 전 수감자 438명 중 전향자가 324명으로 74%에 이르렀고, 43년 3월에 기소된 사회주의자 2,440명 중 비전향자는 겨우 37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전향의 물결이 일본 열도를 휩쓸었고, 수천명의 사상범들이 사회주의 포기를 선언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떤 학자는 "유행병이라 부를 수 있는 강한 요인이 있었다고 암시하고 있다. 즉, 공산주의가 신기하고 자극적이기 때문에 그 유행에 걸린 젊은이들은, 다시 압력이 주어지자 현기증을 일으켜 그것을 버렸다. 극소수만이 죽음을 각오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진짜로 신봉했을 뿐이다. 1927년에서 1928년에 걸쳐 많은 부르조아 작가가 프롤레타리아 사조로 돌연 몸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후 압력이 커지고 국가주의적 감정이 급격히 전국적으로 고조되자, 프롤레타리아 작가는 돌연 공포속에 빠져 이번에 혁명적 문학운동을 버리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러한 '유행병'은 당 최고 지도자의 전향이 일반당원들에게 심적 동요를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전향에 의한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일종의 면죄부'를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더욱 가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행병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에는 또 다른, 아니 더 본질적인 요인이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사노와 나베야마의 사례에서 보듯이 대중으로부터의 고립감 즉, 이름없는 서민조차도 천황을 위해 죽고자 원하는 군국주의 밑에서 이들 국민 대다수와의 연대감에서 고립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전향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그들이 신봉했던 사상이 자신들 속에 체화(體化)되지 못했음을 뜻하며, 그 배후에는 그들의 이론이 충분히 국민대중의 생활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또한 국민 대중을 납득시키지도 못한 관념적 이론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본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딱딱한 극좌적 관념론과 대중추수적인 기회주의로 양분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데 이 극좌적 관념론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자 그 반동으로 이제 극단적인 대중추수주의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대중이 천황을 지지하고 있으므로, 대중이 전쟁을 지지하고 있으므로……'라는 식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 들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천황폐하를 받드는 일'에 투항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모색되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전향을 "일본의 근대사회의 구조를 총체의 비젼으로 파악하고자 시도하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인텔리겐챠 사이에서 일어난 사상변환"이라고 설명한 것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사노와 나베야마가 전향 이후 일본 국민들보다 더 철저하게 천황을 받들고 국가주의로 치달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각을 우리의 문제로 돌려 보자.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의 국내외 정세가 일본의 사회주의자는 물론 조선의 사회주의자에게도 마찬가지로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의 사법당국자도 인정하고 있듯이, "민족적 내지 정치적 환경의 차이로 인해 조선인의 전향은 내지인의 그것과 동일하게 논해서는 안되며" 그 시기와 내용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에 반해(일본 공산주의자의 잇따른 전향에 반해--인용자 주) 당시의 재경조선인 공산주의자의 상황을 볼 때 한 사람의 전향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지인의 전향을 보고 계급적 타락 내지 변절자로 보고 맹렬하게 활동을 개시하였다. 전향·검거로 인해 조직 진영내에서 내지인 구성분자가 감소한 데 반비례하여 조선인은 점차 조직내에서 비중을 더해가게 되었다.……1934년 말에는 조직 전체가 궤멸하게 되자 이에 비로소 조선인 중에서도 전향자가 나오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지인처럼 검거전의 전향자는 거의 없고 그 대부분이 예외없이 검거되거나 또는 송국후 상당 기간 형무소 생활을 한 결과 전향을 표명하는 상황이다.

즉, 일본에서는 1932년말부터 전향이 대량화하는 데 반해, 조선에서는 계속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사실상 와해되는 1935년경부터 전향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중앙의 당이 튼튼하게 버티고 있다면 외부의 탄압이 있더라도 당원들의 동요를 최소화시키고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조공 재건운동조차 완전히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보호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당의 중심부가 전향을 이끌고 나갔지만 조선에서는 탄압을 이겨낼 당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대량전향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전향도 체포·구속 이후에 하게 되는데, 수감자의 전향동기에 관한 통계자료가 이를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자료에서 보듯이 이론적인 문제보다는 개인적인 문제, 즉 가족애나 구금에 따른 후회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구금의 경우 보통은 100일, 길게는 1년 가까이 진행되는데, 구금생활이 길수록 전향의 정도도 높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조선에서는 개인의 자발성에 의한 전향이라기 보다는 권력에 탄압에 대한 굴복의 성격이 더욱 강했다고 볼 수 있다.

                                        < 전향자의 전향동기 >(1937년)                                      단위:명

 


신앙

근친애(가정관계)

국민적 자각

주의 이론 청산

성격 건강 등

국체교육의 결과

구금에 따른 후회

기타

전향자

10

90

5

11

3

67

68

1

준전향자

0

49

1

3

6

28

97

3

백분비(%)

2.2

31.6

1.3

3.1

2.0

21.4

37.2

1.1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공산주의를 신봉하게 된 동기가, 내지인에게 있어서는 순전히 경제적 계급관념에 기초한 데 비해 조선인 공산주의자는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그 근본에 다분히 민족적 반감을 가지고 공산주의혁명을 통해 조선민족의 해방을 기도하려는 이른바 '민족적 공산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어 근본적으로 상이한 것"(강조--인용자 주)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전향 이유 또는 주장에 있어서도 그 차이는 반영된다. 마치 제2인터내셔날이 각국의 애국주의에 함몰되어 전쟁에 협력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사회주의자들도 일본 국가주의로 귀순함으로써 자신들의 신념을 버렸다. 이에 반해 조선의 사회주의자는 "조선민족의 현상에서 볼 때 수단에 관계없이 일본에 반항하여 민족해방을 기도하려는 것은 현하의 정세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운동은 오히려 조선민족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기"에 전향했다고 판단하였다.

이처럼 양자 사이에는 '민족'이라는 깊은 골이 자리잡고 있었다. 식민당국자들이 조선인 사상범을 '순정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기조로 한 공산주의'로 굳이 구분한 것도 결국 식민지라는 특수성이 반영되었음을 말한다. 물론 조선의 경우에도 사회주의라는 '유행병'이 젊은 지식인층 사이를 휩쓸고 지나간 것은 사실이다. 1920년대에 들어 사회주의를 숭상하고 사회혁명을 논하지 않고는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시대적 풍조가 고조하여,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사회주의자연했다. 그래서 일본경찰은 이들을 마르크스보이, 겉만 빨간 홍당무나 사과라고 조소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사회주의에는 사회주의 이념 자체보다는 민족의 해방이라는 에토스가 짙게 깔릴 수 밖에 없었기에 전향의 동기나 주장도 다르게 나타난 것이었다. 황순봉(黃舜鳳)이라는 한 전향자는 조선의 사상전향을 '사회적 유행에 의한 전향'이나 '권력 앞의 굴복'이 아니라, "과거 모든 형태의 혁명적 정치운동이 조선 민중을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다른 형태의 정치운동이 구해져야" 하기 때문에 나타난 '일종의 정치적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그가 찾은 다른 형태의 정치운동은 자치운동이었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전향을 합리화시킨 논리에 지나지 않지만, 적어도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이 일본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따라서 식민당국자가 보기에 적어도 1937년 이전까지는 조선인 전향자를 믿을 수가 없었다. 즉, "그들 중 일부는 오히려 전향을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밖의 자들도 전향을 하나의 특권처럼 여겨 취직 기타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일은 적게 하면서 보수는 많은 것을 바라는 경향이 있어 진실로 갱생의 뜻을 가진 자는 극히 드물다. 그간의 실정은 내지인의 그것에 비해 심한 차이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으니 그들에 대한 많은 기대는 거의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시선을 더욱 거슬리게 하는 것은 위장전향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이관술(李觀述)이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경성 동덕여자고보 교유를 지낸 그는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1933년 3월 22일 기소,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 회부되었는데, 예심 중인 1934년 3월 14일 과거에 믿었던 사상을 전향한다고 하여 보석되었다. 이어 그해 12월 20일 공판에서도 사상의 전향으로 집행유예의 '관전을 입었다'. 그런데 그는 보석이 되자마자 곧바로 이재유 등과 연계하여 공산당 재건활동을 하였는데, 경찰이 다른 사건을 수사하던 중 드러난 것이다.

1930년부터 1935년에 이르기까지 전향자의 총수는 2,137명에 이르며, 그 중 221명(약 10%)이 역전향의 길을 걸었다. 그 동기를 보면 주의자의 권유·선동(108명), 주의자의 압박(28명), 가정적 결함(22명), 환경에 대한 불평불만(21명),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다시 믿게 된 것(12), 생활고(10) 등의 순으로 나타나는데, 대다수가 위장전향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수치는 사실 경찰이나 사법당국자의 신경을 건드리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따라서 1937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시행하면서 법무국장은 보호관찰의 목적을 "내지에서처럼 단지 범죄방지를 위한 경찰 감시 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적극적으로 본인을 지도 유액(誘掖)하여 국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게 하는 한편, 생활을 확립시켜 물심양면으로 충분한 보호를 하는 등 국민으로서의 정도(正道)에 복귀시키고 또한 이를 확보하는 것"에 있다고 하여, 적극적인 사상지도와 생활보호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실효를 거두었다. 1936년에서 1941년까지 보호관찰소에서 수리한 사상범 전력자는 5,290명, 그 중 보호관찰처분에 부쳐진 자는 2,794명인데, 1942년 3월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보호관찰 처분 중 재범자는 29명(1%)으로 그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이다. 또한 2,794명에 대한 전향 비율을 보면, 1937년에 전향자 29.2%, 준전향자 64.6%, 비전향자 5.5%이던 것이 1941년 12월 말에는 각각 51.2%, 42.7%. 3.4%로 변하였다.

4. 전향, 그 화려한 논리 속에 담겨진 사상적 빈곤

유물철학이나 소위 맑스의 {자본론}에 대하여는 거진 칠팔 년의 세월을 허비하면서 나로서는 대개 읽고 연구하여 본 것이었다.……이것은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젊은 혁명가의 철석과 같은 신념을 넣기 위하여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우연한 것으로 보지 않고 과학적인 필연성으로 해석하는 인생관과 철학관이 전부 혁명 운동에 부합하는 이론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론에서 출발한 혁명가는 일시적 감정이나 울분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혁명 법칙에서 자기의 행동과 신념을 굳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영희가 지난날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이유를 회고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 그가 어느날 적에게 투항하면서 전향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일제 파시즘의 정책 선전자로 최전선에 나섰다. 한때는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를 자부하던 그가 왜 이렇게 전락했을까. 고문에서 오는 공포감, 싸움에서의 패배감 등이 그 이유라고 변명하지만, 문제는 유물철학의 과학적 필연성에 대한 신념이 어째서 불가능하게 되었는가를 전향자로서 그는 밝혀놓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침묵의 공간이라도 남겨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공간마저 뛰어넘어 파시즘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이런 유형의 전향을 김윤식은 '관념으로서의 전향'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전위적 정치의식과 억압된 계급으로서의 생활의식의 표현 속에는 내재적 접합점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 이데올로기 선택이란 관념 수준이어서 어느 쪽을 버리거나 선택하는 일도 자기 삶에 뿌리를 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실존적 장면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관념으로서의 전향'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인물로 우리는 김두정(본명 김두식)을 들 수 있다. {防共戰線勝利의 必然性}의 저자로 잘 알려진 그는 전향자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1932년 도쿄에서 '조선의 독립과 무산계급의 적화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를 조직,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의 판결을 받은 그는 1935년 1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자기에 대한 진정한 재확인]이라는 전향성명서를 발표한다.

이 성명서에서 그는 노동운동에 투신한 쁘띠부르조아 인테리의 사상적 동요와 실천적 무능,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분파투쟁과 혁명적 공사(空辭)에 환멸을 느껴 전향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테리인 나는 이상과 같이 과학적 근거를 정확히 인식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노동자 대중을 사랑하는 까닭에 영구히 또 완전히 계급투쟁전선을 퇴각·이탈할 것을 민중 제위에게 성명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나는……부르조아 군문(軍門)으로 투항했는가? 아니다. 단연코 아니다. 나는 다만 진리에 예종하고 자신의 묘혈로 물러갈 뿐이다. 만약 나에게 의식적인 중상을 시도하려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자신 인텔리겐차인 한 조만간 이러한 과정을 수료할 것이라는 점을 예언해 둔다. 다만, 프롤레타리아에 대해서는 생활의 궁핍에 많은 동정을 보내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인테리의 과학적 조건을 잘 헤아려 줄 것을 바란다.

그러나 이 성명서는 자신의 지적처럼 '단지 자신의 무력한 사회적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채워진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신국민주의의 깃발 아래'로 발전한 것은 1937년 10월 23일 서대문형무소의 전향자 35명을 대표하여 쓴 [국가에 대한 盡忠報國의 共同誓盟]에 이르러서였다.

'미나미총독에게 바치는 맹서문'이라고도 하는 이글은 두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일제의 중국침략에 대한 인식과 그것이 전향자들에게 미친 영향이다. 1937년의 중일전쟁은 일본을 '아시아의 맹주' '국제적 방공전선의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고 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위용에 탄복하고 있다. 즉 중일전쟁을 "아세아의 안위(安危)를 양 어깨에 걸머진 우리 대일본제국의 신민은 역사의 궤도에 따라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토벌해야만 한다. 침략을 위한 정복이 아니다. 동양 영원의 평화 확립을 위한 성전"이라고 선전하면서, 이것이 조선인 사상범들이 전향하게 되는 근본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미나미 총독의 황민화 정책과 전향과의 관계이다. 미나미의 정책이 단시간안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내선일체가 성공했기 때문으로 '반도에 넘치는 총후(銃後)의 적성(赤誠)이 모두 이를 실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랜 세월의 미혹은 해결되었다. 이것은 우리들이 가장 흔쾌히 여기는 바이다. 조선에 있어서 전면적인 전향완료도 이에 따라 크게 촉진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여기서 우리는 전향의 완료를 상징하는 최종언어가 '내선일체'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인 전향자의 전향논리 구조속에서 이 언어는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전향자에게는 새로운 사상을 발견하여 잃어버린(또는 포기한) 사상을 대체하는 일이 요구된다. 일본의 전향자는 공산주의를 버린 뒤의 정서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마음으로부터 국가주의(또는 일본 민족주의)의 신봉자가 되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나 극우주의로 전향한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 하야시 후사오(林房雄)가 "우리들은 전향해도 돌아갈 조국이 있지만 그대들은 그것이 없다"라고 솔직하게 지적한 것처럼 식민지 전향자들에겐 돌아갈 조국이 없었다. 이에 대해 왕년의 프롤레타리아 시인 김용제(金龍濟)가 "씨의 당시의 의식이 조선의 전향자를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동시에 일본제국이 조선인의 조국이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씨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우리들의 조국 일본'을 마음에서 부르짖으며 구하고 있는 조선의 인텔리겐차가 있다"라고 반박한 것은 차라리 식민지 지식인의 충성심을 왜 몰라주냐는 애처로운 하소연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하소연이나마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일제가 주장하는 '내선일체'였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대국가주의'였다. 일본에서 전향의 대체물이 국가주의였다면 조선에서는 바로 대국가주의였다고 볼 수 있다.

전향자의 주장 속에서 이 논리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의 선언문(1936년 8월)이다. 세계가 '대국가, 대민족, 대문화'의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인식 아래 "지금 일본에 있어서의 국민적 및 정치적 지도이상은 국가주의적 이상이다. 이 국가주의의 이상은……대국가주의로의 발전을 약속한다"고 전망하였다. 그리고 국가주의가 국제적으로 발전하여 형성된 이 대국가주의는 "그 본질에 있어서 개인적 자본시대의 제국주의적 침해를 뜻하지 않는다. 제민족이 각자의 현실적 생활상의 이해관계에서 상호의존적으로 구성되는 그러한 국가형태. 아마 이것은 '인류의 사회생활상 가장 진보적인 역사적 형태'일 것"이라고 하면서 그 강령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오인은 대국가주의 의식을 강조하여 국가전체의 번영을 위해 노력한다.

2. 오인은 조선인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 향상을 기한다.

3. 오인은 국가적 통제경제의 확립을 익성(翼成)하고, 근로대중의 생활의 안정을 도모한다.

4. 오인은 공산주의, 기타 반국가적 일체의 사상체계를 배격한다.

5. 오인은 시대의 조우(遭遇)에 적응하는 도덕을 수립하여 국민정신의 통일을 기한다.

이 강령에서 우리는 조선인 전향자들의 고뇌를 얼핏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강령의 전체적 기조는 물론 대국가주의에 대한 것이지만, 강령 2에서 보듯이 차별받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의식도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즉, 내선일체를 말하더라도(물론 그 주체는 일본이지만) 그 논리의 이면에는 조선이라는 매개가 반영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그러나 일제의 사상경찰은 이것조차도 배려하지 않았다. 한달 뒤인 1936년 9월 20일, 회원 자격을 '완전하게 사상을 전향한 자'로 한정한 뒤에 나온 성명서에서는 '조선인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 향상' 따위의 문구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들이 목표로 삼는 것은 '조선의 전향'이며, 그 이상으로 삼는 것은 '내일의 일본'을 건설하는 것이다. 내선일여(內鮮一如)의 튼튼한 결합은 이들의 이상 목표를 실현하는데 기본적인 필수조건"이라 하여 동화를 전제로 한 내선일체론만이 주장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전향논리는 식민지라는 현실과는 완전히 단절된 채 내선일체라는 관념속에서만 전개된다. 식민지라는 현실을 부정하면 남는 것은 결국 논리의 비약 뿐이며 그 뒤를 잇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겠는가.

박영희가, 김용제가 그러했고, 김두정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를 이은 현영섭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로 기울었다가 일본인 이상으로 황도주의를 주장한 그는 '어떤 경우에서 보더라도 내선일체의 길 이외에 조선인이 나아갈 길이 있는가,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죽음뿐'이라고 하면서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까지 거침없이 내뱉은 것이다.

왜 이처럼 논리의 극단적인 변화를 보이는가. 전향의 논리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그들이 주장했던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머리속에서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민족과 계급해방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였던 사회주의라는 구원의 메시지가 현실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헤쳐나가지 못하자, 이제 그들은 또 다른 관념, 그것도 거대한 힘을 동반한 파시즘의 품으로 달려간 것이다.

그들이 가진 사상적 뿌리의 허약성을 검토하기 위해 한가지 참고할 것은 그들이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이다. 그들 대다수는 1920년대 말 30년대 초에 사회주의 이념에 몰입했고 활동했다. 사회주의 운동사에서 볼 때, 이 시기는 '사회파시즘'론에 기초한 코민테른의 극좌적 노선이 성행했고(물론 그 배경에는 스탈린주의가 자리잡고 있지만), 그것이 일본이나 식민지 조선에 직수입되어 맹위를 떨치던 때였다. 혈기왕성한 나이였기에 그 노선은 너무도 선명하게 그들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딱딱한 관념이 현실의 강한 저항을 받자 주체를 못하고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만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1930년대의 사회주의 사상(운동)을 너무 평가절하하는 것일까. 불행한 결과를 가지고 그 이전의 성과까지 전부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전향자들이 이들과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전향자의 한 '전형'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이들의 전향논리가 매우 빈곤하고 그 빈곤의 뿌리에는 그들이 가졌던 사상 자체에 결함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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