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가 왜 왜곡되었나     HOME

                         윤창열(한의학박사,대전대학교 한의학과 교수)

 우리 나라 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뭐라고 했냐면,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 왜곡되었느냐? 왜적이 침범해서 역사책을 불태우고, 내란이 일어나서 우리 나라 역사책을 불태워서 왜곡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나라의 역사가들의 의해서’ 왜곡이 됐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아주 엄청난 얘기를 하셨어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왜구나 내란의 병화에 의해서 그 역사가 왜곡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왜곡됐다 이거예요. 김부식, 김일연, 더 나아가서는, 조선시대에 와서 『동국통감』을 지은 서거정이라든가 하는, 그런 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저 또한 백 프로 동감을 합니다.

   삼독(三毒)에 의해 왜곡되었다 

재야사학자들 민족사학자들은, 우리 나라의 역사가 왜곡된 이유를, 세 가지, ‘삼독(三毒)’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삼독의 피해’라고 얘길 하고 있어요. 삼독. 세 가지의 독소라는 거예요. 중독, 왜독, 양독. 

중독(中毒), 이것은 ‘사대주의사관’에 의해서 왜곡된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왜독(倭毒), 이건 이제 ‘식민주의사관’이죠? 그 다음에 이제 양독, 지금의 역사 연구의 주류를 이루는 ‘실증주의사관’, 달리 ‘랑케사학’이라고 얘기하죠. 이 세 가지 삼독의 피해에 의해서 우리 역사가 왜곡되었다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어요.

    1. 중독(中毒) : 사대주의사관

사대주의의 시작 

그러면은 정말 사대주의 사관에 의해서, 우리 역사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현실로 한번 보자 이거예요. 
우리나라에서 사대주의의 시작을 보면, A.D. 608년에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걸병표(乞兵表)를 보냅니다. 군사를 좀 빌려달라 했던 그 일을 사대주의의 효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사대주의가 실행된 것은 ‘신라에서 A.D. 650년, 당나라 고종, 영휘(永輝) 원년에 연호를 갖다 쓰면서 사대주의가 실제 시작됐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왜냐? 이 연호를 썼다는 것은, ‘속국(屬國)’이라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A.D. 649년에 당태종 이세민이 죽습니다. 양만춘 장군이 쏜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서 죽죠. 단재 신채호 선생이 그렇게 밝혀냈어요. 그래서, 당태종이 649년에 죽고 나서 그 해에 고종이 등극을 했는데, 그 때를 즉위년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 다음 해, 650년을 ‘원년(元年)’이라고 하고 개원을 합니다. 연호를 쓰고요. 그 때 쓴 연호가 ‘영휘(永輝)’라는 연호예요. 영원히 아주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라는 뜻의 연호를 썼어요. 

그런데 그 연호를 신라에서 갖다 써 가지고, 사대주의의 뿌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통일신라시대 때는 당나라, 그 다음 고려시대 때는 송나라, 조선시대에 와 가지고는 명나라, 청나라. 이렇게 연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 국시처럼 돼버렸어요. 사대주의죠. 이렇게 되다 보니까 역사를 쓰는 역사학자들이, 아(我)의 입장에서,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우리 역사를 쓰는 게 아니라, 중국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씁니다, 정말 기막힌 얘깁니다. 

『삼국사기』의 사대성

『삼국사기』가 여러분들은, 우리 민족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쓰여졌다고 보지 않을 거예요. 그런 얘기는 하도 많이 하니까요. 

『삼국사기』는 철저하게, 김부식이 중국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썼어요. 놀라운 얘깁니다. 우리 민족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가, 우리 나라 사람이 썼지만, 그 정신은 중국 사람의 입장에서 썼다 이거예요, 중국사람! 

그런데, 그 김부식의 혈통을 보면, 김부식의 이름 속에 이미 사대주의가 들어가 있어요. 김부식이 셋째 아들인데, 김부식의 아버지가 김관(金觀)이란 사람입니다. 김부식의 아버지 김관이 중국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가, 중국에는 소동파, 동생인 소철, 소식, 이들이 유명하니까, 자기 셋째 아들의 이름을 소식에서 ‘식’ 자를 따서, 김부식(金富軾)이라고 지었어요. 소식의 식자를 따서 지은 겁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은 소철의 철자를 따서, 김부철(金富轍)이라고 지어요. 사대주의 정신이 자기 아버지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김부식은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우리 나라의 국풍파를 없애버리는 데, 앞장 선 사람입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데 나가잖아요? 그리고 나서는 삼국사기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김부식은 자기가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사람이 아니니까, 역대의 모든 사서(史書)를 전부 참고해 가지고, 책을 쓰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책을 쓰게 되는데, 『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위징 등이 그 『수서』를 썼거든요.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고구려(高句麗)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수나라와 고구려는 많은 전쟁을 했잖아요? 612년의 그 전쟁은 대단히 유명하구요.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수양제가 장차 토벌을 하려고 했다.’ 이렇게 썼어요. 중국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써야지요. 고구려는 자기의 적대국이니까. 그런데 삼국사기에 어떻게 적혀 있냐면,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놔요.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 이걸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임금께서 장차 토벌할려고 했다.’ 중국놈들은 고구려를 이렇게 쓰면 되지만, 김부식은 우리 나라 사람인데 그런 식으로 썼다는 거예요. 이게 중국사람 입장에서 쓴 거지, 우리 나라 사람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자기 할아버지하고 남의 할아버지가 싸웠다고 그럽시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치 않아가지고 남의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를 치려고 했다. 자기가 역사를 쓰면서, 우리 할아버지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그렇게 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국가적인 관계에서는, 민족간에 있어서는 대등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전부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요.

『삼국사기』라는 것이 이런 정도로 그 주체성을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진덕여왕 4년에 영휘연호를 썼다고 했잖아요? 거기다 또 자기가 주석을 달아놨어요.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아,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냐? 당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야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까, ‘과이능개(過而能改)라’.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이렇게 써놨어요. 

그건 정신병자예요, 정신병자. 역사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기술하면 되는 거지. 그건 아, 중국의 속국이 안 돼 가지고 안달하는 사람 아닙니까? ‘왜 진작 연호를 말이야 버리지 않았느냐? 꾸지람을 듣고서도 못 버리다가, 이제 연호를 쓰니까 참 잘 됐다.’라는 거예요. 이런 정도의 정신배기라면, 이건 나라를 가지고 중국에 걸어 들어가서, 나라를 갖다받칠 사람이예요. 민족의 개념이 없어요, 민족의 개념이.

기타 사서들의 사대성

일연의 『삼국유사』도 사실은 많이 왜곡이 돼 있는데…. 고조선조에서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그 환국을, 자신이 주(註)를 달면서 ‘위제석야(謂帝釋也)라’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불교의 제석환국으로 바꿔놔요. 또,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백두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고, 거기다 단군 왕검의 도읍지 아사달(阿斯達)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는 등, 배달국, 고조선의 광활한 활동지역을 반도 안으로 축소해 버려요. 이런 건 아주 잘못된 거죠. 

조선시대에 와서 서거정의 『동국통감』을 보면, 단군조선의 역사를 다루긴 다루는데, 저 바깥으로 떼어놓고는 다른 나라 역사처럼 다뤄요. 정통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같은 걸 보면, 우리의 역사를 ‘기자(箕子)’부터 시작해요, 기자. 게다가 단군왕검의 사적은 기자동래(箕子東來)의 밑에다 적고 있어요. 

그 외에 정인지의 『고려사』, 한백경의 『동국지리』, 한치윤의 『해동역사』,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등. 우리 나라의 역사가들이 전부, 역사를 쓰는 족족 다 왜곡을 시켜요. 역사를 쓰는 사람마다. 벌써 그 당시에는 환경자체가 그렇게 분위기가 돼버렸어요. 김부식만해도 고려 중기 때인데, 조선시대 때까지, 500년 이상이 흘러오는 동안 그렇게 왔는데, 주체성을 가졌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문난적(斯門亂賊)으로 몰려서 죽거든요. 조선초기에도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 역사가, 이렇게 사대주의사관에 의해서, 이 중독에 의해서 철저하게 왜곡이 됩니다. 고려시대의 모든 역사, 조선시대의 모든 역사가 다 왜곡이 되는 거예요, 전부 다. 

      2. 왜독(倭毒) :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 

 일제의, 역사 왜곡 과정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에, 우리 나라를 영원히 통치하기 위해서, 우리 민족의 서적을 약탈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모든 서적을 전부 일제 수색을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해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서적을 약탈해 갑니다. 그 때에 우리 민족의 역사책 같은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겠죠. 어느 정도 가져갔느냐?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보면, ‘51종 20여 만 권 정도를 가져갔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민족의 고대사, 그에 관한 서적이 일본에 수없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배달(30호)』이라는 월간지에 이런 내용이 실렸어요. 일본 황실 도서관에서 근무하다가 와서 청주에 살다가 죽은 사람이 증언한 내용입니다. 일본의 황실 도서관에 봤더니,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관한 책이 그렇게 많더라는 거예요. 우연히 그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서 근무를 했는데, 요번에 그것이 특집으로 나왔어요. 그 사람이 죽기 전에 구술을 했어요. 일본의 황실 도서관에 조선에서 약탈해간 서적이 그렇게 많더라고. 

일본놈들은 약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나라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 놈들이 말이야, 한국의 역사는 한국 사람보고 쓰라고 해야지, 왜 저희들이 역사를 씁니까? 그래서, 1922년 12월 달에‘조선사편수회’ 즉,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사료를 수집해서, 『조선사(朝鮮史)』를 편찬합니다. 그래서 1938년까지 35권, 본문만 35권이 되는 『조선사』를, 일본놈들이 만들어요. 그런데 거기에, 한국사람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냐? 이병도입니다. 금서룡(今西龍), 이마니시의 수서관 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 일등 공로자가 됩니다. 그 때 쌀 한 가마니가 10원 미만이었다 그래요. 그런데 일제가 조선사 편찬을 위해서 쓴 돈이 100만 원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 책을 쓰는데 쌀을 10만 가마 이상을 썼다는 건데요, 그 많은 돈을 들여 가지고 우리 나라 역사를 식민사관에 입각해서 역사를 썼습니다. 

우리 나라는 1945년에 해방이 되었지만, 일본놈들이 왜곡한 식민사관에서 아직도 헤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100% 지금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의 강단에 있는 사학자들이 식민사관을 척결해야 된다고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식민사관의 굴레를 쓰고 있으면서 식민사관을 척결해야 된다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 구역질이 나올 때도 있어요. 

일제의, 역사 왜곡 내용 

일본놈들이, 우리 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데 목표를 둔, 3대 기본 요강이란 게 있어요. 우리 나라가 1919년 3월 독립운동을 일으킨 뒤에, 일본의 제등실(齊藤實) 총독이 와서 문화정치를 표방하잖아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떠벌린 얘기가 있어요. 제가 한번 먼저 읽어볼 게요. 

문화정치를 표방한 조선총독 제등실은 교활하게도 조선사람을 반 일본사람으로 만들려고 이른바 ‘교육시책’에서,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일본사람이 조선사를 편수하는 그 근본 정신이 이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서룡’이라는 사람이 우리 나라의 고대사를 맡습니다. 그가 고대사를 맡는데, 고대사를 인정도 안 해요. ‘아,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다 믿을 수가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일본놈들은 자기들의 역사를 B.C. 660년부터 시작한다고 얘길 합니다. 웃기는 얘기죠. 일본이란 국호 자체가 A.D. 670년부터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하는데, 막 고무줄처럼 늘여서 갖다 논 거예요. 우리 나라에 ‘단군의 역사’가 있으면 자기들 역사보다 더 앞서거든요, 그러니까 일본은 첫째, 국조(國祖)와 상고사(上古史)의 부정, 이 국조가 있으면 골치가 아픈 거예요. 그래서, 단군의 부정은 뭐 틀림없이 들어가는 거고, 그 다음에 상고사를 부정합니다. 

‘단군시대의 역사? 다 믿을 수가 없고, 다 엉터리다.’ 그러는 거예요. 이마니시가 동경제대를 졸업했는데요. 경도제대 교수로 있으면서, 1921년에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데, 그 사람의 박사학위 논문이 「단군고」예요. 그런데 왜 그것을 썼겠어요? 그것은 의도적으로, 정략적으로 쓴 거겠죠. ‘근자에 말이야 조선사람들은 단군을 조선사람의 조상신으로 섬기는 대종교라든가 하는 이런 것까지 있는데,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내가 빨리 이 논문을 발표한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12년 『삼국유사』 「정덕본」, 정덕본에 나오는‘석유환국(昔有桓國)’을 말이에요, 석유환인(昔有桓因)이다 이렇게 고쳐서 출판을 하게 됩니다. 이게 「동경제대 영인본」이다, 이렇게 해서 발표를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말이에요, 반도사관을 주입해요. 한민족은 ‘야, 너희는 한반도에만 국한되어 살았던 민족이다.’이렇게 식민사관의 대표적인 특징이 반도사관을 주입하는 거예요. 사실은 ‘한반도다’ 하는 얘기도 일본놈들이 오면서 보편화된 얘기죠. 

그리고, 세 번째 우리의 민족성을 건드립니다. 우리 민족, 조선 민족은 이제까지 완전한 독립을 해본 적도 없는,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이다 이거예요. 전국시대에 유랑민들이 떠돌아 들어온 것이 한반도다 이거예요. 그래서 ‘전국시대에 유랑해 온 백성들이 살고 있었던 땅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분열만 일삼는 나라로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누어져 싸움박질만 하고, 고려시대에는 말이야, 음탕한 역사가 진행됐고, 조선시대에는 사색당쟁이라든가 사화라든가, 이렇게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맨 싸움만 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추진력이 없이 살아온 미개민족이기 때문에, 대동아의 미래를 책임져야할 일본이, 당연히 합방해 가지고 보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는 것이 식민사관의 목적입니다. 그외 다른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일제시대 때 역사를 그렇게 배웠던 사람들이 쓴 것이, 지금도 한국의 역사 교육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3. 양독(洋毒) : 실증주의사관

다음은 양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근래에 서양에 유학 갔다온 역사학자들을 보면, 실증주의 사학이다, 랑케사학이다 그래서, ‘유물이 안 나오면 안 믿는다’는 거예요. 파편조각이라도 하나 안 나오면 안 믿는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 민족의 주무대가 중국이에요, 중국. 거기에 중국사람들이 발견한 고고학 자료들만 해도 무수하게 많습니다. 그거 다 갖다 써야 되는데, 그거 하나도 없지요. 

이 양독,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대주의 사관이라든가 식민주의 사관에 의해서, 왜곡된 바탕 위에서 나오는 완전히 괴물 사학이죠. 

    4. 외래 종교의 폐해 

1) 유교의 폐해 

그리고 외래종교의 피해가 있습니다. 먼저 유교는 어떤 피해가 있냐하면, 유교는 중국중심주의를 제창해요. 그러니까 중국 주위에 있는 민족은 오랑캐다. 그래서 원래 우리가 ‘동이(東夷)’라고 할 때, 이(夷)자라는 것이 말이에요. 이게 대궁(大弓)의 뜻이거든요. 동쪽에 살면서 활을 잘 쏘는 민족이란 뜻인데, 이게 뭐 오랑캐, 한문교과서에도 오랑캐. 난 그런 게 아주 싫어요. 우리 민족이 동이족인데, 그러면 우리 민족이 오랑캐라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그렇게 나와요. 이것도 아(我)와 비아(非我)를 구분 못하는 정신나간 학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되고 있어요. 

재미있는 얘길 하나 들면요. 1102년 고려 숙종 7년에 송나라에서 사신이 왔어요. 그런데 ‘아, 여기 말이야 기자(箕子), 은나라의 3현 중 한 사람이었던 기자가 와서, 조선에서 왕 노릇을 했다고 그러는데, 기자의 무덤이 있습니까?’ 기자가 있긴 뭐가 있어요. 기자가 도망간 데는 ‘섬서성 태원현’이에요. 우리 나라에는 없어요. 그런데, 정문(鄭文), 예부상서 정문이라는 사람이 평양에 기자묘를 만듭니다. 그러니까 무주고총(無主古?), 주인 없는 무덤 하나를 만들어서 이것이 기자묘(箕子墓)다 하고서는 제사를 지내요. 그런데 그곳이 본래 단군을 모시던 사당이 있었어요. 그 어떤 제사를 지낼 때, 주된 신을 주벽신(主壁神)이라 그러는데, 원래 단군 할아버지가 주벽신이었어요. 그런데, 단군 할아버지는 저 서향(西向)으로 만들어놓고, 기자를 주벽으로 딱 만들어 놓은 겁니다. 게다가 기자는 초하루 보름마다 제사를 지내고, 단군 할아버지는 봄가을로 한번씩 지내고. 고려시대 때 또 그렇게 육갑잔치를 했었어요. 

기자는 무슨 얼토당토 않는 기자냔 말이에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정신나간 행동 한 것을 보면, 책을 다 찢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요. 참, 어떻게 우리 민족이 이렇게 정신나간 민족인가? 사대주의에 쩔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시 했던 거예요. 유교의 피해라는 게, 정신을 홀딱 훑어 가버렸거든요. 그런 피해가 있었어요. 
불교의 피해는 앞에서 삼국유사 얘기하면서 잠깐 다뤘었습니다. 

2) 기독교의 폐해 

기독교의 피해? 너무 많습니다. 

기독교는 말이에요, 너무 심한 얘기는 하면 안 되지만, 나는 그걸 잊지를 못해요. 86년도에 아시안 게임이 열렸어요. 그 때 서울시에서 ‘단군성전’을 새로 지을려고 했어요. 단군성전이 없는 것을 지을려는 것도 아니었어요. 있는 것을 좀 확대해 가지고 좀 큼지막하게 지으려고 있어요. 88올림픽도 있고 해서.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때, ‘우리 민족은 5천년의 유구한 단일 민족이다’ 이것을 좀 자랑을 할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때 기독교인들이, 모∼든 교회마다, “단군성전 결사반대”, ‘결사’는 빨간 글씨로 썼어요. 다 그랬어요. 나는 대전시내 중동에서 그런 글을 써 붙인 교회 앞을 지나가면서,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 제 어린 마음에도 그랬어요, 어린 마음에도. 저건 용서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방송에 나와서 우린 단일민족이 아니다. 단군은 신화의 인물이다. 단군은 가공의 인물이다. 기독교하는 사람들이 방송이라든가 신문을 얼마나 장악하고 있습니까? 말도 못했어요. 그 때 그 가슴에 입었던 상처가 저는 지금도 잊어버리질 않습니다. 

그들이 단군에 대해서 압니까? 실지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본질적으로 봐야지, 기독교의 도그마 속에 빠져 가지고 무조건 부정할려고 드는 그런 자세가 좋지 않은 거죠. 

연세대에서도 말이에요, 장승 세워놨는데, 베어버렸잖아요. 분명히 기독교하는 애들이 베어버렸을 거예요. 대학가에 장승 세워놓으면 톱으로 다 베어버리고 말이에요. 

민족의 문화를 부정하고,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는 외래종교에 의해서, 우리 민족의 역사가 그렇게 왜곡이 되었던 것입니다. 

朝鮮國 上計神 中計神 下計神이 無依無托하니 
조선국 상계신 중계신 하계신 무의무탁 

不可不 文字戒於人이니라. 
불가불 문자계어인 

조선국 상계신(환인) 중계신(환웅) 하계신(단군)이 
몸붙여 의탁할 곳이 없나니 
환부역조하지 말고 잘 받들기를 글로써 이렇게 경계하노라. 

여호와는 유대족의 지방신 
사람이란 제 조상이 있고 족속마다 제 뿌리가 있나니 
조선사람의 조상은 단군이요 여호와는 유대사람의 지방신이니라.

   * 종교적인 표현은 일부 삭제되었음을 양해바랍니다.

   *출처:증산도 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