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단군조선이 다시 굴절된 것은     HOME

광복 후 한글 보급과 함께 서서히 부활되던 단군조선이 다시 굴절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1963년 국사교과서 내용을 통일하면서, 그리고 1974년 '국정국사교과서'부터 부정ㆍ축소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1963년이면, 정인보(鄭寅普; 1892∼?)ㆍ안재홍(安在鴻; 1891∼1965)ㆍ손진태(孫晋泰; 1900∼?) 선생 등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이 모두 납북된 뒤이고, 장도빈 선생 마저도 타계하신 해이다.

 1963년 5월 문교부의 위촉을 받은 국사학자와 검인정국사교과서 집필자, 국사담당교사 등 28명이 12차례의 회의를 열고, "단군은 민족의 '신화'로 취급한다!, 삼국의 건국에서 삼국의 시조인 주몽ㆍ온조ㆍ박혁거세는 부족사회에서 다룬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한 때는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재위; 53∼146), 백제는 제8대 고이왕(재위; 234∼286), 신라는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 때부터 또는 몇세기 부터라고 한다!" 등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린 이후이다. 이런 결론은 일제가 '취사선택'한 사료를 바탕으로,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단군조선을 비롯 '한국사'를 왜곡ㆍ말살하면서 (일제가) 내렸던 결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5ㆍ16 군사 혁명정부가 민족사관을 강화하기 위해 검인정 국사교과서의 내용을 통일하도록 한 것인데 이와는 반대로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단군조선을 비롯 삼국의 시조와 삼국의 초기 역사마저 '신화'로 왜곡하고 축출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말이 5천년 역사이지 2천년도 채 못되는「머리없는 역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1910년 강점 전ㆍ후와 광복 후 '국사교과서 변천과정'은 바로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에 의한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ㆍ말살실태를 체계적으로 증명하는 자료가 된다.
  결국 정인보ㆍ안재홍ㆍ손진태 선생 등을 비롯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이 6ㆍ25 때 납북된 영향이다. 이들이 6ㆍ25 때 납북만 안되었다면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역사' 그대로 굳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진태 선생은 서울대 문리과대학장에 재직 중 납북되고 말았다. 보성전문ㆍ고려대의 초대 도서관장이었던 손 선생은 ≪조선민족사개론(朝鮮民族史槪論)≫과 ≪국사대요(國史大要)≫를 저술했다.

   단국대 초대학장을 지내기도 한 장도빈(張道斌; 1888∼1963) 선생은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 '역사'를 복원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일생을 항일구국항쟁과 역사연구에 몸바쳤던 장 선생은 참으로 애국자이셨다. 단국대 교가는 장도빈 선생께서 작사한 것이다. 장도빈 선생은 3ㆍ1항쟁 당시 경성여고(현 경기여고) 학생으로 3ㆍ1항쟁을 주도했던 김숙자(金淑姿) 여사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장치혁(張致赫; 1932∼) 고합그룹 회장이 장도빈 선생의 4남이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장 선생을 따라 만주와 시베리아를 떠돌았던 장 회장은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국립 극동대학에「한국학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장치순(張致順; 1944∼) 중앙대 무역과 교수가 장도빈 선생의 5남이다.
   장도빈 선생은 오산학교에도 재직했었는데 당시 한경직(韓景職; 1902∼) 목사의 역사 교사였다


 단국대학 설립(1948년)을 기념하며
(뒷줄 맨 왼쪽) 장도빈 선생, (앞줄 맨 왼쪽) 김 구 선생
  <독립기념관 제공>

             출처:단군21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