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제 3,4권

   

  삼국유사 제 3권

흥법(興法) 제 3 
 

순도조려(順道肇麗)
                                도공道公의 다음에 또한 법심法深, 의연義淵, 담엄曇嚴의 무리들이 서로 계승해서
                                불교佛敎를 일으켰으나 고전古傳에는 기록記錄이 없으므로 감히 그 사실을 순서에
                                넣어 편찬하지 못한다.  자세한 것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있다.)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 이렇게 말했다.  "소수림왕(小獸林王)이 즉위한 2년 임신(壬申; 372)은 곧 동진(東晉) 함안(咸安) 2년이며,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한 해이다.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시켜서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보내고(이때 부견符堅은 관중關中, 즉 장안長安에 도읍하고 있었다), 또 4년 갑술(甲戌; 374)에는 아도(阿道)가 동진(東晉)에서 왔다.  이듬해 을해(乙亥; 375) 2월에 초문사(肖門寺)를 세워 순도(順道)를 거기에 두고 또 이불난사(伊弗蘭寺)를 세워 아도가 있게 하니,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법이 일어난 시초이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순도와 아도가 북위(北魏)에서 왔다는 것은 잘못으로, 사실은 전진(前秦)에서 온 것이다.  또 초문사(肖門寺)는 지금의 흥국사(興國寺)이고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興福寺)라고 한 것도 역시 잘못이다.

상고하건대 고구려의 도읍은 안시성(安市城)이며, 이것을 혹은 안정홀(安丁忽)이라고도 하는데 요수(遼水) 북쪽에 있다.  요수의 다른 이름은 압록(鴨綠)인데 지금은 안민강(安民江)이라고 한다.  그러니 어찌 송경(松京) 흥국사(興國寺)의 이름이 여기에 있을 수 있으랴?

찬(讚)해 말한다. 

압록강에 봄 깊어 물빛은 곱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로이 조네.

갑자기 어디서 들리는 노 젓는 소리에 놀라니,

어느 곳 어선(漁船)인지 길손이 벌써 당도했네.

난타벽제(難타闢濟) 

<백제본기(百濟本記)>에 이렇게 말했다.  "제15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14대라 한 것은 잘못이다.) 침류왕(枕流王)이 즉위한 갑신(甲申; 384.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의 태원太元 9년)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에서 오자 그를 맞아서 궁중에 두고 예(禮)로 공경했다."  이듬해 을유(乙酉; 385)에 새 도읍인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세우고 도승(度僧) 열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百濟) 불법(佛法)의 시초이다.

또 아신왕(阿莘王)이 즉위한 대원(大元) 17년(392) 2월에 영을 내려 불법(佛法)을 숭상하고 믿어서 복(福)을 구하라고 했다.  마라난타(摩羅難陀)는 번역해서 동학(童學; 그의 이적異迹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이라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하늘의 조화는 옛날부터 아득한 것,

대체 잔재주로 솜씨부리기는 어려우리.

어른들은 스스로 노래와 춤을 가지고,

옆의 사람 끌어당겨 눈으로 보게 하네. 

아도기라(阿道基羅; 혹은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 한다) 

<신라본기(新羅本紀)> 제4권에 이렇게 말했다.  "제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중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오자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 혹은 모녹毛綠이라고도 씀)가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편안히 있게 했다." 이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의복과 향(香; 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梁나라에서 사자使者인 중 원표元表 편에 명단溟檀과 불상佛像을 보내 왔다고 했다)을 보내 왔는데 군신(君臣)들은 그 향의 이름과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두루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묻게 했다.  묵호자(墨胡子)가 이를 보고 말했다.  "이는 향이라는 것으로, 태우면 향기가 몹시 풍기는데, 이는 정성이 신성(神聖)한 곳에까지 이르는 때문입니다.  신성(神聖)이란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만일 이것을 태우고 축원(祝願)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눌지왕訥祗王은 진晉·송宋때 사람이다.  그런데 양梁에서 사신을 보냈다고 한 것은 잘못된 듯 싶다)  이때 왕녀(王女)의 병이 위중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축원하게 했더니 왕녀의 병이 나았다.  왕은 기뻐하여 예물을 후히 주었는데 갑자기 그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또 21대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毛禮)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그는 여기에서 몇 해를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講讀)하니 간혹 신봉(信奉)하는 사람이 생겼다(주注에 말하기를 "본비本碑와 모든 전기傳記와는 사실이 다르다"고 했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천축西天竺 사람이라고 했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했다).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이니,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曹魏) 사람 아(我; 아我는 성姓임)굴마(굴摩)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간통하고 돌아갔는데 이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는 그를 출가(出家)시켰는데, 나이 16세에 위(魏)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이 강독하는 자리에 나가서 불법을 배웠다.  19세가 되자 또 돌아와 어머니께 뵙자 어머니가 말했다.  "이 고구려는 지금까지도 불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3,000여 달이 되면 계림(鷄林)에서 성왕(聖王)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 안에 일곱 곳의 절터가 있으니, 하나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 지금의 흥윤사興輪寺이다.  금교金橋는 서천교西天橋로서 우리 속명에는 솔다리[松橋]이다.   절은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처음 그 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법흥왕法興王 정미丁未(527)에 이르러 공사를 시작하며 을묘乙卯년에 크게 공사를 일으키고 진흥왕眞興王 때에 이루어졌다)이요, 둘은 삼천(三川)의 갈래(지금의 영흥사永興寺로, 흥륜사興輪寺와 한때에 세워졌다)요, 셋은 용궁(龍宮)의 남쪽(지금의 황룡사皇龍寺다.  진흥왕眞興王 계유癸酉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넷은 용궁(龍宮)의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다.  선덕왕善德王 갑오甲午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다섯은 사천(沙川)의 끝(지금의 영묘사靈妙寺다.  선덕왕善德王 을미년乙未年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여섯은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天王寺.  문무왕文武王 기묘년己卯年에 공사가 시작됐다)이요, 일곱은 서청전(서請田;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이것은 모두 전불(前佛) 때의 절터이니 불법이 앞으로 길이 전해질 곳이다.  너는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응당 네가 이 땅의 불교의 개조(開祖)가 될 것이다."  아도(我道)는 이 가르침을 듣고 계림(鷄林)으로 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살았는데 곧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다, 때는 미추왕(未鄒王) 즉위 2년 계미(癸未; 263)였다.  그가 대궐로 들어가 불법(佛法) 행하기를 청하니 당시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어서 이를 꺼리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 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의 집(록綠은 예禮와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  <고기古記>에 보면, 법사法師가 처음 모록毛祿의 집에 오니 그때 천지가 진동했다.  당시 사람들은 중이라는 명칭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아두삼마阿頭삼마라고 불렀다.  삼마삼마는 우리말로 중이니 사미沙彌란 말과 같다)으로 도망해 가서 숨었다.  미추왕(未鄒王) 3년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났는데 무당과 의원의 효험도 없으므로 칙사(勅使)를 내어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다.  법사(法師)가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드디어 그 병을 고치니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소원을 묻자 법사(法師)는 대답했다.  "빈도(貧道)에게는 아무 구하는 일이 없고, 다만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워서 크게 불교를 일으켜서 국가의 복을 빌기를 바랄 뿐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령했다.  그때의 풍속은 질박하고 검소하여 법사는 따로 지붕을 덮고 여기에 살면서 강연(講演)하니, 이때 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지므로 그 절을 흥륜사(興輪寺)라고 했다.  모록(毛祿)의 누이동생의 이름은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와서 중이 되어 역시 삼천(三川) 갈래에 절을 세우고 살았으니 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고 했다.  얼마 안 되어 미추왕(未鄒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해치려 하므로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서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교도 또한 폐해졌다.  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514)에 왕위에 올라 불교를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癸未; 263)에서 252년이나 된다.  고도령이 말한 3,000여 달이 맞았다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본기(本記)>와 본비(本碑)의 두 가지 설(設)이 서로 어긋나서 같지 않은 것이 이와 같다.  내가 시험삼아 의론하자면 이러하다.  양(梁)과 당(唐)의 두 승전(僧傳)과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모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불교의 시작이 진(晉)나라 말년인 태원(太元) 연간이라 했으니, 순도(順道)·아도(我道) 두 법사가 소수림왕(小獸林王) 갑술(甲戌; 374)에 고구려에 온 것은 분명하여 이 전기(傳記)는 잘못되지 않았다.  만일 비처왕(毗處王) 때에 처음 신라에 왔다면, 그것은 아도가 고구려에 100여 년이나 머물러 있다가 온 것이 되니 아무리 대성(大聖)의 행동이나 동작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는 하지만 꼭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신라에서 불교를 시작한 것이 이처럼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만일 미추왕 때에 있었다고 하면 이것은 고구려에 온 갑술(甲戌; 374)년보다 100여 년이나 앞서는데 이때는 계림(鷄林)에 아직 문물이나 예교(禮敎)가 있지 않았고, 나라 이름조차도 아직 정하지 않았을 때이니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법 믿기를 청했겠는가.  또 고구려에도 들르지 않고 건너뛰어 신라로 왔다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가령 잠시 일어났다가 폐해졌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중간에 적막하게 아무 소문도 없었으며, 향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겠는가?  연대의 하나는 어찌 그리 뒤졌으며, 하나는 어찌 그리 앞섰단 말인가

생각건대 불교가 동방으로 점점 번지던 형세는 필경 고구려와 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그쳤을 것이다.  곧 눌지왕(訥祗王)과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시대가 서로 가까우니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로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시대였을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고친 것도 모두 아도가 한 일이라고 전하니 소위 묵호(墨胡)란 것도 참 이름이 아니요 그저 그를 지목해서 부른 말일 것이다.  이것은 양(梁)나라 사람이 달마(達磨)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 하고, 진(晉)나라에서 중 도안(道安)을 조롱하여 칠도인(漆道人)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니, 아도는 높은 행동으로 세상을 피하면서 자기 성명(姓名)을 말하지 않은 때문이다.  대개 나라 사람들은 들은 바에 따라서 묵호니 아도니 하는 두 가지 이름으로 두 사람을 만들어서 전했을 것이다.  더구나 아도는 겉모습이 묵호와 같다고 하니 이 말로도 한 사람임을 알 수가 있다.  도령(道寧)이 일곱 곳을 차례로 들어 말한 것은 바로 절을 처음 세운 선후를 가지고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전기(傳記)는 잃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는 사천(沙川)의 끝을 다섯 번째에 실은 것이다.  또 3,000여 달이란 것도 꼭 다 믿을 수는 없으나 대개 눌지왕(訥祗王)때부터 정미(丁未; 527)년 까지는 무려 100여 년이나 되니, 만일 1,000여 달이라면 거의 비슷하다.  성(姓)을 아(我)라 하고 외자 이름을 한 것은 거짓이 아닌가 의심스러우나 자세하지는 않다.

또 원위(元魏)의 중 담시(曇始; 혹은 혜시惠始)의 전기(傳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담시(曇始)는 관중(關中)사람이다.  출가(出家)한 뒤에 이상한 일이 많았다.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9년(384) 말에 경(經)과 율(律) 수십부(十部)를 가지고 요동(遼東)으로 가서 불교를 선전했다.  여기에서 삼승(三乘)을 가르쳐 즉시 불계(佛戒)에 귀의(歸依)했으니 이것이 대개 고구려에서 불교를 들은 시초였다.  의희(義熙) 초년(405)에 담시(曇始)는 다시 관중(關中)으로 돌아와 삼보(三輔)에 불교를 전파시켰다.  그는 발이 얼굴보다 희었고, 아무리 진흙물을 건너도 더러워지거나 젖는 일이 없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한다.  동진(東晉) 말년에 북방(北方)의 흉노(匈奴)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관중(關中)을 쳐서 빼앗고 죽인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이 때 담시(曇始)도 역시 해를 입었으나 칼이 그를 상하지 못하자 발발(勃勃)은 탄식하고, 중들을 널리 용서해서 석방하고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이에 담시(曇始)는 비밀히 산택(山澤)으로 도망하여 두타(頭타)의 행실을 닦았다.  탁발도(拓拔燾)가 다시 장안(長安)을 쳐서 이기고 그 위세를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에까지 떨쳤다.  이때 단릉(단陵)에 최호(崔皓)란 사람이 있어 좌도(左道)를 조금 익혀서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했다.  지위가 위조(僞朝)의 재상에까지 올라서 탁발도의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천사(天師) 구겸지(寇謙之)와 함께 탁발도를 달래어 "불교는 아무런 이익이 없고 백성들에게 해롭기만 합니다"하고 이에 불교를 폐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태평(太平) 말년에 담시는 비로소 탁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이에 정월 초하룻날 갑자기 지팡이를 짚고 대궐 문에 이르자, 도(燾)는 이 말을 듣고 베어 죽이라고 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베어도 상하지 않으므로 도가 직접 베었지만 역시 상하지 않는다.  이에 북원(北園)에서 기르던 범에게 주었으나 범도 역시 감히 가까이하지 못한다.  도는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크게 나더니 드디어 역질(疫疾)에 걸리자 최호(崔皓)와 구겸지(寇謙之) 두 사람도 서로 잇달아 나쁜 병에 걸렸다.  도는 이 허물이 그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해서, 이에 두 집 가족을 죽여 없애고 나라 안에 선언해서 불교를 크게 퍼뜨리게 했다.  담시는 그 후 죽은 곳을 알 수가 없다.

논평하여 말한다.  담시는 태원(太元) 말년에 해동(海東)에 왔다가 의희(義熙) 초년에 관중(關中)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여기에 10여 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는데 어찌 동국역사(東國歷史)에는 이런 기록이 없단 말인가.  담시는 실로 괴이하고 이상한 일이 많아 헤아릴 수가 없는 사람이며, 아도·묵호·난타와 연대나 사적이 모두 같으니 필경 이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그의 변명(變名)인 듯 싶다.

찬(讚)해 말한다. 

금교(金橋)에 눈이 쌓여 얼고 풀리지 않으니,

계림(鷄林)의 봄빛 아직도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네,

예쁘다.  봄의 신(神)은 재주도 많아서,

먼저 모랑(毛郞)의 집 매화(梅花)나무에 꽃이 피게 했네. 

원종흥법(原宗興法; 눌지왕訥祗王 때로부터 100여 년이 된다)과 염촉멸신(염촉滅身)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보면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즉위한 14년(527)에 신하 이차돈(異次頓)이 불법(佛法)을 위해서 자기 몸을 죽이니 곧 소량(蕭梁) 보통(普通) 8년 정미(丁未; 527)에 서천축(西天竺)의 달마대사(達磨大師)가 금릉(金陵)에 온 해다.  이 해에 낭지법사(朗智法師)도 또한 영취산(靈鷲山)에 살면서 법장(法場)을 열었으니 불교의 흥하고 쇠하는 것도 반드시 원근(遠近)에서 한 시기에 서로 감응한다는 것을 이 일로 해서 알 수가 있다.

원화(元和) 연간에 남간사(南澗寺)의 중 일념(一念)이 촉향분례불결사문(촉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 이 사실이 자세히 실려 있으니 그 대략은 이러하다.  예전에 법흥대왕이 자극전(紫極殿)에서 왕위에 올랐을 때에 동쪽 지역을 살펴보고 말했다.  "예전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감응되어 불법이 동쪽으로 흘러들어왔다.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백성들을 위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마련하려 한다."  이에 조신들(향전鄕傳에서는 공목알공工目謁恭 등이라 했다.)은 왕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大義)만을 지켜 절을 세우겠다는 신령스러운 생각에 따르지 않자 대왕은 탄식했다.  "아아!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왕업(王業)을 이어받아 위로는 음양(陰陽)의 조화(造化)가 모자라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즐겨하는 일이 없어서 정사를 닦는 여가에 불교에 마음을 두었으니 그 누가 나의 일을 함께 할 것인가."  이때 소신(小臣)이 있었는데 성(姓)은 박(朴)이요, 자(子)는 염촉(염촉; 혹은 이차異次라 하고 또는 이처伊處라고도 하니 방음方音이 다르기 때문이며, 한어漢語로 번역하여 염염이라 한다.  촉촉·돈頓·도道·도覩·독獨 등은 모두 글쓰는 사람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곧 조사助辭이다.  이제 위 글자는 번역하고 아래 글자는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촉염촉이라 하고, 또는 염도염覩 등으로 쓴 것이다)인데, 그의 아버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조부(祖父)는 아진(阿珍) 종(宗)으로 습보(習寶) 갈문왕(葛文王)의 아들이다(신라의 관작官爵은 도합 17등급等級인데 그 넷째를 파진찬波珍飡, 또는 아진찬阿珍飡이라고도 한다.  종宗은 그 이름이며, 습보習寶도 역시 이름이다.  신라 사람은 추봉追封한 왕을 모두 갈문왕葛文王이라고 했으니 그 까닭은 사신史臣도 역시 자세히 모른다고 했다. 또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를 상고해 보면, 사인舍人은 그때 나이 26세였고, 아버지는 길승吉升, 조부는 공한功漢, 증조曾祖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했다).

그는 죽백(竹栢)과 같은 바탕에 수경(水鏡)과 같은 뜻을 품었으며, 적선(積善)한 집의 증손(曾孫)으로서 궁내(宮內)의 조아(爪牙)가 되기를 바랐고, 성조(聖朝)의 충신으로서 하청(河淸)에 등시(登侍)할 것을 기대했다.  그때 나이 22세로서 사인(舍人; 신라 관작官爵에 대사大舍·소사小舍 등이 있으니 대개 하사下士의 등급이다)의 직책에 있었는데, 왕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그 심정(心情)을 눈치채고 아뢰었다.  "신이 듣자오니 옛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도 계교를 물었다 하오니 신은 큰 죄를 무릅쓰고 아룁니다"하니 사인은 말한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신하로서의 큰 절개이옵고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거짓으로 말씀을 전했다고 해서 신의 목을 베시면 만민이 굴복하여 감히 왕의 말씀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 장차 새 한 마리를 살리려했고 피를 뿌려 목숨을 끊어서 일곱 마리 짐승을 스스로 불쌍히 여겼다.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인데 어찌 죄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너는 비록 공덕을 남기려 하지만 죽음을 피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사인(舍人)이 말한다.  "일체(一切)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신명(神命)에 지나지 않으며,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불교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은 다시 성행하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왕은 말한다.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도 하늘을 뚫을 듯한 마음이 있고 홍곡(鴻鵠)의 새끼는 나면서부터 물결을 깨칠 기세를 품었다 하니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가위 대사(大士)의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왕은 일부러 위의(威儀)를 정제하고 동서쪽에는 풍도(風刀)를, 남북쪽에는 상장(霜仗)을 벌여 놓고 여러 신하를 불러 물었다.  "경(卿)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이를 지체시키지 않았느냐."(향전鄕傳에서는 염촉염촉이 거짓 왕명王命으로 신하들에게 절을 세우라는 뜻을 전하니 여러 신하들이 와서 간諫하자 왕王은 이것을 염촉염촉에게 책임지워 노하고 왕명王命을 거짓 전했다 하여 형刑에 처했다고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벌벌 떨고 두려워하여 황망스레 맹세하고 손으로 동쪽과 서쪽을 가리키니 왕은 사인을 불러 꾸짖었다.  사인은 얼굴빛이 변하여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왕이 크게 노하여 이를 베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니 유사(有司)는 그를 묶어 관아(官衙)로 데리고 갔다.  사인은 맹세를 했다.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으며(향전鄕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사인舍人이 맹세하기를,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시므로 내가 신명身命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 인연을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려 두루 백성들에게 보여 주십시오"했다.  이에 그의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金剛山 마루에 떨어졌다고 한다), 하늘은 사방이 어두워 저녁의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이 곤룡포(袞龍袍)를 적시고 재상들은 근심하여 진땀이 선면(蟬冕)에까지 흘렀다.  감천(甘泉)이 갑자기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고 곧은 나무가 저절로 부러져서 원숭이들이 떼지어 울었다.  춘궁(春宮)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놀던 동무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돌아보고 월정(月庭)에서 소매를 마주하던 친구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이별을 애석해 하여 관(棺)을 쳐다보고 우는 소리는 마치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그들은 모두 말했다.  "개자추(介子推)가 다리의 살을 벤 일도 염촉(염촉)의 고절(苦節)에 비할 수 없으며, 홍연(弘演)이 배를 가른 일도 어찌 그의 장열(壯烈)함에 비할 수 있으랴.  이것은 곧 대왕의 신력(信力)을 붙들어서 아도(阿道)의 본심을 성취시킨 것이니 참으로 성자(聖者)로다."  드디어 북산(北山) 서쪽 고개(곧 금강산金剛山이다.  전傳에는, 머리가 날아가서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장사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에 장사지냈다.  나인(內人)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땅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다.  이로부터 집집마다 부처를 받들면 반드시 대대로 영화를 얻게 되고, 사람마다 불도(佛道)를 행하면 이내 불교의 이익을 얻게 되었다.

진흥대왕(眞興大王)이 즉위한 5년 갑자(甲子; 544)에 대흥륜사(大興輪寺)를 세웠다(<국사國史>와 향전鄕傳을 상고하면, 실은 법흥왕法興王 14년 정미丁未(527)에 처음으로 터를 닦고 22년 을묘乙卯(535)에 천경림天鏡林의 나무를 크게 베어 비로소 역사를 시작했는데 기둥과 들보에 쓸 재목은 모두 이 숲에서 넉넉히 베어 썼으며, 주춧돌과 석감石龕도 모두 갖추었다.  진흥왕眞興王 5년 갑자甲子에 이르러 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갑자甲子라고 한 것이다.  <승전僧傳>에 7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대청(大淸) 초년(547)에 양(梁)나라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舍利)를 가져오고 천가(天嘉) 6년(565)에 진(陣)나라 사신 유사(劉思)가 중 명관(明觀)과 함께 불경(佛經)을 받들고 오니 절과 절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과 탑이 기러기처럼 줄을 지었다.  법당(法幢)을 세우고 범종(梵鐘)도 달아 용상(龍象)의 중들은 천하의 복전(福田)이 되고, 대승(大乘)·소승(小乘)의 불법은 서울의 자운(慈雲)이 되었다.  다른 지방의 보살(菩薩)이 세상에 출현하고(이것은 분황사芬皇寺의 진나陣那와 부석사浮石寺의 보개寶蓋, 그리고 낙산사落山寺의 오대五臺 등을 말한다)  서역(西域)의 이름난 중들이 이 땅에 오니 이 때문에 삼한(三韓)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사해(四海)를 통틀어 한 집이 되었다.  때문에 덕명(德名)은 천구(天구)의 나무에 쓰고 신적(神迹)은 성하(星河)의 물에 그림자를 비추니 어찌 세 성인(聖人)의 위덕(威德)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랴(여기서 세 성인이란 아도阿道·법흥法興·염촉염촉을 말한 것).  그 뒤에 국통(國統) 혜륭(惠隆)과 법주(法主) 효원(孝圓)·김상랑(金相郞), 대통(大統) 녹풍(鹿風), 대서성(大書省) 진노(眞怒), 파진손(波珍飡) 김의(金억) 등이 사인의 옛 무덤을 고치고 큰 비(碑)를 세웠다.

원화(元和) 12년 정유(丁酉; 817) 8월 5일은 바로 제 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9년이니, 흥륜사(興輪寺)의 영수선사(永秀禪師; 이때 유가瑜伽의 여러 중을 모두 선사禪師라고 했다)는 이 무덤에 예불(禮佛)할 향도(香徒)들을 모아 매월 5일에는 영혼의 묘원(妙願)을 위해서 단(壇)을 쌓고 법회(法會)를 열었다.

또한 향전(鄕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시골 노인들이 매양 그의 제삿날을 당하면 흥륜사(興輪寺)에 모임을 가졌다."  즉 이달 초닷새는 바로 사인(舍人)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佛法)에 순응한 날이다.  아아!  이런 임금이 없었으면 이런 신하가 없었을 것이요, 이런 신하가 없었으면 이러한 공덕(功德)이 없었을 것이니, 마치 유비(劉備)란 물고기가 제갈량(諸葛亮)이란 물을 만난 것과 같으며, 구름과 용(龍)이 서로 감응해 모인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법흥왕(法興王)은 이미 폐해진 불교를 일으켜 절을 세우고 절이 완공되자 면류관을 벗고 가사(袈裟)를 입었으며 궁중에 있는 친척들을 절의 노예로 쓰게 하여(절의 종은 지금까지도 왕손王孫이라고 한다.  그 뒤 태종왕太宗王 때에 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佛法을 믿어 화보花寶· 연보蓮寶 두 딸을 바쳐 이 절의 종으로 하였으며, 또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을 데려다가 절의 노예로 삼았으니 이 두 가족의 후손은 지금까지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 절의 주지(住持)가 되어 몸소 넓게 교화를 폈다.

진흥왕은 그 아버지의 덕을 계승한 성군(聖君)으로 임금의 직책을 이어받아 임금의 자리에 처하여 위엄으로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호령이 갖추어져서 이 절에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전왕(前王) 법흥왕의 성은 김씨(金氏)요, 출가한 뒤의 이름은 법운(法雲)이며 자(字)는 법공(法空)이다(<승전僧傳>과 여러 설設에 보면 왕비도 출가出家하여 이름을 법운法雲이라 했고, 진흥왕眞興王도 법운法雲이라 했으며, 진흥왕비眞興王妃도 법운法雲이라고 했다니 의심스럽고 혼동된 것이 퍽 많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보면 법흥왕의 성은 모(募) 이름은 진(秦)이라 했다.  처음 공사를 시작했던 을묘(乙卯)년에 왕비도 역시 영흥사(永興寺)를 세우고 모록(毛祿)의 누이동생인 사씨(史氏)의 유풍(遺風)을 사모해서 법흥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묘법(妙法)이라 했으며 역시 영흥사에 살다가 여러 해 뒤에 죽었다.  <국사(國史)>에는 건복(建福)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塑像)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되지 않아 진흥왕비인 비구니(比丘尼)가 죽었다고 했다.  상고하건대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요, 왕비 사도부인(思刀夫人) 박씨(朴氏)는 모량리(牟梁里) 영실각간(英失角干)의 딸로서,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나 영흥사를 세운 주인은 아니다.  그러면 필경 진자(眞字)를 마땅히 법자(法字)로 고친다면 이것은 법흥왕의 비(妃) 파조부인(巴조夫人)이 비구니가 되었다가 죽은 것을 가리킨 것이니, 이는 그가 절을 이룩하고 불상(佛像)을 세운 주인이기 때문이다.

법흥·진흥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것을 사관(史官)이 쓰지 않은 것은 세상을 경영하는 교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또 대통(大通) 원년 정미(丁未)에는 양(梁)의 무제(武帝)를 위하여 웅천주(熊天州)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고 했다(웅천熊天은 곧 공주公州이니, 그 때는 신라에 소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미년丁未年의 일은 아닐 것으로, 중대통中大通 원년元年 기유己酉(529)에 세운 것이다.  흥륜사興輪寺를 처음 세우던 정미년丁未年에는 다른 군郡에 절을 세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성인(聖人)의 지혜는 원래 만세(萬世)를 꾀하나니,

구구한 여론(輿論)은 조금도 따질 것 없네.

법륜(法輪)이 풀려 금륜(金輪)을 쫓아 구르니,

요순 세월 바야흐로 불교로 해서 이루어지네.

이것은 원종(原宗)을 위한 것이다. 

의(義)에 쫓아 생명 가볍게 하니 놀라운 일인데,

천화(天花)의 흰 젖의 이적(異蹟) 다시 다정해라.

이윽고 한 칼에 몸은 비록 죽었지만,

절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서울을 뒤흔드네. 

이것은 염촉(염촉)을 위한 것이다.

 법왕금살(法王禁殺) 

백제 제 29대 법왕(法王)의 이름은 선(宣)인데 효순(孝順)이라고도 한다.  개황(開皇) 10년 기미(己未; 599)에 즉위하였다.  이해 겨울에 조서를 내려 살생(殺生)을 금지시키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나 새매 따위를 놓아주고 또 물고기 잡는 기구를 불살라서 일체 금지시켰다.  이듬해 경신(庚申)에 30명의 도승(度僧)을 두고 당시 서울인 사차성(泗차城; 지금의 부여夫餘)에 왕흥사(王興寺)를 세우려고 겨우 터를 닦다가 죽었다.  무왕(武王)이 왕위를 계승해서 아버지가 터를 닦은 것을 아들이 일으켜 수기(數紀)를 지내서 완성하니 그 절 이름도 역시 미륵사(彌勒寺)다.  산을 등지고 물에 임했으며, 화목(花木)이 수려하여 사시(四時)의 아름다운 경치를 갖추었다.  왕은 항상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가서 그 경치가 장엄하고 고운 것을 구경했다(<고기古記>에 실려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무왕武王은 바로 가난한 어머니가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낳은 이로,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東으로서, 즉위한 뒤에 시호諡號를 무왕武王이라 했다. 이 절은 처음 왕비王妃와 함께 이룩한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너그러운 명으로 짐승 보호함은 그 은혜 천구(千丘)에 미치고,

은택(恩澤)이 돼지와 물고기에게까지 흡족하니 어짊이 온 세상에 넘치네.

성군(聖君)이 갑자기 돌아감을 말하지 말라.

상방(上方) 도솔(兜率)에는 이제 바로 꽃다운 봄이리.

 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 말기 무덕(武德)·정관(貞觀) 연간에 나라 사람들은 다투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신봉했다.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이 말을 듣고 도사(道士)를 시켜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또 도덕경(道德經)을 강술(講述)케 하여 왕이 백성들과 함께 들으니 곧 제 27대 영류왕(榮留王) 즉위 7년 갑신(甲申; 624)이었다.  이듬해에 고구려에서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배울 것을 청하자 당나라 황제(皇帝; 고조高祖를 말함)는 이를 허락했다.

그 뒤에 보장왕(寶藏王)이 즉위하자(정관貞觀 16년 임인壬寅; 642) 또한 유(儒)·불(佛)·도(道)의 세 교(敎)를 모두 일으키려 했다.  이때 왕의 사랑을 받던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아뢰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다같이 성하게 일어나지만 도교는 그렇지 못하오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도교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이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도교가 불교와 맞서서 나라의 운수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해 여러 번 간했지만 왕은 듣지 않으므로 이에 신력(神力)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에 있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全州)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 가서 살았으니 곧 영휘(英徽) 원년(元年) 경술(庚戌; 650) 6월이었다(또 본전本傳에는, 건봉乾封 2년年 정묘丁卯(667) 3월月 3일日의 일이라 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나라가 망했다(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668)에 나라가 망했으니 그 사이를 따지면 경술년(庚戌年)의 19년 후가 된다).  지금의 경복사(景福寺)에 날아온 방장(方丈)이 바로 이것이라 한다(이상은 <국사國史>에 있는말 이다).  진락공(眞樂公)은 그를 위해 시(詩)를 지어 당(唐)에 남겨 두었고, 문렬공(文烈公)은 그의 전기를 저술하여 세상에 전했다.

또 당서(唐書)를 상고하면 이보다 앞서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비장(裨將) 양명(羊皿)이란 자가 있어서 전쟁에 불리하여 장차 죽게 되었을 때 맹세했다.  "내 반드시 고구려의 총신(寵臣)이 되어 저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개씨(蓋氏)가 정권(政權)을 마음대로 하게 되자 개(蓋)로 성씨를 삼았으니 곧 양명의 응(應)함이었다.

또 <고구려고기(高句麗古記)>에 이렇게 말한다.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대업(大業) 8년 임신(壬申; 612)에 3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왔으며, 10년 갑술(甲戌; 614) 10월에 고구려왕(高句麗王; 그때는 제 26대 영양왕拏陽王이 즉위한 25년이다)이 표문(表文)을 올려 항복을 청할 때 한 사람이 비밀히 소노(小弩)를 품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진 사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 안에 들어갔다.  양제(煬帝)가 표문(表文)을 들고 읽는데 소노(小弩)를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혔다.  양제가 즉시 군사를 돌리려 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주(君主)가 되어 작은 나라를 친정(親征)하여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萬代)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때 우상(右相) 양명(羊皿)이 아뢴다.  "신이 죽으면 고구려의 대신(大臣)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帝王)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양제가 죽은 뒤에 그는 과연 고구려에 태어났다.  나이 15세에 총명하고 신기한 무용(武勇)이 있었다.  그때 무양왕(武陽王; <國史국사>에 영류왕(榮留王)의 이름은 건무建武, 혹은 건성建成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무양왕武陽王이라 했으니 자세치 못하다)이 그의 어질다는 말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姓)을 개(蓋)라 하고 이름을 김(金)이라 했으며 지위가 소문(蘇文)에까지 이르니 바로 시중(侍中)의 벼슬이다(<당서唐書>에는 개소문蓋蘇文이 자칭 막이지莫離支라고 했으니 당唐나라의 중서령中書令과 같은 것이라 했다.  또 <신지비사神誌秘詞>의 서문序文을 보면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序文을 쓰고 또 주注를 달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소문蘇文은 곧 직명職名으로서 문증文證이 있다.  전傳에는, 문인文人 소영홍蘇英弘이 서문序文을 썼다 했다.  어느 것이 옳은지 자세치 못하다).  개금(盖金)이 아뢰었다.  "솥에는 세 발이 있고, 나라에는 세 가지 교(敎)가 있는 법입니다.  신이 보기에 이 나라 안에는 오직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로운 것입니다."  왕은 옳게 여겨 당나라에 아뢰어 도교를 청하니 이에 태종(太宗)이 서달(敍(叔)達) 등 도사(道士) 8명을 보내주었다(<국사國史>에는 무덕武德 8년 을유乙酉(625)에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를 청했더니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이를 허락했다고 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양혈羊血이 갑술甲戌년(614)에 죽어서 이 고구려에 태어났다면 나이 겨우 10여 세에 총재寵宰가 되고 왕을 달래어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어 도교道敎를 청했다 하니 그 연월일年月日에 필경 한가지 잘못된 곳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한다).  왕이 기뻐하여 불사(佛寺)를 도관(道館)으로 만들고 도사(道士)를 존경하여 유사(儒士) 위에 앉게 했다.  도사들은 국내의 이름난 산천을 돌아다니며 이를 진압시키는데, 옛 평양성(平壤城)의 지세(地勢)가 신월성(新月城)이라 하여 도사들이 주문(呪文)을 읽어 남하(南河)의 용(龍)에게 명령해서 만월성(滿月城)을 더 쌓아서 용언성(龍堰城)이라 했으며, 참기(讖記)를 지어 용언도(龍堰堵), 또는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 했다.  여기에 혹 영석(靈石; 속언俗言에는 도제암都帝암이라 하고, 또 조천석朝天石이라고 하니 대개 옛날에 성제聖帝가 이 돌을 타고 상제上帝에게 올라가 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을 파서 깨뜨리기도 했다.

개금(盖金)은 또 왕에게 아뢰어 동북과 서남쪽에 긴 성을 쌓게 했다.  이때 남자들은 부역에 나가고 여자들이 농사를 지었는데, 그 역사는 16년만에 끝이 났다.  보장왕(寶藏王)때에 이르러 당나라 태종(太宗)이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나 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당나라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668)에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 대장군(大將軍) 이적(李勣)과 신라 김인문(金仁問) 등이 고구려를 쳐서 나라를 멸망시켜 왕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돌아가니 보장왕의 서자(庶子)가 4,000여 가구를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다(<국사國史>와 조금 다르기에 여기에 모두 싣는다).  대안(大安) 8년 신미(辛未; 1092)에 고려의 우세승통(祐世僧統)이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의 비래방장(飛來方丈)에 가서 보덕성사(普德聖師)의 영정(影幀)에 예를 갖추고 시(詩)를 지었다. 

열반(涅槃)의 평등한 가르침은,

우리 스승에게서 전해졌다고 하네.

애석하게도 승방(僧房)에 날아온 뒤에,

동명왕(東明王)의 옛 나라 위태로웠네. 

그 발문(跋文)에는 이렇게 썼다.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혹해서 불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보덕법사(普德法師)는 이에 승방(僧房)을 날려서 남쪽 이산으로 옮겨 놓았다.  그 후에 신인(神人)이 고구려 마령(馬嶺)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나라가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것은 모두 <국사(國史)>와 같고, 그 나머지는 본전(本傳)과 <승전(僧傳)>에 모두 기록되어있다.  보덕법사에게는 11명의 높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에 무상화상(無上和尙)은 제자 김취(金趣) 등과 함께 금동사(金洞寺)를 세웠고, 적멸(寂滅)·의융(義融) 두 법사는 진구사(珍丘寺)를 세웠고,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세웠고, 일승(一乘)은 심정(心正)·대원(大原) 등과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세웠고, 수정(水淨)은 유마사(維摩寺)를 세웠고, 사대(四大)는 계육(契育) 등과 함께 중대사(中臺寺)를 세웠고, 개원화상(開原和尙)은 개원사(開原寺)를 세웠고,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역시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本傳)과 같다. 

찬(讚)해 말한다. 

불교는 넓어서 바다와 같이 끝이 없어서,

백천(百川)의 유교(儒敎)와 도교(道敎)를 모두 받아들이네.

가소롭다.  저 여왕(麗王)은 웅덩이를 막고,

바다로 와룡(臥龍)이 옮겨가는 것 알지 못하네.

동경흥륜사(東京興輪寺) 금당십성(金堂十聖) 

동쪽 벽에 앉아서 서쪽으로 향한 이상(泥像)은 아도(我道)·염촉(염촉)·혜숙(惠宿)·안함(安含)·의상(義湘)이다.  서쪽 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한 이상(泥像)은 표훈(表訓)·사파(蛇巴)·원효(元曉)·혜공(惠空)·자장(慈藏)이다. 

 


탑상(塔像) 제 4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그리고 여러 사람의 전기에는 모두 이렇게 말했다.  "신라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으니, 이것은 곧 전불(前佛) 때의 절터이며, 지금 황룡사(皇龍寺) 터는 곧 일곱 절의 하나이다."

<국사(國史)>를 상고하면,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開國) 3년 계유(癸酉; 553) 2월에 동쪽에 신궁(新宮)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황룡(皇(黃)龍)이 나타났으므로 왕은 이것을 의심해서, 고쳐서 황룡사(皇(黃)龍寺)라 했다.  연좌석은 불전(佛殿) 후면(後面)에 있었다.  일찍이 한 번 본 일이 있는데 돌의 높이는 5, 6척이나 되었으나 그 둘레는 겨우 서 발밖에 되지 않았으며 우뚝하게 서 있고 그 위는 편편했다.  진흥왕(眞興王)이 절을 세운 이후로 두 번이나 화재를 겪었으므로 돌이 갈라진 곳이 있다.  그래서 절의 중이 여기에 쇠를 붙여서 보호하게 한다.

여기에 찬(讚)해 말한다. 

불교가 침체함이 얼마인지 기억할 수 없는데,

오직 연좌석(宴坐石)만이 그대로 남아 있네.

상전(桑田)이 변해 몇 번이나 창해(滄海)가 되었는가

아깝게도 우뚝한 채 아무 데로도 옮기지 않았네. 

이윽고 몽고(蒙古)의 큰 병란 이후에 불전(佛殿)과 탑은 모두 불타 버렸다.  그래서 이 돌도 역시 흙에 파묻혀서 겨우 지면(地面)과 같이 편편해진 것이다.

<아함경(阿含經)>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가섭불(迦葉佛)은 바로 현겁(賢劫)의 세 번째 부처다.  그는 사람의 나이로 쳐서 2만 세 때에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여기에 의거해서 증감법(增減法)으로 계산한다면 언제나 성겁(成劫)의 시초에는 모두 무량세(無量歲)를 누렸다.  이것이 점점 감해져서 8만 세에 이르면 그때가 바로 주겁(住劫)의 시초가 된다.  이때부터 또 100년마다 1 세씩 감하여 10 세가 되면 일감(一減)이 되고 또 증가하여 사람의 나이 8만 세가 되면 일증(一增)이 된다.  이렇게 해서 20번 감하고 20번 더하면 한 주겁(住劫)이 된다.  이 한 주겁 동안에 1,000의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는데, 지금 본사(本師)인 석가불(釋迦佛)은 네 번째의 부처이다.  이 네 번째의 부처는 모두 제9감(第九減) 중에 나타난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이 100세 때부터 가섭불의 2만 세까지는 이미 200만여 세나 된다. 만일 현겁(現劫) 시초의 첫째 부처였던 구류손불(拘留孫佛) 때에 이르면 또 몇 만 세(歲)가 된다.  구류손불 때로부터 위로 올라가 겁초(劫初)의 무량세(無量歲)를 누리던 때 까지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석가세존으로부터 아래로 지금의 지원(至元) 18년 신사(辛巳; 1281)까지는 이미 2,230년이고 보면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 때를 지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또 몇만 세나 되겠는가.

본조(本朝)의 명사(名士)의 오세문(五世文)이 역대가(歷代歌)를 지었는데 여기에 의하면, 대금(大金)의 정우(貞祐) 7년 기묘(己卯; 1219)에서 거슬러 따져서 4만 9,600여 세에 이르면 바로 반고씨(盤古氏)가 천지를 개벽한 무인년(戊寅年)이 된다고 했다.  또 연희궁(延禧宮) 녹사(錄事) 김희령(金希寧)이 지은 대일역법(大一曆法)에 의하면, 천지 개벽한 상원(上元) 갑자(甲子)로부터 원풍(元豊) 갑자(甲子; 1084)에 이르기까지 193만 7,641 세라고 했다.  또 <찬고도(纂古圖)>에서는, 천지가 개벽한 때로부터 획린(獲麟; 前 477)에 이르기까지가 276만 세라고 했다.  여러 경문(經文)을 상고해 보면 또 가섭불 때부터 지금까지가 바로 이 연좌석의 나이가 된다고 하였으니, 오히려 겁초(劫初)의 천지가 때와는 어린애 나이가 될 정도다.  이들 삼가(三家)의 말들이 오히려 이 어린 돌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들은 천지개벽의 설(說)에 있어서는 몹시 소홀했던 것이다.

 요동성(遼東城)의 육왕탑(育王塔)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이렇게 실려 있다.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곁에 있는 탑은 고로(古老)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러하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 지방을 순행하던 길에 이 성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오색 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는 그 구름 속을 찾아가 보았다.  거기엔 중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그 곁에는 세 겹으로 된 토탑(土塔)이 있는데 위는 솥을 덮은 것 같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다시 가서 중을 찾아보았으나, 다만 거친 풀이 있을 뿐이다.  거기를 길 깊이나 되게 파보았더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더 파 보았더니 명(銘)이 나왔는데 명 위에 범서(梵書)가 있었다.  시신(侍臣)이 이 글을 알아보고 불탑(佛塔)이라고 말하였다.  왕이 자세한 것을 묻자 시신은 대답한다.  "이것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그 이름을 포도왕(蒲圖王; 본래는 휴도왕休屠王이라 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이다)이라 합니다."  성왕은 이로부터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서 이내 칠중(七重)의 목탑(木塔)을 세웠고, 뒤에 불법(佛法)이 비로소 전해 오자 그 시말(始末)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탑의 높이를 줄이다가 본탑(本塔)이 썩어서 무너졌다.  아육왕(阿育王)이 통일했다는 염부재주(閻浮提州)에는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괴상할 것이 없다.

또한 당(唐)나라 용삭(龍朔) 연간(661-662)에 요동에 전쟁이 벌어져서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는 수양제(隋煬帝)가 토벌한 요동의 옛 땅에 이르렀다가 여기에서 산에 있는 불상(佛像)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몹시 쓸쓸하여 사람의 왕래가 끊어져 있었다.  고로(古老)에게 물었더니 "이 불상은 선대(先代)에 나타난 것입니다."한다.  이에 이 불상을 그대로 그려 가지고 서울로 왔다(이 사실은 모두 약함若函에 실려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三國)의 지리지(地理地)를 상고해 보면 요동성은 압록강밖에 있으며, 한(漢)나라 유주(幽州)에 소속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의 고구려 성왕이란 어느 임금인지 알 수가 없다.  혹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하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명제는 전한(前漢)의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前 37)에 즉위해서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任寅; 前 19)에 승하했으니, 그때라면 한나라에서도 역시 패엽(貝葉)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외(海外)의 배신(陪臣)으로서 범서(梵書)를 알아본단 말인가.  그러나 불(佛)을 포도왕(蒲圖王)이라고 했으니 서한(西漢) 때에도 필시 서역문자(西域文字)를 아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범서라고 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건대, 아육왕(阿育王)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인구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씩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염부계(閻浮界) 안에 8만 4,000개를 세워서 큰 돌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지금 여러 곳에서 그 상서로운 징조가 한두 번 나타난 것이 아니니 대개 진신(眞身)의 사리(舍利)란 그 감응(感應)되는 것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야육왕(阿育王)의 보탑(寶塔)은 속세 곳곳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히고 이끼마저 아롱졌네.

생각건데 그때의 길손들의 보는 눈은,

몇 사람이나 제신(祭神)의 무덤을 가리켰을까. 

금관성(金官城)의 파사석탑(婆娑石塔) 

금관(金官)에 있는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金官國)으로 있을 때 세조(世祖) 수로왕(首露王)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갑신(甲申; 48)에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타國)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두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 하는데,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받게 되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父王)께 아뢰자 부왕은 이 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편하게 바다를 건너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배를 대었다.  이때 그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珠玉)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그곳을 주포(主浦)라고 한다.  그리고 맨 처음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바위를 능현(綾峴)이라 하고, 붉은 기(旗)가 처음으로 해안에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旗出邊)이라 한다.

수로왕(首露王)이 황후(皇后)를 맞아서 같이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해동(海東)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신봉(信奉)하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가 전해 오지 않아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는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러던 것이 제8대 질지왕(질知王) 2년 임진(壬辰; 452)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를 세워(이것은 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의 시대에 해당된다.  법흥왕法興王 이전의 일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또 겸해서 남쪽 왜국(倭國)을 진압시켰으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탑은 모진 4면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彫刻)은 매우 기묘(奇妙)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 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草)에 말한, "닭의 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금관국을 또한 가락국이라고 하니, <가락국본기(駕洛國本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찬(讚)해 말한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치고 왔네.

어찌 황옥(黃玉)만을 도와서 이 언덕에 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노경(怒鯨)을 막고자 함일세. 

고(구)려(高(句)麗)의 영탑사(靈塔寺) 

<고승전(高僧傳)>에 말하기를, "중 보덕(普德)의 자(字)는 지법(智法)이니, 전 고구려 용강현(龍岡縣) 사람이다" 했으니 이것은 아래에 있는 본전(本傳)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보덕은 항상 평양성(平壤城)에 살고 있었는데 산방(山方)의 늙은 중이 와서 불경(佛經) 강의해 주기를 청하므로 굳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가서 열반경(涅槃經) 40여 권을 강의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성 서쪽 대보산(大寶山)의 바위로 된 굴 밑에 이르러서 선관(禪觀)했다.  이때 신인(神人)이 와서 청하기를, "이곳에 사는 것이 좋겠다"하고, 석장(錫杖)을 그의 앞에 놓고 땅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속에 8면으로 된 7층의 석탑(石塔)이 있을 것이다"하므로 땅을 파니 과연 그러했다.  이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영탑사(靈塔寺)라 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황룡사(皇龍寺) 장육(丈六)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즉위한 14년 계유(癸酉; 553) 2월에 장차 용궁(龍宮) 남쪽에 대궐을 지으려 하니,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이것을 고쳐서 절을 삼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고, 기축년(己丑; 569)에 이르러 담을 쌓아 17년만에 완성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 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에 닿았다.  이 배를 검사해 보니 공문(公文)이 있는데 쓰기를, "서축(西竺) 아육왕(阿育王)이 누른 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별전別傳에는 쇠가 40만 7,000근, 금金이 1,000냥이라고 했으나 잘못인 듯싶다.  혹은 3만 7,000근이라고도 한다) 장차 석가(釋迦)의 존상(尊像) 셋을 부어 만들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부디 인연있는 국토(國土)로 가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했고, 부처 하나와 보살상(菩薩像) 둘의 모형(模型)도 함께 실려 있었다.  현(縣)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서 보고하자 왕은 사자를 시켜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땅을 골라서 동축사(東竺寺)를 세우고 세 불상(佛像)을 편안히 모시게 했다.  그리고 그 금(金)과 쇠는 서울로 보내서 태건(太建) 6년 갑오(甲午; 574) 3월(<사중기寺中記>엔 계미癸未년 10월 17일이라고 했다)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부어 만들었는데 공사는 금시에 이루어졌으며, 그 무게는 3만 5,007근으로 황금(黃金) 198푼이 들었고 두 보살상(菩薩像)은 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었다.  이 장륙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으니, 이것은 대왕(大王)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혹은 불상이 진평왕(眞平王) 때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그릇된 말이다.

별본(別本)에는 이렇게 말했다.  아육왕은 서축 대향화국(大香華國)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난 후 100년 만에 태어났다.  그는 부처님께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쇠 몇 근씩을 모아서 세 번이나 불상을 부어 만들었지만 성광공지 못했다.  이때 왕의 태자가 아뢰기를,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더니, 그 배는 남염부제(南閻浮提)의 16개 큰 나라와 500 중국(中國), 10천의 소국(小國), 8만의 촌락(村落)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모두 불상을 부어 만드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로 신라국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이것을 부어 만들어 불상을 이루니 좋은 모양이 다 이루어졌다.  아육왕은 이래서 근심이 없게 되었다.

뒤에 대덕(大德) 자장(慈藏)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現身)해서 감응하여 비결(秘訣)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한다.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와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하던 곳으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의 무우왕(無憂王)이 황철(黃鐵)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너희 나라에 이르러서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으니, 이는 대개 위덕(威德)의 인연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다(별기別記에 실려 있는 것과 같지 않다).

불상(佛像)이 이루어진 뒤에 동축사(東竺寺)의 삼존불(三尊佛)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져 안치(安置)했다.  <사기(史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진평왕 5(6)년 갑진년(甲辰; 584)에 이 절의 금당이 이루어지고, 선덕왕(善德王) 때에 이 절의 첫 번째 주지(住持)는 진골(眞骨) 환희사(歡喜師)였고, 제2대 주지는 자장국통(慈藏國統), 그 다음은 국통혜훈(國統惠訓), 그 다음은 상률사(廂律師)였다."  이제 병화(兵火)가 있은 이후로 대상(大像)과 두 보살상(菩薩像)은 모두 녹아 없어졌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찬(讚)해 말한다. 

속세(俗世) 어느 곳인들 참 고향이 아니랴만,

향화(香火)의 인연은 우리 나라가 으뜸일세.

이것은 아육왕(阿育王)이 착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月城) 옛터를 찾느라고 그랬던 것일세.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신라 제27대 선덕왕이 즉위 5년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불법을 전해주는 것을 감응해서 얻었는데(자세한 것은 본전本傳에 실려있다), 문수보살은 또 말했다.  "너희 국왕은 바로 천축(天竺)의 찰리종(刹利種)의 왕으로, 이미 불기(佛記)를 받았기 때문에 따로 인연이 있어 동이공공(東夷共工)의 종족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산천(山川)이 험한 탓으로 사람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간사한 말을 많이 믿는다.  그래서 때때로 혹 천신(天神)이 화를 내리기도 하지만 다문비구(多聞比丘)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君臣)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화평한 것이다."  말을 끝내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大聖)의 변화인 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갔다.  법사(法師)가 중국 대화지(太和池) 가를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묻는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오?"  자장이 대답한다.  "보리(菩提)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인은 그에게 절하고 나서 또 묻는다.  "그대의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소?"  "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靺鞨)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국(倭國)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는 등 이웃 나라의 횡포가 자주 있사오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신인이 말한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시오"  자장이 물었다.  "고향에 돌아가면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습니까?"  신인이 말한다.  "황룡사(皇龍寺)의 호법룡(護法龍)은 바로 나의 큰아들이오.  범왕(梵王)의 명령을 받아, 그 절에 와서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안에 구층탑(九層塔)을 세우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은 항복할 것이며,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租貢)하여 왕업(王業)이 길이 편안할 것이오.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죄인을 용서하면 외적(外賊)이 해치지 못할 것이오.  다시 나를 위해서 경기(京畿)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지어 함께 내 복을 빌어 주면 나도 또한 그 은덕(恩德)을 보답하겠소."  말을 하고 옥(玉)을 바친 후 이내 형체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사중기寺中記>에 말하기를,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서 탑 세울 까닭을 들었다고 했다).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 16일에 자장법사는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佛經)·불상(佛像)·가사(袈裟)·폐백(幣帛)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와서 탑 세울 일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하기를, "백제에서 공장이를 청해 데려와야 되겠습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청해 오게 했다. 이리하여 아비지(阿非知)라고 하는 공장이가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재고, 이간(伊干) 용춘(龍春; 혹은 용수龍樹)이 그 역사를 주관하는데 거느리고 일한 소장(小匠)들은 200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에 공장이는 꿈에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을 보았다.  공장이는 마음 속에 의심이 나서 일을 멈추었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는 가운데 노승(老僧) 한 사람과 장사(壯士) 한 사람이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중과 장사는 모두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는 일을 멈춘 것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찰주기(刹柱記)>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철반 이하는 183척이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받아 가져온 사리(舍利) 100알을 탑 기둥 속과,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과 또 대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모셨으니, 이것은 못에 있는 용의 청에 따른 것이다(대화사大和寺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다.  지금의 울주蔚州이니 역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세운 것이다).  탑을 세운 뒤에 천하가 형통하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고려왕이 신라를 칠 계획을 하다가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황룡사(皇龍寺)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려왕은 그 침범할 계획을 그만두었다.  주(周)나라에 구정(九鼎)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주나라를 엿보지 못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따위일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귀신의 힘으로 한 듯이 제경(帝京)을 누르니,

휘황한 채색으로 처마가 움직이네.

여기에 올라 어찌 구한(九韓)의 항복만을 보랴,

건곤(乾坤)이 특별히 편안한 것 처음 깨달았네. 

또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 27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올바른 도리는 있어도 위엄이 없어서 구한(九韓)이 침범하는 것이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皇龍寺)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穢貊)을 진압시킨다."

또 <국사(國史)> 및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상고하면, "진흥왕(眞興王) 14년 계유(癸酉; 553)에 황룡사(皇龍寺)를 처음 세운 후에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9년 을사(乙巳; 645)에 탑이 처음 이루어졌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한 7년 성력(聖歷) 원년 무술(戊戌; 698) 6월에 절이 벼락을 맞았다(<사중고기寺中古記>에는 성덕왕善德王 때라 했으나 잘못이다.  성덕왕 때에는 무술년이 없다).  제33대 성덕왕 경신(庚申; 720)에 다시 이 절을 세웠으나 제 48대 경문왕(景文王) 무자(戊子; 868)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같은 임금 때에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였다.  본조  (本朝) 광종(光宗)의 즉위 5(4)년 계축(癸丑; 953) 10월에는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현종(顯宗) 13년 신유(辛酉; 1021)에 네 번째 중수(重修)했다.  또 정종(靖宗) 2(元)년 을해(乙亥; 1035)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는데 이것을 문종(文宗) 갑진(甲辰; 1064)에 다섯 번째 중수(重修)했더니 또 헌종(憲(獻)宗) 말년 을해(乙亥; 1095)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았다.  숙종(肅宗) 원년 병자(丙子; 1096)에 여섯 번째로 중수했더니, 또 고종(高宗) 16년 무술(戊戌; 1238) 겨울에 몽고(蒙古)의 병화(兵火)로 탑과 장륙존상(丈六尊像)과 절의 전우(殿宇)가 모두 재앙을 입었다" 했다.

 황룡사(皇龍寺)의 종, 분황사(芬皇寺)의 약사(藥師) 봉덕사(奉德寺)의 종 

신라 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이 천보(天寶) 13년 갑오(甲午; 754)에 황룡사(皇龍寺)의 종을 주조했는데, 길이는 1장(丈) 3촌(寸),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 7,581 근이었다.  시주(施主)는 효정이왕(孝貞伊王) 삼모부인(三毛夫人)이요, 공장이는 이상택(里上宅) 하전(下典)이었다.  숙종(肅宗) 때에 새 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6척 8촌이었다.

또 이듬해 을미(乙未; 755)에 분황사(芬皇寺)의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의 동상(銅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30만 6,700 근이요, 공장이는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未)이었다.  또 경덕왕(景德王)은 황동(黃銅) 12만 근을 내놓아 그 아버지 성덕왕(聖德王)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만들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그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 건운(乾運)이 대력(大曆) 경술(庚戌; 770) 12월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장이들을 모아서 기어이 완성시켜 봉덕사(奉德寺)에 안치(安置)했다.  이 봉덕사는 효성왕(孝成王)이 개원(開元) 26년 무인(戊寅; 738)에 그 아버지 성덕대왕(聖德大王)의 복을 빌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의 명(銘)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라 했다(성덕대왕은 경덕대왕의 아버지 전광대왕 典光大王이다.  종은 본래 경덕대왕이 그 아버지를 위해서 시주한 금金이었으므로 성덕왕의 종이라고 한 것이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郎) 한림랑(翰林郞) 금필월(해)金弼월(奚)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종의 명(銘)을 지었으니 글이 너무 길어서 여기에 싣지 못한다. 

영묘사(靈妙寺) 장육(丈六) 

선덕왕(善德王)이 절을 짓고 소상(塑像)을 만든 내력은 모두 <양지법사전(良志法師傳)>에 실려져 있다.  경덕왕(景德王) 즉위 23년(764)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금으로 다시 칠했는데, 그 비용으로 조(租)가 2만 3,700석이었다(<양지전良志傳>에는, 불상佛像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이라고 써있다. 이 두 가지 설을 모두 싣는다).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  

죽령(竹嶺) 동쪽 100리쯤 되는 곳에 우뚝 솟은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9년(587) 갑신(甲申)에 갑자기 사면이 한 길이나 되는 큰 돌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사방여래(四方如來)의 상(像)을 새기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는데 하늘에서 그 산마루에 떨어진 것이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그 돌을 쳐다보고 나서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했다.  여기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연경(蓮經)을 외는 중을 청해다가 이 절을 맡겨 공석(供石)을 깨끗이 쓸고 향화(香火)를 끊이지 않았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 하고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그 절의 중이 죽어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 연꽃이 피었다.

또 경덕왕(景德王)이 백률사(栢栗寺)에 거둥해서 산 밑에 이르렀더니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을 파게 했더니, 큰 돌이 있는데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굴볼사(掘佛寺)라고 했으나 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굴석사(掘石寺)라 한다.

경덕왕(景德王)은 또 당(唐)나라 대종황제(代宗皇帝)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공장이에게 명하여 오색(五色) 담요를 만들고 또 침단목(沈檀木)을 새겨서 명주와 아름다운 옥으로 꾸며서 높이 1장(丈) 남짓한 가산(假山)을 만들어 담요 위에 놓았다.  산에는 뾰족한 바위와 괴이한 돌과 동굴(洞窟)이 있어서 각 구역으로 나뉘었고, 그 각 구역 안에는 노래하고 춤추고 노는 모습과 온갖 나라들의 산천(山川)의 형상이 있다.  조금만 바람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벌과 나비가 훨훨 날고 제비와 참새가 춤을 추니, 얼핏 보아서는 참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그 속에는 만불(萬佛)을 모셔 놓았는데 큰 것은 사방 한 치가 넘고 작은 것은 8,9푼 쯤 된다.  그 머리는 혹은 큰 기장만 하고 혹은 콩 반쪽만 하다.  머리털과 백모(白毛), 눈썹과 눈이 또렷하여 모든 형상이 다 갖추어졌으니, 다만 비슷하게 비유할 수는 있어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이 산을 만불산(萬佛山)이라고 했다.

다시 거기에 금과 옥을 새겨 유소번개(流蘇幡蓋)·암라(菴羅)·담복(담복)·화과(花果) 등 장엄한 것과, 백보(百步) 누각(樓閣)·대전(臺殿)·당사(堂사)를 만들었는데 모두가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 형용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앞에는 돌아다니는 중의 형상 1,000여 개가 있고, 아래에는 자금종(紫金鐘) 셋을 벌여 놓았는데, 모두 종각(鐘閣)이 있고 포뢰(蒲牢)가 있으며 고래 모양으로 종치는 방망이를 만들었다.  바람이 불어 종이 울면 돌아 다니는 중들이 모두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한다.  은은하게 염불하는 소리가 나는 듯하니, 이 까닭은 그 종에 있었다.  이것을 비록 만불(萬佛)이라고는 하지만 그 실상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만불산(萬佛山)이 이루어지자 사신을 당(唐)나라에 보내서 바치니 대종(代宗)은 이것을 보고 탄식했다.  "신라의 교묘한 기술은 하늘이 만든 것이지 사람의 기술이 아니다."  이에 구광선(九光扇)을 그 바위 사이에 두어 두고 이름을 불광(佛光)이라고 했다.  4월 8일에 대종은 두 거리의 승도(僧徒)들에게 명하여 내도량(內道場)에서 만불산에 예배하고, 삼장불공(三藏不空)에게 명하여 밀부(密部)의 진리(眞理)를 1,000번이나 외어서 경축(慶祝)하게 하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 교묘한 솜씨에 탄복했다. 

찬(讚)해 말한다. 

하늘은 만월(滿月)을 단장시켜 사방불(四方佛)을 마련했고,

땅은 명호(明毫)를 솟구어 하룻밤에 열렸도다.

교묘한 솜씨로 다시금 만불(萬佛)을 새겼으니,

부처님의 풍도를 삼재(三才)에 두루 퍼지게 하리. 

생의사(生義寺) 석미륵(石彌勒) 

선덕왕(善德王) 때에 중 생의(生義)는 항상 도중사(道中寺)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꿈에 한 중이 그를 데리고 남산(南山)으로 올라가서 풀을 매어 표를 해 놓게 하고는 산 남쪽 골짜기에 와서 말한다.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이것을 파내다가 고개 위에 편하게 묻어 주시오."  꿈에서 깨자 그는 친구와 함께 표해 놓은 곳을 찾아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자 거기에서 석미륵(石彌勒)이 나왔으므로 삼화령(三花嶺) 위로 옮겨 놓았다.  선덕왕 13년 갑신(甲申; 644)에 그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뒤에 절 이름을 생의사(生義寺)라고 했다(지금은 잘못 전해져서 성의사性義寺라고 한다.  충담사忠談師가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이면 차를 달여서 공양한 것이 바로 이 부처다). 

흥륜사(興輪寺)의 벽화(壁畵), 보현(普賢)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 흥륜사의 남문과 좌우 낭무(廊무)가 불에 탔는데 이것을 수리하지 못하고 있어서, 정화(靖和)·홍계(弘繼) 두 중이 장차 시주를 받아 수리하려 했다.  정명(貞明) 7년 신사(辛巳; 921) 5월 15일에 제석신(帝釋神)이 이 절 왼쪽 경루(經樓)에 내려와 열흘 동안 머무르니 전탑(殿塔)과 풀·나무·흙·돌들이 모두 이상한 향기를 풍기고, 오색 구름이 절을 덮고 남쪽 연못의 어룡(魚龍)들도 기뻐서 뛰놀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이것을 보고 전에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경탄하여 옥과 비단과 곡식들을 시주하니 산더미처럼 쌓였다.  공장이들도 스스로 와서 하루가 안 되어 이루어졌다.  역사를 마치자 천제(天帝)가 장차 돌아가려 하니 이 두 중이 아뢴다.  "천제(天帝)께서 만일 궁중으로 돌아가려 하시거든 저희에게 천제의 얼굴을 그려 정성껏 공양해서 하늘의 은혜를 갚게 하시고 또한 이로 인해서 영상(影像)을 여기에 남겨 두어서 이 세상을 길이 보호하게 하시옵소서."  천제가 말한다.  "나의 힘은 저 보현보살(普賢菩薩)이 현화(玄化)를 두루 펴는 것만 못하니 이 보살의 화상을 그려서 공손히 공양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에 두 중은 천제의 가르침을  받들어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상(像)을 벽에 공손히 그렸는데, 지금까지도 이 화상은 남아 있다.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

 신라 고전(古傳)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 천자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름답기 짝이 없어 이에 천자가 말하기를, "고금(古今)에 있는 그림으로도 이같이 아름다운 것은 적을 것이다" 하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서 그 실지 모양을 그리도록 했다(그 화공畵工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혹은 장승요張僧繇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오吳나라 사람으로, 양梁나라 천감天監 연간에 무릉왕국武陵王國의 시랑직비각지화사侍郎直秘閣知화事가 되었고, 우장군右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  그러니 여기에 말한 천자天子는 중국 梁·陣 무렵의 천자일 것이다.  그런데 전傳에 당나라 황제라 한 것은 우리 조선 사람이 중국을 가리켜 모두 당唐이라 하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실상은 어느 시대의 제왕帝王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말을 모두 적어 둔다).  그 화공(畵工)은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어 그림을 다 그렸으나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을 찍어 놓았는데, 고쳐 보려 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붉은 점은 반드시 날 때부터 있던 것인가 보다 하고 그림이 끝나자 황제에게 바쳤더니 황제는 그 그림을 보고 나서 말한다.  "모양은 실물과 독 같으나 배꼽 밑의 점은 속에 감추어진 것인데 어떻게 알고서 이것까지 그렸느냐."  황제는 크게 노해서 화공(畵工)을 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주려고 하니, 승상(丞相)이 아뢰었다.  "저 사람은 마음이 아주 곧사오니 원컨대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말한다.  "만일 저 사람이 어질고 곧다면, 내가 어제 꿈에 본 사람의 형상을 그려서 바치게 하라.  그 그림이 꿈에 본 얼굴과 틀림없다면 용서해 줄 것이다." 그 사람이 이에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의 상(像)을 그려 바치니 꿈과 맞는지라, 황제(皇帝)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화공은 죄를 면하자, 박사(博士) 분절(芬節)과 약속했다.  "내가 들으니 신라국(新羅國)에서는 불법(佛法)을 존경하여 신봉(信奉)한다 하니 그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 곳에 가서 함께 불사(佛事)를 닦아 그 나라를 널리 이익되게 하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이들은 드디어 함께 신라국에 이르러 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의 상을 만들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었으니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신라 말년 천성(天成) 연간(926∼929)에 정보(正甫) 최은함(崔殷함)이 나이 많도록 아들이 없어, 이 절 관음보살 앞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더니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석 달이 되지 않았는데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서울을 침범해 와서 성 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은함(殷함)은 그 아이를 안고 이 절에 와서 말하였다.  "이웃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일이 급합니다.  이 어린 자식으로 해서 누(累)가 겹친다면 식구가 모두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대성(大聖)께서 이 아이를 주신 것이라면, 원컨대 큰 자비(慈悲)의 힘을 내려 길러 주시어 우리 부자(父子)가 다시 만나게 해 주십시오."  슬피 세 번 울면서 세 번 아뢰고 난 후에 아이를 포대기에 싸서 관음상(觀音像)의 예좌(猊座) 밑에 감추고 못잊어 하면서 떠나갔다.  반 달을 지나 적병이 물러간 뒤에 와서 아이를 찾아보니 살결은 마치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모양도 매우 예쁜데 젖냄새가 아직도 입에서 났다.  아이를 안고 돌아와 기르니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롭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이 사람이 곧 승로(丞魯)로서 벼슬이 정광(正匡)에 이르렀다.  승로는 낭중(郎中) 최숙(崔肅)을 낳았고, 숙은 낭중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이로부터 자손이 계속되고 끊어지지 않았다.  은함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대성(大姓)이 되었다.

또 통화(統和) 10년(992) 3월에 사주(寺主)인 중 성태(性泰)는 보살(菩薩)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이 절에 살면서 정성껏 부지런히 향화(香火)를 받들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하오나 절의 토지(土地)에서는 나는 것이 없어서 향사(香祀)를 계속할 수가 없으므로 장차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옵기에 하직하는 터입니다."  이날 성태는 조금 졸다가 꿈을 꾸니 관음대성(觀音大聖)이 말한다.  "법사(法師)는 아직 여기에 머물러 있고 멀리 떠나지 말라. 내가 시주를 해서 제사에 쓸 비용을 충분히 마련해 주겠다."  중이 기뻐하여 꿈에서 깨어 오직 그 절에 머물러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런지 13일 만에 갑자기 두 사람이 말과 소에 물건을 싣고 문 앞에 이르렀다.  절에 있던 중이 나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금주(金州) 지방 사람인데 지난번에 스님 하나가 우리를 찾아와서 나는 동경(東京) 중생사(衆生寺)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공양에 쓸 비용이 어려워서 시주를 얻으려고 여기에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웃 마을에 가서 시주를 모아다가 쌀 엿 섬과 소금 넉 섬을 싣고 온 것입니다."  스님이 말했다.

"이 절에는 시주를 구하러 나간 사람이 없는데, 그대들이 필경 잘못 들은 것 같소."  그 사람들이 또 말한다.  "그 스님이 우리들을 데리고 오다가 이 신견정(神見井) 가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절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따라온 것입니다."  절의 스님이 그들을 데리고 법당(法堂) 앞으로 들어가니, 그 사람들은 관음대성(觀音大聖)을 쳐다보고 절하면서 저희끼리 서로 말한다.  "이 부처님이 바로 시주를 구하러 왔던 스님의 상(像)입니다."  말하면서 놀라고 감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이로부터 여기에 바치는 쌀과 소금이 해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또 어느날 저녁에 절 문에 화재가 나서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불을 껐다.  그런데 법당(法堂)에 올라가 보니 관음상이 없으므로 살펴보니 이미 뜰 가운데 서 있는 것이다.  누가 밖으로 내왔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그제야 모두들 이것은 관음대성(觀音大聖)의 신령스러운 힘인 것을 알았다.

또 대정(大定) 13년 계사(癸巳; 1173) 연간에 중 점숭(占崇)이 이 절에 와서 살고 있었다.  그는 비록 글은 알지 못하지만 성질이 본래부터 순수하여 향화(香火)를 부지런히 받들었다.  어떤 중 하나가 그 절을 빼앗아 살려고 하여 친의천사(친衣天使)에게 호소했다.  "이 절은 국가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구하는 곳이오니 마땅히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뽑아서 그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그 말을 옳게 여겨 그 사람을 시험하려 하여 소문(疏文)을 거꾸로 주어 보았다.  그러나 점숭은 이것을 받는 즉시로 줄줄 읽는다.  천사는 이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방 가운데로 물러앉아 다시 그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그러나 점숭은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읽지 못한다.  이것을 보고 천사가 말한다.

"스님은 참으로 관음대성이 보호하여 주시는 사람이로다."  이리하여 끝내 이 절을 빼앗지 않았다.  그 당시 점숭(占崇)과 같이 이 절에 살던 처사(處士) 김인부(金仁夫)가 이 이야기를 고을의 노인들에게 전해 주고 또 전기(傳記)로도 써 두었다. 

백률사(栢栗寺)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그 절에 부처의 상(像)이 하나 있는데 어느 때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영험이 자못 뚜렷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의 신장(神匠)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소상(觀音塑像)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다"하고, 또 속전(俗傳)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부처님이 일찍이 도리천(도利天)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法堂)에 들어갈 때에 밟았던 돌 위의 발자국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이 부례랑(夫禮郞)을 구출하여 돌아올 때에 보였던 자취이다"한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 692) 9월 7일에 효소왕(孝昭王)은 대현(大玄) 살찬(薩찬)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國仙)으로 삼았고, 주리(珠履)의 무리가 1,000명이나 되었는데 안상(安常)과는 무척 친했다.  천수(天授) 4년(장수長壽 2년) 계사(癸巳; 693) 3월에 부례랑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에 놀러 갔는데, 북명(北溟)의 경계에 이르렀다가 적적(狄賊)에게 사로잡혀 갔다.  문객(門客)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그대로 돌아왔으나 홀로 안상(安常)만이 그를 쫓아갔는데 이때는 3월 11일이었다.  대왕은 이 말을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말했다.  "선왕(先王)께서 신적(神笛)을 얻어 나에게 전해 주셔서 지금 현금(玄琴:거문고)과 함께 내고(內庫)에 간수해 두었는데, 무슨 일로 해서 국선이 갑자기 적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의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적혀 있다).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자 왕은 또 놀라고 두려워하여 조사하게 하니, 천존고 안에 있던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없어졌다.  왕은 말했다. "내게 어찌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고 또 이제 현금과 신적까지 잃는단 말인가."  왕은 즉시 창고를 맡은 관리 김정고(金貞高) 등 5명을 가두었고 4월에 나라 안의 사람을 모집하여 말했다.  "현금(玄琴)과 신적(神笛)을 얻는 사람은 1년 조세(租稅)를 상으로 주겠다."  5월 15일에 부례랑의 부모가 백률사(栢栗寺) 불상 앞에 나가 여러 날 저녁 기도를 올리자, 갑자기 향탁(香卓) 위에 현금과 신적 두 보배가 놓여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 와 있었다.  두 부모는 매우 기뻐하여 어찌된 일인지 물으니, 부례랑이 말한다.  "저는 적에게 잡혀간 뒤 적국의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서 말 치는 일을 맡아 대오라니(大烏羅尼)의 들에서(혹은 도구都仇의 집 종이 되어 대마大磨의 들에서 말을 먹였다고 했다)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데 갑자기 모양이 단정한 스님 한 분이 손에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 위로하기를, '고향 일을 생각하느냐?'하기에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앞에 꿇어앉아서 '임금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했습니다.  스님은 '그러면 나를 따라오너라'하고는 드디어 저를 데리고 바닷가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또 안상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신적을 둘로 쪼개어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서 각기 한 짝 씩을 타게 하고, 그는 현금(玄琴:거문고)을 타고 바다에 떠서 돌아오는데 잠깐 동안에 여기에 와 닿았습니다."  이 일을 자세히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크게 놀라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니 부례랑은 현금과 신적을 가지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왕은 50냥의 금은(金銀)으로 만든 그릇 다섯 개씩 두 벌과, 마납가사(摩衲袈裟) 다섯 벌, 대초(大초) 3,000필, 밭 1만 경(頃)을 백률사에 바쳐서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고, 나라 안의 죄인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관리들에게는 벼슬 3계급을 높여 주고, 백성들에게는 3년간의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으며, 절의 주지(住持)를 봉성사(奉聖寺)로 옮겨 살게 했다.  부례랑을 봉하여 대각간(大角干; 신라의 재상 작명爵名)을 삼고, 아버지 대현아식(大玄阿식)은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龍寶夫人)은 사량부(沙梁部)의 경정궁주(鏡井宮主)를 삼았다.  안상은 대통(大統)을 삼고 창고를 맡았던 관리 다섯 사람은 모두 용서해 주고 각각 관작(官爵) 오급(五級)을 주었다.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쪽 하늘에 나타나더니 17일에 또 서쪽 하늘에 나타나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것은 현금과 신적을 벼슬에 봉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에 신적을 책호(冊號)하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했더니 혜성(彗星)은 이내 없어졌다.  그 뒤에도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지만 글이 번거로워 다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郞)의 무리라고 했으나 이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직 진재(眞材)·번완(繁完) 등만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이들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자세한 것은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민장사(敏藏寺) 

우금리(우金里)에 사는 가난한 여자 보개(寶開)에게 장춘(長春)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사꾼을 따라 나가더니 오래 되어도 소식이 없자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敏藏寺; 이 절은 곧 민장각간敏藏角干이 자기 집을 내놓아서 절을 만든 것이다) 관음보살 앞으로 가서 7일 동안 기도했더니 장춘이 금세 돌아왔다.  그 동안 어찌된 일이냐고 까닭을 묻자 장춘은 대답했다.  "바다 가운데에서 회오리바람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지만, 저는 널판쪽을 타고 오(吳)나라 바닷가에 닿았는데 오나라 사람이 저를 데려다가 들에서 농사를 짓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날 이상한 스님 하나가 마치 고향에서 온 것처럼 은근히 위로하더니 저를 데리고 같이 가는데, 앞에 깊은 도랑이 가로막히자 스님은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 도랑을 뛰어넘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 우리 시골집 말 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여기에 와 있었습니다."  저녁때에 오나라를 떠났는데, 이곳에 도착한 것이 겨우 오후 7, 8시였다.  이때는 바로 천보(天寶) 4년 을유(乙酉; 745) 4월 8일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 말을 듣고 민장사에 밭을 시주하고 또 재물도 바쳤다.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국사(國史)>에 이렇게 말했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태청(太淸) 3년 기사(己巳; 549)에 양(梁)나라에서 심호(沈湖)를 시켜 사리(舍利) 몇 알을 보내왔다.  선덕왕(善德王) 때인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唐)나라에서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00알과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을 가지고 왔는데,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皇龍寺) 탑에 두고, 하나는 대화사(大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 계단(戒壇)에 두었으나,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통도사 계단에는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돌 뚜껑을 덮어서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다.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본조(本朝)에서 전후로 염사(廉使) 두 사람이 와서 계단에 절을 하고 공손히 돌솥을 들어 보았는데,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돌 함(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 번에는 큰 두꺼비가 돌 밑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이로부터는 감히 이 돌을 들어 보지 못했다 한다.  요새 상장군(上將軍)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高宗)의 명령을 받아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符節)을 가지고 절에 와서 돌을 들고 절하려고 하니 절의 중은 지난 일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난처하게 여겼다.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돌을 들게 하니 그 속에 작은 돌 함이 있고, 함 속에는 유리통(瑠璃筒)이 들어 있고, 통 속에는 사리(舍利)가 단지 네 알뿐이었다.  이것을 서로 돌려보면서 경례했는데 통에 조금 상한 곳이 있었다.  이에 유공(庾公)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간수해 두게 하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는 강화도(江華島)로 서울을 옮긴 지 4년이 되던 을미년(乙未年; 1235)이었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사리(舍利) 100개를 세 곳에 나누어 두었더니, 이제는 오직 네 개뿐이다.  그것은 숨겨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여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니 수효가 많고 적은 것이 괴이할 것이 없다."  또 속설(俗說)에는 이렇게 말한다.  "황룡사(皇龍寺) 탑이 불타던 날에 돌솥 동쪽에 처음 큰 얼룩이 생겼는데 이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때는 바로 요(遼)의 응력(應曆) 3년 계축(癸丑; 953)이요, 본조(本朝) 광종(光宗) 5(4)년으로, 탑이 세 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曹溪)의 무의자(無衣子)가 시를 남겨 말하기를, "들으니 황룡사탑이 불타던 날, 번져서 탄 한 쪽에도 틈이 없었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원(至元) 갑자년(甲子年; 1264) 이후로 원(元)나라 사신과 본국 황화(皇華)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에 절했으며 사방의 운수(雲水)들도 몰려들어 참례했는데, 돌함을 들어보기도 하고 혹은 들지 않기도 했다. 진신(眞身)의 사리 네 알 외에 변신(變身) 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셔져서 돌함 밖으로 나와 있었는데 이상한 향기를 강하게 풍겨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이따금 있었으니, 이것은 말세에 있는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인 것이다.

당(唐)나라 대중(大中) 5년 신미(辛未; 851)에 당나라로 갔던 사신 원홍(元弘)이 당에서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의 일이다)와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 계미(癸未; 923) 곧 본조(本朝) 태조(太祖) 즉위 6년에 당(唐)나라로 보냈던 사신 윤질(尹質)이 가지고 온 오백나한(五百羅漢)의 상(像)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있다.  송(宋)나라의 선화(宣和) 원년 기묘(己卯(亥); 예종睿宗 15(4), 1119)에 입공사(入貢使) 정극영(鄭克永)·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지고 온 부처의 어금니는 지금 내전(內殿)에 모셔 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서로 전해 내려오는 말은 이러하다.  옛날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의 지상사(至相寺) 지엄존자(智儼尊者)에게 가 있었는데, 이웃에 선율사(宣律師)가 있어서, 항상 하늘의 공양을 받고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 주방(廚房)에서 먹을 것을 보내 왔다.  어느날 선율사는 의상법사를 청하여 재를 올리는데 의상이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랜데도 하늘에서 보내는 음식은 때가 지나도 오지 않는다.  의상이 빈 바리때만 가지고 돌아가자 비로소 천사(天使)가 내려왔다.  선율사가 "오늘은 어찌해서 늦으셨소"하고 묻자 천사는 대답한다.  "온 동네에 가득히 신병(神兵)이 막고 있어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율사는 의상법사에게 신의 호위가 있는 것을 알고는 그의 도(道)의 힘이 자기보다 나은 것에 탄복하고는 하늘에서 보내 온 음식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또 지엄(智儼)과 의상(義湘) 두 대사를 재 올리는데 청해다가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다.  의상이 조용히 율사에게 말한다.  "율사는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신데,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帝釋宮)에는 부처님의 이빨 40개 중에 어금니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천제께 청하여 그것을 인간에게 내려보내어 복이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율사는 이 후에 천사와 함께 그 뜻을 천제에게 전하니 천제는 7일을 기한하여 이를 보내 주니 의상은 경례를 다한 뒤에 맞이하여 대궐에 안치했다.

그 후 송(宋)나라 휘종조(徽宗朝)에 이르러 좌도(左道)를 믿으니, 이때 나라 사람들은 도참(圖讖)을 전하여 퍼뜨리기를, "금인(金人)이 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건(黃巾)의 무리들이 일관(日官)을 충동하여 위에 아뢰기를, "금인이란 불교를 말하는 것이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는 장차 불교를 없애고 중들을 무찔러 죽이고, 경전(經典)을 불사르고, 따로 조그만 배를 만들어 부처의 어금니를 실어 큰 바다에 띄워 인연이 있는 곳으로 흘려 보내려 했다.  이때 마침 고려 사신이 송나라에 갔다가 그 사실을 듣고는 천화용(天花茸) 50령(領)과 저포(紵布) 300필을 배를 호송(護送)하는 관원에게 뇌물로 주고 남몰래 부처의 어금니를 받고 빈 배만 흘려 보내게 했다.  사신들이 부처의 어금니를 얻어 가지고 와서 왕에게 아뢰자 예종(睿宗)은 크게 기뻐하여 십원전(十員殿) 왼쪽에 있는 소전(小殿)에 모시고 항상 소전 문을 잠그고 밖에는 향과 등불을 설치하여 왕이 친히 거둥하는 날에만 대궐 문을 열고 경례를 했다.

임진년(壬辰年; 1232)에 서울을 강화(江華)로 옮길 때 내관(內官)들은 총망한 중에 잊어버리고 이를 거두어 챙기지 못했다.  병신년(丙申年) 4월에 왕의 원당(願堂)인 신효사(神孝寺) 중 온광(蘊光)이 불아(佛牙)에 경례하기를 청하므로 왕에게 아뢰니 왕은 내신(內臣)을 시켜서 두루 궁중(宮中)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백대(栢臺) 시어사(侍御史) 최충(崔沖)이 설신(薛伸)에게 명하여 급히 여러 알자(謁者)의 방을 다니면서 물었으나 모두 어쩔 줄을 모를 뿐이었다.  내신(內臣) 김승로(金承老)가 아뢰기를, "임진년(壬辰年)에 서울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를 조사해 보십시오"하므로 그 말을 쫓아 조사해보니 일기(日記)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입내시대부경(入內侍大府卿) 이백전(李白全)이 불아함(佛牙函)을 받다."  이백전(李白全)을 불러 물으니 대답한다.  "청컨대 집에 돌아가서 다시 저의 사사 일기(日記)를 찾아보게 해 주십시오."  집에 가서 찾아보고 좌번알자(左番謁者) 김서룡(金瑞龍)이 불아함(佛牙函)을 받았다는 기록을 갖다가 바쳤다.  김서룡(金瑞龍)을 불러 물었으나 대답을 못한다.  또 김승로(金承老)가 아뢰는 대로 임진년(壬辰年)에서 지금 병신년(丙申年)까지 5년간의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에 수직한 자들을 잡아 가두고 심문했으나, 아무런 결말도 나지 않았다.  그런지 3일이 지난 날 밤중에 김서룡의 집 담 안으로 무엇을 던지는 소리가 나므로 불을 켜 조사해 보니 바로 불아함(佛牙函)이었다.  함은 본래 속 한 겹은 심향합(沈香合)이고 다음 겹은 순금합(純金合)이고 그 다음 바깥 겁은 백은함(白銀函)이고, 다음 바깥 겁은 유리함이고, 그 다음 겹은 나전함(螺鈿函)으로 각 함(各函)의 폭은 서로 꼭 맞게 되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유리함뿐이었다.  김서룡은 찾은 것이 기뻐서 대궐로 들어가 아뢰었다.  그러나 유사(有司)는 죄를 의논하여 김서룡과 어불당(御佛堂)과 경령전(景靈殿)의 수직하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하니 진양부(晉陽府)에서 아뢰었다.  "불사(佛事)로 인하여 사람을 많이 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모두 죽음을 면했다.  다시 십원전(十員殿) 안뜰에 특별히 불아전(佛牙殿)을 지어서 불아함(佛牙函)을 모시게 하고 장사(將士)들을 시켜 지키게 했다.  길일(吉日)을 가려서 신효사(神孝寺)의 상방(上房) 온광(蘊光)을 청해다가 승도(僧徒) 30명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재를 올려 정성을 드리도록 했다.  그날 입직(入直)했던 승선(承宣) 최홍(崔弘)과 상장군(上將軍) 최공연(崔公衍)·이영장(李令長)과 내시(內侍)·다방(茶房) 관원들은 대궐 뜰에서 왕을 모시고 서서 차례로 불아함(佛牙函)을 머리에 이고 정성을 드렸는데 불아함 구멍 사이에 있는 사리는 그 수를 알지 못할 만큼 많았다.  진양부(晉陽府)에서는 백은(白銀) 상자에 그것을 담아 모셨다.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불아(佛牙)를 잃은 후로 스스로 네 가지 의심이 생겼었소.  첫째 의심은, 천궁(天宮)의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갔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 의심은 국난(國亂)이 이러하니, 불아는 신물(神物)이므로 인연이 있는 무사(無事)한 나라로 옮겨 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오.  셋째 의심은, 재물을 탐낸 소인(小人)이 그 상자를 도둑질하고 불아는 구렁에 버렸으리라는 것이오.  넷째 의심은, 도둑이 보물을 훔쳐가기는 했으나 이것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 집 속에 감추어 두었으리라는 것이었는데 이제 네 번째 의심이 맞았소"하고 이내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헌수(獻壽)하는데, 심지어 이마와 팔을 불에 태우는 사람도 있어서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실록(實錄)은 당시 내전(內殿)에서 향(香)을 피우며 기도하던, 전지림사(前祗林寺)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에게서 얻은 것이니, 그는 자기가 친히 본 것이라면서 날더러 기록하라고 했다.

또 경오년(庚午年; 1270)에 강화(江華)에서 환도(還都)할 때의 난리는 몹시 심하여 임진년(壬辰年)보다도 더했다.  십원전(十員殿)의 감주(監主)인 선사(禪師) 심감(心鑑)은 자기의 위태로움을 잊고 불아함을 가지고 나와 도둑의 난리에서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 사실을 대궐에 알리니 왕은 그 공을 크게 칭찬하고 이름 있는 절로 옮겨 살게 하여 지금 빙산사(빙山寺)에 살고 있다.  이것도 역시 각유(覺猷)에게서 친히 들은 것이다.

진흥왕(眞興王) 때인 천가(天嘉) 6년 을유(乙酉; 565)에 진(陳)나라에서는 유사(劉思)와 중 명관(明觀)을 시켜 불경(佛經)·논(論) 1,700여 권을 보내왔으며,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삼장(三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通度寺)에 안치했다.  흥덕왕(興德王) 때인 태화(太和) 원년 정미(丁未; 827)에는 당(唐)에 간 학승(學僧)인 고구려 중 구덕(丘德)이 불경(佛經) 몇 상자를 가지고 오니 왕은 여러 절의 승도(僧徒)들과 함께 나가서 흥륜사(興輪寺) 앞길에 가서 맞이했다.  대중(大中) 5년(851)에는 당나라에 보낸 사신 원홍(元弘)이 불경(佛經) 몇 축(軸)을 가지고 왔고, 나말(羅末)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두 번이나 오월국(吳越國)에 가서 대장경(大藏經)을 싣고 왔으니, 그는 곧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開山祖)이다.

송(宋)나라 원우(元祐) 갑술년(甲戌年; 1094)에 어떤 사람이 선사(禪師)의 진영(眞影)을 찬(讚)해 말했다.

      거룩도 해라, 개조(開祖) 스님이시여!  우뚝 빼어났구나 저 참 모습이.

두 번이나 오월(吳越)에 가, 대장경(大藏經)을 가지고 오는 데 성공했네.

보요(普耀)라는 직함을 하사하시고, 네 번이나 조서(詔書)를 내리셨으니,

만일 그의 덕을 묻거든, 밝은 달 맑은 바람과 같다 하겠네. 

또 대정(大定) 연간(1161∼1189)에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이 시(詩)를 지어 남겼다. 

물과 구름 조용한 절에 부처님 계신데,

더구나 신룡(神龍)이 한 지경을 보호하네.

마침내 이 좋은 절 어느 누가 이어받을까,

처음 불교는 남쪽에서 전해왔네. 

발문(跋文)이 있는데 이러하다. 

옛날 보요선사(普耀禪師)가 처음으로 남월(南越)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구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바닷바람이 갑자기 일더니 조각배가 물결 사이에서 뒤집힐 것 같았다.  선사는 말하기를, "이것은 신룡(神龍)이 대장경을 여기에 머물러 두려는 것이 아닐까"하고 드디어 주문(呪文)으로 정성껏 축원하여 용(龍)까지 함께 받들고 돌아오니, 바람도 자고 물결도 가라앉았다.  본국에 돌아오자 산천(山川)을 두루 구경하면서 대장경을 안치할 곳을 구하다가 이 산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서 일어나는 곳을 보고 이에 수제자(首弟子) 홍경(弘慶)과 함께 연사(蓮社)를 세웠으니,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온 것은 실로 이때에 시작된 것이었다. 

한남 관기(漢南管記) 팽조적(彭祖적)은 제(題)한다. 

이 해룡왕사(海龍王寺)에는 용왕당(龍王堂)이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당시 용왕은 대장경(大藏經)을 따라와서 여기에 머물러 있었는데, 용왕당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또 천성(天成) 3년 무자(戊子; 928)에 묵화상(默和尙)이 당에 들어가 역시 대장경을 가지고 왔으며, 본조(本朝) 예종(睿宗) 때에는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조서를 받들고 중국으로 유학가서 요본(遼本) 대장경 3부(部)를 사 가지고 왔는데, 그 한 본(本)은 지금 정혜사(定惠寺)에 있다(해인사海印寺에 한 본本이 있고 허참정許參政댁에 한 본本이 있다).

대안(大安) 2년(1086) 본조(本朝) 선종(宣宗) 때에는 우세승통(祐世僧統) 의천(義天)이 송(宋)나라에 들어가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많이 가지고 왔으며, 이 밖에도 서적에 실리지 않은 고승(高僧)과 신사(信士)들이 왕래하면서 가지고 온 것은 이루 자세히 기록할 수가 없다.  대체로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 오는 데는 그 앞길이 양양(洋洋)했으니 경사스러운 일이다.

찬(讚)해 말한다. 

중국과 동방은 오히려 연기로 막혔고,

녹원(鹿苑)의 학수(鶴樹)는 2,000년이네.

이 땅에 전해 오니 참으로 하례할 일이라,

동진(東震)과 서건(西乾)이 한 세상 되었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전(義湘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의상은 영휘(永徽) 초년(650)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선사(智儼禪師)를 뵈었다"한다.  그러나 부석사(浮石寺) 본비(本碑)에 의하면, "의상은 무덕(武德) 8년(625)에 태어나 어려서 중이 되었다.  영휘(永徽) 원년 경술(庚戌; 650)에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서 그대로 돌아갔다.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당에 들어가 지엄법사에게 배웠다.  총장(總章) 원년(668)에 지엄법사가 죽자 함형(咸亨) 2년(671)에 의상은 신라로 돌아와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 702)에 죽으니 나이 78세였다"했다.  그렇다면 지엄과 함께 선율사(宣律師)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천궁(天宮)의 불아(佛牙)를 청하던 일은 신유(辛酉; 661)에서 무진(戊辰; 668)까지의 7, 8년 사이가 될 것이다.  본조(本朝) 고종(高宗)이 강화(江華)로 옮기던 임진년(壬辰年; 1232)에 천궁의 7일 기한이 다 찼다고 의심한 것은 잘못된 것이니, 도리천(도利天)의 1주야는 인간(人間) 100세에 해당되는 것이다.

또 의상이 처음 당에 갔던 신유년(辛酉年; 661)에서부터 계산하여 본조(本朝) 고종(高宗) 임진(壬辰; 1232)까지는 693년이니 경자년(更子年; 1240)에 이르러야 비로서 700년이 차며, 7일 기한도 차는 것이다.  환도(還都)하던 지원(至元) 7년 경오(庚午; 1270)까지는 730년이니, 만일 천제(天帝)의 말과 같이 7일 후에 천궁(天宮)으로 돌아갔다고 하면 심감선사(心鑑禪師)가 환도(還都)할 때 가져다 바친 것은 필시 진짜 불아(佛牙)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해 봄 환도(還都)하기 전에 왕은 대궐 안 제종(諸宗)의 이름난 중들을 모아서 불아와 사리를 빌어 구하여 비록 정성과 부지런함을 다했지만 하나도 얻지 못했으니, 필경 7일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간 듯 싶다.  지원(至元) 21년 갑신(甲申; 1284)에 국청사(國淸寺)의 금탑(金塔)을 보수(補修)하고 충렬왕(忠烈王)은 장목왕후(莊穆王后)와 함께 묘각사(妙覺寺)에 거둥하여 신도(信徒)의 무리들을 모아 경하(慶賀)하고 찬미(讚美)했다.  이것이 끝나자 심감(心鑑)이 바친 불아와 낙산(落山)의 수정염주(水精念珠)와 여의주(如意珠)를 군신(君臣)과 여러 신도(信徒)들이 모두 쳐다보고 경배한 뒤에 함께 금탑(金塔) 안에 안치했다.

나도 역시 이 모임에 참석해서 이른바 불아라고 하는 것을 친히 보았는데 그 길이는 세 치 가량 되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無極)은 쓴다.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신라 제 24대 진흥왕(眞興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삼맥종(삼麥宗)인데, 혹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나라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卽位)했다.  백부(伯父) 법흥왕(法興王)의 뜻을 사모해서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이 풍미(風味)가 있어서 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민가(民家)의 처녀들 중에 아름다운 자를 뽑아서 원화(原花)를 삼았으니, 이것은 무리를 모아서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치려 함이었으며, 이것은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했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교貞娘)의 두 원화를 뽑았고, 여기에 모여든 사람이 3,4백 명이나 되었다.  교정(교貞)이 남모(南毛)를 질투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취하도록 먹인 후에 남몰래 북천(北川)으로 데리고 가서 큰 돌을 들고 그 속에 묻어 죽였다.  이에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피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서, 노래를 지어 거리의 어린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남모의 무리들은 듣고 그 시체를 북천(北川) 속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여 버리니 이에 대왕(大王)은 영을 내려 원화의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 지 여러 해가 되자 왕은 또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영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 중에 덕행(德行)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고쳐 화랑(花娘(郞))이라 하고, 비로서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花郞) 국선(國仙)의 시초이다.  그런 때문에 명주(溟洲)에 비(碑)를 세우고,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쳐 착한 일을 하게 하고 웃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유산하게 하니 오상(五常)·육예(六藝)와 삼사(三師)·육정(六正)이 왕의 시애에 널리 행해졌다(<국사國史>에 보면,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경庚(병丙)신申에 처음으로 화랑花郞을 받들었다 했으나 이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진지왕(眞智王) 때에 와서 흥륜사(興輪寺) 중 진자(眞慈; 혹은 정자貞慈라고 함)가 항상 이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가 발원(發願)하여 맹세해 말했다.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花郞)으로 화(化)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 제가 항상 수용(수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자, 어느날 밤 꿈에 중 하나가 말했다.  "내 웅천(熊天; 지금의 공주公州)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眞慈)는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여 그 절을 찾아 열흘길을 가는데 발자국마다 절을 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 밖에 탐스럽고 곱게 생긴 한 소년이 있다가, 예쁜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하니, 진자는 올라가 읍(揖)하고 말한다.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하여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  소년이 말한다.  "나도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이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소년은 문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중들에게 지난 밤의 꿈과 자기가 여기에 온 뜻만 얘기하고 또 말했다.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소."  절에 있는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옛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서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오.  그곳으로 가 보는 것이 좋을 게요."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山神靈)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면서 말한다.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진자가 대답한다.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  노인이 또 말한다.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보려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내 달려서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그런 지 한 달이 넘어 진지왕(眞智王)이 이 말을 듣고는 진지를 불러서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으니, 단장을 갖추어 얼굴 모양이 수려한 한 소년이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거닐며 놀고 있었다.  진자는 그를 만나보자 놀라서 말한다.  "이분이 미륵선화다."  그는 나가서 물었다.  "낭(郎)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姓)은 누구신지 듣고 싶습니다."  낭이 대답한다.  "내 이름은 미시(未尸)이고,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 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에 진자는 그를 가마에 태워 가지고 들어가 왕께 뵈었다.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다.  그는 화랑도(花郞徒) 무리들을 서로 화목하게 하고 예의(禮儀)와 풍교(風敎)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는 풍류(風流)를 세상에 빛내더니 7년이 되자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미시랑(未尸郎)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화(德化)를 이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도(道)를 닦으니, 만년(晩年)에 그 역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해설하는 자가 말한다.  "미(未)는 미(彌)와 음(音)이 서로 같고 시(尸)는 역(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운 것을 취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들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견량(見郎)[樹]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선화(仙花) 찾아 한 걸음 걸으며 그의 모습 생각하니,

곳곳마다 심은 것은 한결같은 공로일세.

졸지에 봄은 되돌아가고 찾을 곳 없으니,

누가 알았으리, 상림(上林)의 한 때의 봄을.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努힐夫得)과 달달박박(달달朴朴) 

<백월산양성성도기(白月山兩聖成道記)>에 이렇게 말하였다.  "백월산(白月山)은 신라 구사군(仇史郡; 옛날의 굴자군屈自郡.  지금의 의안군義安郡)의 북쪽에 있었다.  산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가 수백 리에 뻗쳐 있어 참으로 큰 진산(鎭山)이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서 말한다.  "옛날에 당(唐)나라 황제(皇帝)가 어느 때에 못을 하나 팠는데, 달마다 보름 전이면 달빛이 밝고, 못 가운데에 산이 하나 있고 사자(獅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히 비쳐서 못 가운데에 그림자를 나타냈다.  황제는 화공(畵工)을 시켜서 그 모양을 그리게 하여 사자(使者)를 보내서 온 천하를 돌면서 찾도록 했다.  사자가 해동(海東)에 이르러 보니 그 산에 큰 사자암(獅子巖)이 있고 산의 서남쪽 이보(二步)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는데 그 이름은 화산(花山; 그 산의 몸체는 하나인데 봉우리가 셋이어서 삼산三山이라고 했다)으로서 모양이 그림과 같았다.  그러나 아직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신 한 짝을 사자암 꼭대기에 걸어 놓고 돌아와 아뢰었다.  그런데 신 그림자도 역시 못에 비치므로 황제는 이상히 여겨 그 산 이름을 백월산(白月山)이라고 했다(보름 전에는 백월白月의 그림자가 못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는 못 가운데에 산 그림자가 없어졌다."

이 산의 동남쪽 3,000보 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고, 그 마을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하나는 노힐부득(努힐夫得; 혹은 등等)이니 아버지는 이름을 월장(月藏)이라 했고, 어머니는 미승(味勝)이라 했다.  또 하나는 달달박박(달달朴朴)이니 그의 아버지는 이름을 수범(修梵)이라 했고, 어머니는 범마(梵摩)라 했다(향전鄕傳에는 치산촌雉山村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두 선비의 이름은 방언方言이니 두 집에는 각각 두 선비의 마음과 행동이 등등騰騰하고 고절苦節하다는 두 가지 뜻에서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풍채와 골격(骨格)이 범상치 않았고, 속세를 떠난 마음이 있어 서로 좋은 친구였다.  20세가 되자 마을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서남쪽 치산촌(雉山村)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옛절이 있는데, 서진(栖眞)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大佛田)·소불전(小佛田)의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夫得)은 회진암(懷眞巖)에 살았는데 혹은 이곳을 양사(壤寺; 지금 회진동懷眞洞에 옛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다)라고도 했고, 박박(朴朴)은 유리광사(瑠璃光寺; 지금 이산梨山 위에 절터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에 살았다.  이들은 모두 처자(妻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産業)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고 편안히 마을을 길러 속세를 떠날 마음을 잠시도 폐하지 않았다.  그들은 몸과 세상의 무상(無常)함을 느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해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의식(衣食)이 마음대로 생기고 자연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다.  또 부녀(婦女)와 집이 참으로 좋으나, 연지화장(蓮池花藏)에서 여러 부처가 앵무새나 공작새와 함께 놀면서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불도(佛道)를 배우면 응당 부처가 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는 데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어 있는 것을 벗어 버리고 무상(無上)의 도(道)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 풍진(風塵) 속에 파묻혀 세속 무리들과 같이 지내서야 되겠는가."  이들은 드디어 인간 세상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 했다.  어느날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에서 오더니 빛 속에서 금빛 팔이 내려와서 두 사람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꿈에서 깨어 그 얘기를 하니 두 사람의 말이 똑같으므로 이들은 모두 한참동안 감탄하다가 드디어 백월산(白月山) 무등곡(無等谷; 지금의 남수동南藪洞)으로 들어갔다.

박박사(朴朴師)는 북쪽 고개의 사자암(獅子巖)을 차지하여 판잣집 8척 방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 하고, 부득사(夫得師)는 동쪽 고개의 무더기 돌 아래 물이 있는 곳을 차지하고 역시 방을 만들어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했다(향전鄕傳에는, 부득夫得은 산 북쪽 유리동瑠璃洞에 살았으니 곧 지금의 판방板房이요, 박박朴朴은 산 남쪽 법정동法精洞 뇌방磊房에 살았다고 했으니 이 기록과는 서로 반대된다.  지금 와서 보면 향전鄕傳이 잘못되었다).  이들은 각각 암자에 살면서 부득(夫得)은 미륵불(彌勒佛)을 성심껏 구했고, 박박(朴朴)은 미타불(彌陀佛)을 경례하고 염송(念誦)했다.

3년이 못되어 경룡(景龍) 3년 기유(己酉; 709) 4월 8일은 성덕왕(聖德王) 즉위 8년이다.  해는 저물어가는데 나이 20이 가깝고 얼굴이 매우 아름다운 낭자(娘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 냄새를 풍기면서 갑자기 북암(北庵; 향전鄕傳에는 남암南庵이라 했다)에 와서 자고 가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친다. 

갈 길 더딘데 해는 떨어져 모든 산이 어둡고,

길은 막히고 성은 멀어 인가도 아득하네.

오늘은 이 암자에서 자려 하오니,

자비스러운 스님은 노하지 마오. 

박박(朴朴)은 말했다.  "절은 깨끗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가 가까이 올 곳이 아니오.  어서 다른 데로 가고 여기에서 지체하지 마시오."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기記에는 말하기를, "나는 모든 잡념雜念이 없으니 혈낭血囊을 가지고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  낭자(娘子)는 남암(南庵; 향전鄕傳에는 북암北庵)으로 돌아가서 또 전과 같이 청하니 부득(夫得)은 말했다.  "그대는 이 밤중에 어디서 왔는가."  낭자가 대답한다.  "맑기가 태허(太虛)와 같은데 어찌 오고 가는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어진 선배의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德行)이 높고 굳다는 말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菩提)를 이루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그리고는 게(偈) 하나를 주었다. 

해 저문 깊은 산길에,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네.

대나무와 소나무 그늘은 그윽하기만 하고,

시내와 골짜기에 물소리 더욱 새로워라.

길 잃어 잘 곳 찾는 게 아니요,

존사(尊師)를 인도하려 함일세.

원컨대 내 청 들어만 주시고,

길손이 누구인지 묻지 마오. 

부득사(夫得師)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면서 말했다.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衆生)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일 것이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이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소."  이에 그를 맞아 읍(揖)하고 암자 안에 있게 했다.  밤이 되자 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닦아 희미한 등불이 비치는 벽 밑에서 고요히 염불했다.  밤이 새려 할 때 낭자는 부득을 불러 말했다.  "내가 불행히 마침 산고(産故)가 있으니 원컨대 스님께서는 짚 자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부득이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은은히 촛불을 비치니 낭자는 이미 해산을 끝내고 또 다시 목욕하기를 청한다.  부득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마음속에 얽혔으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보다 더해서 마지못하여 또 목욕통을 준비해서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니 이미 통 속 물에서 향기가 강하게 풍기면서 금액(金液)으로 변한다.  부득이 크게 놀라자 낭자가 말했다.  "우리 스승께서도 이 물에 목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득이 마지못하여 그 말에 좇았더니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결이 금빛으로 되고, 그 옆을 보니 졸지에 연대(蓮帶) 하나가 생겼다.  낭자가 부득에게 앉기를 권하고 말한다.  "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인데 여기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도록 한 것이오."

말을 마치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한편 박박(朴朴)이 생각하기를, "부득이 오늘 밤에 반드시 계(戒)를 더럽혔을 것이니 비웃어 주리라"하고 가서 보니 부득은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되어 광명(光明)을 내뿜는데 그 몸은 금빛으로 변해 있었다.  박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한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득이 그 까닭을 자세히 말해 주니 박박은 탄식해 말한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다행히 부처님을 만났으나 도리어 대우하지 못했으니, 큰 덕(德)이 있고 지극히 어진 그대가 나보다 먼저 이루었소.  부디 옛날의 교분(交分)을 잊지 마시고 일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부득이 말한다.  "통 속에 금액이 남았으니 목욕함이 좋겠습니다."  박박이 목욕을 하여 부득과 같이 무량수(無量壽)를 이루니 두 부처가 서로 엄연히 대해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기를, "참으로 드문 일이로다."했다.  두 부처는 그들에게 불법(佛法)의 요지(要旨)를 설명하고 나서, 온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천보(天寶) 14년 을미(乙未; 755)에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즉위(<고기古記>엔 천감天監 24년 을미乙未에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했다고 했으나 그 선후가 뒤바뀐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할까)하여 이 말을 듣고 정유(丁酉; 757)년에 사자(使者)를 보내서 큰 절을 세우고 이름을 백월산 남사(白月山 南寺)라 했다.  광덕(光德) 2년(<고기古記>에는 대력大曆 원년이라고 했으나 역시 잘못된 것이다) 갑진(甲辰; 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자, 다시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금당(金堂)에 모시고 액자(額字)를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어 강당(講堂)에 모셨는데, 남은 금액(金液)이 모자라 몸에 전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불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그 액자는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논평해 말한다.  "낭(娘)은 참으로 부녀의 몸으로서 섭화(攝化)했다 할 만하다.  <화엄경(華嚴經)>에 마야부인(摩耶夫人) 선지식(善知識)이 십일지(十一地)에 살면서 부처를 낳아 해탈문(解脫門)을 여환(如幻)한 것과 같다.  이제 낭자의 순산한 뜻이 여기에 있으며, 그가 준 글은 슬프고도 간곡하고 사랑스러워서 천선(天仙)의 지취(志趣)가 있다.  아, 낭자가 만일 중생을 따라서 다라니(陀羅尼)를 해득할 줄 몰랐더라면 과연 이같이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 글 끝귀에는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자리함을 꾸짖지 마오'했어야 할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세속의 말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푸른빛 떨어지는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어떤 사람이 해 저문데 구름 속 길을 찾는가.

남암(南庵)이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위는 북암(北庵)을 찬(讚)한 글이다. 

골짜기에 해 저문데 어디로 가리,

남창(南窓)에 자리 있으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念珠) 세고 있으니,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위는 남암(南庵)을 찬(讚)한 글이다. 

10리(里) 솔 그림자에 한 길을 헤매다가,

밤 초제(招提)로 중을 찾아 시험했네.

세 통에 목욕 끝나니 날도 장차 새는데,

두 아이 낳아 던져 두고 서쪽으로 갔네. 

위는 성랑(聖娘)을 찬(讚)한 것이다.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무릎을 세우고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비옵나이다.

1,000손과 1,000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기를,

둘 다 없는 이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시오면, 그 자비(慈悲) 얼마나 클 것인가. 

찬(讚)해 말한다. 

죽마(竹馬)·총생(총笙)의 벗 거리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 눈 먼 사람 되었네.

대사(大士)가 자비로운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몇 사춘(社春)이나 버들꽃 못 보고 지냈을까.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정취(正趣), 조신(調信) 

옛날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처음 당(唐)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 어느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낙산(洛山)이라고 이름했으니, 대개 서역(西域)에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 때문이다.  이것을 소백화(小白華)라고도 했는데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眞身)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것을 빌어다가 이름지은 것이다.

여기에서 의상이 재계(齋戒)한 후 7일 만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龍天八部)의 시종(侍從)들이 굴 속으로 안내해 들어가므로 공중을 향해 참례(參禮)하니 수정(水精)으로 만든 염주 한 꾸러미를 내준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물러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바치므로 의상이 받들고 나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齋戒)하고 나서 비로소 관음(觀音)의 참 모습을 보았다.  관음이 말한다.  "좌상(座上)의 산마루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하다."  법사(法師)가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여기에 금당(金堂)을 짓고 관음상(觀音像)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바탕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대나무가 도로 없어지므로 그제야 비로소 관음의 진신(眞身)이 살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洛山寺)라 하고,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에 봉안(奉安)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 후에 원효법사(元曉法師)가 뒤를 이어 와서 여기에 예(禮)를 올리려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郊外)에 이르자 논 가운데에서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法師)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다.  법사(法師)가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친다.  법사(法師)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그를 불러 말한다.  "제호(醍호)스님은 쉬십시오."  그리고는 갑자기 숨고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法師)가 절에 이르자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의 자리 밑에 또 전에 보던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으므로 그제야 전에 만난 성녀(聖女)가 관음의 진신(眞身)임을 알았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했다.  법사는 성굴(聖窟)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眞容)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風浪)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그 뒤에 굴산조사(굴山祖師) 범일(梵日)이 태화(太和)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 이르니 한 중이 왼쪽 귀가 없어진 채 여러 중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다가 조사에게 말한다.  "나도 또한 한 고향 사람으로, 내 집은 명주(溟州)의 경계인 익령현(翼嶺縣) 덕기방(德耆坊)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다음날 본국(本國)에 돌아가시거든 모름지기 내 집을 지어주셔야 합니다."  이윽고 조사(祖師)는 총석(叢席)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염관(鹽官)에게서 법을 얻고(이 일은 모두 본전本傳에 자세히 있다) 회창(會昌) 7년 정묘(丁卯; 847)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굴山寺)를 세우고 불교를 전했다.

대중(大中) 12년 무인(戊寅; 858) 2월 보름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중이 창문 밑에 와서 말한다.  "옛날에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조사와 함께 약속을 하여 이미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늦는 것입니까."  조사는 놀라 꿈에서 깨자 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翼嶺) 경계에 가서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한 여인이 낙산(洛山) 아래 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그 이름을 물으니 덕기(德耆)라고 한다.  그 여인에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나이 겨우 8세로 항상 마을 남쪽 돌다리 가에 나가 놀았다.  그는 어머니께 말한다.  "나와 같이 노는 아이들 중에 금빛이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조사에게 말했다.  조사는 놀라고 기뻐하여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는 다리 밑에 가서 찾아보니 물 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는데 꺼내 보니 한쪽 귀가 없어진 것이 전에 보았던 중과 같았다.  이것은 곧 정취보살(正趣菩薩)의 불상(佛像)이었다.  이에 간자(簡子)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쳤더니 낙산(洛山) 위가 제일 좋다고 하므로 여기에 불전(佛殿) 3간을 지어 그 불상을 모셨다(고본古本에는 범일梵日의 일이 앞에 있고, 의상義湘과 원효元曉의 일은 뒤에 있다.  그러나 상고해 보건대, 의상義湘과 원효元曉 두 법사法師의 일은 당唐나라 고종高宗 때에 있었고, 범일梵日의 일은 회창會昌 후에 있었다.  그러니 연대年代가 서로 120여 년이나 차이가 난다.  그런 때문에 지금은 앞뒤를 바꾸어서 책을 꾸몄다.  혹은 범일梵日이 의상義湘의 문인門人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그 뒤 100여 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져 왔으나 오직 관음(觀音)·정취(正趣) 두 성인(聖人)을 모신 불전만은 그 화재를 면했고, 그 나머지는 모두 타 버렸다.  몽고(蒙古)의 병란이 있은 이후인 계축(癸丑)·갑인(甲寅) 연간(1253∼54)에 두 성인의 참 얼굴과 두 보주(寶珠)를 양주성(襄州城)으로 옮겼다.  몽고 군사가 몹시 급하게 공격하여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므로 주지선사(住持禪師) 아행(阿行; 옛 이름은 희현希玄)이 은으로 만든 합(盒)에 두 구슬을 넣어 가지고 도망하려 하자 이것을 절에 있는 종 걸승(乞升)이 빼앗아 땅속에 깊이 묻고 맹세했다.  "내가 만일 병란(兵亂)에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두 구슬은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못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요, 내가 만일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이 두 보물을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  갑인(甲寅; 1254)년 10월 22일에 이 성이 함락되어 아행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했다.  그는 적의 군사가 물러가자 이것을 파내어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이때 낭중(郎中) 이녹수(李祿綏)가 감창사(監倉使)였는데, 이것을 받아 감창고(監倉庫) 안에 간직해두고 교대할 때마다 서로 전해서 이어받았다.

무오(戊午; 1258)년 11월에 이르러 본업(本業)의 늙은 중, 기림사(祇林寺) 주지 대선사(大禪師) 각유(覺猷)가 임금께 아뢰었다.  "낙산사의 두 보주(寶珠)는 국가의 신보(神寶)이온데 양주성(襄州城)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 안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에 파내서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영(溟州營)의 창고 안에 간직하여 왔습니다.  지금 명주성(溟州城)도 지킬 수가 없사온즉 마땅히 어부(御府)로 옮겨 모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은 이를 허락하고 야별초(夜別抄) 10명을 내어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두 보주를 갖다가 내부(內府)에 안치해 두었다.  그때 사자로 간 10명에게는 각각 은 1근과 쌀 5석(石)씩을 주었다.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世逵寺; 지금의 興敎寺)의 장원(莊園)이 명주 날리군(捺李郡; <지리지地理志>를 상고해 보면, 명주溟州에는 날리군捺李郡이 없고 오직 날성군捺城郡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본래 날생군捺生郡이니 지금의 영월寧越이다.  또 우수주牛首州 영현領縣에 날령군捺靈郡이 있는데 본래는 날이군捺已郡이요 지금의 강주剛州이다.  우수주牛首州는 지금의 춘주春州이니 여기에 말한 날리군捺李郡은 어느 곳인지 알 수가 없다)에 있었는데, 본사(本寺)에서 중 조신(調信)을 보내서 장원(莊園)을 맡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태]수([太]守)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좋아해서 아주 반하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觀音菩薩) 앞에 가서 남몰래 그 여인과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로부터 몇 해 동안에 그 여인에게는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 앞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생각하는 마음에 지쳐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 속에 갑자기 김씨(金氏) 낭자(娘子)가 기쁜 낯빛을 하고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한다.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 속으로 사랑해서 잠시도 잊지 못했으나 부모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딴 사람에게로 시집갔다가 이제 부부가 되기를 원해서 왔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여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 년간 같이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집은 다만 네 벽뿐이고, 좋지 못한 음식마저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꼴이 말이 아니어서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草野)로 두루 다니니 옷은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몸도 가릴 수가 없었다.  마침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나는데 15세 되는 큰아이가 갑자기 굶어죽자 통곡하면서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羽曲縣; 지금의 羽縣)에 이르러 길가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다.  이제 내외는 늙고 병들었다.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10세 된 계집아이가 밥을 빌어다 먹는데,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렸다.  아픈 것을 부르짖으면서 앞에 와서 누웠으니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이 눈물을 씻더니 갑자기 말한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그대와 나누어 입어,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에 정이 맺어져 친밀해졌고 사랑도 굳어졌으니 가위 두터운 인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쇠약한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해오는데 남의 집 곁방살이에 하찮은 음식조차도 빌어서 얻을 수가 없게 되어, 수많은 문전(門前)에 걸식하는 부끄러움이 산과도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워하고 배고파해도 미처 돌봐 주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초(芝草)와 난초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그대는 내가 있어서 더 누(累)가 되고 나는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옛날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다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잃은 난새[난조鸞鳥]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人情)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아가고 그치는 것은 인력(人力)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 말을 따라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는데 여인이 말한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그대는 남쪽으로 가십시오."

이리하여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 하다가 꿈에서 깨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이 깜박거리고 밤도 이제 새려고 한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고 망연(망然)히 세상 일에 뜻이 없다.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한평생의 고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아예 관음보살의 상(像)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다.  그는 돌아와서 꿈에 해현(蟹峴)에 묻은 아이를 파 보니 그것은 바로 석미륵(石彌勒)이다.  물로 씻어서 근처에 있는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 장원(莊園)을 맡은 책임을 내놓고 사재(私財)를 내서 정토사(淨土寺)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 수가 없다.

논평해 말한다.  "이 전기(傳記)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나간 일을 생각해 보니, 어찌 조신사(調信師)의 꿈만이 그렇겠느냐.  지금 모두가 속세의 즐거운 것만 알아 기뻐하기도 하고 서두르기도 하지만 이것은 다만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이에 사(詞)를 지어 경계한다. 

잠시 쾌활한 일 마음에 맞아 한가롭더니, 근심 속에 남모르게 젊은 얼굴 늙어졌네.

모름지기 황량(黃粱)이 다 익기를 기다리지 말고, 인생이 한 꿈과 같음을 깨달을 것을.

몸 닦는 것 잘못됨은 먼저 성의에 달린 것, 홀아비는 미인 꿈꾸고 도둑은 재물 꿈꾸네.

어찌 가을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淸凉)의 세상에 이르리. 

어산불영(魚山佛影)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의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 이것은 마땅히 마야사摩耶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어魚를 말한 것이다)이니, 그 곁에 가라국(呵라國)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서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가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이때 국경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고 못 속에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萬魚山)에 나찰녀(羅刹女) 다섯이 있어서 독룡과 왕래하면서 사귀었다.  그런 때문에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五穀)이 익지 못했다.  왕은 주문(呪文)을 외어 이것을 금하려 했으나 금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說法)한 뒤에 나찰녀(羅刹女)는 오계(五戒)를 받아 그 후로는 재앙이 없어졌다.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龍)이 마침내 화(化)하여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어서 각각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났다."(이상은 <고기古記>에 있다).

또 상고해 보면, 대정(大定) 12년 경자(庚子; 1180)는 곧 고려 명종(明宗) 11년인데 이때 비로소 만어사(萬魚寺)를 세웠다.  동량(棟梁) 보림(寶林)이 임금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말했다.  "이 산 속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北天竺) 가라국(訶羅國) 부처의 영상(影像)과 서로 같은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산 가까운 곳이 양주(梁州) 경계의 옥지(玉池)인데 여기에도 역시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때때로 강가에서 구름 기운이 일어나서 산마루에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가 나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 영상(影像)의 서북쪽에 반석(盤石)이 있어 항상 물이 괴어 없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부처가 가사(袈裟)를 빨던 곳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상은 모두 보림(寶林)의 말인데, 지금 친히 와서 모두 참례(參禮)하고 보니 또한 분명히 공경하고 믿을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골짜기 속의 돌이 전체의 3분의 2는 모두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그 하나요,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아서 혹은 보이기도 하고 혹은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북천축(北天竺)의 글은 뒤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다.

가자함(可字函)의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제7권에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야건가라국(耶乾訶羅國) 고선산(古仙山), 담복화림(담복花林) 독룡(毒龍)의 옆이요 청련화천(靑蓮花泉)의 북쪽인, 나찰혈(羅刹穴) 가운데에 있는 아나사산(阿那斯山) 남쪽에 이르렀다.  이때 그 구멍에는 나찰(羅刹) 다섯이 있어 이것이 여룡(女龍)으로 화하여 독룡과 교접하는데, 독룡은 다시 우박을 내리고 나찰(羅刹)은 난폭한 행동을 하니 기근(飢饉)과 역질(疫疾)이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왕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신기(神祇)에게 빌고 제사지냈으나 아무런 도움도 없었다.  그때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범지(梵志)가 대왕께 아뢰었다.  '가비라국(伽毗羅國) 정반왕(淨飯王)의 왕자(王子)가 지금 도(道)를 이루어 호(號)를 석가문(釋迦文)이라고 합니다.'  완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여 부처를 향해서 예를 올리고 말한다.  '어찌해서 오늘날 불교가 이미 일어났다 하는데 이 나라에는 오지 않으십니까.'  그때 석가여래는 여러 비구(比丘)에게 영을 내려서 여섯 가지 신통력(神通力)을 얻은 자를 따르게 하고 나건가라왕(那乾訶羅王)의 불파부제(弗婆浮提)가 청하는 것을 받아 주기로 했다.  그때 세존(世尊)의 이마에서 광명(光明)이 나와서 1만이나 되는 여러 대화불(大化佛)을 만들어 그 나라로 갔다.  이때 용왕(龍王)과 나찰녀(羅刹女)는 온몸뚱이를 땅에 던져 부처에게 계(戒)를 받기를 청했다.  이에 부처는 곧 그들을 위하여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설법(說法)하니 용왕은 이 설법을 다 듣고 나자 꿇어앉자 합장(合掌)하고 세존이 항상 여기에 머물러 있기를 청하여 '부처님께서 만일 이곳에 계시지 않으면 저에게 악한 마음이 생겨서 아누보리(阿누菩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때 범천왕(梵天王)이 다시 와서 부처에게 예(禮)하고 청한다.  '파가파(婆伽婆)께서는 앞으로 올 세상의 모든 중생(衆生)들을 위할 것이요, 이 작은 한 용(龍)만을 위하지 마시옵소서.'  이에 백천(百千)의 범왕(梵王)들도 모두 이러한 청을 했다.

이때 용왕이 칠보대(七寶臺)를 내어 여래(如來)에게 바치니 부처는 용왕에게 말한다.  '이 대(臺)는 나에게 필요치 않으니 너는 지금 다만 나찰(羅刹)이 있는 석굴(石窟)을 가져다가 나에게 시주(施主)하도록 하라.'  용왕은 이 말을 듣고 기뻐했다 한다.  이때 여래가 용왕을 위로했다.  '내가 네 청을 받아들여 네 굴 속에 앉아서 1,500년을 지내겠다.'  말을 마치고 부처가 몸을 솟구쳐 굴 속으로 들어가니 이내 그 돌은 밝은 거울과 같아져서, 사람들이 그 얼굴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모든 용들이 다 나타났다.  부처는 돌 속에 있으면서 빛을 밖으로 나타내니 모든 용들은 합장하고 기뻐하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서도 항상 부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때 세존(世尊)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석벽(石壁) 속에 앉아 있었는데, 중생들이 볼 때에 멀리서 바라보면 나타나 있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제천(諸天)이 부처의 영상(影像)에 공양하면 부처의 영상도 역시 설법(說法)했다."

또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바위 위를 발로 밟으니 문득 금옥(金玉)의 소리가 났다."

<고승전(高僧傳)>에는 또 이렇게 말했다.  "혜원(惠遠)이 들으니 천축국(天竺國)에 부처님의 영상이 있는데 그것은 옛날 용을 위해서 남겨 놓은 부처님의 영상으로, 북천축(北天竺) 월지국(月支國) 나갈가성(那竭呵城)의 남쪽 고선인(古仙人)의 석실(石室) 속에 있었다 한다."

또 법현(法現)의 <서역전(西域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나갈국(那竭國)의 국경에 가면 나갈성(那竭城) 남쪽으로 반 유순(由旬)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으니, 그곳은 박산(博山)의 서남쪽이며 그 속에 부처가 영상을 남겼다.  여기서 10여 보(步)를 가서 보면 부처의 진형(眞形)처럼 광명이 환하게 나타나지만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하게 보였다.  여러 나라 왕들이 화공(畵工)을 보내서 이것을 그리려 했지만 비슷하게도 그릴 수가 없었다.  나라 사람들에게 전해 오는 말로는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이 모두 마땅히 여기에 영상(影像)을 남길 것이니, 그 영상의 서쪽 100보쯤 되는 곳에, 부처가 이 세상에 있을 때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깎던 곳이 있다고 한다."

 성자함(星字函)의 <서역기(西域記)> 제2권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여래(如來)가 세상에 있을 때에 이 용이 소 치는 사람이 되어 왕에게 소의 젖을 올렸는데, 올리다가 잘못하여 꾸지람을 받자 속으로 분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돈을 주고 꽃을 사서 부처님에게 공양했다.  그리고 솔도파(솔堵婆)에게 수기(授記)하기를, '부디 악룡(惡龍)이 되어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 주시오'하고는 석벽(石壁)에 가서 몸을 던져 죽자, 드디어 이 굴 속의 대룡왕(大龍王)이 되어 악한 마음을 일으켰다.  여래(如來)가 이것을 보고 몸을 변하여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 여기에 오니 용은 부처를 보자 독한 마음이 드디어 그쳐져서 불살계(不殺戒)를 받고 청하기를, '부처님께서 항상 이 굴에 계시면서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했다.  이에 부처가 말했다.  '나는 장차 적멸(寂滅)할 것이다.  그러나 너를 위해서 내 영상을 남겨 둘 것이니 네가 만일 독하고 분한 마음이 생기거든 항상 내 영상을 바라보면 독한 마음이 없어질 것이다.'  부처는 정신을 가다듬어 홀로 석실(石室)로 들어갔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이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 위를 발로 차서 칠보(七寶)로 삼았다 한다."  이상은 모두 경문(經文)이니 대략 이와 같다.

해동(海東) 사람들은 이 산을 이름하여 아나사(阿那斯)라고 했으나 마땅히 마나사(摩那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나사를 번역하면 어(魚)가 되니, 대개 저 북천(北天)에서 있었던 일을 취해다가 산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대산(臺山) 오만진신(五萬眞身) 

산중에 있는 고전(古傳)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을 진성(眞聖), 즉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살던 곳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자장법사(慈藏法師)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五臺山)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자 하여 신라 선덕왕(善德王) 대인 정관(貞觀) 10년 병신(丙申; 636, <당승전唐僧傳>에서는 12년이라고 했지만 여기에서는 <삼국본사三國本史>에 따른다)에 당(唐)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 태화지(太和池) 가의 돌부처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있는 곳에 이르러 공손히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갑자기 부처가 네 구(句)의 게(偈)를 주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그 네 구의 글은 기억할 수가 있으나 모두가 범어(梵語)여서 그 뜻을 전혀 풀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중 하나가 붉은 비단에 금색(金色) 점이 있는 가사(袈裟) 한 벌과 부처의 바리때 하나와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法師)의 곁으로 와서는, 어찌해서 수심에 싸여 있는가 하고 물으니 이에 법사는 대답한다.  "꿈에 네구의 게(偈)를 받았으나 범어로 되어 있어서 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은 그 글을 번역하여 말했다.  "가라파좌낭(呵라婆佐낭)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말이요, 달예치구야(達예치구야)란 본래의 성품은 가진 바 없다는 말이요, 낭가희가낭(낭伽희伽낭)이란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해석(解釋)한다는 말이요, 달예노사나(達예盧舍那)란 노사나불(盧舍那佛)을 곧 본다는 말입니다."  말을 마치자 자기가 가졌던 가사 등 물건을 법사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이것은 본사(本師) 석가세존(釋迦世尊)이 쓰시던 도구(道具)이니 그대가 잘 보호해 가지십시오."  그는 또 말했다.  "그대의 본국의 동북방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五臺山)이 있는데 1만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법사(法師)는 두루 보살(菩薩)의 유적(遺跡)을 찾아 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현신(現身)해서 재를 청하고 7일 동안 공양하고 나서 법사(法師)에게 말한다.  "전일에 게(偈)를 전하던 늙은 중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또 절을 짓고 탑을 세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별전(別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법사는 정관(貞觀) 17년(643)에 이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가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보려 했으나 3일 동안이나 날이 어둡고 그늘져서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원령사(元寧寺)에 살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뵈었다고 하였다.  뒤에 칡덩굴이 서려 있는 곳으로 갔는데, 지금의 정암사(淨岩寺)가 바로 이곳이다(이것도 역시 별전別傳에 실려 있다).

그 후 두타(頭陀) 신의(信義)는 범일대사(梵日大師)의 제자로서 이 산을 찾아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쉬던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가 죽은 후에는 암자도 역시 오랫 동안 헐어져 있었는데, 수다사(水多寺)의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니 지금의 월정사(月精寺)가 바로 이것이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왔을 때 정신대왕(淨神大王)의 태자(太子) 보천(寶川)·효명(孝明) 두 형제(<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신라에는 정신淨神·보천寶川·효명孝明의 세 부자父子에 대한 명문明文이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의 하문下文에, 신룡神龍 원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했으니 신룡神龍 원년은 곧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 을사乙巳다.  왕王가의 이름은 흥광興光이요, 본명本名은 융기隆基이니 신문왕神文王의 둘째아들이다.  성덕聖德의 형 효조孝照는 이름이 이공理恭이니 혹은 홍천洪川이라고 했다.  이는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들이다.  신문왕神文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자는 일조日照니 정신淨神은 아마 정명政明 신문神文이 잘못 전해진 것인 듯싶다.  효명孝明은 효조孝照, 혹은 소昭의 잘못 전해진 것인 듯하다.  이 기록에 효명孝明이 즉위한 것만 말하고 신룡神龍 연간에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고 하는 것은 또한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룡神龍 연간에 절을 세운 이는 바로 성덕聖德이다)가 하서부(河西府; 지금의 명주溟州에 또한 하서군河西郡이 있으니 이것이다.  또는 하곡현河曲縣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울주蔚州라 하나 잘못이다)에 와서 세헌각간(世獻角干)의 집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큰 고개를 지나 각각 무리 1,000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닿아 여러 날 유람하는데, 갑자기 어느날 밤에 두 형제가 속세(俗世)를 벗어날 뜻을 남몰래 약속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도망하여 오대산(五臺山; <고기古記>에는, 태화太和 원년元年 무신戊申 8월 초에 왕王이 산속에 숨었다고 했으나 아마 이것은 잘못인 듯싶다.  상고해 보건대, 효조孝照를 효소孝昭라고도 했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에 즉위했는데 이때 나이 16세였고, 장안長安 2년 임인壬寅에 죽었으니 나이 26세였고, 성덕왕聖德王이 이 해에 즉위했으니 나이 22세였다.  만일 태화太和 원년이 무신戊申이라면 효조孝照가 즉위한 갑진甲辰년보다 이미 45년이나 지났으니 즉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때다.  이것으로 이 글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것을 취하지 않는다)에 들어가니 그를 시중들던 사람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두 태자(太子)가 산 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에 피므로 형 태자(太子)가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물러 살았으니 이곳을 보천암(寶川庵)이라 했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600여 보(步)를 가니 북쪽 대(臺)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이 있으므로 아우 태자(太子) 효명(孝明)이 또 암자를 짓고 살면서 각각 부지런히 업(業)을 닦았다.

어느날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예(禮)를 하러 올라가니 동쪽 대(臺)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고, 남쪽 대(臺)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타나 있고, 서쪽 대(臺)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나타나 있고, 북쪽 대(臺)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이 나타나 있고, 중앙의 대(臺) 풍로산(風盧山)은 또 지령산(地靈山)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이와 같은 5만 보살의 진신에게 일일이 예를 했다.  날마다 이른 아침에는 문수보살이 지금의 상원(上院)인 진여원(眞如院)에 이르러 서른 여섯 가지의 모양으로 변하여 나타났다.  혹은 부처의 얼굴 모양이 되고 어떤 때는 보주(寶珠) 모양이 되고, 또 혹은 부처의 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손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보탑(寶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불두(萬佛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만등(萬燈)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교(金橋)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고(金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종(金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신통(神通)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루(金樓)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륜(金輪)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강저(金剛杵)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옹(金甕)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비녀 모양으로도 된다.  또 혹은 오색 광명(五色 光明)의 모양으로, 혹은 오색 원광(圓光)의 모양으로, 혹은 길상초(吉祥草) 모양으로, 혹은 푸른 연꽃 모양으로도 되었다.  또 혹은 금전(金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은전(銀田)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부처의 밭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뇌전(雷電) 모양으로도 되었다.  혹은 여래(如來)가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지신(地神)이 솟아나오는 모양으로, 혹은 금봉(金鳳)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금오(金烏)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말이 사자(獅子)를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닭이 봉(鳳)을 낳는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청룡(靑龍)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백상(白象)의 모양으로도 되고, 혹은 유저(遊猪) 모양으로도 변하고, 혹은 청사(靑蛇) 모양으로도 변해 보였다.  두 태자(太子)는 항상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밤이 되면 각각 자기 암자에서 도(道)를 닦았다.

이때 정신왕(淨神王)의 아우가 왕과 왕위(王位)를 다투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를 폐하고, 네 사람의 장군을 보내서 산에 와서 이들 두 태자(太子)를 맞아오게 했다.  이들은 먼저 효명(孝明)의 암자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니 오색 구름이 7일 동안 그곳을 덮어 나라 사람들이 그 구름을 찾아 모두 모여 노부(鹵簿)를 벌여놓고 두 태자를 맞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천(寶川)은 울면서 이를 사양하므로 효명을 받들고 돌아가서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이가 나라를 여러 해 다스렸다(기記에는 말하기를, 왕위王位에 있은 지 20여 년이라 했다.  이는 대개 죽을 때의 나이가 26세라 한 것을 잘못 전한 것이다.  그가 왕위王位에 있었던 것은 다만 10여 년뿐이었다.  또 신문왕神文王의 아우가 왕위王位를 다투었다고 하였는데, <국사國史>에는 그런 글이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신룡(神龍) 원년(이것은 당唐나라 중종中宗의 복위復位한 해로서 신라 성덕왕聖德王 즉위 4년이다) 을사(乙巳) 3월 초나흘에 비로소 진여원(眞如院)을 고쳐 세웠는데 이때 성덕왕(聖德王)은 친히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산에 와서 전당(殿堂)을 세우고, 또 흙으로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당(堂)에 모셨다.  그리고 이름있는 중 영변(靈卞) 등 5명으로 하여금 <화엄경(華嚴經)>을 오래 돌려 가면서 읽게 하고 이어 화엄사(華嚴社)를 조직해 오랫동안의 공비(供費)로,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이 산에서 가까운 주현(州縣)으로부터 창조(倉租) 100석(石)과 정유(淨油) 한 섬을 바치는 것을 정해 놓은 규칙으로 삼았으며, 진여원에서 서쪽으로 6,000보(步)쯤 되는 의니점(矣尼岾) 고이현(古伊峴) 밖에 이르기까지의 시지(柴地) 15결(結)과 밤나무밭 6결(結), 좌위(坐位) 2결(結)을 내어서 장사(莊舍)를 세웠다.

보천(寶川)은 항상 그 영동(靈洞)의 물을 길어다가 마시더니 만년(晩年)에는 육신(肉身)이 공중을 날아 유사강(流沙江) 밖 울진국(蔚珍國) 장천굴(掌天窟)에 이르러 쉬었으므로 여기에서 수구다라니경(隨求陀羅尼經)을 외는 것으로 밤낮의 과업(課業)으로 삼았다.  어느날 장천굴(掌天窟)의 굴신(窟神)이 현신(現身)하여 그에게 말했다.  "내가 이 굴의 신이 된 지가 이미 2,000년이나 되었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수구다라니경의 진리(眞理)를 들었습니다."  말을 마치자 신(神)은 보살계(菩薩戒)를 받기를 청했다.  그가 계(戒)를 받고 나자 그 이튿날 굴도 또한 형체가 없어져 버렸다.  보천(寶川)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곳에 20일 동안이나 머물고 있다가 오대산 신성굴(五臺山神聖窟)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또 50년 동안 참 마음을 닦았더니 도리천(도利天)의 신(神)이 삼시(三時)로 설법(說法)을 듣고, 정거천(淨居天)의 무리들은 차를 달여 올렸으며, 40명의 성인(聖人)은 10척 높이 하늘을 날면서 항상 그를 호위해 주고 그가 가졌던 지팡이는 하루에 세 번씩 소리를 내면서 방을 세 바퀴씩 돌아다니므로 이것을 쇠북과 경쇠로 삼아 수시로 수업(修業)했다.  문수보살이 혹 보천(寶川)의 이마에 물을 붓고 성도기별(成道記별)을 주기도 했다.

보천이 죽던 날, 후일에 산 속에서 행할 국가를 이롭게 할 일을 기록해 두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큰 산맥으로, 각 대(臺)는 진신이 항상 있는 곳이다.  푸른빛 방위인 동대(東臺) 북각(北角) 아래의 북대(北臺)의 남쪽 기슭 끝에는 마땅히 관음방(觀音房)을 두어서 원상(圓像)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그린 1만 관음보살상을 모시도록 하라.  그리고 복전승(福田僧) 5명은 낮에는 8권의 <금경(金經)>과 <인왕반야(仁王般若)>·천수주(千手呪)를 읽고, 밤엔 <관음경(觀音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하고, 그곳을 원통사(圓通社)라 하라.  붉은빛 방위인 남대(南臺) 남쪽 면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어 원상(圓像)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그린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地藏經)>과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을 읽고, 밤엔 <점찰경(占察經)> 예참(禮懺)을 염송하고 이곳을 금강사(金剛社)라 일컬어라.  흰 빛 바위인 서대(西臺) 남쪽 면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원상(圓像) 무량수불(無量壽佛)과 흰 바탕에 그린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모시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5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8권의 <법화(法華)>를 읽고, 밤엔 아미타불(阿彌陀佛) 예참을 염송하고 수정사(水精社)라 일컬어라.  검은 빛 방위인 북대(北臺) 남쪽 면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원상(圓像) 석가불(釋迦佛)과 검은 바탕에 그린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오백나한(五百羅漢)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엔 <불보은경(佛報恩經)>과 <열반경(涅槃經)>을 읽게 하고 밤엔 <열반경(涅槃經)> 예참(禮懺)을 염송(念誦)케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일컬어라.  누른 빛 방위인 중대(中臺)의 진여원(眞如院)에는 가운데에는 이상(泥像)으로 된 문수보살 부동상(不動像)을 모시고 뒷벽에는 누른 바탕에 그린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우두머리로 한 삼십륙 문수보살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읽고, 밤에는 문수보살 예참을 염송하고 이곳을 화엄사(華嚴社)라 일컬어라.  보천암(寶川庵)을 고쳐 세워 화장사(華藏寺)라 하고 원상(圓像) 비로자나삼존(毗盧遮那三尊)과 대장경(大藏經)을 모시라.  복전승 5명은 낮에는 문장경(門藏經)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華嚴神衆)을 염송할 것이며, 매년 100일 동안 화엄회(華嚴會)를 베풀고 이곳을 법륜사(法輪社)라 일컬어라.  이 화장사(華藏寺)를 오대사(五臺社)의 본사(本寺)로 하여 굳게 지키도록 하라.  여기에는 정행 복전(淨行 福田)에게 명하여 길이 향화(香火)를 계속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국왕(國王)은 오래 사시고 백성은 편안할 것이며, 문무(文武)가 모두 화평하고 백곡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下院)에 문수갑사(文殊岬寺)를 배치하여 사(社)의 도회(都會)로 삼게 하라.  여기에는 복전승(福田僧) 7명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화엄신중(華嚴神衆)의 예참(禮懺)을 행하고 위의 37명이 재(齋)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을 하서부(河西府) 도내(道內) 8주(州)의 조세(租稅)로써 공양하는 네 가지 물건의 자금에 충당할 것이다.  이렇게 대대(代代)의 임금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명주(溟州; 옛날의 해서부河西府) 오대산 보질도 태자전기(五臺山 寶叱徒 太子傳記) 

신라의 정신태자(淨神太子) 보질도(寶叱徒)는 그 아우 효명태자(孝明太子)와 함께 하서부(河西府)의 세헌각간(世獻角干)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큰 고개를 넘어 각각 1,000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가서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 8월 5일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때 그 무리 중의 시위하는 자들은 두 태자를 찾지 못하고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  형 되는 태자는 오대산 중대(中臺) 남쪽 밑에 있는 진여원(眞如院) 터 아래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터에 풀로 암자를 지어 살고, 아우 태자 효명(孝明)은 북대(北臺)의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역시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형제 두 사람은 부처님에게 예배하고 염불하며 행실을 닦으면서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대(臺)에 나가서 공손하게 예배했다.  푸른 빛 방위인 동쪽 대(臺)의 만월형(滿月形)으로 된 산에는 관음보살의 진신(眞身) 1만이 항상 있고, 붉은 빛 방위인 남쪽 대(臺)의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우두머리로 한 1만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항상 있고, 흰 빛 방위인 서쪽 대(臺)의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항상 있고, 검은 빛 방위인 북쪽 대(臺)의 상왕산(相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00 대아라한(大阿羅漢)이 항상 있고, 누른 빛 방위인 중앙 대(臺)의 풍로산(風盧山)은 또 지로산(地爐山)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비로자나(毗盧遮那)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항상 있다.  또 진여원(眞如院)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이른 아침이면 삼십륙형(三十六形; 대산오만진신전臺山五萬眞身傳에 나온다)으로 화하여 나타났다.  두 태자는 함께 예배하고, 날마다 이른 아침이면 골짜기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서 1만 진신(眞身)의 문수보살에 공양했다.

이때 정신태자(淨神太子)의 아우 부군(副君)이 신라에 있어 왕위(王位)를 다투다가 죽음을 당하니 나라 사람들이 장군 네 명을 보내서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러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바로 이때 오색 구름이 오대산에서부터 신라에까지 뻗쳐 7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빛을 발했다.  나라 사람들은 그 빛을 찾아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질도태자(寶叱徒太子)는 울면서 돌아가지 않으려 하니 효명태자를 모시고 돌아가 왕위(王位)에 오르게 했다.  그가 왕위에 있은 지 20여 년인 신룡(神龍) 원년(705) 3월 8일에 진여원을 처음 세웠다 한다.

보질도태자는 항상 골짜기에 신령스러운 물을 마시더니 육신(肉身)이 공중을 떠서 유사강(流沙江)에 이르러 울진대국(蔚珍大國)의 장천굴(掌天窟)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다시 오대산 신성굴(神聖窟)로 돌아와 50년 동안이나 도를 닦았다고 한다.  오대산은 바로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로서 각 대(臺)에는 진신이 항상 있다고 한다. 

오대산월정사(臺山月精寺) 오류성중(五類聖衆)

 절 안에 전해 오는 고기(古記)를 상고하여 보면 이렇게 말했다.  자장법사(慈藏法師)는 오대산(五臺山)에 처음 이르러 진신(眞身)을 보려고 산기슭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으나, 7일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묘범산(妙梵山)으로 가서 정암사(淨巖寺)를 세웠다.  그 뒤에 신효거사(信孝居士)라는 이가 있었는데 혹은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化身)이라고도 했는데 그의 집은 공주(公州)에 있고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려고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학(鶴) 다섯 마리를 보고 활로 쏘나, 학 한 마리가 날개의 깃 한 조각을 떨어뜨리고 갔다.  거사는 그것을 집어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사람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이에 고기는 얻지 못하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어머니께 바쳤다.

그 후에 그는 중이 되어 자기 집을 내놓아서 절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효가원(孝家院)이다.  거사는 경주(慶州) 경계로부터 하솔(河率)에 이르러 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사람의 모양으로 보이므로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길에서 늙은 부인을 보고, 살 만한 곳을 물었더니 그 부인이 말했다.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는데 거기가 살 만합니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거사는 이것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가르침인 것을 알고, 곧 성오평(省烏坪)을 지나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 모옥(茅屋)을 지은 곳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윽고 중 다섯 명이 오더니 말한다.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袈裟) 한 폭은 지금 어디 있는가."  거사가 영문을 몰라하자 중이 또 말한다.  "그대가 집어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본 그 학의 깃이 바로 가사이다."  거사가 그 깃을 내주자, 중은 그 깃을 가사의 뚫어진 폭 속에 갖다 대니 서로 꼭 맞았는데, 그것은 깃이 아니고 베였다.  거사는 다섯 중과 작별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들이 다섯 성중(聖衆)의 화신(化身)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月精寺)는 처음에 자장법사가 모옥을 지었으며, 그 다음에는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와서 살았고, 그 다음에는 범일(梵日)의 제자인 신의두타(信義頭陀)가 와서 암자를 세우고 살았으며 뒤에 또 수다사(水多寺)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와서 살았다.  이로부터 점점 큰 절을 이루었다.  절의 다섯 성중(聖衆)과 9층으로 된 석탑(石塔)은 모두 성자(聖者)의 자취이다.

상지자(相地者)가 말했다.  "나라 안의 명산(名山)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

 남월산(南月山; 또는 감산사甘山寺라고도 한다) 

이 절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금당주미륵존상화광(金堂主彌勒尊像火光) 후기(後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원(開元) 7년 을미(乙未; 719) 2월 15일에 중아찬(重阿飡) 전망성(全忘誠)이 그의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죽은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서 공손하게 감산사(甘山寺)와 석미륵(石彌勒) 하나를 만들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前妻) 고로리(古老里), 후처(後妻) 아호리(阿好里)와, 또 서형(庶兄) 급막(及漠) 일길찬(一吉찬), 일당(一幢) 살찬(薩찬),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힐買) 등을 위하여 이러한 착한 일을 했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故人)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고인성지古人成之 이하는 글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옛 글 그대로 적어둘 뿐이다.  이 아래도 마찬가지다)

미타불화광(彌陀佛火光) 후기(後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侍全)은 일찍이 상의(尙衣)로서 임금을 모시고 또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도로 바치고 집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이때 국주(國主) 대왕(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죽은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 고로리(古老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서 감산(甘山)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절을 세웠다.  또 석미타(石彌陀) 하나를 만들어 죽은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하여 모셨는데,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제계帝系를 상고해 보면, 김개원金愷元은 태종太宗 김춘추金春秋의 여섯째 아들 개원각간愷元角干이며, 문희文熙가 낳은 이다.  성지전誠志全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우東海攸友는 필시 법민왕法敏王을 동해東海에 장사지낸 것을 말한 것인 듯싶다) 

천룡사(天龍寺) 

동도(東都)의 남산(南山) 남쪽에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세속(世俗)에서는 고위산(高位山)이라 한다.  산 남쪽에 절이 있는데 속칭(俗稱) 고사(高寺), 또는 천룡사(天龍寺)라고 한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는 이렇게 말했다.  "계림(鷄林)에는 두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 줄기의 역수(逆水)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천재(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天龍寺)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이 생긴다."

속전(俗傳)에는 이렇게 말한다.  "역수는 이 고을 남쪽 마등오촌(馬等烏村)의 남쪽을 흐르는 내가 이것이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에서 시작되는데, 중국에서 온 사자(使者)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이내 나라가 망할 것이다.'"

또 서로 전하는 말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단월(檀越)에게 딸 둘이 있어서 이름을 천녀(天女)·용녀(龍女)라 하였는데, 부모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세우고 딸들의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천룡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곳은 경지(境地)가 이상하고 불도(佛道)를 돕는 곳이었는데 신라 말년에 파괴되어 이미 오래되었다.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젖을 먹여 키운 최은함(崔殷함)의 아들 승로(承魯)가 숙(肅)을 낳고 숙(肅)이 시중(侍中)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제안(齊顔)이 이 절을 중수(重修)하여 없어졌던 절을 일으켰다.  이에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하고, 조정의 명을 받았으며, 다시 신서(信書)와 원문(願文)까지 절에 남겨 두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자 절을 지키는 신(神)이 되어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을 많이 나타냈다.

그 신서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단월인 내사시랑 동내사문 하평장사주국(內史侍郞 同內史門 下平章事柱國) 최제안(崔齊顔)은 쓰노라.  경주(慶州) 고위산(高位山)의 천룡사가 파괴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이에 제자 최제안은 특별히 성수(聖壽)가 무강하시고 국가가 편안하고 태평하기를 원해서 전당(殿堂)·낭각(廊閣)과 방사(房舍)·주고(廚庫)를 모두 갖추어 이룩하고, 또 석조불(石造佛)과 이소불상(泥塑佛像) 몇 개를 만들어 석가만일도량을 열었다.  이미 국가를 위해서 수리하여 세웠으니 조정에서 절의 주지(住持)를 정해 보내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지만 이 주지를 교대할 때에는 도량(道場)의 중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가 없다.  희사(喜捨)한 토지를 가지고 사원(寺院)을 충족하게 하는 것을 보면, 팔공산(八公山)의 지장사(地藏寺)와 같은 절은 희사한 토지가 200결(結)이었고, 비슬산(毗瑟山)에 있는 도선사(道仙寺)는 20결이었고, 서경(西京) 사면에 있는 산사(山寺)들도 각기 20결씩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유직(有職)·무직(無職)을 물론하고 모름지기 계(戒)를 갖추고 재주가 높은 이를 뽑아서 절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여러 차례를 계속하여 주지로 삼아 분향(焚香)하고 도 닦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제자 제안(齊顔)은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 천룡사에서도 역시 절의 많은 중들 가운데서 재주와 덕이 함께 뛰어난 고승(高僧)으로 동량(棟樑)이 될 만한 사람을 뽑아서 주지로 삼아 길이 분향(焚香) 수도(修道)하게 하고자 한다.  이에 갖추어 글로 기록하여 강사(剛司)에게 맡겨 두는 것이니 이때부터 비로소 주지를 두게 되었다.  유수관(留守官)은 공문(公文)을 받아 도량의 여러 중들에게 보여 모두를 각각 알도록 할 것이다.  중희(重熙) 9년 6월 일에 관직(官職)을 갖추어 위와 같이 서명(署名)한다."

상고해 보면 중희(重熙)는 거란(契丹) 흥종(興宗)의 연호이며, 본조(本朝) 정종(靖宗) 7(6)년인 경신년(庚辰年; 1040)이다. 

무장사(무藏寺) 미타전(彌陀殿) 

서울 동북쪽 20리 쯤 되는 암곡촌(暗谷村) 북쪽에 무장사(무藏寺)가 있으니, 이것은 신라 제38대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아버지 대아간(大阿干) 효양(孝讓), 즉 추봉(追封)된 명덕대왕(明德大王)의 숙부 파진찬(波珍飡)을 추모(追慕)해서 세운 것이다.  그윽한 골짜기가 몹시 험준해서 마치 깎아세운 듯하다.  그곳은 깊고 어두워 저절로 허백(虛白)이 생길 것이니, 이야말로 마음을 쉬고 도(道)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  절의 위쪽에 아미타(阿彌陀)의 고전(古殿)이 있다.  곧 소성대왕(昭成大王; 혹은 昭聖大王)의 비(妃) 계화왕후(桂花王后)가, 대왕(大王)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왕후는 근심에 차서 황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지극히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했다.  이에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명복을 빌 것을 생각했다.  이때 서방(西方)에 아미타(阿彌陀)라는 대성(大聖)이 있어 지성으로 그를 믿으면 잘 구원하여 맞아 준다는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하고는 이에 육의(六衣)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구부(九府)에 저장해 두었던 재물을 다 내어 이름난 공인(工人)들을 불러서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 하나를 만들게 하고, 아울러 신중(神衆)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는 늙은 중 하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진인(眞人)이 석탑(石塔)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여 대중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속에 숨겨 두고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원래 바위가 험하고 시냇물이 급하게 흐르므로 공인(工人)들은 돌아다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터를 닦을 때에는 평탄한 곳을 얻어서 집을 세울 만하여 확실히 신령스러운 터와 같으니 보는 이들은 깜짝 놀라 좋다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근고(近古)에 와서 미타전(彌陀殿)은 허물어지고 절만 홀로 남아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삼국(三國)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무藏寺)라고 한다"고 한다. 

백엄사(伯嚴寺) 석탑사리(石塔舍利)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주첩(任道大監柱貼)에 이렇게 말했다.  "선종(禪宗)의 백엄사(伯嚴寺)는 초팔현(草八縣; 지금의 초계草溪)에 있고, 절의 중 간유상좌(侃遊上座)는 나이 39세라 했고, 절을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전(古傳)에는 이렇게 말했다.  전대(前代)인 신라 때에 북택청(北宅廳) 터를 희사해서 이 절을 세웠는데, 중간에 오래 폐지되었다가 지난 병인년(丙寅年; 1026)에 사목곡(沙木谷) 양부(陽孚) 스님이 고쳐 짓고 그 주지가 되었다가 정축년(丁丑年; 1037)에 죽었다.  을유년(乙酉年; 1045)에 희양산(曦陽山)의 긍양(兢讓) 스님이 와서 10년 동안 살다가 을미년(乙未年; 1055)에 다시 희양으로 돌아갔다.  그때 신탁(神卓) 스님이 남원(南原) 백암수(白암藪)에서 이 절에 와서 전에 있던 법대로 주지(住持)가 되었다.  또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와서 이 절의 주지인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의 상규(常規) 10조(條)를 정했다.  또한 새로 5층 석탑을 세우고 진신(眞身) 불사리(佛舍利) 42알을 가져다 모셨다.  또 사재(私財)로 계를 모아서, '해마다 여기에 공양할 일, 특히 이 절의 법을 지키던 경승(敬僧)이었던 엄흔(嚴欣)·백흔(伯欣)의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嶽) 등 3위(位) 앞에 계를 모아 공양할 일(세속에 전하기는 엄흔嚴欣·백흔伯欣 두 사람이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백엄사伯嚴寺라 했으며, 이에 호법신護法神을 삼았다고 했다), 금당(金堂) 앞의 나무주발에 매달 초하룻날 공양미(供養米)를 갈아놓을 일' 등을 정했다.  이하 조목은 기록하지 않았다. 

영취사(靈鷲寺) 

절의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신라 진골(眞骨) 제31대왕 신문왕(神文王) 때인 영순(永淳) 2년(683; 본문本文에는 원년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장山國; 곧 동래현東萊縣이니 또한 내산국萊山國이라고도 한다)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 굴정역(屈井驛) 동지야(桐旨野)에 이르러서 쉬었다.  여기에서 문득 보니 한 사람이 매를 놓아서 꿩을 쫓게 하자 꿩은 날아서 금악(金嶽)을 지나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없다.  방울소리를 듣고 찾아 굴정현(屈井縣) 관청 북쪽 우물가에 이르니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속에 있는데 물이 마치 핏빛 같았다.  여기에서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고, 매도 역시 그것을 측은하게 여겨서인지 감히 꿩을 잡지 않고 있다.  공(公)이 이것을 보고 측은히 여기고 감동하여 그 땅을 점쳐 보니 가히 절을 세울 만하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그 현청(縣廳)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절을 세워 이름을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유덕사(有德寺) 

신라 대부각간(大夫角干) 최유덕(崔有德)이 자기 사삿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이름을 유덕사(有德寺)라고 했다.  그의 먼 자손 삼한공신(三韓功臣) 최언위(崔彦휘)가 유덕(有德)의 진영(眞影)을 여기에 걸어 모시고 또 비도 세웠다고 한다. 

오대산문수사(五臺山文殊寺) 석탑기(石塔記) 

뜰 가에 있는 석탑(石塔)은 대개 신라 사람이 세운 것이다.  만든 제도가 비록 순박하여 교묘하지는 못하지만 자못 영험이 있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 한 가지 사실을 여러 옛 노인에게서 들었는데 이러하다.  "옛날에 연곡현(連谷縣)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탑 하나가 배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그림자를 보자 물속 고기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난다.  이 때문에 어부(漁夫)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그림자를 따라서 찾아가니 이 탑이었다.  이에 도끼를 들어 그 탑을 쳐부수고 갔는데, 지금 이 탑의 네 귀퉁이가 모두 떨어진 것은 이 까닭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탄식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그 탑의 위치가 조금 동쪽으로 당겨져서 중앙에 있지 않은 것을 괴상히 여겨서 현판 하나를 쳐다보니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비구(比丘) 처현(處玄)이 일찍이 이 절에 있으면서 탑을 뜰 가운데로 옮겼더니 그 후 30여 년 동안 잠잠히 아무 영험도 없었다.  일자(日者)가 터를 구하려고 여기에 와서 탄식하기를 '이 뜰 가운데는 탑을 세울 곳이 아닌데 어찌해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는가'했다.  이에 여러 중들이 깨닫고 다시 옛 자리로 옮겼으니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나는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부처의 위신(威神)이 그 자취를 나타내어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이같이 빠른 것을 보고서 어찌 불자(佛子)가 된 사람으로서 잠자코 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정풍(正豊) 원년 병자(丙子; 1156) 10월 일에 백운자(白雲子)는 쓰노라.

 

 

삼국유사 제 4권

의해(意解) 제5 


원광서학(圓光西學)
 

<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 제13권에 실려 있는 말이다.  신라 황륭사(皇隆寺)의 중 원광(圓光)의 속성(俗姓)은 박씨(朴氏)이다.  본래 삼한(三韓), 즉 변한(卞韓)·진한(辰韓)·마한(馬韓)에 살았으니, 원광은 곧 진한 사람이다.  대대로 해동(海東)에 살아 조상의 풍습(風習)이 멀리 계승되었다.  그는 도량(道量)이 넓고 컸으며, 글을 즐겨 읽어 현유(玄儒)를 두루 공부하고 자사(子史)도 연구하여 글 잘한다는 이름을 삼한(三韓)에 떨쳤다.  그러나 넓고 풍부한 지식은 오히려 중국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여 드디어 친척과 벗들을 작별하고 중국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나이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金陵)으로 가니, 당시는 진(陳)나라 때로서 문명(文明)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었다.  거기에서 전에 의심나던 일을 묻고 도(道)를 들어서 뜻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장엄(莊嚴) 민공(旻公)의 제자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본래 세상의 모든 전적(典籍)을 읽었기 때문에 이치를 연구하는 데는 신(神)이라고 했는데 불교(佛敎)의 뜻을 듣고 보니 지금까지 읽고 있던 것은 마치 썩은 지푸라기와 같았다.  명교(名敎)를 헛되이 찾은 것이 생애(生涯)에 있어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이에 진(陳)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도법(道法)에 돌아갈 것을 청하니 칙령(勅令)을 내려 이를 허락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중이 되어 이내 계(戒)를 갖추어 받고 두루 강의하는 곳을 찾아서 좋은 도리를 다 배웠으며, 미묘(微妙)한 말을 터득하여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성실(成實)>의 열반(涅槃)을 얻어 마음 속에 간직해 두고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연구해 찾았다.  끝으로 또 오(吳)나라 호구산(虎丘山)에 올라가 염정(念定)을 서로 따르고, 각관(覺觀)을 잊지 않으니 중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임천(林泉)에 모여들었다.  또 <사함(四含)>을 종합해 읽어 그 공효(功效)가 팔정(八定)에 흐르니 명선(明善)을 쉽게 익혔고 통직(筒直)에 어그러진 것이 없었다.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몹시도 맞았기 때문에 드디어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밖의 인사(人事)를 아주 끊고 성인(聖人)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며 생각을 청소(靑소)에 두고 길이 속세(俗世)를 하직했다.

이때 한 신사(信士)가 있어 산 밑에 살고 있더니, 원광(圓光)에게 나와서 강의해 주기를 청했지만 이를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맞아가려 하므로 드디어 그 뜻을 따라 처음에는 <성실론(成實論)>을 말하고 끝에는 <반야경(般若經)>을 강의했는데, 모두 해석이 뛰어나고 통철하며 가문(嘉問)을 전해 옮겨서 아름다운 말과 뜻으로 엮어 나가니, 듣는 자가 매우 기뻐하여 모든 것이 마음에 흡족했다.

이로부터 예전의 법에 따라 남을 인도하고 교화(敎化)하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매양 법륜(法輪)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문득 세상 사람들을 불법(佛法)으로 기울어지게 했다.  이는 비록 다른 나라에서의 통전(通傳)이지만 도에 젖어서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명망(名望)이 널리 흘러서 영표(嶺表)에까지 전파되니,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지고 오는 자가 마치 고기 비늘처럼 잇달았다.  이때는 마침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천하를 다스릴 때여서 그 위엄이 남쪽 나라에까지 미쳤다.

진(陳)나라의 운수가 다해서 수(隋)나라 군사가 양도(揚都)에까지 들어가니 원광은 드디어 난병(亂兵)에게 잡혀서 장차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수의 대장(大將)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구하려 하였으니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이 탑 앞에 결박되어 장차 죽음을 당하려 하고 있다.  대장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 보냈으니, 그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영험을 나타냄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학문이 오월(吳越)을 통달했기 때문에 문득 중국 북쪽 지방인 주(周)와 진(秦)의 문화를 보고자 하여 개황(開皇) 9년(589)에 수나라 서울에 유학(遊學)했다.  마침 불법의 초회(初會)를 당해서 섭론(攝論)이 비로소 일어나니 문언(文言)을 받들어 간직하여 미서(微緖)를 떨치고 또 혜해(慧解)를 달려 이름을 중국 서울에까지 드날렸다.  공업(功業)이 이미 이루어지자 신라로 돌아가서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본국(本國)인 신라에서는 멀리 이 소식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아뢰어 돌려보내 달라고 자주 청했다.  수나라 임금은 칙명을 내려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원광이 여러 해 만에 돌아오니 노소(老少)가 서로 기뻐하고 신라의 왕 김씨(金氏)는 그를 만나보고는 공경하면서 성인(聖人)처럼 우러렀다.

원광은 성질이 한가롭고 다정박애(多情博愛)하였으며,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전표(전表)나 계서(啓書) 등 왕래하는 국명(國命)이 모두 그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  온 나라가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모두 그에게 맡기고 도(道)로 교화(敎化)하는 일을 물으니, 처지는 비록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것과는 달랐지만 실지로는 중국의 모든 것을 보고 온 것 같아서 기회를 보아 교훈을 펴서 지금까지도 그 모범(模範)을 보였다.  나아가 이미 높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궐에 출입했으며, 의복(衣服)과 약(藥)과 음식은 모두 왕이 손수 마련하여 좌우의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지 않고 왕이 혼자서 복을 받으려 했으니, 그 감복하고 공경한 모습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왕은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위문하면서 법을 남겨 백성을 구제할 일을 물으니, 그는 상서로운 것을 말하여 그 공덕(功德)이 바다 구석에까지 미쳤다.

신라 건복(建福) 58년(640)에 그는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을 느끼더니 7일을 지나 간곡한 계(誡)를 남기고는 그가 있던 황륭사(皇隆寺) 안에 단정히 앉아서 세상을 마치니, 나이는 99세요, 때는 당(唐)나라 정관(貞觀) 4년이었다(마땅히 14년이라야 옳을 것이다).  임종(臨終)할 때 동북쪽 공중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 차니 모든 중들과 속인(俗人)들은 슬퍼하면서도 한편 경사로 여기면서 그의 영감(靈感)임을 알았다.  드디어 교외(郊外)에 장사지내는데 국가에서 우의(羽儀)와 장구(葬具)를 내려 임금의 장례와 같이 했다.

그 뒤에 속인이 사태(死胎)를 낳은 일이 있었는데, 지방 속담에 말하기를, "복 있는 사람의 무덤에 묻으면 후손(後孫)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므로 남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벼락이 사태를 쳐서 무덤 밖으로 내던졌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그를 존경하지 않던 자도 모두 우러러 숭배하게 되었다.

그의 제자 원안(圓安)은 정신이 지혜롭고 바탕이 총명하며, 천성이 두루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여 그윽한 곳에서 도(道)를 구하면서 스승을 우러러 사모했다.  그는 드디어 북쪽으로 구도(九都)에 가고, 동쪽으로 불내(不耐)를 보고, 또 서쪽으로 북쪽 중국인 연(燕)과 위(魏)에 가고, 뒤에는 장안(長安)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리하여 각 지방의 풍속에 자세히 통하고 여려 가지 경륜(經綸)을 구해서 중요한 줄거리를 널리 익히고 자세한 뜻도 밝게 알았다.  그는 늦게 심학(心學)에 돌아갔는데 세속 사람보다 자취가 높았다.  처음 장안의 절에 있을 때 도(道)가 높다는 소문이 나자 특진(特進) 소우(蕭瑀)가 임금에게 청하여 남전(藍田) 땅에 지은 진량사(津梁寺)에 살게 하고 사사(四事)의 공급이 온종일 변함이 없었다.

원안이 일찍이 원광의 일을 기록했는데 이렇게 말했다.  "본국(本國)의 임금이 병이 나서 의원이 치료해도 차도가 없으므로 원광을 청해 궁중에 들여 별성(別省)에 모셔 있게 하면서 매일 밤 두 시간씩 깊은 법을 말하여 참회의 계(戒)를 받으니 왕이 크게 신봉했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니 금빛이 찬란하고 일륜(日輪)의 상(像)이 그의 몸을 따라다니니 왕후(王后)와 궁녀(宮女)들도 모두 이것을 보았다.  이로부터 거듭 승심(勝心)을 내어 원광을 병실(病室)에 머물러 있게 했더니 오래지 않아 병이 나았다.  원광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에 정법(正法)을 널리 펴고 해마다 두 번씩 강론하여 후학(後學)을 양성하고 보시(布施)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 데 쓰게 하니, 남은 것은 다만 가사(袈裟)와 바리때뿐이었다."

또 동경(東京)의 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효(貞孝)의 집에 있는 고본(古本) <수이전(殊異傳)>에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이 실려 있는데 이렇게 말했다.  법사의 속성은 설씨(薛氏)로 왕경(王京) 사람이다.  처음에 중이 되어 불법(佛法)을 배웠는데 나이 30세에 한가히 지내면서도 도를 닦으려고 생각하여 삼기산(三岐山)에 홀로 살기를 4년, 이때 중 하나가 와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절을 짓고 2년 동안 살았다.  그는 사람됨이 강하고 용맹스러우며 주술(呪術)을 배우기도 좋아했다.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서 불경을 외는데 갑자기 신(神)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그대의 수행(修行)은 참 장하기도 하오.  대체로 수행하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법대로 하는 이는 드무오.  지금 이웃에 있는 중을 보니 주술을 빨리 익히려 하지만 얻는 것이 없을 것이며, 시끄러운 소리가 오히려 남의 정념(情念)을 괴롭히기만 하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을 방해하여 매양 지나다닐 때마다 미운 생각이 날 지경이오.  그러니 법사는 나를 위해서 그 사람에게 말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하오.  만일 오랫동안 거기에 머무른다면 내가 갑자기 죄를 저지를지도 모르오."

이튿날 법사가 가서 말했다.  "내가 어젯밤 신의 말을 들으니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 중은 대답한다.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魔鬼)의 현혹을 받습니까.  법사는 어찌 호귀(狐鬼)의 말을 근심하시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했다.  "전에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중이 무어라 대답합디까."  법사는 신이 노여워할까 두려워서 대답했다.  "아직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말을 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신은 말한다.  "내가 이미 다 들었는데 법사는 어찌해서 말을 보태서 하시오.  그대는 잠자코 내가 하는 것만 보오."  말을 마치고 가더니 밤중에 벼락과 같은 소리가 났다.  이튿날 가서 보니 산이 무너져서 중이 있던 절을  묻어 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한다.  "법사가 보기에 어떠하오."  법사가 대답했다.  "보고서 몹시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신이 또 말한다.  "내 나이가 거의 3,000세가 되고 신술(神術)도 가장 훌륭하니 이런 일이야 조그만 일인데 무슨 놀랄 것이 있겠소.  나는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온 천하의 일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소.  이제 생각하니 법사가 오직 이곳에만 있으면 비록 자기 몸을 이롭게 하는 행동은 있을지 모르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로는 없을 것이오.  지금 높은 이름을 드날리지 않는다면 미래에 승과(勝果)를 얻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어찌 해서 불법을 중국에서 취하여 이 나라의 모든 혼미(昏迷)한 무리를 지도하지 않으시오."  법사가 대답했다.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래 나의 소원이지만 바다와 육지가 멀리 막혀 있기 때문에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  이에 신은 중국 가는 데 필요한 일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법사는 그 말에 의해서 중국에 갔으며, 11년을 머무르면서 삼장(三藏)에 널리 통달하고 유교(儒敎)의 학술(學術)까지도 겸해서 배웠다.

진평왕(眞平王) 22년 경신(庚申; 600, <삼국사三國史>에는 다음해인 신유년辛酉年에 왔다고 했다)에 법사는 중국에 왔던 조빙사(朝聘使)를 따라서 본국에 돌아왔다.  법사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하여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에 갔다.  밤중에 신이 역시 와서 법사의 이름을 부르고 말했다.  "바다와 육지의 먼 길을 어떻게 왕복하였소."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  "내 또한 그대에게 계(戒)를 드리겠소."  말하고는 이에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을 맺었다.  법사가 또 청했다.  "신의 참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까."  "법사가 만일 내 모양을 보고자 하거든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가를 바라보시오."  법사가 이튿날 아침에 하늘을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가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한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소."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고 이상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속칭(俗稱) 비장산(臂長山)이라고 했다.  신이 말했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하더라도 무상(無常)의 해(害)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니, 나는 앞으로 얼마 가지 않아서 그 고개에 사신(捨身)할 것이니 법사는 거기에 와서 영원히 가 버리는 내 영혼을 보내 주오."  법사가 약속한 날을 기다려서 가 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는데, 검기가 옻칠한 것과 같고 숨조차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그를 존경하여 스승으로 삼으니 법사는 항상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강의했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항상 변방을 침범하니 왕은 몹시 이를 걱정하여 수(隋)나라(마땅히 당唐나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에 군사를 청하고자 법사를 청하여 걸병표(乞兵表)를 짓게 했다.  수나라 황제가 그 글을 보더니 30만 군사를 내어 친히 고구려를 쳤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술(儒術)까지도 두루 통달한 것을 세상 사람은 알았다.  나이 84세에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지냈다.

또 <삼국사(三國史)> 열전(列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어진 선비 귀산(貴山)이란 자는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마을의 추항(추項)과 친구가 되어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사군자(士君子)들과 함께 사귀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욕 당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어진 사람을 찾아가서 도를 묻지 않겠는가."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가슬갑(嘉瑟岬; 혹은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고 하는데, 모두 방언方言이다.  갑岬은 속언俗言으로 고시古尸(곳)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것을 고시사古尸寺(곳절)라고 하니 갑사岬寺라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 9,000보步쯤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 하며,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에 잠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그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저희들 시속 선비는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을 주시어 평생의 경계가 되게 해 주십시오."  원광이 말했다.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으니, 1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일이요, 2는 부모를 효도로 섬기는 일이요, 3은 벗을 신의(信義)로 사귀는 일이요, 4는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일이요, 5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일이다.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일은 모두 알아듣겠습니다마는, 말씀하신 바 '산 물건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한다'는 것은 아직 터득할 수가 없습니다."  원광이 말했다.  "6재일(齋日)과 봄·여름에는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다.  말·소·개 등 가축을 죽이지 않고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세물(細物)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또한 죽일 수 있는 것도 또한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좋은 경계인 것이다."  귀산 등이 말했다.  "지금부터 이 말을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전쟁에 나가서 모두 국가에 큰 공을 세웠다.

또 건복(建福) 30년 계유(癸酉; 613, 즉 진평왕眞平王 즉위 35년) 가을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오자 황룡사(黃龍寺)에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여러 고승(高僧)들을 청해다가 불경을 강의하니 원광이 제일 윗자리에 있었다.

논평해 말했다.  "원종(原宗)이 불법을 일으킨 후로 진량(津梁)이 비로소 설치되었으나 당오(堂奧)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마땅히 귀계멸참(歸戒滅懺)의 법으로 어리석고 어두운 중생들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원광은 살던 가서갑(嘉西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어 이것을 상규(常規)로 삼았다.  이때 시주(施主)하던 여승(女僧) 하나가 점찰보에 밭을 바쳤는데, 지금 동평군(東平郡)의 밭 100결(結)이 바로 이것이며, 옛날의 문서가 아직도 있다.

원광은 천성이 허정(虛靜)한 것을 좋아하여, 말할 때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었고 얼굴에 노여워하는 빛이 없었다.  나이가 이미 많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궐에 출입했는데, 그 당시 덕의(德義)가 있는 여러 어진 선비들도 그의 위에 뛰어날 사람이 없었으며, 그의 풍부한 문장은 한 나라를 기울였다.  나이 80여 세로 정관(貞觀) 연간에 세상을 떠나니 부도(浮圖)가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 지금의 안강安康 서남쪽 골짜기 즉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있다)에 있다.

당전(唐傳)에서는 황륭사(皇隆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고 했는데 그 장소를 자세히 알 수가 없으나, 이것은 황룡사(黃龍寺)의 잘못인 듯 싶으니, 마치 분황사(芬皇寺)를 왕분사(王芬寺)라고 한 예와 같다.  위와 같이 당전과 향전(香奠)의 두 전기(傳記)에 있는 글에 따르면, 그의 성은 박(朴)과 설(薛)로 되었고, 출가(出家)한 것도 동쪽과 서쪽으로 되어 있어 마치 두 사람 같으니, 감히 자세하고 명확하게 결정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여기에는 두 전기를 모두 적어 둔다.  그러나 그 두 전기에 모두 작갑(鵲岬)·이목(璃目)과 운문(雲門)의 사실이 없는데, 향인(鄕人) 김척명(金陟明)이 항간(巷間)의 말을 가지고 잘못 글을 윤색해서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을 지어 함부로 운문사(雲門寺)의 개조(開祖)인 보양(寶壤) 스님의 사적과 뒤섞어서 하나의 전기를 만들어 놓았다.  뒤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편찬한 자도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기록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많이 현혹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분별하고자 한 자(字)도 가감(加減)하지 않고 두 전기의 글을 자세히 적어 두는 것이다.

진(陳)·수(隋) 때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바다를 건너가서 도를 배운 자는 드물었으며, 혹시 있다고 해도 그 이름을 크게 떨치지는 못했다.  원광 뒤로 계속해서 중국으로 배우러 간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니 원광이 길을 열었다 하겠다.

찬(讚)해 말한다. 

바다 건너 한(漢)나라 땅을 처음으로 밟고,

몇 사람이나 오가면서 밝은 덕을 배웠던가.

옛날의 자취는 오직 푸른 산만이 남았지만,

금곡(金谷)과 가서(嘉西)의 일은 들을 수 있네. 

보양이목(寶壤梨木) 

중 보양전(寶壤傳)에는 그의 향리(鄕里)와 씨족(氏族)은 실려 있지 않으나 삼가 청도군청(淸道郡廳)의 문적(文籍)을 상고해 보면 이렇게 씌어 있다.  "천복(天福) 8년 계유(癸酉; 943.  태조太祖 즉위 제26년) 정월 일의 청도군 계리(界里) 심사(審使) 순영(順英) 대내말수문(大乃末水文) 등의 주첩(柱貼) 문공(文公)을 보면,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 장생(長生)은 남쪽은 아니점(阿尼岾)이요, 동쪽은 가서현(嘉西峴)이라고 했다.  절의 삼강(三剛)의 전주인(典主人)은 보양화상(寶壤和尙)이요, 원주(院主)는 현회장로(玄會長老), 정좌(貞座)는 현량상좌(玄兩上座), 직세(直歲)는 신원선사(信元禪師; 위 공문公文은 청도군淸道郡의 도전장부都田帳簿에 의한 것)다."했다.

또 개운(開運) 3년 병진(丙辰(午); 946)의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 장생표탑(長生標塔)에 관계되는 공문(公文) 한 통에 보면, "장생(長生)이 11개이니 아니점·가서현·무현(畝峴)·서북매현(西北買峴; 혹은 면지촌面知村)·북저족문(北猪足門) 등이다."했다.

또 경인년(庚寅年)의 진양부첩(晉陽府貼)에는, "오도안찰사(五道按察使)가 각 도의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사원(寺院)이 처음 세워진 연월(年月)과 그 모양을 자세히 조사해서 장부를 만들 때, 차사원(差使員) 동경장서기(東京掌書記) 이선(李선)이 자세히 조사하여 적었다."고 했다.

정풍(正豊) 6년 신사(辛巳; 1161, 이것은 대금大金의 연호이니 본조本朝 의종毅宗 즉위 16년임)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郡中古籍裨補記)에 따르면 이렇다.  청도군 전부호장(前副戶長) 어모부위(禦侮副尉) 이칙정(李則禎)의 집에 있는 옛 사람들의 소식 및 우리말로 전해 오는 기록에는, 치사(致仕)한 상호장(上戶長) 김양신(金亮辛), 치사한 호장 민육(旻育), 호장 동정(同正) 윤응(尹應), 전기인(前其人) 진기(珍奇)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用成) 등의 말이 적혀 있다.  그 때 태수(太守) 이사로(李思老)와 호장 김양신은 나이 89세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이 70세 이상이었다.  다만 용성만이 나이 60세 이상(운운云云이라 쓴 것은 이 다음부터는 쓰지 않는다)이었다.  신라 시대 이래로 이 청도군의 절과 작갑사(鵲岬寺)와 그밖의 크고 작은 사원(寺院)인 대작갑(大鵲岬)·소작갑(小鵲岬)·소보갑(所寶岬)·천문갑(天門岬)·가서갑(嘉西岬) 등 다섯 갑사(岬寺)가 모두 후삼한(後三韓)의 난리에 없어져서 다섯 갑사(岬寺)의 기둥을 대작갑사(大鵲岬寺)에 모아 두었다.

조사(祖師) 지식(知識; 윗글에는 보양寶壤이라 했다)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 가운데에 이르니,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더니 금빛 비단의 가사(袈裟) 한 벌을 주고, 겸하여 아들 이목(璃目)을 그에게 주면서 조사를 모시고 가게 했다.  이때 용왕은 부탁한다.  "지금 삼국(三國)이 시끄러워서 아직은 불법에 귀의(歸依)하는 군주(君主)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本國)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살면 능히 적병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또한 몇 해가 안 되어서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니 갑자기 늙은 중이 스스로 원광(圓光)이라 하면서 도장이 든 궤를 안고 나와서 조사에게 주더니 이내 없어졌다(상고하건대 원광圓光은 진陳의 말년에 중국에 들어갔다가 수隋의 개황開皇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또 가서갑嘉西岬에 살다가 황륭사皇隆寺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햇수를 계산하면 청태淸泰 초년까지는 무려 300년이나 된다.  이제 여러 갑사岬寺가 모두 없어진 것을 슬퍼하고 보양寶壤이 와서 장차 절이 이룩될 것을 보고 기뻐하여 여기에 왔을 것이다).

이에 보양법사(寶壤法師)는 장차 허물어진 절을 일으키려 하여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의 누런 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가서 찾아보면 아무런 자취도 없으므로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다.  법사는 해룡(海龍)이 작갑(鵲岬)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그 곳을 찾아가서 파보니 과연 예전 벽돌이 수없이 있었다.  이것을 모아 쌓아 올려 탑을 이루니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으므로 이곳이 전대(前代)의 절터임을 알았다.  여기에 절을 세우고 살면서 절 이름을 작갑사(鵲岬寺)라고 했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하고 보양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다섯 갑(岬)의 밭 500결(結)을 합해서 이 절에 바쳤다.  또 청태(淸泰) 4년 정유(丁酉; 937)에는 절 이름을 운문선사(雲門禪寺)라 내리고, 가사(袈裟)의 신령스러운 음덕(蔭德)을 받들게 했다.  이때 이목(璃目)은 항상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법화(法化)를 음으로 돕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서 밭에 채소가 모두 타고 마르므로 보양(寶壤)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고을이 흡족하였다.  이에 천제(天帝)가 그를 죽이려 하자 이목이 보양에게 위급함을 고하니 법사가 침상 밑에 숨겨 주었다.  이윽고 천사(天使)가 뜰에 와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자 법사는 뜰앞의 배나무[梨木]를 가리키니 천사는 거기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부러졌으므로 용이 쓰다듬으니 곧 되살아났다.  그 나무는 근년에 와서 땅에 쓰러졌는데 어떤 사람이 망치를 만들어서 선법당(善法堂)과 식당(食堂)에 안치(安置)하였다.  그 망치 자루에는 명(銘)이 있다.

처음 법사가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화군(推火郡)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마침 고려 태조가 동쪽을 정벌해서 청도(淸道)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산적들이 견성(犬城; 산봉우리가 물을 굽어보고 뾰족하게 섰는데 지금 민간民間에서 이것을 미워하여 이름을 견성犬城이라고 고쳤다 한다)에 모여서 교만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밑에 이르러 법사에게 산적들을 쉽게 물리칠 방법을 물으니 법사는 대답했다.  "대체로 개란 짐승은 밤만을 맡았고 낮은 맡지 않았으며, 앞만 지키고 그 뒤는 잊고 있습니다.  하오니 마땅히 대낮에 그 북쪽으로 쳐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태조가 그 말을 좇으니 적은 과연 패해서 항복했다.  태조는 법사의 그 신통한 꾀를 가상히 여겨 매년 가까운 고을의 조(租) 50석을 주어 향화(香火)를 받들게 했다.  이에 이 절에 이성(二聖)의 진용(眞容)을 모시고 절 이름을 봉성사(奉聖寺)라고 했다.  뒤에 법사는 진용을 작갑사(鵲岬寺)로 옮겨서 크게 절을 세우고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古傳)에는 실려 있지 않고 다만 민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석굴사(石굴寺)의 비허사(備虛師; 혹은 비허毗虛)와 형제가 되어 봉성(奉聖)·석굴(石굴)·운문(雲門) 등 세 절이 연접된 산봉우리에 늘어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 왕래했다."

후세 사람들이 <신라이전(新羅異傳)>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사의 탑과 이목(璃目)의 사실을 원광(圓光)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해 넣었다.  또 견성(犬城)의 사실을 비허사(備虛師)의 전기에 넣은 것도 이미 잘못인 데다가 더구나 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지은 자도 여기에 따라서 글을 윤색하고 보양(寶壤)의 전기가 없어 뒷사람들이 의심내고 잘못 알게 했으니 그 얼마나 무망(誣妄)한 짓인가.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혹은 이 비용이 금빛을 칠할 때 든 것이라고도 한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가위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귀축제사(歸竺諸師) 

광함(廣函)의 <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에 이렇게 말했다.  중 아리나(阿離那; 나那는 혹은 야耶) 발마(跋摩; 마摩는 혹은 낭郞)는 신라 사람이다.  처음에 정교(正敎)를 구하려고 일찍이 중국에 들어갔는데, 성인(聖人)의 자취를 두루 찾아볼 마음이 더했다.  이에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당(唐)나라 서울인 장안(長安)을 떠나 오천(五天)에 갔다.  나란타사(那蘭타寺)에 머물러 율장(律藏)과 논장(論藏)을 많이 읽고 패협(貝莢)에 베껴 썼다.  고국(故國)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연히 그 절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70여 세였다.

그의 뒤를 이어 혜업(惠業)·현태(玄泰)·구본(求本)·현각(玄恪)·혜륜(惠輪)·현유(玄遊)와 그 밖에 또 이름을 알지 못하는 두 법사가 있었는데, 모두 자기 자신을 잊고 불법(佛法)을 따라 관화(觀化)를 보기 위해서 중천축(中天竺)에 갔었다.  그러나 혹은 중도에서 일찍 죽고 혹은 살아남아서 그곳 절에 있는 이도 있으나 마침내는 다시 계귀(계貴)와 당나라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 중에 오직 현태 스님만이 당나라에 돌아왔으나 이도 역시 어디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천축국(天竺國) 사람들이 해동(海東)을 불러 "구구타예설라(矩矩타예說羅)"라 하는데, 이 구구타란 닭[계]를 말함이요, 예설라는 귀(貴)를 말한 것이다.  그곳에서 이렇게 서로 전해 말했다.  "그 나라에서는 계신(계神)을 받들어 존경하는 때문에 그 깃을 꽂아서 장식한다." 

찬(讚)해 말한다.

      천축(天竺)의 머나먼 길 만첩 산인데,

가련타, 힘써 올라가는 유사(遊士)들이여.

몇 번이나 저 달은 외로운 배를 보냈는가,

한 사람도 구름따라 돌아오는 것 보지 못했네. 

이혜동진(二惠同塵) 

중 혜숙(惠宿)이 화랑(花郞)인 호세랑(好世郞)의 무리 중에서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이미 황권(黃卷)에서 이름을 지워 버리니 혜숙은 적선촌(赤善村; 지금 안강현安康縣에 적곡촌赤谷村이 있다)에 숨어서 산 지가 20여 년이나 되었다.  그때 국선(國仙) 구참공(瞿참公)이 일찍이 적선촌 들에 가서 하루 동안 사냥을 하자 혜숙이 길가에 나가서 말고삐를 잡고 청했다.  "용승(庸僧)도 또한 따라가기를 원하옵는데 어떻겠습니까."  공이 허락하자, 그는 이리저리 뛰고 달려서 옷을 벗어부치고 서로 앞을 다투니 공이 보고 기뻐했다.  앉아 쉬면서 피로를 풀고 고기를 굽고 삶아서 서로 먹기를 권하는데 혜숙도 같이 먹으면서 조금도 미워하는 빛이 없더니, 이윽고 공의 앞에 나가서 말했다.  "지금 맛있고 싱싱한 고기가 여기 있으니 좀더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이 좋다고 말하니, 혜숙이 사람을 물리치고 자기 다리 살을 베어서 소반에 올려 놓아 바치니 옷에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공이 깜짝 놀라 말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느냐."  혜숙이 말했다.  "처음에 제가 생각하기에 공은 어진 사람이어서 능히 자기 몸을 미루어 물건에까지 미치리라 하여 따라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공이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니, 오직 죽이는 것만을 몹시 즐겨해서 짐승을 죽여 자기 몸만 봉양할 뿐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나 군자가 할 일이겠습니까.  이는 우리의 무리가 아닙니다."  말하고 드디어 옷을 뿌리치고 가버렸다.  공이 크게 부끄러워하여 혜숙이 먹던 것을 보니 소반 위의 고기가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공이 몹시 이상히 여겨 돌아와 조정에 아뢰니 진평왕(眞平王)이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맞아오게 하니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 누워서 자는 것을 보고 중사(中使)는 이것을 더럽게 여겨 그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7, 8리쯤 가다가 도중에서 혜숙을 만났다.  사자는 그가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혜숙이 대답한다.  "성 안에 있는 시주(施主)집에 가서, 칠일재(七日齋)를 마치고 오는 길이오."  중사가 그 말을 왕에게 아뢰니 또 사람을 보내어서 그 시주집을 조사해 보니 그 일이 과연 사실이었다.  얼마 안 되어 혜숙이 갑자기 죽자 마을 사람들이 이현(耳峴; 혹은 형현형峴이라고도 함) 동쪽에 장사지냈는데, 그때 마을 사람으로서 이현 서쪽에서 오는 이가 있었다.  그는 도중에서 혜숙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유람하러 간다"하여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반 리(半里)쯤 가다가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그 사람이 고개 동쪽에 이르러 장사지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그 까닭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무덤을 헤쳐 보니 다만 짚신 한 짝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安康縣) 북쪽에 혜숙사(惠宿寺)라는 절이 있으니 곧 그가 살던 곳이라 하며, 또한 부도(浮圖)도 있다.

중 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품팔이하던 노파의 아들로, 어릴 때의 이름은 우조(憂助; 이것은 대개 방언方言이다)였다.  공이 일찍이 종기를 앓아서 거의 죽게 되니 문병(問病)하는 사람이 거리를 메웠다.  이때 우조의 나이 7세였는데 그 어머니에게 말했다.  "집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손님이 많습니까."  그 어머니가 말했다.  "가공(家公)이 나쁜 병이 있어서 장차 죽게 되었는데 너는 어찌해서 알지 못하느냐."  우조는 말했다.  "제가 그 병을 고치겠습니다."  어머니가 그 말을 이상히 여겨 공에게 알리니 공은 그를 불러오게 했다.  그는 침상 밑에 앉아서 말 한 마디도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공의 종기가 터지게 되었다.  공은 우연한 일이라 하여 별로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그가 자라자 공을 위해서 매를 길렀으니 이것이 공의 마음에 아주 들었다.  처음에 공의 아우로서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골라 준 좋은 매를 얻어 가지고 임지(任地)로 갔다.  어느날 밤 공이 갑자기 그 매 생각이 나서 다음 날 새벽이면 우조를 보내어 그 매를 가져오게 하리라 했다.  우조는 미리 이것을 알고 금시에 그 매를 가져다가 새벽녘에 공에게 바쳤다.  공이 크게 놀라 깨닫고는 그제야 전일에 종기를 고치던 일이 모두 측량하기 어려운 일임을 알고 말했다.  "나는 지극한 성인(聖人)이 내 집에 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미친 말과 예의에 벗어난 짓으로 욕을 보였으니 그 죄를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부디 도사(導師)가 되어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  공은 말을 마치자 내려가서 절을 했다.

우조는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이 이미 나타났기 때문에 드디어 중이 되어 이름을 바꾸어 혜공(惠空)이라 했다.  그는 항상 조그만 절에 살면서 매양 미친 듯이 크게 술에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니 부궤화상(負궤和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가 있는 절을 부개사(夫蓋寺)라고 했는데, 이 말은 우리말로 삼태기이다.  매양 절의 우물 속에 들어가면 몇 달씩 나오지 않으므로 스님의 이름을 따서 우물 이름을 지었다.  또 우물 속에서 나올 때면 푸른 옷을 입은 신동(神童)이 먼저 솟아나왔기 때문에 절의 중들은 이것으로 조짐을 삼았으며, 우물에서 나와서 옷은 젖지 않았다.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 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오어사吾魚寺다.  세상에서는 항하사恒河沙처럼 많은 사람이 출세出世했기 때문에 항사동恒沙洞이라 한다고 했다)에 가 있었다.  이때 원효(元曉)가 여러 가지 불경(佛經)의 소(疏)를 찬술(撰述)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혜공 스님에게 가서 묻고 혹은 서로 희롱도 했다.  어느날 혜공과 원효가 시내를 따라 가면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다가 돌 위에서 대변을 보았다.  혜공이 그를 가리키면서 희롱의 말을 했다.  "그대가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게요."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절을 오어사(吾魚寺)라 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효대사의 말이라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세상에서는 그 시내를 잘못 불러 모의천(芼矣川)이라고 한다.

구참공(瞿참公)이 어느날 산에 놀러 갔다가 혜공이 산길에 죽어 쓰러져서, 그 시체가 부어 터지고 살이 썩어 구더기가 난 것을 보고 오랫동안 슬피 탄식하고는 말고삐를 돌려 성으로 들어오니 혜공은 술에 몹시 취해서 시장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  또 어느날은 풀로 새끼를 꼬아 가지고 영묘사(靈廟寺)에 들어가서 금당(金堂)과 좌우에 있는 경루(經樓)와 남문(南門)의 낭무(廊무)를 묶어 놓고 강사(剛司)에게 말했다.  "이 새끼를 3일 후에 풀도록 하라."  강사가 이상히 여겨 그 말에 좇으니, 과연 3일 만에 선덕왕(宣德王)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데, 지귀(志鬼)의 심화(心火)가 나와서 그 탑을 불태웠지만 오직 새끼로 맨 곳만은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또 신인(神印)의 조사(祖師) 명랑(明朗)이 새로 금강사(金剛寺)를 세우고 낙성회를 열었는데, 고승(高僧)들이 다 모였으나 오직 혜공만은 오지 않았다.  이에 명랑이 향을 피우고 정성껏 기도했더니 조금 후에 공이 왔다.  이때 큰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공의 옷은 젖지 않았고 발에 진흙도 묻지 않았다.  혜공이 명랑에게 말했다.  "그대가 은근히 초청하기에 왔소이다."  이와 같이 그에게는 신령스러운 자취가 자못 많았다.  죽을 때는 공중(空中)에 떠서 세상을 마쳤는데 사리(舍利)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는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옛날에 지은 글이다."하였으니 이것으로써 혜공(惠空)이 승조(僧肇)의 후신(後身)임을 알겠다.

찬(讚)해 말한다. 

풀밭에서 사냥하고 침상 위에 누웠으며,

술집에서 미친 노래, 우물 속에서 잠을 잤네.

척리(隻履)와 부공(浮空)은 어디로 갔는가,

한 쌍의 보배로운 화중련(火中蓮)일세. 

자장정률(慈藏定律) 

대덕(大德) 자장(慈藏)은 김씨(金氏)이니 본래 진한(辰韓)의 진골(眞骨) 소판(蘇判; 삼급三級의 벼슬 이름)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맑은 요직을 지냈으나 뒤를 계승할 아들이 없으므로 삼보(三寶)에 마음을 돌려 천부관음(千部觀音)에게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고 이렇게 빌었다.  "만일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이를 내놓아서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습니다."  갑자기 그 어머니의 꿈에 별 하나가 떨어져서 품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어서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석존(釋尊)과 같은 날이므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이라 했다.  그는 정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사(文思)가 날로 풍부하고 속세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이 두 부모를 여의고 속세의 시끄러움을 싫어해서 처자를 버리고, 자기의 전원(田園)을 내어 원녕사(元寧寺)를 삼았다.  혼자서 그윽하고 험한 곳에 거처하면서 이리나 범도 피하지 않았다.  고골관(枯骨觀)을 닦는데 조금 피곤한 일이 있으면 작은 집을 지어서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그 속에 발가벗고 앉아서 조금만 움직이면 가시에 찔리도록 했으며, 머리는 들보에 매달아 어두운 정신이 없어지게 했다.

때마침 조정에 재상 자리가 비어 있어서 자장이 문벌(門閥) 때문에 물망(物望)에 올라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으니 왕이 칙명(勅命)을 내렸다.  "만일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자장이 듣고 말했다.  "내가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戒律)을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100년 동안 계율을 어기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가 중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자장이 바위 사이에 깊이 숨어서 사니 양식 한 알 돌봐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어다 바쳐서 이것을 손으로 받아 먹었더니 이윽고 꿈에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五戒)를 주었다.  이에 자장이 비로소 골짜기에서 나오니 향읍(鄕邑)의 남녀가 다투어 와서 계(戒)를 받았다.

자장은 변방 나라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탄식하고 중국으로 가서 대화(大化)를 구했다.  인평(仁平) 3년 병신(丙申; 636, 곧 정관貞觀 10년임)에 왕명(王命)을 받아 제자 실(實) 등 중 10여 명과 더불어 서쪽 당(唐)나라로 들어가서 청량산(淸凉山)에 가서 성인(聖人)을 뵈었다.  이 산에는 만수대성(曼殊大聖)의 소상(塑像)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서로 전해 말했다.  "제석천(帝釋天)이 공인(工人)을 데리고 와서 조각해 만든 것이다."  자장은 소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冥想)하니, 꿈에 소상이 그의 이마를 만지면서 범어(梵語)로 된 게(偈)를 주었는데 깨어 생각하니 알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이상한 중이 오더니 이것을 해석하여 주고(이 이야기는 이미 황룡사皇龍寺 탑편塔篇에 나와 있다) 또 말하기를, "비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해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하고는 가사(袈裟)와 사리(舍利) 등을 주고 사라졌다(자장은 처음에 이것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당승전唐僧傳>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자장은 자기가 이미 성별(聖별)을 받은 것을 알고 북대(北臺)에서 내려와 태화지(太和池)에 이르러 당나라 서울에 들어가니 태종(太宗)이 칙사(勅使)를 보내어 그를 위무(慰撫)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거처하도록 했다.  태종의 은총과 내린 물건이 매우 많았으나 자장은 그 번거로움을 꺼려서 표문(表文)을 올리고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동쪽 절벽에 들어가서 바위에 나무를 걸쳐 방을 만들고 3년 동안을 살면서 사람과 신들이 계를 받아 영험이 날로 많았는데, 말이 번거로워서 여기에는 싣지 않는다.  이윽고 다시 서울로 들어오자 또 칙사를 보내 위무(慰撫)하고 비단 200필을 내려서 의복의 비용으로 쓰게 했다.

정관(貞觀) 17년 계유(癸酉; 643)에 신라 선덕왕(宣德王)이 표문을 올려 자장을 돌려보내 주기를 청하니 태종은 이를 허락하고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비단 1령(領)과 잡채(雜綵) 500필을 하사했으며, 또 동궁(東宮)도 비단 200필을 내려 주고 그 밖에 예물로 준 물건도 많았다.  자장은 본국에 아직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이 구비되지 못했으므로 대장경(大藏經) 1부(部)와 여러 가지 번당(幡幢)·화개(花蓋) 등 복리(福利)가 될 만한 것을 청해서 모두 싣고 돌아왔다.  그가 본국에 돌아오자 온 나라가 그를 환영하고 왕은 그를 분황사(芬皇寺; <당전唐傳>에서는 왕분사王芬寺라고 했다)에 있게 하니, 물건과 시위(侍衛)는 조밀하고도 넉넉했다.  어느 해 여름에 왕이 궁중으로 청하여 <대승론(大乘論)>을 강(講)하게 하고 또 황룡사(黃龍寺)에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7일 밤낮 동안 강연하게 하니, 하늘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강당을 덮었다.  이것을 보고 사중(四衆)이 모두 그의 신기함을 탄복했다.  이에 조정에서 의론하기를, "불교가 우리 동방에 번져서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주지(住持)를 수봉(修奉)하는 규범(規範)이 없으니 이것을 통괄해서 다스리지 않고는 바로잡을 수가 없다."하고 왕이 자장을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중들의 모든 규범을 승통(僧統)에게 위임하여 주장하도록 했다(상고해 보건대, 북제北齊의 천보天寶 연간에는 전국全國에 10통統을 두었는데,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마땅히 직위職位를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하여 이에 선문제宣文帝는 법상법사法上法師로 대통大統을 삼고 나머지는 통통通統을 삼았다.  또 양梁·진陳의 시대에는 국통國統·주통州統·국도國都·주도州都·승도僧都·승정僧正·도유내都維乃 등 이름이 있었으니 모두 소현조昭玄曺에 소속되었다.  소현조昭玄曺는 승니僧尼를 거느리는 관명官名이다.  당唐나라 초기에는 또 10대덕大德의 성盛함이 있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1년 경오庚午에 안장법사安藏法師로 대서성大書省을 삼으니 이것은 한 사람뿐이고, 또 소서성小書省 두 사람이 있었다.  그 이듬해 신미辛未에는 고구려의 혜량법사惠亮法師를 국통國統으로 삼았으니 사주寺主라고도 한다.  보량법사寶良法師 한 사람을 대도유나大都維那로 삼고 주통州統 9인人과 도통都統 18인人을 두었다.  자장慈藏 때에 와서 다시 대국통大國統 한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은 상직常職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부예랑夫禮郞이 대각간大角干이 되고, 김유신金庾信이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된 것과 같다.  후에 원성대왕元聖大王 원년에 이르러 또 승관僧官을 두고 정법전政法典이라 하여 대사大舍 1인人과 사史 2인人을 사司로 삼아서 중들 중에서 재행才行이 있는 이를 뽑아서 그 일을 맡겼으며, 유고有故한 때에는 바꾸어서 연한年限은 정定하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자의紫衣의 무리들은 역시 율종律宗과 다른 것이다.  향전鄕傳에 보면,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 갔더니 태종太宗이 식건전式乾殿에 맞아들여 <화엄경華嚴經>의 강의를 청하매, 하늘이 단 이슬을 내려 비로소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고 했으나 이것은 잘못이다.  당전唐傳이나 <국사國史>에 모두 그런 글은 없다).

자장이 이와 같은 좋은 기회를 만나 용감히 나가서 불교를 널리 퍼뜨렸다.  그는 승니(僧尼)의 5부(部)에 각각 구학(舊學)을 더 증가시키고 15일마다 계율을 설명하였으며 겨울과 봄에는 시험해서 지범(持犯)을 알게 하고 관원을 두어서 이를 유지해 나가게 했다.  또 순사(巡使)를 보내어 서울 밖에 있는 절들을 조사하여 중들의 과실을 징계하고 불경과 불상을 엄중하게 신칙함을 일정한 법으로 삼으니, 한 시대에 불법을 보호하는 것이 이때에 가장 성했다.  이것은 공자(孔子)가 위(衛)나라에서 노(魯)나라로 돌아와 음악을 바로잡자 아(雅)와 송(頌)이 각각 그 마땅함을 얻었던 일과 같다.  이때를 당하여 나라 안 사람으로서 계(戒)를 받고 불법을 받든 이가 열 집에 여덟, 아홉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를 청하는 이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많아지니 이에 통도사(通度寺)를 새로 세우고 계단(戒壇)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도(濟度)했다.  또 자기가 난 집을 원녕사(元寧寺)로 고치고 낙성회(落成會)를 열어 잡화(雜花) 1만 게(偈)를 강의하니 오이녀(五二女)가 감동하여 현신(現身)해서 강의를 들었다.  문인(門人)들에게 그들의 수대로 나무를 심어 이상스러운 일들을 표하게 하고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일찍이 우리 나라의 복장(服章)이 제하(諸夏)와 같지 않다 하여 조정에 건의하니 조정에서는 허락하였다.  이에 진덕왕(眞德王) 3년 기유(己酉; 649)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衣冠)을 입게 하고, 이듬해인 경술(庚戌)에 또 정삭(正朔)을 받들어 비로소 영휘(永徽)의 연호를 썼다.  이 뒤부터는 중국에 조근(朝覲)할 때마다 상번(上蕃)에 있었으니 자장의 공이었다.

만년(晩年)에는 서울을 하직하고 강릉군(江陵郡; 지금의 명주溟州)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거기에 살았더니 북대(北臺)에서 본 것과 같은 형상을 한 이상한 중이 다시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다."  자장이 놀라 일어나서 일찍 송정(松汀)에 가니 과연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감응(感應)하여 와 있었다.  그에게 법요(法要)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태백산(太伯山)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자."하고 드디어 자취를 숨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자장이 태백산(太伯山)에 가서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시자(侍者)에게 말했다.  "이곳이 바로 이른바 갈반지이다."  이에 석남원(石南院; 지금의 정암사淨岩寺)을 세우고 대성(大聖)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늙은 거사(居士) 하나가 남루한 도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 시자에게 말했다.  "자장을 보려고 왔다."  문인(門人)이 말했다.  "내가 건추(巾추)를 받든 이래 우리 스승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보지 못했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미친 말을 하는 게냐."  거사가 말한다.  "너는 너의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면 된다."  시자가 들어가서 고하자 자장도 깨닫지 못하고 말했다.  "필연 미친 사람이겠지."  문인이 나가서 그를 꾸짖어 쫓으니, 거사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치자 삼태기를 거꾸로 들고 터니 강아지가 변해서 사자보좌(獅子寶座)가 되고 그 위에 올라앉아서 빛을 내고는 가버렸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그제야 위의(威儀)를 갖추고 빛을 찾아 재빨리 남쪽 고개에 올라갔으나 이미 아득해서 따라가지 못하고 드디어 몸을 던져 죽으니, 화장하여 유골(遺骨)을 석혈(石穴) 속에 모셨다.

대체로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10여 곳인데, 세울 때마다 반드시 이상스러운 상서(祥瑞)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받드는 포색(浦塞)들이 거리를 메울 만큼 많아서 며칠이 안 되어 완성했다.  자장이 쓰던 도구(道具)·옷감·버선과 태화지(太和池)의 용이 바친 목압침(木鴨枕)과 석존(釋尊)의 유의(由衣)들은 모두 통도사(通度寺)에 있다.  또 헌양현(헌陽縣; 지금의 언양彦陽)에 압유사(鴨遊寺)가 있는데, 침압(枕鴨)이 일찍이 이곳에서 이상한 일을 나타냈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또 원승(圓勝)이란 중이 있는데, 자장보다 먼저 중국에 유학갔다가 함께 고향에 돌아와서 자장을 도와 율부(律部)를 넓게 폈다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일찍이 청량산에 가서 꿈 깨고 돌아오니,

칠편삼취(七篇三聚)가 한꺼번에 열렸네.

치소(緇素)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어,

우리 나라 의관을 중국과 같이 만들었네. 

원효불기(元曉不羈)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俗姓)은 설씨(薛氏)이다.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의 사라수(裟羅樹)밑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의 이름은 불지(佛地)인데 혹은 발지촌(發智村; 속언俗言에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 한다)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란 것을 속언에 이렇게 말한다.  "스님의 집이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이미 만삭인데, 마침 이 골짜기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였으므로 몹시 급한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 나무를 사라수라 했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이상하여 지금도 사라율(裟羅栗)이라 한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종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자 관리는 괴상히 여겨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았더니 한 알이 바리 하나에 가득 차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이유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미 중이 되자 그 집을 희사(喜捨)해서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했다.  스님의 행장(行狀)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조부가 살던 곳을 따른 것이고,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  상고해 보건대, 인덕(麟德) 2년 사이에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삽良州)를 두었는데 하주는 곧 지금의 창령군(昌寧郡)이요, 압량군(押梁郡)은 본래 하주의 속현(屬縣)이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이니 상주(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다.  스님의 아명(兒名)은 서당(誓幢)이요, 또 한 가지 이름은 신당(新幢; 당幢은 우리말로 모毛라고 한다)이다.

처음에 어머니 꿈에 유성(流星)이 품 속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으며, 장차 해산하려 할 때는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으니, 진평왕(眞平王)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丁丑; 617)이었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그의 유방(遊方)의 시말(始末)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업적들은 <당승전(唐僧傳)>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실려있으므로 여기에는 모두 싣지 않고 오직 향전(鄕傳)에 있는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을 기록한다.

스님이 일찍이 어느날 풍전(風顚)을 하여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太宗)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貴婦人)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것이다)에 과부 공주(公主)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원효(元曉)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 사천沙川이니 사천沙川을 속담에는 모천牟川, 또는 문천蚊川이라 한다.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 한다)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經書)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10현(賢) 중의 한 사람이다.  방언(方言)으로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여 육경(六經)과 문학(文學)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 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

원효는 이미 계(戒)를 잃어 총(聰)을 낳은 후로는 속인(俗人)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이름했다.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원효는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 속에 말한, "일체의 무애인(無애人)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는 문구를 따서 이름을 무애(無애)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어느날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敎化)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상추분유(桑樞분유) 확후(확候)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타佛)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元曉)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 할 것이다.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스스로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원효도 역시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의 새벽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그쳤다.  또 일찍이 송사(訟事)로 인해서 몸을 백송(百松)으로 나눴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 용의 권유로 해서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이라 했다.  이것은 또한 본시이각(本始二覺)이 숨어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이것을 헤치고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이것은 또한 지음(知音)하여 서로 창화(唱和)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총이 그 유해(遺骸)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종천(終天)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그때 곁에서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다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 터가 있다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각승(角乘)은 처음으로 <삼매경(三昧境)>의 축(軸)을 열었고,

무호(舞壺)는 마침내 1만 거리 바람에 걸었네.

달 밝은 요석궁(瑤石宮)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芬皇寺)엔 돌아다보는 소상(塑像)만 비었네. 

의상전교(義湘傳敎) 

법사(法師) 의상(義湘)의 아버지는 한신(韓信)이요,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나이 29세에 서울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중국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敎化)를 보려 하여 드디어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 변방으로 갔는데, 여기에서 변방의 순라군(巡邏軍)이 간첩(間諜)으로 잡아 가둔 지 수십일 만에 겨우 풀려 돌아왔다(이 사실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의상본전義湘本傳>과 원효대사元曉大師의 행장行狀에 있다).  영휘(永徽) 초년에 마침 당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자가 있으므로 그 배를 타고 중국에 들어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물렀는데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의상을 청해다가 관청에 머무르게 하고 대접하는 것이 매우 성대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을 뵈었는데 지엄은 그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海東)에서 났는데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서 중국에까지 와서 덮였고, 가지 위에는 봉황새의 집이 있는데,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 하나가 있어 그 광명(光明)이 먼 곳에까지 비쳤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스러워서 집을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리는데 의상이 오므로 지엄은 특별한 예로 그를 맞아 조용히 말했다.  "내가 꾼 어젯밤 꿈은 그대가 내게 올 징조였구려."  이에 입실(入室)할 것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경(華嚴經)>의 깊은 뜻을 세밀한 곳까지 해석했다.  지엄은 영질(영質)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새로운 이치를 터득해 내니 이야말로 깊이 숨은 것을 찾아내서 남천(藍천)이 그 본색(本色)을 잃은 것이라 하겠다.  이때 이미 본국의 승상(丞相) 김흠순(金欽純; 혹은 인문仁問)·양도(良圖) 등이 당나라에 갇혀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 하자 흠순 등은 몰래 의상을 권하여 먼저 돌아가게 하여, 함형(咸亨) 원년 경오(庚午; 670)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일을 본국 조정에 알리자 신인종(神印宗)의 고승(高僧) 명랑(明朗)에게 명하여 밀단(密壇)을 가설(假說)하고 비법(秘法)으로 기도해서 국난(國難)을 면할 수 있었다.

의봉(儀鳳) 원년(676)에 의상은 태백산(太伯山)에 돌아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고 대승(大乘)을 폈더니 영험이 많이 나타났다.  종남문인(終南門人) 현수(賢首)가 <수현소(搜玄疏)>를 지어서 부본(副本)을 의상에게 보내고, 아울러 은근한 뜻이 담긴 편지를 올렸다. 

서경(西京) 숭복사(崇福寺) 중 법장(法藏)은 해동(海東) 신라 화엄법사(華嚴法師)의 시자(侍者)에게 글을 올립니다.  한번 작별한 지 20여 년이 되니 사모하는 정성이 어찌 마음 속에서 떠나겠습니까.  게다가 연기와 구름이 1만 리나 되고 바다와 육지가 1,000겹이나 쌓였으니 이 몸이 다시 뵙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회포와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오리까.  전생(前生)에 인연을 같이 했고, 금세(今世)에 학업을 함께 닦았기 때문에 이 과보(果報)를 얻어서 함께 대경(大經)에 목욕하고, 선사(先師)의 특별한 은혜로 깊은 경전(經典)의 가르침을 입게 된 것입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에 돌아가신 후로 <화엄경(華嚴經)>을 강연해서 법계(法界)의 무애(無애)한 연기(緣起)를 드날려, 겹겹의 제망(帝網)으로 불국(佛國)을 새롭게 하여 중생(衆生)에게 이익을 주심이 크고 넓다 하오니 기쁜 마음이 더해집니다.  이것으로써 여래(如來)가 돌아가신 후에 불교를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굴려 불법(佛法)을 오래 머물게 한 분은 오직 법사(法師)뿐임을 알겠습니다.  법장(法藏)은 앞으로 나가는 것이 하나도 이루는 것이 없고 주선하는 일이 더욱 적사오니, 우러러 이 경전(經典)을 생각하니 선사(先師)께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직 분수에 따라 받은 바를 잠시도 놓칠 수 없으니 이 업(業)에 의지하여 내세(來世)의 인연을 맺기를 원할 뿐입니다.  다만 스님의 장소(章疏)는, 뜻은 풍부하지만 글이 간결하여 후세(後世)사람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의 깊은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義記)>를 이루었습니다.  요새 이것을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베껴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그 지방에 전할 것입니다.  하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그 잘잘못을 자세히 검토하셔서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마땅히 내세(來世)에서는 사신수신(捨身受身)하여 함께 노사나불(盧舍那佛)의 이와 같은 끝이 없는 묘법(妙法)을 듣고, 이와 같은 무량(無量)한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원행(願行)을 수행(修行)한다면 나의 남은 악업(惡業)은 하루아침에 떨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상인(上人)께서는 옛날의 일을 잊지 마시고 제취(諸趣) 중에서 정도(正道)로써 가르쳐 주시옵소서.  인편(人便)이 있으면 때때로 안부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이 글은 <대문류大文類>에 실려 있음) 

의상은 이에 영(令)을 내려 열 곳 절에서 불교를 전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原州)의 비마라사(毗摩羅寺),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 비슬산(毗瑟山)의 옥천사(玉泉寺), 금정산(金井山)의 범어사(梵魚寺), 남악(南嶽)의 화엄사(華嚴寺) 등이 이것이다.  또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과 <약소(略疏)>를 지어서 일승(一乘)의 요점을 모두 기록하여 천 년의 본보기가 되게 하였으니 이를 여러 사람이 다투어 소중히 지녔다.  이 밖에는 저술한 것이 없었으니 온 솥의 고기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족한 것이다.

<법계도(法界圖)>는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668)에 완성되었으며, 이 해에 지엄(智儼)도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은 마치 공자(孔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끊은 것과 같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상은 금산보개(金山寶蓋)의 화신(化身)이라 하는데 그의 제자에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勳)·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명의 고승들이 영수(領首)가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성(亞聖)들이며 각각 전기(傳記)가 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골암사(골암寺)에 살면서 밤마다 팔을 뻗쳐서 부석사 석등(石燈)에 불을 켰다.  지통은 <추동기(錐洞記)>를 지었는데, 그는 대개 친히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묘한 말이 많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佛國寺)에 살았으며 항상 천궁(天宮)을 왕래했다.  의상이 황복사(皇福寺)에 있을 때 여러 무리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항상 허공을 밟고 올라가 층계는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리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무리들도 층계에서 3척이나 떠나 허공을 밟고 돌았기 때문에 의상은 그 무리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가르치지 못한다."  이 나머지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본전(本傳)과 같다.

찬(讚)해 말한다. 

덤불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 연기와 티끌 무릅쓰니,

지상사(至相寺) 문이 열려 귀한 손님 접대했네.

화엄(華嚴)을 캐다가 고국(故國)에 심었으니,

종남산(終南山)과 태백산(太伯山)이 함께 봄 맞았네. 

사복불언(蛇福不言) 

서울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있는 과부가 남편도 없이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2세가 되어도 말을 못하고 일어나지 못하므로 사동(蛇童; 아래에는 사복蛇卜이라도고 하고, 또 사파蛇巴·사복蛇伏이라고 썼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사동蛇童을 말한다)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때 원효(元曉)가 고선사(高仙寺)에 있었다.  원효는 그를 보고 맞아 예를 했으나 사복(蛇福)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한다.  "그대와 내가 엣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이제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원효는 "좋다"하고 함께 사복의 집으로 갔다.  여기에서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布薩)시켜 계(戒)를 주게 하니, 원효는 그 시체 앞에서 빌었다.  "세상에 나지 말 것이니, 그 죽는 것이 괴로우니라.  죽지 말 것이니 세상에 나는 것이 괴로우니라."  사복은 그 말이 너무 번거롭다고 하니 원효는 고쳐서 말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모두 괴로우니라."  이에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한다.  "지혜 있는 범을 지혜의 숲 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복은 이에 게(偈)를 지어 말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라수(裟羅樹) 사이에서 열반(涅槃)하셨네.

지금 또한 그같은 이가 있어,

연화장(蓮花藏) 세계로 들어가려 하네.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명랑하고 청허(淸虛)한 세계가 있는데, 칠보(七寶)로 장식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인간의 세계는 아닌 것 같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속에 들어가니 갑자기 그 땅이 합쳐 버린다.  이것을 보고 원효는 그대로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해서 금강산(金剛山)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도량사(道場寺)라 하여, 해마다 3월 14일이면 점찰회(占察會)를 여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사복이 세상에 영험을 나타낸 것은 오직 이것 뿐이다.  그런데 민간에서는 황당한 얘기를 덧붙였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찬(讚)해 말한다. 

잠자코 자는 용이 어찌 등한하리.

세상 떠나면서 읊은 한 곡조 간단도 해라.

고통스런 생사가 본래 고통이 아니어니,

연화장 세계 넓기도 해라.

진표전간(眞表傳簡) 

중 진표(眞表)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목全州牧) 만경현(萬頃縣; 혹은 두내산현豆乃山縣, 또는 나산현那山縣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만경萬頃, 옛 이름은 두내산현豆乃山縣이다.  <관녕전貫寧傳>에 중 [표表]의 향리鄕里로서 금산현金山縣 사람이라 한 것은 절 이름과 현縣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요,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이며, 성(姓)은 정(井)씨이다.  나이 12세 때 금산사(金山寺)의 숭제법사(崇濟法師) 강석(講席)에 가서 중이 되어 배우기를 청했다.  그 스승이 일찍이 말했다.  "나는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선도삼장(善道三藏)에게 배운 후에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현신(現身)에게서 오계(五戒)를 받았다."  진표는 물었다.  "부지런히 수행(修行)하면 얼마나 되어 계(戒)를 얻게 됩니까."  숭제(崇濟)가 말했다.  "정성만 지극하다면 1년을 넘지 않을 것이다."

진표는 스승의 말을 듣고 명산(名山)을 두루 다니다가 선계산(仙溪山) 불사의암(不思議庵)에 머물면서 삼업(三業)을 닦아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계(戒)를 얻었다.  그는 처음에 7일 밤을 기약하고 오륜(五輪)을 돌에 두들겨서,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지고 바위 언덕에까지 피가 쏟아졌다.  그래도 아무런 부처의 감응이 없으므로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다시 7일을 더 기약하여 14일이 되자 마침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뵙고 정계(淨戒)를 받았으니 이때는 바로 개원(開元) 28년 경진(庚辰; 740) 3월 15일 진시(辰時)요, 진표의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그의 뜻이 자씨(慈氏)에게 있었으므로 감히 중지하지 않고 영산사(靈山寺; 혹은 변산邊山, 또는 능가산楞伽山이라 한다)로 옮겨가서 또 처음과 같이 부지런하고 용감하게 수행(修行)했다.  과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감응해 나타나 <점찰경(占察經)> 2권(이  經은 진陳·수隋 시절에 외국에서 번역된 것이니 지금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다만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 경經을 진표眞表에게 주었을 뿐이다)과 증과(證果)의 간자(簡子) 189개를 주면서 일렀다.  "이 가운데서 제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를 비유한 것이요, 제9간자는 구족(具足)의 계(戒)를 얻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며, 나머지는 모두 침향(沈香)과 단향(檀香)나무로 만든 것으로, 이것은 모두 번뇌(煩惱)에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것으로써 세상에 법을 전하여 남을 구제하는 뗏목을 삼으라."  진표는 미륵보살의 기별(記별)을 받자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살면서 해마다 단석(壇席)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는데, 그 단석의 정결하고 엄한 것이 이 말세(末世)에는 보지 못하던 일이었다.  풍교(風敎)의 법화(法化)가 두루 미치자 여러 곳을 다니다가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이르니 섬 사이의 물고기와 자라들이 다리를 놓고 물 속으로 맞아들이므로 진표가 불법(佛法)을 강의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계(戒)를 받았다.  그때 바로 천보(天寶) 11년 임진(壬辰; 752) 2월 15일이었다.  어떤 책에는 원화(元和) 6년(811)이라 했지만 잘못이니 원화(元和)는 헌덕왕(憲德王) 때이다(이것은 성덕왕聖德王 대로부터 거의 70년쯤 된다).  경덕왕(景德王)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중(宮中)으로 맞아들여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곡식 7만 7,000석을 내렸다.  초정(椒庭)과 열악(列岳)들도 모두 계품(戒品)을 받고, 비단 500필과 황금 50냥을 주었다.  그는 이것을 모두 받아서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 널리 불사(佛事)를 일으켰다.  그의 사리(舍利)는 지금의 발연사(鉢淵寺)에 있으니, 곧 바다의 물고기들을 위해서 계(戒)를 주던 땅이다.

그의 제자 중에서 불법을 얻은 영수(領袖)로는 영심(永深)·보종(寶宗)·신방(信芳)·체진(體珍)·진해(珍海)·진선(眞善)·석충(釋忠) 등이 있는데,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영심은 진표가 간자를 전했으므로 속리산(俗離山)에 살았는데 이가 진표의 법통(法統)을 계승한 제자다.  그 단(壇)을 만드는 법은 점찰(占察) 육륜(六輪)과는 조금 다르지만 수행(修行)하는 법은 산 속에 전하는 본규(本規)와 같았다.

<당승전(唐僧傳)>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개황(開皇) 13년(593)에 광주(廣州)에 참법(懺法)을 행하는 중이 있었다.  그는 가죽으로 점자(岾子) 두 장을 만들어 선(善)과 악(惡) 두 글자를 써서 사람에게 던지게 하여 선자(善字)를 얻은 자를 길(吉)하다고 했다.  또 그는 스스로 박참법(撲懺法)을 행해서 지은 죄를 없애게 한다고 하니 남녀가 한데 어울려서 함부러 받아들여 비밀히 행해서 청주(靑州)에까지 퍼졌다.  동행(同行) 관사(官司)가 이것을 조사해 보고 요망스러운 일이라 하니 이에 그들은 말했다.  "이 탑참법(搭懺法)은 <점찰경(占察經)>에 의한 것이고, 박참법은 여러 경(經) 속의 내용에 따른 것으로, 온몸을 땅에 던져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한다."  이때 사실을 위해 아뢰자 황제(皇帝)는 내사시랑(內史侍郞) 이원찬(李元撰)을 시켜서 대흥사(大興寺)로 가서 여러 대덕(大德)들에게 물으니, 대사문(大沙門) 법경(法經)과 언종(彦琮)등이 대답했다.  "<점찰경>은 두 권이 있는데, 책 머리에 보리등(菩提燈)이 외국에서 번역한 글이라고 하였으니 근대(近代)에 나온 것 같습니다.  또한 사본(寫本)으로 전하는 것이 있는데, 여러 기록을 검사해 보아도 아무데도 바른 이름과 번역한 사람과 시일(時日)이나 장소가 모두 없습니다.  탑참법(搭懺法)은 여러 가지 경(經)과는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 의해서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리하여 칙령(勅令)을 내려 이것을 금지시켰다.

이제 이것을 시험삼아 의론한다.  청주거사(靑州居士) 등의 탑참(搭懺)의 일은 마치 큰 선비가 시서발총(詩書發塚)하는 것과 같아 '범을 그리다가 이루지 못하고 개를 그렸다'고 할 수 있으니, 불타(佛陀)가 미리 방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만일 <점찰경(占察經)>을 번역한 사람이나 그 시일(時日)과 장소가 없다고 해서 의심스럽다고 한다면 이것도 또한 삼[麻]을 취하기 위해 금(金)을 버리는 격(格)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문(經文)을 자세히 읽어 보면 실단(悉壇)이 깊고 조밀하여 더러운 것과 흠이 있는 것을 깨끗이 씻어 주고 게으른 사람을 충격시키는 것이 이 경전(經典)만한 것이 없다.  때문에 그 이름은 대승참(大乘懺)이라고 했다.  또 육근(六根)이 모인 가운데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개원(開元)·정원(貞元) 연간에 나온 두 <석교록(釋敎錄)> 속에는 정장(正藏)으로 편입되어 있으니, 비록 성종(性宗)은 아니지만 그 상교(相敎)의 대승(大乘)으로는 자못 넉넉한 셈이다.  어찌 탑참(搭懺)이나 박참(撲懺)의 두 참(懺)과 함께 말할 수 있으랴.

<사리불문경(舍利佛問經)>에 의하면 부처가 장자(長者)의 아들 빈야다라(빈若多羅)에게 말했다.  "네가 7일 7야 동안에 너의 전죄(前罪)를 뉘우쳐서 모두 씻게 하라."  다라(多羅)가 이 가르침을 받들어 밤낮으로 정성껏 행하니, 제5일 저녁에 이르자 그 방 안에 여러 가지 물건이 비오듯이 내려 수건·복두(복頭)·총채·칼·송곳·도끼와 같은 물건들이 그의 눈앞에 떨어졌다.  다라(多羅)가 기뻐하여 부처에게 물었더니 부처는 대답한다.  "이것은 네가 물욕(物慾)을 벗어날 징조이니, 이것은 모두 베고 터는 물건이다."  이 말에 의하면 <점찰경>에서 윤(輪)을 던져 상(相)을 얻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것으로 진표공(眞表公)이 참회를 일츠켜서 간자(簡子)를 얻고 불법을 듣고 부처를 본 것이 허망된 일이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하물며 이 경(經)을 거짓되고 망령된 것이라고 한다면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어찌해서 진표스님에게 친히 전수(傳授)했겠는가.  또 이 경을 만일 금한다면 <사리불문경(舍利佛問經)>도 또한 금할 것인가.  언종(彦琮)의 무리야말로 금을 훔칠 때 사람을 못 보았으니, 글을 읽는 자들은 이것을 자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요계(요季)에 현신(現身)해서 용롱(용聾)을 깨우치니,

영악(靈嶽)과 선계(仙溪)에서 감응(感應)해 통했네.

정성 다해 탑참(搭懺) 전했다고 말하지 말라.

동해에 다리를 놓아 준 어룡(魚龍)도 감화되었네. 

 

관동풍악(關東楓岳) 발연수석기(鉢淵藪石記; 이 기록은 사주寺主 영잠瑩岑이 지은 것으로 승안承安 4년                                                                   기미己未(1199)에 돌을 세웠다)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全州)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중이 될 뜻을 가지니 아버지가 허락하므로 율사(律師)는 금산수(金山藪)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순제(順濟)가 <사미계법(沙彌戒法)>과 <전교공양차제비법(傳敎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말했다.  "너는 이 계법(戒法)을 가지고 미륵(彌勒)·지장(地藏) 두 보살(菩薩) 앞으로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懺悔)해서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도록 하라."  율사(律師)는 가르침을 받들고 작별하여 물러나와 두루 명산(名山)을 유람하니 나이 이미 27세가 되었다.  상원(上元) 원년 경자(庚子; 760)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어 보안현(保安縣)에 가서 변산(邊山)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쌀 5홉으로 하루의 양식을 삼았는데, 그 가운데서 한 홉을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彌勒像)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戒法)을 구했으나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했다.  이에 발분(發憤)하여 바위 아래에 몸을 던지니, 갑자기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에 올려 놓았다.  율사는 다시 지원(志願)을 내어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修道)하여 돌로 몸을 두드리면서 참회하니, 3일 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진다.  7일이 되던 날 밤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면서 와서 그를 도와 주니 손과 팔뚝이 전과 같이 되었다.  보살이 그에게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더욱더 정진(精進)했다.  21일이 다 차니 곧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들이 오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자장보살과 미륵보살의 앞에 나타나니 미륵보살이 율사의 이마를 만지면서 말했다.  "잘하는도다.  대장부여!  이와 같이 계(戒)를 구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서 참회하는도다."  지장이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彌勒)이 또 목간자(木簡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또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씌어 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한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니, 이것은 곧 시(始)와 본(本)의 두 각(覺)을 이르는 것이다.  또 아홉번째 간자는 법(法)이고, 여덟 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이것으로써 마땅히 과보(果報)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현세(現世)의 육신(肉身)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이후에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두 보살은 곧 숨었다.  이 때가 임인(壬寅; 762)년 4월 27일이었다.

율사가 교법(敎法)을 받고 금산사(金山寺)를 세우고자 하여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갑자기 용왕(龍王)이 나와서 옥가사(玉袈裟)를 바치고 팔만권속(八萬眷屬)을 거느리고 그를 호위하여 금산수(金山藪)로 가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안에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보살이 감동하여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율사에게 계법(戒法)을 주니 이에 율사는 시주(施主)를 권하여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만들고, 또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모양을 금당(金堂) 남쪽 벽에 그렸다.  상(像)은 갑진(甲辰; 764)년 6월 9일에 완성하여 병오(丙午; 766)년 5월 1일에 금당에 모셨으니,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이었다.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우차(牛車)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소들이 율사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우니 수레에 탄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와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분입니까."  율사가 말한다.  "나는 금산수(金山藪)의 중 진표(眞表)요.  나는 일찍이 변산(邊山)의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진생(眞생)을 받았기 때문에 절을 지어 길이 수도(修道)할 곳을 찾아 오는 것입니다.  이 소들은 겉은 어리석은 듯하지만 속은 현명합니다.  내가 계법받는 것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말을 다 듣고 나더니 말한다.  "짐승도 오히려 이러한 신심(信心)이 있는데 하물며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무심하겠습니까."  그는 즉시 손으로 낫[렴]을 쥐고 스스로 자기 머리털을 잘라 버렸다.  율사는 자비한 마음으로 다시 그의 머리를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이들은 속리산 골짜기 속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표를 해 두었다.  그들은 명주(溟州) 해변으로 돌아와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와 자라 등속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에 오더니 몸을 맞대어 육지처럼 만들어 주므로 율사는 그것을 밟고 바다에 들어가서 계법을 외워 주고 다시 나가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연수(鉢淵藪)를 세우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여기에서 7년 동안 살았는데, 명주(溟州) 지방에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렸다.  율사가 이들을 위해서 계법을 설(說)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지켜서 삼보(三寶)에 공경을 다하여, 갑자기 고성(高城)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저절로 죽어서 나왔다.  사람들이 이것을 팔아 먹을 것을 장만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율사는 발연수(鉢淵藪)에서 나와 다시 불사의방(不思議房)에 이르렀는데 그 후에는 고향으로 가서 그 아버지를 뵙기도 하고 혹은 진문대덕(眞門大德)의 방에 가서 살기도 했다.  이때 속리산의 고승 영심(永深)이 대덕(大德)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과 함께 율사가 있는 곳에 와서 청했다.  "우리들은 천릿길을 멀다 하지 않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법문(法門)을 주시기 바랍니다."  율사가 잠자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니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 위에 올라가 거꾸로 땅에 떨어지면서 맹렬히 참회했다.  이에 율사가 교(敎)를 전하여 관정(灌頂)하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와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주었다.  다시 미륵진생(彌勒眞생) 아홉째 간자와 여덟째 간자를 주면서 경계했다.  "아홉번째 간자는 법이요, 여덟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다.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이 있으니, 거기에 정사(精舍)를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서 널리 인간계(人間界)와 천상계(天上界)의 중생들을 건지고, 후세에까지 전하도록 하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바로 속리산에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길상사(吉祥寺)라고 했다.  영심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율사는 그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사에 가서 함께 도업(道業)을 닦아 효도를 다했다.

율사가 세상을 떠날 때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서 죽으니 제자들이 그 시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공양하다가 뼈가 흩어져 떨어지자 흙으로 덮어 묻어서 무덤을 만들었다.  그 무덤에 푸른 소나무가 바로 나더니 세월이 오래 되자 말라죽었다.  다시 나무 하나가 났는데 뿌리는 하나이더니 지금은 나무가 쌍으로 서 있다.

대개 그를 공경하는 자가 있어 소나무 밑에서 뼈를 찾는데, 혹은 얻기도 하고 혹은 얻지 못하기도 했다.  나는 율사의 뼈가 아주 없어질까 두려워하여 정사(丁巳; 1197)년 9월에 특히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에 담았는데 3홉 가량이나 되었다.  이에 큰 바위 위에 있는 쌍으로 난 나무 밑에 돌을 세워 뼈를 모셨다. 

이 기록에 실린 진표의 사적은 발연석기(鉢淵石記)와는 서로 다른다.  때문에 영잠(瑩岑)이 기록한 것만 추려서 싣는 것이다.  후세의 어진 이들은 마땅히 상고할 것이다.  무극(無極)은 쓴다. 

승전촉루(勝詮촉루) 

중 승전(勝詮)은 그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일찍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현수국사(賢首國師)의 강석(講席)에 나가 현언(玄言)을 받아 정미한 것을 연구하여 생각을 쌓고, 보는 것이 슬기롭고 뛰어나 깊은 것과 숨은 것을 찾아 그 묘함이 심오(深奧)함을 다하였다.  이에 그는 인연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여 고국(故國)으로 돌아올 마음을 가졌다.

처음에 현수(賢首)는 의상(義湘)과 함께 배워 지엄화상(智儼和尙)의 사랑스런 가르침을 받았다.  현수는 스승의 말에 대하여 글뜻과 과목(科目)을 연술(演述)하여, 승전법사(勝詮法師)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기회로 이 글을 보내니 의상도 역시 글을 보냈다 한다.  그 별폭(別幅)에는 이렇게 말했다.  "<탐현기(探玄記)> 20권 중에서 두 권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교분기(敎分記)> 3권, <현의장등잡의(玄義章等雜義)> 1권, <화엄범어(華嚴梵語)> 1권, <기신소(起信疎)> 2권, <십이문소(十二門疎)> 1권, <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 1권을 모두 옮겨 베꼈으니 승전법사 편에 보내드립니다.  저번에 신라의 중 효충(孝忠)이 금 9푼을 갖다 주면서 상인(上人)이 보낸 것이라고 하오니, 비록 편지는 받지 못했지만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인도의 군지조관(軍持조灌) 한 개를 보내어 적은 정성을 표하오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아룁니다."  승전법사가 돌아오자 이 현수의 글을 의상에게 전했다.  의상은 법장(法藏)의 이 글을 보니 마치 지엄(智儼)의 가르침을 친히 듣는 것과 같았다.  수십 일 동안 탐색(探索)하고 연구하여 제자들에게 주어 이 글을 널리 연술(演述)시켰으니, 이 말은 의상의 전기에 실려 있다.

상고해 보면 이렇다.  이 원만하고 융통(融通)하는 가르침이 청구(靑丘)에 널리 퍼진 것은 실로 승전법사의 공이다.  그 후에 중 범수(梵修)가 멀리 당나라에 가서 새로 번역한 <후분화엄경(後分華嚴經)>·<관사의소(觀師義疏)>를 구해 가지고 돌아와 연술했다고 하니, 이때는 정원(貞元) 기묘(己卯; 799)년이었다.  이도 역시 불법을 구해다가 널리 드날린 사람이라 하겠다.

승전은 상주(尙州) 영내(領內)의 개령군(開寧郡) 경계에 절을 새로 짓고 돌들로 관속(官屬)으로 삼아 <화엄경(華嚴經)>을 개강(開講)했다.  그 뒤에 신라 중 가귀(可歸)가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서 전등(傳燈)을 계속하여 이에 <심원장(心源章)>을 편찬하였으니, 그 대략에 보면 이러하다.  승전법사는 돌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불경을 논의(論議)하고 강연했다고 하니, 그곳은 지금의 갈항사(葛項寺)이다.  그 돌 80여 개는 지금까지 강사(綱司)가 전하고 있는데 자못 신령스럽고 이상한 것이 있다.

그 밖의 사적들은 모두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대각국사실록(大覺國師實錄)>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심지계조(心地繼祖)

 중 심지(心地)는 진한(辰韓) 제41대 헌덕대왕(憲德大王) 김씨(金氏)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깊고 천성이 맑고 지혜가 있었다.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서 불도(佛道)에 부지런했다.  중악(中岳; 지금의 공산公山)에 가서 살고 있는데 마침 속리산(俗離山)의 심공(深公)이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해 받아서 과정법회(果訂法會)를 연다는 말을 듣고, 뜻을 결정하여 찾아갔으나 이미 날짜가 지났기 때문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에 땅에 앉아서 마당을 치면서 신도(信徒)들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했다.  7일이 지나자 큰 눈이 내렸으나 심지(心地)가 서 있는 사방 10척 가량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그 신기하고 이상함을 보고 당(堂)에 들어오기를 허락했으나 심지는 사양하여 거짓 병을 칭탁하고 방 안에 물러앉아 당을 향해 조용히 예배했다.  그의 팔꿈치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려 마치 진표공(眞表公)이 선계산(仙溪山)에서 피를 흘리던 일과 같았는데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매일 와서 위문했다.  법회가 끝나고 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옷깃 사이에 간자(簡子) 두 개가 끼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가지고 돌아가서 심공(深公)에게 아뢰니 영심(永深)이 말하기를, "간자는 함 속에 들어 있는데 그럴 리가 있는가."하고 조사해 보니 함은 봉해 둔 대로 있는데 열고 보니 간자는 없었다.  심공이 매우 이상히 여겨 다시 간자를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다.  심지가 또 길을 가는데 간자가 먼저와 같았다.  다시 돌아와서 아뢰니 심공이 말하기를, "부처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받들어 행하도록 하라"하고 간자를 그에게 주었다.  심지가 머리에 이고 중악으로 돌아오니 중악의 신이 선자(仙子) 둘을 데리고 산꼭대기에서 심지를 맞아 그를 인도하여 바위 위에 앉히고는 바위 밑으로 돌아가 엎드려서 공손히 정계(正戒)를 받았다.  이때 심지가 말했다.  "이제 땅을 가려서 부처님과 간자를 모시려 하는데, 이것은 우리들만이 정할 일이 못되니 그대들 셋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서 간자를 던져 자리를 점치도록 하자."  이에 신들과 함께 산마루로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간자를 던지니, 간자는 바람에 날아간다.  이때 신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막혔던 바위 멀리 물러가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길이 훤해지네.

불골(佛骨) 간자(簡子)를 찾아 얻어서,

깨끗한 곳 찾아 정성드리려네. 

노래를 마치자 간자를 숲속 샘에서 찾아 곧 그 자리에 당(堂)을 짓고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 동화사(桐華寺)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은 우물이 이것이다.

본조(本朝) 예종(睿宗)이 일찍이 부처의 간자를 맞아 대궐 안에서 예배했는데, 갑자기 아홉 번째 간자 하나를 잃어 아간(牙簡)으로 대신하여 본사(本寺)에 돌려보냈더니, 지금은 이것이 점점 변해서 같은 빛이 되어 새것과 옛것을 분별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바탕은 상아도 옥도 아니다.

<점찰경(占察經)> 상권(上卷)을 상고해 보면 189개 간자(簡子)의 이름이 있는데 이러하다.  1은 상승(上乘)을 구해서 불퇴위(不退位)를 얻은 것이요, 2는 구하는 과(果)가 마땅한 증(證)을 나타내는 것이요, 제3과 제4는 중승(中乘)과 하승(下乘)을 구해서 불퇴위(不退位)를 얻은 것이요, 5는 신통력(神通力)을 구해서 성취함이요, 6은 사범(四梵)을 구해서 성취함이요, 7은 세선(世禪)을 닦아 성취함이요, 8은 받고 싶은 묘계(妙戒)를 얻음이요, 9는 일찍이 받은 구계(具戒)를 얻음이요(이 글을 가지고 고정考訂한다면,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말한, '새로 얻은 계戒'는 금세今世에 처음 얻는 계戒를 말하는 것이요, '옛날 얻은 계戒'는 과거세過去世에 일찍이 받았다가 금세今世에 또 더 받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수생본유修生本有의 신구新舊를 말한 것이 아님을 알겠다), 10은 하승(下乘)을 구하며 아직 신심(信心)에 살지 않는 것이요, 다음은 중승(中乘)을 구하여 아직 신심에 살지 않음이다.  이와 같이 해서 제172까지는 모두 과거세(過去世)나 현세(現世) 사이에 혹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혹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 일들이다.  제173은 몸을 버려 이미 지옥에 들어감이요(이상은 모두 미래未來에의 과果이다), 제174는 죽은 후에 축생(畜生)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귀(餓鬼)·수라(修羅)·인(人)·인왕(人王)·천(天)·천왕(天王)에까지 미치고, 불법(佛法)을 들음, 출가(出家), 성승(聖僧)을 만남,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남, 정토(淨土)에 태어남, 부처를 찾아뵘, 하승(下乘)에 머무름, 중승에 머무름, 상승에 머무름, 해탈(解脫)을 얻음의 제189 등이 이것이다(위에서는 하승下乘에 머무름에서부터 상승上乘에서 불퇴전不退轉함을 얻음까지 말했고, 이제 상승上乘에서 해탈解脫을 얻음 등을 말함은 이것으로 분별된다).  이들은 모두 삼세(三世)의 선악과보(善惡果報)의 차별의 모습이다.

이것으로 점을 쳐 보면, 마음이 행하려고 한 일과 간자가 서로 맞으면 감응(感應)하고 그렇지 못하면 지극한 마음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이것을 허류(虛謬)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8과 9의 두 간자는 오직 189개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송전(宋傳)>에서는 다만 108 첨자(籤子)라고만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필경 저 백팔번뇌(百八煩惱)의 명칭으로 알고 말한 것 같다.  그리고 또 경문(經文)을 상고해 보지도 않은 것 같다.

또 상고해 보면, 본조(本朝)의 문사(文士)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 2권에 신라 말년의 고승(高僧) 석충(釋沖)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진표율사(眞表律師)의 가사 한 벌과 계간자(戒簡子) 189개를 바쳤다고 써 있다.  이것이 지금 동화사(桐華寺)에 전해 오는 간자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찬(讚)해 말한다. 

금규(金閨) 속에서 자랐건만 일찍 속박을 벗어났고,

부지런함과 총명함 하늘이 주었네.

뜰에 가득 쌓인 눈 속에서 간자를 뽑아,

동화산(桐華山) 높은 봉우리에 갖다 놓았네. 

현유가(賢瑜가), 해화엄(海華嚴) 

유가종(瑜伽宗)의 조사(祖師) 고승(高僧) 대현(大賢)은 남산(南山) 용장사(茸長寺)에 살았다.  그 절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의 돌로 만든 장육상(丈六像)이 있었다.  대현이 항상 이 장육상을 돌면 장육상도 역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대현은 슬기롭고 분명하고 정밀하고 민첩해서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이 명백했다.  대개 법상종(法相宗)의 전량(銓量)은 그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깊어서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중국의 명사 백거이(白居易)도 일찍이 이것을 연구하다가 다 알지 못하고 말했다.  "유식(唯識)은 뜻이 그윽하여 알기 어렵고, 인명(因明)은 분석해도 열리지 않는다."  그러니 학자들이 배우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대현은 홀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잠시 동안에 그윽하고 깊은 뜻을 터득하여 회회유인(恢恢游刃)하였다.  이리하여 동국(東國)의 후진(後進)들은 모두 그 가르침에 따랐고, 중국의 학사(學士)들도 간혹 이것을 얻어 안목(眼目)으로 삼았다.

경덕왕(景德王) 천보(天寶) 12년 계사(癸巳; 753) 여름에 가뭄이 심하니 대현을 대궐로 불러들여 <금광경(金光經)>을 강(講)하여 단비를 빌게 했다.  어느날 재를 올리는데 바라를 열어 놓고 한참 있었으나 공양하는 자가 정수(淨水)를 늦게 올리므로 감리(監吏)가 꾸짖었다.  이에 공양하는 자가 말했다.  "대궐 안 우물이 말랐기 때문에 먼 곳에서 떠오느라고 늦었습니다."  대현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왜 진작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가."  낮에 강론할 때 대현은 향로를 받들고 잠자코 있으니 잠깐 사이에 우물물이 솟아나와서 그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되어 찰당(刹幢)의 높이와 가지런하게 되니, 궁중(宮中)이 모두 놀라서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했다.  대현은 일찍이 스스로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일컬었다.

찬(讚)해 말한다. 

남산(南山)의 불상(佛像)을 도니 불상도 따라 얼굴 돌려,

청구(靑丘)의 불교가 다시 중천(中天)에 떠올랐네.

궁중 우물을 솟구치게 한 것이,

향로 한 줄기 연기에서 시작될 줄 누가 알리. 

그 이듬해 갑오(甲午; 754)년 여름에 왕은 또 고승 법해(法海)를 황룡사(黃龍寺)로 청해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게 하고, 친히 가서 향을 피우고 조용히 말했다.  "지난해 여름에 대현법사(大賢法師)는 <금광경(金光經)>을 강론하여 우물물을 일곱 길이나 솟아나오게 했소.  그대의 법도(法道)는 어떠하오."  법해가 말한다.  "그것은 특히 조그만 일이어서 족히 칭찬할 것이 못됩니다.  이제 창해(滄海)를 기울여서 동악(東岳)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물에 떠내려가게 하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왕은 믿지 않고 농담으로만 여겼다.  오시(午時)에 강론하는데 향로를 안고 고요히 있노라니 잠깐 사이에 궁중에서 갑자기 우는 소리가 나고, 궁리(宮吏)가 달려와서 보고한다.  "동쪽 연못이 이미 넘쳐서 내전(內殿) 50여 칸이 떠내려갔습니다."  왕이 멍하니 어쩔 줄을 몰라하니 법해가 웃으면서 말한다.  "동해가 기울고자 수맥(水脈)을 먼저 불린 것뿐입니다."  왕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절을 했다.  이튿날 감은사(感恩寺)에서 아뢰었다.  "어제 오시(午時)에 바닷물이 넘쳐흘러서 불전(佛殿)의 뜰 앞까지 밀려 왔다가 저녁때에 물러갔습니다."  이 일로 해서 왕은 더욱 법해를 믿고 공경했다.

찬(讚)해 말한다. 

법해(法海)의 물결 움직임을 보니 법계(法界)는 넓기도 해라,

사해(四海)를 늘이고 줄이는 것도 어려울 것 없네.

높은 수미(須彌)를 크다고만 말하지 말라,

모두 우리 스님의 한 손가락 끝에 있느니.(이것은 석해石海가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