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와 과거청산

                     - 한일 '신 파트너십'을 실마리로 -

                                                               부산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수   김 창 록

                                                  (부산대학교 국제지역문제연구소, 제17권 제1호, 1999.3)   

Ⅰ. 머리말

한일관계는 과거청산 문제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일제에 의한 35년간의 한국 강점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그에 대한 한일간의 청산이 광복 이후 지금까지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바 '과거사 문제'는 한일관계의 정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왔다.

게다가 과거청산 문제는, 광복 이후 50년 이상이나 진척이 지지부진했던 까닭에, 그 복잡성을 점점 더해 왔다. 특히, 명확한 기준은 마련하지 않고서 그때 그때의 국면을 모면하기 위해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해 온 한일 양국 정부의 직무태만은 문제를 더욱 꼬이게만 만들었다. 그래서 애당초 어떤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어떤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라는 것이 핵심이었던 문제에 감정과 도덕까지도 개입하게 되어, 이제는 무엇이 본질인지조차도 애매하게 되어 버린 형국이다.

이렇게 난마와 같이 얽히고 설킨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와 관련하여, 1998년 10월 7일부터 10일에 걸친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은 새삼 주목을 끈다. 그것은, 김 대통령이 이번 방일을 통해 오부찌 케이조오(小, 惠三) 내각총리대신과 함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이하 '신 파트너십'으로 줄여 씀)을 위한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을 발표하고, 일련의 발언을 통해 한일간 과거청산의 '일단락' 내지는 '종결'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신 파트너십'을 실마리로 해서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를 재점검해 보기로 한다. 우선 '신 파트너십'의 내용과 그에 대한 평가들을 정리해 보고, 다음으로 '신 파트너십'의 자리 매김을 염두에 두면서, 한일간 과거청산의 다양한 측면들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검토과정에서 현재의 시점에서의 과거청산의 의미와 그 구체적인 과제들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또한 이 글은 기본적으로는 한일간의 과거청산 일반을 점검하지만,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며, '신 파트너십'의 자리 매김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왕1)의 방한 문제와 일본군'위안부'(이하 '위안부'로 줄여 쓴다) 문제 등 현안이 되어 있는 구체적인 과거청산 문제를 필요한 범위 내에서 함께 검토하기로 한다.

Ⅱ. '신 파트너십'의 정리

1. '신 파트너십'의 내용

1) 한일관계 일반

과거청산과 관련된 '신 파트너십'의 핵심적인 내용은, 지난해 10월 8일 김 대통령이 오부찌 총리와 회담을 한 후 함께 서명, 발표한 [공동선언]의 2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오부치 총리대신은 금세기의 한일 양국관계를 돌이켜 보고, 일본이 과거 한 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오부치 총리대신의 역사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평가하는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는 뜻을 표명하였다.2)

(小, 總理大臣は,今世紀の日韓兩國關係を回顧し,我が國が過去の一時期韓國國民に對し植民地支配により多大の損害と苦痛を與えたという歷史的事實を謙虛に受けとめ,これに對し,痛切な反省と心からのお, びを述べた.

金大中大統領は,かかる小總理大臣の歷史認識の表明を眞摯に受けとめ,これを評價すると同時に,兩國が過去の不幸な歷史を乘り越えて和解と善隣友好協力に基づいた未來志向的な關係を發展させるためにお互いに努力することが時代の要請である旨表明した.)3)

그리고 과거청산과 관련된 장래의 조치로서는, [공동선언] 2 및 10, [행동계획] 5 그리고 10월 8일의 김 대통령의 일본 국회에서의 연설4)을 통해, 일본문화의 개방, 청소년의 교류를 비롯한 양국 국민간 교류의 증대, 양국 학자들의 역사공동연구, 예술인.시민단체.지방자치단체들간 교류의 증대 등이 제시되었다.

또한 과거청산과 관련하여 김 대통령은, [공동선언]과 [국회연설] 및 [관서지역 주요단체 주최 만찬 연설]5) 등을 통해, 방일 중 수 차례에 걸쳐 일본에게는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촉구하는 한편, 전후 일본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했다. 즉 "전전의 일본과 전후의 일본은 참으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라는 기본 인식 아래, 제2차 대전 후의 일본 민주주의의 발전, 경제성장, 개발도상국에 대한 경제원조, 평화헌법, 전수방위, 비핵3원칙을 위해 "일본 국민과 지도자들이 쏟은 피땀어린 노력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했다. [아키히토 일왕 주최 만찬시 답사]6) 등을 통해 한국의 외환위기와 관련한 일본의 지원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한 것 또한 그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일왕의 방한 문제

방일 기간 중 김 대통령은, 우선 10월 7일 일본의 궁성을 예방한 자리에서 아키히토일왕에게 방한을 초청했고,7) 8일 오부찌 총리와의 회담에서 다시 한번 초청했고, 같은 날의 공동기자회견에서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지 33년이 지났는데도 일본 일왕의 방한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부자연스런 일"이라고 지적하면서 "일왕의 영접이 한국에서 따뜻하게 이뤄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노력할 것"이라며 일왕 초청의사를 거듭 밝혔고,8) 역시 같은 날의 NHK TV와의 좌담회에서는 "오는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까지는 일왕 내외의 한국 방문이 실현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다"며 구체적인 시기까지 언급했고,9) 9일의 기자간담회에서도 "일본왕이 과거 전쟁 상대국인 중국과 영국을 모두 방문했는데 이웃국가인 한국을 국교재개 33년이 되도록 방문하지 못한 것은 부자연스럽고 양국 국민의 화목과 융화에도 문제가 있는 일"이라고 언급했다.10) 그리고 귀국 후인 10일의 기자회견에서도 "여론의 향배를 봐가며 다룰 문제"라고 전제하면서도 "가능하면 (2002년) 월드컵에 임박해 오는 것이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11) 적극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김 대통령의 일왕 방한에 관한 적극적인 입장은, 취임 직후인 지난해 2월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와의 회담과 지난해 3월의 오부찌 당시 외상과의 회담에서부터 개진된 것으로서, 지난해 4월 29일 방한중인 일본 주요언론사 정치부장단과의 회견에서는 "제1의 우호국 국가원수가 방문할 수 없다는 것은 부자연스런 것이자 불행한 것"이라는 표현으로 구체화되었고, 방일 직전인 9월의 인터뷰에서는 "우호국의 국가원수가 서로 왕래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번 방일을 계기로 일본의 왕이 장래 방한 할 때에 한국의 국민이 따뜻하게 환영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발언12)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으며, 그 후 방일을 위한 한일간의 준비과정에서도 거듭 확인된 것이었다.13)

이에 대해 일본측은, 방일 이전부터 김 대통령의 위와 같은 입장에 커다란 관심을 표시하면서, 일왕의 방한이 "가능하게 되는 환경이 정비될 것을 희망"하는 동시에 김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양국은 반드시 환경정비를 진척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라며 신중하지만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으며,14) 이러한 자세는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잘 검토하고자 한다" "쌍방이 협력해서 환경을 정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라는 오부찌 총리의, 일왕방한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일본 총리로서는 최초의 약속 표명으로 이어졌다.15)

3) '위안부' 문제 등

한편 방일 기간 중 김 대통령은, 현안이 되어 있는 구체적인 과거청산 문제에 관해서는, 적어도 공식석상에서는, 재일한국인들의 지방선거 참정권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즉, 김대통령은 10월 8일의 정상회담에서 "재일 한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이 부여되어 일본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오부치 총리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했으며, 이에 대해 일본측은 "국민주권, 지방자치, 국가와 지자체와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노력해 나가겠다고 언급"16)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 등 다른 구체적인 과거청산 문제들에 관해서는 공식석상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비공식석상에서 언급된 것도 '위안부' 문제 뿐이며, 그것도 10월 9일 김 대통령의 일본내의 친분인사를 초청해 베푼 다과회에서 그 문제가 "세계가 납득하는 형태로 해결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는 데 그쳤다.17)

2. '신 파트너십'에 대한 평가

1) 한일 정부 및 정치권의 평가

한국 정부는 김 대통령의 방일 전반을 한일 양국의 "'국민적 협력의 신시대'를 구축하는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하고, 특히 과거청산 문제에 관해 "공동선언에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명문화함으로써 20세기의 과거사 문제를 정리하고, 미래를 향해 협력하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18)라며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김 대통령 자신도, 일본수출입은행으로부터의 30억 달러의 융자를 비롯한 경제협력과 함께,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분명히 사과하고 문서에 남긴 것"을 "방일의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19) 그리고 한국 국민에게 "상대가 나름대로 성의를 표시할 경우 금도를 갖고 대하는 게 바람직한 태도"라며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수용할 것을 당부했다.20)

그런데 실은, 과거청산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의미부여는 김 대통령의 방일 중의 발언들에서 발견된다. 김 대통령은 10월 8일의 공동기자회견의 모두에서 "20세기에 일어난 일은 20세기에 끝내고, 21세기의 신뢰관계를 구축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며" 따라서 "성공"이었다21)라며 회담의 의미를 짚고, "한국 정부로서는 다시금 양국의 과거의 역사에 대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국민은 언론의 자유가 있지만, 정부, 여당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해 나가고자 한다"라고 언급했다.22) 그리고 같은 날의 NHK TV와의 좌담회에서는 "역사인식의 문제가 일단락 됐다고 보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일단 그렇게 됐다고 생각한다. 한국 국민과 저는 이 문제가 더 이상 재론되지 않고 21세기를 향해 의논하자는 방향으로 가자는 생각이다"라고 답변했으며,23) 10월 9일 오오사카에서의 동포와의 간담회에서는 "일본은 과거를 직시하고, 잘못된 것을 사죄"하였으며, "일본측의 완전한 사죄를 받아내었"으므로, "이제 한·일관계는 20세기에 시작했던 불행을 이번 공동성명과 더불어 20세기말로서 끝맺고 21세기 시대를 만들어야"24) 한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25)

다만 김 대통령은, 일본인들의 망언과 관련해서는, 귀국기자회견에서 "일본총리가 정부와 국민을 대표, 문서로 분명히 한 만큼 일본의 다른 지도자들은 거기에 당연히 구속받을 것"26)이라는 입장 아래, "앞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있는 사람이나, 한일 양국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에 제약을 받는 사람이 이에 어긋나는 소리를 하면 용납하지 않을 것"27)이라고 유보를 달았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도, '위안부' 문제는 "과거청산에 포함된 것으로 보지 않으며 이번 방일에서는 이 문제를 처리할 환경과 여건이 안되었고, 따라서 지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고 있다"라고 유보를 달았다.28)

하지만 김 대통령의 입장의 중심이 '유보' 보다는 '일단락'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은 명확한 듯하다. 올해 2월 11일 서울에서 코오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외상과 회담하는 자리에서 "나는 20세기의 일은 20세기 중에 청산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사죄는 한번으로 좋다. 한일관계의 과거는 나의 방일로 청산되었다"라고 발언한 것29)은 그러한 맥락에서만 이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정치권도 "불행한 과거사 극복을 통해 갈등으로 점철된 20세기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일 협력의 시대를 개막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했다"(국민회의)라거나, "'가깝고도 먼 나라'였던 일본과의 관계의 전기를 마련했다"(자민련)라며 대체로 '성공'으로 받아 들였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위안부' 문제 등이 미해결인 채 남게 된 것은 유감이라고 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인 한일우호렵력관계 구축의 초석이 될 것을 기대한다"라며 평가하는 데는 한 목소리를 냈다.30)

한편 일본 정부의 평가도 적극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역사의 한 폐이지"를 열었다라는 오부찌 총리의 발언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31) 다만 과거청산에 대한 평가는, 오부찌 총리가 10월 8일의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의 입장이 "공동문서에 확인된만큼 일본 정부의 책임있는 사람들은 그런 발언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정부의 입장이 명확하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이 이를 존중할 것으로 본다"32)라고 한 것과,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 관방장관이 같은 날의 기자회견에서 "과거 역사인식 문제에 매듭이 지어지고 미래를 향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한일공동선언의 정신에 입각, 양국 역사에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발언을 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할 것"33)이라고 한 것에서 확인되듯이, 외견상으로는 보다 신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내심은, [공동선언]에 의해 과거청산 문제가 "최종적인 것"이 되었다라고 받아들이거나, 적어도 최종적인 것이 될 것에 대해 "강한 기대"를 가지는 것이었다.34) 이것은, "지금까지 몇번이나 이러한 (과거의 문제를 둘러싼) 발언이 행해졌지만, 이번에는 공동선언이라는 형태로 서명이라는 행위를 했다. 과거는 과거로 하고 21세기에는 공동선언의 취지에 기초하여 크게 전진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라는 공동기자회견에서의 오부찌 총리의 발언35)에서도 확인되지만, 특히 코오무라 외상이 지난해 10월과 11월에 집중된 일본의 한.러.미.중과의 정상회담을 평가하면서 쏟아 낸, "자화자찬이지만, 4개국과 (정상회담을) 해서 4타수 4안타, 그 중에서도 일한(회담)은 대 홈런이었다"36)라는 '솔직한' 발언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일왕의 방한과 관련해서는, 김 대통령의 초청에 대해 "과거 어느 때보다 방한 실현을 구하는 의욕이 느껴진다"라고 받아들이면서 "전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라고 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시기상조다"라는 의견도 여전히 강했으며,37)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일본 정치인들의 평가 또한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김 대통령의 국회연설에 대해 한결 같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들이 과거청산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보수우익 '친한파' 정치가들의 해석은 '환희'에 찬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80년대 중반에 '전후 정치 총결산'을 외치며 일본 전후민주주의를 '청산'하려고 하였으며, "전전(戰前)의 황국사관적인 역사인식이" "주류가 되어 나타난" '메이지100년제(明治100年祭)'38)를 주도하기도 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20세기 중 일어난 일을 20세기 안에 마무리짓고 21세기를 맞이하자는 김 대통령의 결의에 감명을 받았"으며, 이로써 "낡은 과거와 결별하고 미래를 구축할 기초"가 마련되어 "후련한 기분이 들었"으며, 앞으로 "기꺼이 제휴해 갈 수 있으리라" 믿으니, "한국의 여러분이 지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란다"라며 반색을 했다.39)

2) 한일 언론의 평가

한국 언론의 평가는 정부의 평가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긍정적이었다. 즉 김 대통령의 방일이 전체적으로 "대립과 협력이 혼재했던 한 세기 동안의 양국관계를 정리하고 다음 세기의 청사진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만한 것이고, 특히 "일본이 행동계획을 통해 지원을 약속한 30억 달러와 일본 기업이 투자상담을 벌인 20억 달러"의 의미는 크며, 과거청산 문제와 관련해서도 "일본 총리의 사과를 공식적으로 문서화한 점, 가해자가 일본이고 피해자가 한국이라고 명시한 점은 과거보다 진전된 것"이라고 평가하는 데 대다수의 언론은 의견을 같이 했다.

다만 과거청산 문제와 관련해서는 평가가 미묘하게 갈리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신 파트너십'에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본의 성의와 진심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담겨 있"40)으니, 그것을 통해 "'과거'를 접고 '미래'로 나가자는 점을 명확히"41)한 것이며, 따라서 "한일관계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과거사 문제를 풀었다",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42)라며, 청산의 종결 쪽에 무게를 실었다. 그 중에는, 일본의 보수적인 정치현실을 강조하고, 김 대통령의 '열린 한국모델'이 장쩌민(江澤民) 주석의 '추궁하는 중국모델'보다 더 일본인의 호감을 샀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우리들의 자세 여하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의 "보다 성숙한 자세와 행동"이, "우리가 얼마만큼 열린 마음으로 일본에 다가갈 것인지"가 중요하다라고 강변하는 주장43)도 발견된다. 또 "'반성과 사죄', 그리고 일부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 되풀이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우리 "정부도 일본 문화개방이라든가 일왕의 방한 문제 등에 전향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과거사를 뛰어 넘을 준비를 철저히 갖춰야할 것"44)이라고 한국측의 과거청산을 촉구하는 주장도 발견된다.

이에 대해 다른 한편에서는, 오와비라는 표현이나 '위안부' 등 구체적인 문제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은 "미흡"하며, 따라서 "과거사를 매듭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라거나, "하나의 진전이지만 불안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등의 유보적인 입장45)을 보였다. 특히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김 대통령이 "형식적인 외곽 때리기로 그친 사실은 유감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며, 그와 같이 "과거사 문제를 무조건 빨리 매듭지으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46) 것이라는 비판적인 견해도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원고측 선의'를 악의로 해석하려는 '피고 일본'의 그릇된 움직임"47)을 경계하는 등, 앞으로의 일본측의 인식의 변화 내지는 노력을 강조하는 논조가 다수 발견되었다.48) 또한 과거청산에 관한 일본측의 적극적인 평가를 경계하면서, 김 대통령의 발언 등이 "'불행했던 과거’를 없던 것으로 하거나 잊어버리자는 게 아니라 과거사 문제로 인한 비생산적인 소모전을 피하자는 의미"49)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조건부 청산선언"50)이라고 방어막을 치는 논조도 발견되었다.

한편 일본의 언론은 김 대통령의 방일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의 지도자에 대한 '비판정신'을 돌연 상실한 일본의 보도"는 한국인기자를 "심히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할 정도였다.51) 그러한 일본 언론의 태도는 기본적으로는 "'지긋지긋한 과거사 사죄요구'라는 족쇄를 벗어 던진 후련함"52)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각 언론의 성격에 따라 그 평가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발견되었다. 우선 {아사히(朝日)신문}의 경우는, 김 대통령의 방일을 통해 "일본의 '과거'에 대한 반성이 처음으로 양국간의 정식 외교문서로 확인된 것이 중요"53)하며, 그 결과 "마침내 당연한 관계가 뿌리내리게 되었다"라고 평가하면서도,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극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며 유보를 붙이고, '위안부' 문제 등을 "일본측에 남겨진 숙제"라고 지적했다.54)

{요미우리(讀賣)신문}의 경우는, "'진정한 이해'는 지금부터"라고 유보를 달면서도, 어느 쪽인가 하면 과거청산의 '종결' 쪽에 무게를 실었다. 정상회담을, 한일관계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강한 결착의 표현" 내지는 "국교정상화 이래의 일한관계에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연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고,55) 일왕 초청 만찬회에서의 김 대통령의 답사에서 과거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담기지 않은 것에 거듭 주목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미래지향, 과거에 일단락"이라는 "기대를 지금까지 방일한 한국대통령 중 누구보다도, 이번의 김 대통령의 방일에서 느낀다"라는 '감탄'을 끌어내고 있는 것56)은 그 선명한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57)

한편 일본의 주요 일간지 중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는 {산케이(産經)신문}의 경우, 방일 전에는, 무라야마 토미이찌(村山富市) 전 총리의 담화에 기초한 공동선언을 마련하는 것은 "실로 말도 되지 않는 분별없는 일"58)이라고 흥분하는 투고를 싣고, "사죄와 반성"은 "일본에 대해 특수한 감정을 가지는 한국민"이 "민족적 우월감을 맛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카드"이므로,59) "환상이나 기대를 품지 않아야 배반당하는 일이 없다60)"라며 예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방일 이후에는, "양국간의 '과거의 역사' 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착"61)지움으로써, "양국관계의 우호 협력의 기조가 확인되었"고, 한일 양국의 "'과거로부터의 이탈'을 위한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으므로, "일본으로서는 환영할 수 있다"라며 입장을 바꾸었다.62) 그리고 그 입장은 "정치가 김대중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는 논조로 이어졌다.63) 뿐만 아니라 그 입장은, "'서로의 상흔을 키우기보다는 상처가 치유되도록 환경을 만들려고 하는' 일본측의 자세에, 한국측이 얼마나 응할 것인가가 앞으로의 양국관계의 분위기를 결정하게 된다"64)라며 '한국측의 분발'을 촉구하거나, "대통령의 본심(ほんね)이 '과거로부터의 이탈'에 있는 만큼", 김 대통령의 "정권이 불안정하게 되는 등 조건이 변화"하기 전에 "양국은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의 착실한 실행으로 '과거로부터의 이탈'을 다질 필요가 있다"라고 주문하는 등 끝없이 질주했다.65)

3) 한일 국민의 평가

한국 국민의 평가와 관련해서는, 청와대의 여론조사 결과66)에 따르면, 응답자의 81%가 방일 성과에 대해 매우 만족하거나 만족하는 편이라고 대답했고, 42%가 30억달러 차관 도입 등 경제협력 강화를 그리고 31%가 일본의 과거사 사죄 및 외교문서화를 가장 큰 성과로 꼽았고, 65%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수준에 대해 '매우 나아졌다'와 '나아진 편'이다라고 응답하여 과거에 비해 진전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고, 80%가 '포용적인 대일관계 지향'에 공감했고, 78%가 그러한 태도가 한일관계를 개선시킬 것이라고 보았고, 65%가 앞으로 한일관계가 우호적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고 한다. 이는 한국 정부 및 언론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같은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선언적 의미에 그칠 것'이라는 대답(39%)이 '실효를 거둘 것'이라는 대답(36%)보다 많이 나와, 위의 일반적인 평가와는 괴리를 보였다.

또한 일왕의 방한과 관련해서도, 응답자의 80%가 일왕의 방한에 찬성했고, 일왕의 방한이 양국간 월드컵 공동개최에 미칠 영향에 대해 58%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응답하여 '도움이 안될 것'(32%)이라는 견해보다 우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왕 호칭 사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대(52%)가 찬성(35%)보다 많이 나와 역시 위의 견해와는 괴리를 보였다.

한편 일본 국민의 평가와 관련해서는, 우선 김 대통령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가 두드러진다. {산케이신문}에조차 "이 대통령이라면, 진정으로 포용할 수 있다는 평온한 기분이 솟아난다"라는 독자투고가 실릴 정도였다.67) 또한 방일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가 주조였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청산 문제에 관한 한 그 평가는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 국민의 그것에 비해 소극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 TBS(토오쿄오방송)가 전화조사한 결과68)에서는, 공동선언에 일본의 반성과 사죄문구가 삽입된 데 대해서는 81%가 '평가'하면서도, 사죄가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가 45.5%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44.9%로 거의 비슷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일왕의 방한에 대해서도 '방문해야 한다'가 32.4%인 데 대해, '방문해야 하나 아직 시기가 아니다'가 54.6%로 나타났다.

또한 한국무역협회가 실시한 여론조사69)에서도, '과거 한국 대통령의 방일에 비해 이번 방일이 한일관계를 개선시키는 성과를 냈느냐'라는 질문에 78.0%가 성과가 있었다라고 평가하였고, 과거사에 관한 일본측의 사죄표명에 대해서도 79.8%가 '강하게 느껴진다'라고 대답했지만, 공동선언에 대해 '실질적 효과가 기대된다'라는 대답이 41.6%인데 비해 '외교상의 상징적 의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밝힌 비율이 58.4%로 높게 나타났으며, 향후 한일관계에 대한 전망에서도 '이전보다 원만해질 것'이라는 대답이 55.0%,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대답이 43.8%로 보다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특히 요미우리신문사의 여론조사에서는, 과거청산 문제에 일단락이 지워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대답이 56%나 되었으며, 일왕의 방한에 관해서도 2002년 이전에 방한해야 한다라는 대답은 31%에 지나지 않은 데 대해, '언젠가 방한해야 하지만 서둘 필요는 없다'라는 대답이 48%, '방한할 필요가 없다'라는 대답도 16%나 되었다.70)

3. 문제로서의 청산의 다양한 측면들의 혼재

지금까지 지난해 10월의 김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등장한 '신 파트너십'의 내용과 그에 대한 평가들을, 과거청산에 촛점을 맞추어 살펴 보았다. 그런데, 다소 긴 정리에도 불구하고, '신 파트너십'의 전모 내지는 의의는 그리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은 듯한 인상이 강하다. 필자는 그것이, 동일한 '과거청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따라 입장에 따라 그 속에 담고 있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현실적 청산'과 '도덕적 감정적 청산', 역사적 청산과 시민적 청산, 그리고 법적 청산이라는 청산의 다양한 측면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그 각 측면을 구별하여 '신 파트너십'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에 접근해 보기로 한다.

III. '현실적 청산'의 한계

'신 파트너십'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주목되는 것은, 이전의 한일간 교섭과 마찬가지로, 그것 또한 과거청산 문제에 대해 극히 '현실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김 대통령의 '현실주의'는 두드러지며, 그것이 '신 파트너십'의 성격을 주도한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것은 김 대통령의 방일이 1997년 말에 몰아닥친 'IMF체제'라는 경제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경제재건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 있던 김 대통령의 방일 목적의 적어도 하나가 경제위기의 극복을 위한 일본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71) 그 결과 과거청산 문제는 처음부터 일본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제기되었다는 조짐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는, 김 대통령이 취임 직전과 직후에는 '대일 강경노선'을 취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실들도 발견된다는 점이 또한 주목된다. 일본의 어업협정 일방파기로 시끄럽던 지난해 1월, 당시의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의 재협상을 주장하는 정부 일각의 목소리를 고려하여, 대일 정책의 종합적인 재검토에 나섰었다.72) 그리고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국 정부는 김 대통령의 취임 직후인 지난해 3월 1일에는, 같은 달 16일로 예정된 제54차 유엔인권위 회의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직접배상 등을 강력 촉구하기로 방침을 세웠으며, 그 때에는 '피해자와 피해자 단체가 총의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방안'이라는 김영삼 정부의 간접촉구 방식에서 탈피하여,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명시하고 정부차원의 배상을 촉구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했었다.73)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김 대통령은 이미 취임 전후인 지난해 1월과 2월의 나카소네 전 총리와의 회담에서 "한국경제의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에 일본이 앞장서 기여해 달라"라고 요청하는 한편으로, 문화개방 일왕방한 등에 언급하며 "나의 정권에서는 마음을 열고 우호친선을 강화할" 것이라는 기본입장을 밝혔다.74) 그리고 이러한 기본입장은 3월의 오부찌 당시 외상과의 회담75)과 4월의 하시모토 류우타로오(橋本龍太郞) 당시 총리와의 회담76)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또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지난해 4월 21일의 국무회의에서 피해자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의결하는 동시에, "일본에 대해 정부 차원의 배상청구는 하지 않"는다라는 방침을 밝힘으로써77) 태도를 후퇴시켰다. 게다가 이 방침은 지원금 지급을 최초로 결정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4월 14일의 국무회의에서 제시된, 지원금 지급을 발표한 다음 "더 이상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배상을 일본에 요구하지 않는 대신 과거의 반인도적 행위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사과를 촉구한다는 방침"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어 결정이 좌절되고78)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의 항의도 받은 이후에 나온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그 방침을 발표한 이후에도 일본에 대해서는, "개인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우리측의 진의다"라는 메시지를 보냈으며, 박정수 당시 외무장관은 "이 문제가 더 이상 양국간의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이번의 조치를 취했다"라고 강조했다.79) 이렇게 본다면 김 대통령의 대일정책은 처음부터 '강경' 보다는 '유화' 쪽에 무게가 실린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김 대통령의 그러한 입장은 우선 한국 정부의 방일교섭 과정에서의 소극적인 태도로 이어졌다. 방일교섭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한편으로는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창씨개명 일본어의 강제 일왕숭배와 신사참배의 강제 등 "과거의 문화침략에 대한 일본의 반성"을 [공동선언]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여,80) 일본측으로 하여금 "민족의 긍지를 손상시켰다"라는 절충안을 고려하게 하기도 했다.81) 또한 김 대통령 자신도 {세카이(世界)}와의 인터뷰라는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의 책임이지 일본국민의 책임이 아니다. 따라서 국민으로부터 돈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라고 밝히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의 '위로금' 지급에 대해 "사건의 본질에 비추어 잘못이다"라고 비판하여82) 일본측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창씨개명을 비롯하여 일본어의 강제 등, 구체적으로 표현해 달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83) 일왕의 사죄는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일체 요청하지 않았다."84) 게다가 '위안부' 문제를 논의하지 않게 된 것은 "한국측의 강한 요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85) 요컨대 과거청산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측은 "일본측에 부담이 될 요구는 삼갔다." 그리하여 두드러진 것은 "경제협력의 면에서 잘 부탁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야기는 실무적으로 진척"86)된 것이다.

이러한 "일본에 대한 말하자면 '햇볕정책'"87)은 방일 중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공동선언]에 명문화된 과거청산 문제만 해도 총론일 뿐 어떤 식으로 왜곡된 과거청산 문제를 교정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각론은 [공동선언]이나 [행동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측이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명문화"한 것을 이유로 커다란 "성공"이었다라고 평가한 그 총론조차 내용적으로는 오히려 후퇴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청산 문제에 관한 오부찌 총리의 발언은 1995년의 무라야마 전 총리의 발언88)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양국 정부의 사전 합의에 따라,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라는 부분에서 식민지 지배의 사실이 명시되었고, 한국 국민이 피해자로서 명시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お, び)"를 하였다는 점은 일정한 진전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라야마 발언에는 등장하는 "국책을 그르쳐", "미래에 잘못이 없게 하기 위해", "침략"이라는 부분은 빠져 있다. 뿐만아니라 1993년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 총리와 1996년의 하시모토 전 총리의 사죄발언에는 포함되어 있었던 일본어 강제, 창씨개명, '위안부' ,징용 등 구체적인 과거청산 과제에 대한 언급89)도 빠져 있다. 게다가, 무라야마 발언으로부터의 후퇴는 그러한 내용을 담으면 일본 "국내에서 또 다시 이론(異論)이 나온다"라는 일본측의 설명을 한국측이 "납득"한 결과였다.90)

그 외에도 김 대통령은 방일 중에 일본인의 호감을 사는 언동을 보였다. 궁중의 만찬회에서 "'과거'나 '사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일본국민의 인상을 바꾸는 첫걸음"이었으며, 국회연설에서 일본의 전후민주주의를 칭찬한 것은 그 연장이었다.91)

그 결과 김 대통령은 "일본사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일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파악해 행동했고 이 점이 일본인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92) 한국의 언론과 국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비록 '감동'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체로 긍정적으로, 즉 "줄건 주고 받을건 받는" "실사구시외교"93)라고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김 대통령은 적어도 '현실적'으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청산 문제에 관한 한, 그러한 '현실적 청산'은 우선 불충분한 것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문제를 "유보"94)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의 문서화에 의해 그것을 "먼저 파기하는 쪽은 종전에 비해 훨씬 큰 부담과 책임을 질 수밖에 없"도록 되었기 때문에,95) 일본인들의 망언에 대한 일정한 제재효과는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청산 문제의 "해결을 위한 조직적인 대처는 시작도 되지 않았기96)" 때문에 그 효과는 문제의 해결로부터는 너무 동떨어져 있을 뿐만아니라, [공동선언]이나 [행동계획]이 외교적인 구속력을 넘어선 법적 구속력을 가지지는 못하는 것인 이상, 그 효과 또한 살얼음판 위의 지침질 이상의 의미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현실적 청산'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극히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지일파이자 현실주의자"97) "현실주의자로서의 강건한 모습"98)이라며 김 대통령을 추켜 세우며 일본측이 주목한 것은, 한국의 경제위기와 김대중 정부의 성격이 과거청산 문제의 '종결'에 유리하다고 하는 점이었다. 과거청산 문제에 가장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산케이신문}이 "한국이 경제나 안보 등 어려운 상황이 되면 일한관계는 잘 되"기 때문에 "그 의미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이번의 방일은 쌍방에게 시기적으로 좋았다"99)고 반긴 것이나, 일본 외무성측이 "화평을 맺으려면, 강경파를 상대로 하는 편이 신뢰할 수 있다"라는 논리로, "반체제 야당지도자의 경력이 길고, 지일파를 자부하는 한편으로 대일 자세에서는 가장 엄격한 입장을 취"해 온 김 대통령이 상대가 된다면, "같은 '사죄'라도 한국사회에서 받아 들이는 양상이 다를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은100) 그 구체적인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말할 것도 없이 "국가간의 배상문제는 1965년의 일한기본조약에서 결착이 끝났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101) 결국 일본측은 한국의 경제위기와 김대중 정부의 한국 내에서의 위상을 이용하여 과거청산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할 수 없게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측의 의도는 이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현실'에 의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 대통령의 일본측 파트너인 오부찌 총리의 내각은 지난해 8월 15일의 이른바 '종전기념일'을 맞아 각료 20명 중 과반수인 13명이 A급전범을 제사지내는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한 '우파'내각102)이다. 게다가 오부찌 총리 자신이 '함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국회의원의 모임'의 회장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해 7월의 참의원선거 후 농수상(農水相)에 취임한 나카가와 쇼오이찌(中川昭一) 의원이 최초의 각의 후의 기자회견에서, 교과서의 '위안부' 기술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그 날 중으로 발언을 철회한 것과 관련하여, 그가 "반일적인 교과서로 배우는 어린이들이 담당할 다음 세대의 일본은 문제없는가"라며 교과서에서 '위안부' 기술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는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의 모임'의 대표라는 점에서 "본심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103) "발언의 철회나 사죄로 끝낼 일이 아니다"라며 경질을 요구하는 사회당의 주장에 대해, 본인이 취소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다"라며 한일어업협정에 관한 교섭의 책임자의 자리에 눌러 앉힌 것도 오부찌 총리였다.104) 김 대통령의 '현실주의'는 그러한 현실까지도 승인해 버린 것이다.

다른 한편 한국쪽의 현실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김 대통령의 방일 직후인 지난해 10월말에 개최된 제6차 한일포럼에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걱정하지만,과거의 문제는 크게 염려 없다. 일본은 아시아의 대변자가 되어 주기 바란다"라는 식의 발언이 "한국쪽으로부터 놀랄만큼 열심히 주장"된 것이나,105) 지난해 11월 한일각료회담 참석을 위해 일본에 간 김종필 국무총리가, 자신이 주도한 1965년의 한일협정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일본 조야의 지도자"들에게 "고마운 마음"를 표시하고, 일본이 "아시아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일본이 최대한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일종의 사죄"를 했으니, "20세기 한일관계를 마감하고 새로운 21세기 우호친선의 시대를" 열기 위해 2000년에 일왕이 방한할 것을 거듭 제의하여 오부찌 총리로부터 "열성에 대해 감사"를 받은 것106)은, 김 대통령의 방일을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107) 김 대통령의 '현실주의'는 과거청산의 '종결'로 치달릴 수 있는 국내의 '폭발가능성을 가진 현실'에도 불을 붙인 것이다.

요컨대 김 대통령의 '현실적 청산'은 일본의 경제적 지원과 호감, 그리고 일본인의 '망언'에 대한 '지금까지보다는 강한 항의수단'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청산 문제의 본질을 덮어 가린다고 하는 대가를 치른 결과였다. 김 대통령이 "인도적 조치"라고 주장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금 지급이, "목의 가시처럼 여겨진" 문제에 관해 한국 정부가 스스로 나서서 "정부배상 불요구 등 선물을 안겨"줌으로써 "일본측의 부담을 덜어" 준 것이라는 해석이 한일 양국에서 제기되는 상황에서, 그에 대해 방일 중에 어떠한 공식적인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108)

그 점에서 김 대통령의 '현실적 청산'은, 역대 정부의 대일교섭과 마찬가지로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전후보상 문제를 불투명하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원조를 받"은 "원조교제(援助交際)"가 아닌가라는 비판109)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극일(克日)의 비타협적이고 자기만족적인 분위기가 용일(用日)의 실용주의적 화해로 전환"되었다라며 방일을 극찬한 한국의 한 일간지가, 그것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의 한일관계와 기본 맥락이 유사한 면모"110)를 보인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오히려 솔직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 극찬은, 일본으로부터 경제협력을 받는 대신 과거청산 문제를 덮어 둔 [김종필 - 오오히라(大平)메모]111)야말로,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한일간 과거청산 문제가 제자리걸음을 하게 만든 근본원인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곧바로 '현실적 청산'의 문제성을 무심결에 폭로해 버린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적 청산'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한일 양국의 현실을 생각할 때, 과거청산의 가능성을 오히려 줄여 버렸다는 것이다. '현실적 청산'이 반가운 것은 오히려 일본측일 것이다. 일본측이야말로 "문장화함으로써, 앞으로 이 문제가 제기될 때 일한의 공식문서 속에 들어 있으니까 이미 끝난 것이다"라고,112) "국제신의에 반하는 것이 된다"라고113) 말할 수 있다라는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의 문제에는 '법적 문제'도 포함될 수 밖에 없다. 적어도 "청산되었다"라고 공언한 김 대통령이 '법적 책임은 별개다'라고 주장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114)

IV. '도덕적.감정적 청산'의 함정

'신 파트너십'과 관련하여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현실적 청산'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서, 그것 또한, 지금까지의 한일간 교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거청산 문제를 도덕적,감정적 문제에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선 김 대통령이, [공동선언]에 의해 "문서로 과거에 대한 인식을 표명"한 것의 의미를, 그것에 의해 그간 일본인들의 "여러가지 발언, 잡음이 있어서 한국국민에게 오해가 생겨났"던 문제를 해소할 수 있게 된 점에서 찾고 있는 데서115) 확인된다. 김종필 총리가, 일왕의 방한을 위한 분위기 조성의 핵심으로서, 일본인들이 "한국민의 맺힌 한을 자극하는 언동이 더이상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나, "돌출발언을 해 감정을 흔들"지 않도록 "삼가"하는 것을 들고 있는 것116)도 마찬가지이다.

이와같이 문제를 감정적인 것으로 파악할 경우, "사과받는 입장에서 이렇게 저렇게 사과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이나 "개인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가 되며,117) 그래서 외교 또한 "조약에는 손을 대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따른 현실적인 수정"을 도모하는 "원한에는 덕으로 보답한다라는 철학"이나118) "도덕적 우위"119)를 추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며, 그 결과 일본측에 대해 요구하는 것도 "마음으로부터의 반성"120)이 되게 된다.

이러한 입장은 한국 언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청산 문제는 "이웃 나라끼리의 감정싸움"이며, 따라서 "감정의 앙금들을 털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121)라고 보는 한국 언론의 경우에도, 문제의 핵심은 "사과와 망언의 악순환"이나 "고질적인 양국 국민의 반일 - 혐한(嫌韓) 감정"이 된다. 그래서 '현실적 청산'은, 오히려 "선(先)피해자 용서론"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가지는 "평가할만한 발상의 전환"이나, "우리 국민의 한분(恨憤)을 금세기를 마감하면서 접고 새로운 세기를 맞겠다는" "용단"이 된다.122)

이러한 입장에서는 '위안부' 문제, 일본 교과서기술 문제, 독도 문제는, 일본인의 망언이 한국인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양국 관계발전에 장애로 작용할 수 있는 불안한 요소들이 되며, 따라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양국 국민 모두가 감정표출이 관계발전을 좌우하는 일이 없도록 이성을 앞세우는 노력을 해야 하며,123) 그리하여 '감정의 20세기'를 매듭짓고 '이성의 21세기'를 맞아야124) 하는 것이 된다. 심지어 그 입장에서는, 한민족에게 진정한 해방도 독립도 오지 못한 것은 일제에 감정적으로 발목이 잡혀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불행한 역사의 추억주의에 매달려 나라의 건강을 해치지 말고, 그것을 털어버림으로써 과거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해야 하는 것이 된다.125)

그리고 그 칙칙한 과거사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본인의 자제도 필요하지만, 특히 반일(反日)적이라 할만큼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몸에 배어 있는 우리 국민도 인식의 전환을 하여, 피해자의 콤플렉스에 내몰려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사과를 요구하는 대신에 다시는 일본의 침략을 받지 않기 위해 힘을 기르는 일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된다.126)

요컨대 한국의 정부나 언론은,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를 기본적으로 감정의 문제로 파악하고, 그래서 그 핵심을 일본인들의 망언이나 한일 국민간의 감정대립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결과 문제를 덮어 두는 '현실적 청산'을 바람직한 방향으로서 평가하고, 그것을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이라고 보는 왜곡된 자기정당화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문제제기 자체를 '비이성적인' 것 내지는 '컴플랙스'라고 매도하고, 반대로 문제를 덮어 가리는 것을 '해방'이라고 보는 자학적인 도착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과거청산 문제를 도덕적.감정적 문제에 국한시키고자 하는 태도는 일본측에 의해서도 '기본적으로는' 공유되고 있다. 일본인에게도 "저쪽에서 반일감정이 높아지면, 이쪽에서도 혐한감정이 솟아나는악순환127)이 문제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과거청산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일본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도 "사태는 윤리의 문제이므로 "나쁜 일을 했으니 솔직하게 사죄하고, 그 성의를 받아 들여 용서하는" 것 이상 문제될 것은 없다.128) 일본의 한국정책에 대해 일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일본인 학자조차도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의 본질은,이웃나라에 대한 일본과 일본인의 도의성의 문제"이다라고 주장한다.129)

다만, 일본측의 경우 이러한 입장은 주로 공격적으로 확산된다.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측이 집요하게 과거에 대해 카탈잡는 것"130)이며, "피해자 의식이 지나치게 강해서 포기할 줄을 모르는" 것131)이며, 한국 외교의 "한편으로는 '과거'를 빌미로 일본을 비난하고 때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협력, 지원을 요구하는 뻔뻔스런 이중성"132)이며,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관습화된 의심과 불신"133)이다. 심지어 심리학자 융까지 동원해, 한국인을 "손에 묻은 선지피의 환각에 시달려 과거 수십년간 계속해서 손을 씻어대는 인물"에 비유하며, 한국인의 "'박해사관(迫害史觀)'을 원형으로 하는 집합무의식"="민족적 트라우마(정신적 외상)"="'한(恨)의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한국민 기질"에 탓을 돌리는 일본인조차 있다.134)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는, '신 파트너십'은, "피해 규탄자"인 한국인이 "그 피해자성을 억제적으로 말하거나, 관대함을 보이면" "가해 속죄자"인 일본인 "중에서 그것에 감격하고 칭찬하는 자가 나오는" "시골연극" 내지 "도덕 심리극"135)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리고 "다수의 일본인은 반복되는 사죄요구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으며, 한국인의 요구에 자율적인 속죄의식을 느끼는 일본인은 점점 적어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 된다.136) 문제는 "객관적 현실에 있어서의 종속과 심리적 현실에 있어서의 우월이라는 일종의 자기분열"이며, 그것은 "이조 이래의 조선반도의 전통"`137)이 된다. 이쯤 되면, "사죄의 위선극"을 그만두고 "우리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반일론의 출현에 의해 일한간에 좋은 의미의 긴장감이 흐르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자칭 "친한파"의 '충고'가138) 오히려 설득력을 가지게 되어 버린다.

하지만, 일본인의 태도가 도덕적 정신적 청산에 매몰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도덕적, 감정적' 접근은 오히려 법적 청산의 종결이라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며, 또한 그 전제를 관철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결국은, 감정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1965년의 일한 국교 수립 때의 원점에 돌아가 보는 수밖에 없다"139)라는 데로 귀결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일한 국교 수립 때의 원점"이라는 것이,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한일기본조약] 및 [청구권협정]에 의한 과거청산의 종결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일본인들은, 법적인 책임 문제는 1965년에 끝난 것이므로, 남은 것은 도덕적, 감정적 문제뿐인데,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통과의례"140)라도 하듯이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일본측의 도덕적, 감정적 청산의 요구와 법적 청산 '종결'의 주장은 서로 밀접하게 얽히고 또 서로를 보강함으로써, 과거청산 문제의 회피를 정당화하는 '공범관계'에 있는 것이다.

한국측이 도덕적, 감정적 청산에만 매달리는 한 그러한 주장에 대해 적절한 반론을 제시할 수 없다. 상대방이 '사죄'를 했다는데, 자꾸만 사죄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다지 '도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도덕적, 감정적 청산에 매달린 한국측의 논리가 왜곡된 자기정당화나 자학적인 도착에 빠지는 것도, 사실은 그러한 한계에 직면한 나머지 논리가 뒤틀려 전개되게 된 결과이다.

물론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는 도덕적인 측면과 감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민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며, 그 때문에 민족간의 감정대립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덕과 감정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사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평가의 합의를 전제로 하지 않은 도덕적, 감정적 청산은 불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지나치게 약하다'라거나 '지나치게 강하다'라는 반론이 가능하며, 따라서 그것은 언제까지나 '종결'되지 않은 채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V. 목표로서의 역사적 청산과 시민적 청산

'현실적 청산'의 한계를 극복하고 '도덕적.감정적 청산'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사적 청산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일간 과거청산 문제 자체가 일제의 침략과 35년간의 강점에서 비롯되는 것인 이상, 그 침략과 강점의 역사적 사실141)을 명확하게 밝히고 그에 대해 적절한 평가를 부여하는 작업이야말로 출발점이자 지향점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애당초 역사의 문제인 과거청산 문제는 정치가의 합의나 문서로 '일단락'되었다거나 '종결'되었다는 식으로 봉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신 파트너십'이 역사의 문제에 대해 극히 비역사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측의 역사인식이다.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의 일방당사자인 오부찌 총리 자신이, 타케시타 노보루(竹下登)내각의 관방장관이라는 직책에 있을 때, 한국 강점에 관한 과거청산을 해야 한다라는 진정에 대해 "할아버지 시대의 일을 나에게 말한다고 해도"라고 답변했다. 그의 답변은 결국, "'할아버지 시대'에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일은 이미 끝났다," "부당한 일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때는 그것으로 통했기 때문에 괜찮은 것 아닌가",142)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위에서 살펴본 나카가와 농수상 사건이나 오부찌내각의 각료들의 과반수가 지난해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일,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져 온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의 역사143) 또한 그러한 역사인식에 터잡은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뿐만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러한 역사인식은 야당 정치인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한국의 진보적 지일파 언론인이 진전된 과거청산을 위한 "희망"으로 들고 있는 제1야당 민주당144)의 칸 나오토(菅直人)대표 역시 '신 파트너십'을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문제에 일단락을" 지운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145) 그 증거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천박한 역사인식이 정치인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일본인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아직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레벨에서 역사인식의 문제에 결착이 지워져 있지 않다."146) 그래서, '위안부'는 강제연행된 것이 아니며, '위안소'는 "질서를 회복하고 현지의 민간인에 대한 폭행을 막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며, "일본군은 그 때까지 노예상태였던 '위안부'에게 오히려 인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관리"했으며, 따라서 '위안부' 문제는 "역사의 날조"라고 강변하는 코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의 만화가 특히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 대량으로 팔리고 있다.147) 또한 A급 전범 토오죠오 히데키(東條英機)를 찬미한 영화 [프라이드, 운명의 순간]이 지난해 봄 버젓이 일본 전국에서 개봉되었으며, '위안부'와 남경대학살에 대한 교과서 내용을 "자학사관"이라고 부르고, 그래서 김 대통령이 칭찬해 마지않은 전후 일본의 진전을 "오욕의 근현대사"라며 '자학'하는 후지오카 노부카쯔(藤岡信勝) 그룹의 "자유주의 사관"이 여전히 발호하고 있다.148)

그 근본적인 원인은 "전후 일본에 피침략국인들의 규탄을 받아들일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잘못된 과거를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부활을 위해 애쓰는 전후 일본의 보수 우익 세력은 물론이고 나아가 진보 혁신 세력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추구해야 할 것은 부정되어야 할 과거를 감싸안은 후에 행해지는 자기갱신이건만", 일본 전후 혁신사상 조차 "과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을 간단히 부정해 버린다." 그래서 "부정해야 할 과거"는 진정으로 부정되지 못했으며, 그 결과 전후 일본의 혁신사상은 "끊임없이 자신의 반동으로서의 보수사상과 한쌍으로 존재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이중인격적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거듭되는 사죄는 "'과거를 부정하는 자기갱신'의 사죄론"일지언정 "'과거의 악을 받아들인 다음의 사죄논리'이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럴듯한 사죄가 나오면 그에 대한 반동으로 망언이 나오게 되는, 한쌍의 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망언이 연중행사처럼 되풀이되는 구조"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분열적 구조"는 "일본사회 전체가 패전의 기점에 숨어 있는 '오욕'을 직시하기를 회피해 온 데"서, "패전을 종전이라 바꿔 부르는 데에서 시작된 전후 일본의 자기기만"에서 비롯된 것이다.149)

요컨대 일본인의 역사인식의 결여 내지는 불충분 그리고 자기기만은 패전 전후의 역사를 명확하게 단절시키지 않은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기에 연연해 온 보수 우익 세력이 과거와의 단절에 나서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전후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가치를 소리높이 외쳐온 진보 혁신 세력 조차도, 그 가치에 비추어 볼 때 철저히 파고들어 부정해야 할 과거를 슬그머니 한 켠에 제쳐두어 버렸던 것이다. 전체적으로 "'대일본주의'는, 1945년의 패전으로 확실하게 반성.청산되지 않은 것이다.150) 그런데 보다 파고 들어가 보면 다시 그 핵심에는 다름 아닌 일왕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일왕제야말로 일본인의 역사인식의 근본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151) 패전전의 일본에서 일왕은 살아 있는 신(現人神)인 동시에 통치권의 총람자(總攬者)였다.152) 일제의 한국 강점과 침략전쟁의 핵심에 일왕이 자리잡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일제의 한국 지배의 핵심은 특수 일본적 신권주의였으며,153) '15년 전쟁'의 핵심적인 결정은 일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154) 그럼에도 일왕은 토오쿄오 전범재판을 모면했으며,155) '상징'이라는 애매한 존재로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 일본의 전전과 전후는 사상적으로 연속되게 된 것이며,156) 다시 그 결과 일왕제는 여전히 일본인의 터부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157)

이렇게 본다면 일왕제야말로 한일간의 역사적 과거청산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측이 과거청산에 적극 나서지 않기 위해 매달리고 있는 1905년 [을사늑약] 및 1910년 [합병늑약] 유효론의 근저에는, 그 무효를 인정할 경우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고 하는 "재정적 공포"와 함께, "일본제국과 일왕의 침략책임을 인정"하게 된다고 하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158) 즉 일본측은 그 경우 일왕을 통해 패전전과 연결되어 있는 '전후 일본'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현실적 청산'과 '도덕적.감정적 청산'에 매달리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왕의 방한 문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왕의 방한에 대해 일본측이 거는 기대는 그것을 통해 과거청산 문제를 최종적으로 종결짓는 것이다. 침략과 강점의 최고 책임자인 일왕이, 패전 후 유일하게 발을 들여놓지 못한 한반도의 남쪽을 '마침내' 방문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아시아를 향해 일본이 전쟁책임을 지지 않고 전후를 끝내는 것을 최종적으로 선언하는 세리모니가 될 것"159)이기 때문이다. 일왕을 받아들인 한국이 공식적으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더욱 곤란해질 것이며, 그 결과 과거사 문제의 완전한 '종결'을 확인하는 결과가 초래될 것임은 거의 틀림이 없다. 그 점에서 일왕의 방한은 "일본 외교의 일대 개가"가 될 것이다.160)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한편으로 침략을 부인하면서 일왕을 국가원수로 끌어올리려고 기도하고 있는 일본의 우익, 보수세력을 부추기고, 반대로 침략에 대한 반성 위에서 일왕을 어떻게든 '상징'의 지위에 묶어 두려고 애쓰고 있는 일본 진보세력의 입지를 좁힘으로써,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한 축을 허물어뜨리게 될 것이다.

물론 일왕이 "빌리 브란트 구 서독총리가 그랬던 것처럼,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땅바닥에 무릎 꿇고 사죄하러 온다면"161) 이야기는 다르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의 상황이 이어지는 한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다. 일본측이 방한을 위한 "환경"을 거듭 강조하며, "아직 시기상조다"라고 발을 빼는 것은 "일왕이 모욕을 당할 염려가 있다"라는 우려 때문이다.162) 그런데 "안전문제"163) 혹은 "불측의 사태"라는 애두른 용어로도 표현되는 그 우려의 핵심은, "좀 더 사죄해라"라고 추궁당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다.164) 그래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1992년 일왕의 중국 방문과 관련하여, 일본의 행동우익이 일왕에게 "외국에 나가 머리를 숙이게 하는 '사죄외교' 짐을 지우게 할 수 없다"라며 반대했으며, 그에 대해 중국 정부가 사죄를 요구하지 않을 것을 사전에 약속한 결과 방중이 실현된 데서도165) 확인된다. 또한 일본의 외무성이, 김 대통령의 방일 때의 일왕 만찬사의 표현과 관련하여, "일왕의 방한을 초청하려고 하는 때에, 한국측은 '말씀(お言葉)'을 문제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본 데에서도,166) 일왕과 사죄를 연결지우는 것을 경계하는 일본측의 입장이 드러난다. 애당초 "확실하게 명확한 형태로 아시아에 대해 사죄하는 것은 일왕제의 형해화"를 초래하는 것이다.167) 즉 그것은 어쨌든 일왕제에 뿌리내리고 있는 전후 일본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후 일본'은 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일왕이 한국에 와서 머리 숙여 사죄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168)

그렇다면 일왕의 방한은 한일간의 과거청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장애가 될 뿐이며, 나아가 진정한 역사적 청산을 좌절시키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히 바로 그 일왕의 이름으로 35년간이나 강점을 당하면서, 빼앗기고 두들겨 맞고 끌려가고 강간당하고 이름과 말까지 바꾸도록 강요당한 한국의 경우, 과거청산이 진정으로 끝날 때까지는, 일왕의 방한은 결코 받아 들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물며, 일본인들 중에도 일왕과 일본의 전쟁책임이 끝나지 않았다며 '아시아민중법정'을 열어 심판하자고 외치고 있는 이들이 있는 상황169)에서, 한국측이 스스로 나서서 일왕의 방한을 요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반역사적인 잘못을 범하는 일인 것이다.

여기에서 거듭거듭 일왕의 방한을 요청하고 있는 한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그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거나170) '전향적인' 조치를 촉구하고 있는 한국 언론171)의 역사인식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65년의 한일회담을 통해 과거청산 문제의 왜곡에 앞장섰던 김 총리가, "새로운 세기에의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 꼭 부탁하고자 한다"라며 일왕의 방한을 초청한 것은,172) 어쩌면 역사인식의 '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므로, 그의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일본측에 의해 "대일 자세에서는 가장 엄격한 입장을 취"해 왔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김 대통령의 역사인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는 점이다. 김 총리의 초청이 김 대통령의 방일 때의 초청에 연이어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의 기본선의 연장선상에서 부상한 정책"173)이라고 볼 수 있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김 대통령 자신의 언급들에서도 마찬가지의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점은 다수 발견된다.

우선 김 대통령은 방일 중 여러 차례에 걸쳐 한일 양국이 "과거 오랜 역사를 통하여 교류와 협력을 유지"([공동선언])해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10월 7일 일왕을 예방한 자리의 발언174)과 국회 연설에서는, "1천 5백년 이상이나 되는 교류의 역사"에 비해 "역사적으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 4백년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과 금세기초 식민지배 35년간" 뿐인데, "이렇게 50년도 안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천 5백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또한 이는 그 장구한 교류의 역사를 만들어 온 우리 두 나라의 선조들에게, 그리고 장래의 후손들에게 부끄럽고 지탄받을 일"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이것은 미래에 있어서의 양국의 우호를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맥락에서 사용된 것이기는 하지만, 1500년 대 50년이라는 시간의 길이의 비교 속에서 일제의 침략과 강점을 상대화하고 있는 것은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중대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아버지를 죽인 것 말고는 저 사람들과 원수 할 이유가 없다'는 격"이라는175)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애당초 역사적 경험에 대한 평가는 "현재의 관계와 연속성을 가지느냐 아니면 단절된 과거 시점에 속하느냐는 역사적 해석에 귀결된다"176)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일본의 패전 전후사의 연속의 측면과 그 연장으로서의 과거청산의 불충분성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심각한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77)

다음으로 김 대통령이 방일을 앞두고 한 일본인기자단과의 간담에서, 강점기의 한 일본인 은사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면서, "내가 2학년 급장을 할 때 그 선생님이 시켜서 시국에 대해 발표를 했는데 일본 대의사(국회의원) 같다고 큰 칭찬을 해 주었고 그 칭찬을 듣고 나도 무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으며, "그 뒤 결국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라고 말하고,178) 방일 중 그 일본인 은사를 만나 화제가 되었던 것179)이 주목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자신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찾아가 만나는 것은 존경은 받을지언정 결코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라면 달리 보지 않으면 안된다. 위의 발언이 "일본의 전시중의 일이므로 '시국'에 대해서라고 한다면 전의고양(戰意高揚) 비슷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국소년(皇國少年)'이었을지도 모른다"180)라는 고약한 해석의 빌미를 준 것은 제쳐두더라도, '식민지 교육'의 폐해가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고, 그것이 일제강점의 중요부분으로서 한국의 학생들에게 가르쳐지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대비가 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배후에서, "한국의 '식민지 세대'에게"서 특히 발견되며 한국의 지도층이 "시대착오적"인 "의식구조"임을 인식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지적되는, 일본에 대해 "선망의식과 증오심"이 뒤섞여 있는 심리상태181)를 발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통치시대의 경험을 가지고, 일본의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알고 있는 우리 세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진정한 정상화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182)라는 김 대통령의 의욕이 진정한 역사적 청산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인지는 심히 의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김 대통령의 역사인식의 불충분함이 위에서 살펴 본 '현실적 청산'이나 '도덕적, 감정적 청산'으로 내달리게 한 원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183)

이러한 역사인식의 불충분성은 한국 국민에게서도 발견된다. 위의 '한일 국민의 평가'에서 살펴 본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 국민이 일왕의 방한에 소극적인 데 대해, 한국 국민은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데는 과반수가 반대하면서도, 일왕의 방한에는 80%가 찬성하고 있다. 이것은 일왕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한일 양국 국민의 인식의 차이, 보다 정확하게는 한국 국민의 인식의 미숙성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천황>이라는 용어는 안된다고 고집하는 것 자체가 반드시 역사에 철저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일본의 왕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는 한국인에게 미묘한 문제이다.184) 과거청산이 옳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감정상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외교적 관례'만을 이유로 <천황>으로 바꾸자라고 하는 한국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보다 철저한 역사인식을 위해 <천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필요할 수도 있다. 우선, 과학의 시대라고 불리는 20세기가 끝나가려고 하는 지금, '신의 자손'이라는 의미를 가진 <천황>이라는 용어는 '부끄러움'의 징표는 될지언정 '자랑'이나 '존경'의 의미는 담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천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일본의 왕을 존경하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일간의 과거사를 염두에 둔다면,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천황>이라는 용어는 35년간의 억압과 착취의 대명사가 된다. 그렇다면 과거청산이 현안이 되어 있는 지금 <천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 청산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한 확인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천황>은 안되고 일왕이어야 한다고 주장해 온 그 오랜 기간동안, 한국의 정치권은 물론이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천황의 방한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오히려 강화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한국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일본의 왕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따지는 것보다는, 그 일본의 왕이 한국의 역사 속에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이 지금까지 왜 청산되지 못했는가, 그 미청산의 현실은 일본의 왕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지금 일본의 왕을 불러들이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정을 염두에 둘 때, 역사적 청산은 필연적인 것임은 물론이고 현실적으로 절박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청산해야 할 과거를 명확하게 밝히고 그에 대해 적절한 평가를 부여하는 작업을 당장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김 대통령의 방일을 전후하여 나타난 일본측의 일련의 움직임이 주목을 끈다. 하나는 방일 전인 지난해 9월 10일 한국사 및 한일관계사를 연구하는 일본의 대학교수 61명이, 일본 정부에 대해 올바른 역사 연구를 위해 아직도 미공개 상태에 있는 구 내무성 등의 식민지 지배 관련 사료를 전면적으로 공개하고 이를 복제해서 남북한에 제공하도록 촉구한 것이다.185) 만일 그러한 조치가 취해지기만 한다면, "역사적 사실이 어떠했는지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가능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한일간의 "역사인식의 차이를 메우기 위한 대화와 교류에 공통된 기반이 구축"될 것186)이 분명하므로, 그들의 촉구는 역사적 청산을 위한 소중한 움직임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시 방일 전인 지난해 9월 30일 일본의 여야당 국회의원 96명이 참가한 '항구평화를 위한 진상규명법의 성립을 지향하는 의원연맹'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이 요구하는 '역사인식의 공유'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국회가 선두에 서서 전쟁의 실태를 명확하게 하고자 하는 목적 아래 발족한 것이다. 이 또한 역사적 청산을 위한 새로운 한걸음으로 반길만한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187)

한편 위와 같은 일본측의 움직임에 비해 역사적 사실의 규명을 위한 한국측의 움직임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자료의 면에서나 책임의 면에서 일본이 먼저 나서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내에도 적지 않은 자료가 남아 있으며, 그에 대한 접근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현실을 생각할 때, 자료 공개의 촉구는 한국의 학자들이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며, 그것을 위한 진상규명법의 제정은 한국의 국회도 나서서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일제의 침략을 일본인들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도 모"르며, "부끄럽게도 일본인들이 더 많이 연구하고 일본인들에 의해 더 많이 제기돼 왔"기 때문에 "일제시기 연구에 일본인 카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188)을 생각할 때 그 필요성은 더욱 절박해진다.

역사적 청산을 위해서는 또한 과거에 대한 적절한 평가도 필요하다. 이미 밝혀진 하나의 사실을 놓고 한일간에 해석이 다른 것이 한일간의 역사공동연구, 나아가 한일간의 역사공동인식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러하다. 그런데 평가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적 청산이 국제법을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법적 청산과 손잡을 필요성이 생긴다. 뒤에서 살펴보는 것처럼, 한일간 역사인식의 근본에 1905년 및 1910년 조약의 효력의 문제가 놓여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한편 역사적 청산에 힘을 더하기 위해서는 그 청산에 한일 양국의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것, 다시 말해 시민적 청산도 필요하다. 1965년 한일회담의 예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지금까지의 한일관계가 문제는 덮어두기에 급급하면서, 비밀스러운 교섭만을 거듭해 온 정부 차원의 관계에 의해 주로 형성되어 온 것이 과거청산의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러하다.189) 뿐만 아니라, 이제는 모든 문제가 국경이라는 틀에 얽매이는 대신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가간의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되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에도 과거청산이라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파트너십"190)의 중요성은 강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점에서 [공동선언]이 다양한 형태의 한일간 시민교류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교류를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시민들의 교류는 분명 상호 이해를 높일 것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역사적 청산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잘 지내자는 것만으로는 과거는 청산될 수 없다. 역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로서의 역사가 청산되지 않는 한 그냥 서로 잘 지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시민차원의 협력과 교류"가 "어느 정도의 정리"191)나 일본 국민의 "마음잡기"를 위한 대일 햇볕정책을 정당화하는 구실192)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시민들의 교류는 오히려 경계해야 할 측면마저 가지고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한일 양국 시민들의 교류가 진정한 시민적 청산으로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역사적 청산과 손잡지 않으면 안된다. 청산해야 할 과거의 확인의 공유와 그에 대한 평가의 공유를 수반할 때에 비로소 그 교류는 한일간의 미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평가의 공유를 위해서는 또한 법적 청산과도 손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점에서 김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한일 양국 시민들이 연대하여, 한일 양국 정부에 대해 과거청산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 것193)이나, 한일 양국의 시민들이 20세기 마지막 달인 2000년 12월에 일본의 토오쿄오에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전범법정'을 개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시민적 청산의 소중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VI. 핵심으로서의 법적 청산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의 핵심에는 법적인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법적인 문제야말로 완전한 과거청산을 가로 막고 있는 일본측의 청산 거부의 뿌리인 것이다.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1910년 [합병늑약]의 효력이다. 이번 [공동선언]에서의 '사죄'의 모델이 담긴 담화를 발표했던 무라야마 전 총리도 1995년 10월 5일의 참의원 본회의에서 "일한병합조약은, 당시의 국제관계 등의 역사적 사정 속에서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되고 실시되었다"라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북한과 한국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은 이후인 10월 13일의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도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로서는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 있고, 조약체결에 있어서, 쌍방의 입장이 평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보완하면서도 "일한병합조약은 형식적으로는 합의로서 성립"되었다라는 입장은 여전히 고수했다. 요컨대 '조약은 정당했다고는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정치적,도의적 책임은 있지만, 법적으로는 유효했고 따라서 법적인 책임은 없다'라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서는 조약무효론은 "억압의 역사에 의해 형성되어, 조선민족의 'DNA'가 된 '한(恨)'이며, '정서'화된 반일 저항소로서 투쟁의 에너지를 길러 온 것"194)에 불과한 것이 된다.

문제가 되는 다른 하나는 1965년의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하 [기본조약]으로 줄여 씀) 및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협정]으로 줄여 씀)의 해석이다. "역사인식"과 "혐한감정"을 문제삼는 배경에는 "국가로서의 반성, 청산은 일한기본조약으로 종료되었다"라는 논거가 깔려 있다. 요컨대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끝났다'라는 것이다. 그러한 입장에서는 과거청산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문제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으로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 된다.195)

이러한 일본측의 주장은 과거청산과 관련한 구체적인 문제들과 관련해서도 전개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측은, [기본조약]에 의해 "도의적 책임은 남았지만 법률적으로는 해결이 끝났다"라는 기본입장에서, 형식상으로는 민간이 주도하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에 정부가 "사무경비 부담 등으로 전면지원"하여 "간접적으로 '도의적 책임'을 다한다는 형태"로 대응하고 있다.196)

그런데 일본인들이 이렇게 과거의 조약에 매달리는 것은,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왕의 책임문제가 불거질지 모른다라는 두려움과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만일 [합병늑약]이 무효라면, 일제의 35년간의 한국 지배는 불법적인 강점이 되며, 따라서 35년간 일제가 한국인에게 끼친 모든 인적,물적 손해는 불법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그에 따른 처벌과 배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1965년의 [조약]과 [협정]으로 그 문제가 종결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처벌과 배상이 현재의 당면 현안이 되게 되는 것이다. 일본측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실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 되는 셈이다.197)

지난해 4월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을 때, 일본 정부가 "커다란 정치적 결단"이라며 "환영"한 것도, "전 '위안부'에게 개인보상을 하면, 강제 연행된 사람들 등 관계자들로부터도 같은 요구가 이어져, 수십조 엔의 재원이 필요하게 된다"라는 걱정에서 벗어나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198) 지난해 김 대통령이 {세카이}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책임질 일이라고 했을 때, 그 발언이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일본외무성이 즉각 '수습'을 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199)

그런데 쟁점이 되고 있는 [합병늑약]의 효력의 문제는, 물론 그 조약 자체의 체결과정에 대해서 다투는 것도 가능하지만,200) 무엇보다 1905년 [을사늑약]의 효력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합병늑약]은 [을사늑약]의 유효를 전제로 하고 있는 까닭에, 만일 [을사늑약]이 무효라면 당연히 [합병늑약]의 효력도 부정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제국의 외교권박탈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은, 1) 1905년 11월 15일 특파대사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의 황제에 대해 그 초안을 제시하면서 "(이 안은) 결코 움직일 수 없는 제국정부의 확정된 방침이므로 금일 중요한 것은 단지 폐하의 결심 여하이다. 이것을 승낙하든지 혹은 거부하든지 마음대로지만, 만약 거부하면 제국정부는 이미 결심한 바 있다. 그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컨대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 이상으로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이며, 한층 불이익한 결과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협박하고, 2) 11월 16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콘스케(林權助)가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에게 조약원안을 보여주면서 찬성할 것을 강요하고, 3) 같은 날 이토오가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모두 자신의 숙소로 불러 밤늦게까지 조약체결에 찬성할 것을 강요하고, 4) 11월 17일 오후 대신회의가 개최되었을 때는 본회의장 안으로 칼을 찬 일본헌병과 경찰들이 몰려 들고, 회의장 주변과 궁궐 안팎에는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겹겹이 둘러싸고, 일본공사관 앞 등 서울 시내 전역을 무장한 일본군이 시가행진하고, 시내의 각 성문에는 야포와 기관총까지 갖춘 부대가 배치되는 등의 강박이 가해지는 가운데 체결된 것이었다.201)

그런데 당시의 국제법에 따르면, 강박에 의해 체결된 조약은 무효였다. 다만 [을사늑약]의 효력에 관해서는 당시의 국제법이 조약을 무효로 만드는 강박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가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해 그 강박을 "교섭당사자, 체결자의 신체에 대한 위해, 협박"202)이라고 해석하는 일본 정부와, "국가대표자에 대해 과거의 비리를 폭로한다든가 권총을 들이대는 등의 협박에 의해 조약의 체결을 강요한 행위"라고 해석하는 일본인 학자203)는, [을사늑약]이 '유효'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제국주의국가들의 논리에만 기초하여 강박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시 이미 강박을 보다 넓게 해석하는 '양들의 국제법'이 존재하고 있었다.204) 또한 조약의 효력에 관한 1969년 [조약법에 관한 비인조약] 제51조의 "조약에 구속되는 사항에 대한 국가의 동의 표명이 해당국의 대표자에 대한 행위 또는 협작에 의한 강제의 결과로 행하여진 것일 경우 어떠한 법적 효과도 가지지 않는다"라는 규정은, 1919년의 [국제연맹규약], 1928년의 [부전조약], 1945년의 [국제연합헌장]에서 확립된 원칙일 뿐만 아니라,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의 시점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국제법상의 원칙이다.205) 게다가, 이미 1906년에 발표된 파리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프랑시스 레이의 논문에서, [을사늑약]이 "전권대사에 대하여 폭력이 행사되는 경우에는 폭력은 조약을 무효로 하는 의사표시의 결함에 해당한다"라는 국제법상의 일반원칙에 비추어 볼 때 "서명이 행하여진 특수한 상황을 이유로" 무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지적되었으며,206) 1935년의 하버드 법률학교의 [조약에 관한 하버드 연구 협약안] 및 1963년 국제연합 총회에 제출된 국제연합 국제법위원회의 보고서에서도 [을사늑약]이 "조약의 서명, 비준, 수락, 또는 승인을 얻기 위하여 개인의 인신 또는 개인적인 능력에 대해 강제 또는 강압을 가하는 행위는 국가가 조약의 무효성을 주장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정당화한다"라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사실의 실례로서 언급되었다.207) 따라서 그 성립 당초부터 줄곧 국제사회에서 널리 인정되어 온 것처럼, [을사늑약]은 무효이며, 그것이 무효이므로 [합병늑약]도 무효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기본조약]과 관련해서는, 그 제2조 즉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It is confirmed that all treaties or agreements concluded between the Empire of Korea and the Empire of Japan on or before August 22, 1910 are already null and void)"라는 조항의 해석이 문제이다. 이 조항에 대해, 한국측은, [합병늑약]과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협정,의정서 등은 명칭여하를 불문하고 모두 무효이며, "null and void"는 '당초부터'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already'는 소급하여 무효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1910년의 [합병늑약] 하나만이 대상이며, 'already null and void'는 [합병늑약]이 원래는 유효했으나, 대한민국정부가 성립된 1948년 8월 15일에 무효가 되어, 1965년의 조약체결 시점에 있어서 '이미 무효'가 되었다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해 왔다. [협정]과 관련해서는, 그 제2조 제1항 즉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는 조항의 해석이 문제이다. 이 조항에 대한 해석 역시, 일본이 한국에 대해 3억 달러를 10년간에 걸쳐 무상공여하고 2억 달러를 10년간에 걸쳐 장기저리의 차관으로 제공한다라고 정한 같은 [협정]의 제1조와 관련하여, 처음부터 갈렸다. 일본측은, 제1조의 자금은 '경제협력자금' 혹은 '독립축하금'이며, 그 자금을 제공하는 부수적인 결과로서 제2조의 청구권의 완전 해결이 인정된 것일 뿐, 양조항간의 법률적인 인과관계는 없다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한국측은, 제2조의 청구권의 해결을 위해, 즉 강점에 따른 피해와 관련하여, 제1조의 자금이 제공된 것이다라고 주장해왔다.

위와 같은 양국의 주장의 차이는, 위 [조약]과 [협정]이, 양국의 편의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최대한 남겨 놓으려는 의도에서 맺어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원인은, 기본적으로는 강점에 기초한 한국측의 배상 등의 청구권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일본측이 두려워 한 것과,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까닭에 부족했던 정당성을 경제개발에 의해 보완하고자 한 박정희 정권이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의 도입이라는 정권적 차원의 목적을 위해 과거청산을 경시한 채 타협에 응한 것에서 찾을 수 있지만208), 그 외에도 냉전체제 아래에서 동북아를 대소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부심하고 있던 미국의 압력, 그리고 한국의 공산화 방지 및 한국에 대한 경제적 진출이라는 일본의 이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요컨대 한일 양국 정부가 '현실'을 고려하여 적당히 타협하면서, 쟁점에 관한 표현을 애매하게 한 다음, 양국의 국민들에 대해 각각 '우리에게 유리하다'라고 주장해 오고 있는 것이다.209)

하지만 과정이야 어쨌든 성립되어 있는 [기본조약]과 [협정]을 놓고 본다면, 일본측의 주장과는 달리 그것들에 의해서도 과거청산 문제는 종결된 것이 아니며, 적어도 법적으로는 '현재의 쟁점사항'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기본조약] 제2조를 일본측과 같이 '이미 무효'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국측과 같이 '애당초 무효'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이상, [기본조약]에 의해서도 [합병늑약]의 효력문제가 '종결'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협정]의 경우에도, 그 내용은 물론이고 한일회담 당시의 [합의의사록] 등에 나타나는 회담의 전과정에 비추어,210) [협정]의 청구권에는, '위안부' 문제 등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구체적인 과거청산 문제와 같이 불법을 전제로 한 청구권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협정]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과거청산은 '법적으로도' 종결되지 않은 것이다.211) 뿐만 아니라, 한걸음 물러나, 설령 정부간의 배상 문제의 해결은 끝났다고 하더라도 피해자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212)

요컨대 한일간의 법적 과거청산은 여전히 남아 있는 과제이다. 그 과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물론 일본 정부가 스스로 나서서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며, 또 가장 효율적이기도 하다. 그 경우 필요한 것은, 강점의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그것이 불법이었음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일체의 손해에 대해 배상하고, 범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죄하고, 범죄자의 처벌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는 처벌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 책임을 질 뿐만아니라, 지금 현재 일본의 재판소에서 '위안부' 등의 피해자 개인이 청구하고 있는 배상에도 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현재는 일본 정부가 그렇게 할 가능성이 없으며, 가까운 장래에도 그 가능성이 크게 늘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법적 청산을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적인 청산을 위해 지금 당장 한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할 수 있다. 우선 한국 정부는 [기본조약]과 [협정]을 폐기하고 일본의 법적 책임을 명시한 새로운 조약을 체결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조약법에 관한 비인조약] 제62조에 따르면, "조약 체결 당시에 존재하였던 사정에 관련하여 발생한 근본적 변화"는 "그러한 사정의 존재가 조약의 구속을 받게 된다는 것에 대한 당사국의 동의의 불가결의 기초가 되어 있었던" 경우에는, 조약의 종료 또는 탈퇴의 근거로서, 이것을 원용하는 것이 허용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기본조약] 및 [협정]과 관련해서는, 1) [기본조약] 제3조가 "대한민국 정부가, , ,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일본이 1991년 말부터 북한과 국교정상화교섭을 개시한 것, 2) 그 청구권의 대상에 '위안부'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1992년 5월 14일 일본이 북한과의 교섭에서는 청구권의 논의 속에 '위안부' 문제도 포함된다는 입장을 밝힌 것, 3) [기본조약] 및 [협정] 체결시에는, '위안부' 문제 등의 실상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일본의 책임의 유무와 소재도 전혀 밝혀져 있지 않았던 데 대해, 1993년 8월 4일 일본 정부가 '위안부'에 대한 "대일본제국군의 관여"를 인정했고, 일본의 수상이 한국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기까지 한 것213) 등, "동의의 불가결의 기초"가 되었던 사정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사정 변경을 이유로 위 [조약] 및 [협약]를 종료시키거나 그로부터 탈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법적 책임을 명시한 새로운 조약의 체결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한국 정부는 [기본조약]과 [협정]의 개정을 요구할 수도 있다. 그 해석과 관련하여 한일 양국 정부간에 갭이 있는 상황에서, 그 접근을 위해 개정하자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방적인 '탈퇴'나 '종료'가 한일관계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방법이 보다 무난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기본조약]과 [협정]이 완전한 법적 청산 나아가 과거청산 일반에 장애가 된다면, 과거청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그 개정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일간의 근원적인 과거청산을 주장하는 이들이, [기본조약]의 재고 없는 "'반성과 오와비' 발언 따위는, 결코 진정한 반성도 오와비도 아닐 뿐만아니라, 식민지 지배의 역사적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다"라며, 그것을 권고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214)

뿐만 아니라 [기본조약]과 [협정]의 범위 내에서도, 한국 정부는 지금 당장 배상 등을 요구할 수 있다. 우선 '위안부' 등 현안이 되어 있는 과거청산 과제에 관해서는, 그것들이 [협정]의 청구권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것인 까닭에, 당연히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그 청구는 피해자 개인은 물론이고 한국 정부가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해서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위안부'에 관해서는, 한국 정부가 국회에서 "65년 한일 양국간 청구권 협정 체결 당시에는 군대'위안부' 문제의 불법성이 논의되지 않는 상태였다"라는 입장215)을 밝힌 이상 적극 나서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216)

이 점과 관련해서는 [공동선언]에 "일본이 과거 한 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하였다"라는 표현이 들어 간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김 대통령은, 이 표현이 문서화된 데 대해, '과거청산 문제는 일단락된 것이며, 따라서 한국 정부는 재론하지 않겠다'라거나 '한일관계의 과거는 청산되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도의적, 감정적 차원에서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지금까지의 일본 정부의 일관된 입장은, '[합병늑약]은 유효하며, 따라서 식민지 지배는 합법이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협정]에 의해 한국에 제공한 자금은 '경제협력자금 혹은 독립축하금'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일본측의 논리에 따르면, 지금까지 잘못된 과거와 관련하여 한국측에 배상을 한 적은 한번도 없는 것이 된다. 잘못한 일이 없다고 본다면 배상할 것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 논리는 잘못한 일이 있다면 배상할 것도 있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리고 [공동선언]에서 일본 정부는 분명히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것에 대해 "사죄를 하였다." 다시 말해 일본이 식민지 지배에 의해 한국에 대해 죄를 빌어야 할 잘못을 하였고 그로 인해 손해와 고통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요컨대 [공동선언]에서 일본 정부는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식민지 지배를 잘못이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지금까지 한번도 한 적이 없는 배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공동선언]의 일어문에는 '사죄'가 '오와비'로 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오와비'는 가벼운 사과에서부터 무거운 사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용어이다. 따라서 일어문에도 명백하게 '사죄'라고 표기하게 하지는 못한 채, 한국어문에는 '사죄'라고 표기하고 국내에서는 그렇게 쓰도록 종용한 한국 정부는, 한국의 "국민을 달래기 위해" "순전히 '국내 소비용'"으로 "일종의 눈속임"을 한 것이다라고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217) 하지만 각도를 조금 달리 하여 생각해보면 '오와비'는 범죄에 대한 사죄의 경우에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공동선언]의 한국어문과 김 대통령의 일본 국회 연설문에 '오와비'에 해당하는 표현을 '사죄'로 할 것인가 '사과'로 할 것인가를 놓고 한일 양국 정부가 "무수한 입씨름을 벌인 끝에" 일본 정부가 '사죄'로 하는 데 동의했다는 사실도 있다.218) 이것을 국내의 한 신문은 "한국어 표현에까지 일본 정부가 신경을 쓰는 것은 일본내 보수층의 여론에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평했지만,219) 사실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의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과거청산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가장 잘 인식되었다. 김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자민당의원들이 [공동선언]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의 표현을 넣는 데 반대한 이유가 바로 "배상책임이 생길 염려가 있다"220) 혹은 "한국의 일본에 대한 청구권 문제가 장래에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221)라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측의 기존의 입장에 충실할 경우의, [공동선언]에 대한 가장 적확한 '법적인 해석'인 것이다. 요컨대 일본측의 기존의 입장에 충실할 경우, [공동선언]에 의해 비로소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범죄였음이 확인되었고, 따라서 그에 대해 배상 등을 해야 할 책임도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 정부가 배상 등을 요구하는 데 장애가 될 요소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끝으로 특히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는,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련 범죄자의 처벌도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스스로 나서서 관련 범죄자를 처벌할 수도 있다. 김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의 "세계적 상식"에 따른 해결을 촉구하며 예로 든, 국제연합 인권소위원회(차별방지소수자보호소위원회)에서 '환영'하는 형태로 채택된 [맥두걸보고서]222)에 따르면, '위안부'를 강제한 행위는 "노예제, 인도에 반하는 죄, 전쟁범죄라고 하는 가장 중대한 국제범죄"에 해당하는 행위이므로, 일본 정부가 피해자에 대한 개인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피해자 "대신에 각 국가가, 자국민인 전 '위안부'를 위해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하는 것도 가능"하다. 또한 일본 정부는 "위법행위를 한 일본군 병사 개개인"은 물론이고 그들에 대한 지휘책임이 있는 "장교 및 관료"와 "강간소(rape center)의 설치, 감독에 책임이 있는 정부, 군관계자를 소추하지 않으면 안된다." 뿐만 아니라, 위의 범죄들에 대해서는 "보편적 재판관할권의 원칙이 존재하며, 어느 국가라도 이와 같이 보편적으로 비난받는 범죄의 가해자를 체포하는 것이 인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 이외의 국가의 재판소에서도 형사절차를 진행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러한 가해행위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확립하도록 국내법을 강화"해야 한다.223)

이것이 현재의 국제사회에서의 '법적 상식'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세계적 상식"에 따라,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에 관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범죄자들의 처벌을 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나서서 범죄자들을 체포하여 한국의 법원에서 형사절차를 진행시킬 수 있고,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국내법을 강화해야 한다.224)

물론 위의 조치들은 한국 정부가 의지를 가질 때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 정부의 자유재량사항은 아니다. 만일 한국 정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중대한 국제범죄"에 의해 자국민이 당한 중대한 인권침해를 방치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국가의 인권옹호 노력을 규정한 국제연합헌장을 위반하는 것이 되며, 당연히 그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Ⅶ. 맺음말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을 핵심으로 하는 '신 파트너십'은,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라고 하는, 원천적으로 역사적이고 또한 지극히 법적인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도덕적,감정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을 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을 진척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문제 해결에 새로운 장애를 설정한 측면마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한가지 '의도하지 않은' 성과가 있다면, [공동선언]을 통해 일본 정부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사죄해야 할 범죄였으며, 그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크나큰 손해와 고통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마침내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법적 청산의 진척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외교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국가간의 문제도 그때 그때의 양국간의 힘관계와 국제정세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는 단지 현실적으로만 접근하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 깊고 그 내용이 너무 복잡하다. 따라서, 긴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장의 현실이 엄혹하다면, 그것을 "분쟁 지속"225)의 상태로 남겨 두는 지혜라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세대의 한계'가 있다면,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겨 두는 것이 진정으로 미래를 대비하는 일일 것이다.

또한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는 참으로 법적인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김 대통령의 지적처럼, "침략당했다, 나쁘다 나쁘다고만 이야기하지 말고, 왜 우리들이 침략당하는 약한 나라가 되었는가, 왜 그토록 변변찮은 정치를 하였는가를 반성하지 않으면 안된다.226) 하지만, 동시에 침략을 당한 이유가 무력이나 경제력만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당시의 국제법에 보다 정통했다면, 문제를 법적으로 파악하고 접근하고 주장하는 능력이 보다 충분했다면, 침략을 당할 가능성은 그만큼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침략으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그에 대해 책임을 묻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227)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는 여전히 커다란 과제이다.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청산되어야 할 과거를 명확하게 밝혀 내고 그에 대해 적절한 평가를 부여하는 역사적 청산을 위한 노력이 기울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역사적 청산 과정에 한국의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고, 그것을 통해 일본의 시민과 연대하는 시민적 청산 또한 추구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위해 누구보다 연구자의 노력이 절실함은 말할 것도 없다. 만일 우리가 그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과거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과거를 너무 모르는 민족이라는 질타228)는 언제까지나 유효한 것이 될 것이다.229)

또한 과거청산의 법적인 면을 명확하게 밝혀 내고, 그것에 입각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법적인 청산도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서는 한일 양국 정부가 나서는 것이 우선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연구자를 포함한 시민들이 적극 나서서 국가와 정부에 대해 요구하고 추궁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무엇이 법이고 무엇이 정의인지를 선언"230)해 달라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외침에 화답할 수 있고, 그리하여 그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게231) 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國際地域問題硏究}(부산대학교 국제지역문제연구소), 제17권 제1호, 1999.3. )



각주


* 부산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수.

1) 이 글에서는 일본의 왕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일왕'을 사용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 본문의 '목표로서의 역사적 청산과 시민적 청산' 참조.

2) 이 글에서는,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은 [김대중 대통령 일본 공식방문 결과](http:// www.mofat.go.kr/ - 외교자료실 - 외교문제해설 - 1998년 - 98년 제9호)에서 인용한다.

3) [日韓首腦の共同宣言<全文>], {朝日新聞} 98.10.8. 이 글에서 인용하는 일본 신문의 기사 등은, 특별한 표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PC통신 천리안(37. 해외서비스 - 4. PCVAN)에서 검색한 것이다.

4) 이 글에서는 [국회연설](http://www.mofat.go.kr/ - 외교자료실 - 연설문DB - 대통령연설문)에서 인용한다.

5) 이 글에서는 [관서지역 주요단체 주최 만찬 연설](http://www.mofat.go.kr/ - 외교자료실 - 연설문DB - 대통령연설문)에서 인용한다.

6) 이 글에서는 [아키히토 일왕 주최 만찬시 답사](http://www.mofat.go.kr/ - 외교자료실 - 연설문DB - 대통령연설문)에서 인용한다.

7) [金대통령 오부치日총리와 정상회담(종합)], {연합뉴스속보} 98.10.8. (이 글에서 인용하는 국내 신문.통신의 기사 등은 PC통신 천리안[21. 뉴스 / 잡지 - 1. 종합일간지]에서 검색한 것이다.) 일본의 궁내청(宮內廳)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한일의 긴 역사 속에서, 우호적이지 않은 기간이 있었지만, 그 때문에 우호관계를 손상시키는 것은, 선조와 자손에게 미안한 일이다. 양국의 우호친선을 위해 일왕, 황후 두 폐하가 한국을 방문해 주시기 바란다"라며 초청했다고 한다. [金大中韓國大統領 宮中晩さん會 天皇陛下訪韓を招請 天皇陛下, お言葉], {産經新聞} 98.10.8.

8) [金대통령 오부치총리 공동기자회견], {연합뉴스속보} 98.10.8. ; [日韓首腦會談<要旨>], {朝日新聞} 98.10.9.

9) [金대통령, "日 일왕 방한 월드컵축구 이전 실현 희망"], {연합뉴스속보} 98.10.8.

10) [金대통령 방일 결산 기자간담회], {연합뉴스속보} 98.10.9.

11) [金대통령 "日정부 인사 망언은 용납안해"(종합)], {연합뉴스속보} 98.10.10.

12) [韓國 昇龍經濟は死なず], {文藝春秋} 1998년 10월호, p.175.

13) ["金대통령, 日 무라야마 담화 확인 요망"<日 의원>], {연합뉴스속보} 98.9.20. ; ["韓國이 日王 2001년 訪韓 타진" <산케이신문>], {연합뉴스속보} 98.10.1.

14) [天皇陛下の訪韓 環境整備に努力], {産經新聞} 98.10.1.

15) [日韓首腦會談 首相{痛切な反省とおわび} 共同宣言に初めて明記], {産經新聞} 98.10.8. ; [{環境整備に努力} 天皇訪韓で小, 惠三首相表明へ], {朝日新聞} 98.10.8.

16) [김대중 대통령 일본 공식방문 결과]. 또한 [국회연설]과 [관서지역 주요단체 주최 만찬 연설]도 참조.

17) [金대통령, "정신대 문제 해결돼야"], {연합뉴스속보} 98.10.9. ; [世界が納得できる解決を 慰安婦問題で金大中, 韓國大統領], {朝日新聞} 98.10.9. 그 외에, 김 대통령은 10일 일본 문화계 주요인사와 환담하는 자리에서 "(일제가) 창씨개명을 하고 우리말을 못하게 함으로써 부자간의 대화도 못하게 한 결과를 빚기도 했는데 이는 인권문제이며, 문화적 상처가 경제적 손해보다 훨씬 크다"라고 지적하고 "20세기 갈등을 20세기에 끝내고 21세기에 화해.협력의 길을 열자"라고 강조했다는 기사가 발견된다 ([金대통령, 일본 문화계 인사 간담회 안팎], {연합뉴스속보} 98.10.10.).

18) [김대중 대통령 일본 공식방문 결과].

19) [[김대통령방일] 귀국기자회견 일문일답], {한겨레} 98.10.10.

20) [金대통령 방일 결산 기자간담회], {연합뉴스속보} 98.10.9.

21) [{信賴關係は劃期的} 金大中韓國大統領, 首相經驗者らと懇談], {朝日新聞} 98.10.9.

22) [日韓首腦會談での{過去の問題}主なやりとり], {讀賣新聞} 98.10.9.


23) [[金대통령 訪日/과거사 정리]{왜곡중단}에 중점], {동아일보} 98.10.10.

24) [동포와의 간담회시 격려사], http://www.mofat.go.kr/ - 외교자료실 - 연설문DB - 대통령연설문.

25) 이러한 의미부여는, 9월 30일의 일본언론사 특파원들과의 회견에서 "내달 나의 일본 방문이 한국과 일본 양국 사이에 더 이상 갈등이 없도록 과거를 청산하고 진정한 이해와 협력을 이루는 21세기 진입의 계기가 돼야 한다는 점을 마음깊이 새기고 있다"([金대통령 "일본 방문 성공 기대"], {연합뉴스속보} 98.9.30. 일본의 신문에는 위의 기사 중 "과거를 청산하고"라는 부분이 "과거를 말끔히 청산하고"로 되어 있다. [歷史認識問題に區切り {謝罪}初の文書化へ 金大中, 韓國大統領7日來日], {讀賣新聞} 98.10.4.)라고 이야기한 것, 그리고 10월 7일의 주일 한국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일본이 과거를 똑바로 보고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는 용기를 보이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한국도, , , 21세기를 맞이하는데 있어 모든 과거를 청산해 동반자로서 같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金대통령 "한일간 금세기 불행은 금세기중 매듭], {연합뉴스속보} 98.10.7.)라고 이야기한 것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6) [金대통령 방일 결산 기자간담회], {연합뉴스속보} 98.10.9.

27) [金대통령 "日정부 인사 망언은 용납안해"(종합)], {연합뉴스속보} 98.10.10.

28) [[김대통령방일] 귀국기자회견 일문일답], {한겨레} 98.10.10.

29) [訪日で過去淸算 韓國大統領, 初めて明言], {産經新聞}[인터넷판] 99.2.12. 또한 9월 11일 정부가 국내에서 일왕이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겠다고 밝힌 것([정부 '일본 天皇' 호칭 공식부활], {연합뉴스속보} 98.9.11)도, 이러한 입장과 연관된 것이었다.([동포와의 간담회시 격려사] 참조.)

30) [국민회의 金대통령 訪日외교 성과 논평], {연합뉴스속보} 98.10.10. ; [金大中, 韓國大統領, 內政改革へ 訪日成功が追い風], {朝日新聞} 98.10.10.

31) [日韓新時代, 足元に不安(時時刻刻)], {朝日新聞} 98.10.9.

32) [金대통령 오부치총리 공동기자회견], {연합뉴스속보} 98.10.8

33) [日관방, "역사 발언에 주의할 것"], {연합뉴스속보} 98.10.9

34) [日韓首腦會談 アジア安定と經濟再生に意欲], {産經新聞} 98.10.8.

35) [日韓首腦共同會見<要旨>], {朝日新聞} 98.10.8.

36) [[98外交一進一退](2)日韓關係 北朝鮮問題試される連携], {産經新聞} 98.12.20.

37) [金大中大統領來日 {天皇訪韓}どう環境整備 W杯出席も視野に], {讀賣新聞} 98.10.8. ; [日韓首腦會談 KEDO署名凍結 解除の絲口探る 天皇陛下, 訪韓時期尙早の聲も], {産經新聞} 98.10.9.

38) [日韓--克服すべき課題とは何か][座談會], {世界} 1998년 10월호, p.204.

39) [<종합> 金대통령, 日 정계지도자 초청 오찬], {연합뉴스속보} 98.10.9. ; [金大統領國會演說 {未來志向}に廣く好感 與野黨議員{過去}解決には異論も], {讀賣新聞} 98.10.9. ; [金大統領, 歷代首相經驗者らと晝食會 與野黨懇親會の樣相も], {産經新聞} 98.10.10 ; [信賴關係は劃期的 金大中韓國大統領, 首相經驗者らと懇談], {朝日新聞} 98.10.9.

40) [[사설]韓日관계 새 국면], {동아일보} 98.10.8. ; [[사설] 한, 일동반관계 이제 시작이다], {한국일보} 98.10.10.

41) [[김대통령] '실사구시 외교', , , "줄건 주고 받을건 받는다"], {조선일보} 98.11.15.

42) [韓日 새 동반 협력시대로], {대한매일} 98.10.9.

43) [[글로벌 포커스]DJ 訪日의 실리], {중앙일보} 98.9.4. ; [[기고]일본 역사의 덫 풀어가기], {중앙일보} 98.11.27. ; [김대통령의 일본방문을 보고], {중앙일보} 98.10.8.

44) [金대통령의 訪日에 거는 기대], {한국일보} 98.10.3.

45) [[사설] 불완전한 '사죄'와 새출발], {한겨레} 98.10.8. ; [[김대통령방일] 먼이웃 거리좁히기 협력 실질틀 중요], {한겨레} 98.10.7.

46) [[데스크칼럼] 일본의 숙제], {경향신문} 98.10.14.

47) [[기자수첩] '과거 매듭'의 대가], {조선일보} 98.10.6.

48) [[사설]한일 동반자관계를 기대한다], {한국일보} 98.10.6. ; [<사설>'사죄' 이후가 중요하다], {문화일보} 98.10.9. ; [[사설] 김대통령의 일본방문], {경향신문} 98.10.7.

49) [[金대통령 訪日/과거사 정리]{왜곡중단}에 중점], {동아일보} 98.10.10.

50) [[김대통령 방일] '일 과거사 표명' 우리정부 입장], {경향신문} 98.10.9.

51) 重村智計, [金大中訪日成功の舞臺裏], {中央公論} 1998년 12월호, p.142.

52) [[방일결산]DJ맞은 일본 "이번엔 뭔가 달라"], {주간조선} 1998.10.22.

53) [文書確認に重み 今後の協力がカギ 日韓共同宣言{過去}の反省], {朝日新聞} 98.10.8.

54) [この變化を確かなものに 日韓共同宣言(社說)], {朝日新聞} 98.10.9.

55) [日韓關係新たな一步 金大統領, 改善へ强い決意示す / 首腦會談], {讀賣新聞} 98.10.8.

56) [[よみうり寸評]金大中大統領の<未來志向>に期待], {讀賣新聞} 98.10.8. ; [日韓宮中晩さん會 {お言葉問題}決着にじます 金大統領, {歷史}に言及せず], {讀賣新聞} 98.10.8.

57) 이러한 평가는 해를 넘겨서도 "오랫동안 양국간 마찰의 불씨가 되어 온 역사문제에 일단락을 지우는 英斷"([指導力見せた金大中政權の一年], {讀賣新聞}[인터넷판] 99.2.25.)이라는 식으로 이어졌다.

58) [[正論]明星大學敎授 小堀桂一郞 日韓共同文書への憂廬], {産經新聞} 98.10.3.

59) [[今度こそ日韓新時代]金大中大統領來日(上){知日派}大統領アピ―ル], {産經新聞} 98.10.4.

60) [産經抄], {産經新聞} 98.10.7.

61) [日韓首腦會談 アジア安定と經濟再生に意欲], {産經新聞} 98.10.8.

62) [[視點]日韓首腦會談 首相{痛切な反省とおわび} {過去離れ}のきっかけに], {産經新聞} 98.10.8. ; [[主張]日韓首腦會談 {過去}との決別願うのみ], {産經新聞} 98.10.9.

63) [[久保紘之の天下不穩]韓國謝罪要求の深層 {トラウマ}が殘る限りは…], {産經新聞} 98.10.12.

64) [[98外交一進一退](2)日韓關係 北朝鮮問題試される連携], {産經新聞} 98.12.20.

65) [日韓首腦會談 金大統領{新たな協力關係}重視 對日外交, 劃期的に轉換], {産經新聞} 98.10. 9.

66) [金대통령 방일외교에 81% '만족'], {연합뉴스속보} 98.10.16.

67) [[談話室]天皇のご訪韓 時期尙早では], {産經新聞} 98.10.18.

68) [日 국민 80% 이상 對韓 반성, 사죄 표명 긍정 평가], {연합뉴스속보} 98.10.15

69) [일본인, 金대통령 방일 성과 높이 평가], {연합뉴스속보} 98.10.21.

70) 社說]良好な"環境"が必要な天皇訪韓], {讀賣新聞} 98.12.5.

71) 韓新時代, 足元に不安(時時刻刻)], {朝日新聞} 98.10.9. ; [日韓{普通の關係}期待 過去の淸算, 決着を 金大中大統領7日來日], {朝日新聞} 98.10.4.

72) 정부, 對日정책 종합 재검토], {연합뉴스속보} 98.1.24.

73) [정부 유엔인권위서 '위안부'문제 적극 제기], {연합뉴스속보} 98.3.1.

74) 당선자 나카소네前총리 요담], {연합뉴스속보} 99.1.4. ; [金大中韓國大統領と中曾根康弘氏の會談<要旨>], {朝日新聞} 98.2.27.

75) [天皇訪韓實現めざす 韓國大統領,小, 外相と會談し表明 W杯向け], {朝日新聞} 98.3.22.

76) [日韓パ―トナ―シップ策定に合意 金大統領, 今秋にも訪日 首腦會談], {朝日新聞} 98.4.3.

77) [日위안부 지원방안 결정, 정부차원 배상청구 않기로], {한겨레} 98.4.20.

78) [[위안부] 정부, 일본군위안부 위로금 지급 보류], {한겨레} 98.4.14.

79) [韓國が[支援金]を給付 元從軍慰安婦への賠償, 重い課題], {朝日新聞} 98.5.29. 5월의 유엔 인권위원회 현대형노예제실무회의에서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마디의 발언도 하지 않은 것은 그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대협, 대통령에 '위안부'문제 관련 면담요청], {연합뉴스속보} 98.8.23 참조.)

80) [過去の文化侵略, 日本に反省を 金大中韓國大統領が來日時の共同文書に揭載要求], {讀賣新聞} 98.9.22.

81) [金大中韓國大統領7日來日 "文化侵略"謝罪か反論か 對應に惱む首相], {産經新聞} 98.10.1.

82) [國民的交流と友好の時代を], {世界} 1998년 10월호, p.61.

83) [{過去の淸算}, 創氏改名には觸れず {村山談話もとに}野中氏方針], {朝日新聞} 98.9.29.

84) [金大中韓國大統領 天皇陛下訪韓 {よく檢討}首相表明へ 2001年を軸に], {産經新聞} 98.10.8.

85) [元慰安婦問題 局長級協議を設置 日韓政府が合意], {産經新聞} 98.10.6. 또한 ["訪日 金대통령 납치사건 언급피할 것"], {연합뉴스속보} 98.9.28. ; [정부, 日 과거사 정리방향 긍정평가], {연합뉴스속보} 98.9.29. ; [韓日, 공동선언서 '위안부' 문제 언급 않기로], {연합뉴스속보} 98.10.3. ; [元慰安婦問題に言及せずで合意 日韓共同宣言], {産經新聞} 98.10.3.도 참조.

86) [[今度こそ日韓新時代]金大中大統領來日(下)眞のパ―トナ―シップ], {産經新聞} 98.10.6.

87) [國家超え, 市民が連携を 金大中大統領來日], {朝日新聞} 98.10.9.

88)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에, 국책을 그르쳐, 전쟁에의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국가들, 특히 아시아국가들의 사람들에 대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나는, 미래에 잘못이 없게 하기 위해, 의심할 바 없는 이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 이에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お, び)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95년 8월 15일의 [戰後五十年に當たっての首相談話], [日韓共同宣言, [村山談話]基本 對象は韓國, 個別問題盛らず], {朝日新聞} 98.10.6.에서 인용.

89) [日韓共同宣言, [村山談話]基本 對象は韓國, 個別問題盛らず], {朝日新聞} 98.10.6.

90) [侵略巡り韓國說得 日韓共同宣言の舞台裏 登, 外政審議室長に聞く], {朝日新聞} 98.10.20.

91) [[正論]慶應義塾大學敎授 小此木政夫 日韓關係に劃期的な, , , ], {産經新聞} 98.10.15.

92) [[기자의 눈]권순활/日우익의 {시대 착오}], {동아일보} 98.10.11.

93) [[김대통령] '실사구시 외교', , , "줄건 주고 받을건 받는다"], {조선일보} 98.11.15.

94) [金大中韓國大統領, 7日來日 懸案解決どこまで], {讀賣新聞} 98.10.4.

95) [[김대통령방일] '한일 행동계획' 의미와 초점], {한겨레} 98.10.8.

96) [殘る歷史認識の深い溝 {日韓共同宣言}と今後 海野福壽], {朝日新聞} 98.10.19.

97) [[今度こそ日韓新時代]金大中大統領來日(上){知日派}大統領アピ―ル], {産經新聞} 98.10.4.

98) [實を取った韓國大統領の戰略 受け身に回った日本側 日韓首腦會談], {朝日新聞} 98.10.9.

99) [[今度こそ日韓新時代]金大中大統領來日(下)眞のパ―トナ―シップ], {産經新聞} 98.10.6.

100) [[今度こそ日韓新時代]金大中大統領來日(中){歷史認識}問題], {産經新聞} 98.10.5.

101) [金大中大統領來日 元慰安婦問題曲がり角に 搖れる{女性基金}の意義], {産經新聞} 98.10.2.

102) [計13閣僚, 靖國參拜へ 小, 內閣の過半數, うち5人は前日までに], {朝日新聞} 98.8.15.

103) [これで[外交の小, ]か 中川氏發言(社說)], {朝日新聞} 98.8.1.

104) [日韓漁業交涉に影響も 韓國世論反發の恐れ 中川農水相慰安婦發言], {朝日新聞} 98.8.1.

105) ]日韓フォ―ラム 對話, 一段と率直に 大統領訪日で"雰圍氣", , , ], {産經新聞} 98.11.1.

106) [[김총리] 아시아 통화기금 필요성 재론], {한겨레} 98.11.30. ; [[김총리] 기자간담회 일문일답], {한겨레} 98.11.29. ; [2000년 일왕 방한 성사에 최선<日 총리>], {연합뉴스속보} 98.12.1.

107) 물론 김 대통령과 김 총리가 모든 문제에 관해 같은 의견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김 총리의 일본에서의 발언과 관련해서는, 아시아 통화기금 창설에 관한 주장에 대해 정부의 방침과 어긋난다는 논란이 일어나 김 총리가 해명을 한 것과는 달리([[김총리] 김총리 AMF발언 해명], {한겨레} 98.12.1.), 그 외의 발언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는 보도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두사람이 연립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이상, 본문과 같은 평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08) [[기자수첩]한일과거사해법 동상이몽], {세계일보} 98.10.7. ; [[글로벌 포커스]역사 - 그 고통을 넘어서], {중앙일보} 98.5.22. ; [日韓關係新たな一步 金大統領, 改善へ强い決意示す / 首腦會談], {讀賣新聞} 98.10.8. ; [[今度こそ日韓新時代]金大中大統領來日(中){歷史認識}問題], {産經新聞} 98.10.5.

109) ぱくいる, [日本はアジアとの{援助交際}をやめよ], {インパクション} 110, 1998.10.15., pp.49-50.

110) [對日 실용노선, , , 김대중-박정희 '닮은꼴'], {한국일보} 98.10.13.

111) 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 p.169 이하 ; 高崎宗司, {檢證 日韓會談}, 岩波書店, 1996, p.115 이하 참조.

112) 林弘志, 山川大作, 西岡力, [金大中訪日をどう見るか], {現代コリア} 1998년 11월호, p.13.

113) [日韓首腦會談 金大統領の勇氣と自信示す / 靜岡縣立大敎授 金兩基氏], {産經新聞} 98.10.9. 일본인들이 "김대중 대통령의 용기와 자신"을 칭찬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위의 기사 참조.)

114) 과거청산 문제를 "일본인 자신의 문제"로 보고, 따라서 "과거의 문제를 담은 공동선언을 만들려고 한 것은, 결코 일본을 질책할 의도에서가 아니라, 한국민을 설득하기" 위한([國會演說を何度も推敲 金大中大統領訪日の舞台裏語る 崔相龍敎授], {朝日新聞} 98.10.10.) '립서비스'였다는 대통령 특별수행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애당초 그 가능성을 논할 필요조차 없어질지도 모른다.

115) [日韓首腦會談での{過去の問題}主なやりとり], {讀賣新聞} 98.10.9.

116) [[김총리] 아시아 통화기금 필요성 재론], {한겨레} 98.11.30. ; [[김총리] 기자간담회 일문일답], {한겨레} 98.11.29.

117) [[기자수첩]한일과거사해법 동상이몽], {세계일보} 98.10.7.

118) [{相互信賴で和解を} ブレ―ンの池明觀氏に聞く 金韓國大統領訪日], {朝日新聞} 98.10.7.

119) [{金대통령 訪日} 역대 訪日과 다른점], {대한매일} 98.10.7.

120) [焦點採錄 豫算委員會, 參院20日], {朝日新聞} 98.8.21.

121) [[사설] /김 대통령의 첫 일본 방문], {한겨레} 98.9.11.

122) [[기자수첩]한일과거사해법 동상이몽], {세계일보} 98.10.7. ; [[김성우에세이] 제5의 自由], {국민일보} 98.10.16.

123) [[사설]새 차원의 한일관계], {중앙일보} 98.10.8.

124) [金대통령 訪日 결산, , , 성과와 전망], {대한매일} 98.10.12.

125) [[김성우에세이] 제5의 自由], {국민일보} 98.10.16.

126) [[사설]새 차원의 한일관계], {중앙일보} 98.10.8. ; [임춘웅 칼럼-일본 콤플렉스 벗어날 때다], {대한매일} 98.10.8.

127) [[正論]政治評論家 屋山太郞 日韓關係を歪めているのは何か], {産經新聞} 98.10.6.

128) [日韓の善隣へ謝罪とゆるし(聲)], {朝日新聞} 98.10.8. ; [金大中韓國大統領と中曾根康弘氏の會談<要旨>], {朝日新聞} 98.2.27.

129) 海野福壽, {韓國倂合}, 岩波書店, 1995, pp. 244-245.

130) [[主張]金大中大統領來日 日韓新時代は相互協力で], {産經新聞} 98.10.6.

131) [[正論]政治評論家 屋山太郞 日韓關係を歪めているのは何か], {産經新聞} 98.10.6.

132) 黑田勝弘, [{天皇}{日皇}{日王}], {現代コリア} 1998년 11월호, p.26.

133) 鄭大均, [道義論だけでは日韓を不幸にする], {This is 讀賣} 1999년 1월호, p.128.

134) [[久保紘之の天下不穩]韓國謝罪要求の深層 {トラウマ}が殘る限りは…], {産經新聞} 98.10.12.

135) 鄭大均, 위의 글, p.125.

136) 鄭大均, 위의 글, p.126.

137) 鄭大均, 위의 글, p.131.

138) 田中明, [金大中訪日 - 日韓關係の非生産性], {現代コリア} 1999년 1월호., p.126.

139) [[正論]政治評論家 屋山太郞 日韓關係を歪めているのは何か], {産經新聞} 98.10.6.

140) [[今度こそ日韓新時代]金大中大統領來日(上){知日派}大統領アピ―ル], {産經新聞} 98.10. 4.

141) 일제의 침략상에 대해서는 우선 [특별기획 일제의 광기와 대학살], {역사비평} 1998 겨울호 참조. 또한 한일간의 미청산 과제의 전모에 관해서는 우선 한국정신대연구회(편), {한일간의 미청산과제}, 아세아문화사, 1997 참조.

142) [日韓--克服すべき課題とは何か][座談會], {世界} 1998년 10월호, pp.206-207.

143) 이에 관해서는 우선 강창일, [전후 일본인의 역사인식과 망언],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현대사연구팀(편), {일본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한길사, 1996 ; 이원덕,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하영선(편), {한국과 일본}, 나남출판, 1997 참조.

144) [[아침햇발] 일본의 과거청산 역량], {한겨레} 98.10.8.

145) [日정계 지도자들, "金대통령의 국회연설에 감명"], {연합뉴스속보} 98.10.9.

146) [韓中との共同宣言內實化を 土屋公獻(論壇)], {朝日新聞} 98.12.4.

147) 이에 대해서는 上杉聰, {脫ゴ, マニズム宣言 - 小林よしのりの[慰安婦]問題}, 東方出版, 1997 참조.

148)'자유주의 사관'에 관해서는 藤岡信勝, {汚辱の近現代史}, 德間書店, 1996 ; 같은 이, {[自虐史觀]の病理}, 文藝春秋社, 1997 참조. 그리고 '자유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으로는 G. 매코맥, [일본 '자유주의사관'의 정체], {창작과 비평} 1997년 겨울호 ; 藤原彰, 森田俊男(편), {近現代史の眞實は何か}, 大月書店, 1996 ; 松島榮一, 城丸章夫(편), {[自由主義史觀}の病理}, 大月書店, 1997 참조.

149) 카또오 노리히로 / 서은혜(옮김),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 - 전후 일본의 해부 - }, 창작과비평사, 1998, pp.9-15. 다만 카토오의 이러한 논리는 침략전쟁에 앞장 선 일본인 사망자들을 "무의미한 사망자로서 무의미한 그대로 깊이 추모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 냄으로써, "타국의 죽은 자들에 대한 사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전후 일본인으로서의 우리"라는 "사죄 주체"를 만들자라는 쪽으로 흘러간다. (위의 책, pp.15-17) 하지만 이 논리에는 중요한 '비틀림'이 숨어 있다. 자국의 '사망자'를 애도하지 못하면 타국의 '사망자'도 애도할 수 없다는 논리는, '사망자'라는 중성적인 표현을 양자 모두에 사용함으로써, 침략자와 희생자라고 하는 양자의 차이를 흐려버리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일본의 과거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이다.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었는가, 부정적인 것이었는가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개의 일본인이 침략자였던 자신의 가족을 애도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혈육을 애도하는 것은 '정의'의 문제이다. 그것은 과거 일본이라는 국가와 그 일부로서의 일본인들이 한 행위에 대한 평가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죽은 자들을 애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애도를 빌미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과거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국, 카토오의 논리는, 그 자신이 지적하는 주체의 불형성이라는 일본 전후의 문제성을, 그 자신 또한 객관화하지 못하고 역으로 그 속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비틀려' 버린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50) [日韓--克服すべき課題とは何か][座談會], {世界} 1998년 10월호, p.210.

151) 위의 글, p.203.

152) 이에 관해서는 金昌祿, [日本에서의 西洋 憲法思想의 受容에 관한 硏究] (서울대학교 법학박사학위논문), 1994.8. 제2장 참조.

153) 이에 관해서는 金昌祿, [植民地 被支配期 法制의 基礎], {법제연구} 8호, 1995, pp.52-58 참조.

154) 일왕의 전쟁책임에 관해서는 千本秀樹, {天皇制の侵略責任と戰後責任}, 靑木書店, 1990 ; 井上淸, {天皇の戰爭責任}, 岩波書店, 1991 참조. 또한 일본의 전쟁책임 일반에 관해서는 家永三郞, {戰爭責任}, 岩波書店, 1985 ; 高橋彦博, {民衆の側の戰爭責任}, 靑木書店, 1989 ; 荒井信一, {戰爭責任論}, 岩波書店, 1995 ; 粟屋憲太郞 외5, {戰爭責任, 戰後責任}, 朝日新聞社, 1994 참조.

155) 이에 관해서는 우선 박원순, {아직도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신문사, 1996 제2장 참조.

156) 이에 관해서는 金昌祿, [{日本國憲法}의 '出現'], {아시아硏究} 제14집, 1996.2. ; 같은 이, [{일본국헌법}의 역사에 대한 법사상사적 고찰], {法史學硏究} 제17호, 1996 참조.

157) 이에 대해서는 1989년의 히로히토 일왕의 사망으로 아키히토 일왕에로 일왕의 대물림이 있은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진 것이 아닌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적어도 침략전쟁이나 강점과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것과, 일왕제 자체가 패전전의 신권일왕으로부터 상징일왕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이 그 논거일 것이다. 하지만, 일왕제의 문제성은 일왕 '개인'이나 일왕과 관련한 구체적인 제도를 뛰어 넘은 체제 내지는 사상과 관련된 것이다. 과거청산과의 관계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일왕을 핵으로 하는 패전 전후의 일본의 체제 내지는 사상의 연속성인 것이다. "쇼오와(昭和)일왕을 비롯한 지금까지의 일왕을 생각하며, , , 일왕의 직무를 다할 것이다"(小林武, [天皇制論の五○年], {法律時報} 66-12, 1994, p.10.)라는 아키히토 일왕의 발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그 연속성의 증거라고 할 것이다.

158) 伊藤成彦, [日韓基本條約を見直す好機だ], {論座} 1998년 11월호, p.20.

159) 天野惠一, [金大中, 江澤民來日と象徵天皇の{皇室外交}], {インパクション} 111, 1998.12.20., p.121.

160) 이종구, [새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단상], {창작과비평} 1999년 봄호, p.336.

161) 정경희, [[한국논단] 일본 [덴노]의 한국방문], {한국일보} 98.9.23.

162) [金大中大統領來日 {天皇訪韓}どう環境整備 W杯出席も視野に], {讀賣新聞} 98.10.8.

163) [金大中韓國大統領 天皇陛下訪韓招請 實現なお不透明 對日感情の行方カギ], {産經新聞} 98.10.8.

164) [日韓首腦會談 {おわび}明記は前代未聞 國學院大日本文化硏究所敎授大原康男氏], {産經新聞} 98.10.9.

165) [[主張]天皇ご訪韓問題 愼重のうえにも愼重期せ], {産經新聞} 98.10.9. ; [[아침햇발] 일본의 과거청산 역량], {한겨레} 98.10.8.

166) [日韓, 過去より未來志向 金大中大統領迎え天皇陛下{お言葉}], {朝日新聞} 98.10.8.

167) 文京洙, 姜惠楨, ぱくいる, [日韓關係の行方], {インパクション} 110, 1998.10.15., p.28.

168) 법적으로만 따지면, 일왕의 방한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김 대통령이나 김 총리의 언급과는 달리 패전 후의 일왕은 단순한 '상징'일 뿐 결코 '국가원수'가 아니다.(, 口陽一, {憲法 I}, 靑林書院, 1998, pp.124-129) 따라서 그 방문이 양국의 관계정상화를 위해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나아가, 같은 이유에서, 2002년 월드컵 개회식에 일왕을 초청하지 않아도, 외교적인 결례가 되는 것도 아니다.

169) 이에 관해서는 アジアに對する日本の戰爭責任を問う民衆法廷準備會, {時效なき戰爭責任 - 裁かられ天皇と日本 - } [增補版], 綠風出版, 1998 참조.

170)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일부 한국 언론의 일왕 문제에 대한 침묵의 증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지난해 한해 동안 {한겨레}에 7편의 원고를 투고하여, 그 중 4편의 원고가 게재되었다. 그런데 게재되지 못한 원고 3편이 모두 일왕의 침략책임 내지는 방한에 관한 것이었다. 독자의 투고를 신문에 게재할 것인가의 여부는 물론 신문사 나름의 기준에 따라 결정하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필자의 원고 중 유독 일왕에 관한 것만이 게재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겨레}가 김 대통령의 방일을 전후해서도 일왕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생각해 볼 때, 일왕 문제가 한국의 언론에 의해서도 일종의 터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71) 일왕의 방한 문제에 관한 한국 언론의 '호의적인' 태도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현재의 아키히토 일왕이 황태자였던 1985년, 나카소네, 전두환 밀월무드를 배경으로 그의 방한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도, 한국의 언론은 "호의적"이었다. "아키히토 황태자는 '과거'와는 관계가 없다"라는 논조가 등장했고, 황태자와 미찌코(美智子) 황태자비의 연애이야기를 특집기사로 다룬 여성지가 있었는가 하면, "일왕가(天皇家)는 백제의 말예(末裔)다"라는 논리로 "황태자의 귀향론" 운운하는 신문까지 있었을 정도이다.[金大中韓國大統領 天皇陛下訪韓招請 實現なお不透明 對日感情の行方カギ], {産經新聞} 98.10.8.

172) [天皇訪韓2000年に 金鍾泌首相が招請], {朝日新聞} 98.11.29.

173) 天野惠一, 위의 글, p.116.

174) [韓國, 金大統領, {近くて近い國に}熱瓣 {W杯成功を}陛下と會見], {朝日新聞} 98.10.8.

175) 고원정, [[세태칼럼 사람아 세상아]], {국민일보} 98.12.5.

176) 박영재,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현대사연구팀(편), 위의 책, pp.15-16.

177) 또한 김 대통령이 위의 국회연설을 하면서, "4백년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년간"이라는 부분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이름을, "한국사람에게는 침략자라 할지라도 일본사람에게는 영웅"이라는 이유로 일부러 지적하지 않은 것도, "일본의 학교교육에서도 요즘에 와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한 마당에 우리가 되려 일본의 침략긍정론자들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는가"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서승, [또다시 확인된 멀고도 험한 한, 일관계], {역사비평} 1998 겨울호, p.17.

178) [[김대통령] 초등교시절 일본인 은사 소개], {한겨레} 98.9.30.

179) [[DJ] 일인은사 만난다, , , 80세 무쿠모토 이사부로씨], {조선일보} 98.10.6.

180) [[今度こそ日韓新時代]金大中大統領來日(上){知日派}大統領アピ―ル], {産經新聞} 98.10.4.

181) [[사설]사죄 이후를 주목한다], {세계일보} 98.10.8.

182) [[今度こそ日韓新時代]金大中大統領來日(上){知日派}大統領アピ―ル], {産經新聞} 98.10.4.

183) 이 글에서는 상세하게 다루지 못하지만, 이러한 역사인식의 불철저함이, 일본에 대한 재일한국, 조선인 문제의 추궁의 불철저함([韓國, 金大統領, {近くて近い國に}熱瓣 {W杯成功を]陛下と會見], {朝日新聞} 98.10.8. ; [日韓が{未來志向}をめざす前に 金光敏(論壇) [大阪]], {朝日新聞} 98.11.3. 참조)과, 한국이 가해자의 입장에 있는 베트남과의 과거청산의 불철저함([金대통령, 베트남 國父 호치민묘 헌화], {동아일보} 98.12.16. ; [[횡설수설]이낙연/韓-베트남 과거사], {동아일보} 98.12.17. 참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84) 이것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김지룡, [일왕이 내 일왕이냐 일본문화 전문가 시각], {중앙일보} 98.9.13. 참조.

185) [日교수들, 정부에 韓.日사료 전면공개요구 성명], {연합뉴스속보} 98.9.10.

186) [<日교수들 韓.日관계 사료 공개요구 성명전문>], {연합뉴스속보} 98.9.10.

187)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위의 연맹은 의원들간의 "전쟁관의 미묘한 차이" 때문에 "회장 등 임원은 정하지" 못하는 험난한 출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일본에서의 역사적 청산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고 할 것이다. [戰爭眞相究明,立法へ 超黨派で議員連盟設立], {朝日新聞} 98.9.29. ; [{戰爭の究明}へ超黨派議連 ともかく發進,會長不在], {朝日新聞} 98.10.1.

188) [책머리에], {역사비평} 1998 겨울호, p.14 ; [[시론]윤덕민/21세기의 韓日관계], {동아일보} 98.10.11.

189) 최장집, [[중앙시평] 새로운 한일관계의 조건], {중앙일보} 98.9.13.도 참조.

190) [<'미래'로 가는 韓-日>(4·끝) 金대통령 訪日서 얻은 것과 과제], {문화일보} 98.10.10.

191) [[내가 보기엔 - 히라이 히사시] 한, 일 '해묵은 앙금' 이젠 풀자], {국민일보} 98.10.8.

192) [[류근일 칼럼] 한-일 정상회담 접근법], {조선일보} 98.9.27.

193) [정대협, 대통령에 '위안부'문제 관련 면담요청], {연합뉴스속보} 98.8.23. ; [韓.日단체들, '위안부'문제등 해결촉구 연대시위], {연합뉴스속보} 98.8.31. ; ["金대통령, 日에 '위안부' 배상 촉구해야"], {연합뉴스속보} 98.9.15. ; [日 시민단체, 韓.日 정상에 전후보상 조기해결 촉구], {연합뉴스속보} 98.9.18. ; [韓.日 시베리아 억류자 단체 30일 서울서 첫 합동회의], {연합뉴스속보} 98.9.27. ; ["정부는 日에 '위안부'문제 배상 요구하라"], {연합뉴스속보} 98.9.30. ; [[歷史淸算]で市民らが注文 金大中, 韓國大統領來日], {朝日新聞} 98.10.7.

194) [殘る歷史認識の深い溝 [日韓共同宣言]と今後 海野福壽], {朝日新聞} 98.10.19.

195) [日韓共同聲明の{おわび} 自民總務會に反發の聲], {讀賣新聞} 98.10.8.

196) [慰安婦問題再び火種, 女性基金の{償い金} 來日控え金大中韓國大統領が異論], {讀賣新聞} 98.9.16. ; [日韓首腦會談 {過去の決別}相互努力 {慰安婦}では隔たり], {産經新聞} 98.10.9.

197) 坂元茂樹, [日韓保護條約の效力--强制による條約の觀點から], {法學論集}(關西大學) 제44권 4합병호, 1995.1., p.375.

198) [韓國の元慰安婦への支援金支給を歡迎 日本政府(永田町霞が關)], {朝日新聞} 98.4.22. ; [韓國が{支援金}を給付 元從軍慰安婦への賠償, 重い課題], {朝日新聞} 98.5.29.

199) [慰安婦問題再び火種, 女性基金の{償い金} 來日控え金大中韓國大統領が異論], {讀賣新聞} 98.9.16.

200) 이에 관해서는 이상찬, [1900년대 초 일본과 맺은 조약들은 유효한가],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현대사연구팀(편), 위의 책 참조.

201) 이태진(편저),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 "보호조약"에서 "병합조약"까지 - }, 까치, 1995, pp.49-62 ; 山, 健太郞, {日韓倂合小史}, 岩波書店, 1966, pp.174-180 참조.

202) 1995년 10월 13일 중의원예산위원회에서의 하야시 아키라(林暘) 외무성조약국장의 답변, 伊藤成彦, 위의 글, p.18에서 재인용.

203) 坂元茂樹, [舊條約問題の落とし穴に陷ってはならない], {世界} 1998년 9월호, p.198.

204) 伊藤成彦, 위의 글, pp.19-20. 당시의 국제법상 강박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은, '유효론'을 전개하고 있는 사카모토 교수가 자신의 다른 글에서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관해서는 坂元茂樹, [日韓保護條約の效力--强制による條約の觀點から] 참조.

205) 金明基 외5인, [挺身隊隊員의 人權侵害에 대한 韓日間의 法的 諸問題에 관한 硏究], 大韓國際法學會, {國際法學會論叢} 37-2, 1992.12., pp.23-25. 또한 權奇薰, [1904年-1910年 韓日間의 諸條約의 效力에 관한 硏究]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8.도 참조.

206) 프랑시스 레이 / 최종고, 남효순 역,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 이태진(편저), 위의 책, pp.308-309.

207) 도츠카 에쓰로 / 김익한 역, ["을사보호조약"의 불법성과 일본 정부의 책임], 이태진(편저), 위의 책, pp.335-336.

208) 伊藤成彦, 위의 글, p.21.

209) [기본조약] 및 [협정]의 문제점에 관해서는, 이원덕, [1965년 한일조약의 문제점과 개정방향],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현대사연구팀(편), 위의 책 ; 같은 이,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 白忠鉉, [國際法으로 본 1900년대 韓日條約들의 문제점], {韓國史市民講座} 제19집, 一潮閣, 1996 ; 裵載湜 외2, [韓, 日間의 法的 諸問題 -- 1965年 諸條約의 시행상의 문제점 --], {法學} (서울대학교) 35-2, 1994.10. 참조.

210) 한일회담에 관해 한국측 입장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으로는 大韓民國政府, {韓日會談白書}, 大韓民國政府, 1965 ; 민족문제연구소,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아세아문화사, 1995 참조. 그리고 일본측 입장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으로는 高崎宗司, 위의 책 참조.

211) 國際法律家委員會(ICJ) 저 / 自由人權協會(JCLU), 日本の戰爭責任資料センタ- 역, {國際法からみた[從軍慰安婦]問題} (원제목 Comfort Women : an unfinished ordeal), 明石書店, 1995, pp.184-185.

212) 이에 관해서는 김창록, ['위안부'문제에 관한 일본의 법적 책임], 한국해양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영남국제법학회, {정신대 문제를 통해 본 일본의 전쟁책임}, 1998, pp.39-40 참조.

213) 吉見義明, {從軍慰安婦}, 岩波書店, 1995, p.6.

214) 伊藤成彦, 위의 글, p.22 ; 天野惠一, [戰爭被害, 加害と天皇制], {インパクション} 110, 1998.10.15., p.88 ; 天野惠一, [金大中, 江澤民來日と象徵天皇の{皇室外交}], p.117 ; [[정책] 한-일관계 재정립촉구 교수 100명 정책제안], {한겨레} 98.8.30.

215) [[DJ,金대사 접견]『日에 단호 대처,감정대응 자제}], {동아일보} 98.1.26.

216) 다만 이 문제에 관한 한국 정부, 특히 김대중 정부의 입장은 반드시 명확한 것은 아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지난해 4월의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지원금 지급 결정과 관련하여, 한국 정부가 애당초 그 지급 후에는 정부 차원에서는 "더 이상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배상을 일본에 요구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었고, 시민단체 등의 반발에 부딪혀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이라는 부분을 철회한 후에도, 일본측에는 "개인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우리측의 진의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은 위의 방침과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일본 정부에게 배상책임이 있음에도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본의 범죄에 대해 한국 국민의 세금으로 배상하겠다는 것이 되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한국 정부의 명확한 입장 표명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217) 서승, 위의 글, pp.18-19 ; 天野惠一, [金大中,江澤民來日と象徵天皇の{皇室外交}], p.117.

218) [[김대통령 방일] '오와비'표현 해석 이견], {경향신문} 98.10.9. ; [<金대통령 訪日>'공동선언' 뒷얘기], {문화일보} 98.10.9.

219) [[김대통령방일] 알쏭달쏭 '오와비' 신경전], {한겨레} 98.10.8.

220) [歷史認識問題に區切り {謝罪}初の文書化へ 金大中, 韓國大統領7日來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