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대한침략기(日帝의 對韓侵略期,1876-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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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원 호 ( 고려대 강사, 한국사 )

'친일'과 '친일파'의 역사적 개념

최근에 나온 여러 종의 친일파연구서적은 거의 예외없이 '친일파'의 유래를 갑신정변단계의 개화파에서부터 끌어온다. 갑신정변의 주체인 김옥균 등의 변법개화파가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정변을 일으킨 데다가 이들 중 몇몇이 식민지시대에 들어 친일적 행위를 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 경향의 연구자들은 식민지시대 친일파의 뿌리를 그 전사(前史)로서의 개화기의 개화파에 연결시킨다. 이와는 출발점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근대변혁운동의 주체를 농민층에서 찾는 민중사학론의 관점에 선 연구들도 개화파가 이 시기 변혁 주체가 될 수 없는 한계를 '친일'의 대외의존적 성향에서 찾는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친일파'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어느 역사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외세와의 친연성을 가지는 정치집단'이라는 의미라기 보다 민족적 정서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역사적 행위를 한 매국노, 민족반역자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사회적 언어는 그 개념의 형성 이면에 반드시 역사적 과정을 거친다. 현재의 '친일파' 개념 역시 가혹했던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식민지화의 첨병 역할을 했던 매국노, 식민지시대 일제에 붙어 식민정책을 미화하거나 동족을 압박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목숨을 버리도록 부추겼던 반민족 범죄자들에 대한 우리의 정서가 결코 우호적일 수 없다. 더구나 해방이후에도 친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경우 그 부정적 의미는 단순히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의미로 다가온다. 따라서 지금의 '친일파'가 담고 있는 함의에 도덕적 무게가 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언어가 역사성을 가진다면 역사적으로 '친일=반민족적'이라는 등식이 그대로 성립되지 않는 시기의 '친일'에게까지 이 '친일파'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탈(脫)역사적 사고이다. 근대로의 이행기에 외세의 침략을 받는 나라에서는 항상 외세와 친연성을 가지는 정치집단이 출현했다. 19세기의 독일이나 일본에서도 이같은 양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열강의 세력 각축장이던 19세기말의 우리나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친일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친미파, 친청파, 친러파 등이 함께 존재했고 이들 정치세력의 배후에는 반드시 열강의 힘이 끼어들어 있었다.

자주적 근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서 관료를 비롯한 정치세력들은 열강의 힘에 기대어 정치권력을 유지하거나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고 '친일' 성향의 집단 역시 그같은 세력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식민지화이전의 시기에 친일파를 반민족적 집단으로 매도하려면 친미파 등도 마찬가지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지금도 정서적으로, 정치적으로 친미, 친일로 기울어져 있는 관료나 국회의원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보지만 그들을 바로 민족반역자로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현재의 친일, 친미적 성향의 정치세력들이 권력의 배후를 그 쪽에 기대기도 하고 그러한 정치적 편향이 통상정책의 결정이나 남북문제에서 현재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압박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들을 간단히 '매국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지금의 '친일'성향과 식민지시대의 '친일'행위는 그 목적과 배경에서 역사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혹독했던 과거 식민지의 경험이 만들어낸 반민족집단으로서의 '친일파'라는 역사적 개념과는 달리, 이들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등 사회체제로서의 현실적 이상 모델을 그쪽에서 찾는 세력들로서 그들의 비주체적 행위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어도 현실의 세계체제 내에서 정치적 외교적 한 편향인 '친일', '친미'를 바로 '반민족'이나 '매국'으로 판단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개화기의 친일성향의 인물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오히려 식민지의 경험을 겪은 지금보다 '반민족' 문제는 적용이 까다로와져야 한다. 100년전 한국사회는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만이 식민지를 면하는 길이었고 그 과정에서 근대화의 모델을 일본이나 청국, 또는 미국에서 구하는 정치집단들이 존재했다. 그 중 일본의 명치유신이후의 자본주의화 과정을 이상적 모델로 삼는 집단이 바로 이 시기의 '친일' 개화파였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화이후의 역사적 개념을 소급하여 김옥균 등의 '친일'개화파를 지금의 '친일파'개념으로 비난한다면 지극히 비역사적 사고일 수밖에 없게 된다. 한번 친일파가 영원한 친일파도 아니었다.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만 해도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다시 친일파로 변신한 인물이었다. 한반도가 일본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기 전까지 친일파는 구조적으로 성립되어 있다기보다 정치적 선택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외세의존적 성향의 세력들이 근대적 변혁을 이룰 수 있었던가 하는 점은 현재 우리 역사학계의 과제로 남아있다. 한동안 박정희 시대의 근대화론이 학문적으로 지배하던 60. 70년대에는 외세의존성을 간과하고 오직 개화파만이 근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자본주의 지상주의였던 근대화론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사상이나 행위가 높이 평가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물론 이 시기에도 이에 대한 반론은 존재했다. 개화세력의 개혁 자체가 지주적 성향을 보이는 데다가 외세의존적 자세가 우리 사회변혁의 주체로서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의 민중사학에 이르면 후자의 입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반외세 민중적 입장을 취하지 못한 정치세력은 결코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개화파의 외세친연성과 '농민적'이 아닌, '지주적' 개혁노선은 반민중적이어서 변혁의 주도세력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이 문제는 민중사학 내부에서도 역사를 민중 편향의 시각으로 봄으로써 역사의 주체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이 시기 역사전개의 과학적 이해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애매해진 변혁의 전망과 맞물려 그동안 한물간 것으로만 여겨졌던 근대화론이 "개화파외에는 대안이 없었다'는 식으로 다시 발언권을 얻고 있다.

개화파를 현재적 의미의 '친일파'식으로 보는 한 변혁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개화파만이 대안이었다는 근대화론도 당시 농민의 자주적 변혁의 과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외세의존의 자본주의적 성향을 가진 세력만이 변혁이 가능했다고 보는 결과론적 단순화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시기 올바른 변혁의 주체를 어느 세력에게서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의 해명은 외압의 변화와 우리 사회의 발전과정을 시기적으로 면밀히 검토하면서 구체적 역사시기의 모순구조에 대응하는 각변혁세력의 논리와 주체역량을 평가하는 것이 단서가 된다고 본다. 인간의 사회적 행위가 역사적 산물인 한 그 평가도 역사적 조건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반봉건 근대화가 역사적 과제이던 시기에 '친일'의 문제는 평가기준에서 상대적으로 부차적이다. 실제로 갑신정변 당시만 해도 김옥균이 먼저 손을 내민 곳은 미국이었다. 그러나 불간섭주의로 일관하고 조선에 큰 관심이 없던 당시 미국이 지원해 줄 리는 만무했고 결국 일본이 김옥균을 거들고 나왔다. 그런데 이 시기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압력을 가해온 쪽은 일본이 아닌 청국이었다. 청국은 종주국 행세를 하면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민씨 일족도 이들에 기대어 개화세력을 정계에서 축출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 위기에 있던 김옥균 등은 청국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세력이 위축 당하던 일본과 이해타산이 맞았던 것이고 그 결과가 갑신정변이었다. 갑신정변 실패이후 10년동안 원세개의 권력이 고종을 능가하고 청국이 우리의 근대화를 직접적으로 간섭하고 방해하는 과정은 김옥균의 정변이 '친청'세력보다 오히려 외압의 판도를 정확히 읽은 반외세의 자주적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정변파에게 현재적 의미의 '친일' 혐의를 뒤집어 씌우거나 개화기의 '친일' 개화파를 식민지시대의 '친일파'와 같은 성격으로 보는 견해는 개념이 가지는 역사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다음 절에서는 이 시기 근대화를 위한 모델을 일본, 청국, 미국 등에서 구한 개화세력의 논리와 내적 분화를 시기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개화세력 내부의 한 분파로서의 '친일' 개화파의 '친일'의 실체와 그 시기적 변화도 함께 살피고자 한다.

근대화의 모델문제와 '친일'개화파

조선후기이래의 실학적 전통을 잇고 있던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유대치(劉大致) 등의 일련의 선진적 지식인들은 양무운동단계의 청국을 직접 견문하거나 서양의 사정을 소개한 청국서적의 영향을 받으며 세계사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사상의 형성과 그 세력의 확대에 노력했다. 이들은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유길준 등 양반 청년관료들에게 '시무(時務)의 학(學)'에 힘쓸 것을 권하고 그들을 지도했다. 박규수는 척사론자들의 화이관을 극복하고 청국이나 일본, 서양이 모두 대등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아 통상개국론 등의 현실적 노선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 때 박규수가 서양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인 서적은 {해국도지(海國圖志)}와 같은 열강의 무력침입에 대응할 수 있는 기선제조 등의 해방론(海防論)을 중심으로 한 청국 양무운동론자들의 저술이어서 그의 '시무의 학'도 여전히 전통적 사회체제, 곧 '동도(東道)', '동교(東敎)'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청국을 모델로 한 양무론적 개혁론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후 1차 수신사 金綺秀일행은 조약체결에 따른 방문을 하여 주로 군대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일본의 '부국강병'에 대해 김기수일행이 고종에게 보고하면서 민씨척족을 비롯한 정권의 담당자들도 이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1880년 2차 수신사 金弘集일행이 파견되었다. 김홍집은 이 때 청국공사관 참사관 黃遵憲 등과 회담을 통해 세계의 대세, 통상문제, 조선의 앞으로의 대외관계 등에 대해 의견을 듣고 귀국하면서 황준헌의 {朝鮮策略}과 鄭觀應의 {易言}을 가지고 왔다. 이 두 책은 당시의 조선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열강과의 결합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수립을 주장하는 {조선책략}은 당시 세계의 변화에 어둡던 정권 담당자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제공했고, 중세적 질서의 온존과 內修外攘에 급급한 척사론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이언}은 주로 서양의 근대적 생산력의 우수성을 소개한 양무운동단계의 서적인데, 한글로 번역되기도 하여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국제정세와 외국의 근대문물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청국의 양무론적 富國强兵이 국가적 정책으로 수용되어 갔다. 고종정권은 특히 武備와 군기제조에 관심을 기울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는 한편, 군제를 개편하고 신식군대 別技軍을 창설했다. 또 1881년 1월 朴定陽 등 모두 62명으로 구성된 朝士視察團(紳士遊覽團)이 일본에 파견되어 정치,경제,군사,대외통상,교육 등 각 부문에 걸쳐 시찰하고 돌아 왔고, 3월에는 銅제련, 피혁제조의 기술을 습득시키고자 일본에 사람을 파견했다. 1881년 9월에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하여 천진에 보내 군기제조를 학습하게 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과 청국에서 근대화의 과정을 시찰하고 일부 근대적 기술이 도입되었지만 아직 이 시기의 개화정책은 武備의 증강이 중심이 된 관주도의 근대적 생산력의 발전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1880년대 초반에는 청국의 양무론과 같은 인식이 당시 고종을 비롯한 정계의 주조를 이루었고 그 내용은 박규수의 '時務의 學'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수신사, 조사시찰단, 영선사 등의 파견과 개화정책의 수행과정에서 개화파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갔다. 개화정책이 서구의 근대적 생산력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고종을 비롯한 집권세력과 개화파의 이해는 일치했다.

1882년의 임오군변이후 개화파는 내부적으로 분열이 일어났다. 사상적으로 서구문명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청국문명의 틀 내에서 이해하는 동도서기론적 입장에 있던 김윤식 등은 유교문화에서 조선이 일본보다 선진적이었음을 자부하고 명치유신에 의해 서구화된 일본의 변모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가 청국의 속방임을 천하가 다 아는 바이며 항상 청국이 착실히 담당해주지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는 孤弱之勢거늘 만약 청국이 종래와 같이 착실히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실로 유지하기 어렵다"고 했다. 김윤식은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도 종래 갖고 있던 청국의 능력과 지도력을 의심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가 영선사로 청국에 간 이후 청국과의 대외창구의 실무자였던 점도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김윤식은 개화(開化)를 시무(時務)로 보고 서양과 청국, 그리고 조선의 시무를 각각 분리하여 국가의 발전단계에 맞게 적용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조선의 시무는 검약을 숭상하고 가난을 물리쳐 민(民)을 진휼하는 데 힘쓰고 열강과의 조약을 준수하며 통상과 근대적 생산력의 진흥에도 힘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그가 주장하는 시무는 사회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열강과의 분쟁을 없이 하면서 근대적 생산력의 발전을 바라는 소극적 대세론의 개화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소위 시무란 것은 모두 서양의 가지와 꽃잎(枝條花葉)이다. 근본(本)을 지키지 않고 먼저 타인의 말(末)을 먼저 배운다면 어찌 안다고 하리오"라 하며 근본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는 그가 세계사의 대세를 따른다는 점에서 '시무(時務)', 곧 '서기(西器)'의 수용에 힘쓰지만 '동도(東道)'를 버릴 수 없다는 동도서기론의 입장에 있었음을 뜻한다. 이 논리는 전통적 사유체계나 정치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양의 근대적 생산력을 수용하겠다는 청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과 논리구조가 비슷하다.

그런데 김윤식과 함께 행동하며 변법개화파와 분리된 魚允中은 개혁방법에서 김윤식과 다소 차별성을 가진다. 1881년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어윤중은 일본이 채택한 명치유신이후의 사회체제를 일정하게 비판하면서도 부국강병이란 측면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청국으로부터의 "자주는 가할지 모르지만 독립은 아니다"라는 그의 청국관은 정치적으로 김옥균과 분리되고 김윤식과 같은 입장에 서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1882년 임오군변(壬午軍變) 이후의 많은 개화상소에서도 동도서기론의 입장에서의 시무=개화를 주장했고 그 내용은 박규수나 김윤식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임오군변이후의 개화소들은 상소를 작성한 인물들 스스로 인정하는 것처럼 앞서 본 청국양무운동의 이론적 기반이던 鄭觀應의 {易言}에 근거했다. 그래서 "통상이래 시무를 이야기하는 자들은 회사 건립과 기선 구입, 토화(土貨) 개발과 양물(洋物) 운반을 하여 상호 왕래하며 세계각국과 이익을 나누고 세력균형을 이룬 이후에 자강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는 지적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박규수의 '시무의 학'이나 김윤식의 '시무설', 그리고 임오군변 이후의 개화를 위한 '시무소(時務疏)' 등 이 시기 '시무'를 주장하는 시무개화파들의 개화는 본질적으로 근대적 생산력의 수용과 국제간의 세력균형에 의한 통상론에 국한된 것이었고, 자주적 근대민족국가의 수립을 통해 국내외적 정세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결여된 소극적 대세론으로서, 청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한 개혁론이었던 것이다.

한편, 박규수의 '시무의 학'에 영향을 받은 김옥균 등 개화세력의 일부는 시무를 단순히 근대적 생산력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근대적 정치체제로의 개혁이라는 새로운 지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김윤식은 [시무설]에서 이들을 지적하여 "지금 논자들은 서양의 정치제도를 본받자고 하고 이를 시무라고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사상적 지향은 이미 강재언이 지적한 대로 1890년대 청국의 변법운동론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청국 변법운동과 갑신정변 주도 세력의 지향이 유사했던 점은 무엇보다 개혁의 모델이 같았기 때문이다. 양자는 모두 부르주아 국가의 정치제도와 경제제도의 모델을 일본의 명치유신에서 구했다. 김옥균은 일본의 근대국가로의 발전 근거를 '변법'에서 찾았다. 그는 {치도약론(治道略論)}(1882)에서 "또 들으니 일본이 변법(變法)한 이후로 모든 것을 경장(更張)했다(又聞日本自變法以來更張萬端)"고 한다. 이 변법은 명치유신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근대적 정치체제, 곧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무개화파가 주로 관주도(官主導)의 군수공업과 상업, 그리고 일부의 민수공업 등 근대적 생산력 발전의 노력에만 머무른 청국의 양무론을 개혁의 모델로 삼은 데 비해, 갑신정변을 주도한 변법개화파는 일본의 정치제도와 경제체제 등을 모델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변법은 종래의 정치체제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정치적 실천을 담보하여야 했고 이 점에서 청국 변법운동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김옥균 등은 청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 보호 아래 있으려던 김윤식, 어윤중 등과 달리 청으로부터 정치 문화적으로 독립을 주장했다. 1882년의 임오군변이후 청의 압력이 가중되어 가고 후기로 갈수록 민씨척족들이 청과의 연계 속에 김옥균 일파를 권력의 핵심에서 밀어내기 시작하면서 이 주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김옥균은 "自來로 청국이 屬國으로 생각해 온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나라가 振作의 희망이 없는 것은 역시 여기에 원인이 없지 않다. 여기서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속박을 물리치고 특히 독립자주국을 수립하는 일이다. 독립을 바라면 정치와 외교는 불가분 自修自强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인식하에서 그동안의 대원군과의 다른 정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청의 대원군강제 납치를 맹비난했다.

이 시기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는 충분한 자금과 근대적 생산력을 도입할 인적 자원의 확보가 이루어져야 했고 여기에는 봉건적 수탈구조의 혁파와 같은 적극적 개혁의 의지가 동반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왕실과 민씨 척족을 비롯한 문벌가문출신인 관료세력들은 오히려 봉건적 수취구조 내에서 착취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수탈은 부세수취의 과정에서 중간수탈을 행하며 사복을 채우는 것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국가재정의 전반적 위기를 가져왔다.

김옥균 등 개화파의 계급적 기반도 민씨 척족 등 문벌귀족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개화파의 개혁노력이 기왕의 왕실 및 관료세력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은 부르주아적 발전의 물적 토대를 확보하기 위하여 관료세력의 수탈을 막고 부세제도를 개혁함으로써 국가재정을 강화하고 이를 통일적으로 운영하려 했던 데 있다. 그들의 정강에 나오는 문벌의 폐지, 지조법(地租法)의 개정, 관리나 이서배의 중간수탈을 막고 국가재정을 호조로 일원화하는 것 등은 바로 그러한 의도를 보여준다. 개화파가 주체가 되어 만든 {漢城旬報}나 김옥균의 {治道略論}, 洪英植이 미국을 다녀와서 고종과의 대화를 적은 {復命問答記} 등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에 필수적인 기간산업, 곧 교통 운수 통신수단의 근대화와 기계 조선공업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를 위해서 개혁자금의 확보가 급선무였고, 그래서 김옥균은 일본과 300만원의 차관교섭을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현실의 틀내에서의 개혁자금의 조달이 불가능해 진 마당에서는 무엇보다 양반관료의 중간 수탈을 타파하고 국가재정을 확보할 제도적 장치가 요구되었다. 그것은 바로 變法, 곧 정치체제의 개혁이었다.

{한성순보} 등에 실린 서구의 입헌정체와 헌법, 의회 운영방식에 대한 기사들은 개화파의 정치적 지향을 잘 보여준다. 시무개화파도 서구나 일본의 정체에 대해서 이해가 있었다고 보여지나 집권세력인 민씨척족이나 이들의 후원자였던 청국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어 현실적으로 정치체제의 개혁을 위한 실천으로 나가지 못했다. 반면 {治道略論} 단계에서 이미 명치유신이 일본의 근대적 개혁을 가능하게 한 근거였다고 보았던 김옥균 등의 입장에서는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제의 수립이 정치적 지향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883년 報聘使로 미국 등 서구의 근대적 정치제도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직접 견문하고 온 洪英植이나 徐光範 등에 의해 미국의 사회체제나 정치제도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면서 변법적 인식은 더욱 강화되었고, 그것은 결국 정변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변법개화파의 입헌정체에 대한 지향은 현실의 정치에서 그대로 나타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세력기반이 대중에 뿌리내리지 못한 데다가 봉건적 문벌이 지배체제를 강고히 장악하고 있는 이상 군주권의 일정한 비호 아래에서만 개혁이 가능했던 까닭에 군주권의 타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변법개화파는 우선 집권문벌세력의 타파에 촛점을 맞추었고, 김옥균이 쓴 {갑신일록}의 14개조 신정강 중에서도 문벌의 폐지를 주장했다. 또 이 정강에서는 의정소(議政所)를 설치하여 군주권의 제한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갑신정변 단계 변법개화파의 정치개혁구상이란 정치권력을 장악한 문벌을 타파하고 봉건적 통치체제에 기반한 전제군주제를 제한하고 의정소를 통하여 입헌군주제의 초기형태인 입법권과 행정권을 가진 내각제도를 창설함으로써 근대적 정치체제의 확립에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조의 개정으로 지주 중심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변법개화파의 地租개정은 일본의 지조개정을 모델로 하고 있었다. 일본지조개정은 근대적 '일물일권(一物一權)적' 토지소유권을 '위로부터' 확립하고, 그를 통해서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보장하는 한편, 지주권을 보호하여 지주자본가를 일본 근대화 추진의 주도세력으로 육성하려 한 것이다. 개화파가 발행한 {漢城旬報}는 일본의 2차 지조개정이 발효된 지 약 40일만인 양력 1884년 4월 25일 그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고, 36호로 폐간되기 직전인 8월 11일의 35호에서도 '日本地租條例' 원문을 다시 한번 게재할 만큼 지조개정에 관심이 있었다.

이처럼 갑신정변은 일본의 정치 경제체제를 모델로 한 봉건지주계급의 부르주아지화를 추구하는 '위로부터 개혁'의 한 전형이었다고 할 수 있고, 정변을 추진한 변법개화파의 '친일'적 경향 역시 근대화의 모델을 일본에서 가져오고 우리를 속국으로 삼던 청국에 대응하는 반외세의 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갑신정변 실패후 변법개화파들은 정계에서 제거됨으로써 사실상 그 역사적 역할을 다했다. 시무개화파도 1887년을 전후하여 청국과 민씨척족이 정계를 장악하는 가운데 김윤식, 어윤중이 유배되고 김홍집이 정계사퇴 의사를 표명하는 등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시무적 개화론은 역사의 진전과 함께 사상이나 인적 구성에서 내부적으로 변화를 보이며 외연을 점차 넓혀 갔다.

1880년대 초반이후 개화정책의 결과로 만들어진 각종 근대적 기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대외관계의 실무자였던 일부의 신진 관료층이 김홍집, 어윤중 등 시무개화파들과 일정한 관련을 맺으며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조희연(趙羲淵),김가진(金嘉鎭),안경수(安경壽),김학우(金鶴羽),권형진(權瀅鎭),권재형(權在衡),장박(張博),정병하(鄭秉夏)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무과등과자,중인,서자 출신 중급관료로서 정치적으로는 배타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민씨척족을 비롯한 문벌세력에 반감을 품고 있었고, 사상적으로 종래 시무개화파의 '東道' 수호적 입장과는 달리 전통 유학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실무적 관료형의 개혁론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종래의 정치체제를 근원적으로 바꾸려는 변법적 인식 보다는 체제 내 개혁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시무적 개화론을 일정하게 계승하고 있었다. 그들은 변법개화파와는 달리 특정한 정치적.경제적 사상이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뭉친 것이 아니고 대부분 직업적 관료로서 형식상 국왕 혹은 왕조에 대한 충성심으로 결집된 세력이었기 때문에 서로 동지적인 연대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권력집단으로서의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그들은 나중에 갑오개혁때 김홍집,김윤식,어윤중 등과 유대관계를 맺고 개혁의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무개화파 세력에는 유길준도 가담하고 있었다. 유길준은 갑신정변 이전의 단계에서 김옥균 등 변법개화파와 변혁에 대한 인식이 유사했지만 정변의 실패이후에는 체제 내의 개혁이라는 현실적 개혁론자가 되었고 특히 갑오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이 새롭게 성장하던 관인층은 민씨척족을 비롯한 문벌의 정치독점과 민중수탈, 또 이를 가능하게 한 문벌의 재생산 기반인 과거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이 점은 시무개화파에게서 일반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등의 저술이나 시무개화파가 주도하여 만든 {漢城周報}에서는 과거제의 폐지와 공론에 의한 인재선발과 재상 임명 등으로 문벌정치의 폐단을 타파할 것을 주장했고 문벌폐지와 관련하여 입헌군주제의 장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신분의 문제에서도 서얼차별, 노비세습, 연좌법의 폐지, 신분에 관계없이 근대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등 평등사상에 입각한 진보적 형태의 민권신장을 주장하며 종래의 시무론적 인식에서 발전적으로 나아갔다. 또한 鄕會 등 지방민의 자치기구의 설치를 통하여 지배계급의 수탈을 막는 제도적 장치도 구상하여 후일 군국기무처의 의안에 포함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제군주제의 폐지나 제한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변법의 단계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고 전래의 제도를 정비하는 수준의 체제내에 머물렀다. {한성주보}의 {大典會通}적 법질서의 강조는 이들의 현실적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은 갑신정변 단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앞서 본 대로 변법개화파도 지주적 토지소유의 타파보다는 부세체제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들어 지주적 개혁론은 더욱 강화되었다. 김윤식은 부자의 재산권을 보호하여 '殖産興農'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종래의 지주제를 온존하는 바탕 위에서 근대적 생산력의 발전을 바라고 있었고, 유길준도 정전론 등 토지재분배론을 비판하고 근대적 세제의 확립, 특히 지조개정을 통한 세제개혁을 주장했다. 이같은 개혁론은 결국 종래의 지주제를 개혁의 물적 기반으로 삼는 자본주의 이행에로의 '위로부터의 길'의 전형적 형태였다.

1894년의 농민전쟁은 종래의 지배구조를 근원적으로 뒤흔들었고 이에 추동되면서 봉건정부 내부에서도 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校正廳설치는 그 결과였고 여기서는 주로 봉건적 수탈의 완화에 촛점을 두어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수용했다. 그런데 뒤이은 일본의 경복궁 점령으로 민씨척족이 정권에서 배제되고 군국기무처가 수립되면서 개혁은 더욱 혁신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유길준 등을 비롯한 시무개화파가 군국기무처를 장악하고 개혁을 주도함으로써 여기서 내어놓은 議案은 앞서의 그들의 개혁론을 현실화하고 있었다. 물론 일본의 내정개혁요구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아직은 그 뒤 시기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자율적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혁안 중에는 비록 조선의 내재적 요구에 의한 것이었더라도 결과적으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용이하게 만들거나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려는 일본의 간섭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많았다. 더구나 농민군을 '匪徒'라고 지칭하고 일본군에게 농민군의 진압을 요청하는 등 민중관이나 민족문제에서도 한계를 드러냈다. 이처럼 갑오개혁은 개혁주체가 지니는 외세와의 친연성, 민중과 유리된 개혁이라는 점, 그리고 개혁이 결과적으로 외세의 침탈을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점 등에서 한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외압의 조건이 이 개혁의 성과를 자주적으로 내재화할 수 없게 한 엄연한 한계는 부인될 수 없지만, 개혁주체의 노력과 개혁의 내용은 조선후기이래 조선사회의 내재적 발전 속에서 추구해온 합법칙적 역사발전의 결과이기도 하며, 근대적 국가와 사회체제 건설을 위한 상당히 일관성 있는 성격의 정책체계였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진다. 그 뒤 일본의 내정간섭이 노골화되고 군국기무처가 해산되면서 내재적 개화운동의 역사적 계승이라기 보다 외세에 의한 개혁으로 그 성격이 급격히 변질되고 '친일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가 수립되면서 개화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집권세력 내부의 소수 관료세력으로서 개화파가 주도하던 개화운동은 외연이 급격히 확장되어 갔다. 이 운동은 근대적 생산력의 도입이나 정치적 개혁에 그치지 않고 사회,문화적 민권운동으로도 전개되어 광범한 대중에게 근대적 사상을 보급하고 부르주아적 개혁의 토대를 확대하는 데 이바지했다. 또 의회개설운동을 벌여 종래의 형식적 기구였던 중추원을 의회로 재편하고 군주권의 제한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다수의 민중을 동원했지만 광무정권의 군주권 강화방침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또한 관민공동회와 만민공동회의 단계에서는 종래 볼 수 없었던 대중집회로 발전했고 따라서 운동의 주체와 참가층도 소수의 관료만이 아닌 신지식인, 상인, 농민 등 일반대중으로까지 넓어졌다.

그런데 독립협회는 제국주의 침략하에서 절실히 요구되던 국내시장의 보호를 외면하고 자유무역에 의한 경제적 시장 개방을 주장했다. 이는 대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지주나 상인계급의 이해를 일정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 반러시아적인 친일,미,영의 외교론에 입각한 중립화론의 주장에서도 이들의 제국주의 인식이 불철저함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청일전쟁이후 개항장의 확대와 함께 시장이 전면적으로 제국주의세력에게 개방되어 가면서 민족모순이 심화되어 가던 시점에서 나온 이같은 주장은 독립협회가 반제민족운동의 지도부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지주나 상인계급에 기반한 '위로부터의 길'을 추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적 개혁이 역사적 과제이던 시기에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에 대한 노력을 보였고, 나아가 민중과의 연대 가능성을 기왕의 개화파를 비롯한 어느 집권세력보다 강하게 드러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한편 독립협회운동이 민권운동이라기 보다 오히려 전제황권을 강화하는 운동이었다고 보고 민권도 일부 계층에 국한된 제한적인 것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은 그 자체가 종래의 전통적 군주권에 대한 제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군주권을 완전히 부인하지 못하고 민권의 의미에도 제약이 있는 것은 역사적 조건과 주체의 한계 때문이지만 제한적이나마 군주권 제약 노력이 황권의 강화로 귀결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황권강화'는 대한제국의 독립국으로서의 국제적 위치 강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독립협회의 개혁 모델에 대해서는 프로이센이나 영국형으로 보는 등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양자 모두 그 근거는 입헌군주제적 성격에 둔다. 하지만 정체론 이외에 경제정책의 자유무역적 성격, 상인의 私商的 성격, 그밖에 민권에 대한 사고는 프로이센이나 일본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정체론의 경우에서도 의회설립운동 과정에서 보듯이 입헌군주제가 반드시 내포하고 있는 권력구조의 내각적 요소를 찾기는 어렵다. 이같은 의회는 영국이나 프로이센형의 입헙군주제하의 의회와는 다르다. 구태여 유사한 형태를 찾으라면 내각과 무관하고 행정부 견제의 의미를 가진 미국의회가 가장 닮았다. 그러므로 독립협회의 개혁모델은 현실적으로 군주권을 부정하고 공화제가 주장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이 아니어서 직접적으로 미국식 공화제를 내세우지는 못했지만 경제정책이나 사회정책, 그리고 의회구상 등 개혁론 전체를 함께 고려할 때 미국형이 가장 유사하다고 본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주도한 박정양, 이상재 등 정동파는 미국공사를 지내는 등 친미적 인물들이었고 서재필 역시 누구보다 미국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보수파들이 독립협회에서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삼으려 한다고 한 비난은 독립협회 외곽의 시각이 독립협회의 개혁을 미국형으로 본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적 모델이라고 하더라도 군주권을 부정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이 아닌 데다가 제국주의와의 관계에서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등 역사적 평가에서는 제한적 의미밖에 가질 수 없다고 본다.

대중적 개화운동으로서의 독립협회운동과는 달리 고종을 비롯한 정권의 담당자들은 오히려 군주권의 강화를 꾀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의 수용을 추구하는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광무개혁은 지주제의 근대화와 상공업의 발전을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지향했지만 그 추진세력은 왕실과 소수의 집권관료였고 특히 왕실이 종래의 의정부를 압도하면서 개혁의 물적 기반을 제공했다. 식산흥업정책을 중심으로 한 이 개혁은 개화파의 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기 보다는 이미 집권세력 내에서도 일반적 인식이 되어온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수용을 바라는 근대화 의식의 발로였고, 개혁주체가 국가재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그 동안의 어느 개혁보다 생산력의 발전을 구체적 형태로 실현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활발하던 상회사,은행,근대적 생산공장의 설립과 광산개발, 철도부설 등의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중심세력이던 왕실이 역둔토 등에서 지주경영을 강화하고 지대의 대일수출로 얻는 이익을 재정의 중요한 원천으로 삼는 데다가 청일전쟁이후 경제적으로는 더욱 강화되고 있던 일본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독립협회와 마찬가지로 국내시장의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노력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갑신정변 이래 독립협회에 이르기까지 개화파가 봉건적 상업세를 비롯한 잡세의 폐지를 일관되게 주장해 온 데 비해, 오히려 왕실은 각종 산업 전부문에 걸쳐 잡세를 수취하고 특권상인의 독점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불평등조약체계로 말미암아 세계자본주의 세력으로부터 국내시장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취약한 국내자본에 대한 과다한 봉건적 잡세 수취는 결과적으로 이 개혁이 의도한 국내 산업의 보호 육성을 어렵게 했고, 따라서 생산력 발전에도 한계를 드러 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군주권을 강화하고 왕실과 왕권을 둘러싼 소수 집권관료들로 개혁의 주체가 한정됨으로써 당시 독립협회 등을 통해 확산되고 있던 부르주아적 개혁의 지지기반을 흡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광무개혁은 일면 일본 명치정권의 개혁과 유사한 형태를 띠면서도 개혁의 기반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채 1905년 일제에 의한 보호국화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시기 각정치세력들은 개혁의 모델을 청국, 일본, 미국 등으로 삼으면서 그 성향에 따라 '친청', '친일', '친미'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는 '친일파'만이 역사적 과제를 외면한 세력으로 단죄될 수도 없고, 현재적 의미의 '친일파'=매국노로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압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친일'의 의미는 바뀌어 갔다. 다음 절에서 보듯이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을 배경으로 한 '삼국공영론' 등의 수용과정에서 이미 현재적 의미의 '친일'적 사고가 배태되고 있었고, 러일전쟁기에 다가가면서 이용구의 일진회와 같은 정치적으로도 완전한 친일파로 변신하는 집단도 출현하고 있다.

'삼국공영론(三國共榮論)'의 논리적 전환

1884년의 갑신정변 실패이후 김옥균 등을 후원하던 일본의 후쿠자와(福澤諭吉)는 1885년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했다. 청과 조선과 같은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하고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하자는 이 논리는 흔히 갑신정변 실패에 대한 좌절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청과 조선은 일본을 맹주로 그 지도 아래 문명화되어야 한다고 보고, 따라서 청과 조선에 대한 무력 침공까지 주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다루이(樽井藤吉)는 흥아론(興亞論)을 내세웠다. 후쿠자와가 철저히 서양근대문명의 사상과 가치관의 수용까지 주장하는데 반해, 다루이는 일본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문명만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달성하자는 입장이었다. 다루이의 흥아론은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인종주의적 의식을 깔고 있는데, 서양 대 동양, 백색인종 대 유색인종이라는 대립되는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백인의 침략에 동양이 단결해서 막아내야 하고, 일본과 조선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을 건설하고 이 대동국과 청이 연대해야 한다고 했다. 이 사상은 일본 우익의 '아시아주의'의 뿌리가 되고 후일 '한일합방론'도 이 논리를 모태로 한다.

그런데 이 아시아연대론의 입장에 선 논리가 독립협회이후의 단계에서 우리에게도 전파되고 있었다.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삼국공영론'이 그것이다.

……대한과 일본 그리고 청국은 다만 같이 한 아세아 속에서 살 뿐만이 아니라 종자가 같은 종자인 고로…… 서로 도와주며 아무쪼록 구라파 학문과 교육을 본받아 어서 동양삼국이 능히 구라파의 침입을 동심으로 막아야 동양이 구라파의 속지가 아니될 터인데 청국이 이 형편을 모르고 구습에 젖어…… 청국과 대한이 절단나는 날은 일본도 얼마 아니되야 구라파 힘에 못견딜 터이라({독립신문}, 1898년 4월 7일)

이 삼국공영론은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삼국의 맹주는 보다 문명화된 일본이다. 그러나 독립협회나 황성신문이 초기부터 일방적으로 친일 논리로 경도된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연대론을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에 대한 야욕을 경계하는 논조도 나오고 있었다.

……日本이 淸國으로 교전하여 一勝을 幸得한 후로 自滿의 心을 발하야 揭言하되 戰後經營 태반 성취하엿다 하나 我난 此를 成就하였다 확언키 어려운 것이 淸國은 東洋의 巨陸이라 지금 西勢東漸하난 日을 당하여 아무조록 淸國과 敦睦하야 勤勉開進할 方策을 曉及지 아니하고 怒鋒을 相加하여 비록 一島를 빼앗고 배상을 多取하엿으나 此로 인하야 천하의 怒眼을 開導하야 淸國一等要地가 다 西人의 囊으로 入하얏으니 然則淸國이 만일 瓜分하난 날이면 일본은 其高枕安臥할는지 ({황성신문}, 1900년 5월 23일)

위에서 인용된 기사에서 보듯이 일본의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열강의 중국영토 분할로 귀결되고 말았고 열강의 청국지배는 일본으로서도 좋은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황인종 형제의 모든 나라를 권고하고 인도하되 작은 이익을 탐치말며 작은 분에 충격치 말고 한 가지인 종자들을 서로 보호할 큰 계책을 세워 동양 큰판에 평화함을 유지케하는 하는 것이 그 하나님께 정하여 주신 직분의 당연한 의무라"({독립신문}, 1899년 11월 9일)고 하여 일본의 침략적 자세를 경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진 문명국인 일본이 청국과 조선과 같은 '隣家를 원조하여 二國의 開化에 협력'({황성신문}, 1900년 4월 12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초기의 삼국공영론은 일본맹주론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일본의 동아시아에서의 침략적 자세에 대해서는 일면 경계를 하고 있었다. 따라서 20세기에 들어오기 이전의 삼국공영론은 일본에 대해 맹목적 추수를 하는 러일전쟁단계와는 다르며 일본의 침략론인 아시아연대론도 보다 순수한 입장에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야욕에 대한 이같은 불철저한 인식은 러일전쟁기가 다가오면서 본격적 친일론으로 바뀌어갔다.

초기 삼국공영론은 서양열강에 대한 동양삼국을 대립적 구조로 내세우면서도 구체적 대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만주진출에 대한 경계가 표면화하면서 전쟁으로 러시아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나오고 그 전쟁은 일본 주도하의 것으로 보았다.

滿洲는 東亞의 門戶라서 만주를 잃게 된다면 우리 韓國은 위태로워질 것이며 中國은 분열될 것이니 한국이 위태롭고 中國이 분열되면 러시아가 반드시 東洋에 세력을 크게 키워 장차 일본열도를 병탄할 것이니 이는 滿洲一路가 러시아인의 日本倂呑에의 문을 열게 되어 일본의 안위존망이 또한 滿洲의 得失과 관련이 되니 일본은 부득블 一戰할 것이다({황성신문}, 1903년 10월 2일)

이같은 인식의 결과는 러일전쟁당시에 이르면 보다 친일적 자세로 나아가게 되는데 "지난 日淸戰爭때 일본이 우리 韓國獨立을 도와주는 것을 제일의무로 삼아 오늘에 이르도록 독립의 기초를 확고히 지킨 것은 모두 일본의 힘이니…… 러시아와 더불어 血戰하는 것도 목적은 또한 우리 韓國의 獨立을 굳건히 하며 강토의 보전을 위하여"({황성신문}, 1904년 3월 19일) 하는 것이라는 논리로까지 비약하게 되었던 것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한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는, 이같은 일본에 무비판적으로 경도된 논리는 러일전쟁이후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 역시 당연시 여기고 오히려 이를 內修自强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계몽운동기의 적극적 친일론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다.

일본의 문화정책과 유학생파견

일본은 강화도조약 체결직후인 1877년부터 조선내부에 일본에 대해 우호적 인사를 양성하기 위해 양반의 자제를 일본에 유학시키는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적극적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뒤 1, 2차에 걸쳐 수신사가 일본에 파견되면서 일본의 근대화과정을 직접 견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승려 이동인(李東仁)은 1880년 일본으로 밀항해 일본의 승려와 후쿠자와, 하나부사(花房義質)공사 등을 만나고 있었다. 이 해 2차 수신사가 일본에 왔을 때 이동인은 김굉집(김홍집)을 만나 적극적으로 유학생파견을 건의했다. 하나부사공사는 유학생 파견을 조선정부에 계속 건의하고 있었는데 그 실현은 1881년에 보게 되었다. 전년도에 수신사의 수원(隨員)이었던 별군관 임태경(林泰慶), 이원순(李元淳), 김재우(金在愚) 세 사람을 통역 박인순(朴仁淳)과 함께 일본에 파견하여 동(銅)제련과 피혁제조의 기술습득을 하나부사에게 의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부사의 유학생파견에 대한 적극적 자세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하나부사가 오사카(大阪府)의 지사에게 배려를 요청하는 선에서 끝나고 말았다. 이들을 유학생의 효시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기술연수의 수준이었고 학교교육을 받는 유학생은 아니었다.

명실상부한 유학생파견은 역시 1881년의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이 도일하면서 이루어졌다. 총 62명이 간 이 시찰단의 수원 중 유길준과 유정수(柳定秀)는 후쿠자와가 경영하던 경응의숙에, 윤치호는 나카무라(中村正直)이 경영하던 동인사(同人社)에, 김량한(金亮漢)은 조선소에 들어가 수학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 등은 공장에서의 기술습득이 아닌 직접 학교교육을 통해 근대적 학문과 어학을 배우게 한 것으로 본래적 의미의 최초의 유학생으로 친다.

또 이해 조병호(趙秉鎬)사절이 파견되었는데 수원이었던 장대용(張大鏞), 신복모(申福模), 이은돌(李銀乭) 등은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했다. 1882년 김옥균이 일본에 갔을 때도 수원 중 여러명의 유학생이 끼어 있었고, 임오군변이후 박영효도 10여명의 유학생을 동반했다. 1883년에도 김옥균은 수십명의 유학생을 경응의숙 입학시켰다. 1883년 신문간행을 위해 일본인을 초빙할 때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 14명 등 유학생 17명이 함께 귀국했고, 이들은 근대적 군인을 양성하기도 하고 1884년 갑신정변의 행동대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1883년 말에는 유학생수가 5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유학생 파견 비용은 일본에서 빌은 17만원의 차관에서 충당했다.

이처럼 갑신정변이전의 유학생은 일본측에서도 체계적 문화정책의 결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부사공사와 후쿠자와의 개인적 노력이 그 배후에 있다. 그래서 "문화정책의 수창자(首唱者)는 하나부사였고 실행자는 후쿠자와였다"는 평가까지 있다. 이 시기 일본유학생은 상당수가 갑신정변에 가담했고 정변의 실패로 이들의 대부분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했다.

갑신정변이후 중단되었던 유학생파견이 재개되는 것은 갑오개혁이 계기가 되었다. 1895년 200에 가까운 유학생이 일본으로 파견되어 경응의숙에 입학했다. 물론 1880년대 말부터 일본에 기술연수를 위해 파견된 경우도 있었다. 갑오개혁이전에 파견된 유학생은 대체로 제약, 조폐, 광산 등의 분야의 기술습득을 위한 소수의 인원이었다. 따라서 본격적 유학생 파견의 재개는 갑오개혁이후부터였고 1897년에는 64명이 성성학교(成城學校), 동경법학원, 동경공업학교 등에 입학했다. 육군사관학교에도 1896년 11명, 1898년 21명, 1902년에는 8명이 입학했다고 한다. 1904년에는 황실특파유학생 50명이 동경부립제일중학(東京府立第一中學), 순천중학(順天中學), 조도전(早稻田)실업학교 등에 입학했다. 동경부립중학에 입학한 인원 중 46명은 동맹휴학을 해 전원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후 16명이 복교되었는데 이 중 신규입학한 9명을 포함해 1907년 25명이 졸업하게 되었다. 동경부립중의 동맹휴학사건은 직접적으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따른 반일감정이 발단이었다고 한다.

유학생의 상당수는 귀국후 근대적 개혁기구의 실무를 맡아 대한제국시기의 근대화를 담당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는 1905년이후 친일파로서 일본의 한국침략에 일익이 되기도 했다. 반면 동경부립중학의 동맹휴학사건에서 보듯이 반일의 논리를 가진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유학생 파견을 통한 일본의 문화정책은 구조적으로 친일파를 양성하는 바탕이 되었고, 실제로 이들 중에서 친일파가 많이 나온 것도 사실이지만 을사보호조약이전의 시기까지의 '친일파'문제는 구조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정치적 선택의 문제로 보는 것이 역사적 실체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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