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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조선인 유산층의 친일논리와 배경 HOME

정 태 헌

머리말

식민지시대에 대한 인식방법은 [원시적 수탈론]과 [생산력 지상론]으로 대별된다. 전자가 사학계 일반의 시각이었다면 후자는 식민사학이나 서양학계 일반의 (아시아,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지상이었다. [원시적 수탈론]은 일제하 당시의 反帝意識(반제의식)이라는 치열한 실천 의지를 과학적인 植民地像(식민지상)으로 발전시켜 이론적 실증적으로 그 내용을 채워가는데 크게 미흡했다. 그 결과 감정적 차원을 벗어나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에 내재된 객관적 메카니즘의 과학적 분석과 미래상의 현실적 조망에 점차 무력해지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역사인식, 현실인식의 공백과 보수화되어가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최근에는 [생산력 지상론]이 다시 대두되어 일제하의 경제유산이 해방 한국경제의 기틀을 이루었고 결국 친일의 문제도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논리까지 제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공주 갑부 김갑순이 대전을 개발한 것이 자기이고 일본놈이 그것을 가져갔냐고 항변할 때 해방 직후의 분위기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의미심장한' 발언으로 이해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가치관의 전도는 각분야에서 해방후에도 지배력을 행사하던 친일파 또는 그들의 세계관 속에서 훈련된 '엘리트'들의 '조국근대화노선'이 식민지시대의 '근대화노선'과 궤를 같이 하면서 전개된 한국현대사의 실상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오늘 살만하게 되었다"는 보수적 현실인식 속에서는 자본주의자체를 절대적 가치체계로 받아들이면서 전혀 논증되지 않은 근거를 기초로 모든 변수를 도외시한 채 식민지적 자본주의 이식의 출발점이었던 일제시대와 오늘을 무매개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충분히 가능하다.

이러한 추세에 대응하는 오늘의 역사학계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 수준은 여전히 감정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친일'이라는 개념의 역사적,논리적 범주에 대해서조차 학계에서 제대로 논의되어 본 적이 없다. 친일(파)은 일부에서 변명하듯이 목에 칼이 들어와 불가피하게 선택했던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일정한 '논리와 확신' 속에서 행해졌고 富(부)와 知識(지식)을 독점한 층이었기 때문에 당대에는 실질적으로 적지 않은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비분강개해야 할 과거가 아니라 형식을 달리한 채 바로 오늘로 이어지는 현실의 문제이다.

따라서 친일문제에 대한 접근은 친일의 자기존재 기반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그 존재의 모순이 무엇이었는가를 해명하는 차원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일정하게 '정착'된 모습을 보인 1930년대 친일의 논리와 식민정책적 배경을 분석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식민지 지배에 의존한 자본(富)축적의 기대

1) 有産層(유산층)에 대한 세제특혜정책

일제는 식민지통치에 필요한 경비를 조선으로 들여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조선 내에서 조달하고자 했다. 물론 補充金(보충금)이나 조선총독부의 公債(공채) 소화는 일본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보충금은 일본인관리의 조선근무수당에 소요되었을 뿐 아니라 식민지지배에 대한 시혜의식을 불어넣기 위한 '정치적 의미'가 보다 컸다. 공채도 적자재정 보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경제 내에서 부담하기에는 너무나 큰 비용을 필요로 하는 일제의 경제침략과 대륙침략의 군사적 목적을 띤 철도,도로,항만 등의 건설에 충당되었는데 그 원리금 부담(公債費)은 결국 조선 내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로 전가되는 체제였다. 따라서 조선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는 공채비와 군사관계비로 대부분 流出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생산력발전이나 복지향상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조세논리에 비추어 볼 때 조선내 자금의 流失이나 浪費 즉 생산력발전의 고갈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만성적인 재정부족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조세의 주세원을 1910년대에는 地稅, 1920년대 이후 1930년대 전반기까지는 지세와 더불어 무차별적 대중과세체제인 消費稅로 제한하였다. 즉 개인소득세제가 1934년에 이르러서야 처음 도입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지주나 상공업자 등 과세부담이 가능한 유산층에게는 地稅나 소액의 營業稅 및 資本利子稅 외에는 직접세부담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영업세와 자본이자세가 처음 과세되기 시작한 1927년 이전까지는 지세가 유일했다. 따라서 급증하는 세출액에 대응해야 하는 조세수입의 공백은 저소득층일수록 부담이 가중되는 소비세로 채우는 수 밖에 없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의 이러한 조세정책은 조선인 유산층에게 식민지 하에서 독립(운동)을 포기하더라도 충분히 富를 쌓을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지세나 영업세는 토지의 크기(地價)나 외형거래실적을 과세대상으로 한 고정액의 단순비례세이기 때문에 영세 지주나 중소 업자일수록 상대적으로 重課(중과)되는 비탄력적인 특징을 갖는다. 원래 일제는 1927년의 <제1차세제정리>에서 개인소득세를 도입하려 했으면서도 유보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의 세무행정이 소득세제를 감당할 수준이 못되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소득세제 도입이 조선경제구조의 재편과 친일파트너 양성에 주력하던 1920년대의 식민정책 기조와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소득세제 실시에 따른 과세부담은 고소득층에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1920년대 중반의 시기는 이들 고소득층에 대해서 일정한 경제적 혜택을 주면서 식민정책 안으로 적극 포섭하는 '제한적' 민족분열정책 단계였지, 이미 체제내 포섭을 완료하고 집중적 과세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지 못했다. 財産稅制 (재산세제)도입이 시기상조라는 견해 때문에 1934년(<제2차세제정리>)까지 유보된 것도 유산층(지주층)의 이해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가 '제한적 민족분열정책' 시기였던 1920년대의 식민정책에 비추어 무리였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따라서 개인소득세 실시의 전단계로서 去來總量(거래총량)에 따른 비례세제인 영업세와 자본이자세를 도입하였다. 이들 稅目(세목)은 과세행정능력이나 당시의 지배정책을 고려할 때 外形標準(외형표준)으로 稅源을 포착하는 초보적인 과세체제 수준을 넘을 수 없었다. 따라서 세액의 비중도 지세와 달리 극히 작아 조세수입의 2% 정도에 불과했다.

조세문제와 관련하여 [토지조사사업](이하 [사업])은 지세수탈체제를 확보하기 위한 과정의 하나였다. 이때 토지소유권자를 누구로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일제가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한국사에서 토지에 대한 제권리를 둘러싸고 형성,발전되어 온 관습적,실질적 소유관계 여하에 따른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구래의 지주들에게 귀착되었다. 그것이 식민통치를 위해서나 일본자본주의 발달수준에 조응하는 수탈체제를 형성하기 위해서 '효율적'이었다. 물론 배타적 소유권자 확인이 어려운 구황실 소유의 토지나 임야와 같은 경우는 총독부 소유로 뒤바뀐 채 東拓(동척)이나 기타 총독부기구에 불하되었다.

지세의 성격도 [사업]을 계기로 이전 시기와 근본적으로 달리 배타적 소유권에 입각한 등기부상의 소유권자에게 과세부담의 '법적' 책임을 부과하고 중세적인 사회운영논리 즉 신분 등 경제외적 요인에 의해 과세원에서 누락되거나 은닉될 수 있는 요인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조세수탈의 절대적 비중을 식민지 초기에 地稅로 채울 수 있었던 것도 철저한 세원 색출기구를 통해서 가능했다. 그러나 1910년대에 지세 비중이 조세액의 40~66%나 되는 두드러진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지주의 절대적 과세부담이 큰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당시의 경제구조가 단순하고 열악하여 다른 稅目창출이 불가능했고 재산형태로서 動産이 범주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이서 절대적인 조세규모 자체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지세의 절대액보다는 오히려 지세제도 안에 내재된 지주에 대한 세제특혜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무렵의 조선경제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明治初期 (명치초기) 일본에서도 1890년대 전반기까지 지세가 조세의 60~87%나 되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나 조선과 명치초기 일본의 현상적인 조세구조의 모습은 비슷했지만 양국의 지세제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내재되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지주층을 조선과 같이 보호 육성대상이 아닌 재원을 집중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하고 지주들에게서 수탈한 재원으로 자국자본주의의 산업적 축적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반면에 조선에서는 식민지지배의 유력한 파트너로서 지주층을 '육성'할 필요가 있었고 특히 식민지 초기에 집중적으로 소요되는 식민통치비(총세출의 30% 이상) 등의 세출부담을 지세로 충당할 수 있었다. 결국 조선에서 거두어들인 조세 즉 지세가 거꾸로 조선의 '생산적' 발전을 가로막는 식민지수탈정책의 자원으로 流用되었다.

지주계급은 일제에 의해 정책적으로 '보호'된 '세제혜택' 계층이었다. 경제논리상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경쟁력밖에 가질 수 없는 식량개발기지로 조건지워진 식민지 지배의 파트너로서, 그리고 '민족분열정책'의 한 고리로서 조선의 (대)지주층은 적어도 1930년대 전반기까지 재정,금융정책에서 확실하게 '특권적' 지위를 보장받았다. 무엇보다 지주층은 거의 유일한 과세부담 능력계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소득세가 부과되지 않았다. 戶稅(호세)나 家屋稅(가옥세)등을 제외한 주요 稅目 중에서는 지세부담이 유일했다. 식민지시대 농업경영의 주도적 형태는 지주가 단순하게 지대만 노리는 봉건적 경영양식이 아니라, 종자선택에서부터 경작과정과 마지막 상품화과정에 이르기까지 투자와 경영의 수지타산을 맞추고 소작농은 단지 노동력만 제공하는 자본가적 경영형태로 바뀌어 갔다. [사업] 과정에서 도입된 [조선지세령]의 지세체제는 영농이윤(소득)에 대한 과세(소득세)가 아니라 단순히 부동산(토지)자본의 이자에 대한 과세형태였다. 더구나 생산량에 대한 지세액 비율은 일본의 1?5도 못되는 수준이었다. 즉 일본의 지주와 조선의 지주에 대한 과세는 식민정책에 따라 질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지세는 소득수준에 따라 누진세가 아닌 소득역진적인 비례세로서 수십정보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와 영세지주의 부담이 같은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일제 스스로도 대지주층일수록 부담이 가벼워져 과세부담능력과 전혀 조응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또 농업은 자본회전률이나 자연조건의 제약 등 다른 산업보다 훨씬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영세상공업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영업세나 소득세에서설정된 免稅點(면세점) 규정이 지세제도에는 없었다. 또 지세부담은 정치 경제구조의 역관계상 소작농에게 전가시킬수도 있었다. (대)지주 중심의 금융특혜는 물론 1910년대를 지나 1925년까지의 미가상승률이 일반 물가상승률보다 훨씬 높았던 점도 지주층의 농업경영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러한 특혜적 조건은 1910년대말부터 식민지 금융기구를 매개로 한 일제의 금융자본이 농업부문으로 집중적으로 투여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조세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한 지세액은 [사업]의 완료를 통해 1911~1918년간에 1.7배가 늘어났지만 조세증가율(2.4배)에 훨씬 못미쳤다. 즉 지세가 단순비례세체제를 유지하고 지주계급 위주의 농업정책이 계속되는 한 세출 급증에 대응하기에는 지세액 증가가 한계가 따른다는 사실이 이미 1910년대부터 드러났다. 지세액을 늘리기 위해 [사업] 완료로 13?1000으로 제정된 지세율은 1922년에 17?1000으로 인상했지만 1934년에는 개인소득세제 실시에 따라 지주의 급격한 과세부담을 완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15?1000로 인하했고 이 세율은 1943년의 [신조선지세령] 발포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4년 이전까지 1919~1933년간의 지세증가율은 1.4배에 불과했다. 이때문에 일제는 1920년대들어 지세 외에 酒稅, 연초세(1921년부터는 전매제로 전화되었기 때문에 전매익금) 등 일반대중과세인 소비세를 주요 세목으로 주목하게 된다. 결국 이때까지도 지주, 상공업자 등 유산층은 부담능력에 걸맞는 과세집중대상이 아니라 과세특혜대상이었다.

2) '만주붐'의 조성과 공업발전의 기대

일제의 세제특혜정책은 분명히 조선인 유산층에게 소득에 조응하는 과세부담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독립보다는 식민지 지배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富의 축적 '가능성'을 심어준 계기의 하나였다. 동시에 1920년대말 이래의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제의 만주침략은 '만주붐'이라는 상품시장(수출)의 일시적 확대를 통해 富의 축적 '가능성'을 현실적인 '신념과 확신'으로 심어주어 식민지지배를 오히려 자본축적에 유리한 조건으로까지 인식하게 되었다. 실제로 대공황의 타격에서 일정하게 회복되면서 특히 1931년의 만주사변 도발을 계기로 일본-조선-만주를 잇는 円블럭의 확대에 따라서 1934년경부터 조선의 상공업도 '호황'을 띠기 시작하였다. 또 1920년대 중후반 이래의 급격한 협상가격차 확대도 조선인 자본의 상공업투자를 유도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이 시기 공업발전의 조건으로서 원료의 풍부, 상품수요의 확대, 공업투자 이윤의 증대 등의 일반적인 조건과 함께 특수한 조건으로서 만주국의 출현이 반드시 거론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4년 들어 일제가 조선의 산업경제가 "현저한 약진"을 보게 된 조선의 산업경제를 강조한 배경도 이러한 '호황'때문이었다. 당시 식산국장은 미곡 등 농작물가의 현저한 증가, 각종 구제사업의 영향으로 농촌 구매력의 증진 외에 對滿洲(대만주)수출의 증가로 "미증유의 활황을" 보였다고 강조했다. 또 금융완화, 金利低下 및 물가앙등 등은 공업채산을 유리하게 이끌어 방직, 護謨靴(호모화), 철공, 革下(혁하), 피혁, 양조 등의 지방상품을 비롯하여 시멘트, 사탕, 면포, 제재, 제분, 차량 등의 滿洲,中國 수출상품과 琺瑯鐵器(법랑철기), 硬質陶器(경질도기), 통조림 등의 中國,南洋,印度(인도) 수출상품 등이 활황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질소비료, 澱粉(전분)공업, 硬化油 (경화유)등 각종 공장은 전능력을 발휘하여 인천의 방적공장, 영등포의 두 맥주공장, 수력전기사업, 북조선의 유지공업 및 각지의 섬유공업 등 조선공업도 종래의 중소설비의 조선내 자급 목적에서 점차 대규모 경영과 수출상품의 제조로 전환되는 경향이 농후하다고 보았다. 전

실제로 宇垣一成(우원일성)이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제창한 [조선공업화정책]과 관련하여 대공황에서 벗어나면서 조선인 소유를 포함한 전체 공장수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상업의 범위도 크게 확대되었다. 이 시기 조세수탈의 중심이 소비세로 이동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상품화(소비)영역이 넓어졌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조선은 새롭게 확대되기 시작한 자본투자, 상품시장이었다. 실제로 회사수나 불입자본금의 절대적 부분을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던 회사자본의 경우에도 공황기를 통해, 그리고 1931년부터 일본에서 시행된 [중요산업통제법]의 적용을 피해 조선이라는 자본투자처를 찾아 급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자본뿐 아니라 중소규모의 상공업에게도 일정하게 발흥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1930년대초 대체로 1934년 이후 본격화된 '만주붐'은 분명히 조선인 유산층에게 식민지하에서도 얼마든지 富를 축적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기대심리를 북돋아 주어 이들의 매판화,친일화과정을 촉진시켰다. 梶村秀樹(미촌수수)연구에 의하면 일제는 만주국 수립을 계기로 일제는 [滿鮮一如,만선일여] 구호 아래 만주인(중국인)과 달리 [2등국민]으로서의 지위를 조선인에게 부여한다는 기만적인 차별정책을 펴면서 조선인자본의 만주진출을 독려했다. 조선인자본가들도 일제의 만주지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즉 일제에 대한 투쟁 또는 저항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면서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의 자기발전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었다. 실제로 조선인자본가들은 滿蒙經濟座談會(만몽경제좌담회,1932.4), 鮮滿貿易座談會(선만무역좌담회,1932.5 및 1937.6), 조선공업협회 주최의 工業者大會(1934.10) 등의 모임에서 만주시장을 눈 앞에 두고 적극적인 진출을 모색하였다.

한 논자의 주장은 조선공업과 조선인공업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만주사변 이후 조선의 공업발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대변하고 있다.

"미곡수난시대에 봉착된 것을 계기로 조선 산업은 중대한 전환기에 직면(해 있다). …… 총독부도 방향을 전환하야 공업중심으로 목표를 돌릴 것같은 경향이 잇다. …… 경제발전의 필연성으로 보아 시기문제로 절박한 것도 사실이다. …… 日滿經濟關係(일만경제관계)가 긴밀의 도를 加하게됨으로 接壤(접양)의 地인 조선의 우월성은 배가되며 발휘되여 가속도적 공업발전을 보게 될 것이다. 일본자본가의 만주진출 경로로서 조선에서 기업화하는 사람이 속출, 만주산물을 원료로 하는 공업이 조선에 증가하고 잇다. 조선 자체의 내재적 원인으로는 공업발전과 지리적 우월성으로의 공업발흥이 서로 倂致(병치)되어 조선내 공업은 획기적 약진 …… 進化의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의미로도 필요하다. 즉 일본 內地와 만주와의 중간에 잇는 조선은 필연적으로 아세아로 진군할 것이며 자연한 법칙일 것이다. 공업의 요소인 자본, 노력, 자원, 동력 등의 사정도 前述과 같치 호전상태를 보이며 거기다가 조선 자체의 소화력증가, 만주와의 무역관계에서도 조선공업의 지위는 더욱 중요성을 가하며 희망이 충분하고 점차로 宏大(굉대)한 進境(진경)을 보일 것이다. 重要産業統制(중요산업통제)를 행한다면 반드시 조선공업계는 급진적 진보를 고할 것이다." (밑줄은 필자)

대자본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만주시장을 배경으로 한 방직 등 신흥공업 10 업종을 거론하면서 조선경제의 낙관적 발전전망을 하기도 했다.

"조선의 공업발전상의 제 유리점에 착목한 금융자본가들은 조선을 일대 활약의 신천지로 알게 되었다. 특히 滿洲市場을 상대로 한 새로운 기운에도 선동. 최근에는 엔화 감가에 의한 자본가의 기업적 의욕을 자극하고 遊資氾濫(유자범람)하여 …… 軍需(군수)관계도 공업활흥을 촉성(하고 있다)." (밑줄은 필자)

만주사변 직전의 글이기는 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이나 부르죠아들이 '희망찬' 낙관은 못가지면서도 일제의 '발전'에 따라 조선경제도 팽창할 수 있다는 전망도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조선의 현세는 외재제국주의 금융자본벌의 통제하에 在하여 공업발전의 요소를 缺(결)함도 안이요 조선의 ?조아지-가 自暴自棄(자폭자기)하야 공업방면에 치중하지 않는것이 아니면서도 조선의 공업은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방황하며 전진의 희망이 희박하다. …… 그런데 일방으로 볼적에는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방황하고 잇는 것만큼 모든 선진제국이 밟은 軌道(궤도)로 보아 자본주의 최후단계인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실세력 내지는 진출한 것이라고 보는 자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그는 조선의 브르조아지-가 다 某제국주의 금융자본과 야합을 한다면 반드시 최후의 단계에 진출할 것을 夢想(몽상)하고 잇스며 이는 그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접근할 수 잇다고? 보는 바이다." (밑줄은 필자)

1930년대 이후 세출액 변화 가운데 눈에 띠는 한 사실은 조선인의 무마 및 친일파의 육성과 이용을 위한 경비액 자체가 격감한다는 점이다. 이는 식민지 지배기구가 확립되어 가면서 식민지 체제유지를 위해 매판계급을 육성하는데 필요한 재정지출조차 불필요할만큼 유력층(유산층)의 친일화가 정착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미 중소상공인 가운데 상당수가 식민지 체제를 극복의 대상으로서보다는 불가피한 전제로 인정한 가운데 자신들의 '성장과 발전'을 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때문에 이들은 당시 총독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커다란 판단착오를 하고 있었다. 한 예로 대공황을 지나면서 조선인 중소상공업의 피폐와 몰락에 대한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徐椿(서춘)은 "조선내 중소상공에 대한 구제자금으로 5천만원이면 5천만원 3천만원이면 3천만원이 온다고 잡고" 가정하면서 그에 대한 자금분배책까지 논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세출내역 가운데 이러한 성격의 경비지출은 전혀 없었다. 이러한 기대감을 총독부가 촉발했겠지만 자신들 스스로가 먼저 식민지 정책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측면도 컸다.

地方議會 진출을 통한 [同化] 속의 정치적 모색

조선의 유산층들은 1930년 중반까지 계속된 세제특혜, 일제의 만주침략에 따라 조성된 [만주붐] 등을 계기로 식민지지배에 의존해서 나아가서는 식민지지배를 통해서만 자기발전과 축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산층에 대한 일제의 '배려'가 언제까지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발전'과 '축적' 구상은 일제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고 일제의 조건과 정책이 바뀌면 이제까지 축적된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언제든지 집중적 수탈대상으로 전락할 소지를 안고 있었던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초반이 되면 일제의 세제특혜 '배려'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공황기인 1931년의 경우 공채비와 군사관계비 즉 일본으로 유출되어야 할 비용이 조세수입에서 61%나 되어 제한된 지세나 대중과세인 소비세 중심의 조세구조를 계속 고집할 수 없었고 일제로서는 재정타개의 전환책이 필요했다. 더구나 전국규모로 확대되어 가는 농민,노동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이 치열해짐에 따라서 조선내의 '체제안정'이 긴급하게 요청되었다. 또 조선과 일본의 곡가폭락에 따라 일본 지주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처지에서 지주계급 일방에 치우친 농정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즉 이제까지 제한된 유산층이나 지식을 주대상으로 한 '민족분열정책'의 범주를 일반 농민까지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농촌진흥운동]으로 표현되는 1930년대의 농정전환은 이러한 배경에서 실시되었다.

1930년대 식민농정의 전환은 지주에 대한 세제특혜를 포함한 정책적 '배려'를 철폐한 것이고 총호수의 4-11%에 불과한 고소득 유산층을 주요 과세대상으로 한 개인소득세제 도입 시점(1934년)이 1920년대 기간에 정책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산미증식계획'의 중지년도라는 사실은 이점과 무관하지 않다. 1930년대 후반기 이후 전시수탈체제로 접어들면서 소득세 즉 유산층에 대한 과세가 조세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개인소득세제가 실시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 각종 물적 부담을 집중시키더라도 가시적인 반발을 일으키지 못할 만큼 이미 일제에 포섭된 상태였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당시 朝鮮日報나 東亞日報 논조도 개인소득세제 도입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했으며 총독부 당국도 이제까지 실질적 과세부담을 지지 않던 고소득층에 대한 과세체제이기 때문에 일반대중이 환영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갖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동반된 [떡고물]에 환상을 품었던 유산층이 식민지 체제 내로 인입된 이후에는 무차별적 수탈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戰前 제국주의 분할체제의 필연적 결과가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전시수탈의 이념이었던 [대동아공영권] 논리에 따라 일본과 하나되지 않으면 (이미 무너져가고 있는 축적구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축적기반이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 식민지지배를 축적구조에 저해가 된다는 본질적 측면에서 바라보지 못했다.

이들이 자신들에게 집중되는 과세부담에 대한 하나의 대안은 지방의회의 적극적 진출을 통해 '정치적'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일제의 의도와 맞물리는 것이었다. 1930년대 이후 식민정책의 전반적 구도 변화는 지방제도에도 미쳐 지방제도 개정(1930.12)으로 1931년부터 종래의 指定面 대신 邑을 신설하여 府,面制를 府,邑,面制로 바꾸고 지방의회의 선거제를 도입하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까지 형식적 자문기구에 불과했던 府面評議會와 道評議會 대신, 선거로 선출하는 議決機構로서 道會, 府會, 邑會를 신설하고 面協議會會員도 임명제 대신 선거제로 바꿨다. 지방제도의 변화는 1920년대부터 유산층과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제기하던 주장, 즉 자문기구가 아닌 의결기구로의 지방제도 전환 요구에 일정하게 부응하는 同化政策의 적극적인 표현이었다. 언제든지 총독이 해산할 수 있는 기만적인 것이었지만 의결기구로의 지방의회 전환을 통해 일제의 통제 아래 '정치적 욕구'를 해소시킨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실제로 지방제도의 의결기구로의 전환과 선거제 도입 이후 지방선거는 이권 등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府,邑會의 활동도 비교적 '활발'하게 운영되어 식민정책에 동화,흡수되어 가는 층이 점차 두터워져 갔다.

府,邑會, 面協議會 등 지방의회의 (피)선거권은 일본에서 이미 1928년부터 보통선거제가 실시된 것과 달리 각종 府,邑,面稅를 합하여 地方稅 5円 이상의 납세자 가운데 만25세 이상의 성인남자로만 제한되었다. 그러나 유산층 지식인들은 일본에서의 보통선거제(여성은 제외) 실시에도 불구하고 선거권자를 지방세 5円 이상의 납세자로 제한하는 선거방식 자체에 대해서는 한번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지방의회 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이권을 식민지 하의 극히 제한된 '정치적' 발언권 행사에 제한되었음을 의미한다.

(피)선거권은 고소득 유산층, 개인소득세제 실시 이후에는 대체로 개인소득세 납세층 범주로 제한되었지만 "개인소득세 창설에 따라서" "府邑面 의원 선거권자 자격제한에 의한 납세액 5円을 중심으로 유자격자의 대변동이 초래할 것이 예상되고 또 당연한 결과로서 內鮮議員의 선출 비율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지방세) 납세액 제한조건을 인상하지 않는 한 불가피했다. 특히 개인소득세제 실시 이전에는 일본인보다 경제수준이 떨어졌던 조선인들이 지방세 5円이상의 납세자 즉 (피)선거권자가 되기는 더욱 어려웠다. 따라서 (피)선거권을 갖게 된 제한된 일부 조선인들은 (피)선거권 보유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세'와 '특권'을 과시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이들은 지방의회 진출을 통해 官과의 친밀도를 높혀 각종 '이권' 개입이나 자신의 지방세 부담을 줄이는 '이익'도 누릴 수 있었다. 실제로 지방제도 개정 이후의 선거에서 기권율은 10% 미만에 불과할 만큼 유산층의 지방선거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컸다.

지방제도의 개편, 선거제 도입, (피)선거권자의 확대는 이들에 대한 집중적인 물적 수탈에 대한 일종의 반대급부였다. 일제가 이들의 지방의회 진출을 굳이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면 개인소득세제 실시와 더불어 선거권자의 납세액 하한선을 상향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대로 유지한 것은 同化政策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방제도 개정 3년후인 1934년에 도입된 개인소득세 과세에 따른 지방세 부담의 증가로 조선인 선거권자가 급증하였다. 개인소득세제의 실시와 1938년 증징을 거친 1939년에 京城府會議員 선거권자는 1931년의 22,733명에서 28,431명으로 5,698명이 늘어났고 늘어난 선거권자의 대부분(86.4%)이 조선인이었다. 조선인 선거권자 증가율(62.4%)은 일본인 선거권자 증가율(5.2%)보다 훨씬 높았다. 이것은 개인소득세제 실시 이전인 1920-1931년 사이에 일본인 선거권자 증가율(7배)이 조선인 선거권자 증가율(3배)에 비해 2.3배나 되었던 사실과 극히 대조적이다.

조선인 선거권자가 많아지자 조선인들의 道,府,邑會議員(面協議議會員) 당선자도 급증하는 큰 변화가 나타났다. 경성부의 경우 개인소득세 도입 직후인 1935년까지만 해도 조선인 당선자는 전체 당선자의 1?3도 안되었지만 불과 4년 후인 1939년에는 43.5%나 차지하는 급격한 변화를 보였다. 심지어 1935년에는 조선인이 경성부회 최고 득표자로 당선되기까지 했는데 1920년대에는 전혀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조선인의 지방의회 진출의 급증은 조선인의 권리 향상이라는 측면보다는 유산층들이 친일의 차원을 넘어 同化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한된 '政治圈'으로의 포섭은 개인소득세제 도입에 따라 집중적 수탈대상으로 전락한 유산층의 불만을 희석화시키는 기능을 할 수 있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독립'보다 식민지 지배체제에 흡수되면서 자신의 '당면이익' 추구에 매몰된 이들에게 府會,邑會,面會로의 진출 확대는 同化의 수준을 한 단계 높힐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허구적 '정치욕구'의 출구도 1940년대 이후 전쟁이 장기화,확대되고 억압적 통제가 강화되면서 식민통치상 효율적인 기능을 수행하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태평양전쟁 이후의 조세수탈은 소득계층을 가리지 않는 전면적 수탈체제로 전환되면서 지방세 납세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개인소득세 납세자도 세원색출의 강화와 인플레에 의해 1939년의 26.9만여명에서 1942년에는 53.4만여명으로 2배나 급증했다. 선거권자의 급증을 초래했고 府의 경우에는 군수공업 확충으로 인구가 급증하여 인구비례에 따른 법정당선자수도 늘어났다. 선거권자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그만큼 선거경쟁도 커지게 됨에 따라서 지방의회라는 회유장치조차 '효율적' 전시통제의 강화에 장애요인으로 대두되었다.

1943년의 4차 府邑面會 의원선거를 앞두고 일제는 두가지 대처방안을 내놓게 된다. 첫째, "府의 인구증가에 따라 무한히 의원 定數를 늘릴 수 있는" 府制를 개정하여 인구 급증으로 定數가 늘어나게 된 府會議員定數를 줄이고 상한수를 설정했다. 둘째, "지방의회의 결전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일본과 같이 推薦制(추천제)를 채택"한 [부읍면회의원 및 면협의회원 총선거지도요강](1943.2.17)을 발표하였다. 결국 지방의회의 제한된 선거권을 형해화시키는 것이었다. 전시하에 "민중들이 쓸데없이 선거운동에 몰두하는 등의 사태를 피하기 위"한다는 명분 아래 '자유경쟁'의 소지를 없애 부윤이나 읍면장이 후보자를 추천하고 추천을 받지 않은 "자유 입후보자를 아예 없도록 하는" 철저한 통제선거체제로 바뀌었다.

납세부담에 따른 불만을 회유하고 통제된 '政治圈' 형성의 기능을 하던 지방의회 통로는 1943년(5.21)의 지방선거를 계기로 제한된 납세층 위주의 선거권마저 부정되었다. 자신들에게 집중되는 과세부담에 대한 정치,경제적 보상구조가 축소,폐지되는 와중 속에서 유산층이 식민지체제에서 일탈될 가능성은 있었다. 실제로 일제는 지방의회 추천선거제 도입으로 "자유입후보자가 없으면 추천에 의해 사실상 당선인의 범위가 정해지고 일반 선거인의 선거는 선거의 實을 잃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투표의 기권방지에 상당한 고심"하였다. 따라서 "추천과 동시에 선거를 결정하는 제도" 또는 "강권으로 온건 타당한 민의를 압박하는 느낌을 일반에게 주지 않는 세심한 주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의 가능성은 마산부의 경우 투표율이 90%나 되었던 예를 보면 별다른 저항없이 일제의 기권방지 캠페인 속에 흡수되었다.

이는 식민지 지배에 기댄 자본축적의 가능성을 믿던 유산층의 마지막 정치적 보루였던 허구적 '자치론'의 붕괴를 의미한다.

맺음말

[친일파]의 논리는 시기별로 식민정책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면서 나타났다. 그러나 전 시대를 통해 일관된 것은 식민지라는 상황을, 주어진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고 식민정책에 따라서 개인적인 富의 축적 가능성만―결국 보장되지 않는―타진했을 뿐 극복의 대상으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제는 개항기 이래 제국주의 인식의 결여, 근대적 국민관의 결여에 의해 부국강병의 대상으로 삼은 국가가 없어졌을 때 저항의 기반을 상실한 이러한 근대화 지상론자의 맹점을 정확하게 꿰뚫었고 실제로 식민통치의 안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화 과정 일반에서 보이는 자본가그룹의 현실 타개 또는 창출능력과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1937년)하기 이전까지 1930년대의 식민정책은 유산층들에게는 이중적 성격으로 다가왔다. 개항 이후 미단작체제 하에서 富와 자본축적 조건을 마련할 수 있었던 (대)지주층에 대해 일제는 1930년대 초반까지 주요 과세대상에서 제외시키는 혜택을 제공했다. 이러한 과세혜택은 일본자본의 틈바구니에서 생존과 발전을 모색하던 상공업자에게고 미쳤다. 거기에다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인한 '만주붐'은 특히 상공업층에게 독립보다 식민지지배를 감수할 때의 '유용성'으로 기울어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이들은 일시적 '호황' 현상에 매몰되어 오히려 일제의 우산 아래 있는 것이 자신들의 자본축적과 시장개척에 유리하다고까지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에 따르면 식민지로부터의 독립(운동)은 자기계급의 이해관계에 철저하게 대립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산층의 식민지 포섭이 일정하게 마무리되자 1930년대 중반이 되면 유산층은 이제까지와 달리 집중적인 과세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기업경영 또는 지주(농장)경영의 주요한 변수인 과세체제, 특히 소득세제의 운용과정은 전쟁이 확대되면서 군수물자 동원에 필요한 업종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 대해서 집중과세되었다. 동시에 전시체제 하의 자유로운 투자조건의 박탈은 개별기업 또는 지주경영의 확대재생산을 커녕 단순재생산조차 불가능하게 할 정도였다. 이들이 발전 또는 성장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식민통치 차원에서 가능한 일정 수준, 일정 시기에 제한된 것이었다. 결국 식민지체제는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상태의 자본가적 발전의 측면에서 결정적인 제약조건이었다. 그러나 일정한 역사적 조건을 바탕으로 한 친일의 논리는 자가발전까지 하면서 일제의 인종대결 선전에 흡수되어 (미국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서만이 그리고 이겨야만 자기도 살 수 있다는 자기함정에 빠지게 된다.

지주 또는 상공업자로서 유산층의 계급적인 위치에서 그들의 富 또는 자본축적 구상이 식민지지배 하에서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대응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려면 식민지지배 하에서도 富 또는 자본축적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자유로운 자본가적 발전이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식민지라는 제약은 이러한 제 조건을 전혀 보장하지 못했다. 이점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범주적 존재로서 유산층의 자기발전논리가 빠진 함정이다.

1930년대 이후 선거제와 의결기구로서의 체제개편을 이룬 지방의회에 유산층들이 적극적 진출을 모색하게 된 것은 일시적으로 '성장'한 물적 조건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정치욕구'의 출구였고 점점 옥죄어 오는 물적 제약에 대응하여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방안이기도 했다. 물론 조선총독이 언제라도 해산할 수 있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제한적인 것이었지만 이러한 허구적 '정치욕구'의 출구조차 1940년대 이후 전쟁이 장기화,확대되면서 지방의회라는 유산층 회유장치조차 '효율적' 전시통제 속에서 형해화되어 갔다. 일반 민중뿐 아니라 유산층은 자신들이 희구하던 엘리트적 '정치욕구'조차 통제당하면서 무제한의 '효율적' 수탈대상으로 전락하면서도 최소한의 저항의지조차 보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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