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동방 대제국  


 

   一. 太古의 밝음이 東方에 비치고
 

우주에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지구가 있어 만물을 관장하는 조물주께서 인간이 거기서 살 수 있는 지혜를 주셨다. 우리 東方에서 고대에 이것을 하늘이 내리신 환의 이치라 하여 환을 밝고 넓은 전일이라 하였다. 따라서 인간이 살아가는 길은 만물의 영장으로 밝고 어질고 자비로워야 함이라 머나먼 그 옛날에 하나님이 동방에 환인의 나라를 점지하셨다.

긴 역사의 흐름 속에 인간은 흩어지고 갈라지고 하여 우랄 산맥을 경계로 동서로 나뉘어 생활 터전을 마련하였다. 동방의 환인 왕국의 말기에 인구가 많아짐에 천하 만민이 분쟁을 일으켜 살기가 어려워지고 질서가 마비되니 하나님은 이를 불쌍히 여겨 인간사회에 홍익인간의 제세구민(사람을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도록 세상을 구하는)할 사자를 세상에 보내시니 이가 환웅 천왕이라 환웅이 천제위 명을 받아 태백산 단목하에 하강하시어 백성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추대하니 환웅은 삼천의 무리를 이끌고 단목하에 단을 모아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고 천왕 위에 등극하니 왕은 곧 제사장이며 옹립한 각부 추장들은 사제들이다. 고대 제정일치 사상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한웅 천왕은 만백성에게 조서를 내려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계시를 너희들에게 이르나니 이제 백성들이 질서를 지키고 편하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신시를 열어 구휼할 것이니 오훈으로 국시를 삼아 널리 알리나니 부지런히 살펴 행하여라. 그에 이르기를 ,

 

일. 성신불위하고(성실하고 믿음을 두터이 하여 속이지 말 것이며),,

이. 경군 불퇴하며(서로 공경하고 근면하여 게으르지 말 것이고),,

삼. 효순 불위하고(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함에 틀림이 없게 할 것이다.),,

사. 廉義不淫하여(염치를 중히 하여 의리를 지키고 음난행위를 하지 말 것이며),,

오. 겸화 부쟁하고(항상 겸손하여 화합하여 싸우지 말고) 「단군 세기」

 

덕을 쌓아 풍속을 순화하고 각부 추장은 솔선 수범하여 백성을 교화하라' 하였다. 이어 국호를 배달이라 하고 오계(다섯 가지 계율)를 제정 공포하여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케하고 산업을 진흥하여 상고 사회의 풍속을 순화하는데 힘을 기울여 신시가 융성하고 평화하여 스스로 자족하니 구환의 백성이 화합을 이루고 기뻐하였다. 환웅 천왕 재위 94년에 장수하고 허다한 업적을 남겨 원시사회에 개혁의 기틀을 마련해 놓고 승천하셨다. 이로부터 14대 환웅 치우 천왕이 등극하셨다. 일명 자우지환웅이라고도 한다. 치우는 천성이 활달 영매하고 지략과 재능이 출중하여 따를 자가 없었다. 소시부터 전왕을 따라 병란이 일어나는 전쟁터에 종군하여 종횡 무진한 용맹과 기발한 용병술을 구사하여 백전백승하니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일찍이 천하 통일의 대지를 품고 천문과 지리를 깊이 연구하고 천리를 통달하여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부르는 재주를 익혀 만민이 우러러보는 천하제일의 천왕이 였다. 청구에 도읍을 정하고(청구는 중원 하북부근으로 추측) 「君子曰北朝陽之谷一靑丘國在其北山海經」

중원 경영에 나섰다. 이때 중원에는 수십개 민족이 각기 한 부를 이루어 분립하여 서로 싸우고 중원의 좋은 땅을 서로 차지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동북에는 강대한 동이족(조선족)이 있고, 북에는 몽고족(동이족에서 분리)이 있고, 서북에는 흉노와 돌궐 진 상은족이 있고, 서남에는 한족과 남만 팔개족이 있고 여타 소수 민족이 잡거하였다. 치우천왕은 군량을 쌓고 무기를 만들고 군사를 조련하여 부지런히 전쟁 준비를 갖추었다. 이때 처음으로 동이 주조되어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원 진압에 출사하니 이때에 중원에는 황제 헌원씨가 탁록에 도읍하고 중원 최강을 뽐내고 북쪽을 대요가 관장하고, 동에는 창힐이 관장하고, 서쪽은 소호가 웅거 하야 백성을 잔휼하였다. 치우천왕은 구환의 군사를 징발하여 사로로 나누어 진격할 새 제1군은 멀리 적진 깊숙이 들어가 소호 왕의 도읍지 진류성을 포위하고, 제2군은 대요 왕을 공격하며 진류성을 포위한 제1군은 싸움을 돋구지 말고 다른 곳과의 교통을 막으라 하고 천왕은 친히 제4군을 몰고 탁녹을 향하여 달려가니 연도의 백성들에게 추호도 해롭게 하지 말 것을 엄명하고 위풍 담당하여 근접 추장들은 치우천왕의 용맹 지략이 귀신같다는 것을 지난날의 싸움에서 익히 아는지라 가는 곳마다 관문을 열고 환영하며 감히 막는 자가 없었다. 치우는 탁녹에 접근하여 기마 정병 3천을 선봉 삼아 비호같이 헌원의 방위벽을 분쇄하고 닥치는 대로 섬멸하니 헌원은 일진을 패하고 중군을 수습하여 치우와 대전할 새 미처 진용을 차릴 여가도 없이 치우군이 좌충우돌하며 맹공격을 가하니 헌원의 전군이 지리멸렬하여 반격할 능력을 잃고 헌원은 수하 수백기 이끌고 멀리 달아났다. 치우는 일지군을 이끌고 적군을 추격하여도 간 곳을 찾을 수가 없어 돌아왔다.

 

치우천왕은 양도를 염려하여 오래 머무르지 아니하고 전군에 회군 명령을 내려 청구로 반사하니 각 군이 모두 합류하여 동반하였다. 한편 헌원은 치우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탁녹으로 돌아와 패전의 뒷수습을 한 후 각지 추장들로 하여금 집결할 수 있도록 전쟁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성곽을 수리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대비하니 그 위세를 회복하였다. 치우천왕은 헌원이 탁녹에 돌아와서 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는 간자의 첩보를 받고 다시 출사 준비를 하였다. 이번에는 기필코 헌원을 멸할 각오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삼군을 호령하여 탁녹으로 진격할 새 치우천왕은 짐승의 가죽으로 전포를 만들어 입고 동으로 단조한 갑옷과 투구를 쓰고 (獸身人語銅頭鐵額長沙造五丘丈刀載太芎 史馬遷 史記) 대궁을 메고 오구 장도를 휘두르니 연도 관문의 수비군이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도주하니 이르는 곳마다 적군의 방어진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탁녹을 우회하여 멀리 요로에 매복하여 헌원의 퇴로를 차단하고 강갈과 대요에게도 각기 일지군을 보내여 공격을 가하고 탁녹을 총공격할 계책을 짜고 있는데 치우천왕의 아우 한 장수가 일지군을 이끌고 공격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전공을 세우고자 돌진하였다가 헌원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전사하였다.

 

이 사건을 가지고 후세 한나라 사가 중에 헌원이 치우를 잡아 죽였다고 산해경에 추기하였다. 그리고 동화를 꾸며 치우가 풍우를 불러일으켜 공격함으로 헌원이 비를 그치게 하는 여신을 불러 풍우를 그치게 하고 잡아죽였다 하였다. 치우천왕은 항상 전쟁 선두에서 용맹하게 싸워 공을 세우는 동생을 잃고 진중에 눈물을 참고 총공격에 들어갔다. 양군이 고각을 울리며 백병전이 벌어져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치우는 선두에서 대노를 휘둘러 닥치는 곳에는 적의 머리가 추풍낙엽같이 떨어지니 적이 두려워 쳐다보지 못하고 흩어지니 질풍같이 헌원의 본진으로 돌진하니 만군 지중에 탁월한 무예와 용맹을 당할 자 없는지라 헌원은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전세가 기우니 본거지를 버리고 패잔군을 재촉하여 대요에게 의지코자 찾아갔으나 대요 또한 패하여 치우에게 항복하였고 다시 창힐에게로 가니 그도 이미 항복하였는지라 소호는 포위되어 있고 하여 또 다시 멀리 달아나려고 가다가 복병이 난데없이 돌출하여 잡히고 말았다.

 

이리하여 탁녹이 함몰하니 탁녹명임에는 시체가 산과 같이 쌓이고 피흘려 강이 되었다. 후세 사가 관중은 이 광경을 '所課天下之君項敗一怒伏屍編野是也'라 비유하였다. 한나라 시대 사마천이 말하기를 역대의 제후들이 치우가 능히 헌원을 정벌하는 천하 영웅을 흠모하였다. 또 말하기를 치우의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던 옛날에 천자로 불렀다. 치우천왕은 평생소원이 중원에 만백성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군악을 진정하고 고대 신시와 같은 이상 사회를 이루고자 헌신하였다. 그는 일찍이 천리를 깨닫고 천기를 살피고 環宇의 신비를 규명한 신인이라 하여 후세에 다만 천제의 아들이 이 세상에 낫다 하였다.

 

삼신기에 이르기를 치우는 균화천에 있고 왕검은 안덕천에 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삼신설에 이르기를 삼신은 천일이요, 지일이요, 태일이니, 일은 삼으로 작용한다 했으니(표훈천사) 치우는 태일이 주관하는 치화의 임무를 수행하셨다. 고대 중원에서 오래도록 무신으로 받들어서 태일 주체로 추앙하였다. 후세에 남긴 병법으로는 치우이편 탱리병법일편 천일병법 삼십오편 천일음도 이십사편권이 있다. 이것은 후일에 중원의 춘추 전국 시절 강태공의 통치 군사 지침서가 되고 오나라 부차왕을 도와 강한 월나라를 정복한 손자 병법 기초 자료가 되고 후한의 유비를 도와 천하를 삼분한 제갈량의 팔진법이 모두 여기서 전수된 것이라 한다. 치우천왕의 삼신 사상은 후세 중원에 널리 퍼져 삼신 일체 사상의 태일 제사는 제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팔신장은 강태공 이래의 행사라 하여 제나라가 나라에 제사를 하였다고 하며 언제 시작하여 언제 그치는지 알 수 없다 하였고 팔신은

 

일. 왈 천주이시니 하늘에 제사하고,

이. 왈 지주이시니 태산에 제사하고,

삼. 왈 병주이시니 치우를 제사하며 치우는 동녘 평육 감향이니 제나라의 서쪽 경계 너머이고,
  사. 왈 음주이시니 삼산에 제사하고,
  오. 왈 양주이시니 지부에서 제사하고,
  육. 왈 월주이시니 내산에서 제사하고 모두 제나라 북쪽 발해이고(발해는 고대 조선족의 내해이고 발은 고어로 물이다.),
  칠. 왈 일주이니 성산에서 제사하고 성산은 바다로 들어가는 제나라의 동북쪽이며 해뜨는 곳이다.
  팔. 왈 사기주이시니 낭야에서 제사하고 제나라 동쪽이며 서해가 시작되는 곳이다.

 

(太一之祀典始於齊以天祭也其祀絶莫知起始八神一曰天主祠天齊二曰地主祠泰山三曰兵主祠蚩尤在東平陸監鄕齊之西境也四曰陰主祠三山五曰陽主祠芝部六曰月主祠之萊山皆在齊北?渤海七曰日主祠成山成山斗入海最居在東北隅以迎日出云八曰四時主祠琅邪在齊東方盖歲之歲之所始{秦封禪書})라고 하였다. 치우천왕은 헌원과의 십년 전쟁에서 칠십삼회 대전에서 백전백승하니 하늘에서 나타난 천제의 아들이라 하여 천하 만민이 경복하고 수 천년을 무신으로 추존된 치우천왕은 중원의 미개한 여러 야만 종족들의 분쟁을 종식시키고 하늘을 존경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신앙 정신을 일깨워 고대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BC 2490년 인류 사회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파란 많은 생을 수도 청구에서 생을 마감하시니 비단 동이족뿐만 아니라 대륙의 모든 종족 민초가 슬퍼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능은 산동성 동평군 예장현 궐나성중에 있으며 능의 높이는 칠십 척에 이른다고 하였다. 진나라(秦)와 한나라(漢)에 이르도록 시월이면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며 반드시 붉은 기운이 나와서 치우의 깃발이 나부끼듯하여 그 영혼이 여상스럽게 천년을 지나도 사라지지 아니 하야 헌원도 그의 도읍지에 영혼이 머물음에 영원히 따랐다고 한다.

 

(其陵在山山東東平郡裔張縣闕?城中高七十尺秦漢之際往民猶韋以十月祭之必有靑氣出如絳謂之蚩尤旗其靈魂雄魄自與凡人향異歷千歲而猶不泯者服軒轅以是索然楡岡亦從以永隊矣 「鑑易」 {漢書地理志}) 또 이르되 치우천왕의 위엄이 떨쳐 후세에도 이어서 수산 통로(중원에서 배달 나라로 조공하는 길) 지방은 항상 두려워하였다.

강태공서에 치우천왕의 활약상을 동화(童話)에 비유하여 왜곡한 후세 사가의 행위는 심한 짓이라 하였다. 치우천왕은 고대 조선 중원에서 무위와 지용과 인덕이 세상을 덮어 중원 풍패 지방에는 치우천왕의 사당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산동성 편현 서안에 있는 구성의 서북 물가에 있다고 하였다. (蚩尤祠在西北濟上有埇城今山東平縣西南 {漢書地理志})

 

시인 소동파가 이곳을 지나다가 쓴 기행문에 고대의 퇴락한 사당을 보고 감개무량하여 읊은 시에 '오랜 세월 퇴락한 환웅 사당은 새들이 만나고 머무르는 집일새'(樵?己入黃熊廟白鵲猶朝禹會林)라 하였고 춘추좌전에 이 사당의 신주는 동해 사람으로 나랏말이 같지 아니한데 그러나 같이 살았다고 하였다.(東海人以國語不同也兼存) 후세에 이곳에 살던 동족은 난리를 피하여 요동으로 피하였거나 그 나라 사람으로 동화하였으니 누가 보존하고 제사하랴!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모든 유적들도 {한서 지리지}에도 '단지 황제와 치우가 탁녹에서 싸웠다'라고 했을 뿐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아니하였다.(黃帝蚩尤戰於?鹿)

 

   二. 東方大帝國의 막이 오르고
 

 단군왕검(檀君王儉)이 대통을 이으니 고대 조선의 중시조가 된다. 그의 어머니는 大東方의 거족(巨族)인 웅씨의 딸이며, BC 2370년 5월 2일 왕검 단군이 탄생하셨다. 왕검은 성장함에 천성이 고매하고 지모가 비범하여 세상에서 신인으로 추앙하니 웅씨 왕국의 비왕으로 있었다. 배달 국에서 5가의 우두머리가 되어 800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단목하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할 때 사제(司祭)들의 축복을 받으며 단상에 올라 천제의 명을 받들어 천왕 지위에 오르니 백성들이 신인이 하강하였다고 해서 우러러보았다.

천왕은 九規를 부활하고 아사달(哈乙濱)에 천도하고 국명을 朝鮮이라 하였다. 기원전 위서(魏書)에 기록하기를 지난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사람이 아사달에 건국해서 나라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乃往二千載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國號朝鮮) 이에 九桓의 왕후 추장이 배석하여 東夷 九種(東有歲貊諸國西有幽燕契丹諸國比有肅愼靺鞨諸國自此元來自爲東方別種夷 {通鑑})이 만백성에게 훈련 조서를 내리면서 말하기를 "天範은 오직 하나이니 너희가 마음을 精齊하면 그것이 곧 조천이다.

 

민심은 오직 한 가지니 모름지기 성심을 다잡아 인심에 미치면 감화하여 하느님의 뜻에 합치고 온 누리에 작용한다. 너희가 세상에 사는 것은 어버이가 있기 때문이요. 어버이는 곧 하늘의 뜻에 따라 세상에서 너희를 낳으니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이 곧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것이 충효인 것이다. 너희가 도를 체득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벗어날 것이다. 짐승도 짝이 있고 헌 신짝도 짝이 있다. 너희 남녀는 화목하고 원망하지 말며 질투하지 말며 음란하지 말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헐뜯지 말며 다투지 말고 싸우지 말라. 그리하면 집안과 나라가 흥성할 것이다. 소와 말을 보아라. 오히려 물을 나눠 먹는다. 서로 빼앗지 않고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면 나라는 융성할 것이다. 호랑이를 보아라. 강하지만 공손하지 못하여 천한 것이 되었다. 너희는 서로를 찔러 죽이지 말고 사람을 상하지 말며 제휼 하라.

 

너희가 규칙을 흩으리면 신의 도움을 영원히 얻지 못하여 몸과 집이 망할 것이다. 너희가 논에 불을 놓으면 벼는 남김없이 말라죽을 것이며 신은 노할 것이다. 너희가 그 향기를 두껍게 쌓더라도 반드시 셀 것이다. 떳떳한 성품을 가져서 사악함을 품지 말며 악을 숨기지 말며 화를 감추지 말며 마음은 하늘을 길이 공경하며 백성들을 친히 하라. 너희는 복이 무궁할 것이다. 오가의 무리는 흥복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檀君世記}) 帝는 신료들을 모아 각자 소임을 맡기니 영의 대신 팽우(彭虞)에게는 토지를 개간하여 백성의 양식을 늘리고 궁궐을 짓게 하였다. 대신 거지(巨智)는 문자를 정돈 정제하고, 대신 기성(箕省)은 의약을 개발하여 질병을 다스리게 하고, 대신 나을(那乙)은 판적을 관장하였다.

 

그리고 병사 희전(羲典)은 화복 운기를 점치고 병마를 관장하며 군량을 비축시키고, 구한 열국의 안보를 충실히 하였다. 帝는 5家 64제후를 통괄하는 통치 기구를 삼분하여 三汗을 설치하니(後書에 이르기를 番汗 辰汗 馬汗 或은 신한 말한 불한이라 하고 後에 다시 番朝鮮 莫朝鮮 眞朝鮮 等으로 쓴 것이다.) 번한의 왕검성은 험독(險瀆) 산동성에 정하고 우순과 국경을 감정하고 유주와 영주에 방위군을 주둔케하고 기주를 12분하여 순으로 하여금 관장케하고 그 동쪽은 조선국 번한에 속하였다. 후세 한인(漢人)이 말하는 흉노와 서로 접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한 것은 역사 기록의 오착이다. 무이웅씨(武夷熊氏) 말하기를 서주 기사 諸州는 기주 동편 영주 예주(山東 河北) 지방과 모두 한 울타리 안이고 동방의 좋은 땅을 형성하여 서주는 곧 노나라와 경계하여 희해와 연하였고 동이(조선)에 속한 두 고을인 즉 곡부기사의 예의와 문학을 숭상하는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漢人所謂斷匈奴右臂者以其不與西成相接也史書有錯武夷雄氏曰徐池沂朝諸水在其前冀東與?豫之地皆不雄引在懷抱排楫之內亦東方一形勝也徐卽魯境地連淮海東夷其俗有二曲阜沂朝則禮儀文雅之邦西 {書傳})

 

이어서 제는 동무(東武)와 도라(道羅)를 번한(番汗)에 봉하여 기주와 동북 여러 나라와 연 유 거란 제국을 양분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이것은 동북쪽을 영유한 것이다. 따라서 우순(虞舜)은 중원 요지의 ¼을 영유하였다.(冀洲帝都之地三面距河充河?之西河초之東豫河之北周禮職方河內曰冀洲是也天下四分之一舜分爲 {書傳}) 이와 같이 구주를 12주로 나누어(기주 동북을 조선에 넘김) 어느 세월에 다시 회복할 것인가(이것을 사관들은 虞舜의 사죄라고 비난함)라고 하였는데, 일변 또 그것은 虞가 치수 사업을 한 후에 그 차례가 사죄의 앞에 있는 순 소행 대사라고 사관이 잘못 기록한 처음부터 선후를 헤아리지 못하고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 (是爲十二河盖河甚久不知其自何時復合爲九也吳氏曰比一節在禹治水之後其次序不當在四罪之先盖史官泛記舜所行之大事初不計先後之敍也) 이와 같이 단군과 우순과의 국경 감정에 관해 후세 사관들의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시대에 동이 대제국의 단군 천왕 명을 항거할 자 누구이랴. 약소한 우순으로는 최선을 다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 옛날에는 요순과 몽고도 동이족으로 그 영지 또한 대단군제국 영토에 포함할 것이나 후세 변화를 참고하여 분리 기록한다.(도면 참조)

 

진한은 왕검성을 아사달에 정하고 서북은 몽고와 접하고 북은 환천리하고 동은 연해주에 이르고 남은 마한과 송화강을 경계하고 마한은 서는 요하를 경계로 번한과 접하고 남은 대마도에 이른다. 마한은 왕검성을(심양 개원 지역으로 추정됨) 정하니 대단군의 조선국 영토는 동은 연해주에서 서는 황하 북은 몽고 시베리아에 닿는 당시 아세아 유일의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구환의 64제후국을 3 5로 분활 통치한 것은 당시의 교통 수단으로는 말과 호랑이(山海經海外東京에 海外 東京이란 河北省一帶에 古朝鮮 地域을 말함. 君子國在其北衣冠帶劍食獸使二大虎在旁其人好 라고 하여 큰 호랑이를 방에 두었다고 하니 호랑이를 길들여 타고 다닌 것으로 여겨짐)가 원거리 교통 수단이고 통치상 편의 수단 이였다. 이때에 중국에서는 팔년대한 구년 제수(八年大旱 九年 涕水)의 저 유명한 대 재난으로 대륙이 황폐화되었다.

 

팔년간의 가뭄으로 백성의 굶어 죽는 자 부지기수인데 다시 구년간의 홍수로 국토가 황폐화하여 사람이 살아남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堯는 舜에게 舜은 湯에게 선위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원의 二代江(楊子江 黃河江)이 넘쳐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나라안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니 비참한 광경은 헤아릴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탕왕의 온갖 노력에도 미숙한 기술로는 어찌할 수 없어 왕은 형산(衡山)에 올라가 백마를 잡아 하늘에 제사하고 산하 휴식처에서 잠자고 있었다. 꿈속에서 단군의 사자라는 사람이 나타나 스스로 창수사자(滄水使者)라하며 三日 祭戒하고 도산으로 가 보아라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 때에 단군 대제께서도 중원의 재난으로 백성들의 고통스러워함을 걱정해서 백관을 소집하여 대책을 의논하였다. 태자 부루가 아뢰기를 "소자를 탕우에게 보내 주시면 그들을 깨우쳐 오행 치수법을 가르쳐 만백성의 고통을 덜겠사옵니다"하였다.

 

제가 이르기를, "너는 오행 치수 법을 익혀 널리 국토 관리에 효과를 충분히 보았으니 그 일을 감당할 것이다. 이제 서둘러 떠나도록 하라"하셨다. 부루태자가 탕우의 도산에 도착하였다. 이에 우왕이 사우(似禹)를 보내 맞이하니 부루태자는 오행 치수의 기법과 도량형계(度量衡計)의 수리를 강의하니 탕왕이 꿈을 깨고 일어나 도산에 당도하여 태자와 인사를 나눈 후 태자가 오행 치수 법을 강하고 비책을 전하였다. 월나라 고전(春秋)에도 '팔년 대한이 지난 후 구년제수'라는 천재가 닥쳐 왕은 치수에 골몰하여 자기집 대문 앞을 지나도 5년간을 들어가지 못하고 물난리를 겪는 백성들의 구호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3일 목욕 재계하고 백마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이날 꿈에 주신(朝鮮人을 洲愼肅愼등으로 呼稱하였다.)이 나타나, "나는 창해 사절(滄海 使節)이다 도산에 오면 신서를 주겠노라"하여 일어나 도산에 가서 금간옥첩 신서를 받아 치수에 성공하고 오랫토록 그 은혜를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짖고 제사를 올렸다고 했다. 그러나 사마천 사기에는 이러한 중대한 역사를 기재하지 아니하였으니 한무왕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웠음이랴!

 

부루태자는 돌아가 천왕에게 비참한 상황을 고하였다. 물론 천왕의 직할 지역인 요하와 화북 산동도 수해는 무참하였으나 중원의 중심지인 양자강 황하강 일대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 지역 대 수해는 오래 계속되다가 후세 수나라에 이르러 대규모 운하 등 군사 목적 수리 공사로 약간 개선되었다. 단군 천왕께서는 지구상에 제일 큰 대제국을 건설하여 홍익인간의 교화를 베푸시고 장수를 누리시고 遼河邊 別宮에서 각부 사제와 태자부루를 탑전에 불러 홍익인간의 교리를 세상에 펴는데 소홀히 하지 말고 게으리지 말라 경계하시고 또 삼신(태일 신인즉 삼위일체라 하여 우주를 창조하신 유일신은 곧 하느님이라는 뜻)을 섬기는데 정성으로 다하라 하시고 귀천 하시니 천왕의 붕어 하심이 세상에 전해지자 만백성이 슬퍼 통곡하였다. 때는 BC2241년 3월이었다. 대통을 이은 부루천왕을 평생을 통하여 홍익인간의 교화에 전념하고 삼신을 섬기는데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부루천왕은 백성을 구휼하는데 전념하는 군왕이었다.

 

천왕 또한 장수하시고 붕어 하시니 백성들이 슬퍼하여 단을 만들어 곡식을 올려놓고 소원을 빌었다. 이것을 후세에 부루단지 업신 삼신 등으로 섬겨 사람의 생명도 삼신이 점지 하사 세상에 태어난다고 믿어 왔다. 이러한 삼신 사상을 후세에 구세주로 일컬어지는 여러 성인들의 구세 철학 교리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식민지 통치로 일제가 민족 사상의 국교 말살 정책으로 그들의 국교인 아마데라 스오미가미 종교를 강요하여 말살되었다. 이전에는 전국 가가호호 빠짐없이 부루단지 또는 삼신 단지를 모시고 예수 교도나 불교신도 가정에도 여일하였다. 『한단고기』에 遼河左岸에 관경비가 있다 하였다.

 

*일제(日帝)가 파괴한 국사당

日本은 南山에 있는 단군 성조를 모시는 국사 당을 철폐하고 그 자리에 日本의 假想神 아마태라스오미고도 神宮을 세워 조선 신궁이라 名하고 조선인에게 改宗과 참배를 강요하고 조선인의 三神敎 天帝 신앙을 말살하였다. 그리고 日本국의 역사를 조선보다 오랜 것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는 단군 성조의 역사를 실상이 아닌 神話라고 조선인에게 교육하기 위하여 조선 총독부 주관으로 조선 역사 교과서를 날조하여 조선인에게 교육 주입시켰다. 그 교과서 편찬에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조선인 학자도 다수 참여시켰는데 총독부 통감이 위원장이 되어 그명령으로 임의로 만들어졌다. 거기에 참여한 조선인 학자의 한사람 이였던 최남선이 훗일 단군을 실상이 아닌 신화라 한 것은 마땅치 않다는 한마디 말을 했다고 전해질 뿐 아무도 이의를 감히 달지 못하였다고 한다. 태고사에 관한 글을 마감함에 앞서 첨언 하는 바는, 좋으나 싫으나 상고사를 참고함에는 중국사를 살펴야 하는데 중원을 무대로 한 치우천왕의 동이족 활약상에서 대단군 조선 제국에 이르는 사료가 너무나 빈약하고 치우에서 하은으로 이어지는 치적도 사기에서 끊어 버리고 공자께서 요전을 시작으로 요순 우탕 문무 주공에 이르는 중국의 정통사를 기록하니 태고사를 연출할 수 없다.

 

공자께서 요전 이상의 역사를 끊는 것에 대하여 당시 사가들의 비난이 있어 상고 기록이 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끊어 버린 것은 부당하다는 항의에 대하여 공자는 역사를 뺀 것은 그 기록을 잃어버린 것이다라고 간단히 회피하였다. (武夷熊氏曰孔子定書斷自唐禹以下堯典是第一編書以前更有文字孔子曰吾猶及史之厥文也今亡矣 『書傳』) 공자가 끊어 버린 요전 이전의 기록에 조선족에 관한 것을 대략 살펴보면 고대 사학자 應邵 가로되 치우는 옛날에 천자다.(應邵曰蚩尤古天子)

공자는 삼조기에 가로되 치우는 서인이며 빈곤하였는지라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침벌함에 치우가 가장 사나웠으니 천자로 안 섬겼다 라고 상반되게 말하였다. (孔子三朝記曰蚩尤庶人之貧者諸候相侵伐蚩尤最爲暴則蚩尤非爲天子也 『書傳』) 또 제나라 관자 가로되 치우는 여산의 금이라 (위대하다는 뜻)오병을 일으켰으니 분명 서인은 아니다. 치우가 죽은 후 천하가 다시 소란해지고 황제는 드디어 치우의 형상을 만들어 통치에 앞세우니 천하가 두려워하고 치우가 죽지 않았다 하여 팔방 만방이 복종하였다. 공안국이 가로되 九黎 즉 천하가 인군이라 하였다. (管子曰蚩尤受盧山之金而作五兵明非庶人…中略…蚩尤沒後天下復擾亂黃帝遂畵蚩尤形像以爲天下天下咸謂蚩尤不死八方萬邦皆爲?服孔安國曰九黎君?蚩尤是也『三朝記大載記』)

 

공자는 무왕도 옳지 못한 인군으로 치부하였는 즉 치우 천왕의 무력 통일도 옳지 못 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공자 가로되 동에 구종이가 있고 남예 팔개종의 만족이 있고 서에 육종의 융족이 있고 북에는 오종의 적족이 있어 사해의 큰 왕이라고 이른다 하였다. (孔子曰東有九夷南有八蠻西有六戎北有五狄謂之四海之大夫君『漢書』禮樂志) 이러한 단편적 기록뿐 치우에서 단군으로 이어지는 태고 역사는 영원히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그것은 당왕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 할 적에 국내성에 있는 고구려 태조 사당과 역사 서고를 불태워 없앰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런 기록도 찾아 볼 수 없고 중국 기록은 공자가 요전 이전의 기록은 끊어 버렸으니 중국 당시의 사학자들이 역사란 기록으로 남겨야지 입으로 전하는 것은 그때의 정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기 쉬운 것인데 공자가 태고사를 역사에서 뺀 것을 잘못이라고 반박한 것을 보아도 그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BC 1833년 12세단군 아한이 재위에 오르고 별궁 근교 요하좌안네 순렵관 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겨 후세에 전하였으니 이것이 금석문의 시초이다. 문헌이 모두 멸실 되고 이러한 실물이 귀중한 옛 역사의 자료이거늘 국토를 상실하고 반도 한 구석에 칩거하는 형편이니 어느 누가 보전하랴. 후세에 창해 역사 여홍성이 이곳을 지나다가 숲속에 묻혀 있는 고비를 살펴보고 감개무량하여 시 한 수를 남겼으니 가라대 [마을 밖 번한 땅에 이상한 돌이 있네. 축대는 무너지고 철쭉만 붉었구나. 글자는 마모되고 이끼만 푸르구나. 이끼를 갈아내고 글자를 찾아내니 흥망성쇠 얽힌 시절 기울어진 사연을 문헌에 그 증거를 찾을 길 막막하고 여기에 거룩할 손 당시 자취이 아니냐] 대단군 조선 백세기 간에 은은 친선 사절을 수시로 보내 왔었는데 은왕 무정의 대에 이르러 조선의 변방 제후국으로 황하 북녘에 있는 귀방을 침략하고 다시 동진 하여 색도와 금지 두 나라까지 침범하였다.

 

이에 본국에 구원을 청하는 고변이 연다라 이르고 피난민이 몰려오니 제는 영을 내려 구원군을 편성하여 국경 지역으로 출동케하고 계사원 태수 고등으로 하여금 은도 구원 대장을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귀방에 이르니 은왕 무정은 색도 금지에서 이미 패하여 고등군이 이르니 잔군을 이끌고 멀리 달아났다. 이번 전쟁으로 은왕은 섣불리 동이 변방을 치다가 패하고 장차 조선의 대군이 원정 올까 두려워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약속함에 제가 이를 윤허하였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盖斯原 추장 고등이 귀방국을 병탐하고 중병을 보유한 강국으로 부상하여 서북 국경 지대의 열후를 제압하고 세가 강성함에 우현왕에 봉해 줄 것을 주청 하였다. 제는 이를 허락지 아니 하였으나 그 후 다시 여러 번 주청하니 끝내 불허하면 은과 연계할까 두려워 이를 허락하여 우현왕에 봉하였다.

 

BC 1287년 우현왕이 죽고 손자 대에 이르러 색불루가 삼대 우현왕위를 계승하였다. 제는 연로하여 정무를 서우여에게 맡기고 살수에 봉토를 주고 기수후를 봉한 후 국중을 순회하여 민심을 수렴하고 오가를 소집하여 이르기를 "과인이 연로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으니 장사 서우여에게 선위코저하니 백관은 과인의 고충을 승지하고 선위의식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라 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우현왕은 천왕이 노쇠하여 친히 정사를 돌보지 못함을 짐작하고 장차 자신에게 선위할 것임을 믿고 있다가 크게 놀라 군신의 공론을 들은 후 상소문을 써서 사자로 하여금 천왕에게 올렸다.

 

(大檀君天王國右賢王臣索弗累奉表于大檀君天王尊殿下矣往日殷王武丁侵我國不法略欲於我邊境三國以累汲於聖上之宸襟而那際臣祖爲阻敵侵之害以救國難而破敵遂報國之本務矣時於我側被害亦多焉其後繼臣以又亦電務守防西部廣境嚴戒萬全無漏以殷余他諸種族之國敢不入寇矣臣如爲之務是由不可不參與廟堂國政萬機焉臣近次傳聞則聖上爲念禪位於徐于余之配慮則此是千萬不當之事而徐于余者久爲侍尊側受恩仕官於廟堂雖然別無功積也夫官掌大權以統治百姓之大任者經歷國家之苦役以獻身於顯萬民之龜鑑爲要也今玆徐于余全無衆人之信望的功勳矣凡國家的大事則大統承繼之信諮問群候之意收斂以鑑定朝臣之議定然後讚定尊旨大爲可乎臣恐懼百拜敢願聖敎再審伏望矣) 漏錄補記 (臣 索弗累는 삼가 천왕 어전에 表를 올리나이다 신은 일찍이 殷王 武丁이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대국의 변방 삼국을 침범하여 성여를 깨침에 신은 조왕을 따라 출전하였습니다. 신의 일문은 혈투수삭에 적을 섬멸하고 갈충 보국하여 국토를 보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군의 피해도 지대하여 상이의 아픔을 알았습니다. 감히 아뢰옵건대 그로부터 은과 기타 열국이 이제는 조선을 넘보지 못 할 것이 옵니다.신이 변방 수호의 임무에 전념하여 국정 책정에 참여치 못하였으나 들려 오는바에 의하면 성상께옵서 서우여에게 선위한다 하오니 이는 천만부당하옵니다. 서우여는 묘당 주위에서 오래도록 관직에 머무르고 있었사오나 뚜렷한 공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무릇 국가의 대권을 이을 자라면 신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헌신 불식하여 만인의 귀감이 되어야 하온대 서우여는 국민의 신뢰를 받을 만한 공적을 쌓지 못하였사옵니다. 국가 대사를 감정하고 대통을 승계 하는 일은 널리 민심을 수렴해서 군신의 의결을 거쳐 영단을 내려야 하옵니다. 공구 백배 하옵고 성교를 복망 하옵니다 하였다.) 천왕은 여차 표문을 보고 심란 무책이라 우현왕이 서부 광역을 관할하는 번한 제1의 실력자로 정예 대군을 영도하고 있으며 은과 접하여 그의 향배는 국가 흥망이 걸려 있는 형편이니 무력 문책은 어림없는 일이였다. 그러나 천왕은 우현왕의 건의를 받아 드리지 아니 하였다. 사태가 여기 이르니 우현왕은 백관의 권유를 받아 관할 역내 제후국의 추장을 소집하여 경계를 강화한 후 수천의 장수를 거느리고 부여에 진주하여 신도로 정하고 대단군 조선국의 서우여에게 선위를 인정 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와 함께 제도로 통하는 양한의 요로를 차단하고 신왕의 등극을 막았다. 이때 제도는 청주이나 계평과 아사달도 비왕이 있는 왕검성으로 삼도의 연락이 차단되었다. 천왕은 할 수 없이 서우여를 퇴위시키고 서인을 삼고 옥책과 옥새를 우현왕에게 내리고 양위하여 우현왕 색불루가 천왕 위에 나아가니 이가 22세 단군이다. 이때에 은의 서남에는 남국이 일어나 강성 하야 여라 하고 후일 진의 주력이 되었다.

 

이르매 서북 총병 신독이 서북 방위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켜 재도 험독을 급습하여 천왕이 영고 탑으로 피하였다. BC 1238년 천왕이 붕하고 23세 단군 아홀이 즉위하고 웅가손으로 하여금 일군을 이끌고 은나라 경계에 가서 남국군과 힘을 합쳐 반란군을 돕는 은의 변방을 파하고 반란군 본거지를 습격하여 반장 신독을 주살 하였다. 이어 은경 변방 추장금달 청구군 구려군 주개 등과 몽고군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서경을 수시로 침범하는 적을 토벌하는 일대 소탕전이 전개되었다. 연합군은 은계를 넘어 방책을 분쇄하고 희대까지 진격하여 은군을 대파하여 그곳에 새로이 국경을 감정하고 성곽을 쌓고 포고씨를 음후에 영고 씨를 서후에 방고씨를 희후에 봉하였다. 중원에서는 은나라가 대단군 조선국과 같은 시기에 중원의 동북은 동이족이 서남은 은이 오래도록 번성해 오다가 BC 1000년경 부터 殷은 쇠약하기 시작하여 폭군 걸주가 포나라 추장의 딸 포사를 첩으로 드린 후 그의 희대의 미색에 빠져 왕후와 태자를 폐하고 황음 무도한 통치로 제후 추장들이 이반하여 은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주나라 문왕이 각부 추장들을 포섭하고 군비를 강화하여 위엄이 중원에 떨첬다

 

   三. 周가 殷을 멸함과 箕子 比子 微子 三仁의 비극
 

이어추장(제가추장)들의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오르니 이가 주 문왕이다. 은 나라의 열후로서 백자 벼슬에 봉함을 받고 있었다. 문왕은 천성이 왕위에 관인 후덕하여 六국 제후의 신망을 받고 은을 제압하였다. 도사 여당(강태공)을 師父로 맞아 국권을 공고히 하고 아들 무왕이 二대왕으로 登立한 후 은을 멸하였다. 周는 지나족(支那族)으로 중원에 군림하니 후세 모든 사서(史書)는 모두 주를 정통으로 편찬하였다. 殷은 동이족을 포함한 묘족이 주체를 이룬 나라로 그 시대에 문물이 상당히 발달하고 예악이 성하였다. 미개한 周에게 패하니 國人이 불복하여 사방에 民亂이 일어나니 조선의 접경 제후국 음(음)나라는 조선서경열국인 희이 제후의 도움을 받아 주를 공격하니 (朱子曰奄東方之國陳氏曰此奄與淮夷三監同助武庚以叛 『書傳』) 주의 무왕은 대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정벌함에 조선은 국경을 방위하고 전쟁에 가담하지 아니하였다. 무왕은 패잔 반군이 하북성 조선국으로 도피하였으나 추격하지 아니하고 東夷와의 충돌을 피하였다. 周는 殷을 정복한 후 은나라 백성들을 낙읍으로 옮겨 새로운 왕도 건설의 대역사를 벌여 은나라 백성들을 勞役에 투입하였다. 무왕이 출정한 틈에 은나라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무왕은 포고를 내려 은나라 국민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을 노역에 종사케 한 것은 이것이 너희들의 운명이거늘 나 없는 틈에 너희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너희 四개국 백성들은 모두 죽여 없앨 것이나 내가 너희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너희를 살육하지 아니하고 낙읍에서 노역에 종사케 하여 나의 신민을 삼는 것은 周나라 조정의 美德의 소치니라 하였다. (我來自商奄之時汝四國之民罪皆應死我大降爾命不忍註戮乃至明治天罰移爾遠去于洛以親比臣我宗周有多遜之美 『書傳』) 옛날 은나라에 한 도사가 살고 있었는데 성은 여씨고 이름은 望이며 자는 자아라고 하였는데 후에 강씨 성을 하사 받아 그의 벼슬을 따라 강태공 강자아 여망 등으로 불리운 사람이 살고 있었다. 원래에는 동이 족으로서 동방 노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 학문이 道를 통할 경지에 이르고 일찍이 치우 병법을 익혀 천문 지리에 통달하고 인후 돈독한 품성이였다. 벼슬과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고 오직 수도에만 전념하니 가난을 면치 못하여도 벼슬을 탐하지 아니하고 八十에 이르도록 고생을 같이하든 아내는 견디다 못해 그를 버리고 가 버렸다. 때에 유왕의 행패로 기우는 나라를 구할 수 없음을 천기를 보고 점치고 있음이었다. 殷이란 어떤 나라인가 옛날 상나라는 은나라 백성에게 七百理 땅을 주어 속국을 삼았는데 六개 종족이라 하였다.

 

(皆七百里之守兼商殷之民賜以附庸殷民六族 『漢書』) 周나라가 殷을 멸하고 중원의 종주국이 되니 漢족 周의 온 국민이 노래하고 춤추며 시를 지어 축하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東方군자 지국 동이국에서 봉황이 날아오르고 수많은 새들이 함께 날아와서 경축한다 하였다. (興也鳳凰靈鳥也出於東方君子之國見則天下安寧飛則群鳥從以萬數慶燐同 『侍傳』)공자께서도 이르기를 하늘의 이치로 周나라에 운이 돌아와 다시 인간의 도리가 행하였다 하여 기뻐하였다. (孔子曰天道循環周而復始人道亦然) 또 왕도 근처 높은 언덕에 봉황이 나타났다 하여 후세 학자들이 일제히 축하하며 가로되 봉황이 나타남은 周가 융성할 조짐이라 하고 봉황이 동방 군자국을 나와서 주나라로 왔으니 천하가 편안함을 볼 수 있고 날으면 모든 새들이 함께 날아 서로 즐거워 한다 라고 시를 지어 경축하였다.

 

때에 대단군 조선 제국이 내란이 빈번하여 열국이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周가 중원에서 일어나니 봉황이 나타났다 하여 운명적 징후로 보았다. 은 王은 주후를 서백(西伯) 벼슬을 주어 리(彎)국의 열후에 봉하였던 바 부패한 은王을 밀치고 王이 되어 주문왕은 비록 열국의 종주국으로 군림하였으나 여러 종족의 열국 제후 추장들이 언제 배반할지 모르는 처지임에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처지인데 좌우에서 말하기를 천하를 통치하려면 어진 인재를 얻어 자문을 구해야 하온데 지금 渭水가에 한 도사가 있어 능히 우주를 붙뜨는 지략이 있다하옴니다. 이사람에게 천하사를 물어 보시면 근심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문왕이 가로되 나 또한 전일에 그런 위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나니 그대는 이제 곧 從者를 데리고 가서 모시고 오라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奏請은 그 사람은 전일에 殷王이 여러 차례 불러도 가지 아니하고 곤궁하면서도 벼슬도 받지 아니 하였사옵니다. 은왕이 어질지 못하니 섬길 수 없다는 생각이옵니다. 주상께서 예를 갖추어 스승으로 모시면 응할지 모르오나 부르면 멀리 피할 것이 옵니다 하였다.

 

주왕이 크게 깨닫고 내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도다 하고 목욕 재계하고 예를 갖추어 侍中을 데리고 호위병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위수가에 행차할 새 사전에 통고치 못하게 하고 여망의 집에 이르니 초라한 오두막에 노파만 있을 뿐이라 물으니 위수에 낚시 갔다 하는 지라 강가에 가서 주위 농부에게 물으니 저기 있는 늙은이 온데 꽂은 낚시로 고기는 낚지 못하고 먼 곳만 바라보는 괴상한 늙은이를 무엇 하러 찾느냐 하였다. 문왕은 가까이 가서 서 있어도 한나절이 되어도 돌아보지 아니하니 근시가 문왕의 행차를 전하고자 한 것을 만류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이러하기 삼일만에 문왕은 입을 열어 사부는 낚시를 즐기나이까 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제야 여상은 낚싯대를 버리고 엎드려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였다. 문왕은 손을 잡고 일으켜 함께 수레를 타고 환궁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八十이었다.

 

여상 여망 강태공이라 하여 주나라 八백년 기업을 이룩한 초석이며 저 유명한 명언 즉 天下는 非一人之天下也라하여 무왕에게 천하는 만백성의 것이지 王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여 독재정치를 못하게 경계하였다. 은나라의 왕자 微子는 나라가 망함에 이르러 太師 箕子와 小師 比干을 불러 선후 책을 의논함에 비간은 비통하여 묵묵부답이고 기자는 나라와 함께 망할지언정 내 한사람의 영화를 위하여 周를 섬기지 아니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기자는 은나라 백성이 모두 주나라의 奴隸가 되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이 장차 나와 함께 주나라의 종이 될 것이니 내가 장차 누구의 녹을 먹는단 말이냐 하며 문왕의 은작을 거부하였다 (箕子所爲商其論常我罔爲臣僕是也言不幸而遭國之將亡與此無罪之民將俱被因盧而同爲臣僕未知將僕何人而受錄 『侍傳』) 후에 기자는 동이족에 귀의하고 비간은 마지막 극간하다 걸주에게 처형되고 太子 미자는 주나라에 항복을 거부함에 제후국으로 강등한 명분만의 은나라王으로 예우하고 기자는 무王이 殷을 정벌한 후 기자를 방문하였다.

 

무王은 말하였다 "오직 하늘은 백성들이 서로 화합하고 살도록 음호하니 내 그 윤리를 아는지라 올바르게 하고 있는지 물었다. 기자는 말하기를 옛날 큰물을 막는 것은 五행치수법으로 막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무왕은 자신의 치적을 치하할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듣고 오행치수홍범구 등을 따르지 아니하고 크게 노하였다. (周武王伐紂箕克殷訪問箕子武王曰於乎維天陰定下民相和其居我知其常論所序箕子對曰在昔??鴻水?陳其五行帝乃震怒不從鴻範九等 『史記』) 이에 무제는 기자를 포섭코자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기자는 周나라에 신하될 것을 거절하였다.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史記』) 또 주서에 이르기를 기자가 홍범의 진리를 강의한 후 무왕이 조선왕에 봉했으나 기자는 신하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대개 기자가 주나라 신하됨을 거부하는 지조를 무왕도 어찌할 수 없었다

 

(箕子陳洪範之後武王封于朝鮮而不臣也盖箕子不可臣武王亦遂其志而不臣之也 『書傳』)

이밖에도 기자가 무왕에게 불복하고 은나라의 신하로서 節介를 지켰다는 기록들이 많이 있으니 공자도 그러한 절개를 찬양하여 가로되 미자와 비간과 기자 세 사람의 어진이여 세 사람의 어진 행위는 비록 같은 길은 아닐지라도 모두 天理에 맞는 바른 행동이라 하였다

 

(孔子曰說有三仁焉三仁之行雖不同而皆出乎天理之定 『書傳』) 또 기자가 폐허가 된 은의 古都 등을 다니며 백성들과 함께 슬퍼하고 숨어살며 狂人행세를 하여 무왕의 봉작을 피하고 지냈다고 古史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부귀영화에 뜻이 없고 大義를 지켰다고 孔子는 찬양하였다. 동이의 나라로 갔다는 것뿐 왕의 봉작을 받은 古史기록은 없다. 비참한 처지에 이른 은나라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간 것인바 기록에 오천의 무리를 이끌고 갔다는 것이지 조선왕이니 무왕의 봉함을 받았느니 하는 말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양심 있는 史家들도 조선왕을 봉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 기록들이 있다. 따라서 唐왕 이세민이 모든 사기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했다라고 변조하였으나 그 반증되는 기록을 모조리 고치지는 못했다. 옛 기록에 없는 것을 아무런 고증 없이 무조건 그러한 변조를 한 것이다.

 

그 이유인즉 이세민과 그의 주위 사관 온언박 등의 공명심에 도취한 결과로서 당시 당의 이세민은 천하 유일의 황제가 되고자 항상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던 흉노를 달래여 세페를 받치고 정략결혼으로 사돈을 맺고 북방의 안전을 확보한 후 이 세상에 유일한 적 고구려 정복의 계략을 꾸민 것이라 이세민은 스스로 어질고 덕망 높은 聖君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고구려 정복은 분명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행위로서 그것을 옛 중국 영토를 회복하는 일이라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 무왕이 조선 침략에 내세운 명분도 그러한 것이였다, 그리하여 주나라 무왕이 조선왕을 봉하고 한 무왕이 四군을 설치한 중국 땅을 회복하는 전쟁이라는 역사 변조를 강행한 것이다. 당왕 이세민은 원래 흉노의 손자로서 수나라 때에 전쟁에서 공을 세운 공로로서 李씨의 성을 하사 받은 자 이다. 그러한 그의 흉노 특유의 침략 정신은 고구려 황제보다 자기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망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 변조를 계기로 중국의 역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저서에 무왕봉기자조선 한무왕 한사군 설치라는 허위 기록을 되풀이하여 그에 반증되는 古代기록들을 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에도 중국의 역사 서적뿐 아니라 지도들도 변조해서 발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자가 변절하여 조선왕에 봉함을 받았는지 아니면 기자에게 무왕이 내린 조선왕에 봉한다는 작호를 거부하고 절개룰 지켰다고 三仁이라 칭송한 것이 공자가 허위로 쓴 것인지 여부는 중국 사학가들의 양심에 맡길 것이다. 기자는 은나라 국민의 고초를 보고 내가 군자의 나라 동이국으로 가고저하니 원하는 자는 나를 따르라 하니 백성들은 주나라 오랑케의 奴僕이 될 수 없다 하며 군중이 기자를 따라 동으로 향하니 민족의 대이동이였다. 이러한 상황은 주나라로서는 그들의 노예가 된 은나라 국민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관한 것은 어떤 까닭인지 나라의 노예가 너무 많으면 국비의 과다 지출과 또 하나는 은나라 국민을 벽지로 옮기고 그 요지를 주나라 국민이 이주하는 바 자연적으로 비우는 것은 막을 필요가 없다는 두 가지 이유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역사 기록은 다만 기자가 五千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갔다라고만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험하고도 긴 수천리길을 남부여대하고 조선 왕검성험독(지금의 산동성)에 다다르니 도중에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살아남은 피난민은 五千에도 못 미쳤다. 이 때 二十五世 단군 솔나천왕은 은태사 기자가 인덕이 고매한 현인 군자라는 것을 알고 그를 환대하여 접견하고 원로의 고생을 위로하고 서화의 땅 營주에 定着케한 후 기자를 번조선후에 봉하고자 하니 기자 아뢰기를 망국의 대부 성상의 거둠을 얻어 함께 피난온 무리와 생을 얻었사오니 이상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천王은 그의 인품이 믿을 만함을 보고 이르기를 그대는 현인구자의 기모로서 능히 나랏일을 맡아 善治의 공을 이룰 것인즉 사양치 말라 하였으나 기자 固사하고 말하기를 성상의 聖恩이 망극하오나 신이 감히 聖旨를 받들지 못하옴은 이제 신이 위작을 받자 오면 은나라와 주나라 사람들이 신을 가르켜 작위의 유혹을 받고 이곳으로 도피해 왔다 할 것이니 이는 불쌍한 백성을 구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피신한 본의가 아니옵고 주왕 또한 聖上을 원망할 것이 옵니다. 그러하오니 원컨대 신으로 하여금 성은을 입어 여생을 편하게 지내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며 끝내 사양하였다.

 

이리하여 천왕은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제후의 예우로 정착케 하였다. 이 때가 BC 1100년경이였다. 한 고왕과 당왕 이세민에 의하여 조작된 여러 사서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였다. 그것도 대단군 조선국 천왕의 허락도 없이 제국의 王으로 봉했다 하였으니 그 어떠한 역사적 각종 기록이나 주위 여건도 있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망언이다. 다만 후세사관이 날조한 평양의 조선왕 기자가 아닌 은나라에 동일 명칭 기자는 있을 수 있을 것이나 한 무왕 시대의 학자 반사고도 이를 정면으로 부인하여 무제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은나라가 衰亡하여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라고 역사의 기록이 있는데 무왕이 조선을 토벌하여 기자를 조선왕에 봉했다고 하였으니 서로 맞지 아니하다 하여 간접적으로 사기 변조를 지적하였다 (殷道衰箕子去之朝鮮武王伐討封箕子於朝鮮如此不同) 당시의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아도 무왕이 조선을 정복한 기록도 없고 미약한 주나라가 감히 단군 조선 대 제국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라 일본의 僞造史記를 기화로 그것을 근거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고 그것도 당시의 조선 본토인 산동 하북 요동도 아닌 한반도의 평양에 수도를 하였다 하고 이것을 정사로 배우게 하여 역사가도 맹목적으로 식민 사관에 동조케 한 희극이다.

 

무릇 역사란 광범한 사료를 종합 보전하고 객관적 시야에서 면밀히 감시해야 할 것이며 상기한 역사관으로 여타 모든 역사 기술에 응용하였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기초가 되었다. 周나라의 원명칭은 南이고 南方제후국이다. 주나라는 본래 禹貢 雍洲境內 岐山之陽이며 文王의 세대에 이르러 국력이 신장하고 상은의 걸왕 세대에 은의 폭정으로 은을 정복할 기회를 잡았다. 시전(侍典)에 周나라의 문왕은 나면서부터 성덕이 있고 또 聖女 사씨를 배필로 맞아 비로소 궁중 사람들이 정숙한 덕을 간직하고 시를 지어 칭송하였다. (周之文王生有聖德又得聖女?氏爲之配宮中之人其始至見其有幽閑貞之德故作是詩) 문왕의 ? 대사는 華國候의 딸로서 변주 진류현의 황성이 그 나라이다. 문왕비 ?氏는 모범적 성덕부인으로 당시 문란 미개한 부녀 사회에 경이적인 존재로서 문왕의 덕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요조숙녀(窈窕淑女)의 호칭을 받고 문왕을 성군의 덕을 쌓도록 큰 영향을 미쳤다. 후세 중국의 중화(中華)의 호칭은 문화의 꽃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유래되었고 요조숙녀의 성덕부인 대명사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실로 천하가 망하고 성하는 것이 한 여자의 손에 달렸다고 비유하는 말도 여기서 연유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녀는 전무후무한 여성(女聖)이라 하였다. 주나라가 미개 몽매로부터 순화하는데는 이와 같이 문왕비와 강태공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기자가 周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거부한 것은 소씨 가로되 "기자가 周나라 신하는 아니하겠다하고 조선왕의 봉작도 받지 아니하고 무왕의 訪問을 받아 홍범의 이치를 강술한 것은 하늘이 이와 같은 도리를 우순에게 전하여 殷에 이르렀는데 자신에게서 그치고 무왕에게 아니 전하면 다시는 天下에 전할자가 없는지라 그럼으로 무왕에게 그것을 전한 것이고 그것은 무왕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였다 (王訪道于箕子陳洪範王克殷釋箕子之因訪問以天道箕子以洪範陳之乃封于朝鮮홍而不臣홍浜蘇氏曰箕子之不臣周也易爲武王陳洪範也天以是道공之禹傳至於我不可使自我而絶以武王而不傳則天下無可傳者矣故爲箕子者傳道則可仕則不可 『書傳』 미루어 보건대 기자가 무왕에게 불복 신하면 면담도 사절해야 하는데 만나 주고 홍범을 강의하였으니 그것도 항복한 것이 된다는 후세 사가의 왜곡된 풀이를 할 소지가 있음에 불가불 天道를 후세에 전해야 하는 大義를 위함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四. 殷의 箕子와 東夷 고죽국의 백이 숙제가 周나라 곡식을 안 먹는 절개와
           조선대 제국의 倭國정벌
 

주나라에 불복하는 충절 중에는 고죽국(孤竹國, 백이국 고리국 영지국 등으로 불리는 나라)태자와 같은 사람도 있다. 고죽국은 단국제국의 제후국이다. 때에 은나라가 멸망하는 시기에 단국 제국도 통제력이 미약한 상황 이였다. 그 틈에 주나라는 고죽국도 그 지배하에 통제하였다. 고죽국태자 백이는 은나라에 유학하여 은나라의 태자와 함께 하여 은태사 기자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는 무왕의 봉작을 거부하고 그의 아우 숙제와 함께 주나라 영토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먹지 않는다 하고 수양산에 들어가(당시 수양산은 조선 제국의 관경이였음) 그 산중에서 산나물을 캐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 공자 역시 기자와 같이 충절이라고 찬양하였다. 기자가 피난민을 인솔하고 조선에 온 것도 피난민을 구한다는 목적도 있었으나 주나라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도 그 목적 이였다. 그런 守節하는 인품은 피난민들과 함께 와서 삶으로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아니하였다. 무왕이 기자를 방문하고 치적과 치세에 대해 물었을 적에 기자가 홍범9편을 강의함에 무왕이 진노함을 전술한 바와 같거니와 백이 숙제가 망국의 한을 품고 수양산으로 들어간 비극은 그 나라의 비참한 모든 국민의 비극이였다. 은나라 국민이 비통에 빠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시 그것을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이르기를 "期分尾分(산산히 흩어졌내) 流亂之子(정처 없이 떠다니는 관민이여) 叔分伯分(숙제와 백이의 슬픔) ?如充耳(냉소하듯이 못들은 척하네)"

 

초후(초후는 古竹國의 酋長)의 군신이 산산이 흩어져 유랑하니 가련한 형편였다. 그러나 위(衛)나라 관료들은 같은 동이족으로써 모르는 척하고 그런후에 어렵게 지냈다는 말을하니 위나라 사람들은 역시 이같은 행동을 하였다. (言초之君臣流離期尾若此其可憐也而衛之諸臣淑然如塞耳而無間何載至是然後盡其辭焉流離患難之余而其言之有序而不迫如此其人亦可知矣)

제후들은 비록 나라는 다르다 하여도 서로 어려움을 구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초가 망하면 衛에도 어려움이 미칠 것인데 초나라 사람들의 고통을 구휼하지 아니함은 어찌된 것인지 그때 위나라는 하북에 있었고 초와 위는 영토가 북적과 접하여야 할 처지인데 그와 같이 피난민을 도와주지 아니함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眉山巍氏가 말하였다.

 

侍傳, 그 시대에 조선 제왕도 불안 상태로 中原 東北 地域의 諸侯들을 구하지 못하였다.(眉山巍氏는 古史五十篇을 지은 사학가였다.) 은나라가 망한 후 은의 덕망 있는 신료가 주나라에 항복해서 봉작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은나라의 당시 선진의 도덕성은 그와 같았으며 은나라 사람들이 그 당시 부른 시에도 오랑캐(周나라)가 침입하여 물리칠 수 없는 터에 유왕이 色情에 침적하여 충신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아니 한다고 한탄하였다. 기자를 朝鮮王에 봉했다는 변조는 당시 무왕이 한4군을 설치했다는 역사 날조를 하기 위하여 안사고에게 강요했슴이랴! 아니면 후기에 당왕 이세민이 한 짓인지. 안사고는 문제의 역사를 변조하면서 {시전} {서전} 등에 기록을 모조리 없애는 작업을 소홀했다.

 

이러한 고서 기록이 남아 있음으로서 역사를 바르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은 무왕이 조선왕을 봉했다는 것과 무왕이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두 가지 허위 사실을 모든 후세 역사 기록에 강조하여 古代 東夷 군자국의 문화 사회에 뒤떨어진 국민의 열등감을 씻고자 이를 항상 앞세워 기술하는 역사 서적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일제 식민 교과서는 이를 근거로 한층 조선 고대사를 말살하여 일본사를 위조하고 이것을 근거로 삼아 식민 사관을 보급하였다. 여기서 부동한 식민 사관이 생겨 신중한 古代史 記錄을 참고 없이 국민의 역사관을 오도한 것이다.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면서도 기자나 伯夷 叔齊같은 주나라에 불복하고 봉작도 받지 아니하는 인사들을 충절 지사라고 찬양하는 철학자로서 충효 사상의 윤리 도덕을 존중하는 성인이였다. 당시 주나라 사람들이 무왕을 성군이라 하였으나 공자는 무왕이 무력으로 통일을 했다고 왕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무왕은 각부 추장들을 그대로 두어 조선 제국 제도를 본따 제후에 봉하고 주나라를 섬기는 제후국이 되게 하고 종주국으로서 관할권을 가졌으며 제후 추장들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주왕의 딸들을 시집보내여 사돈을 삼았다. 비빈이 많았으니 딸도 많았을 것이다.

 

주왕의 딸은 姓이 姬氏니 王姬라고 불렀다. 그리고 타고 다니는 수레와 입고 다니는 옷은 화려한 성장이였다. (周王之女姬姓故曰姬下嫁於諸侯車腹之盛 {侍典}) 주왕은 제후 추장들에 가혹한 조공을 받지 아니하고 종주국으로 인정케하는 것으로 그치고 은나라 국민도 반항자를 학살하지 아니하고 노예로 포섭하여 차츰 주나라에 동화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가들은 그를 역시 성군이라고 호칭하였다. 공자는 물론 올바른 인군이 아니라고 평하였다. 이 때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 영토를 중원의 중심 지역뿐이고 지금의 하북 하남 산동성과 황하 일대는 모두 대단군 영토였다. 단군세기({환단고기})에 BC 909년 제30대 단군 나휼 천왕이 청구(靑丘, 수도)의 정사를 살피고 치우천왕의 공덕을 돌에 세기고 서쪽으로 엄독홀에서 列國汗들이 모여 열병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으며 흉노가 조공을 받쳤다고 하였다. BC 723년에는 웅襲(熊襲)이 반란을 일으켜 대장 언파불험을 海上의 熊襲에게 보내 평정하였다.

 

여기에 대하여는 後記할 것이나 해상이라 함은 倭國에 위치한 큐슈(九洲) 쓰시마(對馬島) 이키(臺岐) 시곡(四國) 등 4개 섬을 말하며 거기 강력한 추장 구마소(熊襲)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토벌한 것이다. 근래에 와서 일본의 역사책은 이것을 일본의 고대사에 편입하여 일본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 倭國의 고대 인명에 무슨 마로(磨呂), 무슨 미고도(尊), 무슨 히꼬(彦)라는 것들은 당시 그곳의 통치 계급인 조선인이다. 日本史에 熊襲을 구마소라고 하는 것은 熊襲 즉 곰습을 일본 발음으로 구마소라 부른 것이다. 일본 고대사에 웅습에 관한 기록은 물론 후세에 와서 삽입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선 반도에 인적이 드물고 남부 해안 지역에 약간의 사람들이 살고 거기서 가까운 일본 열도의 서남단에 있는 구주 지방과 교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단군 제국의 월주지역 (上海 부근)과 행상으로 통하여 단군 제국 광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五. 大檀君帝國의 周나라 征伐과 燕의 대단군조선 이탈
 

周나라는 武王 이래로 단군 제국에 대한 禮를 소홀히 하고 여러 諸侯國을 자주 침범하였다. 제27대 단군제국 豆密 天王은 관내 여러 諸侯國의 유대를 强化하였다. 요동 요서의 諸侯를 대동하고 수미리국(須密爾國) 양운국(養雲國) 구다천국(句茶川國) 등의 各王候가 예물과 문후사절(問候使節)을 보내 왔다. 그러나, 周는 武王 이래 使節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豆密 天王은 화북의 서언왕에게 命을 내려 周를 토벌하라 하고 인근 열후에게 命令하여 서언왕을 지원하라고 하였다. 이 때에 周는 무왕의 손자 강王때였다. 서언왕은 주위 열후들과 함께 大軍을 이끌고 주나라로 진격하였다. 중원 서북부를 점유한 조선군은 수도 서안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 때 周는 강왕도 그간에 죽고 그 孫子 목왕때였다. 목왕은 크게 놀라 天王에게 謝罪使를 보내고 周나라 영토의 半 이상에 이르는 36개 諸侯國을 조선 제국에 양도하고 天王에게 항복하였다. 중국 고전에는 단군제국의 주나라 정벌 총대장의 서언王 출생 경위를 고구려 주몽 천王 出生 경위 전설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으나 주몽 出生 시대 이전인 BC 千年경임으로 同一人은 아니며 후세 史家가 혼동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 서술에서 무왕이 숙진을 토벌하였는데 강왕 때에 이르러 조선이 다시 와서 서언왕이라고 칭하면서 九夷(朝鮮族의 總稱)를 거느리고 종주국인 周나라를 쳐서 서쪽 하상에 이르렀다. 주의 목王은 그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東方 제후들을 서언王에게 갈라 주어 주관토록 하는 제후국은 36개국이며 어진 정치를 행하였다. 종주국인 주나라를 토벌했다고 기록한 것은 망발이다. 종주국인 단군제국이 주를 토벌한 것이다. (及武王滅討肅愼來獻康王之時肅愼復至候徐夷僭乎奈率九夷以伐宗周西至河上穆王畏其方熾乃分東方諸候命徐偃王主之行仁義陸地而朝有三十六國 『後漢書』)

 

이 곳은 단군제국의 서북지역 일부이며 이때는 단군 제국이 분립하기 전으로 주가 단군 제국에 사자를 보냈고 서언왕의 자손 일부는 성도로 나아가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이동하는 대로 주민이 따랐다. 그 일부 자손은 동으로 이동하여 만주로 들어와 해모수의 선조로 보인다. 주몽 성왕의 출생 전설이 역시 여기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당시 檀君 天王이 열국을 봉작한 것은 그 제도가 후세에 동이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은나라를 거쳐 주나라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공자의 출생지는 곡부로서 중국 사기에는 魯나라 사람(燕나라 안에 있는 魯라는 諸侯國)이라 하였고 조선족의 나라인 연나라인이라 아니하고 그냥 노나라 사람이라 하였다. 그리고 중국 사기에는 유명 인사에 관한 기록은 반드시 어느 나라 사람이고 누구 자손이다 라고 썼는데 孔子에 관해서는 그의 母系 기록이 있고 父系는 분명하지 않다. 공자는 중원 여러 종족이 분립한 제후들을 순방하며 구세철학 도덕경을 전파하고저 평생을 희생적으로 봉사하였으며 제후를 說服하고자 하였으나 中原의 漢族을 위시한 각 민족간에 도가 통하지 아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후에는 동방군자국 조선에 가고 싶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老衰하였음에 弟子들이 말려 실행하지 못하고, 東夷族의 道德 規範이 中原 列國에서 실행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孔子悼道不行設浮欲居九夷有以也夫)

 

孔子는 中原의 四方 民族을 東은 東夷, 南은 南蠻, 西는 西戎, 北은 北狄이라고 불렀다. {周禮}에 東에 九夷, 南에는 八蠻, 서에는 육융, 북은 오적이 산다 하여 渭之四海之大夫君이라 하였다. 이러한 수십 종의 민족이 四海(四方)에 살고 군주가 있다고 이른다고 했다. 처음 東夷의 이는 그 뜻은 음이 큰 활쏘는 大弓으로써 다른 三方과는 뜻이 달랐으나 후세에 와서 한족이 중원을 차지한 후 漢 武王 시절에 글자와 뜻을 고쳐 부르고 기록했던 것이다. 東夷族이라고 쓰여 왔는데 언제부터 뜻과 글자가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족의 後進性을 수치로 생각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BC 640년경 조선 제국의 서역 변방인 연이 천왕의 정령을 받들지 않고 이때 연후는 제나라와 동맹하여 제국으로부터 분립을 꾀하는지라 천왕은 이를 고죽국의 두열후에게 훈령을 내렸다. 군사를 일으켜 연을 함께 정벌하자는 것이었다.

 

반심을 품은 연을 정벌할 것임에 정벌군을 도와 함께 연을 정벌하라고 배퍼명을 토벌장군에 임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연으로 진격하였다. 정벌군은 三路로 나누어 연도를 포위하고 四方으로 공격하니 왕도가 함락하고 연왕을 자칭하는 文候는 다급하여 齊나라에 구원을 청하니 이 때 齊의 桓公은 문무를 겸비한 명재상 관중(管仲)의 경륜을 힘입어 제나라 72성을 무혈점령하여 일약 중원 제일의 강국으로 부상하여 6국 제후국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이제 연이 패전하여 구원을 청하니 연은 동방을 지키는 제나라의 방패라 이에 단독으로 조선 제국 대군이 연을 파하고 장차 중원 전정토를 휩쓸 형편이니 이제 격퇴하지 못하면 중원열국은 위험에 직면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열국은 때를 놓치지 말고 전군을 동원하여 대전에 동참하라 하였다. 이에 전국 제후국의 군대가 속속 제나라로 집결하니 지모 탁월한 관중은 대장성부에게 步騎 10 만을 주어 이르되 장군은 곳 태행산을 넘어 불리지국을 음습하라 지금 그들 군사는 대부분 연을 치는데 출동하여 수성군이 허약할 것이다 하고 관중은 전군을 二路로 나누어 열국장수들을 지휘하여 연나라 도읍을 탈환하고 한 쪽으로 고죽국을 침공하여 그 나라를 점령하고 한편 성부도 주야배도하여 불리지국을 점령하니 이로써 조선 제국 2개열후가 함몰하고 조선제국 서경(西境) 방위에 큰 헛점을 가져왔다.

 

이 전쟁으로 중원의 조선족은 혼란에 빠져 일부 난민은 바다를 건너 험산고도(險山孤島)라고 알려진 조선 반도로 건너간 자도 있고 대다수가 요동 만주로 이주하였다. 패잔군이 선두에서 인솔하고 갔다. 전란으로 연은 제나라의 절제를 받게 되었으며 공자도 燕人 차림의 조선족 풍속을 버리고 한족 풍속으로 돌아가게 된 것을 관중의 덕으로 칭찬하였다.(孔子曰微管仲吾其被髮在? {書傳}) 연은 기후 정축 31년 연의 소왕은 악의(樂毅)를 상장으로 제나라를 정벌하여 단번에 제의70여성을 항복 받고 고토를 회복하여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조선제국 열후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한편 요동 만주로 이주한 고리국 후예들은 후대에 임희부(지금의 개로) 고도(古都)에서 나라를 세웠다.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은 숙진 예맥 말갈 등으로 불리는 동이족이다. 그들은 광야에 말을 달리고 마상에서 능숙하게 활을 쏘고 창검을 휘두르는 용맹한 기마민족의 기질로 삼한족의 집단들 이였다. 고리국에서 이주한 동이와 쉽게 융합하여 대부여국을 창업하고 장차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태이다. 옛날 周는 소공을 연후에 봉하고 후대 해후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후 연후의 수는 34대에 이른다. 제후란 나라의 왕족이다. 국가 유공자에게 명예로 내리는 후가 있고 한 지역을 지배하는 추장에게 후작을 내려 관리권을 가지는 것이 있고 국경 지역에 있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추장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그 사람이 누구이든 그 때의 실력자를 후에 봉하는 단군 제국의 제도이다. 제나라 전성기에 지나족의 주나라는 주의 후기 쇠퇴기에 이르러 제후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약소국이였다. 다만 지난날의 종주국(宗主國)이라고는 명분으로 제후를 봉하는 허령제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이 조선 제국으로부터 이탈하고 왕을 자칭하고 대군주를 꿈꾸는 유혹에 빠지기 충분하였다.

 

자고로 동방에는 九種 夷가 있는데 서쪽에 유연 거란제국(東方九種夷西有幽契丹諸國)이라고 분명히 해 온 타민족의 추장에게 候를 봉하고 왕국으로 격상하는 氣勢 그러하였다. 연은 비록 나라를 보전하였다고 하나 쇠약하여 관중의 손아귀에 들었다. 중국 {史記}들은 燕나라를 그들 역사 속에 편입하여 기록하고 있다. 상고컨데 공자의 생향은 노나라이며 노나라는 연나라에 속하였으니 연에는 한족도 섞여 살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대전이 대단군 조선 제국의 통제 불가능한 비극을 초래하였고, 이것은 장차 동이열국간의 장기 분립으로 민족의 이질화를 가져온 불씨가 되었다. 원래 주가 봉한 연후는 연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나 이로부터 중국 사서에는 동이열후가 아닌 周나라로 중국 역사에 편입하여 춘추 사기를 편찬하면서 그와 같이 기술하였다. 단군 治勢에는 象形 表意가 있었으나 100리밖에 있는 열국끼리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가림토라는 38자를 창제하였다. 우리 나라의 첫 문자가 천부경인데 환웅천왕이 하느님의 탁선을 기술케하였다는데 鹿圖文으로 기록하였다.

 

고운 최치원이 일찍이 篆古碑를 보고 이것을 베껴서 책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이 대체로 신라 중기부터 유학에 전념하여 이것을 버리고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최치원 자신도 관심을 보였으나 이것이 출세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므로 이상 연구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吏讀文字도 같은 결과로서 단군 천왕께서 태자를 우에게 보내어 금간옥첩을 전하여 중원 개척의 신기원을 열었다. 이 문자는 고대 동이족이 사용한 표의인즉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의 시초이다. 중원의 大聖 孔子께서는 이를 발전시켜 『詩傳』, 『書傳』, 『春秋』 등의 모든 사서를 한자로 기록하기에 이르러 그 深奧한 字義는 인간의 생활 철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우리는 이것을 한자라 하나 그 원류는 우리 동이족의 글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당시 이렇다 할 문자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고 우리의 역사를 상세히 기술하지 못하고 당학에 침적하여 모화사상이 싹트고 그것을 모방하여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나마 書雲觀에 비치한 역대조의 古史는 朝鮮 太宗의 무리한 民의 史書 所持禁止令으로 개인의 소유를 없애고 다시 수집 보관한 것이다. 이후 유명한 일본 역사 제조 회사 사장의 별명을 가진 악덕 높은 역사 학자 今西龍이 완전히 소각하고 우리는 그들이 만든 식민 사관 역사에 매달린 형편에 이르렀다. 그러면 옛날의 일본은 어떠하였는가? 동이족에 속한 섬나라로 옷을 입지도 아니하고 몸에 붉은 문신을 하고 한 남자가 수 십명의 여자를 거느렸다.

 

(倭屬燕倭國在帶方東大海內以女爲主其俗露개衣服無鍼功以丹朱塗身不嫡忌一男子數十婦也 『山海經』) 이러한 일본에 단군제국 이래의 우리 나라 『史記』가 존재할 수 없음에도 그들이 조선의 고대사를 만들어 조선 역사라고 한 것을 우리 나라에서 지금까지 그 일부만을 수정하여 가르치고 있다. 중국은 어떠한가? 한족의 주가 은족을 멸하고 중원에서 종주국으로 군림하였으나 황하 너머 동이국의 통제를 받았다. 그런 기록도 있다. 진시왕이 연을 멸함으로써 중원 동북 지역의 조선족이 황하유역에서 밀려나는 비극을 맞았다. 주왕조와 은왕조는 대단군 조선제국에 조공을 바치고 상국으로 섬겨 온 것은 우리 고기에는 있으나 중국 사기에는 빠졌다. 지나족의 주나라는 집권 초기에는 미약하였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역내의 수십개 종족들을 공자의 문자 혁명으로 포섭하고 동화하는데 성공을 거두어 중원 강국으로 부상하였으나 감히 조선제국에 도전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여기에 중원의 한족 역사 왜곡을 본다.

 

魏略에 기자 이후 조선후(주의 통제국이라는 뜻)는 주나라의 쇠퇴함을 보고 연나라가 주나라에 맞서 스스로 왕이 되어 東域을 공략하려고 하니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쳐서 주나라를 섬기려고 했다. (箕子之後朝鮮候見周衰燕自尊爲王欲東略地朝鮮候亦自稱爲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또 기자가 5천명의 피난민과 함께 조선에 가서 무왕의 봉작을 받아 조선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관한 모든 기록에 항상 이것을 근거 삼아 고대 조선을 축소시켰다. 그리하여 조선이 주나라에 충성하기 위하여 연을 치고자 했다고 하고 주나라가 조선 제국에 조공한 사실은 아예 기록이 없다. 이러한 황당무계한 『史記』를 조작하였다. 공자는 기자를 삼인(三仁)의 인물로써 절개를 지켰다고 찬양하였다. 후세에 와서 당나라 사학자는 무왕이 조선을 정복하여 기자를 조선왕에 봉했다고 기록하였다. 『史記』위조도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다. 고대 다른 어떤 중국 역사책에도 기자가 변절했다는 기록은 없다.

 

한무왕이 사마천의 역사 바로 쓰기를 트집잡고 역사 위조를 아니한다고 사마천의 불알을 까는 형을 가하여 『사기』의 고조선 기록 전부를 없애 버려 중간 부분이 없어진 채 중국 치부를 삭제케 하고 당왕 이세민이 어용학자를 동원하여 역사 위조를 강행하는 등의 관습은 지금 시대에도 남아 있다. 연후가 연왕을 잠칭하고 조선제국의 절제를 배제한후 조선 본국과의 전쟁은 상곡일대(北京一帶)에서 요하에 이르는 곳에서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빼앗고 빼앗기는 동이족의 내란은 그칠 줄 몰랐다. 연이 점유한 대단군 조선 영토는 (代郡 鳴門 南은 ?郡地域 容城 范陽 北은 新城 故安 ?縣 良鄕 新昌 及 渤海之安此皆燕地 樂浪 玄?도 燕에 屬했다)라고 『漢書地理志』에 記錄하였다.

 

이것은 주나라 영토보다 큰 것이며 중원의 古朝鮮 영토 전부를 만주만 제외하고 연나라 영토로 기록하고 연나라는 중국 영토다라고 한 것이다. 그 이전 고대사에 국경에 관한 기록이 있다. 주나라와 연나라 사이 영토 경계선도 확실하게 하여 협을 경계로 「'陜'이란 하남성에 있는 유명한 오세지 함곡관을 말한다.」 동쪽은 연나라 소공이 관할하고 서쪽은 주나라 주공이 관장한다라고 약정하였다. (成王時召公爲三公自陜以西召公主之自陜以東周公主之 『史記』) 당시 주나라 영토는 서촉과 산동은 관경이 아니 였음으로 연나라의 ⅓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주는 종주국으로 행세하고 연나라와는 예물 등을 주고받는 관례가 있을 뿐 연은 주의 열후는 아니며 싸운 일도 없고 국경을 서로 존중하여 충돌을 피하였다. 중원 전국시대 말기에 연나라가 진나라에게 패하여 태자 丹을 볼모로 진나라에 보내여 휴전을 하였다가 오랜만에 풀려 나왔다. 태자 단은 원수를 갚고자 진시왕을 죽이려고 노심초사하였으나 두 번이나 실패하고 연나라의 멸망을 가져왔다.

 

   六. 우화충의 反亂과 三朝鮮의 分立
 

BC 426년 43대 단군 구몰천왕때 즉, 중원 전국 시절 말기 단군 제국도 천왕의 통치력이 약화되어 열후에게 내리는 통치력이 약화되어 열후에게 내리는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이때 융안업호(지방 장관직) 우화충이 반란을 일으켰다. 요서와 하북일대의 상당수의 제후들을 포섭하여 수도 왕검성으로 대군을 몰아 진격해 왔다. 천왕은 상장 모용구로 하여금 대장군을 삼아 임지 제남 평원의 삼도병을 징발하여 반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모용구는 위용 등등하게 고각을 울리며 삼한 제후들과 상의하였다. 우화충에게 한모사가 헌책 하기를, "지금 모용구의 병마가 정예하여 정면으로 대전할 수 없사오니 술수로써 대전해야 합니다. 병법에 군사는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장군께서 일지군을 이끌고 선두에서 모용구와 싸우다가 서서히 후퇴하며 싸우다가 총 후퇴를 하면 모용구는 추격해 올 것이니, 제후군을 四方 要衝地에 매복하였다가 일시에 반격하여 포위하고 장군께서 돌아서서 총공격을 가하면 적이 분열되어 능히 싸우지 못하고 달아날 것입니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섬멸하면 구몰왕이 항거하지 못하고 장군께서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유악지중에 모둔 장수들이 찬동하여 일제히 준비하였다. 한편, 모용구는 대군을 몰고 전진하여 염탐군의 보고를 들으니 적의 군세는 생각하던 것 보다 어렵지 않게 여겨졌다. 그래서 양군이 함성을 지르며 대장의 공격 명령으로 접전을 벌이다가 적군이 차츰 후퇴하니 더욱 추격하여 적군이 진지를 모두 버리고 총퇴각을 함에 모용구가 말하기를 "내가 이제 반적을 일거에 섬멸해 버리겠다."하였다. 대군을 몰아서 추격하다가 날이 이미 저물어 지는지라 혹여 복병이 있을까 염려하여 공격을 중지하고 돌아가려 하니, 때는 이미 늦었는지라 사방에서 고각이 울리고 깃발이 흔들며 적군이 순식간에 에워싸니 천왕군이 놀라 흩어져 달아났다. 모용구는 亂中에서 전사하고 나라의 대군이 潰滅하였다. 탐정이 왕검성에 패전한 사실을 급히 고하니, 조정의 만족백관이 황황망조하여 천왕은 급히 피난 명령을 내렸다. 대소 관료들은 종묘사직 신주를 모시고 궁을 빠져나가 천왕은 전국 옥새와 보화를 챙기고 비빈 궁녀와 함께 시종들의 호위를 받으며 청주 왕검성을 빠져 나오니 적의 추격이 급하여 육로를 버리고 바다를 건너 해성으로 피난하였다. 이 시대에 발해는 조선의 내해였으며 '발', '벌', '살', '헐' 등의 발음이 들어가는 명칭은 조선족이 호칭하는 명칭이며 이두문으로 한자를 붙여서 부른 것이다.  

발은 고어로 물이라는 것이다. 여기 청수(靑洲) 해성(완주) 모두 발해 주위에 있으며 치우천왕의 수도권 위에 있다. 모용구의 방위군이 패멸함에 삼십 육군이 함락하고 우화충은 왕검성을 점령하여 왕을 자칭하였다. 백민성 욕살 구몰이 군사를 일으켜 달려왔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물리 천왕이 피난처에서 사태 수습에 고민하다가 병을 얻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대소 신료와 구몰을 탐전에 불렀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짐이 부덕하여 백성을 편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이제 짐의 대에 이르러 반적에게 나라를 잃었으니 열성조에 죄를 지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 세상에 가서 선제왕을 뵐 수 있을런가!"하며 구몰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짐이 일찍이 후사가 없어 그대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으나 후사 문제를 거론할 겨를도 없이 오늘의 사태에 이르렀다. 그대는 선왕의 후예로써 용맹하고 품성이 인후하니 가히 제왕의 자질을 갖추었느니라."하고 이어 백관에게 이르되, "경 등은 백민욕살 구몰을 도와 왕업 회복에 전력하여 주기 바라오."하고 붕어 하였다.

 

백관신료와 백성들이 통곡하고 국장을 치른 후 군신들이 모여 상의하였다. "이제 우화충이 왕검성을 점령하였으니 장차 이리로 쳐들어올 곳인즉 어찌할 것인가?"하며 대책회의를 열었다. 백관의 침통한 공기 속에 국상이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군사 주력은 이미 패멸하고 재정비의 여력이 없다. 약소한 병력으로 이 곳에서 적과 항전은 불가하니, 어찌함이 좋을까?"하였다. 여러 장상들의 의견은 일단 적의 공격을 피하여 멀리 퇴각할 준비를 하고 동부예맥에 의지할 것을 잠정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는 장단경의 해모수군의 전황을 살펴 가며 결행하기로 하였다. 부여 해모수군은 미처 지원할 겨를도 없이 천왕의 전군이 파멸되는 혼란에 빠짐에 우화충의 추격을 일단 격퇴하였다. 그리하여 첩자를 다수 왕검성 내위에 밀파하여 적극적으로 대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래서 우화충의 동정을 면밀히 살피며 九恒의 열후가 집결하는 상황을 보아 동참할 준비를 하였다. 구물이 열국에 격문을 보내어 반적을 토벌할 병마를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니 하북과 요동의 18성이 이에 호응하였다.

 

BC 425년 마침 대홍수로 우화충의 왕검성이 수침으로 혼란이 일어나니 해모수는 동원령을 내려 각 부제장에게 이르기를 "지금 반적은 대홍수로 왕검성이 혼란에 빠지고 삼군 병마가 흩어져 있으니 때를 얻었음이라. 제장은 힘을 모아 왕검성을 총공격하면 기필코 반적을 파할 것이다. 내 이미 18성 태수에게 격문을 보내 왕검성의 구원군을 막고 반적의 도피로를 차단하면 우화충을 반드시 파멸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제장이 승복하고 왕검성으로 진격하였다 해모수는 선두에서 1만의 기마병을 이끌고 질풍같이 돌격하니 도성의 방위책이 파괴되고 제장이 사방으로 도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이에 우화충은 성곽의 험준함을 의지하고 장병을 독려하여도 衆寡不敵이라 성외곽에 주둔한 방어군은 구원을 해 오지 않으니 점차 수성 병사가 죽고 도망가고 성이 함락하기에 이르니 우화충은 일당을 거느리고 도망가려고 하니 남문을 깨트리고 돌입한 해모수군에게 주살 되었다. 이어 제장이 입성하여 성중 백성을 구휼하고 항복한 장병을 원지에 배치하고 승전고를 울리며 축하연을 베풀었다. 해두 피난지에는 별도로 태수를 임명하고 代王 구몰은 종묘 신주를 모시고 환도하였다.

 

이리하여 태후가 거처를 정한 후 제장을 모이게 하여 이르기를 "제가 崩하신 후 피난 조정이라 능히 후계를 정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가 이제 왕검성을 회복하고 나라의 위상을 갖추었으니 大位를 더 이상 비울 수 없소. 하루 빨리 천왕을 받들어 천하 인심을 진정 시킬 것인즉 제장과 백관은 뜻을 모아 대사를 감정하기를 바라오."하였다. 이때 제장들은 이미 구물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공론에 부치기를 "구물은 왕손으로 반적을 토벌하는데 대공을 세웠으니 가장 적임일 것이며 열국제후도 승복할 것입니다."하였다. 그후 하늘에 고하고 천왕위에 오르니 이가 44세 단군이다. 이미 대단군조선은 반란과 분열을 거듭하여 연과 거란과 유(燕과 契丹 幽)는 모반하여 연과 제는 본국 조선의 토벌을 경계하여 상호 동맹하고 방위를 강화하니 대단군 조선은 황하 동안과 산동의 대부분 영토를 상실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구물천왕은 조서를 내려 나라의 기운이 쇠하고 수도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해모수와 병합하여 국호를 대부여(大扶余)라 개칭하는 의논이 나왔다. 이로써 대단군조선은 끝나고 다만 삼한(三汗), 三朝鮮 등의 명칭과 제도는 그대로 이어졌다. 대단군 조선의 제왕기를 입수하지 못하여 김은수주해 환단고기의 단군 연기를 인용하였다.

 

     7.대단군 조선의 쇠퇴 와 해모수의 등극....
 

이 때의 동이열국은 부여, 고구려, 숙진, 마한, 진한, 번한 등으로 분립하니(여기서 한(汗)이란 우리 고어로 큰 나라의 임금 등의 뜻이며 따라서 연한은 연왕, 진한(辰汗,朝鮮)은 진왕, 번한은 번조선(번조선왕) 등의 뜻인데 지나인이 발음문으로 기록한 것이니 이외에도 숙신 주신 막조선 등등 동이족을 간편한 기록을 할 적에 마구잡이 쓴 것이며 東夷의 夷도 (클 이)를 (오랑케 이)로 뜻을 바꾸어 卑下 시켰다. 무인 二十三年 一月 연이 신정 하래사를 보냈으나 이 때 이미 연은 자의로 칭왕하고 신하의 예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이 때 天王은 허명일 뿐 대제국 열후를 통솔하지는 못하였다. 연왕은 군비를 확충하고 제(濟)와 동맹을 맺고 세를 확장하면서 장차 대단군 조선제국 황제위를 노리고 있었다. BC 365년 연왕은 1차로 조선의 서경에 위치한 번조선을 치고서 제나라의 지원 병력과 함께 大軍을 편성하여 국경을 넘어 침입하였다. 요새지 운장을 山西大同府 공략하고 요서를 점령하니 番韓은 낭산태수 예장춘에게 명령을 내려 燕제軍의 후방으로 돌아 양도를 끊으라 하고 한편으로 방위 태세를 갖추고 大부여 天王에게 구원병을 청하였다.

 

사자가 이르는 말에 연왕이 제나라의 지원병을 받아 번한을 침범하니 주나라를 능가하는 힘이라 지금 구하지 아니하면 번한이 감내 하지 못할 것이니 저들이 번한을 정복하면 필연코 삼한의 종주국이 되고자 우리를 칠 것인 즉 지금 우리가 번한을 도와 저들을 물리쳐야 한다 하고 구원군을 파견하여 三도로 연군을 에워싸고 총공격을 가하니 연제군이 패주하고 그들이 침공 기지로 삼았던 연운도를 탈환하여 침략군을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양국간의 전쟁은 장기간 계속되어 쌍방 전사상자가 늘어나기만 하였다. 후에 북막태수 액니거길(厄尼擧吉)이 말한왕(단군여루 天王)의 명을 받아 대군을 이끌고 와서 번한을 도와 연군을 공격할새 번조선 장군 신불수가 군사 일만을 이끌고 합동하여 연을 패퇴시켰다.

 

二十년에 걸친 번한과 연의 동족상잔의 상곡(上谷)전쟁은 양국의 피폐를 가져오고 연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번한은 이를 받아들여 조양(造陽)으로 서계(西界)를 정하고 상호 불침 조약을 맺고 天王에게 보고하였다. 燕은 후대에 다시 자객을 번한에 잠복시켜 번한王 해인을 암살하였다. 이로 인하여 五가의 제후가 다투어 패권을 노리던 중 箕후가 군사를 일으켜 번한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을 점령하고 역내 제후를 진압하였다. 기후는 상주 사자를 天王에게 보내어 사태 수습을 보고케 하고 표를 올려 번조선왕에 봉해 줄 것을 주청하여 이를 추인 하였다. BC 250년 10월 북막추장 아리당부(北莫候 阿利當夫)의 사자가 입조하여 천왕에게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伏惟 北莫候阿里當夫上表天王尊下矣盖我東方朝鮮帝國大檀君聖祖爲天帝之子下降于太白山檀木下以喪國奠都於阿斯達而鑑鏡天符經以弘益人間之救世的敎理爲傳播於八紘旣連綿二千余年也至於今世紀九恒之萬民受難於塗炭之者爲分立於列國分爭年久無止由兒是也列聖祖以來大帝國至于今危瓦解之境也竊孰如燕幽者不服主上之政令背反于帝國以至於自謂?王哉旣露出反骨矣又燕候相繫於齊以其支援之下侵攻帝國亦助長於列國之混亂以圖不軌哉必不可不討膺懲耶今帝國列候漸善安如而糧道自足兼備精銳兵馬兮可謂用兵之秋也기惟天道循還以往昔飛去西周之鳳凰回來於東方焉今周衰追以中原陷入大亂焉不計測如天下事也天上太白犯三星而蚩尤旗見案星傳蚩尤旗類彗而後曲象旗又太陰犯西界而將次變易紀數之兆以必至煩發變亂以循還一期乎時於三汗之安爲祥王鳥回來致大望之旺運兮燕上將樂毅者燕候死而太子惠立不信於樂毅樂毅奔趙楚之間而諜者之報則便可得彼之援齊亦衰兮大勢如此則誠出師之好機哉?如卞朝鮮王爲鄕導官以向進上谷而傳於激文山東河北的朝鮮諸候則燕之橫暴日久各部酋長列候旣被害尤甚焉期必爭先參戰乎臣之麾下將兵中選拔五旗騎馬精兵一萬臣卽率先發一擧以擊破上谷北塞及周圍諸關則聖上馬汗王與率兩路大軍後續來攻則弗越年定燕乎然后主上行幸靑洲王儉城以大軍逗留黃河浿水之沿域后發激文於中原西南六國韓魏趙秦齊楚以欲會盟之儀則彼群不敢抗爭以鑑定六國其勢然也以故大檀君朝鮮帝國天帝子威盖腹三汗九恒及中原華夏以天下萬民洽恩化弘益人間之聖德矣臣阿里當夫頓首百戾伏望聖敎矣 漏錄補記

 

북막후 아리당부는 천왕존하전에 표를 올리나이다. 우리 동방 조선 제국은 대단군 선조 천왕께서 천제의 아들로 태백산 단목하에 하강하시어 아사달에 조국 전도하여 천부경을 거울삼아 홍익인간의 구세교리를 팔방에 전파하신지 이천여 년에 이르렀 사온데 이제 구환의 만백성이 각부 열후의 분립으로 난리 통에 시달려 왔으며 열성조 이래의 대제국이 와해할 위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일찍이 연후가 성상의 정령을 받들지 아니하고 王을 자칭하여 이미 반골이 드러났사옵니다. 연은 제나라의 지원을 받아 조선 열후를 공격하여 국가를 혼란에 빠트리고 불괴를 꾀하고 있사오니 이제 응징 토벌하지 아니할 수 없사옵니다. 제국의 열후가 이제 안정을 회복해 가고 있으며 식량이 자족하고 병마가 정예하여 가히 용병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天도 순환으로 옛날 서주나라로 떠난 봉황이 동방으로 돌아오고 周나라의 쇠퇴로 중원이 대란하니 天하사의 귀추를 헤아릴 수 없사온데 하늘에는 태백이 三星을 범하고 蚩尤 깃발이 별을 끼고 이어지며 그 깃발들이 빛나고 후에 굽은 현상으로 보여서 태음이 西계를 범하여 장차 기수 변역의 조징이니 변란 빈발의 한순환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옵니다.

 

이제 동방은 三한 광역이 안정세로 왕조가 만리를 날아 돌아오는 왕운을 맞아 대망의 天운이 이르렀습니다. 간자의 보고에 연장 악이는 연의 소왕이 상장으로 임명하여 제나라를 파하는 대공을 이루었으나 소王이 죽고 해王이 대를 이어서는 악이를 불신하여 열국 연합으로 진나라를 치는 연합군 총지휘관으로 출정 중인 악이를 소환함에 악이와 해王 사이는 해王이 태자 때부터 틈이 있는지라. 만약에 돌아가면 화가 미칠 것을 짐작하여 조나라 초나라등으로 망명하였다 하옵니다. 이제 제나라도 쇠하여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大王게서는 산동 하북의 조선열후에게 격문을 전하여 참전하라 하오면 그간 연王의 횡포에 시달린 열후 추장들은 앞다투어 성전에 참여 할 것이옵니다. 신은 휘하 五기병 중에서 일만 기마정병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상곡 북쇄를 분쇄하고 주위 방책과 여러 관문을 일거에 파괴할 것이오니 주상께서는 번조선王을 향도관을 삼아 양로 대군으로 연을 엄습하면 해를 넘기지 아니하고 연을 능히 정복할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주상께서는 청주의 蚩尤 天王 수도 왕검성으로 행차하시고 大군을 황하 패수 연역에 둔치한 후 중원 서남 六국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 진나라, 제나라, 초나라에 격문을 보내며 황하가에서 희맹하자 하오면 六국은 감히 항쟁하지 못할것이옵고 이들은 싸우지 아니하고 감정할 것이옵니다.이로써 대단군 조선제국의 옛 권위를 찾아서 주상의 위엄을 三한 九환에 진동하고 중원화하를 덮을 것이옵니다.

 

 신 아리당부 돈수 백배하옵고 엎드려 성교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표문을 놓고 天王은 백관을 모아 의논하였으나 의논이 분분하여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중 아리당부는 북녘 흉노와 몽고 등의 협조를 상약하고 기다려도 소식이 없으니 왕검성으로 달려와서 天王을 배알하고 다시 아뢰옵기를 병법에 병귀신속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廟議 未定하고 시일 지체하면 大謀누설되어 연이 미리 대비 강화하면 大事不可成이 옵니다. 곧 결행하지 아니하면 삼국 제후는 각기 二心을 품고 있어 성상을 따르지 아니하고 分立의 길을 갈 것이고 중원東土는 영구히 성상의 영토가 되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마땅히 大영단을 내려 주시옵소서 하였다.
 

고열가天王은 비록 인후한 품성이나 우유부단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아리당부에게 이르기를 신중히 검토할 것이니 다음에 다시 기회를 보자하였다. 이에 아리당부는 궐문을 나오면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주신 때를 받지 아니하니 장차 화가 미칠 것이다. 천하사를 의논할 명군이 못되니 섬겨서 아무것도 이룰 것이 없다 하고 돌아와서 대부여진조선을 이탈하였다. 이어 고리국에서 만주로 퇴거해 온 왕후의 후예 해모수 일행은 웅심산에 군사를 집결하여 白岳山 古都를 점거하고 단을 모아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을 올린 후 해모수를 단상에 옹임하여 천제의 아들이라 하고 王으로 받들어 北부여王이라 호칭하니 BC二三九年 四月 八日이였다. 천제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구세주로 추앙하고 매년 4月 8日을 기념하는 잔치를 하였다.(『단군고기』)

 

   八. 義渠王國의 滅亡과 秦나라의 일어남
 

옛날 중원 서북에 위치한 진나라는 주나라가 중원의 종주국으로 위세를 떨칠 적에 주를 섬겨도 오랑캐 대접을 하고 열국 모임에도 소외되었다. 周나라가 쇠하고 열국이 쟁패하는 속에서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왔다. 그러나 진과 인접한 조선제국의 열후인 담임 누번 의거 三국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조선제국이 쇠퇴하여 열후가 분리하니 각자 자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중 義渠王國은 심히 强盛하여 중원열국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국으로 大兵을 보유하고 궁궐은 그 규모가 주나라에 비등하였다. 진은 항상 의거王국과의 선린에 힘써 왔다. 선왕은 여러 비빈과의 사이에 남자 아이만도 아홉 명이나 되었다. 그 중에는 선태후의 아들 太子가 있었다. 그러나 선왕이 죽고 그 아우가 병권을 잡고 太子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찬탈하여 成王이 되었던 것이다. 그후 태후가 의거왕과 사통하여 의거왕이 애호하니 성왕은 義渠王이 두려워 태후를 홀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태후는 내심 자기 아들의 실각을 원망하고 있었다.

 

아우 成王이 王位를 잇고 先王妃는 太后에 봉하여 선태후라 하였던 것이다. 선태후는 여전히 정사에 관여하였다. 선태후는 의거王과의 외교에도 직접 참견하여 의거王과 눈이 맞았다. 의거王은 전부터 선태후의 뛰어난 미색에 황홀하였으나 청춘 과부가 된 선태후와 서슴없이 사랑에 빠졌다. 선태후와 成王은 의거王이 진나라를 침략할까 두려워 정략적으로 유인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의거王은 선태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얻어 더욱 사랑에 침적하였다. 선태후는 서읍(西읍)족 특유의 눈이 깊고 크고 백옥 같이 희고 맑은 얼굴에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성왕은 형수를 의거王에게 바치고 진나라를 보전코자 한 것인데 형수가 두 아이를 낳고 의거王의 사랑을 독차지 하니 장차 의거왕과 합작하여 진나라를 동이족에 넘겨주고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 공산이 커졌다.

 

성왕은 비밀히 심복 臣僚들을 모아 놓고 상의하였다. 성왕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었다. 과인이 兄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정무를 전담하지 못하고 있음은 제공이 아는 바와 같거니와 지금 태후가 의거王의 총애를 받아 깊은 사랑에 빠져 있음으로 국가의 안위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자칫 태후의 뜻을 거스르면 의거왕의 노여움을 살 것인바 우리가 비록 강력하나 의거왕의 동이국에 미치지 못하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면 좋을지 의견들 듣고자 하노라 하였다. 장사가 말하였다 " 소신이 오래 전부터 이 일을 걱정하고 궁리하여 왔습니다. 이제 大王께서 이 문제를 물으시니 때가 왔습이옵니다. 지금 태후께서 국사에 집념 한다 하여도 國事에 도움이 되지 아니 하옵니다. 마땅히 제거하고 의거왕국을 멸하여 후환을 일거에 해결함이 옳을 것이오니 여차 여차 하오면 기필코 성공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의논을 정하고 태후의 생일을 맞아 대연을 배설하고 의거王을 청하였다. 의거王은 태후와 함께 대취하여 침실에 들고 수행 종자 호위병사도 별도히 주연을 배설하고 취하여 잠이 든 후 成王은 命을 내렸다. 수문장은 굳게 지키고 절대로 한 놈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만일에 대비하여 양국 국경을 굳게 경계하여 왕래를 끊은 후 의거왕의 침실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경호병을 남김없이 처치하였다. 의거왕은 당초에는 비상시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대비를 하였으나 왕래가 거듭되고 아무런 적대 감정이 없음으로 안심하고 경계를 늦추었다가 해를 입었다. 사자를 의거王宮에 보내어 방심케 한 후 一지군을 이끌고 왕궁을 급습하여 점령한 후 왕의 一族과 백관을 진살하였다. 선태후는 비록 의거왕과 사랑에 빠졌으나 역시 진족의 망국을 그대로 볼 수는 없었다. 의거왕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죽이면서 진이 의거 왕국을 병탐하는 계략에 협조하였다. 시동생 成王으로부터 다음 세대 王位를 자기 아들에게 돌려준다는 약속은 물론 실천되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진태조 비자(非子)이래 十二代에 이르러 진나라는 중원 西北지역에서 동이족을 누르고 강력한 민족으로 부상하여 후세에 진시왕의 天下통일하는 기초를 마련하고 주나라 말기에 힘으로써 중원 열후에 끼여드는 원동력이 생겼다.절세미인은 나라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묘미를 가짐으로 세상 사람이 말하기를 "영웅은 미색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현사는 책을 멀리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의거왕은 결국 진왕의 계교에 말려 패망하였다.

 

이리하여 진은 동북의 동이족 내란으로 마음놓고 중원의 패권 다툼에 끼여 세를 확장하여 呂政(여정)시대에 이르러 六국을 정벌하고 중원을 통일한 후 북변 연나라를 순방하여 상군에 이르러 연인 여생을 시켜 바다에서 구해 온 신서도록(神書圖錄)에 장차 진나라를 망할 자는 호라고 하였으니 동북의 조선족의 내란이 그치면 진이 점령한 중원 동북 지방에서 조선 제국과의 대전을 우려하던 중이라 때를 놓칠세라 화급히 大軍을 동원하여 몽활장군으로 하여금 三十만군을 거느리고 하남땅을 공격하게 하고 중군을 친히 거느리고 병참을 관리하며 독전하니 제장이 공을 다투어 진격함에 하남의 동이국이 본국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외로이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궤(敗潰)하였다. (始皇巡北邊從上郡人燕人盧生使入海還以鬼神事因秦錄圖曰亡秦者胡也始皇乃使將軍蒙活發兵三十萬人北擊略取河南地史漢一統)

 

이와 같이 진시왕은 六國을 정복하여 한족의 주나라를 멸하고 산동,하북,하남의 동이 조선 제국의 영지까지 점령하여 산동,하북에 공지를 설정하고 조선과의 충돌을 피하였다. 그렇게 하고도 안심할 수 없어 흉노와 조선을 막는 만리장성을 동서에 걸쳐 쌓았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백성의 피폐로 민심을 잃고 장성 축조에 공을 세운 몽활도 몰살당하였다. 진시왕 정은 무도한 폭군으로 그의 무단(武斷)정치를 비판하는 유학자들이 주왕조는 중화로 진나라는 미개국으로 비유한다 하여 굴을 파서 생매장하고 서적들을 모조리 거두어 불살라 버렸다. 이것을 후세 사가는 갱유분서라고 하였다. 진왕은 중원을 통일하고 마음이 방자하여 가라대 내가 六국을 정벌하여 열국의 왕이 되었으니 마땅히 명칭이 달라야 될 것 아니냐 하였다. 좌우 아뢰기를 조선국왕이 천제의 아들이라 하여 천왕이라 칭하니 대왕께서도 이제 중원을 통일하여 전무한 대업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마땅히 황제라 칭함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진황제가 된 政은 그의 영화를 영구히 누리고자 일찍이 들려 온 불로초를 구하고자 동북 국경에 순행하니 제인 서시등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삼신산(朝鮮半島)이 있고 이름하여 봉내방장의 영주땅이온데 선인(신선에 비할 만한 도사)이 살고 있으니 동남동녀(童男童女)를 구하여 정성으로 바치면 얻을 것이옵니다 하여 때에 동남동녀 천명을 구하여 서시가 바다로 들어가 선인에게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海中有三神山名曰逢萊方丈洲遷人居之靑得齊戒童男童女數千入海求遷人弗得) 이 무렵 중원에 알려진 지금의 한반도는 해중에 있는 섬으로 산고 수려한 험지로 사람이 극히 드물고 신선이 불로초(山蔘)을 캐서 먹고사는 신선이 사는 곳인데 난리통에 燕이 망하고 거기 살던 동이족의 일부가 조선반도에 바다를 건너갔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 전설에 진시왕이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명을 三신산에 보냈는데 그들은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가면 죽을 것임으로 금강산 三신산 逢萊方丈에 불로초를 구하러 갔다가 신선을 만나지 못하고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였음에 숨어살다가 진시왕이 찾을까 두려워 왜국으로 갔다 하고 그곳은 대마도인데 조선에서 그곳으로 간 신인이 땅을 잡아 당겨 조선 반도에서 떨어져 나가서 섬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때 진시왕이 구하는 불로초는 천년 묵은 산삼으로서 산삼이 천년을 묵으면 동삼이라 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생겨 움직인다 하여 동삼이라 하였고 신선의 눈에만 띄어 이것을 먹으면 불로장생한다 하여 불로초라 하였다. 당시 장백산, 태백산, 금강산 등지에 산삼을 캐 먹고사는 신선이 있었다고 하는데 진시왕이 수만 금을 쏟고도 불로초 아닌 산삼도 구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포악한 진시왕이 오래 살지 못하도록 한 것일까? 진시왕의 중원 통일은 차 시대 중원 한나라가 그대로 통일된 중원을 차지하는 행운을 얻고 동이는 중원에서 영토를 잃고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시대 진시왕의 출현은 東方제국의 수난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진나라는 극히 미개한 종족으로 진시왕정의 二十一대조이자 진나라 중흥을 이룬 목공(穆公)도 견술女(犬戌)의 자식이다라고 했으니 당시의 중원 서북은 동이, 흉노, 터키, 헝가리, 몽고, 지나 등 여러 민족이 혼거한 지역이니 이들이 장기同住함으로써 진나라 종족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 사람은 용맹한 기세가 있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잘 선도하면 일어나기 쉬우며 인의 돈독하고 굳세고 과감한 자질이 있어 군사와 농사에 번성한 강토를 이름으로 산동제국(동이국)이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秦人俗大低尙氣?先勇力忘生輕死故見於詩…善導之則易興起而篤於仁義以猛驅之則其强毅果敢之資亦足以强兵亦農而…) 주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한 유왕(유왕)은 그의 황음무도한 난행으로 진(秦)나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열국의 구원군도 참전할 기회가 없었다. 周나라를 정복한 진은 주나라의 유王을 포로하여 여산에 수용하였다가 결국 주나라 국민 학대의 책임을 물어 처형하였다. 그러나, 주나라 국민은 유王의 포악한 정치로 고통받고 나라가 망하였으나 비록 폭군이라도 오랑캐 나라의 손에 죽었다고 하니 온 국민이 분노하였다. 한족의 민족주의 사상은 이와 같이 철저하였다. 그리고, 천지 대변이고 중국의 수치며 주나라 신하의 큰 원수라 하였다. (王而沒於夷狄天地大變中國之大恥東周臣子之大讐也 『詩傳』)
 

훗날 진족은 완전 한족화 하였다.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것은 周나라의 부패로 중원의 열후가 모두 칭王하고 다투는 틈에 뜻밖에 이루어진 것이다.

 

   九. 秦始王의 횡포와 연나라의 멸망
 

한편 진시왕은 이미 중원열국을 정벌하였으나 한족은 깊이 진족을 멸시하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들의 주왕이 황음무도하여 나라가 亡하였으나 유王이 진나라 사람의 손에 죽은 것에 대하여 오랑캐에게 한족의 왕이 죽었다고 천지 대변이라 하여 깊은 수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진시왕은 그 세가 강대하여 능히 백만 대군을 일으킬 수 있고 휘하에는 유능한 장군이 백으로 헤아릴 수 있는 세력이니 당시 연이 비록 강하나 진시왕은 능히 정복할 수 있음에도 유일하게 남은 연나라 征服을 중지 한 것은 연은 다른 열국과는 달리 조선 제국의 열후이니 비록 분열 상태이기는 하나 급하면 조선 제국에 돌아가서 통합할 것이니 자칫하면 조선 제국과 충돌할 것임으로 이제 겨우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는 아직도 강남 지역은 불안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조선 제국과 충돌하여 장기전으로 陷入함은 큰 위험을 가져올 것임에 연에 대한 추격을 중지하고 조선 제국과 협상을 시도하여 다음과 같은 제안을 조선 제국에 하였다고 보여진다. 즉 浿水를 국경으로 하고 우북평에서 천진에 이르는 패수변을 공지로 비워 두어 양국민의 접촉을 피함으로써 양국간 국경 충돌을 예방한다.

 

이것은 단군조선제국의 황하 일대의 燕의 고지를 잃는 것은 단군의 故地를 잃는 결과이나 연이 분리하여 王을 칭하고 조선 제국과 맞서 오랜 세월 싸워 통일이 어려운 상황인데 연은 중원 고도를 이미 잃고 요동으로 후퇴하여도 항복할 뜻이 없었다. 그것은 연이 왕을 자칭하고 국토를 분열시켰으나 동족의 멸망을 보고 어찌 할 것인가 백성들의 희생을 어찌할 것인가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은 秦이 연을 멸한 후 새로이 연후를 봉함에 있어 반드시 연인을 핍박하지 말 것을 전제로 진의 요청에 동의 한 것이라. 그리고 공지로 비워 두는 공지는 조선의 광역으로 인정하고 그 공지는 조선이 관할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원北역과 東역의 조선 제후국들의 진나라에 대한 항거를 후원하지 아니 한다는 조건으로 상호 불가침조약을 하고 조선 황제는 진시왕을 도와 연을 공벌하였다 여기서 조선 제국은 연이라는 동족을 잃고 진시왕은 중원을 통일하였다. 조선은 열국 분립 시대여서 진시왕과의 쟁패를 피하고 산동 三十 여군을 진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여 진은 산동에 험색한 곳에 關을 수축하고 험쇠를 의지하여 갑병으로 국경을 수비하였다. (秦幷兼諸候山東三十余郡繕津關據險塞修甲兵而守之 『書傳』) 서전에 의하면 이러한 국경선 너머 공지를 두어 조선과의 충돌을 피하였는데 한이 진을 멸한 후에도 그것을 유지해 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진은 국경과 안쪽 河北省 南皮縣 東南八理 지점에 千龍城을 축조하고 패수 안쪽으로 공지를 따라 겹겹이 방위 진지를 구축하고 최정예 중병을 배치하여 조선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것은 진나라 주위에는 다만 강력한 동이족이 그들의 중원 동북 故土를 찾기 위해 침입할지 모를 것임으로 준비한 것이다. 秦은 二代에 자체 내분으로 亡하고 漢나라는 진나라가 처참한 싸움 끝에 이룩한 통일 중원을 그대로 넘겨받아 그 영토를 보전 확장함으로써 후세 중원의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연나라등 동이족을 위시한 수十개 다수 민족으로 大변혁을 성취하였다. 진시왕이 몽활장군을 시켜 北녘의 적(조선과 흉노)을 공격하여 하남땅과 河南의 단군 제국의 四十四현을 약취하고 임조에서 요동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그 난폭한 군사 행동을 후세 사가는 비록 비난하였으나 종국에는 다행한 일이었다 라고 하였다. 이 지역의 조선족은 포로가 되어 勞役에 동원되었다. 후한서에 진한의 늙은이가 말하기를 옛날 진나라에서 망한 사람들이 苦役을 피해서 조선 반도에 와서 땅을 갈라 주어 마한이라 하였는데 진나라 말과 닮아서 秦韓이라고도 하였다. (辰韓耆老自言秦亡人避苦役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其名…有似秦語故或名之爲秦韓) 진시황의 中原통일은 동이족에게 큰 타격과 변화를 가져왔다. 후세 중국 사기는 진나라의 관계 역사를 변조하지 않고 그대로 전해 왔다. 진은 한족에게 완전 동화하였음으로 그러한 것이다. 공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中國而純乎人欲則化夷爲夷狄而知則天理則化爲中國秦本狄不得幽中國之會盟 『春秋』 
 

중국의 깨끗하고 순수함이며 다른 나라 사람이 중국에 동화코자 함에 오랑캐도 중국인이 되어 하늘의 이치를 알면 중국인이 되는 것인 즉 진나라는 본시 오랑캐라 중국 열후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중국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진시왕이 중원을 통일한 후 그 세가 天下에 진동하여 감히 그 누구도 반항하지 못하였다. 진시왕이 韓나라를 멸한 후 韓나라에는 장자방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키에 이목이 수려한 귀공자 장량이 있었다. 그는 韓나라에 五代 공경을 지낸 가문이 멸망 당함으로서 진시왕을 죽이고자 절치 부심 하였다. 하루는 친구의 소개로 滄海 창해(요하서남)에 天下역사로 알려진 여홍성(黎洪星)을 만나기 위하여 친구와 함께 그를 창해로 찾아갔다. 韓나라는 동이족과 한족이 혼거하는 나라였다. 그러므로 상호 친교도 많았다. 장량은 창해에 여홍성의 집에 가서 그를 찾아 인사를 나눈 후 진시왕을 죽일 계획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당시 조선 사람도 무도한 정벌(연나라)로 무수히 학살당하였음으로 적개심이 강함을 아는 고로 마음놓고 털어놓았다. 이르기를 진시왕이 연을 파하고 산동 하북의 동이족을 마구 학살하여 무수한 난민이 東으로 피난하였거니와 연왕으로 하여금 태자 단을 잡아 보내면 연을 멸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어기고 연을 멸하였으니 천지 원수라 진시왕을 죽이고자 하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존형을 찾아왔노라고 하였다.

 

이에 여홍성은 분연히 일어서며 말하기를 이일을 내가 해내리라 하고 그 구체적인 계획을 듣고 난 후 말하기를 "대장부 세상에 나서 나라 위해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조선족의 기상이라"하며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니 그는 원래 괴력을 가진 역사라 양인은 굳게 다짐하고 날을 받아 하남성 양무현으로 향하였다. 출발에 즈음하여 요하 서안의 단군 묘를 참배하고 양무현 박랑사중에 농부를 가장하고 120斥의 철수를 습속에 숨겨 놓고 기다리던 중 진시왕의 행차가 어가를 타고 앞뒤로 무사가 삼엄하게 호위하고 지나가니 접근할 수 없어 三十보거리에서 크게 소리치며 달라붙어 철퇴를 날리니 진시왕은 혼비백산하고 시종 대신이 탄 부차가 맞아 산산조각 나고 시종이 여러명 죽었다.
 

이와 같이 진시왕에 대한 동이족의 복수는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진시왕의 위세에 위축되어 있던 지나족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진시왕의 외모는 코가 높고 등등하며 눈이 길게 째져 매와 같이 매섭고 일에 임하면 지체없이 돌진하는 품성이라고 한 통은 기록하고 있다.

 

그의 순행이 형산남군에 이르러 대풍을 만나 행차를 중단하고 좌우가 이르기를 앞에 있는 상산 사신의 노함으로 인한 것이라 하였다. 시왕이 그 사당이 누구의 사당이뇨 하니 좌우 가로되 요 임금의 두딸이며 순인군의 왕비입니다 하였다. 진시왕은 이 말을 듣고 대노하고 즉시 죄수 三千명을 동원하여 그 산의 나무를 모조리 벌목해 버리고 산상에 올라 그 길로 남으로 돌아갔다. 이 일은 해석해 보자 그 사당의 신이 노하여 大풍이 일어났다면 고사를 지내고 도움을 비는 것이 진시왕의 관습으로 보아 당연한 것인데 진시왕은 틈틈이 함양에서 태산까지 먼 길을 마다 않고 행차하여 제사를 올리고 신을 철저히 섬겨 왔다. 그러나 여기서 이와 같이 노한 것은 사당의 주신이 지나족의 정통왕인 요순의 가통으로 그 후계국 주나라를 오랑캐의 나라 진이 멸망시킨 데 대해 노여움을 보인 것이라고 시왕이 이에 반발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한 것이라 시왕은 행노에 사당을 참배하고 치우사당에 매년 친히 제사를 올렸는데 여기서는 이와 같이 행동하였다. 堯임금은 그의 二女를 舜임금의 왕비로 출가시켰는 바 이러한 정략적이고 더욱이 친족간의 혼인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書傳』에 舜仁君과 堯女는 四從간이라 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의 어린 딸 둘을 모두 늙은 순임금에게 바치지 아니할 수 없음은 그가 순에게 대권을 양위하면서 천명이라 하여 비통한 말을 뒤풀이한 것으로 보아 일족의 안전 보장을 얻고자 한 일 것이다.

 

순임금의 아내가 된 堯女는 늙은 舜이 세상을 뜨자 또한 스스로 운명을 한탄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두 자매가 얼싸안고 순절하였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사당을 지어 원혼을 달래였다고 한다. …却說… 세상이 하늘 같이 두려워하든 진시왕을 습격하여 비록 죽이지는 못하고 잡혔으나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에 임하는 조선족의 태도에 크게 용기를 얻은 한족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유방과 항우가 패에서 일어났다. 한족은 주나라를 이은 정통 국가로서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되었다. 초나라의 항우는 한나라(漢)유방에게 패망함으로서 중원의 오랜 전란은 끝나고 한족(지나족)이 중원을 통일하였다. 진시왕의 연나라정벌로 많은 영토를 잃은 번조선왕 기준(기후의 손자)이 이제 漢寇를 단독 방어하기에는 어려운 형편임에 요서요토의 방위를 강화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때에 한나라는 진을 멸하고 이미 설치되어 있는 조선과 진과의 국경 패수(황하북로 서쪽)에 이르는 국경선을 그대로 답습하기로 약정하였다. 한나라 역사 기록에는 멀고 험한 곳으로서 지키기 어려워서 진시왕이 설정한 국경선을 그대로 따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하북과 산동 일대는 동이족이 개척하여 비옥하고 중원 제일의 문화적 선진 지역인데 멀고 험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일까?

(秦滅燕屬遼東爲激漢興爲其遠亂守復修遼東故塞之浿水爲界 『通易』)

 

      十. 河伯女와 解慕漱의 만남
 

요동은 험난하고 인구 희소하였으나 중* 동북 일 때와 요동에 걸쳐 동이족이 광범하게 분포하여 살고 있으면서 말을 달리고 활을 쏘고 창검을 휘둘러 전장을 휩쓰는 용맹은 중원서 으뜸이며 학문을 익혀 문무를 겸한 전형적 무사의 보고 였다 쉽사리 정복 할 수 있다면 어찌 진시왕이나 유방 같은 호전 주의자가 패수를 경계 삼아 물러갔고 각설 예로부터 송화강 연안 일대에는 비옥한 농토가 있고 강의 동북에는 산림이 울창하여 좋은 수렵지를 이루었다. 동이족은 수렵을 나가면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표적을 맞추는데 능숙하였다. 또 그것은 적의 침입을 대비하는 군사 훈련이기도 하였다. 왕께서도 틈만 나면 백관을 거느리고 왕검성을 나와서 수렵을 즐기셨다. 그 시대는 문무를 가리지 않고 마상에서 수렵하였다. 국가 유사시에는 불고 신명하고 헌신하는 절개는 이때부터 조선족의 미풍이었다.

 

그리고 송화강 일대에는 좋은 목축 지대가 있어 전마를 대량 사육하였다. 그리고 송화강은 물고기가 많이 잡혀서 왕검성 주민의 좋은 찬거리었다. 이 무렵 송화강 연안에 풍골이 신선 같고 학덕 높은 장자가 한사람 살고 있었다. 조상 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큰 재산가가 되었다. 국가 유사시에는 재정을 보조하고 주민이 굶주리면 재물을 나누어 구휼하고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였다. 벼슬은 아니하여도 조정 중신들도 존경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삼신께서 용왕의 아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점지하셨다" 하여 하백이라 불렀다. 일찍이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을 두었으니 장녀는 유화요, 둘째는 훤하 셋째는 가화였다. 딸들이 외모가 모두 아름다워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특히 장녀 유화는 미색과 재주가 뛰어나서 하백은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학문을 익히게 하고 고금 치세 병난의 내력과 천문지리를 익히게 하였던 바 재주가 비상하여 사리를 어렵지 않게 통달하였다. 어느 날 한 과객이 찾아와서 하룻밤 유숙을 청하였다. 하백은 과객을 사랑으로 모시게 한 후 얼굴을 가린 관을 벗은 후 자세히 다시 보니 지난 청년 시절 바로 자기를 가르친 스승이라 깜짝 놀라 사랑에 모신 후 일어나 절을 올리고 물었다. "그간 선생께서는 어디로 가셨는지 행방이 묘연하여 한번 뵙고자 하여도 찾을 길이 없었는데 그간 어느 곳에 가셨었기에 그렇게 소식이 없었사옴니까?"하고 물었다.

 

선생은 웃으면서 "세상을 등진 늙은이가 볼일 없는 세상에 나타나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인적 없는 산중에서 삼신암을 지어 거처하며 짐승들과 벗하며 세월을 보냈노라." 하였다.

하백이 말하기를 "그간 세상이 너무나 변하였사옵니다. 이러한 때에 장차 또한 어떠한 변화가 올는지 소생은 불안하옵니다." 하였다. 선생이 가로되 "연나라에 변고가 일어날 조짐이니 장차 조선이 혼란을 겪고 역수 순환의 기년이 이르렀으니 하늘에는 해성이 태음을 범하고 북두칠성이 천강운전에 도를 일어 중원에 큰 변고가 있을 것이고, 대홍수가 있을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영웅 호걸이 마상에서 패권을 다투는 전란을 겪을 것이라 하였다. 수십 년만에 만난 사제간의 정담은 그칠 줄 몰랐다. 하백은 술상을 드리게 하고 딸들에게 예를 올리게 하고 옛날 아비의 스승 자부선사이신데 도통한 신선이시다 하였다. 선사가 유화를 유심히 살핀 후 그들이 나간 후에 말하기를 "큰 영애가 장차 대인을 생산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초년 파란이 두려우니 경계하고 삼가하라 하였다." 하백이 물었다. "무슨 뜻이 옵니까?" "더할 말은 없으니 신의 조화를 누가 알리오!"하고 다음날 며칠 더 머물 것을 간청하여도 끝내 듣지 아니하고 홀연히 떠나갔다. 선생이 떠난 후 하백은 여러 가지로 사색에 잠겼다. '선생은 원래 그 학문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신인이라. 우주의 기틀을 헤아리고 천기를 점치며 세상을 통찰하는 신통력이 있는지라 일부러 가르침을 받고져 하여도 얻지 못하니 어찌하랴!' 곰곰이 생각하니 두렵기도 하였다. 그것은 유화의 미색이 많은 사람들이 눈길을 끌고 있음으로 무슨 사고나 생길까 불안하였다. 하백은 유화에게 엄히 경계하여 조심하도록 명하였다.

 

한편 유화는 도사에게 인사를 올리고 방에서 나오면서 그 도사의 태도에 이상한 감이 들어 문밖에서 잠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니 장차 대인물을 출산할 것이라 하니 더욱 흥분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집안은 평민이니 왕족이나 명문 거족에게 출가하기도 어려운 처지인데 무슨 구세의 대인물이 난단 말인가 의아하였다. 유화가 어느 날 꿈을 꾸니 강가에서 두 동생과 함께 놀고 있는데 비룡이 바다에서 날아와서 물고 있는 여의주를 유화에게 안겨 주며 용왕의 명으로 이 여의주를 그대에게 전한다 하였다. 놀라 깨니 삼경이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이 밝음에 하도 이상하여 치장을 하고 집을 빠져나와 송화 강가에 나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한 남자가 가까이 오더니 앉아서 말을 걸었다. "나는 고리국왕의 왕자 해모수며 틈이나서 바람 쏘이러 왔다가 아름다운 소녀가 여기 있기에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한다."하였다. 유화가 보니 기우 헌앙하고 준수한 얼굴이 과연 그가 마음속에 그리던 호남자였다. 서로가 이야기가 통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하고 유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왕자는 놓아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부왕의 허락이 없어도 어찌하든 결혼을 성사시키겠다"고 설득하였다.

유화가 말하였다. "그러면 그때까지 기다릴 것이며 사사로이 통정할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였다 왕자는 말하였다. "내가 평민의 몸이 아니니 이제 들어가면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소 그대가 끝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저 강물에 몸을 던저 죽을지언정 그대를 돌려 보낼 수 없소. 나는 지금 그대를 본 후로 나의 혼은 그대를 떠나지 못하오"하며, 아무리 달래도 막무가내였다. 유화는 진퇴양난이었다. 그의 부친 하백은 그러한 연애를 결코 용납하지 아니할 것이며 한편 만일이라도 왕자 신상에 사고가 생기면 자신뿐 아니라 일문이 화가 미칠 것인즉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왕자를 따라 그가 휴식처로 쓰는 조용한 방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거기서 밤을 세우게 되어 유화는 저녁상을 물리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것은 부친의 교훈을 어기고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달아나 강물에 몸을 던질까 하였다. 왕자가 물었다.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소." 하였다. 유화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왕자는 감싸안으며 위로하였다. "내가 날짜를 기약할 수는 없으나 결코 그대를 잊지 않고 찾을 것이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오." 하였다. 유화는 문득 간밤의 꿈을 생각하였다. "사람이란 영감이 있는데 이것도 운명적인 결과로서 하늘에 뜻을 거역할 수 없는 일이다"하고 마음을 돌리니 행복감마져 느꼈다." 며칠 동안 그곳에서 지낸 후 서로가 집에 돌아갈 결심을 하고 유화는 각오를 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하백은 유화를 보고 분통이 터졌다. 유화에게 건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호통과 심한 매질이 가해졌다. 그리고 말하였다 "너는 가문을 더럽히고 아비를 욕되게 하였으니 네죄 죽어 마땅하다."하고 종자에게 명하였다. "끌어다가 우발수에 던지고 오라." 엄명하였다.

 

종자는 한마디도 항변하지 못하고 묵묵히 죽음의 길로 끌려오는 지난날의 금옥같이 아끼든 상전 아가씨를 보면서 강가에 이르러 배에 싣고 던질 지점에 다다르니 눈물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종자는 배를 저어 물살이 약한 곳에 밀어 던지고 뒤돌아보지 않고 돌아 왔다.

한편 해모수왕자는 때에 한구의 출몰로 출정하는 부왕을 따라 전선에서 수년을 보내고 돌아와서 유화를 찾으니 그녀의 부친이 강에 던져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남몰래 그곳을 찾아가 통곡하였다.한편 강물에 던져진 유화는 물살이 약한 곳에 던저져 혼신의 힘으로 헤엄쳐 강안으로 나오다가 지나가는 어부에게 발견되어 구출되었다. 한편 왕검성의 해부루 황제는 늦도록 후사가 없어 근심하여 영산을 찾아다니면서 삼신에게 기원하고 정성을 올렸다. 어느 날 기도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타고 오던 말이 전방에 조그마한 물체를 바라보며 멈추고 움직이려 하지 아니 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왕이 종자를 시켜 가져오라 하여 살펴보니 개구리를 닮은 한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버려두었던 것이다. 왕은 기뻐하며 이것을 삼신이 점지해 주신 아이로다 하고 주어다 길러서 태자를 봉하였다. 얼굴 모양이 개구리를 닮았다 하여 이름을 금와라 하고 해부루왕이 죽은 후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에는 금와왕이라 호칭하였다.

 

어느 날 해부루왕은 우발수를 지나다가 우연히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한 어부가 아름다운 처녀를 한사람 우발수에서 구해 왔는데 도무지 말을 아니 하는데 범상치 않는 품위가 있다'하였다. 왕은 즉시 종자를 보내어 데려 오게 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실로 절세미인이 였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로다. 저러한 품위와 미색이 겸비한 인물이 어찌 강물 속에서 나왔단 말이냐?'하며 궁으로 데려다가 후실을 삼았더니 얼마 후에 남아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생산 날짜가 입궐하기 전에 임신하고 있었음이 분명함으로 왕이 추궁하여도 "다만 햇님의 영감으로 잉태하였다."하고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왕은 궁졸을 시켜 내다 버리게 하였으나 아이가 죽지 아니 하니 별실에 가두었던 유화를 풀어 주고 아이를 거두어 기르도록 허락하였다. 유화는 정성을 다하여 길렀다. 유화는 일찍이 부친 하백으로부터 배우고 전수 받은 학문과 치세의 경략 철학이 통달한 경지에 이르러 그의 아들을 훈육하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아들은 재주가 출중하고 영리하여 모친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데 전력하였고 풍채가 귀골로 눈에 광채가 흐르고 품성이 공겸 활달하며 자라면서 대인지풍이 사람을 경복케 하였다. 활과 칼쓰는 법이 비상하여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함에 태자 금와가 시기하고 해를 입혀도 조금도 불평 없이 태연자약 극복해 나가니 더욱 주위 사람이 경탄하였다. 이때 태자의 주위 인사들이 태자에게 진언하였다. "추모의 인품이 비범하여 장차 큰일을 저지를 인물이오니 살려 두었다가는 저하의 장내에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미리 대비함이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하였다. 태자가 말하였다. "나 또한 그가 가까이 있으니 불안하고 두렵소 어찌하면 좋겠소 하고 물었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지금 대왕의 성수 높으시고 유화비의 지혜로움은 황후와 다른 비빈들이 미치지 못하오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습니다. 때를 보아 불의에 격살해 버리면 됩니다."하고 결의하였다 유화비는 평소에 태자가 추모를 미워하고 그 주위를 사람들이 심히 추모를 경계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태자 주위를 근시와 궁녀 중에 심복을 두어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태자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았다. 유화비는 추모를 불러서 명령하였다. "이제 네가 이곳을 떠날 때가 왔다. 태자가 지금 너에게 틈만 생기면 해를 가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너는 곧 오이 마리 협부와 상의하여 저들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빠져나가라." 하였다 동행할 세사람의 조정 중견 인물은 추모의 대인적 인품에 감복하여 함께 대사를 도모키로 합의한 인물들이다. 추모는 모비에게 아뢰었다. "동지들과 탈출할 의논을 끝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가슴아픕니다." 하였다. "너는 장차 큰일을 이루어야 할 몸이라. 사사로운 정은 금물이다 그리고 어느 곳으로 갈 것이냐?" 물었다. 추모는 말하였다. "남으로 태백산을 넘어 반도로 가면 지금은 그곳에 진시황의 연나라 침략이래 피난민이 몰려 상당수의 주민이 모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서 그곳 주민들을 통합하여 건국의 기초를 닦으면, 한 가지는 대사를 도모할 근거를 닦고, 둘째로 적으로부터 완전히 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하였다.

 

이에 모비는 실망한 빛을 보이며 훈계하였다. "먼 훗날을 위하여 큰일을 꾀하는 자 험하고 위험한 가시밭길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간 나는 너에게 건곤운기의 변화하는 이치를 익혀 나라를 바로 세우는 총수가 될 것을 믿어 왔다. 그러한 소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너에게 전수하였으니 예로부터 그 진리는 천문 지리 인화가 조화를 이루어야만 성공의 길이 열린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계책을 세우고 움직이고 하는 것은 그 득실을 깊이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어찌 깨닫지 못하였느냐 어찌 편안함을 염두에 두고 은신의 편의를 바란단 말이냐 하였다." 이에 추모는 송구하여 몸둘 바를 모르고 "소자가 불민 하와 깨닫지 못함을 깨우쳐 주소서 하였다." 유화비는 말을 이었다. "지금 남녘 반도 산골에 자리잡아 묻혀 앉으면 소왕국을 건설하여 편안함을 얻을 것이다. 너에게 맡겨진 천명은 단군 제국의 옛영광을 찾는 대모를 달성하는 것이다. 지금 알려진 바에 의하면 중원에서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고 한나라가 진나라를 멸하고 초한의 싸움이 그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동북 중원은 실로 용무할 땅이라.

 

지금 네가 지목한 곳은 그간 전쟁 피난민이 상당수 이주했다 하여도 지금까지 무인도와 같은 공지와 같다. 그곳에 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정주하고 때를 갖추어 출정코자 하여도 반도 안을 통틀어 징병한들 그 병력은 오천을 넘지 못할 것이고 그것도 피난민 노약자일 것인바 중원까지의 치중 운수는 수천리의 험노인즉 대사를 도모한다는 것은 아예 거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하니 남녘 반도는 협소한 험지로 웅비의 기지가 될 수 없느니라. 지금 형세로는 웅비의 깃털이 패수가에 있으니 장차 대사를 도모하는데 수십만 중을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자원이 있고 중원의 허실을 보아 불시에 신속히 대군이 나아갈 수 있고 물러나며 요동 산험수심한 요새지에 웅거 하야 적의 대군을 막고 능히 지킬 수 있다. 그러므로 산동 산서 하북의 중원 고토회복을 몽매간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니 대장부 세상에 나서 만백성을 구하는 위업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의지로 처세할 것인즉 깊이 생각해 보라" 하였다. 추모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어머니가 말끝을 맺으니 크게 깨닫고 일어나 어머니에게 절하고 엎드려 고하였다.

 

"지금 어머니 교훈을 들으니 어두운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맑은 빛을 보는 것 같습니다. 소자 그간 학문을 배우고 처세법을 익혀 동지를 사귀어 장래에 대비하고 방법을 연구하고 병술을 익혔으나 난세에 대응하는 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 어머니의 금옥과 같은 가르침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명심하여 마음속에 간직하겠습니다." 하고 밤이 깊도록 담론하였다. 이때 추모의 처 예씨는 임신 중이었다. 추모를 동행코자 하니 유화가 말렸다. "대사를 도모하는 자는 한개 아녀자를 돌볼 수 없느니라. 험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니 너는 여기서 고생스러워도 나와 같이 있다가 때를 기다려라" 하고 추모에게 일렀다. "성공을 거둔 후에 반드시 데리고 가라 잊지 마라" 하였다. 후일 추모의 대성은 그 어머니의 가르침이 크게 도움을 주었다. 추모는 동지들과 약속을 정하고 다음날 새벽에 동지들과 함께 궁을 빠져나와 멀리 엄이수에 이르렀다. 추모 일행이 궁궐을 빠져 나와서 엄이수 소화강 지류에 이르니 물은 깊고 배는 없어 일행이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어느덧 멀리에서 추적해 오는 군사가 보였다. 태자 금와가 자고 나서 보니 추모와 몇 사람의 그와 친교 있는 사람들이 안보였다. 예감이 이상하여 군사를 풀어 찾도록 한 것이다. 사태가 급하니 추모는 냇가에서 소리쳤다. "나는 하백녀의 아들이다. 나를 구해 다오." 강가에서 어부가 배를 저어 다가왔다. 일행을 태우고 멀리 떠나서 추격자가 강안에 도착하여 돌아오라고 소리쳐도 돌아가지 아니하니 활을 쏘아도 이미 멀리 떨어져 닿지 아니하였다. 그 일대에서 어업을 하고 있는 어부들은 평소에 하백의 陰德을 입었던 사람으로 위급할 때에 그 은혜를 갚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추모를 구한 것이다.

 

한편 추모가 강가에 다달아 배는 없고 그를 잡으려고 하는 군사는 추격해 오니 위급하여 나는 하백녀의 아들이다. 라고 소리치니 사방에서 용와의 명을 받은 고기떼가 몰려와서 강물 위를 메워 한개의 배를 만드니 고기등에 올라 무사히 걷넜다고도 한다. 어째든 기적이 일어나서 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북으로 향하여 한 골짜기에 이르렀을 적에 괴이한 옷차림을 한 세사람을 만났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보니 모두 장자풍이라 한 사람은 이름이 제사라 하고 한 사람은 무골이라 하고 한 사람은 묵거라고 하였다 우리가 귀인을 기다린지 오래입니다. 옛날 자부 선인께서 장차 천지 기수가 바뀔 때가 올 것이니 때가 되면 반드시 귀인이 이곳으로 올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귀인을 보니 기모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추모는 그 세사람이 학문과 경륜이 출중함을 보고 상빈례로 맞아서 동행하였다. 그들은 졸본천에 이르러서 건국한 후 각기 중책을 맡아서 고구려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十一. 추모(周夢)의 高句麗 建國
 

일행은 지금의 국내성에 본거지를 정하고 후세에 당왕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국내성에 있는 추모의 사당을 불사르고 모든 서적과 전각을 불살랐으니 이곳이 첫 연고지로서 추모 사당이 수도에 없고 이곳에 세우고 역대 황제가 행차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이곳이 추모 대왕의 처음 피난지로 추측되는 오열홀에 정착하였다 주위 주민들을 보살피고 차츰 힘을 키워 원근 소국들을 병합하여 나라 형태를 갖춘 후 용맹과 무위로서 졸본왕 송양을 항복 받고 영토를 확장하여 견실한 제국을 창설하니 졸본 부여라 하였다. 중원에서 패하고 만주로 퇴각한 해모수왕국 고리국의왕 해모수는 추모의 생부였다. 기구한 운명의 여인 유화와의 사이에 태어난 추모는 그 아들이다. 사양길에 접어든 소왕국 고리국의 창업은 BC 삼백년 전후로 추측된다. 그리고 중원 하북성 고죽성에 도읍 하였다가 패망한 옛 나라 칭호이다.

 

때에 해모수는 후사가 없다고도 한다 추모는 처음 졸본국이라 하였다가 생부를 만나 고리국을 합병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원래 해모수는 고등이라 하여 성이 고씨이며 고구려의 호칭도 그 성에 따라 지은 것이다. 당시 중원의 한나라이래 고구려의 호칭을 고려 또는 고구려로 병칭한 것도 이러한 사연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건국은 해모수의 건국 기년인 BC 239년으로도 될 수 있으나 광개토대왕의 후세 비문에 주몽 성왕을 창업주로 기록하였기에 이를 따른다. 추모는 백관을 거느리고 천단에 올라 구환조 면류관을 쓰고 금구옥대를 두르고 단상에 오르니 대신들은 대례복에 청라관을 쓰고 백관이 금은고의 조복을 입고 오우관을 쓰고 단하에 나열하니 대신이 책서를 받으러 낭독하고 황제위에 오름을 선포하였다. BC 190년 황제는 고천레를 올리고 백관을 거느리고 환궁하여 서훈할새 송양을 졸본후에 봉하고 협부를 대대로에 제수하고 마리를 주도부에 오이를 태대사에 각기 제수하고 무거를 내부 대문에 제사와 무골을 좌우 대형에 각기 제수하고 부분도를 도사에 제수하여 정서장군을 임명하고 태대사오이를 정동장군을 임명하였다. 한편 천자의 위엄을 갖추기 위하여 궁궐을 짓고 한편으로는 동으로 각부 난립한 예맥국을 정벌코자 출사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예맥 추장들이 연이어 망풍 귀순하니 위세가 떨쳤다.

 

이 때에 졸본 서북에 대부여의 열후국으로 여왕국이 있었다 대부호로서 덕망이 높은 연타발의 외동딸로서 대부여왕의 서잔인 우대에게 출가하였다. 이후 우대는 불류 ,온조 두 아들을 얻고 소왕국을 창업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내 서소노는 과수로서 나라를 지켜 왔다. 추모가 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라 위세가 떨침에 사절을 교환하고 예물을 후히 보내 친교를 맺었다 서소노는 영리한 여걸이며 추모왕은 문무 겸비한 영웅이라 두터운 교분을 가지는 동안에 의기 상통하여 서로 재혼하였다. 추모왕은 그의 아들 불류와 온조를 친자식 같이 지극히 사랑하고 인격을 다듬어 주었다. 아마도 나이는 추모는 이십대일 것이고 서소노는 삼십대일 것이다. 서소노여왕이 가진 재물은 고구려를 부흥하였다. 해부루 왕후비 유화는 주몽을 떠나 보낸 후 그 아들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금와왕은 그가 부왕의 후실로서 왕을 지성으로 받들고 왕실에 공헌한 어진 덕을 기리기 위하여 태후 예로 장사하고 태후묘를 지어 배향 하였다. 유화가 해부루왕의 비가 되어 생산을 못한 것으로 보아 해부루왕이 친자식을 얻지 못한 것은 그의 비빈들의 탓이 아니고 왕이 결함이 있었든 것으로 보인다. 주워 키운 금와왕은 많은 자식들을 두었다. 유화비가 세상을 떠남에 추모의 본처 예씨는 유복자를 데리고 서로 의지가 되었던 시어머니 유화비가 없으니 외로이 지내다가 남편 추모가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있으나 만날 수가 없으니 하루는 아들 유리에게 물었다.

 

"지금 너의 아버지는 고구려 왕으로 있으나 동부여 와는 적대 관계에 있으니 만날 수가 없다 어찌하면 좋을까?"고 하니, 아들 유리가 말하였다.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겠습니다. 간단한 준비를 하옵시면 소자가 남모르게 말을 준비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남모르게 말을 준비해 두었다가 몰래 빠져나와 먼길을 달려 고구려 영내에 이르러 변방 장수의 안내를 받아 왕검성에 당도하였다. 일찍이 추모가 대부여를 떠날 적에 자기 처를 동행할 수 없음으로 임신 중인 아내가 장차 출산할 아이에 대한 확인 방법을 일러두었다. 그 방법은 칼 한 자루를 반으로 부러뜨러 한쪽은 자기가 가지고 또 한쪽은 대궐 주춧돌 옆에 묻어 두고 아내 예씨에게 이르기를 "내가 칼 반쪽을 어느 곳에 묻어 두었으니 그 아이가 장성하거든 그것을 찾아 가지고 나에게로 오도록 하라."고 일러 놓았다. 그리하여 예씨는 아들 유리에게 그 칼을 찾도록 일렀다 유리는 모친이 말한 육각 나무를 인근산을 몇 일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종일 찾다가 돌아와서 궁궐 대청마루를 무심코 보니 궁궐 기둥이 육각 나무로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육각 나무 모양만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설마 궁궐 기둥이라 생각하고 혹시나 싶어 궁궐 대청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쇠 울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자세히 들으니 궁궐 기둥 있는 곳이었다. 유리는 주춧돌 옆을 파 보았다. 과연 부러진 칼이 나왔다. 유리는 그 칼을 가지고 모친과 함께 추모왕을 만났다.

 

추모왕은 그것을 보고 자기가 보관하고 있는 불어진 칼을 가지고 오게 하여 유리가 가진 것과 맞추어 보니 과연 딱 맞아 한 자루의 칼이 되었다. 추모는 크게 기뻐하여 유리를 태자로 봉하고 장차 후계자로 세웠다. 이어 태공 송양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하게 하였다. 송양의 딸은 아름답고 현명하여 왕실의 장래 왕후감으로써 흡족한 인품으로 추모는 흡족하였다.

여기서 고구려 역사의 연기 축소로 인한 모순이 계속된다. 추모 황제의 아들은 유타이고 유리는 손자이다 다시 거기에 대한 것을 기술할 것이나 여기서 수정하면 역사를 근본적으로 대수정을 해야 하므로 간단히 확정지을 문제가 아니므로 고구려 역사 축소 문제는 광범한 자료와 구체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조속한 시정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바이다.

 

   十二. 모돈(冒頓)의 新朝鮮 侵犯과 漢나라 征伐
 

BC 198年 신조선왕은 부여 별종으로 불리는 대 부여국 북막추장 鮮卑가 정녕 불복하고 月氏候를 공격하고 흉노가 이를 지원하니 신조선王이 月氏候를 支援하여 선비를 討伐하고 이어서 흉노를 討伐코저 하니 흉노王 單于 頭蔓이 감히 朝鮮과 抗戰할 수 없음으로 월후에게 太子 모돈을 볼모로 보내고 사죄하니 和平을 허락하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월후는 볼모로 와 있는 흉노의 태자 모돈이 非常한 人物임을 보고 두렵게 생각하였다. 한편 흉노왕은 美女 알씨 소생자를 심히 사랑하여 후계자로 하고자 長子인 太子모돈을 죽음으로 몰기 위하여 조선국 월씨를 다시 공격하였다. 월후는 흉노왕의 배신에 大怒하여 볼모인 태자 모돈을 죽이려고 하니 모돈은 꾀를 써서 월씨의 좋은 말을 훔쳐 달아났다. 흉노는 태자가 돌아온 것을 보고 다시 태자의 말과 그 처를 활로 쏘아 죽게 하고 태자 모돈에게도 활을 쏘아 죽이려 하니 그 활을 돌려 그의 계모와 그 소생인 이복동생 들 그리고 그를 죽이려 하는 아비 두만까지 전부 쏘아 사살하고 스스로 王位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조 선왕은 모돈에게 사자를 보내서 모돈의 千里馬를 상납하라 하였다. 모돈이 추장 회의를 열고 의견을 들으니 부하장상들이 모두 거절하고 싸우자 하였다. 그러나 모돈은 말하였다. "지금 조선이 강성하여 싸워서 이기기는 극히 어려운 형편이니 국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한갓 명마 한 필이 대수로울 것 없다."하고 기꺼이 말을 헌납하였다. 얼마 후 조선의 북막후 月氏는 모돈의 처첩 중에 美色이 뛰어난 麗人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女人을 바치라 하였다. 모돈은 左右신하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였다. 한 신하가 다시 "閼氏(王의 비빈)를 바치라 하니 어찌할 수 없다 하였다. 군신이 일제히 분노하여 말하기를 "무도한 오랑캐를 공격해야 한다."고 규탄하였다.

 

모돈이 말하였다. "이웃나라와의 友好를 위하여는 어찌 한낱 女子를 아낄 것인가"하고 사랑하는 女人을 헌납하였다. 모돈은 內心 분노하고 장차 원수를 갚기 위하여 군비 확장에 全力 하였다. 얼마 후 조선의 북막후 月氏는 점점 교만하여 다시 사자를 보내어 흉노와 조선 사이 서로 비워 놓은 공지 千里땅을 조선이 점령하겠다. 고하였다. 이에 모돈은 大怒하여

":영토는 나라의 근본이라 어찌 양도할 가부냐?"하고 양보하고 화친하자는 者는 목을 베고 馬上에서 月氏를 치는데 참전하지 아니하고 뒤에 남는 者는 모두 斬한다 고하였다. 高句麗 건국과 같은 시기이다. 軍令을 내리고 三十萬 步騎 大兵으로 三군을 호령하여 일제히 요동으로 진격하니 신조선은 모돈을 가볍게 보고 그가 감히 조선에 도전하지 못할 줄 알고 지난날 여러 차례 흉노는 조선을 침입하였다가 패하고 상당 기간 순종하였은 즉 안심하고 있다가 불시에 침공하니 1차로 하북의 월후가 패하여 전초 방위선이 무너지니 신조선이 갑자기 징집한 병력은 十萬에 불과하여 요하변에서 방어하다가 또다시 패배하였다. 모돈은 이에 신조 선왕이 멀리 달아났으니 깊이 추격하다가는 계교에 빠질까 위험하기도 하고 신조선이 재기하여 다시 공격해 올 힘은 당분간 없을 것임에 요서로 철수하였다.

 

번조선은 원군을 보낼 겨를도 없이 신조선의 十萬병력은 섬멸 당하고 무수한 치중을 잃었다. 그리하여 하북 영토를 모두 빼앗기고 요동으로 후퇴하였다. 때에 한나라 유방은 항우와 싸우느라 하남지역을 비우고 있었다. 그 틈에 모돈은 조선故地와 하남지역 한나라 국경 지역까지 진출하여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三十萬 大軍을 이끌고 漢軍을 공격하여 馬邑에서 한나라 大將 韓信을 포위하였다. 한신은 여러 차례 흉노에게 사자를 보내여 화친을 청하였으나 의심하여 화의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한편 한신은 한王 유방에게 구원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여도 한王도 한신을 의심하여 구원해 주지 아니하니 한신은 進退兩難으로 마읍에서 흉노 모돈에게 항복하였다. 모돈은 한신을 항복 받고 한왕 유방을 토벌하기 위하여 낙양으로 향하였다. 한王도 모돈과 항전하기 위하여 군사 三十二萬명을 유방왕이 친히 이끌고 北으로 향하여 평주(大同府)에서 모돈군과 만났다. 모돈은 동방의 강국 신조선을 격파하고 자신을 얻어 四十萬 정병을 이끌고 진격하였다. 흉노 모돈은 남으로 太原을 공격하고 晋陽에 이르렀다. 흉노와 한신은 진양에서 한군을 공격하였다. 유방의 한군은 三十二萬의 병력으로 반격해서 들어갔다.

 

이때 한나라 大將 劉敬이 돌아와서 한왕 유방에게 고하였다. 양국 싸움은 조금 쉬고 동정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전면에 늙은 노약者가 배치되고 아군이 진격하면 후퇴하고 복병을 해 두었다가 기습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하니 지금 흉노를 쳐서는 아니 되옵니다 하였다. 이때 한나라 군사는 이미 진격을 재촉하고 있는 中이라 유방은 이 말을 듣고 大怒하여 유경을 가리켜 제나라 포로가 입을 잘 놀려 벼슬을 얻고서 무슨 그따위 망언을 하느냐 하며 마구 치고 가둔 후 한王은 군사를 재촉하여 일거에 흉노를 섬멸코자 평성에 진출하였다. 흉노는 싸우며 달아나다가 한군이 미쳐 평성에 집결하기 전에 모돈은 四十萬 보기병으로 한王군을 포위하여 생포하였다. (冒頓從精兵四十萬騎圍帝於白登 『鑑易』) 한王을 따라 종군해 온 陳平이 한王을 구하는 비책을 세웠다.

 

간첩에게 보화를 많이 주어 斡氏(모돈의 王비)에게 갖다 바치도록 파견하였다. 모돈의 王비가 좋은 선물을 받고 모돈에게 말하였다. 우리와 한나라가 지금 서로 어려움이 없는 터에 지금 우리가 한王을 잡고 너른 영토를 점령하였으니 우리가 점령한 영토는 목축을 할 만한 초지가 아니니 가져도 쓸모 없는 땅이고 한王은 놓아주지 아니하면 그를 대신할 王을 세울 것인즉 차라리 한王을 놓아주고 쓸모 없는 땅도 지키는데 힘만 들 것이오니 돌려주고 앞으로 우리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다짐을 받는 것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흉노 모돈은 돌려보낼 것을 허락을 하고 그 대신 매년 상당한 세패(조공)을 받고 한王의 公主를 선우(單于:흉노족왕의 호칭)모돈의 첩실로 헌납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돌아온 한王 유방은 가두어 두었던 유경을 풀어 주고 가로되 내가 公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평성에서 욕을 보았다 하고 유경을 二千戶의 管內候에 封하고 號를 建信候라 하였다. 단 (유경은 동이족으로서 포로된 자임) 註. 중국 사기는 한王이 포위되어 七일 동안 굶고 있다가 흉노가 길을 열어 주어 탈출했다고 쓰여 있을 뿐 자세한 포로 생활의 내용이 없음. 한王이 公主를 흉노에게 보내려고 하니 呂后(한王의 王비)가 밤낮으로 울면서 첩이 太子와 단 하나의 公主가 있는데 어째 公主를 흉노에게 버릴 것이오 하며 슬퍼함에 보내지 못하였다. (帝曰善欲遣長公主呂后月夜泣曰妾唯太子一女奈何棄之匈奴上竟不能遣 『通鑑』)한王이 고민하고 있다가 다음해 겨울 집안 처녀를 公主라고 속여 보냈다 라고 사기에 기록하였으나 그후 공주에 관한 기록으로는 흉노에 시집간 公主가 생남하여 외손자가 外家를 잘 섬겼다는 것뿐 공주에 관하여는 일체 기록이 없고 한나라 呂后의 주위 친 인척 기록이 허다한데 비하여 보면 다른女子를 보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하여 신광이 말하기를 건신후(유경)는 모돈 잔적은 仁義로 설득할 수 없는 오랑캐라 하고 한편으로 혼인하여 사돈을 맺게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아니한 부당한 행동이었다 라고 하였다. 신조선은 그릇된 판단으로 모돈을 대하다가 상곡 우북평 일대의 영토를 도리어 잃고 모돈의 요서 침입을 막는데 급급하였다.

 

이번 전역으로 河南北州의 36개 고조선 영토가 흉노와 한의 영토로 돌아갔다. 한나라도 오래 전부터 흉노를 東에서 위압하든 조선이 뜻밖에도 흉노에게 도리어 패하니 크게 당황하였다. 흉노 모돈은 오랜 세월 東역의 강대국 조선 제국의 위력에 눌려 오다가 신조선을 패퇴시켜 의기양양하여 중원의 한고조를 공격하여 항복 받고 교만이 넘쳤다. 흉노 선우(單于:흉노족王의 호칭)모돈은 한나라 유방이 죽은 후 여태후에게 사자를 보냈다. 사자가 여태후에게 전한 친서를 펼쳐 보고 여태후는 군신들 앞에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다가 사자를 보고 호통쳤다. "이 자를 끌어내어 목을 베라 하였다." 그 친서의 사연인즉

 

"지금은 과부가 된 당신이나 내가 다같이 인생의 즐거움이 없으니 서로간에 같이 즐길 수 있도록 오락을 갖자 하였다." 즉 연애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번희가 아뢰었다. "흉노 선우가 이같이 무례하니 원컨대 十萬병을 주시면 흉노속에 들어가 모조리 정벌하겠습니다."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제포가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번희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하였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가로되, "지난날 고조 폐하께서 평성에서 흉노와 싸우다가 포위되었을 적에 번희는 상장군으로서 한병 三十二萬병을 이끌고 흉노와 싸워도 고조 폐하를 구하지 못하고 황공하게도 고조 폐하께서 항복하여 풀려나고 그들의 침공을 막을 수 없어서 년간 조공을 바치고 공주를 헌납하는 수치를 감당하고 있는 터에 무수히 죽어 간 상이의 애처로운 노래 소리가 끊기지 아니한 형편에 단지 十萬명의 병사로 흉노에 가서 횡행한다는 망언은 교만에 넘친 행동이옵니다. 흉노는 지금 강성하여 그들이 섬기는 조선 제국도 패퇴시켰습니다. 오랑캐는 좋은 말로도 그들을 좋아하게 하는데는 부족하옵고 나쁜 말은 노여움을 사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하였다. 여후가 실정을 모르는바 아니라 그가 애지중지하는 공주를 선우에게 바치고 철석간장이 녹는 아픔도 견뎌 온 처지이라 중신들 보기 민망하여 한번 노여움을 보였을 뿐이었다. 이에 여후는 사자에게 좋은 말로 손사하고 차마를 내어 사자를 돌아가게 하면서 여러 가지 여건이 여가를 즐길 수 없어 미안하다는 답서를 써서 답변사를 함께 파견하였다. 선우 모돈도 사자를 보내어 고맙다는 답서와 함께 좋은 말을 선사하고 선우 모돈도 드디어 화친하고 여후 초청을 강요하지 아니하였다.

 

신조선도 이번 전쟁으로 피해 막대하나 漢나라도 이번 전쟁으로 사람과 물자의 피해는 헤아릴 수 없고 하북산동의 조선국과의 충돌도 일체 피하였으며 그 지역의 동이족 내란에도 간여하지 아니하였다. 우리 나라 역사 서적에 西土지역의 大小전쟁을 내란과 漢寇의 구분을 하지 않고 기록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진시왕에 의하여 멸망한 연은 유방의 한나라가 진나라를 대신하여 영유한바 되었다. 진나라를 멸한 후 漢 중왕 유방과 楚 覇王 항우는 중원의 주인공 자리를 두고 七年간의 혈전을 벌여 유방이 승리를 거두어 한나라의 왕으로 등장하였다.

 

   十三. 韓信의 죽음과 英布의 반란
 

한나라에서 한신은 전시에 총대장이였으나 봉토를 주지 않고 회음후에 봉하여 함양에 두었다. 그것은 하나인즉 옆에 두고 감시함이요 둘은 영포 팽월 같은 한신의 부하였던 사람보다 하위 벼슬을 주어 불평을 토로하여 반심을 나타내게 하여 除去하는 명분을 찾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차마 자기 손으로 죽이기에는 너무나 생사고락을 같이한 情分과 功績때문에 주의의 눈총이 두려웠다. 그는 모든 것을 여후에게 맡기고 전국을 순수하고 다녔다.

 

마침내 한신은 반심을 나타냈다. 잠복한 간자의 밀고를 받은 여후의 초청을 받고 입궐하다가 궐문 안에 매복한 무사에게 포박되어 여후앞에 꿇어 앉아 한탄하였다. "내 일찌기 괵도사가 전하기를 지금 兵權을 잡고 있으니 일어서면 항거할 능력 있는자 없고 그 명성은 만민이 따를 만하니 곧 거행치 아니하면 화가 미칠것이니 장군은 유방을 믿고 있으나 유방은 장군을 두려워하니 그 손에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제 그 꼴이 되었으니 후회 막급이라!" 하고 천하를 호령하던 대장군 한신은 한여자의 명령하에 목이 떨어졌다. 이리하여 두 장군은 제거 하였으나 이제 영후 영포 한 사람이 남았다. 이에 여후는 앞서 죽인 팽월의 살을 오려내어 젖을 담아 모든 열후에게 사신을 보내 나누어주고 술안주로 먹게 한 후 황공하여 하사한 고기를 먹는 자는 의심을 아니하고 불쾌한 태도를 취하는 자는 반심을 품은 자니 자세히 살펴보고 오도록 명하였다. 한족은 당시 공자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대성한 문자 혁명과 동이족의 예의지국풍속을 익혀왔고 도덕관념을 깊이 연구 체득한 성인의 가르침을 받아왔슴으로 크게 개화하였으나 아직 그것은 유문사희 일부이고 서민 대중은 아직도 식인 풍속이 그치지 아니하고 사회도덕관념도 형성되지 못하였다. 이에 使者가 영포에게 "여후의 하사한 팽월의 고기젖이라." 하니 영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올라 머리털이 거꾸로 섰다. 팽월은 동고동락한 친구이자 동지였다. 영포는 알겠다하고 미루어 두고 먹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내심 '이 여우 같은 呂后년을 죽여 팽월의 원수를 갚겠다.'고 부하장군들에게 외쳤다.

 

때에 영포의 愛姬가 병으로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틈을 혁이라는 그 의사는 長者라 의논할 만한즉 만나자고 하였다. 혁은 함께 반란을 이르키자고 할까 두려워 병을 칭하고 만나지 아니하였다. 이에 화가난 영포는 혁을 체포코저 하였다. 이것을 전해들은 혁은 주야로 달려나가 유방에게 변을 고하였다. 고조는 상국 소하에게 이 일을 어찌 처리할고 물었다.

소하 가로되 "혁의 말을 그대로 믿지 못할 것인 즉 사람을 보내 그 진위를 다시 한번 영포를 만나 시험해 보아야 할것이라."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조사한 결과 과연 영포가 叛할 뜻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군신을 모아 놓고 대책을 의논하니 모두 군사들을 일으켜 치자고 하였다. 그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집에 돌아온 모사 등공은 그의 빈객 설공에게 무슨 좋은 수가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설공이 말하기를 "영포가 반하는 것은 조금도 괴이한 것 아니다"라고 하메,  등공 이 답하되 "上께서 땅을 떼주어 봉토하고 작위를 주어 귀하게하고 남면하여 만승의 왕이 되었거늘 무엇이 모자라 반할고?" 하였다. 이에 설공이 가로되, "전년에 팽월을 죽이고 왕년에 한신을 죽였으니 영포는 그 두사람과 같이 공을 세운 一體之人이라 다음 차례는 자기라고 생각함이라 하였다." 유방이 이 말을 듣고 설공을 불러 계책을 물었다.

 

설공이 말하기를 "영포가 반한 것은 당연할 것임이라. 이제 영포가 군사를 이끌고 산동으로 나아가면 그것을 상책이니 영포는 원래 산동사람이며 山東은 본래 한나라땅이 아님니다. 영포가 中計를 취하면, 그 승부를 점칠 수 없고 하계로 나오면 폐하는 베게를 높이 베고 편안히 주무실 수 있습니다." 이에 유방이 물었다. 山東으로 나가면 어찌 상책인지 설공이 다시 설명하기를, "영포가 산동으로 나아가면 동으로 오나라를 취하고 서로 초와 제를 어우르고 노로해서 연과 조 두나라를 어루만져 그 곳을 고수하면 山東은 원래 동이족의 조선제국이오니 그곳 주민은 조선족이라 번조선 과 합치면 지금 한 나라는 천하병마를 호령할 명장과 모사가 없고 영포의 鮮故地를 포기하고 한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폐하의 상책이요.

 

욕심을 부려 토벌코져 하다가 자칫 遼河에 있는 조선제국의 대군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되면 한 나라의 보존이 위태로울 것이옵니다. 영포가 東으로 오와西를 초와 韓을 취하고 위나라(이전 조선제국의 열후였음)에 의거하여 양곡을 쌓아놓고 요새를 지키고 성고의 험지에 의존하면 싸워서 승패를 모르옵고, 영포가 東으로 吳를 취하고 西로 채나라에 내려가 越을 중히하여 長沙로 돌아가면 이곳은 동이족과 인연이 그치는 곳이니 폐하는 베게를 높이 베고 편안히 주무실 것이옵니다. 하였다. (薛公對曰布反不足怪也使布出於上計山東非漢之有也出於中計勝敗之數未可知也出於下計陛下安枕而臥矣上曰何謂上計對曰東取吳西取楚弁齊取魯傳檄燕趙固守其所山東非漢之有也何謂中計東取吳西取楚弁韓取魏據敖倉之粟塞成皐之口勝敗之數未可知也何謂下計東取吳西取下取下蔡歸重於越身歸長沙陛下安枕而臥漢無事矣, 鑑紀)

 

설공이 또 말하기를 "필연코 영포는 하계를 택할 것이라 하였다. 上이 그 이유를 물은즉, 가로되 영포가 동이족으로 용맹을 당할 사람이 없고 用兵을 잘하여 제장이 경복하였사오나 그는 驢山之徒(여산지도)라 만승의 王이 되어 일신을 편하게 할 뿐이며 백성을 보살펴서 먼 장래를 설계하는 지혜가 없으니 우선 편한 하책을 택할 것임니다" 하였다. 그러하면 한나라는 무사할 것입니다. 여산지도란 불한당패거리출신이라 무예와 병법을 익혀 전쟁은 능하나 지도는 없다는 말이다. 또 산동은 원래 한나라땅이 아니다.(山東非漢地有也 鑑易)라고 말한 것은 영토만 조선 땅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 주민도 동이족이니 여기서 백성을 화합하면 지난날의 조선국의 제후국으로 돌아가면 중원은 다시 주인이 바뀐다는 것이었다. 이때 영포가 세가지 계책 모두 일차로 오나라를 든 것은 오에는 다수의 동이족이 살고 있어 영포의 고향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난날의 중원에서의 조선족의 오랜 내란 특히 上谷(북경)일대에서 오랜 전쟁으로 또 진나라와 연나라의 전쟁으로 주민이 번조선 동지와 조선반도와 요동만주로 옥토를 버리고 이주하였다.

 

사서등 여러 책에 피난하는 조선족과 한족이 요동과 번조선기준 영토로 이주하였다고 기록이 있으나 싸움이 조선 영토에서 조선족의 내란이고 진나라가 조선국에 침입한 전쟁에 한족이 피난을 올 것인가 이것은 연을 주나라왕의 열후로 기술 한 것을 글씨 그대로 해석함이라 그러한 기록은 한족의 관행인바 주가 연을 정복한 일도 없고 연이 주나라에 칭신한 일도 없다. 다만 중국의 관행적인 기록일 뿐이다. 중국의 자존적 기록은 대단군 조선제국도 그들의 제후국이고 일본(倭)도 유구도 일본왕 왜왕 유구왕 등을 봉하고 신하가 되어 조공하고 진동장군에 봉하고 하였으나 정복을 했거나 직접 관리 혹은 통치한 일이 없다. 다만 그렇게 기록한 것 뿐이다. 여기서 알아둘 것은 일본은 왕을 진동장군으로 봉함을 받아 그것을 큰 명예로 하여 일본왕 토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는 진동 장군으로 자처하고 그의 정부를 쇼군깨(將軍家)로 불렀다. 그것은 당시 일본의 문화는 대륙국가에 비하여 많이 떨어져있던 문화인 탓이지, 전혀 중국의 절제를 받은바 없다. 그런데 동이족은 그러한 봉작을 명예로 생각하여 받은바 없고 당나라시절 망국적 조선제국의 말기에 당이 마구 봉작을 내려 분열을 조장했다. 서북부 중원을 차지하고 동북만주요동을 차지하고 있는 동이족은 비옥한 농토와 광활한 목지를 가진 부유한 大제국을 형성하여 문화의 중심권이기도 하였다.

 

조선반도는 유목지가 없고 농토가 협소하여 극소수의 주민이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계속되는 전쟁피난민으로 인구가 늘어나 馬韓은 나라를 형성하여 만주의 부여국 一群등이 남하하여 合流한 마한은 다만 그들의 협소한 지방일 뿐 그들의 본국은 역시 중원이며 중원을 한족이 독차지하는 것은 당시는 상상조차 할수없는 일이었다. 부유의 실언으로 피난해 온 조선족을 한족이 귀화하여 조선사람이 되었다고 하였다. 영포는 과연 설공의 추측대로 下計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한고왕이 설공을 군사로 삼고 東으로 친정하여 영포를 멸하였다.

 

   十四. 盧관의 반란과 衛滿의 탈출
 

한나라 유방의 막료 중에 노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방의 죽마고우로서 뛰어난 재주와 지모가 있고 기모 준수하여 용역 과단하고 무예 출중한 유방과 좋은 짝이었다. 초패왕 항우와의 싸움에도 항시 호위장군으로 유방의 곁을 자유로이 출입하고 작전에 공을 세웠다. 항적이 해하일전 에서 강동 팔천 제자를 잃고 오강에 몸을 던져 죽음으로써 오군이 평정됨에 연왕을 봉하여 동북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그 인선이 극히 어려운 처지였다. 연은 진시왕이래 중국 영토로 편입되었으나 아직 그 주민은 동이족이며 번조선과 국경하고 공지를 두어 주민간의 교통을 분리하고 있으나 동족간의 제휴가 쉬운 것인즉 대 인물이 아니면 대임을 맡길 수 없는지라. 내심 노관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여러 의견을 듣고자 백관을 소집하였다.

 

유방이 이르되, "제장 열후 중에서 누가 연왕에 적임인가?" 하니 여기서 자격으로 보아서 장자방,한신,노관 삼인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장량자방은 이미 벼슬에 뜻이 없음을 밝혔고 한신은 한왕의 신임이 노관만 못하니 중의(衆議)는 노관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모두 입을 모아 "태위장안후노관이 적임이옵니다." 하였다. 그때 벼슬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이때 왕후에 봉작을 받은 자는 많았으나 한족식 명예직일 뿐 실권을 행사하는 왕후는 유씨 였다 따라서 유씨 외의 타성지인은 팔명에 불과 하였다.한고조가 노관을 연왕으로 봉하니 왕후들 중 행운이 연왕 만한 사람이 없었다. (上乃入?爲燕王諸候得莫如燕王者)라고 역사가 반사고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연나라는 동이열국의 서쪽에 위치하여 산물이 풍부하고 영토가 광활하여 동방군자국으로서 문화가 발달하여 중원의 각 민족으로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중원의 한족에게는 문명을 수출하는 대단군 조선 제국의 번한에 속한 열후였는데 자칭 왕이 되어 이탈함으로서 번한과 오랜 전쟁을 하였고 한족 열국과도 분쟁이 있었다.

 

그런데 진나라에 패망 당하고 진이 한나라에게 망하니 한나라 영토가 된 것이다. 연인은 동이족의 용맹과 의리와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진시왕 정이 중원을 통일할 적에도 마지막까지 항거하였으나 본국과 결별되었으므로 본국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하였다. 이러한 연나라는 옳은 주인을 만나면 크게 발전하여 중원에서 한과 겨룰 만한 강국이 될 소지가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열국과는 비교가 안되는 그 연왕의 자리를 노관에게 맡긴 한고왕 유방은 내심 아무리 심복이라고 하나 불안하였다. 노관은 일족 일당을 거느리고 연에 부임하여 군신의 하례를 받으며 연왕위에 오르고 동으로 성채를 수축하여 조선에 대한 방위에 힘쓰고 왕도를 복구하여 왕실의 위엄을 갖춘 후 백관을 모아 효유하여 가로되, "지난날 이곳 백성들이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려 피폐하고 바다를 건너 동으로 피난한 자 또한 헤아릴 수 없으니 실로 불행한 일이다. 이제 군비를 확충하고 양식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생업에 힘쓰도록 도울 것이며 조선을 침범하지 아니하고 흉노와 분쟁하지 아니할 것인 즉 조선의 경우 서로를 넘볼 틈이 없으니 우리의 방위가 든든하면 침범하지 아니 할 것이다. 그러나 국토 관리에 힘써 부강을 이룰 것인 즉 나의 이와 같은 결의를 성공하도록 힘써 주기 바란다"하였다.

 

이때에 한은 중원을 통일하여 열국제후왕을 전공에 따라 봉작 하였으나 아직 건국 초기임에 국내외의 반항 세력을 제어하기 위하여 각기 병력을 보유함으로 언제 어디서 반란이 일어날지 헤아릴 수 없는지라 조선 제국도 그러한 상황에서 분열과 내란으로 이 천년 대제국의 붕괴를 가져 왔던 것으로 이는 고대 국가의 공통적 애로였다. 유방은 국기의 안정을 위해 거침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열국을 순수하여 충성을 확인하고 내정은 여후가 소하 조참의 자문을 얻어 처리하였다. 그녀는 성격이 잔인하고 질투가 심하여 유방의 애첩을 돼지우리에 가두고 짐승 먹이를 주어 폐사토록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식들도 모조리 가두어 죽였다. 유방의 친척이 아닌 공신으로 영지를 가진 자와 명예직의 봉작을 가진 자의 경우 그 인망이 높아서 능히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도 있었다. 그런데 인물들도 이제는 전쟁이 끝나고 쓸모가 없으니 살려 두면 화근이 될 수 있는 즉 기회를 보아 처치 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왕 유방이 중원을 통일하는데 가장 큰공을 세운 자는 한신 영포 ,팽월이다. 이 세 사람은 수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특히 항적의 용맹을 감내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세 사람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이들은 여러 차례 포위 당하여 사경에 이른 유방을 위험 속에 몸을 던져 구해 낸 용사들이며 한나라의 천하 통일은 유악지중에 장량 수하 조참의 운수 지략과 밖으로는 한신 영포 팽월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한족의 중원 점유를 가져오게 한 영웅으로 받들어진 인물들이다. 여기 장량은 호를 자방이라 하였는데 꾀 많은 사람을 장자방이라 할만큼 세상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유방을 섬겨 전시에 대공을 세워 삼만호 봉토를 주어 열후에 봉함을 받았으나 그것을 사양하고 받지 아니 하였다. 그는 언행이 온순하고 용모 단정한 미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두뇌 명철하여 그의 계획 묘책은 백발백중하였고,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의 만류를 듣지 않고 유방이 자의로 행하는 정책이나 작전은 반드시 실패하였다. 유방과 여후의 사람됨을 거울같이 들여다보고 있었으며 유방도 자기의 마음속을 깊이 헤아리고 있는 그를 내심 두려워하였다. 자방은일찍이 한신에게 일렀다.

 

"세상 영화는 부운과 같은 것이다. 이제 장군은 한나라 통일을 이룩하였는데 대공을 세웠으니 이것으로 국가 민족을 위한 의무를 완수하였으며 또 그것으로 대장부의 꿈을 또한 이룬 것이다. 마땅히 나와 함께 속세를 떠나 노후를 편히 보내자고 하였다." 그것은 영화를 누리려 하면 유방이 살려 두지 않을 것임을 충고한 것이나 한신은 유방을 겉으로는 잘 알고 있었으나 깊이 알지 못하여 자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방은 속세를 떠나 적송자를 따라 동방군자국으로 입산하였으니 그 종적은 아는 사람이 없다. 또 그가 동이족인지 한족인지 아는 사람도 없다. 유방은 한신을 희음후에 봉하고 영포를 희남왕에 봉하고 팽월을 양왕에 봉하였다. 팽월은 용맹하나 지혜롭지 못하였다. 계략에 걸려 반란죄로 처형되었다. 유방은 또 낭중열후희 한신을 반한다 하여 참하였다. 이리하여 유일한 타성인으로 왕후의 자리에 있는 자는 노관 한사람뿐이었다. 연왕 노관은 이제 내 차례가 왔구나 하고 안절부절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이에 노관은 박사 위만과 상의하였다. 위만은 원래 동이족이라 연이 망한 후에도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망국의 슬픔을 주민들과 함께 하였다. 노관의 경우 연왕으로 부임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현지 동이족의 지도층 인사를 등용 하는 것은 자연적인 추세였다. 그리고 당시 미개한 한족 관헌으로는 동방예의지국의 국민 의식의 자존심이 강한 조선족의 마음을 순화할 수 없었다. 노관은 좌우를 물리치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연나라에 와서 본 즉 이곳은 나의 고향과 같이 친숙한 심정이 든다. 나는 고향에서 유방과 함께 교우할 적에 그곳에도 많은 동이족이 있어 동족의 정을 느꼈다 나는 연왕으로 봉작을 받은 것이 무한의 영광이라 여겼고 또, 모든 왕후장상들이 부러워하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 고민과 희한이 과인의 피를 마르게 하고 있다. 그대는 장자이니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릴 가르침을 받고자 하오." 하였다. 위만이 물었다.

 

"대왕께서 이곳에 오시어 만백성을 보살펴 편히 생업에 종사하고 기강을 엄하게 세워 탐관오리가 자취를 감추었고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어 풍요로웠던 옛 풍속이 차츰 돌아옴에 만백성이 대왕의 은덕을 칭송 하온 대 무엇이 걱정이 옵니까?" 하였다. 연왕은 이 말을 듣고 한숨을 깊이 내쉬고 멀리 서쪽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지라 조금을 기다리다 위만이 입을 열었다."신이 감히 생각 드는바 있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한왕폐하와의 군신지의 보다 그 옛날의 우정이 멀어질까 염려하는 것이 옵니다.신이 망언을 하였다면 용서하옵소서"하고 용서를 청하였다. "바로 그것이로다 공이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 좋은 계책이 있을 것인즉 사양치 말고 일러주기 바라오." 하며 위만의 손을 잡고 일으켜 가까이 앉게 하였다. 위만이 이윽고 대답하였다.

 

"지금 한왕께서 천하를 대정하고 자손 대대로 그 영광을 있게 하고자 장래의 화근(禍根)을 제거하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옵니다. 한나라의 화복을 좌우하는 인물은 칠인방으로 삼상(三相) 삼장(三將)과 연왕이라고 세상이 다 알고 있는 터입니다 그 중 제일인자로 꼽힌 장자방은 한왕의 마음속을 헤아리고 부귀영화를 페리와 같이 버리고 적송자를 따라 동방 봉래산 방장에 몸을 숨겨 속세를 떠났으며 소하 조참은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은 있으나 유문 장자에 불과하니 종결을 본 것이고 한신 팽월 영포 삼장은 이미 참하였으니 이제 대왕 한 분만 남아 있사옵니다. 그리고 한왕의 친족이나 여후의 친족이 아닌 왕후는 이제 대왕 한사람뿐이옵니다. 한왕께서나 더욱이 여후께서 천하사를 경영하는데 어찌 사사로운 우정에 매이겠사옵니까?" 하였다. 연왕이 가로되, "과인이 또한 그 일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는지라 장차 나에게 화가 미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소?"하니, 위만이 다시 이르기를 "이제 대왕께서 그 화를 면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장량을 본받아 황금의 자리 연왕위를 한왕에게 돌려 드리고 속세를 떠나서 먼 동방으로 신선을 찾아 나가시면 한왕은 필연코 대왕의 가솔을 거두어 보전케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한왕의 변치 않는 우정이 옵니다. 그리고 둘째는 군사를 조련하여 병력을 증강하고 서북 방어 성책을 보강하고 서로 제(齊)와 친교하면 될 것입니다. 그 곳 주민 또한 동이족이 많이 살고 있으니 비상시에 도움이 될 것이고 동으로 번조선왕 기준과 연합하여 황하 서안을 선점(先占)하고 조선 제국 진조선왕에게 왕자를 보내어 조선 제국과의 친선을 확인하고 후원을 약속 받으면 한왕을 두려워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하여 삼분 천하하면 영토는 한왕만 못지 않고 인구 자원은 한왕보다 위일 것이니 한왕이 어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찍이 한신이 괵월의 삼분 천하 건의를 듣지 아니하였다가 일개 부녀자의 손에 복검이사(伏劒以死)하였고 팽월이 유용이무지(有勇以無智) 하여 동으로 조선과 제휴하여 삼분 천하의 계책을 선용하지 못하고 단지 용맹만을 믿고 서남에 웅거하여 한왕과 겨루다가 패망하였으니 천리가 이러 하옴에 대왕의 현명함으로 스스로 정하옵소서"하였다. 

 

또한 "지난번 희가 때를 놓쳐 결국 한왕이 선수를 쓰게 되었고 한왕의 명을 받들어 희를 한왕과 함께 공벌하여 멸하였다. 한왕은 첫째로 버거운 한사람의 공신을 제거하고 둘째로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왕의 한 팔을 꺽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 것인바 대사를 도모하는 기틀이 이러한 것이오니 지체 미결하면 화가 미치는 것이 필연 지사이옵니다. 물러 나가는 것 또한 천기(天機)가 있사옵니다. 그런고로 장자방이 삼만호왕후 봉작이 라는 파격적 처우를 즉석에서 거절한 것은 그 때를 놓치면 화를 자초한다는 것을 짐작한 것인바 봉작을 받아 부임하여 자리를 잡으면 자방의 마음먹기에 따라 유방과 상쟁하면 유방은 자방의 적수가 되지 않으며 유방은 의심이 많은 사람임은 세상이 다 아는 터이니 반드시 자방이 자리를 굳히기 전에 명분을 만들어 토벌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방은 이러한 유방의 품성을 깊이 알고 있음으로 이렇게 대처하였습니다. 양자 중 어느 것을 택하든 때를 놓치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오니 헤아리옵소서 신 또한 대왕과 같은 길을 가야 할 운명이 온대 대왕께서 자립의 길을 택하지 아니하면 어쩔 수 없사오니 이미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사옵니다" 하였다.

 

이에 노관은 말하였다. "공의 계책대로 라면 한왕과 결전을 각오해야 하는데 나의 병마는 지금 극히 미약하고 한왕은 삽시에 대군을 일으킬 수 있는데 어찌 항쟁 할 수 있으랴?"하니, 위만이 답하기를 "한나라가 지금 통일을 이루었으나 열국의 여러 민족들이 언제 반란을 일으킬지 불안하여 한왕이 순수(巡狩)를 그치지 않고 비유씨(非劉氏) 제후를 제거하느라 심히 인심이 불안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한왕을 침범하지 아니하면 한왕은 움직이지 아니 할 것 이 옵니다. 지난날 영포가 군사를 이끌고 연으로 들어 왔더라면 연나라 국민이 기꺼이 맞이하였을 것이고 대왕께서도 항전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와 연합하여 보전하는 것이 사책이 되었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한왕이 영포를 치려면 전국 대군을 일으켜 영포와의 전쟁이 아니라 장차 조선 제국 승부를 겨루는 대전으로 발전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니 한나라가 강성하고 조선 제국이 분열되었다 하여도 아직은 조선 제국에 맞설 생각은 없사옵고 진나라가 망한 후 많은 진나라 사람들이 서북으로 흉노에게 돌아가 한인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흉노와 연계하여 침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사오니 장기적으로 대군이 출전하면 함양과 낙양은 가루가 될 것입니다. 감히 치지 못할 것이 온대 영포가 그의 동족의 나라 연이 한왕의 심복인 대왕께서 지키고 있다는 그것만을 염려하고 연나라 백성들이 호응할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남으로 월에 의지코자 하니 한왕이 마음놓고 토벌한 것입니다. 지금 한왕이 쉽게 대왕을 칠 수 없는 것이 역시 이와 같은 이치이옵니다. 대왕께서 하루속히 병력을 보강 조련하여 정예병으로 무장하면 동이족은 용맹무겁하여 번조선 기준과 연합하고 제(齊)와 조(趙) 또한 제휴할 수 있으니 한왕이 대군으로 출병해도 자방과 한신 등이 없는 한 능히 감당할 수 있고 다행히 연나라 국민이 대왕의 선정에 감복하여 잘 따르고 있으니 나아가서 한중왕에 오른 후 한왕을 쳐서 천하를 쟁취 할 수도 있습니다" 하였다.

 

노관은 원래 세심하고 영리한 성품이라 결단을 내렸다. "내 마음을 정하였으니 공은 곧 병력 보강의 조처를 취하고 병마를 조련하는 일에 전념하라. 내 친히 국경 방채와 성곽의 보수를 돌아보리라 하고 일면 기준왕에게 격문을 보내어 상호 동맹관게를 확인하고 양국 국경 패수를 상호 준수하여 친선을 도모하고 전쟁 결과에 따라서는 상호 연합군을 편성하여 중원을 공략키로 한 후 왕자에게 명하여 단군조선 황제에게 가져갈 공물을 준비하여 떠날 차비를 차리게 하였다." 또 한편으로 상사 장승을 흉노 선우에게 파견하여 제휴할 것을 청하였다. 선우가 물었다. "그대의 주인 노관은 일찍이 유방을 도와 초패왕 항적을 쳐서 항적이 오강에서 기가 막혀 자살토록 계교를 꾸민 지묘 발굴한 인물로서 그가 유방을 따라 종군하여 음산에서 나와 싸운 일도 있어 그를 중히 보고 있는 터인데 한왕이 그를 특별히 중용하여 연왕의 대임을 맡겨 동(東)을 감시케 한 것으로 알고 있거늘 그대들이 우리 나라와 제휴코자 함은 한왕의 지시로 모략을 부리는 것이 아니냐? 내 그대를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하고 다그쳐 심문하였다.

 

장승은 이에 한나라에서 있었던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신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일들과 연왕의 지금의 처지를 설명하니 선우 또한 그 일을 탐지하고 있는 터라 일단 장승의 원로방문의 고초를 위로하고 당분간 그곳에 머물게 한 후 탐정을 연과 한에 밀파하여 실정을 탐문케 하였다. 그러나 천지운기는 언제 어디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할는지 운명이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기한 바와 같이 낭준열후 희는 조나라와 동이족의 국경을 경비하는 방위 병력을 관리하는 장군인데 예하 장병들의 일선 방위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군관민 초청 잔치를 개최하였는데 국경 지대이니 조선족과 접촉이 많음으로 사람들이 조선족과 내통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인심을 얻는데 힘써서 잔치에 빈객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니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희는 스스로 몸을 낮추어 지극한 태도로 연로자를 공손히 접대하니 주민들이 희장군을 칭송하고 군사들이 잘 따르랐다. 유방은 일찍이 명망 높고 실권을 가진 장수를 꺼리고 여러 방법으로 제거해 버리는 터에 희의 하자를 잡을 수 없어서 수하 심복 주창을 조나라 재상으로 임명하여 조후 희를 감시케 하였다. 이에 주창은 한왕을 찾아가 말하였다. "조후가 민심을 크게 얻어 인망 높다는 잔치 지난날의 정황을 설명하고 이곳이 진시왕이 빼앗은 조선 제국 고토삼십군(故土三十郡)의 일부임을 상기시키고 조후 희가 마음만 먹으면 조선과 연계하여 능히 모반할 수 있으니 두렵다고 하였다." 한왕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곧 토벌하리라" 하고 출사 명령을 내렸다. 한왕은 '희를 제거하는 기회를 잡았다.'라고 생각하였다.

 

항상 희의 인망과 유능함이 마음에 걸려 동이족과 접경한 이 지역에 유씨 성을 가진 자를 배치코자 하여도 희를 제거할 명분을 얻지 못하다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칠세라 불시에 출전하여 희가 미처 준비하지 못하게 신속히 진격하였다. 그리고 동으로 연의 노관으로 하여금 진격케 하니 희가 황황망조하여 크게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한왕에게 유린되니 크게 한왕을 보고 외쳤다. "내가 폐하를 배반한 것이 무엇이오!" 한왕이 말하였다. "너는 여기서 방위 노력은 하지 않고 민심 얻는데 만 열중했으니 그것이 반심을 품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하니 "내가 주인을 잘못 만났구나"하고 탄식하였다. 유방도 희를 진멸하고 탄식하였다. 그가 아무런 허물이 없음을 알고 있슴이다. 유방은 희를 진멸하고 친척으로 조후를 봉한 후 철수하였다. 이로써 전국 열후중에 친 인척 아닌 봉후는 연 왕 노관 한 사람뿐이고 또 가장 크고 중요한 왕국이었다.

 

자연 세상 사람의 이목이 연으로 살피었다. 이와 같이 희가 완전 패망하기 전에 희는 조선에 구원을 청하고자 하나 연왕 노관이 동북에서 공격하는 조선에 사자가 갈 수 없고 흉노에게 사자를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아마도 전쟁이 조금 지체되어 구원군이 들어가서 조후 희가 안 죽었다면 세상은 크게 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행운은 한왕 유방에게 있었다. 결국 조후 희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지라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희의 구원사와 연왕의 구원사 장승과 흉노국에서 만나게 되고 흉노의 항자가 한왕에게 연왕의 모반을 밀고하고 희의 구원사가 흉노국에서 돌아와서 장승과 만난 사실을 한왕에게 고했다. 연왕은 장승이 돌아오지 아니하니 흉노의 선우가 안 보낸 것을 모르고 혹여 배반한 것 아닌가 의심하고 한왕의 소환에 칭병 불참하였다. 이미 반역이 들어 난 지라 미처 준비에 착수할 겨를도 없이 이 지경이 되였으니 이 어찌된 운명인고 노관과 위만은 하늘을 우러러 한 탄 하였다. 노관은 위만의 손을 잡고, "공은 조선국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나 이 몸은 돌아갈 곳이 없다"하고 탄식하였다.

 

이에 위만은 이번 반란 모의로 연에 머무를 수 없는 조선족 천여 명을 대동하고 번조선 기준왕에게 귀의하였다. 그리고 연왕 노관도 한왕의 토벌군이 이르기 전에 수하 한인을 이끌고 흉노국으로 피난하였다.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왕 죽은지 얼마 안되어 흉노국에서 쓸쓸히 죽었다. 여후는 함양 연왕저에 있던 노관의 처를 지난날의 극진한 친교를 생각하여 해치지 아니하였다. 이 사건은 중원의 변화적 역사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위만은 일족을 거느리고 기준왕에게 가서 박사의 벼슬을 받고 군국 정사를 살피는데 능수 능난 하여 크게 성과를 올렸다. 그러한 위만의 능력을 보고 기준왕은 만족하였으나 한편으로 두려웠다. 한편 요동에는 단군 제국의 뒤를 이을 세력으로 고구려가 일어났다.

 

   十五 高句麗 大王 周夢(鄒牟) 天子位에 승차
 

一次 창해 戰役後 해모수왕의 君臣들은 大扶余를 (扶餘로부터 분리한 해부루王國) 정벌하여 天王位에 오를 것을 주청 하였다. 王이 말하였다. 우리 고구려가 그들의 속국은 아니나 大扶余王 해부루가 비록 허명이라 할지라도 단군 제국의 정통을 이은 天王位에 있으니 무력으로 정복하면 大義를 저버리는 것이니 해부루王이 스스로 물러날 때를 기다림이 옳다 하였다. 左·右에 서 이르기를 해부루王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天王位에 그대로 눌러 앉아 있으니 이대로 기다림은 국가에 害가 미치는 것이오니 이는 天帝의 뜻을 어기는 것이옵니다. 大王께서 양위하라는 書札을 써 주시면 使臣을 보내서 전하고 이해로 달래어 만일에 듣지 아니하면 정벌해 버림이 옳을까 하옵니다. 王이 이에 동의하여 해부루 二世 天王에게 讓位하라는 권고문을 발송하였다. 해부루 王은 해모수王의 동정에 관하여 첩자의 보고에 고모수가 군사를 이끌고 왕검 성으로 진격 해 올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정보가 속속 들어옴에 만조 백관이 전전긍긍하고 민심이 흉흉 하든 차에 해모수王의 使者가 온다 하여 모두 긴장하여 대기하고 있든 중 사자가 도착하여 표를 올림에 받아 보니 표에 가라대,

 

斯如盛也我軍杖義出征强攻凶寇以克難遼河之役矣玆以扶余王解牟漱二世謹表于大扶余國天王麾下矣裨王之麾下勇將猛卒善戰奮鬪卽帥將之智用兵運籌之策必中於決勝戰陣精兵之勇揚武千里之外以保全彊境於扶余聖域焉盖救恤生靈之災危此亦盡忠之信哉豈弗天命之所致乎今師?鄕而群臣公論於朝議則敵侵之禍於對備策也今方可渭海內危機之際陛下無爲尊坐之位焉古來君王者省悉民草之苦以篤勵勉行者治國之大道也本裨王竊惟今天王之威武未及於制禦外寇也又仁化之德未洽於萬民之望兮但只空守天王之大統的虛像也我使歷戰己過十余星霜千里地境於連戰討賊眞忠義之士不顧身命於死之效又難民之赤誠義擧暴骨壙野以今日之保全功有以也夫孤按于今如此難局者因於往年山東?海之役矣漢王劉徹不法越境以劃策爲圖右渠王矣天王有怨恨於右渠王之由兒不顧右渠之救援呼訴以傍觀其王儉之危渠孤立無援之境而只依我北扶余與高句麗之支援而我軍血鬪以擊退滄海之漢寇以保番朝鮮地境矣雖然還有中 原領土之危連接漢寇之進至遼水之境以招來今日之禍也誠此得罪於宗廟列聖之明而又失萬民之望矣豈爲應天理之循乎願察天下之大勢以避自招之困境卽萬民之幸甚矣 漏錄補記

 

(장하도다 충의로운 우리 군사 강력한 공격으로 침략자를 물리쳐 요하변 전역에서 승리하였도다. 이에 북부여王 二世 해모수는 대부여국 천왕 휘하에 글월을 올립니다. 저 비장 휘하 용맹한 장병은 선전 분투하여 장수의 용병 전략은 결승에 백중하고 병사의 용맹은 千里밖에 떨쳐 부여국의 성역(요동 만주)을 보전함으로서 백성들의 재난을 구하였으니 이 또한 충성의 신의로서 어찌 천명의 소치가 아니리요. 이제 출정군 장병이 돌아옴에 신료들의 조정 공론이 적침에 대비하는 결의를 하였고, 온 나라의 위기를 맞은 이때 천왕께서는 아무런 계책 없이 천자 위의 높은 자리에 앉았으니 예로부터 군왕은 백성들의 아픔을 자세히 살펴 부지런히 통치의 대도를 걸음이라 비왕이 저윽히 살피건대 폐하의 무력은 침략자를 능히 막지 못하고 大王의 어진 덕은 만민에게 미치지 못하니 단지 헛되이 대통을 지키는 허상이라 양 고구려는 지난 十여년 간 千里지경에 연이어 적을 토벌함은 참으로 충성스런 장병들의 죽음을 각오한 싸움으로 싸움터에 힘을 합친 난민들의 죽음도 백골이 광야에 흩어지는 희생 끝에 오늘을 보전하였으니 장할세라 그 공이여 돌이켜 곰곰이 생각건대 지금 이와 같은 어려운 시국에 이르는 것은 왕년의 山東 滄海 전역이 원인이라 한무왕 유철이 불법으로 조선 열국 번조선을 침범할 획책을 하였는데 天王께서는 과거 우거王에 대한 원한으로 우거王의 구원 호소를 무시하고 그의 왕검성 위기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다만 우리 북부여와 고구려가 지원하여 아군의 사투로 창해에 침입한 한구의 二十만 군을 격퇴하였으나 아직도 중원 영토의 위태로움은 멀리 요수변까지 이르는 오늘의 화를 초래함이라. 실로 종묘 열성조에 죄를 짓고 만민의 바람을 저 버리니 어찌 天理 순환에 응함이랴.  원컨대 천하 대세를 살피시어 곤경을 자초하는 일을 피하면 나라의 다행 지사이옵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使者가 말하기를 해모수王께서는 大軍을 이끌고 이리로 와서 陛下를 뵈올 날이 멀지 않다 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 양위의 용단을 내리시면 해모수王께서는 반드시 보답할 것 이옵고 大扶余王 관민의 안전과 운신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오니 신의 말을 의심치 마시옵고 영단을 내리 시옵소서. 이때를 놓치면 대 화가 미칠 것은 필연이옵고 참혹한 지경에 이를 것이 오니 깊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天王이 답하였다. 짐이 심사할 것이니 그대는 객사에 기다리라 하였다. 天王은 백관을 모아 놓고 의논하였다. 상국이 해모수王의 상소문을 본 후 상소문을 모두 돌려보았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들 이였다. 상국이 입을 열었다. 지금 고모수 汗이 한구를 물리치고 널리 민심을 수습하여 번 조선 창해의 흩어진 군사들이 그 휘하에 운집하여 군세는 수十萬에 이르고 백전의 功을 쌓은 맹장 용졸이 운집하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天下 열국이 分立 쟁패하여 폐하의 어명에 따르지 아니함이 이미 오래입니다. 저들은 왕검 성을 멀리 포위하고 진격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오니 결코 항전할 생각은 아니 되옵니다 하였다. 이어서 상국 阿蘭弗은 말하였다.

 

이제 양위하시면 해모수王은 폐하를 홀대하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그러 하옵고 臣은 일찍이 神의 계시를 받아 遷都할 것을 상주한 바 있사오나 이제 이곳을 떠나 새로운 도읍할 땅을 찾는 것도 역시 하늘의 뜻인 줄 아옵니다. 여기서 東으로 千里를 못 가서 가섭원(加葉原)이라는 곳이 있사온대 땅이 기름지고 山川이 수려하여 왕업을 이룰 천해지지(天惠之地)옵니다. 이곳을 떠나 천도하옵심이 좋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제는 阿蘭弗(아란불)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해모수王(解募漱)에게 사자를 보내어 양위하는 詔書를 전하였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정통성을 위하여 왕검 성에 受禪台(수선대)를 모아 대통을 이어 天子위에 오르게 하라고 청하였다. 해모수王은 五千의 호위병을 이끌고 왕검성(開原)에 입성하여 五龍車를 타고 百官은 白馬를 타고 전후로 호위하여 수선대에 이르러 오우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차고 수선대에 오르니 하늘에는 瑞雲이 나르고 풍악을 울리니 해부루王이 옥쇄를 올리니 사제(司祭長)장이 선위의 책서를 낭독하고 고천제를 올린 후 天子位에 오르니 백관 장상들의 하례를 받으며 대사령을 내리고 대연을 베풀어 군신을 위로하고 공훈을 포상하였다.

 

이로부터 해모수王은 天子라 칭하였다. 그리고 전 天子 해부루王을 가서라(加西羅)王에 봉하였다. 백관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해부루에 대한 봉작을 반대하고 반도 험지에 위리 안치하여 후환을 없이 할 것을 권하였으나 천자는 이를 허락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가시라王이 정성을 다하여 짐의 뜻을 따라 왕검 성을 명도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병란의 화를 면케 하였으니 짐이 덕으로 관용함이라 하였다. 일설에는 해부루 황제가 해모수의 공격을 피하여 백관을 이끌고 왕검 성을 떠나서 멀리 가섭원 즉 동만주로 갔다 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가서라王(東扶余王) 해부루의 후손이 훗일 고구려 황제와 전쟁을 벌렸기에 그러한 기록들이 나온 것이다. 고구려 역사 古기록이 없어 졌으니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여기서(東滿洲)라 한 것은 일정한 지명이 없고 요하 및 송하강 일대를 요동이라 하였다. 해모수왕이 인수한 대부여 영토는 어떠하였나? 현도의 北으로 千里이고 南으로 고구려와 같이하고 東으로는 파루와 西로는 선비와 접하고 北은 약수가 있었다. 여기 파루, 선비 등은 부여 동족이나 지역에 따라 그 지역 이름을 종족 이름으로 한족이 부른 것이다. 지방 二千里 땅으로 본래는 맥의 영토였다.

 

약수는 영주 유성 동남에 있는 요락수(饒樂水), 지금의 백랑수(白狼水)다. (扶余國在玄蒐北千里南與高句麗東與把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이와 같은 부여 영토는 고구려 영토와 합하여 고구려의 광역이 되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周夢 聖王의 이와 같은 영토 확장은 광개토大王 시대까지 중원 失地회복을 상당 부분 이루었다. 때에 해모수天王은 그의 庶子 위구대에게 그의 領土의 한 地方을 扶余 分國으로 물려주어 小왕국을 영유케 하였다. 그러나 위구대는 早死(일직 죽음)하고 그의 과부 西召奴가 후일 이곳에 와서 河南(하남)에 백제국을 창업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해모수 天王은 백관을 모아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리었다. 짐이 先王의 유지를 받들어 고리국 고토를 회복하여 옛 영광을 다시 찾고자 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고 帝國의 열후를 제휴할 처지에 있지 아니 하였더니 이제 天王位에 올라 天下에 뜻을 펼 때가 왔으나 짐의 나이 八十지년에 심신이 모두 기력을 잃으니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는지라 대권을 후사에게 선위코저 하나니 짐의 太子 졸본王 추모는 나라를 세운지 일천하나 富强을 이루었으며, 인성이 착하여 가히 경들의 바람에 틀리지 아니할 것인즉 그 차비를 갖추도록 하라 하였다.

 

군신들이 아뢰기를 그 일은 大王 만세 후에 시행하여도 늦지 아니 하오니 원컨대 옥체를 보존하소서 하며 일제히 재고할 것을 주청하였다. 천왕은 이르기를 짐이 국권을 맡아 경들과 함께 환란지간에 고락을 함께 하여 오늘의 영광을 가져 왔으나 이 모두 경들의 공이라, 이제 짐의 수가 다하였음을 스스로 알고 있음이라, 천명을 도망갈 수 없으니 어찌 하랴. 경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고 자중하고 짐의 뜻을 따라 차질 없이 행하라. 짐의 뜻은 이미 정하였으니 달리 짐을 권하지 말라 하니 백관이 모두 체흡하였다. 해모수王은 이제 고령으로 마상에서 광야를 달리며 적과 싸우는 야전생활을 끝내고저 天王位에 오를 때를 기다려 왔으니 이제는 자신 감내 할 수 없었다. 天王은 이전에 추모王과 사이에 父子간의 정이 오가서 옛날 하백녀 유화와의 관계로 거기서 태어난 자기 자식임을 인지하였으니 일찍이 그를 太子로 들이고 두 개의 고구려를 하나로 묶어 합치고자 하였으나 내부 사정으로 그대로 미루어 왔으나 이제 추모王의 세는 그 주위 列國이 항거할 수 없는 강국으로 등장하였으니 고리王國의 휘하 신료들도 이제 강대한 국가의 臣僚로 전환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일설에는 해모수王이 다른 嫡子(본부인 소생)가 없었다 고도 하였다. 졸본 고구려王 추모는 해모수 天王의 부름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북부여(일명:北고구려)국에 이르러 와병 중의 父王을 배알하고 天王位를 계승하여 나라를 합쳤다. 父王은 군신이 힘을 다하여 고토 회복의 대업을 성취하라 하고 지금 한무왕이 패퇴한후 다시 팽월을 대장으로하여 대군을 창해에 파견하여 또 다시 침략하니 창해의 한구를 반드시 격퇴해야 한다고 백관에게 이르기를 신王을 받드는 일을 짐에게 하는 정성과 같이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라 이르고 아들의 손을 잡고 이르대 나의 휘하 만조 신료는 충량하고 성실하니 크게 너를 도울 것이다. 추호라도 소흘히 하지 말라. 이른 후 이제는 여한이 없다 하고 숨을 거두었다. 해모수王은 父王을 따라 중원 고죽성에서 철수하여 이곳에 정착한 후 심혈을 기우려 나라를 세우고 生前에 헌신적으로 발해, 창해 요동 창예 등지에 침투하는 한군과 싸워 고구려 주몽의 도움으로 연승을 거두고, 한무왕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해진 한구의 집요한 침입을 막아내어 요동을 보전하고 창해에서 한구의 선봉 부대를 축출하여 우거王을 보호하는데 힘썼다.

 

    十六 周夢 皇帝의 崩御(붕어)와 黃龍國(황용국)의 滅亡
  

周夢 天王은 조선 제국 열후들을 병합하고 위적의 침입에는 선두에서 분전하여 격퇴하고 마침내 고리국의 영광을 이을 고구려를 창업하였으나, 후세에 와서 요동에서 백제와 싸웠다. 二十二세의 젊은 나이로 고구려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하늘은 이 불세출의 영웅에게 중원 故土회복의 기회를 주지 안하고 六十二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自朱夢立都闕升骨城歷四十年通典) 三國사기에 이와 같이 열거하고 한편으로 本紀 一편에 四十世에 죽었다고 하였다.(王昇遐時年四十歲) 통전을 인용하여 二十二세의 나이로 王位에 나아가 四十年을 在位하고 서거했다, 해 놓고 四十세에 죽었다고 하였으니 역사 기록이 이와 같이 모순을 많이 범한 것은 이 또한 무리한 고구려 기년 축소의 소산이라 보인다. 주몽天王은 太子유리에게 중원 고토 회복에 전력하라 유언하고 용성에서 붕어 하시니 산천 토목도 슬퍼하는 것 같다 하였다. 太子는 통곡을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들이 상의하여 太子를 위로하고 王位에 오를 것을 재촉하니 太子는 서서히 국장을 지낸 후로 미루었다. 이에 장사 마리가 아뢰었다. 지금 국내 제후의 향배가 무상하고 언제 한구의 난이 일어날지 기약할 수 없으며 흉노 모돈이 신조선을 파한후 이제 조선 제국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고 중원에서 한나라를 항복 받고 기세 등등하여 무슨 짓을 할지 믿지 못하는 터이옵니다. 이제 太王께서 승하하심이 해내위에 전해지면 天下가 진동할 것이오니 지금 즉일로 大位를 계승한 연후에 국상을 치러야만 만민이 안정을 찾을 것이옵니다. 국가 대사이니 결코 가벼이 생각지 마옵소서 하였다. 백관이 일제히 동의하니 太子는 울음을 그치고 보위에 오른 후 대사령을 나리고 변방에 특사를 파견하여 요새를 굳게 경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추모王을 東明성왕이라 추존하였다.

 

大권을 계승한 유리天王은 先大王의 유훈을 충실히 받들어 내실을 다졌다. 그러던 중 충실하고 현명한 송현비가 젊은 나이에 서거하였다. 현명한 내조를 해 온 王后를 잃은 유리天王은 큰 타격이었다. 유리 천왕은 새로이 두 왕비를 맞았다. 오천후의여 화의(禾姬)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한인의女 雉姬(치희)를 제二의 王妃로 맞아들이었다. 두 王妃는 모두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두 女人은 서로 王의 사랑을 끌어오기 위하여 경쟁하고 다투었다. 유리王은 그러한 애정 다툼을 막고자 두 사람을 한사람은 東궁에 한사람은 西궁에 거처하게 하였다. 天王은 어느 날 기산에 가서 여러 날을 머무르고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天王이 없는 틈에 두 사람의 王妃는 서로 다투었다. 그러나 화희가 치희보고 꾸짖었다. 너는 한가의 천한 계집이 왕실에 들어와 교만하게 구느냐 하였다. 원래 치희는 한인 포로의 딸로 그의 뛰어난 미모와 출중한 자질을 인정받아 天王이 후비로 들인 여인으로서 화희는 평소부터 치희를 멸시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王이 그를 총애함으로 마음속에 질투심이 폭발한 것이다. 치희는 나름대로 원래는 귀한 집 딸로서 그러한 멸시를 참지 못하여 궁을 뛰쳐나가 도망갔다. 天王은 궁에 돌아와 그것을 알고 말을 타고 뒤를 쫓았다. 그러나 치희는 분노하여 돌아오려 하지 아니 하였다. 사랑이란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새삼 느꼈다. 강제로 끌고 올 수는 있어도 사랑은 그렇게는 얻을 수 없었다. 天王은 나무 밑에 앉아서 종자를 물리치고 혼자 희한의 한숨을 쉬면서 먼 하늘을 쳐다보니 황조가 떼지어 나르고 있었다. 王은 허전한 마음을 노래로 달래었다. 「훨훨 나는 황조여 암쑥이 서로 의지 하네 나의 외로운 마음이여 그 누구인고 돌아오렴」 유리 天王은 그의 치세는 평온을 추구하였다. 중원 고토 희복에는 보다 신중을 기하였다. 이때 고구려 북녘을 점거하고 있던 선비(鮮卑)가 틈만 나면 침입 약탈하고 토벌 고저 나가면 험지에 숨고하여 근심거리가 되었다. 선비는 한나라 기록에는 부여 별종이라고 되어 있으나 선비란 한이 조선 족에 관하여 북녘을 오환 선비 비려 등 여러 호칭을 그때그때 부쳤으나 이들은 모두 조선 동이 족으로 조선 제국 말기 제국의 분열로 각자 분립한 조선 열후이다. 유리天王 十一年봄 묘당에 군신이 모여 방위책을 의논하였다. 天王이 물었다. 북막후 선비가 우리와 환친을 하지 않고 험지에 의지하여 틈만 보면 출몰하고 불리 하면 험지에 숨어 버리니 그냥 두면 국가의 화근이라 어찌하면 좋을꼬 하였다.
 

 이에 정서 장군 부분노가 출반주하여 가라되 선비국은 험고한 나라이나 용맹하여도 어리석은 성품이오니 힘으로 치기는 어려우나 모략으로 치면은 쉬운 것입니다 하였다. 天王이 가라대 그러면 장군의 계책을 듣고자 하노라 하였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미녀 첩자를 선비에 밀파하여 고구려는 허장성세로 강한 척 하나 기실 허약하고 군사도 적으니 약한 나라이다 라고 선전한 후 선비의 동정을 보아 계교로서 섬멸하면 되옵니다 하였다. 天王은 그 말을 듣고 과연 좋은 생각이다 하고 그대로 따랐다. 얼마 후 과연 선비는 침공 할 준비를 갖추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王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南으로 선비와 적대하였다.

 

선비는 용맹을 뽐내며 성을 나와 고구려 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 군은 일전을 패하고 후퇴하니 선비는 고구려 군이 비겁하여 후퇴함을 보고 마침내 성중 수비는 허술한 채 大군을 동원하여 진격해 왔다. 이때 부분노는 정병 二萬을 이끌고 사잇길로 깊이 선비 도성 위각산에서 멀리 바라보니 성중이 허술한지라 전군에 영을 내려 도성으로 진격하여 성채를 유린하고 성중으로 쇄도 하니 소수 수비군은 중과 부족이라 궤멸하고 고구려 군은 도성을 점령하고 성누에는 고구려국 국기가 올라갔다. 선비군은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경하여 군사를 돌려 달려가니 부분노는 선비의 요새 험지를 반대로 고구려 군이 점령케하여 선비군을 돌아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고구려 유리天王은 군사를 다시 돌려 돌아가는 선비군을 大군을 몰아 공격하니 전후로 협공 당한 선비군은 계궁 역진하여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선비국은 고구려에 속한 옛조선 열후로 돌아왔다. 天王은 부분노의 大공노를 포상하여 식읍(食邑)을 넓혀 후에 봉하고자 하니 이번 승리는 太王의 성덕이라, 어찌 신의 공이라 하오리까, 하고 부분노는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아니 하니 天王은 황금 三十근과 말 十四필을 하사하였다. 十四年봄 東부여王 대소(帶素)는 사자를 보내어 제의하기를 상호간 친목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王子를 교환하여 인질 하자고 하였다. 대소王은 고구려가 선비를 정벌하고 국역이 점점 커짐에 심히 불안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王子 三人이 모두 총명하여 인망이 두터움을 알고 계교로서 제거 코저함이 였다. 대소王도 다수의 王子가 있으나 출중한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고구려 天王은 太子를 불러 의사를 물었다. 太子 도절(都切)은 대소王이 해코자 하는 것을 짐작하고 가지 아니하였다. 대소王은 군신을 모아 의논하였다. 우리가 지금은 고구려가 두려울 것이 없으나 저들은 계속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북막후 선비를 병탐하여 날로 강성하니 지금 치지 아니하면 장차 화가 미칠 것이니 군사를 일으켜 공략함이 어떠한고 하였다.

 

군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대소王은 결단을 내렸다. 출정 할 것이니 제공은 이에 따라 만반의 출정 준비를 하라 하고 王은 친히 보기(步騎)五萬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요소를 궂게 지키고 출전을 자제하였다. 고구려 노장 부분노는 출전 방위 장군에게 일렀다. 엄동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병가의 꺼리는 바인데 대소王이 강함을 믿고 엄동 출사를 강행하니 우리는 응전 하지 말고 굳게 지키고 있다가 적의 변동을 보아 공격하라. 내가 천문을 보니 유성이 북에서 동으로 흘러 동부여지에 떨어지고 흑운이 西공에 밀집하니 장차 동으로 대설을 가져 갈 것이니라, 때가 아니면 움직이지 아니하고 편함을 가지고 피폐함을 급습하여 백중 승리하는 법이라, 지난날 태조성 王이 백전 백승한 전략이니라 하고 일러주었다.

 

한편 대소 왕은 전위군 五萬을 이끌고 진격코자 하나 적이 험고를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후군을 이끌고 오는 장수에게 우회하여 적의 측면을 치라 하고 적을 강공하여도 요새를 파하지 못하고 근심하든 중 대설이 내리어 그치지 아니 하니 군사가 움직일 수 없는지라 고구려 군의 기습을 두려워하여 퇴각 하니 무수한 동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유리天王은 太조 聖王과 같은 군사 대국에 자신이 없었다. 근시 교가 天王에에 진언하였다. 신이 전일 제수용 도야지를 잡기 위하여 위나암에 갔다가 그곳 지형을 살펴보니 산은 험하고 물은 깊어 지키기에 좋은 환경이고 한편으로 좋은 곡창을 끼고 좋은 목축지를 겸유하고 있으니 좋은 도읍지가 될까 하옵니다 하였다. 근신들은 유리天王이 일찍이 보다 견고한 도읍지를 원하고 있음으로 이와 같은 보고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天王은 여러 차례 답사 한 후 위나암성을 축조하고 二十 二年 그 지역 국내(國內)에 천도(遷都)하였다. 이것을 국내성이라 호칭한다. 설화로 보아 신도와 구도는 근거리로 보인다.

 

유리天王은 수렵을 즐겨 한 번 나가면 여러 날을 수렵에 몰두하여 도성에 돌아오지 아니함에 노상(老相)협부사 이를 간하여 국정을 소홀히 하면 선大王 의 창업이 수포로 돌아 갈 것이라고 극간 하였다. 유리天王은 대노하여 늙은이가 무슨 망언인가 하고 삭탈관직하고 내 쫓았다. 이일은 국가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 이후로는 신하들이 유리天王의 잘못된 처사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고 열후(列候)도 점점 떨어졌다. 유리太子가 天王位에 오른 후 天王은 나약하였다. 모-든 일에 겁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王子들은 출중하였다. 새로 太子에 봉해진 해명王子는 父王의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통치에 불만 이였다. 兄 도절太子도 王이 언젠가는 대소王에게 인질로 보내질 것을 생각하고 고민 끝에 죽었던 것이다. 해명太子는 王이 천도 후에도 구도(?都)를 지키고 父王을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해명太子의 용기 있고 현명하다는 소문은 황룡국(黃龍國)에도 전해졌다. 黃龍 國王은 강궁(强弓)하나를 사자를 시켜 가지고 가서 해명太子에게 바쳤다. 太子를 시험해 보려고 한 것이다. 太子는 그 활을 받고 힘차게 당겨서 부러뜨려 버렸다. 太子는 사자에게 말하였다. 이활이 약해서 부러졌다. 내가 힘이 세서 부러진 것이 아니라 하였다. 黃龍王은 사자가 돌아와서 보고하는 말을 듣고 놀라고 부끄러워하였다. 이런 일들을 太子를 음해 하려는 신하가 王에게 고하였다. 太子께서 강함을 뽐내어 黃龍王을 조롱하였으니 장차 국가 비상 사태가 일어나면 黃龍王은 적과 힘을 합쳐 우리 나라의 한편을 위협 할 것입니다.

 

太子가 太조聖王의 고도(故都)를 떠나지 아니하고 군사를 조련하고 있으니 혹여 간신배들의 오도하는바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은근히 太子의 불손함을 비쳤다. 天王은 이 말을 듣고 太子가 반란이라도 모의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즉각 사자를 黃龍王에게 보내어 太子가 무례한 행동을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 말과 함께 太子가 심히 불효하니 우리太子를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黃龍王은 太子를 한 번 만나자고 초청하였다. 太子는 초청을 받고 黃龍國을 향해 출발코자 하니 주위 종자가 충간 하였다. 황용 왕은 지금 아무런 만날 사유도 없이 太子를 만나고자 함은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이오니 혹여 불칙한 음모가 있을지 모르오니 가지 마옵소서 하였다. 太子는 말하였다. 내 命이 하늘에 있거늘 하늘이 나를 죽이고자 아니하면 누가 나를 어찌할까 보냐 하고 나섰다. 황용 왕은 죽일 계획을 하고 태자를 맞았으나 태자의 늠름하고 용맹한 모습에 감탄하고 두려워 감히 해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친절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내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세상에 저런 훌륭한 인물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이냐 유리王이 저런 大인물을 太子로 두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죽이려 하는고 하며 한탄하였다. 유리天王은 황용국王의 손을 빌려 죽이려 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즉시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령서와 함께 칼을 보냈다. 太子는 사자를 맞아 명령서를 펼쳐 보니 가라대, 내가 일찍이 도읍지를 옮겨서 안시성으로 왔으되 너는 따르지 아니하고 그곳에 머무르고 강함을 뽐내고 이웃 황용 국을 멸시하여 이웃간 정의를 저버리고 원수를 맺었으니 이 어찌 자식된 도리라 하겠느냐? 너 같은 불효자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법이니 여기 칼을 보내나니 이 칼로 자진토록 하라 하였다. 太子는 명령을 받고 불효자가 어찌 세상에 낯을 들고 살수 있으랴 하고 곧 칼을 들고 죽으려 하니 주위에서 말렸다. 사자가 비록 명령을 전달하여 왔으나 혹여 간사한 무리가 장난하는 수도 있으니 다시 하회를 보고 그때 가서 대처함이 옳은 것이오니 잠시 참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처음 장자이신 도절 太子께서 단명으로 세상을 떠나신 후 금太子께서는 정당하게 太子位를 이으시고 父王의 命을 어긴바 없사온데 불효란 千부당 하오며 간신배의 참언으로 大王께옵서 성총을 흩트린 일로서 어찌 쉽게 죽을 수 있사오리까 하였다. 太子가 말하였다. 전일 내가 황용국 사자가 가져온 강궁을 뿌려트린 것은 힘자랑이 아니라 황용국이 우리를 미약하게 여겨 넘볼까 하여 시위 한 것을 父王께서 오해 한 것이라, 이제 그것으로 이와 같이 불효라고 질책하시니 내어찌 父王의 命을 따르지 아니하고 살 궁리를 할 까부냐. 그러하면 불효의 죄를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이라 그대들은 나를 말리지 말라 大丈夫 마상에서 전장으로 달리며 적을 치고 나라에 충성을 해야 할 몸인 것을 어찌 방안에서 죽으랴. 하고 칼을 가지고 동원에 나가서 땅에 거꾸로 꽃아 놓고 말을 달려 그 위에 엎어져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방년 二十一세였다. 원로들은 그가 태조 성왕의 지난날의 기풍과 영특함이 같다 하여 대성 할 것을 기대 하였다가 이와 같이 죽으니 슬퍼하며 한탄하였다. 그러면 그 황용국(黃龍國)은 어떤 나라기에 天王이 그같이 중희 여겼는가. 유리 황제는 지난날 고구려가 선비를 토벌하여 항복 받은 후 선비 추장 모용보로 하여금 그 곳 중산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中山국은 遼동이 아니고 中原 北部 冀州地域이며 元來 조선 제국의 열후국이며 後日백제의 하남이다 모용보는 본국 고구려의 지원 없이 그 곳을 지키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그리하여 색노(索虜)역시 (동이족 별종)에게 영지를 빼앗기고 東으로 연나라 지경 황용땅에 와서 다시 일어나 터전을 닦던 중 모용보(慕容寶)의 동생 수하 장수 빙발이 寶를 죽이고 다시 진왕 고운을 멸하고 스스로 대연 천왕이라 하였다.(秦王高雲爲海夷憑跋所滅跋僭號自稱大燕天王 緯書) 빙발의 소재(小第) 문통(文通) 은 어린 나이로 모용氏 모살 음모에 참여하였다. 빙발은 종방형제등 二十三人이 차마를 부인이 몰고 숨어서 황용성에 잠입하여 공손氏를 멸한 것이다. 후에 문통 또한 음모를 꾸며 성공하여 연王位에 올랐다. 황용성(黃龍城)에 도읍을 정하니 황용국 이라 하였다. 王은 壯大하고 용맹하여 유리 황제는 심히 경계하고 충돌을 피하였다. 그리고 장차 고구려의 중원 진출에 그의 향배는 큰 영향이 있기에 중요한 존재였다. 황용국의 문통은 그兄 빙발이래로 대연 천왕이라 칭하고 동이족 왕국으로서 중원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중원에서 진(晋)이 위(魏)를 누르고 새로이 일어나서 강동의 손호를 정벌하여 서촉과 강동을 모두 병탐하여 강성함에 고구려를 뒤로 두고 진과 쟁패할 수 없었다. 

 

문통은 진주 사마염과 사돈하여 딸을 진의 태자비로 시집보내고 진국에서도 연주문통과 사돈하여 동방불패 고구려를 중간에서 막는 완충역할을 맡게하는 정약 결혼을 하였다. 이리하여 三국은 서로 견제하는 상태로 상당기간 평화를 유지하였다. 진주 사마염은 연주 문통에게 연태자의 입시(入侍)를 요청하였다. 혹여 고구려의 중원정벌을 도울까 염려하여 연태자를 인질코저 함이였다. 비록 사돈을 맺었으나 연과 고구려는 동족임으로 믿을 수 가 없었다. 그러나 문통은 내심 딴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고구려가 중원고토 회복을 노리고 있으나 진은 서촉과 강동을 모두 병탐하여 광대한 중원영토를 점유하고도 조선고토를 고구려에 넘겨줄 생각은 아예 없고 진주의 조부 사마애가 고구려와 약조하고 전후로 공손연을 멸한 후 공손연의 영토 전부를 점유하고 고구려에 그 고토(故土)를 돌려 주지 아니하고 있음에 불원 고구려와 진은 대전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시기에 중원을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태자 입조를 아니하였다. 이에 연나라 조정에서는 공논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에 산기상시 유훈이 연왕에게 상소하여 가라대 비록 서로 상혼하여 화합하였다 하나, 태자의 진조 입시를 안하고 있다가 위가 대거침입하면 나라가 위태하니 진은 오나라와 연나라보다 강대하니 우리가 대국을 섬겨서 태자를 입시케하고 연후에 이산한 백성을 모으고 창고의 곡식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농산을 장여하여 부강을 이룬후라야 사직을 영구히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이 상소문을 받아본 문통은 대노하여 유훈을 사형시켰다. (世祖許之徵其子王仁入朝文通不遣侍子魏若大擧將有危亡之廬夫以重山晋氏燕弱于吳屬願時遣世子以恭大國之命然後收離集散厚布恩澤分賑倉庫以濟民之勸督農桑以激秋稔庶大業危而更安社稷可以永保文通大怒殺之)문통과 그 후 발은 중원 하북일대를 점거하고 위력을 떨쳐 한 때 중원 동북에 군림하였다. 빙발이 죽고 그 아들 홍(弘)이 왕위를 이었으나 또 다시 색노와의 오랜 전쟁으로 궁극에 패하고 고구려 故國壤王 시절 중원 東北部에 깊숙이 들어가 그 지역을 점유하고 있을 적에 고구려에 자진 투항한바 있다. 이리하여 황용국은 멸망하였다. 이 때에 고구려는 영주 평주 등 일대가 모두 고구려 영토였음으로 고구려의 별궁이 있던 북풍성(北豊城)에 투항해 온 것으로 보인다.

 

황용국 영토였던 용화주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였다. 그리고 太子의 죽음에 대하여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모를 섬김에 있어 곁을 떠나지 아니한다. 하나 옛날 주나라 무王은 문王의 곁을 떠나 武로서 제후를 굴복케 하는 등 문王의 생각과는 다른 행동도 있으나 불효라 하지 아니하였다. 해명太子가 父王의 곁을 떠나 있어 용기를 보인 것은 불효의 죄가 마땅하다 하였다. 그러나 무王이 그 아비 문왕의 뜻을 거슬려 용맹을 뽐낸 것과는 다르다 라고도 하였다. 또 전하기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용기(勇氣)있게 행동하는 것이 못마땅하면 좋게 타일러 선도할 것이지 타일러도 듣지 아니했단 말인가. 이웃에 실례를 저질렀다 하여 한마디 주의도 없이 곧바로 죽으라 한 것은 아비의 도리가 아니며 해명 태자는 그러한 命을 받았다고, 한 번 해명하고 용서를 빌어 보지도 아니하고 죽어서 아비로 하여금 자식을 죽였다는 불미스런 평을 듣게 한 것 또한 불효이니 이것은 곧 아비는 아비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한 것이고,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한 것이라 하여 후세에 王子 호동이 부왕의 명으로 자살 한 것과 같이 평하였다. 안컨대 옛날 동이족이 동방군자국이니 예의지국이니 하여 한무재가 번 조선을 칩벌하여 고구려의 법령 엄격하고 도덕 질서 정연함에 감탄하고 고구려의 서적을 반출하고 미처 못 가져 간 것은 모조리 없앤 바와 같이 그 도덕 관념이 충효 사상에 있어 지나친 정도가 아닌 가도 생각된다.

 

아무튼 동이족은 그것이 무너지지 아니하고 이조까지 이어왔고 지금도 차이는 있으나 그러한 도덕률은 우리 민족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옛날 대순(大舜, 禹舜)이 독장사의 아들로서 소년 시절 그의 계모가 모함하여 아비가 계모의 말을 듣고 순을 죽이고자 지붕 위에 오르게 하였다. 오른 후에 내려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치웠다. 순은 미리 눈치채고 올라갈 적에 삿갓 두 개를 가지고 올라갔었다. 사다리를 치운 후 그 집에 불을 질렀다. 순은 아비가 죽이려 하여도 죽지 아니하고 그 뜻을 어기고 살고자 삿갓을 양손에 들고 뛰어 내렸다.

 

순이 죽지 아니하고 아비의 뜻을 어긴 것은 아비로 하여금 자식을 죽였다는 불미스런 말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 효자라 하였다.순은 그 계모가 항상 모함하고 해롭게 하여도 계모를 정성으로 섬기고 악명이 밖으로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고 계모 소출 동생들을 우애 있게 선도하였다. 순이 세상 사람들에 지효(至孝)라고 평판이 높아서 원근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후일 만인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라 만세에 성군(聖君)의 칭호를 남겼다. 고구려의 해명太子가 이 같은 성인을 본받지 못한 고로 효자의 도리를 못하였다고 한 것이다. 유리王은 太子의 시체를 거두게 하여 죄인이 아닌 태자의 죽음으로 장사 지내고 사당을 지어 주었다. 유리왕의 첫王子는 대소王에게 인질로 보내려 하여도 아니 감에 핍박하여 고민 끝에 죽었고 둘째는, 이웃나라에 실수를 저질렀다고 죽었고 셋째 왕자 무휼이 남아 있었다. 무휼 또한 용맹하고 영특하였다. 중국 사서에는 용맹하여 폭군 같은 인물로 묘사하였다. 후일 대무신왕으로 중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천하를 호령한 인물이다. 유리天王은 그의 용맹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다른 王子가 없어서 무휼을 태자에 봉했다. 한편 東부여 대소王은 젊은 나이에 王位를 계승하고 혈기 방장하여 고구려의 늙고 겁많은 유리天王이 만만하였다. 협박하는 국서를 가지고 사자가 고구려를 방문하였다.

 

유리왕이 국서를 받아 보니 가라대 나의 선王은 고구려 주몽王과는 좋은 사이였는데 우리를 유인하여 우리 군신이 이곳으로 도피하였다. 군신이 옛 영광을 찾고자 힘써 오늘의 국가를 이룩하였다. 무릇 국가는 大小가 있고 사람은 장유가 있다. 적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 어린 자가 나이 많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기는 도리(道理)이다. 王께서 순리를 따라 나에게 순종하면 하늘은 반드시 그대를 도와 영구히 사직을 보존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보존코자 하여도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이에 王이 생각하건데 나라를 세운지 오래지 아니하며 先代의 列候는 흩어지고 백성이 불안하고 군사는 저들 보다 많지 못하니 일단 항복하였다가 다시 훗일을 도모함이 옳다고 생각하고 군신과 상의하여 회답하되 과인이 바닷가 구석에 있어 (발해北쪽 국내성) 예의를 듣지 못하고 이제 大王의 가르침을 받으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아니하오리까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무휼 태자는 父王의 나약함에 울분이 치솟았다. 그는 太子궁으로 사자를 청하였다. 太子는 사자에게 말하였다.

 

나의 선조大王께서는 천지 신령의 자손이라 어질고 총명한데 그대의 先王이 시기하여 父王(해부루)에게 참소하여 말먹이로 부리고 해롭게 하여 불안하여 탈출하였다. 이제 東부여王이 옛일을 부끄럽게 생각지 아니하고 강함을 믿고 우리를 경멸하니 사자는 돌아가서 고하라 하고 계란 꾸러미를 주며 일렀다. 이것을 大王께 바치니 大王이 이것을 깨면 내가 大王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섬기지 아니 할 것이다 하였다. 유리왕은 太子의 간청으로 항복을 늦추고 사자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부여王은 사자가 돌아와 계란 꾸러미를 바치며 하는 보고를 듣고 군신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고 군신들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을 본 한 궁여 노파가 아뢰었다. 계란 꾸러미는 자고로 누란(累卵)이라 위태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옵니다. 그것을 깨지 아니하면 편한 것이니 그 뜻은 대왕께서 자신의 위태로움은 모르고 남의 항복을 받고자 하니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생각을 바꾸라는 이치 옵니다 하였다. 王은 고구려를 칠 수 없음을 짐작하고 생각을 바꾸었다. 소년 太子의 지혜가 이와 같았다. 부르王 三十 一年 한나라 王位를 찬탈하여 황제가 된 왕망(王莽)이 사자를 보내 와서 예맥과 흉노를 함께 토벌하자고 하였다. 고구려는 예맥과는 서로 통하는 바이고 그들이 예맥이라 이름 부처 부르는 예맥도 고구려의 일족이며 흉노는 고구려와 서로 싸움을 피하는 사이였다. 고구려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한 나라는 중원 깊숙이 침투한 이들을 단독 격퇴하는 것은 어려워 여러 차례 사자가 와서 강요하였다.

 

이때 한나라는 중원에 침투한 고구려로 하여금 그들을 징발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흉노를 정벌코자 하였다. 그러니 東明聖王이 중원고토 회복을 위하여 파견하였던 사람들이라 끝까지 불응하니 한은 중원에 있는 고구려인을 징발하여 강제로 전선에 밀어 넘었다. 그들은 전쟁을 피하고 색위(塞外, 북경, 요서 지역)로 달아나 집단을 이루어 도리어 중원으로 되돌아와서 약탈하였다. 한王 왕망은 볼모로 잡고 있던 그들의 가족을 학살 하니 수十萬명을 매몰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중원에서 한과 동이 족은 싸움이 계속되어 왕망이 한나라 황제가 된지 三十年만에 망하고 광무(光武)가 한나라 유씨 정권을 중흥하는 기회를 잡았다. 왕망은 음우를 식혀 고구려를 치라고 하니 음우는 고구려와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고구려 대장 연비(延丕)에게 화친하자고 유인하여 암살하였다.한편 이틈에 부여는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유리王은 무휼 태자에게 동부여를 막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太子는 군사를 이끌고 나가며 첩보를 들으니 적의 병력이 훨씬 많았다.

 

정면 회제(會戰)으로는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진군을 늦추고 병역을 나누어 깊이 매복하였다. 부여군은 고구려 군이 부여 군에 비하여 훨씬 열세라는 첫보를 듣고 大軍으로 음습하여 준비할 틈을 주지 아니하고 왕검 성을 공략할 계책을 세우고 급하게 진격하였다. 大군이 고구려 진지를 습격코자 학밭령에 이르렀을 적에 함성이 크게 일어나면서 후군이 소란하며 복병이 후군을 급습하여 三군이 흩어지니 전군이 혼란에 빠져 제각기 도망하여 늪을 빠져 나와 산으로 올라가서 고구려 군이 겹겹이 에워싸서 군사는 배고프고 목말라 싸울 힘을 잃고 무참히 섬멸 당하였다.

 

무휼 태자는 이번 싸움에 수만 필의 군마를 얻고 부여王은 겨우 생명을 보전하여 도망갔다. 이후로는 동부여가 고구려를 침범하지 못하였다. 한나라도 그 동맹국인 동부여가 패배함에 중원에서 고구려의 침공을 막기 어려워졌다. 고구려는 지난날 제국의 열후로서 지금 한구와 연고를 맺고 있는 양 예맥국(梁濊貊國)을 노장군 오이(烏伊)와 마리(摩離)로 하여금 二萬騎의 정예군을 동원하여 정복하고 한이 전날 요서(遼西)에 있는 고구려 영토의一부를 점령하여 고구려 현을 설치한 실지(失地)를 공략하여 다시 찾았다. 그리고 한나라가 화친하자고 꼬여 대장 연비를 모살하여 그 수급을 경사 거리에 매달아 고구려를 파했다는 것을 선전하고 고구려를 하구려로 낮추었다고 선전한 한나라의 비겁한 행동에 고구려는 분개하여 중원의 동북과 서암지역에 침입 공격을 강화하였다. (其更名高句麗 爲下句麗 布告天下令咸知焉于是烙人愈犯邊東北與西南夷皆亂云) 유리天王은 태조 성왕의 창업을 소중히 지키는데 전력하고 중원고토 회복의 유언을 실천하는데 과감하지 못하였으나 태자 무휼이 그 일을 시작하였다. 유리天王은 三十 七年 十月 두 곡리 별궁에서 봉하시니 호를 유리명왕이라 추존하고 두곡동원(豆谷東原)에 안장하였다.

 

   十七 大武神王의 東부여 征服과 遼西經營
 

고구려는 무휼 태자가 보위를 이어 天子位에 오르니 이가 大武神王이다. 十六세의 나이 어린太子로 大軍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아가 각부 장군을 지휘하여 적을 격파하고 대공을 세워 나라안밖에 사람들을 놀라게 한 영걸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 영리한 장한 웅걸로서 큰 지략을 품고 있었다. 十七세에 등극한 大武神王은 부여 고구려를 입국한 해모수의 五世손이고 太祖 동명성왕의 三世라고 하나 (實은 四世이다) 二年 정월에는 수도에 큰 지진이 있었고 백제인 千여호가 투항해 왔다. 三國史記의 기록이다. 이 무렵 중국 사기에는 고구려가 요동에서 백제를 공격하여 고구려는 요동을 점유하고 백제는 요서를 영유(領有)하였다고 하였다. 미루어 보건대 백제人의 투항은 요동 고구려 본토에서 있었던 일임이 분명하다. 이때는 조선 반도에 아직 백제 국은 존재하지 아니하며 그럴 만한 개척된 땅도 인구도 없었다. 요서 군은 요령 서부와 하북 당산지구(北京南 天津地域) 동부 하북천 서쪽 낙정으로 장성 이남이다. (낙정은 낙랑군을 이른다.) (遙西郡遙寧西河北唐山地區東部河北千西 樂亭以長城以南, 漢魏總書) 四년 十二月 황제는 그의 숙원인 東부여 병탐을 위하여 大군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다. 부여 남쪽은 진흙토로 진격이 어려웠다.

 

재(帝)는 습지를 벗어나 평지에 진을 치고 불류수상 (지금의 송화강)에서 멀리 끝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키가 九척에 얼굴이 희고 눈이 빛나는 한 거한 (巨漢)이 나타나 어전에 배알하고 아뢰기를, 폐하께서 부여를 친다 하오니 소신은 북막에서 온 사람이 온데 이름은 괴유(怪由)라 하옵니다. 종군을 허락하여 주시면 부여王의 머리를 베어 휘하에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帝는 크게 기뻐하여 허락하였다. 또한 사람이 있으니 이름이 마려(麻廬)라 적곡리 지방에서 왔다. 하며 장창을 들고 앞장서 폐하를 호위하여 길을 인도하겠다 하였다. 王이 부여국을 향해 북진하다가 중간에 진을 치고 말은 안장을 풀고 인마가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이 광경을 첩자가 東부여王에게 보고하니 부여王이 때가 왔다. 하고 이르되, 적이 교만하여 적을 앞에 두고 말안장을 풀고 칼을 두고 쉬고 있으니 대군으로 음습하면 적은 대오를 이루어 항전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하고 전군에 命을 내려 신속히 포위하여 퇴로를 차단케 하고 스스로 一지 정예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 군을 직충 하였다. 그러나 적진 가까이 있는 늪지에 말이 빠져 진퇴 양난에 빠졌다. 이 때 고구려의 괴유가 칼을 휘두르며 비호 같이 달려드니 부여 군이 겹겹이 둘러싸서 항전하여도 만군중을 횡행하여 대성 일갈하고 번개 같이 달려들어 부여 왕의 목을 베어 들고 뛰쳐나가니 그 누구도 막을 자가 없었다.

 

고구려 황제는 부여 왕의 목을 베었으나 부여군에게 겹겹이 싸여서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갇힌지 5日만에 양식은 떨어지고 군사는 굶어서 싸울 힘도 없으니 하늘에 기도하고 살려 달라 호소하였다. 그런데 안개가 四方에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고구려 군은 풀을 베어 허수아비를 만들어 즐비하게 세워 놓고 사잇길을 해쳐 도망쳐 송화강 상류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야수를 잡아먹고 허기를 채우고 겨우 도성에 도착하여 보니 수萬名의 군사를 잃고 허다한 치중을 버리고 참담한 패배였다. 帝는 군신을 모아 놓고 짐이 경솔하게 부여를 치고자 진군 하다가 이와 같이 많은 군사와 물자를 잃었으니 이난 짐의 부덕한 탓이라 나의 과오로다 하고 상한 자를 위로하고 친히 조문 지어 전사자를 北문밖에 재단을 차리고 제사하며 통곡 하니 군신이 上을 위로하여 승패는 병가상사라 너무 슬퍼하지 마옵소서 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나라 사람들은 큰 희생을 치렀으나 결속하고 나라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다음해 三月에 큰말 百필이 동부여국을 떠나 고구려국 학발령 아래 차회곡(車廻谷)에 몰려오고 지난 전쟁에서 죽은 동부여 왕의 막내아우가 동부여 국의 장내가 어두움을 보고 부여를 떠나 갈사천 (曷思川, 송화강지류)에 한 무리를 이끌고 와서 나라를 세우고 백여 군사를 이끌고 압녹곡(鴨綠谷, 압록강 계곡, 즉 黑龍江변 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수렵 나온 해두국(海頭) 王을 습격 살해하고 옛 제국 열후였던 해두국을 점유하였다. 부여왕의 종제(從弟)가 국민에게 선포하였다. 이제 王이 전사하고 나라를 바로 세울 王弟마저 떠나서 갈사국을 세웠으니 우리에게는 나라를 지킬 능력이 없다. 이대로 있으면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니 이제 항복하여 생명을 보전함이 옳다 하고 고구려에 항복 하니 고구려 황제는 그를 반겨 맞이하여 연나부(椽那部)王에 봉(封)하고 주민을 무휼 하였다.

 

이해 十月에 天下 名將怪由가 죽었다. 帝는 궤유가 병이 무거워 소생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친히 괴유의 집에 납시어 문병하니 괴유가 울면서 신이 北막의 천한 출신으로 폐하의 거두심을 얻어 후은을 감격하고 있사온대 이제 폐하께서 이와 같이 친히 납시니 이 몸이 죽어도 은혜를 잊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帝도 눈물을 흘리며 장군의 용맹은 세상에 미칠 자가 없어 부여국이 공구하여 귀순하였는지라 장차 중원 회복의 대사를 함께 도모코자 하였거늘, 이 어찌된 일인고 하며, 손을 잡고 슬퍼하였다. 帝는 괴유의 大功을 가상하여 北망명산 양지에 장사 지내고 수묘인을 두어 춘추 재향을 지내게 하였다. 帝는 을두지(乙豆智)를 좌보(左補)로 재수(除授)하고 송옥구(松屋句)를 우보(右輔)로 제수하고 백관을 승차 한 후 항복을 거부하는 계마국(盖馬國)을 정벌하여 國王을 참하고 구다국(句茶國)을 항복 받아 주위의 옛 제국 열후들을 모두 항복 받으니 국토가 팽창하고 백성들을 무휼하여 국위가 떨쳤다.

 

이리하여 국토방위를 튼튼히 하여 기초가 여물었다. 국토 통일을 이룩한 고구려는 중원 쪽으로 눈을 돌려 요서에서 백제와 충돌하고 중원 故土회복에만 관심을 쏟고 조선 반도는 비록 고구려 영토는 아니나 동족이 몰려서 해가 갈수록 피난민이 불어서 세가 커져 가는데 거기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내버려두었다가 장차 동족 쟁패의 내란으로 이어지는 비극의 씨앗으로 발전하였으니 五百年후를 내다보는 강태공과 같은 위인의 없었음이라 할까?

 

후일 유일한 선구자 광개토大王이 단명으로 끝났음이 한스럽다. 이에 군신들이 王에게 아뢰었다. 지금 중원에서는 진시왕이래 王의 칭호를 황제라 부르고 문장이나 어법에서 王의 상위로 새겨 지금 한王 유철도 황제라 자칭하고, 변방 군웅들도 황제를 칭 하는 자 많사옵니다. 대단군 제국이 분열 와해 된 후 진왕 정(政)이 연을 멸하고 중원을 통합한 후 방약 무례하여 감히 황제라 일컬어도 단군 제국의 대통을 이은 대부여는 국역이 미약하여 진 왕의 망자 존대하는 방자함을 막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러 도처에서 황제를 자칭하는 자 생겼으니 지금 형편으로는 이들을 통제 할 수 없고 이 상태로는 천왕의 위엄을 지킬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사옵니다. 그리고 진나라가 망한 후 그 나라 국민은 한족에 동화하여 삶을 보전해 가는 형세로서 한나라는 연 나라가 망한 후 그곳 동이 족과 진나라의 진족 국민을 포섭하여 대국으로 성장하였으니 이제는 경시 할 수 없는 형세임을 인식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니 저들의 언동을 탓할 것 없이 우리 스스로 전통 자세를 확립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나라에서는 太祖 聖王이래 간이 황제 칭호를 쓰고 있으나 고정적 관행이 아니되오니 신료들이 주상의 호칭에 혼돈이 있사옵니다. 우리 나라의 大王칭호가 황제 칭호에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사오니 저들이 오만 방자하여 황제가 王의 위에 있는 듯이 호칭하고 있으니 우리도 황제 칭호로 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이일은 저희 신료 백관이 이미 의논한바 이옵니다 하였다. 대무신王은 말하였다. 과인은 王의 칭호가 은근하고 더 좋은 듯 하나 公 등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그렇게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황제 칭호를 채택하였으나 大王칭호도 병행되었다. 그러나 황제 호칭은 진시왕 이래의 칭호임으로 어색하였다. 과인이 학문을 하였으나 황제 칭호에 관하여는 아는바 가 적다. 그 자세한 것을 말해 보오 하였다. 이에 좌보 을두지가 아뢰었다. 원래 제(帝)란 단군 天王께서 天帝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하강하셨다 하여 나온 것인데 帝란 가장 높으시고 주재한다는 뜻이고 같은 때의 당요(唐堯)와 다음 우순(禹舜)을 공자께서 요재 순재라 일컬었사온데 진시王에 이르러 그의 신료 박사들이 王에게 고하기를 옛 五帝도 능히 하지 못한 天下통일을 大王께서 이루시었으니 天皇 地皇(천왕 지황)의 대업이라 마땅히 황제라 호칭해야 한다 하여 王보다 上位에 올라야 한다. 하고 자칭 황제라 하였사옵니다. 진王정(政)은 진王 초(楚)의 자식이 아니고 효문왕비 화양태후와 승상 여불 위와의 불륜의 자식으로서 진시왕은 한족이 진을 멸시하고 유학자들의 비평적 논리의 저서(著書) 등을 혐오하여 갱유 분서(坑儒焚書)와 같은 잔학 행위를 자행하였고 진시왕의 母 화양태후의 음란은 그칠 줄 모르고 여불위는 그의 불륜 관계가 공개적으로 논의될까 두려워 독이라는 장한을 자기 대신으로 화양태후에게 추천하여 독은 환관(부랄깐병신)이라 속여 입궐한 후 공공연히 태후의 내실에 출입하여 그들의 음란은 더욱 심하여 급기야는 독과 태후 사이에 다시 두 아들이 나고 태후와 독은 불궤(不軌)를 획책하다가 탄로되어 독과 아이는 죽이고 이사 건의 책임을 물어 여불위도 삭탈 관직하고 초나라로 추방되었다.

 

진시왕은 여불위에게 따졌다. 그대는 진나라를 위하여 한 것이 무엇이며 무슨 공이 있다고 승상 자리에 앉았는고 하고 질책하였다. 시왕 정은 여불위가 내심 자기의 친부임을 알고 그를 처형하지 아니하고 초나라로 추방하였다. 여불위는 쫓겨 나와 지난날을 희한하고 내가 남의 나라를 빼앗고 남의 집을 어지럽혔으니 죽음이 마땅하다 하고 자살하였다. (奪人之國而亂人之家以罪當死矣)당시 진족이나 한족은 화양태후와 같은 과부의 음탕 행위는 허물이 아님으로 조정에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군자국을 자칭하는 조선은 그를 화냥년(華陽女)이라 하여 후세에 음탕한 女子에 대한 대명사로 사람들은 그러한 행동을 멸시하였다. 孔子는 한족 사회의 도덕 개혁을 위하여 부녀자의 절개를 강조하고 二君不事 사상과 함께 一夫 從事를 설교하였으나 道가 행해지지 아니하였다. 진시왕을 위시한 진나라 조정에선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적녀(狄女)와 한족인 여불위의 사이에 나온 자식이니 진족이 아님으로 오히려 다행으로 일체 불문에 부치고 王으로 받들었으나 그 무례하고 교만함은 사후에 二世 또한 난행을 하여 불과 二世에 亡하였으나 대를 이은 한의 유방이 또한 그 제도를 따라 황제를 호칭한 것이옵니다. 그러면 자세한 제도를 말해 보시오. 을두지는 설명하였다.

 

一. 황제는 자칭 짐(朕)이라 하옵고 신민은 폐下라고 부르옵니다.

二. 그 말은 제조(提調)라 하옵고

三. 사관(史官)기사에는 上이라 하옵니다.

四. 소재(所在)는 행재소(行在所)라하고

五. 거처는 금중(禁中)이라 하옵니다.

六. 后는 성중(省中)이라 하옵고

七. 도장은 옥새(玉璽) 라 하옵니다.

八. 이르는 곳 (所至)은 幸이라 하고

九. 나아가는바 (所進)은 어(御)라 합니다.
 

一. 命令은 一曰 책서(策書)요

二. 二曰 제서(制書)이고

三. 三曰詔書요

四. 四曰 계서 (戒書)라 하옵니다.
 

一. 皇帝 皇后 王后帝는 모두 임금(君)이라 하옵고

二. 王의 영토는 王有天下라 하옵니다.

三.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단군 성조께서 天帝의 아들로서 세상에 하강하셨기에 天帝之子 天王, 天子 등의 호칭으로 중원의 여러 나라들은 감히 이러한 호칭은 쓰지 못하였는데 진시왕이 동이족인 연 나라를 정복하고 증원을 통일 한 후 단군 제국에 항거할 수 있다는 교만 방자한 생각으로 황제를 참칭(僭稱)하고 진나라를 멸한 한나라가 또한 진시왕을 본받아 황제 天子 등을 참칭하고 있으나 대단군제국의 분열로 이를 문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옵니다. 예로부터 天王, 天子 등의 호칭은 우리 단군 제국만이 쓰는 호칭이며 아비는 하늘과 같고 어미는 땅에 비유하여 天子라고 부른 것이며 그럼으로 天王, 天子의 호칭은 단군을 천재의 아들로 받드는 칭호로서 右代史書에 기록하되 동이 조선이 예로부터 부르는 호칭이며 天下를 통제하여 여기에 귀의한다고 일컬어 왔사옵니다. (故稱天王天子夷稱之所父天母地故稱天子之所稱歸往故稱天王天子夷狄之所稱天下之所?往, 通典)진시왕 以來 한나라에서도 지금 황제 天子 등의 호칭을 참칭하고 있으나 황공하오나 이제 우리가 저들의 방자함을 막을 수 없사옵니다.  (註, 요전 이전의 고대사는 공자의 고사 단서로 맥이 끊어지고 없으니 단군의 치적은 전해 진 것이 없으나 통전 위서 등에 관련 기록이 있어 古代에 황제 천자 등의 호칭은 조선 제국에서 통용했음을 알 수 있다. 보다 자세한 것을 알고자 하여도 남아 있는 고전에는 없고 하서(夏書)에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나 구덕 하지 못하였다.)

  天王은 다시 물었다. 그러면 天子는 天下를 통제하여 天下가 귀의한다. 하였음 즉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답하여 가라되 옛날 단군 성조께서 天下를 홍익인간의 큰 덕으로 덥고 天下만민이 여기 귀의하여 생업을 영위하여 왔사옵니다.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성교를 받드는데 소홀함이 없이 세상이 평화로이 오랜 세월을 화목하게 살아왔사옵니다. 그럼으로 天下귀의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으로 一. 天子는 밖이 없으며 天下를 집으로 삼는 것이니 天子는 바로 부르는 별칭이옵니다. 二. 皇帝는 至尊을 이르는 것이니 皇은 황황(煌煌)하여 빛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능히 天道를 행하는 고로 皇帝입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는 말하였다. 지금 중원에서 황제의 칭호가 쓰여진지 불구하거늘 이를 금하지 못하니 한스럽구나 경이 그 자세함을 빠짐없이 해덕 하였으니 과연 학식의 깊음을 알겠도다.

 

학덕과 경륜을 겸비하였으니 경은 짐의 여망(呂望)이로다 하고 칭찬하였다. 한편 연과 유주 걸안의 동이족 피난민이 바다를 건너 조선 반도에 이주하고 요동 만주의 숙진 예맥 말갈 등 동이 족의 남하 한 피난민이 농토를 개간하고 목축지를 조성하여 비로소 건국할 인구가 모였으며 기원전 마한 진한 변한 가야 등은 이름이 나라라고 하나 미미한 수의 인구로 추측된다. 중국 역사 기록에도 진시왕이나 한무왕은 오래 살고 싶어 신선이 산다고 하는 조선 반도를 바다 속의 험한 산으로 된 곳으로 감히 접근 할 엄두도 못 내고 불로초를 구하고자 여러 차례 행하여 태산에 제사만 지내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이 모두 호전 주의자로서 감히 조선 반도를 넘보지 못한 것은 요동 만주에 웅거하고 있는 동이 조선 제국이나 후 고구려와 대전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거니와 별로 사람이 살지도 않는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반도에 침입할 생각은 엄두도 못 내고 또 그럴만한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다만 태산에 올라 동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멀리 해중 삼신산에 신선이 산다는 곳을 향하여 정성을 들이고 신선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다가 두사람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러한 조선 반도에 가야라는 부락 국가가 반도 남쪽에 있었다. 후에 마한, 변한, 진한 부가 생기고 몇百年후에는 국가 형태를 갖춘 신라에 이어 백제 분국이 생겼다. 신라 백제가 조선 반도에 영토를 조성하고 있어도 고구려는 조선반도에는 전혀 영토적 관심이 없었다.

 

   十八. 衛滿의 번 조선王位 찬탈과 漢武帝의 蒼海패(敗)戰 및 歷史 왜곡과 古史書 破棄
 

大단군 제국이 三조선으로 분립한 후 번조선왕 기준은 위만을 맞아 그를 후대하였으나 위만은 야심이 충만하고 병법에 능통하며 기준이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랐다. 위만은 한구(漢寇)의 침입을 핑계로 병력을 동원하여 왕검성(험독, 후한서동 이전에 의하면 험독은 山東省登洲근처임)을 점령하고 기준 왕을 쫓아 버리고 스스로 번조선왕이 되어 진조선왕 조선 황제에게 정변을 상주하였다. 제는 그를 번조선왕으로 봉하였다. 한나라 사기에는 연인 위만을 한족 인양하여 위만이 동이의 의관을 하고 상투를 쫓고 연을 탈출하여 조선으로 가서 조선 왕이 되었다. 하고 또한 쪽으로는 東녘의 조선 왕들이 황조(皇朝, 大단군 조선 제국이 분열로 쇠퇴하니 한 왕도 진시왕을 본떠서 황제라 칭하기에 이름)에 조공을 하려 하여도 위만의 손자 우거王이 막고 교통을 끊었다 라고 앞뒤가 안 맞는 기록을 함. 위만은 번조선王이 된 후 서경의 성곽을 수축하여 방비를 강화하고 역내 제후들을 단속하고 병마를 보강하여 그의 통제에 불복하는 낙낭후 최숭(催崇)을 공격하니 최숭은 일당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여기 바다는 발해를 말한 것임) 남단의 왕검성(在平壤)을 점거하고 요하 발해 연안일대에 영지를 이룩하여 낙랑王(樂浪王)이라 칭하였다.

 

위만은 세를 확장하고 병마를 조련하여 그의 숙원인 서토의 동이족 결합을 위하여 연 나라에 버리고 온 백성들을 다시 규합하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병이 위중하니 그의 아들 손자들을 탑전에 불러 놓고 유언하기를 내가 연 나라에서 고락을 같이하는 동이 동족을 버리고 와서 영화를 누리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니라 연 나라 백성과 越에 흩어져 있는 동이 족은 옛 영화를 생각하고 있다. 大단군天王께서 九환의 백성을 三분하여 통치할 적부터 이곳은 번汗의 땅으로서 幽王, 燕王, 契丹王 樂浪王등이 모두 번汗王의 휘하 제후였다. 동몽선습에 통감을 인용하여 古我東方九種夷東有穢貊諸國西有幽燕契丹諸國北有肅愼抹鞨諸國此元來自爲東方別種夷 (이것으로 보아 연 나라가 亡하기 이전까지는 조선 반도에는 나라를 형성할 만한 수의 주민은 살지 아니하였다.)

 

이제 西에 있는 三개王국이 차례로 亡하고 백성은 흩어져 고초를 겪고 있으니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너희들은 명심하고 힘써 이루도록 하라. 그것은 곧 三국을 통일하여 동족의 아픔을 덮어 주는 일이다 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한은 흥성 하야 번한王이 영토를 회복할 틈은 나지 아니하였다. 한은 국내 정세가 안정되니 四 方面의 적들을 공격하여 국경 멀리 구축하는 원정에 착수하였다. 한나라 효경 왕은 남방의 월남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국경을 늘리고 동월을 공격하여 멸하고 北으로 흉노를 정벌하여 흉노를 멀리 쫓고 방책을 강화하고 東으로 번조선을 공격하였으니 우거왕의 반격에 부딪쳐 후퇴하였다. (是時漢方南?兩越東擊朝鮮北逐匈奴西戌大宛中國多事) 한서에서 말한 서술대완은 치뱃트를 이름인지 알 수 없음. 한은 三方에서 成功을 거두었으나 조선에서는 실패하였다. 한 왕은 번 조선의 우거왕에게 한나라의 봉작으로 조선王을 봉하고 중원의 한나라 열국으로 후원하겠다는 회유책을 썼으나 우거왕은 나는 조선帝國의 臣下라 한王이 어찌 이같이 무레하뇨 하였다.

 

다시 한무왕에 이르러 東으로 우거王에 대한 회유와 위협은 계속 되었다. 우거왕은 한나라의 강력한 방위망으로 西土의 확장 회복은 불가능이었다. 한무왕은 국세를 확장하여 국력을 키우려고 동으로 국토 확장을 꾀하였다. 그것은 곧 또 동이 족의 내란으로 발전하였다. 밀고 밀리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한무왕은 이때를 기회로 번조선 정벌을 위한 준비를 서서히 착수하였다. 漢은 진족뿐 아니라 중원의 수많은 종족과 파촉의 남만까지 同化하여 이제는 강력한 대국민족으로 성장하였다. 무왕은 北으로 흉노를 공격하여 그 세를 동·서로 갈라서 약화시키고 고조이래 흉노국 선우에게 바치는 조공도 중지하고 선우王에게 첩실로 바치는 한왕의 공주도 헌상을 중지하고 흉노왕의 문책 침입에 대항하는 등 한족의 오랜 수치를 설욕하고 이제는 東으로 눈을 돌려 동이 족의 분열로 와해 상태에 있는 단군 제국의 중원 동북 일대 열국의 분리 공략에 나섰다. 우선 동방의 조선 제국 열후들을 유혹하여 번 조선을 돕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자의 내왕이 있어야 하는데 우거왕이 요소에 경비병을 배치하여 막고 해로도 봉쇄하여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무왕은 백관을 모아 의논 끝에 우거王의 배후인 요동에 한 개의 교두보를 확보하여 장차 있을 수 있는 조선 제국의 지원군을 차단하고 겸하여 우거王의 배후를 위협하는 세력을 만들고자 요동에 출병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강력한 고구려 군의 출현으로 격퇴 당하였다. 때에 고구려는 중원 故土 회복을 노려 군비에 힘쓰고 있는 중에 뜻밖에 漢寇의 침입을 맞았다. 한무왕은 고구려와 十年동안 거침없이 발해 지경에서 싸우다 고구려와 부여 해모수의 뒤를 이은 大고구려에게 패 하였다. 그곳을 한나라 영토로 만들어 번 조선 정복의 기지를 만들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大軍을 파견하여 그곳 동이 족을 정복하고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으나, 반란이 계속 되고 근접한 연 나라와 제나라도 소동이 일어나고 고구려가 공격 해 오고 하여 막대한 소모전을 감당할 수 없어(相公) 공손홍의 간하는 청을 들어 철수하고 말았다.(公孫弘數諫以危罷弊中國以奉無用之地願罷之∼上乃許之春罷蒼海郡) 무왕은 이 전쟁에 패전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니 그 실상인 즉, 팽오(彭吳)를 대장으로 한 二十余萬의 군사를 동원하여 전장에 나가서 적을 죽이고 포로 한자에게는 큰상을 준다 하고 거기에 그러한 공로자에게 지급한 황금이 十余萬金이고 한나라 군사의 전사자가 十余萬名이며 군수물자와 선박 등의 비용도 이에 못지 않다고 하였다. (是時漢比歲金十余萬斤而漢軍死士馬者十余萬兵甲輾漕之費不與焉, 通典) 무왕은 바닥난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관직을 대량 매관, 매작 하고 무공을 뽐내고자 욕심을 부리다가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武帝之志荒矣豈非, 多欲之爲累裁通典) 이 전쟁에서 부여 해모수王은 중도에 서거하고 고구려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역시 국력 소모도 심대하여 大부여국의 쇠태를 가져왔다. 고구려도 주몽황제의 고리국 故土 회복의 大望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주몽황제는 창해 전역에서 승리하였으나 그해 四十年治世를 마감하고 六十二세에 세상을 떠나니 중원 공략도 중단되고 만 것이다. 周夢 天王 四十治年 漢元朔 三年 BC 138年이다. 무왕은 무수히 宮女를 두었다.(武帝多取好女至數千人嗔後宮通典)무왕은 好武功名하여 무공을 좋아하고 욕심이 많아서 수천 명의 후궁을 두었다고 한다. 그가 정복한 四方의 미녀들은 모조리 잡아다가 후궁으로 가두어 두고 공신들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없었다.무왕이 창해군에서 고구려에게 패하고 철수한 것은 고구려 건국年代를 가리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 광계토 大王비문에 왜(倭)가 대방(帶方) 경계에 칩입했다.

 

   *帶方郡 位置圖
 

비문에 기재된 지명과 같이 대방군은 한말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고 건안중의 여러 사기에 보이며 비문에 이르기를 왜가 대방지역 경계에 출몰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고 好太王이 백제, 신라 등 나라를 관활하고 숙진을 열병하고 왜놈을 소탕하였으며 위세가 삼한을 덮었다는 것은 반드시 증거이다. 한의 건안시대가 광개토太王 시대이니 한의 헌왕이 고구려의 영낙 연호를 중지하고 건안 연호를 썼든 시대라 약 180年을 이와 같이 고구려 年紀가 축소된 것은 확실하다. 七百余年이란 역사 기록은 오류가 분명하며 九00年 전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상 추측컨대 김부식의 三국사기에 역년을 감축한 것은 서한 말기 애왕(哀王) 평왕(平王)시절 고구려가 중원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위세를 떨쳤던 역사 기록을 유사에서 빼 버리고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예 그 시대는 고구려가 없었던 것으로 하여, 건국 연대를 낮추어서 기록하고 五胡 十六國 시절을 전후한 고구려 전성 시대 고구려가 중원 北부를 석권하여 당시 중원은 비록 한 시대적이기는 하나, 고구려 연기를 중원 열국이 사용했을 정도로 고구려의 위세가 중원을 호령하였다는 중국 측 기록도 있는데도, 후세 당나라의 위조한 사기에 나오는 고구려를 비하한 기록을 채택하여 고구려와 중원 북부 열국 즉 연(燕) 위(魏) 조(趙) 진(秦) 등 十六국 시절, 고구려와 옆에 있는 열국들과의 교류를 모두 고구려가 그들 나라에 조공했다고 당나라 시절 편찬한 사기를 그대로 옮겨 쓴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당나라 이전 당대(當代) 기록과 다른 것은 그 당시의 기록이 특별한 모순이나 하자가 없는 한 후대에 와서 기술한 것보다 신빙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틀리지 아니 할 것이며, 굳이 후세 기록을 채택하고 또 三國史記를 저술할 당시는 우리 나라 고사(古史)서 神秘集古朝仙秘詞大辯說朝代記周南逸土記誌公記表訓三聖秘記安含老三聖記元童仲三聖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修撰余所一白余券動天錦魔風錄通天錄中錄 地華錄 道銑漢都識圓史太白逸史 등등 古史가 있어 충분히 우리나라 正史를 편찬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이러한 참고 서적을 전부 배제하고 왜곡되고 위조한 흔적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당서 계통 사서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은 무슨 이유일까? 어찌 보면 그렇게 씀으로서 오늘날까지 三國史記가 폐절 되지 아니하고 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고 생각되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古代 正史 古代史 類雜記등이 없어진 경위는 唐의 고구려 침입 朝鮮時代 太宗의 古史수거 임진왜란에 약탈, 소각, 倭政時代 소위 明治王의 칙영에 의한 史書약탈, 서운각 소장古史의 日本史學者 今西龍의 약탈 소각 등으로 모두 수거 소각되어 오늘날 정사 편찬이 극히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다.

 

대단군제국이 개국이래 아세아 대륙의 중요 지역에 군림하고 문화의 기초를 뿌리 박은 우리의 正史를 비록 삐뚤어지고 축소되고 하였으나, 멸망하지 아니하고 이와 같이 남아서 활기를 찾고 있는 민족의 저력은 후세 자손에 희망을 안겨 주어야 할 것이다.

三國史記를 쓸 적에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지금 와서는 알 수 없는 일이나 더욱이 우리 나라 고사는 일체 채택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어떤 압력에 의한 저술임은 추측되나 무어라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당이세민은 한림원을 창설하여 박사들을 모아 본격적 역사 위조 사업을 강행한 자로서 그의 北적출신 횡폭한 성질은 누구도 그의 뜻을 거슬리지 못하였다.

 

唐 末 중국 사학자도 이러한 그의 행위를 인군 된 자가 춘추 대의를 모르면 가장 나쁜 것이다. 라는 말을 반드시 듣게 되는 것인즉, 당(唐)은 집안 법도도 없고 당 태종은 악(惡)의 우두머리다. (故曰爲人君父而不知春秋之義者必蒙首惡之名唐世無家法由太宗首惡也痛鑑)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漢族을 지배함에 있어서 포악 적이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수양왕을 섬기면서 그의 방자 무례함을 많이 본받은 것 같다. 수서에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에서 이겨 수나라 군사 三十만이 몰사하니 수나라에 사죄하고 조공을 바쳤다고 사실을 완전 전도하였는데 후세 당이 고구려에 패하여 백만 대군을 요동에서 잃고 당 태종은 九사 一생으로 도주하였는데, 여기서도 고구려가 使者를 보내어 잘못했다 사과하고 조공을 받쳤다고 하였다.

 

당 태종은 그가 수나라를 이어 당나라王에서 황제로 자칭하고 三년 七月에 요동의 고구려의 승전 경관(景觀)부터 파괴하는 일부터 시작한 철저한 고구려에 대해 원한을 품은 자이 였다. 지금 우리 나라 古代 正史가 국내에는 없어도 침략자들이 소각하고, 남은 일부가 일본이나 중국에 반드시 있을 것으로 추측되나 이것을 찾을 국력이 우리에게는 아직 없다. 그렇다고 식민 사학적이라고 보여지는 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는 교과서는 조속히 시정하여 후세 국민에게 역사관의 오착이 없도록 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된다. 삼국 사기에서 보여지는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年代 축소는 그것이 그 연대 축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로 인한 역사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큰 것이며 역사 年紀를 낮추어서 그 시대 史記를 빼 버린 것으로 당을 숭상하는 당 문학자의 비위에 맞추었다. 우리나라 사기를 기록하면서 황제, 황조, 天子 등의 존칭을 일체 쓰지 아니하고 신라가 황제 天子 등의 칭호를 중단한 것을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였으며 요동을 회복코자 하는 세력을 반동분자로 지목하는 등 당나라를 숭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정이 金泉市 南面 所在 옛 감문국 사찰 三층 석탑에 天官 十七年 戊戌에 세웠다는 碑文에 敬信大王 生母 朴氏를 照文皇太后라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皇帝칭호를 쓰고 故土회복을 꿈꾸고 있는 세력이 남아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大王, 太王 등의 호칭은 황제와 동격으로 쓰여졌다.

 

신라 高句麗人의 詩文을 당나라 학자들이 皇帝 天子 등의 문구를 빼고 임의로 문장 문구를 만들어 맞추고 元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대하여 皇帝, 皇朝, 天子 등의 호칭을 못하게 했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까지는 우리 나라에서도 中國과 同一한 호칭을 했다고 보여지며 모든 서적에 皇帝 칭호를 없앤 것은 李朝시대 들어와서 부터이다. 여기 중국의 호칭에 대하여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중국이란 한족이 그들의 나라가 중원의 중심지다 라는 자존심으로 중국이라는 대명사를종종 쓴 것이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 쓴 것은 요즘와서 생긴 일이다. 한무왕이 집권 초기 번 조선을 치기 위하여 팽오를 보내어 예맥을 (후한서에 高句麗一名貊耳, 고구려는 一名맥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치고 창해 군을 조선에 설치하였더니 이웃 연 나라와 제나라가 소동이 벌어졌다 라고 한나라 사기 식화지에 기록되어 있고 (武帝卽位數年彭吳察濊貊朝鮮置滄海之郡則燕齋之間?然 騷動) 또 후한서에 한무왕 원삭, 원년에 예君 남녀가 번조선 우거王을 반하고 二十八萬口를 이끌고 요동에서 漢에 항복하여 그 땅에 창해 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그 후 창해 군을 파(철수)했다고 했으니 이와 같이 약 十年간을 뺏고 빼앗기는 혈투를 하다가 종국에 파했다고 호도 한 것이다. 더욱이 한무왕은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르러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무왕집권 초기의 조한(朝漢)大戰은 한 고왕 후기의 초한(楚漢)七年 전쟁보다 못하지 않는 대전쟁 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 사기는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하고 그 결과를 창해 군을 파했다고(철수) 간단하게 기록하고 우리 국사의 기본 역사로서 간주하고 있는三國史記는 이와 같은 역사적 大 사건을 아예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또 전기한 예의 군후 남여(南呂)가 우거王을 배반하고 요동에서 한에 투항하여 二十八만 가구를 요동에서 창해군을 설치했다 하였으니 그 당시 二十八만 가구는 당시 조선반도 전체인구 보다도 많았을 것이고 우거왕국 번조선 인구에 비할 만큼 많았을 것임에 단군 제국 열후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 열후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예국 군후가 투항한 경위의 기록이 없고 전쟁으로 정복한 흔적도 없으니 필연코 물심 양면으로 희유 혁박 병탄한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곧 우거왕 정벌에 나설수 있다고 한무왕이 판단을 내린 원인이 되었고 창해군을 설치하고 우거왕의 번조선을 정복하고 동방제국 조선의 중원 진출을 완전 봉쇄해 버릴 정책을 수행하는 계기로 삼았다.

 

    十九 漢武王과 右渠王의 朝漢平和 交涉 失敗
 

한무王의 창해 패전은 한무王에게 위협이 되었다. 한무王은 지난날 東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목적으로 창해에 전진 기지를 설치코자 하다가 고구려에게 패하여 번조선 정벌을 중지하였으나 조선을 요동으로 멀리 밀어내고 싶었다. 한무王은 조선이 패수가에 공지를 점거하고 있는 것은 국경지대에 공지를 두기로한 옛 조약을 위반하고 국경을 침범한 것임으로 그냥 두면 큰 우환이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전쟁을 반대하는 측은 지난날 우거王을 멸하기 위하여 배후 교두보를 설치코자 오랜 전쟁을 계속 하여도 교두보 확보에 실패하였는데 평화로운 이때에 그러한 전쟁을 자청하는 일은 불가하다 하였다. 한무王은 내심 中原의 三方을 정벌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유족 東方 四夷(한서에 조선을 四夷라고도 한다 하였다.) 에게 敗하여 불쾌한 마음으로 다시 조선 정벌에 나서고 싶은 감정이었다. 지금 다시 조선을 정벌하려면 지난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좋은 계책이 있어야 하는데 그 어떠한 계략이 없는고 하였다.

 

주전론자들은 말하였다. 지난날 동이족을 가볍게 보고 시작한 전쟁으로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는 병력이 강성하여 지난날에 비할 바 아니고 재화는 국고에 가득하여 大戰을 치르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거王의 배후를 위협할 교두보도 필요없이 大軍으로 엄습하여 우거王이 준비할 겨를도 없이 서두르면 조선天王의 구원도 이루어질 겨를이 없을 것이옵니다. 이에 무王은 결의를 표명하였다. 짐이 三方을 토벌하고 東方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느니 이제 마땅히 힘을 모아 大事를 이루도록 총력을 모으라 하고 반전론을 용납치 아니한다 하였다. 이리하여 육해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한편으로는 우거王에게 친교를 맺자는 서한을 가진 使者가 파견되었다. 응하면 지난번의 예국과 같이 싸우지 아니하고 승리를 거두는 것이고 아니 들어도 방심토록 하여 급습코자 함이다.

 

그리하여 한무王은 출병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고 한편으로 우거王에게 마지막으로 친선 사절을 보내어 친교를 청하고 겸하여 번조선 형세를 살피고 오라 하여 涉何(섭하)로 하여금 방물을 갖추고 종자를 거느리고 험독 왕검 성에 번조선王 우거를 배알하였다. 우거王이 섭하를 보고 하문하였다.그대의 주인 한 왕은 이번에 무슨 일로 그대를 이곳에 보냈느뇨 하니, 섭하가 아뢰옵기를 신의 황상께옵서는 大王과 친교를 돈독히 하고 동녘 조선 열국과도 교통하여 친선을 도모코자 하와 이제 大王께서 길을 열어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소신을 大王전에 보내였사옵니다. 원컨대 교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우거王이 이 말을 듣고 사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교통을 끊고 내왕을 막는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어 그리 하는 것인즉 한 왕의 청은 들어 줄 수 없느니라 하였다. 습하가 그 세 가지 이유가 무엇이 온지 일러 주시옵소서 하였다.

 

우거왕이 말하였다. 한 왕은 전일에 친선 사절을 빙자하여 나를 비방하고 나와 동녘 열국간의 이간(離間)을 획책하는 간교한 걸로 利로서 유혹한 서간을 한 왕의 밀사를 체포하여 압수한 바 있으니, 한 왕이 조선열국과 교통코자 하는 것은 목적이 친선이 아님으로 이를 막는 것이오 둘째는 지난날 포악한 진시왕이 연을 병탐하여 동이 족을 괴롭히는데, 이제 한이 진을 멸하고 중원을 차지 하였은즉 연을 해방하여 자립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함에도, 그대로 진시왕을 답습하여 동이를 억압하니 이것은 양국간의 친선의 본의가 아니라 만일, 끝내 나의 충고를 들어주지 아니하면 장차 大禍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은 불원 적중하여 한나라의 쇠퇴를 가져왔다. 셋째는 이제 대단군 조선제국이 九환의 혼미로 天步 불순하나 대통을 이으신 王께서 왕검 성에 계시며 일찍이 殷과 周는 대단군 조선제국 天王에게 예물을 올리고 문후를 게을리 하지 아니 하였거늘, 그대 한나라는 周의 정통을 이었으니 전례를 따라 禮를 행하고자 하면 과인이 인도 할 것이나, 다만 교역을 터고저 길을 열라 하니 이를 허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돌아가서 이대로 전하고 한王이 교통을 트기에 앞서 친선 예를 행한다면 내가 양국간의 교통을 풀 것이고 한 왕도 황제를 칭함에 뜻뜻할것이니 그대는 돌아가 이대로 한 왕에게 일러라 하였다. 섭하는 한王이 목적한바 우거왕을 설득하여 한 왕의 후원을 받아 조선 제국을 이탈하고 독립 왕국을 만들어 동방의 동이 족을 막는 완충 역할을 맞는 지난날의 연과 같이 하고저 하였으나 그의 지조가 철저하여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돌아가게 되니 돌아가서 무왕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앞이 캄캄하였다.

 

우거왕은 약간의 답례품을 갖추어 비장으로 하여금 멀리 국경 초소까지 전송케 하였다. 사자 일행이 국경에 이르러 섭하는 간도가 두렵다 하여 한나라 초소 임유관까지 배웅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비장은 그를 한나라 초소 근방까지 배웅하였다. 사자 섭하는 갑자기 숨겨 가지고 있던 비수로 비장을 난자하였다. 그리고 재빨리 방채속으로 달려가 숨었다. 그리하여 섭하는 비장의 수급을 베어 들고 무왕에게 돌아가 고하였다. 조선왕 우거는 방약무인하여 교통을 틀 생각은 전혀 없고 폐하가 조선 제국 황제에게 친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황제를 자칭한다 하여 진시왕과 같다 하였사옵니다. 신이 폐하를 위하여 부끄럽고 분하여 오는길에 배웅하는 우거王의 大將 한사람의 목을 베어 왔사옵니다. 하고 그 수급을 쟁반에 담아 바치었다. 무왕은 분하여 우거王의 大將을 죽인 섭하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 공을 표창하여 요동 태수를 봉하였다. 여기 요동太守란 이름뿐이고 그 封地는 없은, 즉 이러한 봉작제도는 한족의 오랜 관행이나 봉토가 없는 명예만의 제후에게는 응분의 국녹을 주어 체통을 갖추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과의 국경수비에 파견 주둔토록 하였다. 한편 조선 우거王의 命으로 배웅 나갔던 비장의 수하 종자들이 돌아와서 비장의 참살 당한 사실을 王에게 告하니 우거王이 대노하여 무왕의 비겁함을 크게 꾸짖고 복수의 방책을 강구하더라, 한편 무왕은 중원 三方을 안정하였을, 즉 흉노의 혼사王(渾邪)을 항복 받아 北적의 침공 근심을 덜었을 즉 흉노를 막는 속국이 생겼음이라 지난날 한 고왕이 흉노에게 포로 되어 흉노 왕비의 은총으로 풀려났으나, 흉노에게 항복하고 조공과 王女를 흉노왕 선우의 첩실로 바치는 일을 한족의 참을 수 없는 수치로 엮어 왔으나, 이제 그것을 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單

 

때맞추어 동이 예王(歲)의 항복을 받아 소위 四이 정복의 大望을 이룰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동이족은 연이 망한후 대를 이어 예王이 비록 한의 명분상 列國이라 하여도 自治 王國으로 있다가 한의 핍박과 회유로 항복하기에 이르니 燕齊之間의 동이족이 一大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두 나라의 항복은 재물(財物)로 유인하여 성공한 것이고 兵馬는 그냥 위엄을 보여 위협을 느끼게 한 것이다. 중국 史官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武帝從事四夷以慧費中國不獨其征伐而然也如東夷?王等降而燕齊之間 爲之騷動匈奴暈邪王降而府庫爲之一空夫王者之於夷狄不誘其來不追其往使中國自爲中國夷狄則吾民可以無事而己也然則光武閉玉門以謝西域之質豈蚩不爲長策乎)

 

무왕이 동이를 치는 일은 재물과 무력으로 이루는 것이니 동이 예王 등을 항복받고 연과제의 두나라에 소란이 일어나고 흉노 흔사王이 항복함은 비용이 많이 들어 국고가 비워졌다. 무릇 이적을 다루는 대는 오라고 유혹하지 아니하고 가는 자는 쫓지 아니하고 중국 스스로 이적으로 하여금 따르게 함이니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 그러한즉 광무는 궐문을 닫고 서역나라들의 인질을 사절하였으니 어찌 좋은 정책이 아니라고할수 있겠는가. 한의 이러한 정책은 다시 한의 서역 통로를 중간에서 막고 있는 동이의 오손(烏孫)을 후한 폐백 재화로 초청하여 한과 연계하는데 성공함으로서 흉노의 오른팔을 꺾는 결과를 가져와 오랜만에 서역 통로가 트이게 되었다. 이와 같이 燕과 齊의 고토에 있던 예왕마저 한무왕에게 항복하니 조선이 연을 회복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난관이 생겼다. 우거왕은 백관을 모아 의논하였다.

 

전날 한나라의 使者가 나의 대장을 암살하고 도망갔으나 한무왕은 일언반구 사과의 말도 없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요동 태수로 임명하여 그 일을 오히려 표창하니 실로 의리 없는 오랑캐라 백성은 사람 잡아 먹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고, 조정 공경 대신은 공맹의 유학과 공자에 의하여 전파된 우리 동이족의 예법으로 교화의 공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군자 지도의 덕을 이해 못하고 있으니, 그들 행실 또한 흉측한 오랑캐 풍이라 이제 한족은 진족(秦族)을 위시하여 여러 종족을 융합하여 거족(巨族)을 형성하여 강성하니 지난날의 한족이 아니라 쉽사리 물리칠 수 없는지라, 그러나 우방의 대장을 그것도 자기를 호송해 주는 그 마음도 모르고 암살하고 간 범인을 공로자로 표창하고 벼슬을 내리는 무도한 오랑캐를 어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제공은 의견을 말하라 하였다. 상국(相國) 노인(路人)이 아뢰었다.

 

지금 한은 크게 흥성하여 四方이 안정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번조선 힘으로는 한을 치는 것은 섶을 가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저들의 행동이 불순하나 참으셔야 합니다 하였다. 또 大將 王?(왕겹)이 말하였다. 지금 우리의 군사는 十만에도 미치지 못하고 마필도 三만을 넘지 못하옵니다. 대전 발생하면 한은 수十만중을 동원하여 大戰에 임할 것이고 폐하여도 쉽게 보충할 수 있으나 우리는 한 번 폐하면 후원군이 없고 부여 왕금성에 帝國 皇上께서는 열국의 통합이 아니되니, 大軍으로 우리를 돕지는 못할 것이고 우리가 패하면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一, 二만의 구원 군으로 퇴각을 도와주는 것이 고작이옵니다 하였다. 王이 말하기를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수모를 겪고 있으니 이대로 있어도 저들은 대항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깔보고 정벌코자 할 것이라 하니 제장 막표들이 묵묵부답이라 중낭장 성기(成己) 가라대 무왕이 연에 예王을 항복 받고 燕齊의 동이 족을 제압하여 東城에 걱정이 없사옵니다. 그럼으로 지난번과 같은 야만 무례를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한무왕과 자웅을 겨를 수는 없다 하여도 이냥 지나칠 수는 없사옵니다 하였다.

 

그러면 문책사를 보내어 그의 죄과를 추궁하면 그의 사죄를 받아 낼 수 있을는지, 그 누가 한王의 사죄를 받고 요동 태수를 문죄할 수 있을 고 하니, 좌우 제신이 모두 그것은 불가합니다 하였다. 그것은 지금 한무왕은 군자가 아닙니다. 일찍이 先祖 大王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고왕 유방은 지방 소읍의 형장으로 진나라 말에 세상이 어지러운 때에 패거리를 모아 떠돌아다니다가 옛친구 노관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켜 요행히 천하를 얻은 자라 미개 몽매하여 대의를 모른다고 하였사오니 그 소자 무왕이 무슨 예절을 알겠사옵니까. 만일 우리의 사자가 가면 반드시 해를 입을 것이오니 사자 파견은 불가하옵니다. 따라서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요동 태수 섭하가 舊연나라에 머무르고 있으니 그를 토벌하여 멸살하고 돌아오면 일단 복수하는 것이오니 어떠하올는지 하니 제장들이 모두 찬동하였다. 이에 王은 장군 왕겹을 정서 장군을 명하고 니게(尼谿)를 軍師로 하여 기병 일만을 주어 일거에 한군 국경을 돌파하여 방채를 유린하고 국경 방위 한 군을 격파한 후 섭하를 잡아 참수하고 돌아왔다.

 

한王 무가 이러한 보고를 받고 대경하여 장상을 전원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무는 엄숙히 입을 열었다. 짐이 四方을 진압하고 해내가 이제 안정한데 유독 동에 조선이 끝내 수호를 거부하고 국경을 유린하여 군민의 피해가 우심 한지라 그들이 깊이 영내에 침입해 오지 아니하였으나, 아국의 국경 수호가 일거에 붕괴되니 장차 두려움을 금할 수 없는지라 제공의 의견을 말하라 하였다. 많은 대신과 대장들이 말하기를, 변조선王 우거는 오만불손하게도 폐하에게 항거하고 한과 동녘 요동에 있는 단군 제국과의 교통을 중간에서 가로막고 조선 제국 황제에게 예를 행하지 아니하면 길을 열 수 없다는 등의 망언을 하는자 이오니, 이번 기회에 군사를 일으켜 정벌함이 오른줄 아옵니다 하였다. 그러나 대신 반고는 말리었다. 이번 우거王의 범경은 전일 섭하의 불의(不義)에 대한 보복이 오며 폐하에게 不軌를 저지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四夷 불 정벌의 정책을 계속하고 무마의 술수로 다스림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고구려 등 조선 열국의 병마가 참전하면 동이 제국과의 大戰으로 확대될 것이오니 그렇게 되면 종묘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옵니다.

 

안전에 우거왕 만을 두고 대사를 결정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이에 여러 장군들이 입을 열었다. 지금 조선 열국은 내란이 끝치지 않고 패권 다툼에 몰두하여 우거王의 패망을 오히려 관망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무왕은 말하였다. 간자를 요동 만주와 남평양에 밀파하여 그 소식을 들은 후에 출사 할 것이니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 하였다. 그리고 동이 제국이 통합 안정되기 전에 우거王을 정벌하여 山東省과 河北省을 한으로 완전 편입해 버리고 요하西에 있는 양국간의 국경 空地도 한인을 이주시켜 한의 中原 占領을 이루는 기회로 삼을 것이라 하였다. 한편 우거王은 한武王의 好戰 기질이 그냥 넘어가지 아니할 것으로 판단하고 방위에 여념이 없었다.

징병을 서두르고 성곽과 방채를 수축하고 영내 列侯에게 참전 준비를 지시하고 나무를 베어다가 병선을 만들어 해전에 대비하는 등 거국적 노력을 하였다.

 

   二十. 漢武王의 번조선 侵攻과 우거王의 抗戰
 

王은 전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번조선을 도울 우군이 없다고 판단함이다. 제一선에는 燕과 齊에서 징발한 지난날의 전쟁 포로(주로 동이족)를 앞장세워 번조선 국경 요새를 격파하여 大軍의 진로를 개척하였으나(포로군은 이것을 한나라는 죄수軍이라 하였음.) 그들은 초전격돌 수개월간에 전멸하였다. 무왕은 초전에 패하고 다시 군사를 증모하여 그해 가을 二十萬大軍을 일으켜 출사할 새 누선 장군 양복(樓船將軍 楊僕)으로 하여금 軍士 五萬을 주어 齊나라로부터 발해로 나아가 조선군의 뒷면을 공격하라 하고, 좌장군 순체(左將軍旬)에게 軍士 五萬을 주어 山東으로 나아가 왕검 성을 공격하라 하고, 武王은 스스로 中軍을 이끌고 요하西江으로 나아갔다. 이에 우거王은 무왕이 군사를 이끌고 三路로 진격 해 온다는 급보를 받고 大臣과 將軍들을 모아 兵事를 의논하였다. 우거王은 말하기를 무도한 무왕이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침범하니 이를 물리칠 방략을 수립하자 하고 군사를 나누어 험지 요새에 웅거하여 나가서 싸우지 말고 지키고 있다가 적이 접근하거든 방위하여 공격하되 출격하지 말라 하였다. 그것은 적은 兵力으로 大軍을 막는 방법이고 敵은 병력 보충을 무한정 할 수 있으나 아군은 그것이 여의치 못한 탓이다. 한 군은 요동으로 진격하였다. 우거王은 백관 장수들을 격려하고 우리는 이미 방위책을 마련하였거니와 분신 쇄골 대단군 天王이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영토를 사수하기 바라오 하였다.  
 

때에 한 군의 선봉 부대는 죄수 부대를 선두로 파도와 같이 밀려들어 방책을 부수고 국경을 넘어 난입하였다. 이들은 물러서면 죽이는 운명의 죄수였다. 조선군은 第 二방벽으로 진격해 오는 노변 험지에 이미 복병하고 기다리다가 측면공격을 하고 후퇴하던 부대가 돌아서 협공하니 초전에 승승 돌진해 오던 한 군은 중간에서 포위되어 전멸되었다. 무왕은 의기양양 승전을 뽐내고 저 中軍장중에서 諸將을 독전하다가 무참한 패배를 당하고 조선 군의 역습이 두려워 좌우 신하들의 권유를 들어 함양으로 돌아갔다. 한무王은 이것을 체험으로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요동 원정에 나서지 아니하였다. 그는 신중하여 약수를 건너지 아니 하였음으로 무사하였다. 그러나 번조선王의 항복을 받지 못하면 一生 一代의 수치일 뿐 아니라 그의 호칭과 같이 武왕의 명성을 잃으면 연 나라 백성과 진 나라 백성 등 여러 이민족 열국의 반란을 불러 올 것임으로, 국력을 기울여 우거王 정벌에 전념하였다. 요서에 침공해 온 한나라 좌장군 순체는 朝鮮군의 방위 성채를 공격 함락시켜 주민을 약탈하는 등 행패가 극심하였다.  
 

한나라 군사들은 풍요로운 식량과 호화로운 의복을 보고 황홀한 딴 세상을 본 듯 닥치는 대로 약탈을 자행하여 미처 피난 가지 못한 주민의 피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한나라의 지휘관들도 동이국은 군자국이라고 들은 바는 있으나 이와 같은 문명국 인줄은 미처 몰랐다. 사병들이 딴 세상에 온 듯 약탈하고 설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조선 군은 점령당하지 않는 지역의 주민들을 피난케하고 미처 운반하지 못한 식량 의복은 불사르고 병력을 북해에 있는 도도국(陶塗國, 번조선 제후국)을 중심으로 집결하여 험지를 先占웅거하고 浿水를 엄수하여 보급로를 확보하고 도도국 병력은 해로를 막고 우거군은 육로를 막고 나오지 아니하고, 응전 하지 아니하고, 지키고 있으니 한나라 군사는 왕검성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러하니 누선장군 양복의 수육 十萬병력으로 단독 왕검성을 공격하다가 선발로 성하에 도착한 齊나라 군사 七千名은 성밖에 매복한 조선군의 기습으로 전멸 당하고 양복의 후속 부대도 우거왕이 독전하는 조선 군에게 대패하고 전군이 지리멸렬하여 겨우 五十군을 이끌고 산골짝으로 피하다가 난데없이 복병이 내달아 저기 오랑캐의 대장을 잡으라 하고 소리치며 달려드니 양복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날 곳을 찾으나 앞·뒤로 포위되어 갈곳이 없었다.  
 

그러자 누가 와서 장군은 소장의 뒤를 따르소서 하며 앞을 막아섰다. 양복의 심복 부장이었다. 그리하여 대모를 휘두르며 포위망을 뚫고 혈로를 개척하며 나가니 十여기가 겨우 뒤를 따랐다. 부장은 쫓는 조선 군을 가로막고 사투하다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어육이 되었다. 양복은 종자 數名과 함께 말을 버리고 山上으로 숨어서 생명을 보전하였다.
 

한편 좌장군 순체가 이끄는 요동 군은 왕검 성 城下에서 기다리며 고전하는 양복 장군에게 가는 길을 뚫을 수가 없으니 무왕의 죄책이 두려운지라 수하 동이족 장군 정다에게 一지군을 주어 선두에서 조선군 방위채를 파하지 못하면 군법으로 다스린다 하고 양복은 후원군을 지휘하여 조선군을 강공하다가 군사의 태반을 잃고 패퇴하였다. 좌장군 순체는 선발 대장 정다에게 패전의 책임을 덮어씌워 처형하였다. 이와 같이 전력을 상실한 순체는 패잔병을 거두어 조선 군의 추격을 피하여 야음을 타서 국경 패수를 넘어 퇴각하였다. 그리고 누선 장군 양복은 산중에서 十여일 을 숨어 있다가 조선 군이 성중으로 철수한 후 九死一生으로 하산하였다. 조선 군은 한나라 총수가 산중으로 도주하여 十日이 넘도록 하산하지 아니하고 四方으로 찾아도 찾지 못하니 굶어 죽었다고 단정하고 철수하였다.(王 右渠城守窺知樓船軍昭卽出城擊樓船軍敗散遁山中十余日稍求退散卒復聚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波, 漢書鑑記)  
 

좌장군도 패수가에서 조선군과 싸워 또 패하고 패잔군을 수습하니 살아남은 자 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멀리 조선군을 피하여 국경 넘어 퇴각하여 진을 치고 무왕에게 패전을 고하고 패전에 원인이 좌장군 순채의 지원군이 오지 아니하여 실패하였다고 하였다.
 

한무왕은 조선 원정군이 一派로 선봉군이 몰패하고 二次로 出戰 大軍 全員이 패귀하니 분을 참지 못하여 大小臣僚를 召集하여 선후 책을 의논하니 신료들의 의견이 화전 양론으로 의논이 분분하였다. 내가 傾國之兵을 일으켜 기필코 조선王 우거를 파하고자 하니 누가 총대장에 합당하뇨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일제히 그것은 불가하다고 간하였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패하였다 하여도, 조선王이 한나라를 얕보고 출병 침입하는 망동은 결코 하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조선 왕이 그 행동을 삼갈 것인즉 폐하의 위엄이 손상되지 아니하옵니다. 또 말하기를 한나라가 경국지병을 일으켜 조선 열후국의 하나인 우거王을 파멸했다고 하여 폐하의 위엄에 보탬이 되지 아니하옵고 지금 흉노가 조용하오나 폐하께서 공주를 단우에게 보내 주지 아니한데 한을 품고 있사오니 그가 언제 변할지 예측 할 수 없사오니 국가 전군을 동원하여 우거王을 치는 것은 자칫 대화를 자초하는 일이오니 깊이 살펴 주시옵소서 하였다. 무왕 가라대 大臣들의 충간은 이해할 수 있으나 짐이 이미 원정 대군을 잃고 이대로 앉아 있으면 백성들이 원망할 것이니 어찌 한을 풀지 않으리요 하니, 상국이 아뢰었다. 신에게 한 계교가 있사옵니다 하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 하였다.
 

지금 형세는 우리가 싸우면 불리합니다. 그것은 조선 동이족은 용역 표간하여 지난날 진시왕을 살신 공격한 사람이 모두 동이족이 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전쟁에 이겨서 기세 등등하고 아군은 패하여 의기소침하니 싸움을 피하고 다만 좌장군 순체와 누선 장군 양복은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진퇴 양난에 빠져 있사오니 병역을 원상 보충케 한 후 별도로 十萬의 지원군을 보내어 적을 위축케 하는 위세를 과시하며 항복을 종용하고 수만 금을 던져 우거왕의 장상을 매수하는 장기 정책을 쓰면 적을 가히 피할 수 있사오니 병마로 다투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아니되옵니다 하였다. 이에 무왕 가라대, 적을 휘유 하는데 어찌 그러한 거금을 쓸 것이며 성공하지 못하면 국고만 큰 손실을 입는 것이로다 하였다. 상국이 다시 아뢰었다. 지금 대군으로 승부를 다투면 몇십 배의 전비가 드는 것이 온데 어찌 기만 금을 아끼오리까 한 군중에는 연 나라의 동이 족이 상당수 있사옵니다. 그들 중에 우거王의 좌우 신료와 친교 있는 者 있사오니 쓸모 있는 인물을 골라 회유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옵니다 하니, 여러 大臣들이 그것이 상책이라 하여 권하였다. 무도 역시 군사로서 번 조선을 파하기 어렵고 다른 조선 열후의 동향 또한 헤아릴 수 없는 불덩이니 그 계책을 따르기로 하였다. 
 

무왕은 영을 내려 二十萬병력을 다시 증발하고 열국에 명하여 치중을 맞게 한 후 백만 대군이라 허장 성세하야 요동으로 진격하였다. 이 소식이 요동에 전해지니 왕검 성의 백성들도 불안하여 험독을 버리고 요하를 건너 만주로 피난가는 자가 무수하였다. 우거王은 백관을 모아 의논한 결과 중과 부족이니 싸워서 불리 할 것임으로, 왕검 성을 더욱 보강하여 성 외곽 험지 요소 요소에 방채를 만들어 왕검 성에 접근을 어렵게 하고 나가서 싸우지 아니 하면 적은 大軍이라 수천리 운량에 적의 허점이 들어 날것이니, 때를 가려 공격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왕검 성에는 삼년의 양식을 비축하고 도도국 도 의로운 도읍이 수십만중 大軍을 막아내기는 중과 부적이고, 더욱이 왕검 성이 수성 일변도로 접전을 회피 할 것임으로 밖으로 지원을 받을 길이 없으니, 도성을 폐하고 관민이 모두 요동 동역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도도국(陶塗)이란 지금의 진 황도로서 번 조선의 위성국이니 한서에 國陶塗國名也本 出兵國以爲名이라 하여 도도(陶塗)는 이 도읍이다. 여기서 도도국 太守를 고리 국에서 후퇴한 고두막한 (高豆莫汗)이 아닌가 한다. 한 군이 요동으로 다시 대거 침입하여 좌장군 순체와 누선 장군 양복이 다시 군사를 보충하여 옛 위풍을 갖추었다.  
 

한편 무왕의 특파 장군 위산은 수만금의 금폐를 가지고 군사를 이끌고 와서 패전한 두 장군을 격려하고 지난 패전을 검토한 후, 지난 경험에 비추어 도도국을 점령하지 않고는 왕검 성을 칠 수 없음을 깨닫고 전군이 도도 국으로 진격하니, 이미 폐허가 되어 둔병할 곳이 없는지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왕검 성으로 향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도도국 태수 고두막(가상)은 패수강서변에 일지 군을 매복해 두고 한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고 한군은조선 군이 멀리 달아났다고 안심하고 원로의 피로를 풀기 위하여 무장을 풀고 휴식에 들어갔다. 고두막한은 야음을 틈타 한군진지 가까이 병력을 집중하여 새벽녘에 일제히 하산하여 한군 진지에 돌진하여 닥치는 대로 휘두르는 창검 아래 한 군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몰 죽음을 당하였다. 조선 군은 한군 선봉을 섬멸하고 그 진지 방책을 모조리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한 군이 변고를 듣고 후속 대군이 도착했을 때에는 조선 군은 이미 섬을 건너고 있었다. 지난번에 좌장군의 전군이 몰패를 당하고 이번 다시 출병한 선봉군이 전멸함으로서 한 군은 고두막한을 신병(神兵)이라 두려워하였다. 한편 좌장군 순체와 누선 장군 양복도 왕검성하에 진을 치고 위산(衛山)도 대군을 왕검성 가까이 이끌고 나아가 시위를 하며 싸움을 돋구지는 아니하였다. 위산은 믿을 만한 동이 출신 장군 한사람을 자신의 장막으로 불러서 위산은 말을 끝냈다. 내가 황제 폐하의 어명을 받고 대군을 인솔하고 이곳에 와서 싸움을 주저하고 있는 것은 무고한 생명의 무한한 희생을 피할 길을 생각하고 있슴이다. 지난날의 이곳 싸움에서 수십만 생명을 잃었으나 이번 싸움에 백만 대군을 우거王이 어찌 항거 할 것이냐 성이 한 번 파하면 성중의 백만 군민은 씨를 말릴 것인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이러한 비극을 피하는 것은 항복하여 명예와 생명을 보전하는 일이라 지금 우거王이 미옥하여 끝까지 한王 폐하의 화해를 거부하니 그의 주위 장상을 달래어 항복케하면 그 공노에 따라 후작을 내리어 자손 대대로 영광을 누리게 할 것이니 그대는 왕검 성에 들어가 그들을 옛정으로 이해를 들어 설득하여 성공하면 그대 또한 열후의 봉작을 내릴 것이니 성심을 다하여 이일을 성공케하라. 하고 수만 금을 주어 성중으로 보내고 그대 가솔은 내가 보호하여 그대가 성공하고 돌아오도록 기다릴 것이라 하고 가족을 인질 하여 딴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검 성에 잠입하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아니하였다. 한편 위산은 사자를 시켜우거王에게 대화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성 가까이 나아가 마상에서 기다리니 우거왕이 제신을 거느리고 성누에 나타나서 위산을 보고 외쳤다. 그대는 군사를 이끌고 왔으면 싸울 것이고 싸움이 두려우면 물러갈 것이지 무왕의 말을 전하겠다고 하니 무슨 수작이요 하고 꾸짖었다. 이에 위산은 머리를 굽혀 예를 올린 후 말하였다. 소장이 오래 전부터 大王의 고매한 위명을 듣자옵고 이제 황제 폐하의 어명을 받들려 이곳에 와서 옥안을 우러러 뵈오니 영광이옵니다. 하고 이어 말하였다. 지금 한 황제께옵서는 거듭되는 전화로 도탄에 빠진 만백성의 고초를 더는 것은 양국이 화친하여 친목을 이루는 것이라 믿으시고 신을 사자로 이곳에 보내시었습니다. 太王께서는 皇帝폐하의 존의를 이해하시고 화친의 約을 맺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였다.  

우거王이 물었다. 당초 이 전쟁은 한王이 시작한 것이다. 이제 싸움을 그만두고 어떠한 화친을 하겠다는 것이냐? 하였다. 위산이 답하기를 지금 무제 폐하께서는 조선 국과 교통을 트고 산물을 교역하며 친선을 맺고자 하는 것이지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大王께서 끝까지 들어주지 아니하면 부득이 군사로서 결단을 내리려고 신으로 하여금 백만 군을 이끌고 이에 이르게 하였사옵니다. 황공하오나 大王의 소수 군사로서 끝까지 겨루고자 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옵니다. 大王은 군사는 十萬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성은 백만에 미치지 못하온데 싸워서 줄어드는 국력은 무엇으로 채울 것이옵니까. 곧 바로 양측이 모여 앉자 화의(和議)를 의논토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였다. 우거王이 말하였다. 나의 군사는 충정 용맹하여 一당百으로 百萬大軍도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무고한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대의 전하는 말이 한 왕의 진심이라면 의논해 보리라 하고 양자의 和議가 열렸다. 의제와 조건은 대화에서 이미 양해된 것이니 그 실천 방안이 의제였다. 이에 우거왕의 인준서를 가지고 직접 태자가 가지고 가서 무왕 한테 인준을 받는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우거王의 입조칭신(入朝稱臣)하는 것이 아님으로 王은 이를 허락하였다.  
 

따라서 우거王은 太子로 하여금 步騎一萬을 점검하여 대동케 하고 만일에 대비하여 군량치 중운반병 五千을 달게 하여 함양으로 무왕을 만나러 출발토록 하였다. 太子가 군사를 이끌고 패수를 건너려고 하니 使者 衛三과 左將軍 楊璞은 의논하였다. 太子가 정병 萬여명을 이끌고 황제 폐하를 배알하겠다고 하니 위험한 일이라 무슨 변란이 일어나면 어찌 할 것이냐? 폐하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르는 일이고 저들이 군사를 이끌고 가겠다고 하는 것은 항복을 끝내 거부하고 황제 폐하와 대등함을 과시하는 것이니, 우리는 죄책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서 제지해야 한다 하고, 太子에게 군사 대동을 말리었다. 처음부터 이들은 화의를 한다 하고 太子를 한 왕에게 보내어 항복의 서약을 하게 하고 무왕이 우거를 조선 왕에 봉한다는 봉작을 내린다는 수작이었다. 우거왕은 한무가 中原 三方에 이민족 추장들을 왕후로 봉작하여 변방을 지키는 정책을 쓰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으로 太子에게 정병을 거느리고 가서 회의 비준을 받되 항복하지 말라고 일렀던 것이다. 사자 위三이 太子에게 말하였다.  
 

太子께서는 이미 항복하였으니 군사는 여기 두고 종자만 데리고 가서 황제 폐하를 뵈옵소서 하였다. 이에 太子가 위三을 보고 꾸짖었다. 내가 화의를 위하여 한王을 보러 가는 것이지 항복하러 가는 것은 아니거늘 무슨 말이요. 한王은 흉노 단우에게는 조공을 바치고 왕녀를 헌상하면서 단군 조선 제국 天王에게는 조공을 받치지 아니하며 우리에게 군사로 위협하고 항복을 강요하니 어찌 화의(和議)를 바랄 수 있겠소, 내 그대의 목을 뵈어 경계코자 하나 양국간에 사자를 해치는 것은 우리 군자국에서는 아니하는 것임으로 그대를 살려 보내니 한王에게 가서 이대로 이르시오 하고 군사를 이 끌고 돌아왔다. 사태가 실패로 돌아가니 좌장군 양복은 본진으로 돌아가고 사자 위三은 함양으로 돌아가서 무왕에게 전후사를 고하였다. 
 

한무왕은 자초지종을 듣고는 大怒하여 너는 어찌하여 그와 같이 나라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무슨 낯으로 죽지 않고 나를 보러 왔느냐 하고 좌우를 호령하여 끌어내어 목을 뵈어라 명하였다. 무왕은 노여움이 가시지 아니하여 좌장군 양복도 죽이려고 양복을 소환하려 하니 좌우 대신들이 간하였다. 지금 양복을 잡아오면 원정군이 동요 할 것이고 부르면 양복은 위삼을 참한 것을 알고 있으니 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그냥 두어 공을 이루도록 하옵소서 그가 전자에 패전하여 十만명의 군사를 잃고 이번 다시 실수를 저질렀으니 죽음을 무릅쓰고 공을 세워 죗값을 씻고자 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그리고 諸臣들은 요동 출병으로 수천리 운량에 국력 소모가 막심하여 요동 군사를 罷할 것을 간하였으나 무왕이 불허하고 노함이 심하여 두 번 입밖에 내지 못하였다. 한나라 사기는 우거왕이 항복을 약속하고 太子가 군사를 이끌고 항복하러 나왔다고 했다. 항복을 하려면 太子를 무왕에게 보내서 볼모로 하고 (그 시대는 꼭 이렇게 하였다.) 항서를 바치고 적군 군문 앞에 나와 엎드려 비는 것이지 어찌 큰 군사를 이끌고 항복하러 갈 것인고 심한 조작이다. 
 

한무왕은 諸臣들에게 이르데 우리 大軍이 한낱 조선 열후를 파하지 못하고 거금으로 화의를 이루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였다. 상국이 말하기를 위삼이 화의 진행을 그르쳐서 실패를 하였사오니 우거왕의 좌우 장상 몇 명을 통하여 환심을 샀다 하오니 불원 무슨 변고가 그들에게 있을 것으로 생각되오니 회의를 좀 기다림이 옳을까 하옵니다 하였다. 한편 왕검 성에서는 太子가 돌아와서 그들의 속임수를 말하고 일체 그들의 회의 제의에 응하지 않도록 하고 성곽을 철통같이 지키고 경계하니 한 군이 반년을 싸워도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한 군은 연 나라에서 징모한 동이족 군사를 앞세워 공격을 강행하였으나 약간의 수성병을 격살하였으나 성병이 굳이 지키고 나오지 아니 하니 큰 성공을 거둘 수가 없고 연 나라서 징발한 조선 병은 강폭 무작하여 용감하나 다루기 어려웠다. 한 군은 여러 방법으로 攻城을 하여도 왕검성의 수비는 철통같아 어찌 할 수 없어 누선 장군은 군중에 영을 내려 수군(水軍)을 따로 편성하니 제(齊) 나라의 조선 족이 주력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수중으로 잠행하여 방책을 급습 파괴하고 수군을 동원하여 성벽으로 오르게 하여 기습 공격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공격에 가담한 수군은 강변 험지에 진치고 있는 조선 군과 성상에서 쏟아 대는 화살에 포위되어 한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누선 장군은 또 萬여兵을 잃고 수심에 잠겨 있는데 좌장군 순체가 사람을 보내어 날을 받아 合力하여 총공격을 하자고 통지가 왔다. 그러나 누선 장군 양복은 자신이 없었다. 왕검 성의 철통같은 방비를 뚫으라고 하면 병력만 소모 할 뿐 무모한 공격은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성중에 한장수가 전일 공작한 매수 작전으로 암암리에 투항해 왔다. 그리하여 그 장수를 성중에 있으면서 수시 연락하도록 성중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성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으로 좌장군의 제의를 알겠다고 간단히 일러서 사자를 돌러 보냈다. 한편 한왕무는 요동 출병으로 국비는 과중하고 一년이 다되도록 왕검 성은 파하지 못하니 초조하였다. 그리고 좌장군 순체와 누선 장군 양복의 번갈아 올리는 전항보고는 서로 상치하여 협력이 안된다고 판단하였다.  
 

무왕은 백관을 소집하여 말하였다. 요동에 출전中인 좌장군 순체와 누선 장군 양복이 서로 다투어 협력하지 아니함으로 병력만 무수히 잃고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였다. 한 대신이 아뢰었다. 그 두 사람을 통제할 칙사를 보내서 협력토록 해야 하옵니다. 하였다. 그 일을 누구에게 맡게 할 것인가 하였다. 대신이 아뢰었다. 제남태수 공손수는 병법에 밝은 명장이옵니다. 공손수에게 절월을 주어 一군을 이끌고 가서 요동의 兩人 장군을 통제하여 攻城게 하오면 성공 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무왕은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를 입조하라 일렀다. 공손수는 원래 동이 족으로 지난 초한 전쟁에서 봉해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전공을 세운 功臣이었다. 입궐한 공손수에게 무왕은 전권을 주어 군사를 이끌고 요동에 가서 양장을 돕되 알아서 적절히 모든 군무를 처리하라 하였다. 무왕이 요동에 동등 품격의 두장수를 파견하는 것은 大軍을 한사람의 통제하에 두는 것은 반란의 위험이 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고 무가 친정하여 양장을 통제하다가 무가 양장에게 군권을 같이 맡기고 돌아옴으로서 이러한 현상이 생겼다. 
 

공손수는 어명을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에 이르러 먼저 좌장군 순체를 만나 경과 보고를 들었다. 좌장군이 말하였다. 누선 장군이 여러 차례 나와 함께 작전을 세워 적을 치기로 약속하고도 지키지 아니하여 성공 할 수가 없었고, 그 뿐 아니라 사람을 왕검 성에 밀파하여 우거왕과 내통하고 있으니 필연코 조선 군과 짜고 우리를 격멸할 우려가 충분히 있사옵니다 하였다. 공손수가 들으니 一理가 있는 말이었다. 이에 사자에게 절월을 주어 누선 장군 양복은 좌장군 군막으로 오라 하였다. 양복은 순체의 막사로 공손수를 만나러 갔다. 공손수는 순체와 짜고 포졸을 배치하고 누선 장군의 수행 군사는 장막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장막 안으로 들어오는 누선 장군을 직각 포박하였다. 공손수는 말하였다. 내가 어명을 받들어 그대의 반란죄를 물어 처형한다 하고, 변명의 여유를 주지 아니하고 처형해 버렸다. 그리하여 누선 장군의 군사는 모두 거두어 좌장군 순체의 휘하로 편입하였다. 누선 장군 양복은 일찍이 여러 차례 패전으로 대군을 잃고 무왕의 성품을 아는지라 언젠가는 죄를 물어 처형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우거왕에게 망명하여 순체를 공멸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그 증거가 나타나기에 앞서 처형해 버렸다.  
 

공손수는 돌아가 무왕에게 결과 보고를 하였다. 무왕은 놀랐다. 순채에게 전군을 독단 위임해 버렸다. 무왕은 두말없이 공손수를 참하였다. 좌장군 순체가 반심을 품고 출정 대군을 이끌고 돌아오면 무왕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공손수를 처형한다고 해서 위험이 살아지는 것은 아니라 한나라 조정은 침울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것은 순체도 폐군과 무수한 병력을 손실한 허물이 있어 좌장군 순체도 어떤 생각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였다. 순체는 전군을 총동원하여 왕검 성을 공격하였다. 
 

   二十一. 변조선 王國의 반역자들이 우거왕을 弑害하고 漢에 투항
 

세상 운명의 신은 너무나 무정한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인재가 부른 불운이지만 우거왕의 大臣 相路人 相韓陰尼谿相參(국상노인 국상한음 니계상삼) 세 사람은 한王이 보낸 황금과 봉작의 유혹을 받고 항복의 기회를 노리던 中, 뜻밖에 누선 장군이 처형되고 우리 장군들이 동조하지 아니하니 항복을 못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하루는 大臣노인이 수성 장군 왕겹(王)을 찾아갔다 왕겹은 상국께서 어찌 여기까지 납시었습니까? 하고 물었다.  

 

노인이 말하였다. 금일 한 군의 공성(攻城)이 더욱 가열하여 많은 사상자가 난다기에 걱정이 되어 사정이 어찌한지 한 번 들렸습니다. 하고 전고를 위로하였다. 왕협이 말하였다. 요즘 와서 적의 공격이 극심하여 피아의 사상자가 많고 특히 적의 사상자는 몇 배 많사오니, 그 시체를 치우는 일도 없이 산적한 시체를 딛고 물 밀 듯이 들어오니 잠시만 마음놓아도 큰일날 지경이옵니다. 이제 一년이 넘도록 싸워서 무수한 인명을 잃고도 지칠 줄 모르고 성을 둘러싸고 있으니 소장이 평생을 戰場에서 살아왔으나 저같이 미련한 전쟁은 처음 보았습니다. 성을 치는 것은 한달 아니면 두달에 함락시키지 못하면 물러가서 다시 기회를 보는 것이 전법인데 一년이 넘어도 포위망을 풀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이러한 전쟁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하였다.
 

재상 路人이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적이 그러하니 아군의 희생 또한 적지 아니하고 전비 또한 과다하여 나라와 백성들이 다 같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 전쟁이 계속되면 장차 어찌 될지 장군의 생각은 어떠하오 하였다. 왕겹이 말하였다. 지금 싸우고 그치는 것이 모두 무왕의 마음먹기에 있으니 그것을 누가 어찌 될지 장담 할 수 있사오리까. 다만 무왕도 이제 싸움에 지칠 터인즉 불원 포위를 풀고 돌아갈 것으로 보는 것이 저의 전장의 경험이옵니다 하였다. 이에 상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하였다. 지금 무왕은 조선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함양으로 돌아가 그 수치를 씻고자 전력을 다하여 싸움을 독려하고 있소. 백의 군사가 죽으면 二백의 군사를 보충하는 전법으로 지금 한 군의 수는 十여만을 잃고도 초전의 倍數에 이르고 있소, 漢武는 이 전쟁에서 결판을 내지 않고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오 하였다.
 

왕겹이 물었다. 일찍이 무는 北에서 흉노에게 패하여 도망간 일도 있고 년년 조공을 바치고 왕녀를 흉노 단우의 첩으로 바치기로 하고 화해하여 보전 한일도 있사온데, 요동의 패전을 거기 비하면 크게 수치라 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더욱이 단군 조선 황제에게 바쳐 오던 오랜 예물도 중단하고 단군을 본따 天子를 자칭하고 있는 터에 자기네 마음대로 철수하는 것이온데 무슨 불평이 있사오리까 하였다. 노인이 말하였다. 차일시 피일시라 그때는 중원에서 한족이 통일을 이루었다 하여도, 중원의 각 민족이 완전 복속하지 아니하였고 영토는 우리 조선 제국의 三分의 一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大軍을 일으켜 數千里 원정에 나설 처지도 못되었습니다. 지금에 저들은 영토는 中原의 八, 九를 자치하고 군사는 백만을 헤아리고 군량은 수년 먹을 것을 쌓아 두고 있으니 무왕이 이번 싸움에서 무수한 군사를 잃고도 물러나지 아니하는 이유이니 전쟁의 끝은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오 하였다.
 

그러하오면 相國께서는 장차 어찌 될 것으로 생각하옵는지요? 하고 물었다. 路人이 말하였다. 전일 진시왕이 천하를 통일 할 적에 五국을 정벌하고 연 나라에 三十만 대군을 투입하여 싸우다가 군사를 물리고 화해하여 太子丹의 인질을 풀어 돌려보내고 진나라 열후국으로 남아 있으면서 친목코자 하였으나 연太子단이 분수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수차례 진시황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연王 희(喜)가 또한 진과 맞서 싸우다가 조선과 진나라가 협공하여 일족이 몰사하고 백성은 바다 건너 마한 등으로 피난 가고 山넘어 요동으로 피난하고 미처 피하지 못한 백성은 한족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고 있음은 장군도 알고 있는 일 아니오.
 

연王이 일찍이 조국을 배반하고 단군 조선 제국 황제의 절재를 받지 아니하고 동으로 제국 영토를 침범하여 싸움을 끝내지 아니하여 원수를 지고 西에서 강력한 진나라와 맞서 싸우다 앞뒤로 협공 당하여 패망하였으니 이는 길이 역사에 교훈 삼아야 할 것이오 하였다. 이에 왕협장군이 물었다. 장차 어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니 相路人이 나직이 소리를 죽여 말을 이었다. 지금 相府에서 王에게 대세가 어찌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화해할 것을 재청하였으나 王께서 완강히 거절하니 우리 모두가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형편이라 하여 왕협의 응답을 기다렸다. 왕협이 한숨 쉬며 무슨 방책이 없느냐고 다구처 물었다. 
 

상노인이 보기에 왕협의 마음을 능히 돌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한 왕의 밀사와 의논이 있어 항복하면 열후에 봉하여 장래를 보장하는 여러 차례의 확약이 있었소. 다만 용맹한 장수 한사람을 함께 하라는 무왕의 요청이 있어 여러모로 고려한 결과 장군을 만나러 온 것이오 우리가 나라를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길밖에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길이 없소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 또한 연 나라의 再版이 될 것이오니, 정세가 그때와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소 하였다. 배후에서 조선 별군의 협공은 없다는 말은 빼고 연이 지난날 겪은 것과 같은 처지임을 역설하였다. 이리하여 왕협은 설득되고 그날 밤으로 노인, 한음, 상협은 상협이 모든 관문을 열도록 명령하고 가솔을 데리고 왕검 성을 빠져 나와 한군 진영에 가서 좌장군 순체에게 항복하였다. 순체는 이들로부터 왕검 성의 군무 전반에 걸친 정보를 입수하고 순체는 파팔마를 함양으로 띄워 무왕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들 배반자들은 함께 모의한 니계상삼은 우거王을 죽이고 투항 할 것이라 하였다.
 

한무왕은 요동 전쟁의 장기화로 국민 부담이 가중하고 병역 소모의 계속으로 인심이 흉흉하여 묘당에 철군론이 끊이지 아니하였고 좌장군 순체에게 全軍을 독단케하여 무슨 변고가 생길까 마음을 놓을 수 없어 군신을 모아 더불어 요동군 철수를 의논할 참에 조선王의 大臣과 將軍이 항복했다는 보고를 받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거왕은 제장과 大臣들을 모아 훈유하였다. 지금 몇 사람의 반역자가 도망갔다 하여 우리의 힘이 약해지지 아니한다. 그것은 오직 여러분이 여기 있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한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적에게 누설된 제반군 기밀을 점검 개정하고 철석같은 그의 의지는 한 군이 불원 철수 할 것을 확신하고 도도王 고두막과 상의하여 한 군이 철수하면 그 뒤를 추격하여 몰살하고 중원 깊이 진격하여 조선고토 기주지역 十二주를 회복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고두막은 이 때에 왕검 성을 포위하고 있는 한구를 도처에서 기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漢寇는 그를 보면 달아나기 바빴다. 그는 大弓을 써서 멀리 있는 한나라 장수를 백발백중 쏘아 죽여 한나라 장수들의 공포 지적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진로를 바꾸는 행운의 여신은 한무왕에게로 갔다. 반심을 품고 우거왕의 주위를 살피고 있던 니게상삼은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그의 심복 장수를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한구의 병영으로 달아나 순체에게 항복하였다. 무왕은 이 소식을 듣고 의기 양양하여 대신들을 모아 대연을 베풀고 전쟁 수행에 공이 많은 신료들을 위로하였다. 그리고 이르되 이번에 항복한 조선 대신 니계상삼은 경사에 오는 길로 참형하라 그 주인을 배반하고 죽이는 者는 살려 두어 쓸모가 없느니라 하였다. 대신들은 무왕이 큰상을 내릴 줄 알았는데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하였다. 이윽고 군무 대신이 아뢰었다. 그것은 불가하옵니다. 지금 우거왕을 죽였다. 하여도 그 수하 장군들이 태자를 업고 항전을 계속하고 있는중이온데 그렇게 되면 성중에 남은者 죽기로 싸울 것이니 항복한 大臣을 죽이는 것은 항복하는 者를 막는 것과 같사오니 결코 그를 죽여서는 아니되옵니다 하였다. 그러면 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성이 함락한 후에 처형하리라 하였다.
 

이에 대신들은 다시 아뢰었다. 그러하여서는 아니되옵니다. 대왕께서 항복하는 將相에게는 候에 봉작하고 우거왕의 머리에 만호후를 걸었사온대 이제 폐하께서 식언하시면 폐하의 위엄에 손상이 오고 그보다 큰 문제는 지금 조선은 열국이 분열하여 쟁패하고 있으나 부여王이 단군제국의 정통을 이었다고 황제를 칭하고 있사오니 그들이 국내가 수습되면 중원 고토회복에 나설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사옵니다. 투항자를 우대하고 신의를 동이에게 보이는 것은 도적을 잡기 위해 도망을 치는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신위영무(神威英武)하시고 中原 大國에 君臨하시었사옵니다. 비록 그러하오나 단군 제국의 후예 황제국은 강력하고 생활 기능과 예절지풍은 이번 요동에서 보다시피 우리 나라가 배워야 될 미풍이오며 자고로 동방 군자 지국의 명칭이 허언이 아니오니 공자께서도 항상 동이국에 가서 살 것을 원하였사오니 그러한 군자국이여서 그러한 것이옵니다. 공자께서 中原에서는 君子之道가 행해지지 아니하니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孔子悼道 不行設浮海慾居九夷有以也夫) 그러하오니 무력으로 동이제국을 이길 수는 없사옵니다.(여기 공자께서 바다를 건너 동이 국에 가고자 했다는 것은 당시 노나라에서 육로로 요동에 갈 수 없고 발해 바다를 이용하여 왕래가 쉬웠슴이다.) 동이가 그들 서로가 싸우고 분열하여 약화시키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以蠻攻蠻夷中國之形也, 漢書) 깊이 살피시옵소서 하였다. 이리하여 무왕은 우거왕을 배반한 반역자들을 후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투항자들을 격려하여 王儉城 함락을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도록 지시하였다. 왕검 성은 우거왕이 반역자들의 음모로 시해된 후 대신 성기(成己)가 우거왕의 太子 장상을 옹립하여 국왕을 대행케 하고 제장을 모아 의논하였다. 이제 국운이 불행하여 반역자들이 국왕을 시해하였으니 실로 하늘이 무너지는 시련이 우리에게 닥쳐왔음이라 우리가 지금 한나라 오랑캐에게 항복하면 우리 군자 국민은 한족 오랑캐의 종복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비극을 맞았으나 슬픔에 잠겨 용기를 잃어서는 아니된다. 지금 왕검 성의 견고함은 적이 백가지 방법으로 쳐들어 와도 무너지지 아니하고 충효한 우리 군사 앞에 한 병의 목은 추풍낙엽과 같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서 이 나라를 보전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과 힘을 합치면 두려울 것이 없다. 하고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항복한 반역자들의 조선군 교란 회유는 집요하였다. 그들의 전일 部下 장성들과 친 인척을 통한 온갖 모략 회유에도 성중은 요동하지 않았다. 한편 한나라는 크게 놀랐다. 大臣들과 將軍이 항복하고 왕을 죽이고 하여도 끄덕도 하지 않고 城을 지키고 軍民이 위협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니 武王은 항복한 者들을 불러서 命하였다. 너희들이 정한 時日안에 王儉城守將 成己를 죽여 왕검 성을 함락하지 못하면 너희들은 가솔과 함께 모두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였다. 이에 왕검 성 성중에는 니계상삼의 수하 장수로서 니계상삼이 잠복시켜 둔者가 있었다. 항복한 반역자들은 城下로 몰려가서 城中을 향하여 소리 높이 외쳤다. 항복하면 武왕이 상을 주어 보답하고 항복하지 아니하면 城을 파한 후 軍民을 몰살한다고 그리하기 數日만에 잠복하고 있던 니계상삼의 부하가 성기를 죽이고 혼란한 틈에 한 군이 城을 맹공 하니 성中이 마지막 희망을 잃고 항복하였다. 이에 武가 大喜하여 이제 中原 天地는 漢나라 것이로다 하고 항복한 조선 反逆者들에 후를 封하였다. 그리고 우거王의 아들 長에게 幾候의 봉작을 내리어 거두어 주었다. 번조선 국민의 우거왕을 기리는 마음을 달램이었다. 이리하여 僚河以西 中原 東北 一部가 漢族領土가 되고 단군以來 東方君子國으로 中原의 文化 예술 산업의 中心地였던 번朝鮮國은 멸망하고 東方의 英雄 번조선王 우거는 패권 다툼에 정신을 못 차리는 진 조선 말조선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고군분투 二年에 매국 반도의 손에 운명하고 말았다.  
 

   二十二. 樂浪 玄도 臨沌 眞番 이란 四군의 실상을 살펴본다.
 

한무는 비록 번 조선을 멸하고 그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그것은 불과 수년에 고구려가 다시 회복하였으며 계속된 전쟁으로 국고의 탕진과 민심의 이탈로 장차 사직을 왕망에게 빼앗기는 원인을 만든 결과이기도 하였다. 무왕의 호전적 행동으로 변방(四方) 전쟁에 국력 소모가 너무 컸으며 우거王국을 정벌한 후 四군을 설치하고, 고구려를 고구려 현으로 만들었다고 역사 기록을 하였으나, 그것은 위조한 것이며 한무가 번조선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번조선 영토와 접한 고립된 고구려 변방 영토를 전쟁 없이 일부 병합한 것을 고구려 전체 인양 과장하여 한四 군을 새로이 설치 한양 변조한 것이고, 기실 한은 그 시에 고구려와 싸운 일도 없고 고구려와는 초기에 창해에서 싸우다가 패한바 있다. 우거왕국의 반역자들에게 우거王의 영토였던 기존의 四군에 속한 것을 나누어 후(侯)에 봉한 것뿐이다. 그 당시 하남과 요서에는 중원 北域의 강국 백제가 있고 東域 요동에는 고구려가 도사리고 있는데, 그 속에다 무슨 한사군을 설치한단 말인가. 불능함을 당시 상황이 그것을 말해 준다.  
 

당시 한 무왕은 신흥 고구려의 중원 공략을 막는데 급급한 터인데 요동 요서를 점유하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를 제치고 인구 희소한 조선 반도에 갈 수도 없고 갈 일도 없다. 한나라 사기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후세 당의 이세민이 고구려를 치려고 명분을 세우고자 요동은 한무왕이 四군을 설치했던 한나라의 땅이다 라고 허위 선포하였고 당시 요동이란 요하 변을 中心으로 四方 一대를 이르는 것이고 만주 고구려 영내는 아니다. 일본의 식민 사관 편찬 교과서에서 당의 이세민이 만든 잘못된 사기를 확대 편찬한 것이다. 한무왕이 설치했다는 현토 낙랑 임돈 진번 四郡은 무왕이 침공하기 前부터 있었던 명칭으로, 서전 한서 지리지 등에 간혹 보인다. 그리고 그 四郡의 位置는 遼西와 遼東에 있고 조선 반도와는 먼 거리에 있던 위치며 반도에는 郡을 설치 할 인구도 없었다. 그리고 그곳 번조선 조선족은 한나라 점령하에 소위 四郡으로 나누어 한나라의 封侯를 받은 四人의 반역자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직접 점령한 영토는 우거왕의 영지일 뿐 그것도 원래 있던 四郡 전부가 아니다. (遂定朝鮮爲樂浪臨沌玄?眞番四郡封參爲?淸候有功爲陰爲萩?候?爲平州候長爲幾候最以父死頗有功爲捏陽候, 鑑易) 즉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四군에 삼을 홰청후에 음을 추저후에 협을 평주후에 장을 기후에 취는 그 아비가 죽고 공이 있음으로 낙양후에 봉했다 라고 하였다. 일본 총독부 교과서는 낙낭군을 조선 반도에 갔다 놓았으니 그것은 조선 역사를 고의적으로 축소 시키기 위하여 그런 조작을 한 것인지 아니면 古史탐사의 미숙으로 인한 무지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 식민 사관의 원인이다. 漢무왕은 땅을 점령 하여보니 그전부터 전해 들은 바는 있으나 동이족은 부유한 문화 선진 국민으로 중원 여러 민족들을 감복케 하였고 한족의 문명화에 큰 자극을 주었다.  
 

後世중국 역사서는 이것을 기자가 조선에 와서 조선인을 교화 시겼다고 왜곡하였다. 그러니 中國 古典에 이와 반대로 동이 문화 제도를 배워서 중원의 정치 문화 예절 도덕적 치세의 순리를 발전시켜 왔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무왕이 반역자들에게 내린 봉작 또한 조선에서 배운 단군 대제국의 통치 제도를 본뜬 것이다. 한족은 빠른 시일에 東夷의 선진 문화와 기술에 힘입어 농토 개간과 목축지 조성에 성과를 올려 생활 안정을 찾았다. 동이 문화의 발전은 그것은 또 중원의 각 민족에게 예절을 알게 하고 모르면 동이 족에게 구하였으니 무릇 오랑캐라고 불리는 만이(夷) 융적 四夷(조선 족의 별칭이라 하였음)는 오히려 문명 제도인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公, 候, 伯, 子, 男) 이라고 부르는 벼슬의 고하를 이르는 작호 제도를 두어 그렇게 불렸다.所謂中國失禮求之四夷者也凡蠻夷戎秋總名四夷者猶公候伯子男皆號諸候云, 漢書東夷傳)

  이와 같이 한무왕의 번 조선 침략은 한무왕의 武威를 四方에 뽐내고자 하는 그의 야만적 공노심도 있었거니와 단군 제국의 문명 수입에도 큰 희망을 건 침략전쟁이었다. 이와 같이 정치적 문화적 先進 제도는 주나라때 이래 단군천王국으로부터 계속 중원에 수입되어 단군제국의 제후 열국에 대한 작위 제도 관직 제도 등이 중국에 전해졌음을 말한 것이다. 춘추좌전에 이르기를 공자께서 작위 제도를 담자에서 이미 빼앗거니와 (여기 담자란 산동성에 있는 단군제국의 열후임.)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기로는 천자의 관직 제도를 배운 것을 잃은 것도 조선 족에 있었던 것을 의심치 않는다 하였다.(左傳曰仲尼學官名於掘子旣而一告人曰吾聞之天子失官學在四夷其信也) 단군제국은 영토의 大小 강약에 따라 제후들의 작위를 정하였다. 단군 제국 시대에는 조선 반도에는 제후가 없었다. 제후를 봉할 만한 王국이 없었다. 인구가 희소 한 까닭이다. 한서지리지에 한 四郡에 관하여 요동군이 그 위치임을 분명히 하였다.(遼東郡 遼東元?郡樂浪郡)
 

첫째, 한무왕이 漢四郡을 설치했다는 것은 큰 誤錯이다 그것은 後世에 와서 唐書의 장난이다. 한서 지리지에도 樂浪으로(?狼)玄도는 옛조선의 나라 이름으로 한족이 호칭한 것이라 진번 임돈도 매 일반이다. 遼東과 함께 모두 幽州에 屬하였다고 하고 옛날 진번조선국이다 라고 (故眞番朝鮮胡國)했으니 四郡이란 한무왕이 원래 있던 地名에 郡을 일부 점령하여 四적에게 봉해준 것이다. 古代 朝鮮 단군 대제국의 열후였으며 일부는 번 조선에 속한 영지였다.
 

우거王國이 무너지면서 한무왕이 한때 차지하여 上記한 반역자들에게 봉지로 일부가 들어간 것이 분명 한 것인바 한무왕이 새로이 四郡을 설치했다는 근거는 없다. 그리고 그곳에 봉함을 받은 반역자들도 그 순간일 뿐 어떤 명분을 부처서 처형되었거나 패서인 된 것으로 보이니 그 후 그 지역이 고구려 영토로 회복된 끝인데도 그들의 이름은 다시는 나타나지 아니한다. 중국 역사상 반역자에게 주는 상훈은 언제나 순간적인 것이 그 통례이다. 다음 위치 문제인데 난데없이 조선 반도 평양 대동강까지 편입한 소위 일본 학자의 지론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 한의 左장군과 번 조선의 싸움은 浿水가에서 있었고 이기지 못하였다.(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未能破天子爲兩將未有利乃使衛山鑑易) 중국측 사기는 패퇴한 싸움은 이기지 못하였다, 이롭지 못하였다, 등으로 기록한다. 이와 같이 패수 西쪽 즉 지금의 天津 지역에서 싸워서 두 장군이 모두 패하고 위산을 시켜 재물로 매수하여 반역자의 자체 내란으로 한나라가 승리 한 것인바 그들이 점령한 땅 즉 번조선땅의 위치를 알 수 있다.  
 

必要에 따라 별지 어수록
 

그 時代에 倭는 文學이란 아예 없는 未開한 時代였고 한이 遼東에서 우거王을 파하였을 當時의 기록에 朝鮮백성들은 전혀 서로 도적질 하는 일이 없고, 집에는 門도 해 달지 아니하고, 대문을 닫는 일도 없고, 婦女子는 정숙하여 음탕함이 없고, 遼東에 처음 관리가 就任해서 보니(여기서 말하는 官吏란 武王이 임이 封侯를 했은즉, 행정은 조선 족이 할 것이고, 漢寇의 軍吏 통제 要員일 것임) 백성을 다스리는데 六十余條目의 法規가 있어 참으로 좋은 法治제도로서 어진 文化 社會였다. 樂浪海中에는 倭人이 있어 百余國으로 나누어져 사는데 해마다 조공을 조선에 바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是以其民終不相盜無門之戶閉婦人 貞信不淫郡初取吏於遼東吏見犯禁睍多至六十余條可貴哉 仁賢之化也 樂浪海中有倭人分爲百余國以歲時來獻見云) 라고 하였은 즉, 한족社會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러한 文明國을 보고 비록 힘으로 征服은 하였으나 史記를 쓸 적에는 오랑캐 胡國으로 表現하고 별별 명칭의 國名을 만들어 멋대로 쓰고 하면서도 亦是 君子國이라는 呼稱은 빼지 못한 것은 未開한 漢族 社會에 모범 됨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음이랴 하물며 倭의 未開함은 문명과는 멀었으니, 거기에 우리 나라의 古代 史書가 있을 수 없고, 다만 日本明治開化後에 비로소 歷史學이란 日本의 榮光된 皇國史記 만들기의 御用史學家가 생겼는 즉, 거기서 무슨 古代朝鮮史가 나오며, 敢히 古代 朝鮮史를 論擧한단 말인가, 史學者는 그러한 사람들의 말을 흉내내는 것보다는 歷史를 硏究할 熱意가 있다면 유식한 옛 村老를 찾아 한 마디라도 들었더라면, 실로 史學徒의 眞實된 修業이 되었을 것을 一部 그릇된 史學書의 補完을 바라는 마음 간절함. 한무왕이 우거王을 破하고 번 조선 땅을 차지할 영토는 어떠하였는가 살펴보기로 하자.
 

진시왕이 연을 멸하고 中原을 통일 할 적에 옛날 大檀君 이래 조선 제국의 노른자위 옥토였던 黃河邊諸侯國의 三十余郡을 연이망함으로서, 자연 秦나라에 빼앗기고 四郡이 남고 진이 빼앗은 영토 안에 광막한 空地를 만들어 조선과의 충돌을 피하고,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고, 국경선에는 방위 진지를 견고히 만들어 그 一대의 요새를 수리하고 甲兵으로 엄중 방위하였다.(秦幷兼諸候山東三十余郡繕津關據險塞修甲兵而守之 漢書) 그 후 한이 진을 멸하고 진의 영토를 그대로 차지하고 조선의 故土를 돌려주지 아니하니 위만이 이를 분하게 여겨 한을 칠 궁리를 하였던 것이다. 漢은 진이 공지를 두고 방위하는 方法으로 泰과 똑같이 하여 조선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그곳을 방비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기록은 그곳이 멀고 방위하기 어려워서 진나라가 정한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다. 무왕이 번조선을 침탈한 것과는 서로 상치되는 사기를 쓰고 있다. 이와 같이 武왕이 빼앗은 번조선영토는 黃河변 공지였던 난민 정착地 및 其周圍一帶와 遼河西土一帶의 山東 四郡의 일부이다. 한서 地理志에 四郡이 유주에 속했다는 것과 一致하는 것이니 우거王의 영토와 王검성이 있는 험독을 요하 東쪽으로 추정한 것은 후세 史家의 근거 없는 잘못된 추측이다.
 

더욱이 한사군의 위치를 조선반도까지 갖다 붙이는 것은 무지한 망발이다. 武왕과 같은 폭군적 史記 변조 명령에 의하여 상호 모순된 기록을 하게 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후세 당의 이세민은 요동 전체를 한 四郡이라 하고 옛 中國땅이라고 망언하였다. 이번 朝漢大戰후 한구는 여러 차례 요하건너 東域에 침입하여 약탈 행위를 하였으나, 조선측의 고등의 후예들의 신무용맹에 그때마다 폐산 하였다. 이것은 무왕의 침략 명령이 아닌 지방 병사의 약탈 등 호기심으로 인한 전쟁도 겹쳤다. 무왕은 이번 朝漢大戰에서 초전에 의기양양하여 조선 帝國과도 이제는 항쟁할 수 있을 것인데 列國 번조선쯤이야 하고 얕보고 그 무위를 요동에 떨치기 위해 친히 大軍을 몰고 와서 싸움을 독려 하다가 大敗하고 달아나 다시는 요동에 걸음 하지 아니하였으니 조선군의 용맹에 그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한낱 조선열후국의 왕검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무왕은 전기 한바와 같이 출전 장수들을 까닭 없이 모두 죽이고 마지막 승전하고 돌아온 대장 순체를 하옥하고 죽이려 하니 대신들이 일제히 간하여 가라대, 순체가 약간의 과오가 있다 하여도, 그것은 敵이 결사 항전 함으로 생긴 것이옵고 지금 승전하고 개선한 장군을 큰 허물없이 참수하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하니 무제는 할 수 없이 죽이지 못하고 폐하여 서인을 만들어 추방하였다. 패전의 책임을 그리로 돌려서 자기의 敗戰수치를 감추고 국민의 원망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도록 함이었다. 전사자가 너무나 컸슴이다. 역사학자 반사고, 사마천 등이 무왕의 패전 역사를 사실대로 쓰다가 모두 형벌을 당하고, 그의 행적을 찬란하게 함양하는 역사 위조를 하고 수치스런 기록은 폐기한 후 일단 풀려났다. 그것은 도처에서 승전을 뽐내던 무왕이 우거왕에게 패하여 돌아오고 그 파견한 한나라 군대가 조선 군에게 연전연패하고 그가 믿었던 장수들이 패전의 원인을 서로 떠미는 추태를 부리니 분하기도 하고 막판에 간 자의 모략이 성공하여 財物로서 매수하여 적국에 반란이 일어나 스스로 망하여 승전하였으나, 옳은 전쟁으로 이긴 것이 아님에 화풀이로 패전 책임을 물어 무고한 장수들을 죽인 것이다. 당초 무왕은 번조선 변방 防衛세력을 파하고 발해南에 창해군을 설치하였으니, 해모수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八年을 싸웠으나 지탱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무왕은 이 전쟁으로 국고가 탕진되어 이후 요동을 넘보지 못하였다. 한무왕은 해모수王과 고구려 동명성왕이 죽은 후에야 번 조선을 급기야 정복하여 그의 필사적 욕망을 달성하였다.
 

    二十三. 百濟 건국과 위(魏)와 전쟁 공손도(公孫度)의 온조(溫祚)지원
 

요동 요서 정세에 관하여 여기 추모王의 전처 예씨와 아들 유리의 출현은 서소노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서소노비는 자기의 아들이 王位를 이을 것으로 믿고 있다가 첫째, 소생 유타를 太子로 봉하니 추모王의 공명정대하고 추호도 속일 줄 모르는 고매한 성품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온조와 비류를 맡겨 부족함이 없으나, 太子유타가 어떠할 지 정권 분쟁은 친형제도 믿을 수 없는 것인데 자기 아들이 어찌 될지 불안하였다. 서소노는 추모王과 의논하여 적당한 지역에 王국을 건설하여 자립하도록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서소노는 많은 재물과 두 아들을 데리고 전부터 무역으로 연고가 있는 동이족이 모여 사는 요서창예로 건너가서 재물을 헐어 정착지를 확보하고 인재를 모았다. 오간(烏干) 마예(馬예) 등 十여명의 (賢臣) 어진 신하들은 건국에 힘을 모아 옛날에 부여王이 庶子 위구대에게 물려주었던 한 地方 인근 추장들을 통합하고 세를 확장한 후 대방 지경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백제라 하였다. 서소노의 두 아들 중 비류는 이곳 대방이 건국의 適地가 아니라고 다른곳을 찾아 떠나고 온조가 혹은 그 아들이 백제王에 즉위 하였다. 고구려 건국보다 약 七·八十年후로 추측된다.北史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東明至夫余而王至仇台篤始立國於帶方遼東公孫度以女妻之遂爲東夷强國初以百家濟因號百濟(서소노가 부여에 와서 대방에 나라를 세워 요동 공손도의 여식에게 아들이 장가를 가서 동이족의 강한 나라가 되었다. 처음 百가구가 왔다 하여 백제국이라 불렀다.) 이 때는 백제 전국이 요하서남의 대방군이며 중원하남에 천도한 것은 한영왕(漢靈王)시대이다. 여기 東明이란 서소노를 일컫는 것이고 구대독은 온조의 생정(生庭)三寸 혹은 五寸일 것이다. 구대(仇台)氏는 서소노의 全亡 夫姓이다. 이와 같이 요동에 강력한 군사력을 편성하여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 위례성은 어디서 나온 것을 삼국사기에 기록한 것인지 확인 할 수 없음)을 공략(攻略)하니 당시 漢은 동이족의 하남지역 침공이 끊이지 아니하여 거기에 대비하는 재정 지출이 막대하였으나 하남을 수복하지 못하였다.(夫不息無寇而戒爲費漸多河南非復國有褐虜難宋書) 고죽은 하남군 광역 지경이다. 하남의 개봉중모양무 산조권은 모두 위나라 땅이다라고 하였으니, 한편 위가 백제와 싸워 하남에서 이기지 못하였다는 위지의 기록으로 보아 상기한 것은 일부는 위가 회복 점유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河南一之開封中牟陽武酸棗卷皆魏地) 개봉은 중원의 요지로서 백제의 하남은 위 나라의 개봉부와 접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河南은 東南쪽에 있다.  

이것으로 보아 백제가 창예에서 하남에 입국하는 데는 한과 상당한 전쟁을 치른 끝에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소노의 아들 온조가 요서에 가서 건국한 것은 물론 공손도의 도움이다. 그의 아비 위구대가 건국한 곳은 하남이 아니다. 魏元嘉 六년 七月에 백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十二月에는 이웃에 있는 서하국과 하남국이 함께 사신을 보냈다. (魏元嘉六年七月百濟國遺使來貢 十二月西河 河南國遺使來貢魏志) 서하국은 선비 지유의 자손이고 하남국은 선비 모용혁락의 자손이다. 두 나라가 모두 중원의 東北으로 통하는 진농의 옛 유사의 땅이다. (西河者鮮卑祉兪之後也河南者其先亦鮮卑慕容奕洛于之後也二國皆東北通秦?古流沙之地焉, 漢魏叢書) 유사란 하남의 옛 명칭이며 선비는 고려 별종 혹은 부여 별종이라 하였으니 모용혁락은 부여 天子의 형제들로 보인다. 서하국에 관하여 자세한 우리 나라 역사 기록이 없으나 그 위치(位置)는 중원 山西 大同府의 大同江 하류이고 北京 南北쪽이고 東은 백제의 河南과 접경한 역시 부여족의 나라이니 안컨데 한무왕 중기 고구려가 中原北部를 점거하고 위세를 떨치던 때에 그 일익을 담당한 후, 백제의 옆에 하서 四郡을 점령하여 西河국을 창업한 부여족이다. 때에 한(漢)은 東夷 조선의 중원 북부 지역 점거에 대하여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하였다. 漢의 낙농후 장궁과 양허후 마무등이 표를 올려 가라대 고구려 오환 선비(高句麗烏丸鮮卑)는 모두 부여 출신이다.  
 

흉노의 위쪽에서 河西四郡을 공격하고 또한 동이족이 右측을 공격하니 北녘 오랑캐를 멸한지 불과 몇년사이 또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니 이것은 폐하께서 그들에게 은혜로서 베푸는 결과이옵니다. 신등이 정책을 펴 나가는데는 萬世에 공을 세워 비석에 새겨 둘 일을 아니함은 후세에 의아(疑訝)해 할 것이옵니다 하였다.(高句麗烏丸鮮卑攻其左發河西四郡天水?西姜胡擊其右如此北虜之滅不過數年臣恐陛下仁恩不忍謀臣孤疑令萬世刻石之功不立於聖世, 鑑易)漢王의 답하는 조서에 가라대 황석공기에 (한고왕의 一등공신 장자방에게 황석공이 건너 준 처세 철학과 병서를 겸한 책) 가라대 유한 것으로 강한 것을 제어하고 약한 것으로 강함을 능히 제어하고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도모하면 수고롭고 공은 없으니 먼 것을 버리고 가까운 것을 도모하면 빨리 끝나는 것이라, 그럼으로 넓은 땅을 관할하면 거치르고 널리 덕을 베푸는 자는 강함을 가지는 것이라 하였나니 군사를 거두고 백성을 편하게 할 것인즉, 적을 치는 것은 그 때(時)가 아니면 軍事 행동은 쉬는 것이 좋다 하였다.
 

이것은 적이 유연하지 못하고 강함을 믿고 영토를 강점하면 언젠가는 망하는 것이니 강함을 뽐내면 반드시 변란이 생기는 것이니 그 때에 치면 성공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이와 같은 王의 교시를 듣고 군신은 다시 병사를 거론하지 아니하였다. 요컨대 한은 백제의 하남과 서하국 四주를 공략할 능력이 없었으며 위王조조는 한나라 사직을 찬탈하기 위하여 오히려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술한 바와 같이 위나라가 집권한후 백제와 하서국은 위나라에 친선 사절을 보냈다. 거기 조공했다는 것은 물론 과장이다. 하서국에 관하여는 우리 나라 역사의 현재 알려진 기록에서는 빠져 있고 옛 古史는 보전 된 것이 없으니 그 내력을 알 수 없으나, 옛날 중원 북부에 있던 고리국을 통치한 부여족이 고리국 망할 적에 해모수 해부루 등 일족은 만주로 후퇴하고 일부 제후는 그곳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 나라 三國史記는 많은 오류가 있음이 인정되나 거기에 겹쳐 식민 사관의 여독은 그 자체를 왜곡하고 있다.
 

김부식은 하남을 조선 반도에 갔다 놓치는 아니 하였다. 그러한 흔적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식민 사관은 하남을 조선 반도에 갔다 놓고 반도에는 없는 지명을 조작하였다. 비류와 온조가 한반도 전라도 땅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면 그곳에 나라가 될 만한 인구가 살고 있어야 하고 인구가 있었다면 나라가 있었을 것인즉, 몇 사람 혹은 몇 十명 몇 百명이 가서 그 나라를 차지할 수 있으랴. 三國史記에 비류 온조가 가서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지, 조선 반도 전라도로 갔다고는 하지 아니 하였으며, 분명 하남(河南)이라고 지명을 명시하고 있다.
 

그 시대 고대 가야국이 南쪽에 있었는데 北쪽에 인구가 있었다면 가야의 영지일 것이고 신라 건국 百餘年前 일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부여王의 서자이고 해모수의 庶동생 혹은 손자벌 되는 위구대가 父祖王의 지원으로 나라를 창업하려다가 죽고, 그 후에 서소노가 비류 온조를 데리고 와서 온조의 아들은 공손도의 딸에게 장가가서 그곳에서 강국이 되었다.(百濟者其先東 三韓國中諸小國之一也後偉强大魏志) 그 후 약 二百年 후인 위나라 조조의 손자 위王 조예 시대에 하남을 회복코저 북녘 여러 軍도독에게 명하여 北녘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書典에 가라대 위군에 항거하였다고 했으니 스스로 고수(固守)하여 이기지 못했다는 뜻이다, 라고 하였고 위나라 군은 三十여회나 싸워서 많이 이겼으나 역성(歷城)까지 가서 군량이 떨어졌다 하였으며(역성은 백제의 월주(지금의 상해) 지경이다.) 이로서 위가 중원을 평정하였다 하고 위가 하남을 평정 했다 하나 江위쪽은 회복 할 수 없었다고 기록 하였다. (魏河南復爲 魏所克於是詔遣都督諸軍 北若地書曰拒魏師言苟自固守非制勝之詞也 魏師 三十余戰多捷軍至歷城資運竭書曰魏定河南言江左不能與爭也自是中原定於魏矣, 漢魏叢書)


  서하국은 이때 망한 것일까 위나라는 백제가 도읍한 하남이 위의 경사(京師)에 너무 가까워 위협을 느꼈다. 그리하여 하남을 회복코자 거침없이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에게 패하고 목적 달성을 못하였으니 당시 위나라 조예왕 시대에는 위나라의 전성시대이니 백제가 얼마나 강력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요서(遼西)도 백제 영토이니 그리로 쫓아내고자 하였으나 백제는 단호히 항전하였다. 近哨 古王시대이다. 百濟국 年紀 축소로 약간 차이가 있음. 遼東太守(漢이 임의로 태수라 불렀으나 공손도(公孫度)자신은 연王이라 하였음. 사위가 되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漢書에도 기록되어 있다. 위는 유비가 건국한 후한의 서촉을 정복하였음으로 백제도 능히 정복할 수 있다고 자만 하였던 것이다. 온조 百濟王이 천도한 하남은 北平郡 여성현 서남 하구의 땅이며 지금의 산동 평주의 남쪽이며 기주의 북쪽 공부의 동쪽으로 해서 북해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니 하남은 서쪽으로 돌아서 갈석이 그 뒤에 있다 라고 하였다.(北平郡驪城縣西南河口之地今平州之南也冀州北方貢賦之東自北海人河南向西輾而碣石在其後, 碣石地志) (갈석은 월주의北 발해 창해가에 있다.)

 

그리고 공손도의 영지(領地)는 요동을 거점으로 청주에 이르러 청주 자사라고도 하고 발해 건너 여러郡을 차지하고 요동의 조선 영토와 청주 지경으로 역시 그곳은 조선의 너른 땅이다. 설씨 가라대 지금의 등주 땅 내이내산의 동이 재 나라후가 있고 내인 즉 지금의 내주의 땅으로 목축업을 한다. 하여 목이인 이라 하고 목축을 생업으로 한다 하였다.(公孫度據遼東自號靑州刺史越海而有諸郡遼東朝鮮皆其地廣?寓夷薛氏曰今登州之地萊夷萊山之夷齊有萊候萊人卽今萊之地作牧者言可 收牧夷人以蓄牧爲生也, 漢地理志) 처음 서소노가 두 아들을 데리고 출발 할 적에 一족 백戶를 이끌고 扶余王을 찾아갔다. 처음 百家즉 백가구가 와서 나라를 세워서 백제라고 하였다. 라고 北史에 기록되어 있다. 추모王은 숙진말갈 예맥 걸안 등 여러 종족을 융합하였고 분립한 중원에서 백제의 창업을 돕는 공손씨에 관하여 살펴본다. 옛고리국 열후인 동이족으로 요동 요서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公孫度는 부여王 해모수의 아들 혹은 족하 위구대(尉仇台) 고구려 주몽천왕과는 이복형제 뻘이고 그 아들 즉 서소노의 아들인 온조(溫祚)의 아들을 사위로 삼았다. 그리하여 부여王으로부터 물려받은 요동의 小國 백제를 하남(河南)으로 옮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하남 천도를 한 백제왕이 온조의 손자인가 한다.

 

위례성은 百濟의 수도권에 있는 北京 西南의 慰縣과 ?水의 머리字를 따서 그렇게 한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하남은 공손도의 오랜 영토로서 西漢말기에 한(漢)과 다년간 싸워 영유한 곳이다. 부여와 공손씨의 합작은 연王과 백제가 다같이 강국으로 부상하고 연王 공손도의 위엄과 덕망은 해내위에 떨쳐 중국인도 유명 인사들이 다수 피난 와서 공손씨에게 귀의하였다. 그 중에는 북해 태수 영병원 왕열등도 와서 귀의하였다.(公孫度威行海外中國人士避亂者多數之北海官寗?原王烈適遼東 綱易) 북해는 산동이다. 백제가 본거지 하남과 요서에서 멀리 월주(上海지역)까지 뻗친 것은 공손도의 손자 공손연이 죽고 그 영토를 인수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백제가 중원에서 강국으로 등장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지난날 중원에서 패권을 다투던 조조 유비 손권의 각축지였던 월주를 백제가 직접 약취한 기록은 없다.

 

공손도는 동이 군자로서 학문이 깊고 인후 관대하여 남과 다투지 아니하고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중국인 유명 인사들과도 널리 사귀었다. 때에 한나라에서는 동탁이 왕권을 장악하고 반대파의 원소 원술을 토벌하고 있었다. 원소는 동탁과 싸우고 있는 강남 손권의 본거지 양성을 대장 주앙(周昻)을 보내서 공탈 하였다. 이에 四寸 동생 원술은 공손氏에게 원조를 청하였다. 공손도는 원소 원술의 인간 됨이 옳지 못하다 하여 이를 거부코자 하였으나 문중의 당내 공손찬이 원술과의 지난 교분을 생각하여 동생 공손월을 구원사로 특파하였다. 공손월은 군사를 이끌고 가서 손권을 도와 주앙을 공격 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공손찬은 원소로 인하여 아우가 죽었다. 하고 크게 노하여 大軍을 일으켜 원소를 공격하여 기주 제성(冀州 諸城)을 공략하였다. 공손찬도 인망이 높은 동이 족의 군자지풍을 갖춘 현인이었다.

 

이로 인하여 원소는 본거지를 잃고 조조에게 패망하였다. 탁군에 유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한 경왕(景王)의 여덟째 아들의 후예로서 인품이 인후하고 기우 헌앙 하며 귀가 커서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인물로서 후에 조조가 대이적(大耳賊)이라고 욕하였다. 어릴 적에 공손찬과 함께 노식(盧植)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노식은 동이 족이라도 유비가 거기서 학문을 배운 것은 그 당시 조선 사람과 한나라 사람이 함께 東北중원에서 혼거 하였기에 공손찬과 함께 수학할 수 있도록 언어가 통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유비는 어려운 시기에 공손찬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공손찬의 관역 상산군(常山郡)의 수장 조운(趙雲)이라는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공손찬에게 배알하였다. 여기서 유비는 조운의 행동 거지와 인물됨을 자세히 살펴보고 한눈에 반하였다. 은근히 친절을 베풀면서 그에게 접근하였다.  

 

그가 한인으로서 조선국(동이족)의 장수로 있었는지 조선족인지 당시 상산은 백제 영토였으니 이상하게 여겨 설득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러모로 의논하였다. 그리고 장차 대사를 도모 하고저 한다는 희망을 피력하고 대장부 어찌 이런 한 지방에서 주저앉을 수 있겠느냐 하고 극역함에 대사를 도모하자고 역설하였다. 이에 조운이 응낙하고 유비를 따르기로 하였다. 그의 자는 자룡으로 훗일 위나라 조조와의 싸움에서 상산 조자룡 이라는 명장으로 조조군을 놀라게 하였던 장수이다. 공손찬은 큰 뜻을 펴겠다는 그를 막지 아니 하였다. 한편 공손도에게 귀의한 많은 중국인 名士중에 영병 원왕과 화흠(華歆)세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이들은 모두 공손도와 품성이 상통하였다. 영은 젊은 시절 화흠과 친구 사이로 지내 왔었다. 한 번은 두 사람이 함께 밭에서 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금덩이가 하나 발견되었다.

 

영은 그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그러자 화흠이 그것 금덩이 아니냐고 주워서 보고 그대로 버렸다.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두 사람의 우열을 가렸다. 병영은 항상 공손도에게 말하였다. 경전(經典)은 세상사 시국 문제에는 어려움을 해쳐 나가는 학문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인데 원왕열은 성격이 너무 곧아 청이 결백한 특이한 품성이라 물 속에 잠겨 있는 용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여도 성덕(成德)이 있으니 때가 아니라고 가만히 있으면 이것은 모두 장차 화를 부르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도망가 버렸다. 공손도는 그를 쫓지 아니하고 그대로 보냈다. 공손도는 능히 대군을 일으켜 天下를 다툴 수 있는 처지인데도 백성의 살상을 피하여 덕으로 다스리고자 하여도, 그것은 난세 영웅의 길이 아님으로 자멸의 길이 될 수 있어도 그는 조선 족의 군자 도덕성을 고수하였다. 영은 달아나서 원소의 막료로 있다가 원소에게 한실에 거역하는 것은 옳지 못한 배신이라 바른 소리로 간하다가 처형당하였다.

 

원왕열은 항상 사람은 선도하면 쓸모 있는 것이라 하여 인심이 흉흉한 난세에 공손도에게 의지하여 있으면서도 난민을 구호하고 선도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인근에 덕망이 높았다.한 번은 소 도둑질한 자가 잡혀 왔다. 관가에 취조를 하니 도둑이 말하기를 죽을죄를 지었으니 달게 형벌을 받겠습니다. 다만 이 일을 원왕열 大人에게 알리지 말고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간청하였다. 조사관은 귀이히 여겨 원왕렬에게 전후사를 고하였다. 이에 원왕열은 포목 한 필을 주어 석방하였다. 도둑은 더욱 원왕렬의 인덕에 감복하였다. 주위에서 귀이하여 원왕열에게 물었다. 도적을 처벌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벼필을 주어 석방하니 무슨 연고입니까 하니 원왕열이 말하기를 도적이 그 죄를 부끄러워 나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은 이미 깊이 뉘우치고 있습이다. 그의 마음을 돌려 선행토록 한 것이로다 하였다.

 

후에 한 노인이 길 가다가 가는 곳에 도착하여 보니 보검을 중도에서 빠트린 것을 알았다. 노인은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보검 잃은 것이 몹시 아쉬웠다. 이미 날이 늦었는데 한사람이 길가에 섰는데 보니 거기 그 칼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 사람은 길 가다가 그 칼을 보고 칼 잃은 주인이 돌아오도록 종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원왕열에게 고하였다. 원왕렬은 사람을 시켜 어떤 사람인가 알아보았더니 전에 소도둑이었다. 사람들이 다툼이 있어 관가에 소송하러 가다가 원왕열을 만나기 부끄러워 뒤돌아 가고 혹은 가서도 서로 미루고 감히 원왕열에게 묻지 못하고 되돌아가서 화해하였다. 

 

원앙열의 민원 처리가 이같이 공정 무사 하니 소송 사건이 거의 없었다. 공손도는 원왕열을 장사에 임명하였으나 열은 굳이 사양하고 그곳을 떠나서 시중에 장사꾼으로 연명하고 정승 벼슬을 마다하였다. 추측컨대 공손도와 같은 인현군자는 난세에 나라를 지킬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다고 패자의 길을 택하기에는 피차 천성에 맞지 아니하니 그곳을 떠났음이 아닌가 한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위구대가 죽고 三世 의려代에 와서 같은 동이 족인 모용귀(慕容?)의 공격으로 나라가 亡하고 王은 자살하였다. 그로부터 백제의 나라이름은 모두 없어졌다. 백제가 망할 적에 王실의 一족이 모두 옥저 (沃沮)나라로 달아났다.

 

그런데 진(晉)나라 이후부터는 옥저의 이름이 없어지고 백제의 나라가 다시 등장한다. 미루어 보건대 백제의 유민은 옥저와 합하여 다시 백제국을 회복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백제와 고구려는 二百年간 중원에게 병입하였다. 라고 수사(隋史)에 있다. 동진 (東晋) 시대에 고구려는 요동을 점유하였고 백제는 요서를 점거하고 있었다.(東晋世高麗崙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姚察書) 이런 것으로 보아 百濟는 一단 모용귀에게 패망하였다가 옥저 후(沃溫後)옥저후는 해모수의 아들이니 여기서는 온조의 三寸인지 할아버지뻘인지 不明에게 의지하여 다시 힘을 합쳐 나라를 회복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 옥저는 요서의 한 지방을 점유하였을 뿐인데 百濟와 합병하여 큰 나라를 이룬 것이다. 이상은 필자가 진서, 위서, 송서, 수서, 북사, 한서 등의 기록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고 原文수식은 아니하였다. 참고로 百濟가 영유한 요서가 얼마나 큰가. 여기 지도를 참고하거니와 오월 춘추에 백제의 중원 서해 북쪽 영토는 서쪽은 월주 즉(지금의 상해 北지방)에 이르고 옛 월나라의 주위 千里의 땅이 모두 백제땅이라 하였다. 中原에서 오호(五胡 十六국 시대를 연 주류(主流) 민족이 부여족이니 백제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다.  

 

高句麗, 百濟, 河西國 公孫度, 領土 地圖

 

백제의 영토는 하남에서 월주에 이르는 수천리의 긴 영토이다. 월주는 원래 온조의 처가인 공손도의 영토였다. 위 나라가 백제를 공격할 적에 월주의 역성까지 진격하였다가 군량이 떨어졌다. 하고 싸움에 대하여는 그 이상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여기 관하여 수용문왕통경(隋龍文王通經)에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전에 가라대 위군이 역성에 가서 양식이 떨어져 밤에 모래를 쌓아서 곡식 같이 해 두고 군량이 풍족하여 여유가 있다고 하고 도망갔다하고 위군이 패주한 사실을 폭노하였다. (歷城資運竭夜晶籌量沙以爲未魏人謂資糧有余緩之乃돈歸)  

 

근간 일간 신문지상에 실린 기사에 지난이차 대전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김구주석이 중국 장개석 총통과 만난 자리에서 장총통이 자기는 절강성이 고향이라 하고 옛날에는 거기가 백제 였다고 하기에 김주석은 자기나라의 그러한 역사를 몰랐든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후일 술회했다는 기사를 보고 중국인 지도층 인사는 우리의 고대사를 잘 알고 있음을 인식한다. 여기 東明王이 부여에 이르르고 仇台代에 이르러 입국했다고 했으니 백제를 입국한 위구대는 추모王의 아들은 아님이 분명하나 서소노의 아들 비류 온조와의 사이가 삼촌간인지, 손자간인지, 규명할 수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전술한 고추모(周夢)의 건국이 서한 초기 일진데 한반도에는 인구 희소하고 개간되지 않는 산악 지대로 나라를 세울 땅도 사람도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남이니 위례성이니 하는 지명도 물론 없었다. 아마도 신라가 건국한 세기(世紀)초에 이르러서야 만 건국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시기도 지명 같은 것은 없고 주민이 모여 사는 부락에 우리 동이족의 古語 명칭이 약간 있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도 그 시대는 서라벌로 호칭하고 경주는 신라 중기후 당나라의 慶州를 본따서 부친 것이다. 신라와 당이 백제와 싸울 때에도 신라에는 경주라는 地名은 없고 금성(金城)이라고 임의로 호칭 한 것으로 서 금성이란 염은 성 즉 수도의 대명사이다. 우리 동이 족의 지명 인명이 중국식으로 바뀐 것은 신라 통일 후기부터 이조 末까지의 오랜 세월을 거처 이루어진 것이다.

 

   二十四. 한무왕의 조선 반도 海路침입 실패와 신라의 건국

 

요동은 한나라의 색위 국경 밖이다. 진시왕은 불로초가 나는 삼신산을 가려면 조선 제국과 전쟁을 해야 하고 한무왕은 삼신산을 가려면 고구려와 싸워야 했다. 그들은 승산 없는 전쟁을 할 수는 없고 바다를 건너 바로 건너가서 신선이 나타나서 불로초를 구해 준다고 믿을 수도 없는데 적이 해로를 차단하면 속수무책으로 잡혀 죽을 것임에 감히 할 수 없는 일인데 무왕은 만년에 진시왕이 구하지 못한 불로초를 구하고자 이성을 잃었다. 무왕은 멀리 동해 바다를 바라보다가 봉내산에 건너가리라 선언하였다. 侍臣 중신들이 크게 놀랐다. 군신(群臣)이 간하여도 막무가내였다. 동방삭(東方朔)이 간하였다. 동방삭은 중원 제一의 장수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신선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게 얻는 것이옵고 조급하면 이익 되지 못합니다. 봉내산은 수중에 있는 나라에 있고(東海之內北海之隅有國名曰朝鮮天毒其人水居倚人愛人) 여기 물에서 산다는 것은 바다에 둘러싸인 나라의 산에 산다는 뜻이다. 위험한 산악 지역에 가서 신선은 못 만나고 주위 적에게 잘못 포위 되면 어찌 하옵니까? 그 곳에는 사람이 살지 아니하나 요동의 고구려가 그들의 후방에 적이 침입하는 것을 묵과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대군을 동원하여 싸울 수 없는 것은 진시왕과 같은 처지입니다 하였다. 무왕은 일찍이 요동을 거처 조선 반도에 가고자 발해에 창해군을 설치하여 동부여와 교통을 터서 후원을 얻고자 하였으나 고구려에게 패하여 창해군을 철수하였던 것이다. 무왕은 나이를 헤아릴 수 없이 장수한 者 東方朔의 말을 따라 바다로 조선을 침입하는 일을 중지하고 동방삭이 시키는 데로 궁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신선의 출현을 기다렸다. 무왕은 그 후 계속 발해 근방 태산에 행차하여 제사도 지내고 높이 二十丈이 되는 大지점대를 세워서 정성을 드리고 方士를 봉내 방장에 보내어 신선을 만나도록 하라 하고 다시 東으로 태산을 찾아 上帝에게 제사를 올려 볶음을 빌고 친히 발해에 나아가서 멀리 東녘 하늘 아래 三神山 봉내방장을 바라보며 간절히 신선이 불로초를 가지고 올 것을 빌었다.(太初元年冬十月上行幸泰山十二月甲午朔旦冬至祠上帝於明堂東至海上考入海及方士求神者莫驗然翌遣冀遇之十二月甲午朔上親禪高里?后土臨渤海將以望祀逢來之屬冀至朱延焉, 漢書) 그러나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  

 

무왕은 이에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 반도를 침공하겠다고 우겨서 東萊(山東半島)에 수군을 집결케 하여 발해에서 一개 군단을 이끌고 군신의 만류를 뿌리치고 三신산에 신선을 만나러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상륙하지 못하고 十여일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왔다.(上欲浮海求神仙君臣諫弗聽會大風冥海水彿涌留十余日及還, 鑑易) 무왕은 다시 또 선단을 이끌고 갔다가 四日후에 어루선(御樓船 인군타는배)만 돌아왔다고 하였다. 여기 어루선을 호위한 병선들은 어찌 되었는지 어찌하여 어루선만 돌아왔는지 전혀 기록이 없다. 당시 조선 반도는 한무왕의 군단을 격퇴 할 만한 인구도 군사력도 없는 시기였다. 아마도 상륙도 못하고 고구려 순군에게 패멸당한 것 아닌가 한다. 이후로는 무왕은 진시왕 못지 않게 불로초 구하던 그 일을 단념하고 세상에 어찌 신선이 있겠는가. 짐이 간사한 무리들에게 속은 것이로다 하고 불로초 구하는데 동원된 방사, 도사 등을 모두 해체해 버리고 두 번다시 바다 건너 三神山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아니 하였다. 한무왕의 三神山 불로초 구하는 일로 많은 인명을 발해에서 잃었으며 이에 관련된 조정의 궁인과 신료들을 죽인 자도 百여명에 이르렀다고 감역에 기록이다. 한서에는 봉내방장의 신선을 만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갔다가 十日만에 혹은 四日만에 어루선이 되돌아 왔다고 기록하였으나 뽐내는 것을 즐겨 대군을 동원하여 四方을 정복하는 무왕이 배한척을 가지고 단독으로 건너갈 이치는 없고 필연코 해상에서 고구려 수군에게 함대가 전멸되고 무왕탄 배만 경우 도망쳐서 살아온 것 아닌가 한다.

 

한무왕의 조선 반도 침공은 그 자세한 상황이 역사서에 기록되지 아니하고 다만 어루선 즉 황제가 타는 큰배가 돌아왔다고 만 기록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패전의 수치를 남기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한무왕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신선이 사는 조선 반도 가려면 요동을 거처서 가든지 아니면 동해 (황해)를 건너야 하는데 조선 고구려 군과의 싸움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동해를 건너 직접 상륙을 시도하였다고 보인다. 그것은 조선반도 안에는 싸울 상대는 없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아니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왕은 아마도 상륙하기 전에 태풍을 만나고 고구려 수군의 습격을 받아 대부분의 선박과 군사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무왕은 결국 세사람의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東海中三坐神仙所居的山故稱三神山)에 가보지도 못하였다. 이와 같이 진시왕과 한무왕은 태산에 올라 동방 하늘을 바라보며 오지 아니하는 신선을 기다리며 건너가지 못하는 삼신산 봉내방장을 바라보며 애타게 기다리다가 하늘이 정한 수명을 어찌하지 못하고 죽었다.  

 

한반도 혹은 조선 반도라고 불리는 三神山이 있고 동래방장에 불로초가 나고 신선이 산다는 높은 산과 맑은 계곡 세상에서 가장 맑은 공기와 먹으면 약이 되는 물 온갖 영기 있는 휘귀나무 이 세상 아무 곳에도 없는 불로초로 일컬어지는 千년 묵은 산삼이 나는 곳 일명 해중 삼신산은 처음에 농토가 없고, 목지가 없고, 말을 달리고 길우는 광활한 평야가 없어 이곳에 사는 사람은 극히 소수의 남하한 동이족과 남방에서 풍랑으로 조난한 소수인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원 대륙과 요동 만주에서 부족간 전쟁과 민족간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서 패전한 동이족피난민이 조금씩 이주하여 기원 전후에는 상당수의 인구가 유입되었다. 그리하여 BC 三十年경에는 반도 동남 지방에 나라가 생겼으니 그 건국 경위는 중원에서 한무왕의 침략으로 고조선 족의 여러 집단이 피난하여 조선 반도로 건너와서 여러 小國을 이루었으니 가라대,  

一. 曰閼天楊山村이니 瓢巖峯에 웅거하고

二. 曰突山高墟村이니 兄山에 웅거하고

三. 曰茂山大村이니 尼山에 웅거하고

四. 曰覺山珍支村이니 花山에 웅거하고

五. 曰全山加利村이니 明活山에 웅거하고

六. 曰明活山高耶村이니 金剛山에 웅거하였다.

 

이들 나라는 극히 좁은 지역으로 三國 유사에도 산골이라 하였다. 어느날 고허 촌장이 멀리 나정 방림들을 바라보니 말이 꾸부리고 앉아서 큰 알 한개를 지키고 있는 것을 주워서 깨어 그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혁거세라는 十二세 소년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보통 사람과는 다른 위인이였다. 각부에서 이 소문을 듣고 모였다. 상기한 각부 촌장들이니

 

一. 고허부장 소벌도리

一. 무산대수부장 구레마

一. 각산진지부장 지백호

一. 금산가리부장 지타

一. 명환산고야부장 호진  

 

以上 六부장이 공동 합의로 혁거세를 신라王으로 추대하였다.박모양의 알에서 나왔다. 하여 박혁거세라 하였다. 도읍을 서라벌에 정하고 비로소 반도 안에 가야국에 이어 국가 형태를 갖춘 王국이 탄생하였다. 진한, 변한, 등 주위 소국들을 병합하고 농경과 잠업을 장려 개발하여 점차 부강을 이루어 주민의 생활이 윤택하여 지난날 중원의 풍요로운 옥토를 버리고 피난 온 고통을 씻었다. 남만주의 낙랑이 군사를 이끌고 약탈하러 왔다가 신라인이 대문을 밤에도 잠그지 아니하고 곡석을 야적 하여도 도둑이 없음을 보고 낙랑 군은 그 높은 도덕성에 탄복하여 우리가 여기서 저것을 약탈해 가면 도적 떼와 같으니 지난날의 번조선땅 한구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하고 서로 부끄러워하여 그대로 물러갔다. 신라인은 번조선과 고구려 등지의 난민으로서 고도의 문명 의식을 가져 주경야독하고 근면한 문화인 이였다. 박혁거세거서간(朴赫居世 居西干)은 BC 五七年 十三세에 등극하여 역년 六十 一年에 서거하고 남해 자웅이 후사로 즉위하였다. 혁거세王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낙랑국이 상중을 틈타 신라를 습격하여 서라벌 수도를 포위 공격하였다. 신라인은 이러한 부도덕한 야비 행위에 분개하여 결속하여 항전하였다. 낙낭국은 그들의 인국에 대한 부도덕한 공격이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하였다.  

 

   二十五. 高句麗 百濟의 建國記年 축소와 역사 왜곡 왜구(倭寇)의 신라 침략

 

동이 조선의 古代를 중원 본토가 아닌 조선 반도에 갖다 놓고 중원에 있는 지명도 그렇게 하여 역사를 기술하려고 하니 조선 반도는 애초에 없고 중원에 있는 지명을 반도에다 갖다 부쳐 모순된 역사서가 생기고, 거기다 고의적인 식민사를 침략자가 만들어 내어 어처구니없는 착오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굳히기 위하여 남아 있는 우리 古代 史書까지도 모조리 태워 버린 침략자의 역사 왜곡은 오늘날에도 그 잔재가 살아지지 않고 있다.  

 

조선 반도 인구가 조금씩 불어난 것은 진시왕이 연 나라를 파하고 몽활군이 하남 三十주를 유린함으로서 동이족이 큰 타격을 입고 조선 제국은 三조선으로 분립함으로서 九환의 열후가 분열하는 비극 속에 고대사가 소멸되었다. 많은 역사 서적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년도의 오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예로 한무왕 유철이 번조선을 정벌하여 우거王영토를 병합하고 고구려에 대하여는 전혀 당시 싸움을 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고구려를 고구려 현(縣)으로 했다고 깔아 낮추어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때 BC 108年 이전에 이미 고구려 국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고구려 건국 시기에 대하여는 한서 동이 열전에 그 나라가 흥성한 것은 서한초라고 여러 전기에 기록되어 있다.(漢書東夷諸傳其興國倂載西漢之初) 三國史記에도 왕의 母 유화가 동부여에서 흉하시니 금계 왕이 태후예로 장사 지내고 사당을 지어 모셨다(王母柳花於東扶余王金蛙以太后禮葬之遂立神廟) 하였는데 금와王이 자기의 비(?)를 태후의 예로 장사 지내고 사당을 지었다고 하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유화는 해부루왕의 비이고 그의 생전의 덕행과 그 친손(親孫)인 북부여王에 대한 예절로 태후예로 장사 지내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모셨다는 것이 분명하며 유화는 기후 생산을 하지 아니 하였으며, 금계王의 여러 王子들은 금와의 王비에서 나온 王子이다. 유화는 분명 금와王의 서모 혹은 계모이다. 유화 해부루 왕비를 금와(金蛙)王비라 한 것도 고구려의 연대 축소 시키는데서 나온 모순이다. 태조 주몽 후 대주류왕의 연대에서 왕비 대비가 되었다가 태자가 王子가 되었다가 三代로 二代로 바뀌었다가 三國사기 고구려 본기의 모순된 기록은 年代 축소의 흔적이 노출된 것으로 보여진다. 주몽성王의 太子 유타를 빼고 孫子 유리를 太子로 기록하였다. 廣開土大王碑에 고명 世子하고 유리王을 大주류王이라 기록하였으니 上下 분리하여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국조王 宮皇帝는 七세에 즉위하여 太后가 수렴 청정하였고 한의 光武왕은 국조환제 재위 四年에 죽었다. 중국 사기에 중원에서 고구려가 위세를 떨친 고구려王은 宮황제 시대이며 북경 태원까지 中原北반부를 점령한 시대는 평왕에서 광무왕에 이르는시대이다. 국조황제의 직위가 三十年이상 앞당겨야 사리에 맞는 것이다. 고구려의 年記 축소는 이러한 모순을 가져오고 있다. 그 년기 축소는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성왕에서 국태조 궁황제에 이르는 사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여러 古史에는 주몽성王의 왕위를 이을 자는 여달(閭達)이며 유리王은 손자이고 태조王 宮도 大武神王의 조카나 아들이 아닌 후손이라 하였다.(朱蒙死閭達代立閭達死子如栗代立如栗死子莫來 ∼ 子孫相傳至裔孫宮 漢魏총書 通典) 여기 王名 글자는 漢字 표음이니 일정하지 못한 것이다. 안컨데 중국 고사 기록도 우리 나라 고사에 기의한 것이지 우리의 왕조 기년을 중국서 알 수도 만들 수도 없는 것인바 참고함이 그릇되지 아니한다. 따라서 주몽성王의 본처 예氏 소생은 류타이며 유리는 손자인 것으로 보여진다. 기년 문제는 역사상 바르게 고치는 것이 국사 편찬 諸賢의 課題일 것이다. 唐나라 학자 賈言忠의 저서에 고구려는 한나라 때부터 九00年간 있었던 나라 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史記外에 당시 당나라에는 소정방이 가져간 留記를 위시하여 많은 고구려 서적들이 있었을 것이고 역사 연구에 자료가 충분하였을 것임에 그러한 자료에 의하여 우리 나라에 관한 역사 기록에 참고했을 것임에 고언충의 기록은 틀림이 없다고 믿어진다. 倭가 朴赫居世 十一年 병선 百여척을 동원하여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니 군사를 동원하여 막는 중 낙랑이 이러한 틈을 타고 다시 침공하여 도성을 포위 공격하였다.신라는 국난을 극복하고 차츰 발전하였으나 왜구(倭寇)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노략질은 千年을 끝치지 아니하였으나 신라는 단 한 번도 왜를 토벌한 일이 없고 다만 방비와 방어에 전념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연유인가. 

 

평범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신라는 박씨 왕조 왕을 거쳐 석탈해가 계승하여 석씨 王朝 八王을 거치고 다시 김알지가 계승하여 三十七王의 金氏왕조에 이르렀으나 전혀 倭를 토벌한 원정군의 출전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한반도 역사상 그 많은 왜구의 침략 약탈을 막기 위한 원정은 李朝 世宗시대에 단 한 번 대마도의 왜구 소굴을 소탕한 것으로 그것도 왜구를 소탕 섬멸 한 것이 아니고 항복 받고 三百석의 구휼미를 보내어 그들의 굶주림을 구호 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국내의 민란을 진압한 것이다. 신라는 발전 과정에서 예맥국과 옥저 국을 통합하여 후당 시대의 신라 영토는 北으로 만주 동북 지방 옛 동부여 지역에 이른 것으로 당서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왜는 五十여 분국으로 각기 번주(藩主)가 통치하였고 통일 정권은 없었다. 그럼으로 왜가 곳 지금의 일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왜구가 곧 일본을 대표하는 해적인지 의문이다. 우리 나라의 광개토大王 시절 大大的 中原영토 확장전 太祖王 말기 왜국王 흥(興)이 中原順帝에게 올린 表文에 먼 나라 구석의 몽매인에게 나라를 봉해 주시어 이 지역 二百여 나라를 정복하여 항복 받고 종주국에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사오니 비록 저의 어리석음이오나 先代의 그러하였던 것은 멀리 백제가 함선을 띄워 막고 고구려가 불법으로 무도한 침략을 하려고 변경 침탈을 그치지 아니하니 매양 기회를 놓치고 풍파가 없어 진로가 비록 트인다 하여도 신의 亡父濟(죽은 아비 제(濟)가 그들이 天子에게 배알하는 길을 막는데 대해 분개 하였사온데 그것을 쳐서 길이 트인다 하오니 百萬의 후원을 으뜸이오. 감격 하옵고 ∼ 順帝는 이에 自假(가정하여) 開府儀同三司와 여타 모두 가정 咸假)으로 충절을 권하는 조서를 내려 [도독왜 신라 임나라가 타진한 묘한 六國제군사 안동 대장군 왜왕을 제수 했다] (여기 假라함은 사실은 아니나 충성을 맹세하고 그러한 명칭을 원하니 가字를 부쳐서 제수하였다는 것임) 이 시대는 한반도에는 이미 백제가 신라 건국 三十여 년후 지금의 전라도에 百濟 분국을 설립하였고 고구려가 요동 요서를 공략하여 중원의 한에 압력을 가하는 때 인대 중원 南쪽에서는 송무왕이 일어났다. 그러나 순왕(順王) 時代에 와서는 황제를 자칭하여도 미약한 존재로서 다만 수식적인 조서를 보내고 벼슬을 고구려 백제에도 봉작을 하였으나 고구려 백제에 항거할 힘은 없었다.

 

아직은 중원은 한과 위의 세력권이 남아 있었다. 여기 왜가 순왕을 섬긴 것은 지리상 멀리 갈 수 없는 처지였음으로 그리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 왜王을 자칭한 濟나 그 아들 興은 일본 역사에나 우리 나라 역사에 존재하지 아니한 인물이며 왜란 전술한 바와 같이 지금의 일본 구주 대마도 이끼 시고꾸의 고구려가 건국 초기에 지배 하던 곳의 王이 아닌가 한다. 중국측 기록이나 광개토大王 비문의 기록과 같이 신라와 백제를 고구려에 속한 백성이다. (그 시절) 하였은 즉 신라 혹은 백제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이 고구려의 통치를 불복하는 四개 섬을 토벌하는 상황을 그곳 왜가 순왕에게 구원을 호소 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보다 앞서 왜가 처음으로 중원과 소통한 것을 보면 왜가 자칭 대부왜국王이라 하고 왜국은 南쪽 끝이라 하며 使者가 와서 조공을 바쳤다. 광무왕이 인수를 내리고 영초 원년에 왜국왕 수승등이 사람(종복을 뜻함) 160人을 바치고 배알을 청하였다. 환재, 영제지간에 왜는 대란이 일어나 서로 치고 오래 계속되어 王이 없었다. 즉 이로부터 내왕이 끊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BC 三十年경부터 AC 100年 사이는 倭王의 사자가 가끔 오갔다는 것이다.(倭奴國奉貢朝賀使人自稱大夫國之極南界也光武賜以印綬安帝永初元年倭國王帥升等獻口百六十人願請見桓靈間倭國大亂更相功伐歷年無主, 宋書) 大夫國이란 한나라 太守격에 해당하는 계급의 벼슬 명칭이다. 자칭이라 한 것으로 보아 光武왕이 大夫벼슬을 내린 것은 아니다. 후세 일본 도꼬가와바구후(幕府)시대에는 왜구를 통제하여 조선과 중국에 출입하는 선박은 고슈인생(御朱印船)이라고 하는 면허증을 가진 선박만이 출입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왜는 완전 통일국가 일본으로 문명화의 길로 들어섰으며 왜구의 침입도 일단락하였다지난번 일본이 그들의 천왕 묘로 추정 하여 발굴한 아쓰가古 분묘가 벽화 등 매장품으로 보아 고구려인 이라는 것이 확인됨으로서 그냥 복원한 사실과 겨누어 볼 적에 백제가 일본 왕실과 혈육 관계가 있고 아마도 조정을 세워 문화의 꽃을 피운 그 시기보다 한발 앞서 그들 아쓰가 지방의 王이였고 야마도 민족이라고 일컫는 기마 민족은 고구려 인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역사 문제의 거론은 일본인들이 극히 꺼리는 것인바 그것을 그들 국민의 수치로 생각하는 사고는 중국인이나 조선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그들 역사에는 그 누구에게도 정복되었거나 고대에 패전 한일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년 영웅심 같다 할까 왜구에 관한 역사적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백제도 조선 반도 분국을 설치한 후 머지 않아 왜국에 건너가서 국가 형태를 갖춘 정부를 개설하고 비록 지역적이기는 하나 미개한 주민에게 문명 제도를 수출하여 문화 개혁을 이룩하였으니 피난민의 집단이 아니라 백제의 분국 형태였다. 그것은 당시 왜국 조정이 백제王실 인물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백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들의 동맹 관계는 굳건히 유지되었고 신라는 한 때 백제와 왜의 공동의 적이였다. 연에 속했다는 邪馬臺國이 백제南쪽 대해중에 있다고 하였고 유귀(流鬼)도 거기 있다고 하였다. 유귀는 流球國 즉 지금의 오기나와를 일컫는 것이며 李朝 時代까지 사절이 선물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오갔다.  

 

사마대(邪馬臺)는 일본의 야마도 (大和)의 원명(原名)이며 고구려인 이 이주한 나니와 (難波國)와 邪馬臺는 일본 열도 안에 있는 지역인 것이다. 고대 중국의 여러 역사 기록에 동이족 연인의 풍속에 관한 것을 기록하였다. 한민족 풍속과는 너무나 다름으로 특기 하였다. 동이족인 연 나라 사람들은 남녀가 어울려서 노래하고 춤추고 풍악을 좋아하고 한낮에도 그렇게 놀고 그러면서 남녀 불륜 행위와 기타 범법 행위는 엄격한 처벌을 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세계에서 특유한 동이 족의 풍속이며 일본도 차이는 있으나 비슷한 풍속이 있다. 南方의 원주 민족이 사는 일본에 동이 민족이 문화를 이식하여 일본국을 창조한 것은 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실로 인식된다. 그것은 사마도 민족이란 그들이 한 때 주장한 하늘에서 하강한 민족도 아니고 남방에서 온 왜소한 남방 민족도 아니며 용기와 희생정신이 강한 옛 고구려인의 품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열도에 거주하고 있는 몇 종의 원주민보다는 인구수는 적었을 것이나 모든 면에서 월등한 문화적 능력을 가졌기에 원주민을 지배하는 상위 층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지금은 전혀 연고 없는 타국이나 조선 족의 고대 역사 관계를 기술하니 남의 나라 같지 않게 서술하였다. 신라는 박혁거세 王朝 창업후 일체 부정이 없는 정치로 국민 생활이 부유해지고 부양할 자식이 없는 노약자는 국가에서 구호한다는 소문이 四方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국기가 안정됨에 王은 건국 공신 六부장에게 성(姓)을 사(賜)하니 양산부는 양부 李氏 고허부는 사양부 催氏 대수부는 점양부 孫氏 간지부는 본피부 鄭氏 가리부는 한지부 裵氏 명활부는 습비부 薛氏라 하였다. 이어 十七 등의 관제를 공포하고 가무의 곡을 제정하여 예술을 진흥케 하였다. 신라는 혁거세王朝에서 석탈해 王朝로 그리고 다시 김알지 왕조로 이어가면서 모두 현인을 찾아서 선위 하였고 친자식이 王의 자질이 없다고 보면 결코 친자식에게 계승케 하지 아니하였으며 王位계승 문제로 다투거나 싸운 일이 없다. 이러한 전통은 역대 신라 조의 미풍으로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도덕 사회였다. 신라의 이러한 국가 발전은 인국 백제에게는 불안을 안겨 주었다. 백제는 신라가 강대해지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석탈해王 八년 八月 백제는 군사를 일으켜 계산성을 공략하고 이어 구양성을 공격하였다. 王은 二千의 기병으로 격퇴시켰다. 백제는 十四年에 또다시 침입하였고, 十七年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방어군 대장 각간 우오가 전사하였다.  

 

十八年에는 백제가 또다시 변경을 침략하였다. 二十年에는 군사를 일으켜 계산성을 회복하고 수성군 二百명을 섬멸하였다. 二十 一年에는 가야(加耶)와 황산진(黃山津)에서 크게 접전하여 千여명을 섬멸하였다. 신라는 계속되는 외침 속에서도 영토를 차츰 확장하여 인구도 크게 늘었다. 지마니사금 壬午年에 군사 萬명을 일으켜 가야국 영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가야는 당시 신라 보다 먼저 건국한 나라로서 그 세가 신라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능히 신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이후 오랜 세월 신라와 가야는 수교하여 충돌을 피하였다. 나해니사금朝 十三年에서 十四年에 이르는 동안 왜가 침입하고 남해 일대의 八개 나라가 결속하여 가라를 침공하니 가라王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함에 王은 六부의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격퇴하고 六千명의 포로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였다. 

 

十九年에는 백제가 다시 요차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가 전사하니 신라 왕은 이벌손 이음으로 하여금 정병 六千을 거느리고 백제의 파사현성을 공격하고 이로부터 양국간의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이러한 틈에 왜구는 조분니사금王 三年에 신라를 급습하여 곧바로 수도 반월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때 신라는 국력이 신장하여 왜구는 패하여 달아나니 王은 친히 왜를 격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千여명을 참 하였다. 十六年에는 고구려가 北변을 침략하여 방어군이 패퇴하였다. 신라는 백제와 왜가 번갈아 침입하여 견디기 어려운데 고구려가 北변을 공격하니 어려움은 겹쳤다. 첨해니사금王 二年에 고구려에 王子를 볼모로 보내고 화친하였다. 왜구가 년년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주민을 납치 하니 나라안이 편할 수가 없었다. 유래니사금王 十二년 王은 백관을 모아 놓고 묘의를 열었다.

 

王이 이르기를 왜구가 끊임없이 침입하여 백성이 편할 날이 없으니 과인이 백제와 상의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켜 왜국을 정벌코자 하니 어떠한가 하였다. 서불 감홍권이 아뢰었다. 우리 군사는 수전을 익히지 못하였고 모험을 무릅쓰고 원정하였다가 혹여 잘못될까 두렵습니다. 더욱이 백제와 함께 도모한다 하오나 백제는 사술이 많으며 항상 우리를 넘보고 있는 형편이오니 함께 큰 일을 도모하기에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王은 그 계획을 포기하였다. 왜구는 그후도 계속 침입하여 그 규모도 점차 커지고 백성을 납치하여 신라 발전을 저해하였다. 왜구 침략이 계속 되던 中 실성니사금王 七年봄 왜가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사방에서 집결하여 침입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가 신라에 들어왔다. 신라王은 묘의(廟議)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여 王이 말하였다. 

 

왜구의 침탈로 우리 나라는 편할 날이 없고 국민은 계속되는 약탈과 납치로 그 참상은 심화되고 있으나 나라에서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과인의 부덕한 탓이라 이제 군사를 일으켜 저들이 침입할 준비를 하는 중에 선제 공격을 하여 일거에 섬멸코자 하니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하였다. 이에 서불함 미사품이 아뢰었다. 신이 듣사온데 兵은 흉기라 하였사옵니다. 전쟁은 위험한 일이 온데 군사를 크게 일으켜 하물며 먼 곳에 바다를 건너 남을 치다가 불리한 결과가 되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대로 험한 곳에 관을 설비하여 적을 막고 적이 물러 날 적에 치면 이는 편한 것으로 수고로운 자를 치는 병법이오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여 그치고 말았다. 十七年에는 나물(奈勿)王子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신라가 거국적으로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침입하는 왜구를 섬별 할 준비를 갖추고 있으니 이러한 정보가 왜구 대마도 본영에 입수된 탓이리라 이후 약 三十年은 왜구의 침입은 해안 지역에 소규모적 약탈이 있었을 뿐 대규모 침공은 없었다. 

 

그러다가 납지마리간王 二十八年에 왜는 대규모 침입을 감행하여 南과 東에 양로로 침입하여 노략질을 자행하고 주민을 납치해 간 후 익년 다시 침입하여 도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王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위험을 무릅쓰고 선두에 나서서수성 장병을 위로 격려하여 적을 막았다. 적은 성은 함락되지 아니 하고 성밖 주민은 모두 도피하고 약탈한 양식은 떨어지니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王은 군신의 만류를 듣지 아니하고 선두에서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가는 적을 추격하였다. 적은 중도에 복병을 해 두고 추격에 대비하고 있다가 王의 군사가 깊이 추격해 들어온 후 복병이 내 달아 후군을 공격하고 물러가는 군사가 돌아서서 王을 공격하니 王은 진퇴 양난으로 좌충우돌하여도 포위망을 벗어 날수가 없었다. 그러자 큰 안개가 주위를 덮어 지척을 분간 할 수 없게 되니 王은 계교로서 적을 속이고 혈토를 뚫어 탈출하였다. 적은 王이 이미 탈출 한 것을 알고 하늘이 돕는구나 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전쟁으로 신라는 수많은 장병을 잃었다. 자비마입간王 二年에 왜는 병선 百여척을 편성하여 다시 대규모 침탈을 시도하고 월성 도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성의 수비가 공고하여 함락 할 수 없음에 적이 물러나니 신라군이 추격하여 영덕 방면 北해구에 이르러 태반을 섬멸하여 왜구는 큰 손해를 입고 돌아갔다.  

 

적은 두 달 후에 다시 그들 피해의 보복으로 활개 성을 습격하여 성을 파하고 千여명의 주민을 납치 해 갔다. 신라는 千년을 두고 무수한 왜구의 침공을 막아내고 사직을 보존하였으나 단 한 번도 원정군을 파견하여 토벌한 사실이 없다 함은 전술하였거니와 그 수수께끼는 무엇인가. 하물며 왜구는 왜국 지방의 해적 집단일 뿐 전체 왜국군은 아니며 또 그러한 통일국가도 왜에는 없었다. 안컨데 신라는 건국 당시의 조선 반도 인구는 회소 하다 함은 전술한 바이다. 건국 전반기까지는 원정군을 파견하여 왜구의 본거지를 섬멸할 만한 국력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두 번의 원정 논의가 있었으나 그 논의의 내용을 본적 한가지는 수군을 창설할 병력이 없어서 수군 조련을 하지 못하였고, 둘째는 수전 준비가 있다고 가정하여도 인구가 취대동원 병역 萬명을 넘지 못하였을 것임에 원정군 五千을 편성하는 것이 고작일 것임에 그러한 병역은 확고한 성공을 보장할 수 없었다고 보여지며 백제가 이미 분국을 설치하여 세력 확장에 힘쓰고 있는 상황에 나라를 비울 수 없는 여건으로 그러한 정세가 계속 되었다는 것이다. 

 

또 고구려와 똑같은 민족이면서도 고구려는 처음부터 만주 중원 대륙에서 황야에 말을 달려 횡행하며 전쟁에 익숙하여 무수한 승패를 겪은 農牧(농업과 유목)을 겸한 생활양식이 다르게 살아왔음에 고구려 같으면 패할 때는 패하더라도 적국을 공격하고 본다는 진취적 행동을 취했을 것이나 신라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모험은 아니한다는 정책을 일관 하여오니 그러한 무기력한 소극적 결과가 아닌가 한다.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중원과 만주의 거침없는 전쟁으로 동이족 피난민이 계속 몰려오고 낙낭국을 고구려가 멸하여 그곳 피난민이 몰려오고 하여 상당수의 인구가 되었으나, 백제 또한 같은 형상으로 발전하여 신라는 조선 반도와 동북 만주의 고구려 영토가 아닌 지역을 합친 王國을 건설코저한 건국 이념은 실현이 어려워졌다.

 

건국 초기부터 왜구의 계속된 침략은 백제가 강성하기 전에 신라가 반도 내에 영토를 확장하여 백제가 설 땅이 없게 하고 반도 전체를 장악할 기회를 가질 여유가 없었다. 물론 당시 이미 수십만중을 동원 할 수 있는 인구와 국토를 보유하고 있는 고구려와 맞설 생각은 가지지 아니하였고, 고구려도 반도의 협소한 속에 자리잡은 신라나 백제 분국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고구려의 오산이었다. 신라와 백제는 서로가 적대하면서도 고구려가 치면 서로 돕고 고구려는 반도 안에 깊숙이 들어가려고 하면 중원에 있는 역대왕朝는 그들이 눈에 가시로 생각하는 고구려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고구려는 단군 조선의 대통을 이어 중원 고토 회복을 열망하고 있으나 지난날 대단군 조선 제국이 팔굉(八紘)을 집을 삼고 九桓을 관장한 것은 그것이 병마로서 마상에서 무력으로 복속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삼신의 점지를 받아 이 세상에 하강 하사 만민을 통치한다는 종교적 교리로서 중원의 황하 이북, 이동, 요동, 요서, 만주의 열국(列國)들을 총괄 한 것인바 이제 고구려가 비록 단군 天王位를 계승한 天子라고 하나 열국 제후 들이 단군 제국의 옛 종교적 종주로 고구려에 추종하지 아니하고 중원의 상당수 동이족이 살아남기 위해 한족에 동화하고 계속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으니 고구려의 그러한 노력은 중원에서 한족은 조선의 失地 회복이 아닌 침략으로 간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단군 대제국이래 계속되어 온 三神祭는 민족 종교로서 계승 되었고 불교가 들어온 후에도 사찰을 건립하면 三神堂을 따로이 축조하여 공양하였으니, 그것은 석가모니도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구제(救濟)하기 위해 三神이 점지 하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인식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해모수가 천재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四月 初八日을 석가모니 탄일로 기념하고 사찰에 부처님을 모시는 큰 건물을 환웅(桓雄)의 집이라 하여 大雄殿(대웅전)이라 하였다. 이것은 단군古記이며 불전의 기록은 아니다. 그러나 四月 八日의 석가모니 탄신일 기념은 우리 나라 뿐이며 출생지인 인도에도 그러하지 않다 일본에서도 우리 나라의 神宮制度(신궁제도 신라 소지마입간王九年二月置神宮於寮乙 史記新羅本紀)와 같이 신궁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는데 지금도 그의 식은 고대三神祭儀式과 거의 동일하다 신라는 선조王을 모신 신궁에 王이 친히 제사를 올렸는데(十七年春正月王親祀神宮王) 지금 일본도 이와 같이 하고 있다. 古代 우리 나라 三國王室과 日本 王室의 연고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二十六. 太祖황제가 遼東의 漢寇를 축출함과 아울러 중원 고리국 故土를 회복

 

漢광무가 죽고 환왕이 왕위를 이은 후 한구가 요동을 침범함에 고구려는 다시 요동 六현을 공략하고 이어 안왕이 王위를 계승함에 五年에 사신을 파견하여 현도 군에 침입한 한구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실행되지 아니함에 태조 황제는 현도후 예맥 거수로 하여금 한태수 경기(耿夔)를 토벌케하여 화려성을 탈환하고 반격해 온 후임 현도 태수 요광 유주자사 빙환 요동 태수 채풍 등이 대거 출정 요새를 넘어 현도군에 출격하여 예맥거수를 공박함에 태조 황제는 太子 수성으로 하여금 大軍을 이끌고 한구를 토벌케 하였다. 太子 수성은 太祖황제를 따라 역전의 공을 쌓아 용병에 능숙하고 천성이 총명 활달하였다. 한구가 고구려 현토후(玄?候)를 파하고 의기 양양함에 수성太子는 소수의 군사를 전면에 이끌고 와서 화친할 뜻을 사자로 하여금 전하여 적으로 하여금 방심케 한 후 험한 요새지에 군사를 매복하고 大軍을 멀리 우회하여 현도 요동 번성의 한구를 일거에 섬멸하였다. 다음해에는 요동에 주둔하고 있는 一線 部隊로 하여금 요대(遼隊)에 침입한 한구를 소탕케 하였다. 반격해 온 한군大守 채풍 경기 병조연 공손보 등이 大軍을 몰아 고구려 軍을 추격하다가 신창에 매복한 고구려軍 八千정병의 기습을 받고 요동 태수 채풍 공조연 용서 ?마연 공손보 등 한나라 장수 百余명이 전몰하고 황제의 친정군(親征軍)이 패주하는 한 군을 추격하여 섬멸하였다.(蔡諷等追擊新昌戰沒功曹耿耗兵曹?龍端兵馬椽公孫輔以身?諷俱沒於陣死者百余人 後漢書)

 

이어 태조 황제는 친히 군사를 지휘하여 마한 예맥병 수千명으로 현도 군에 출몰하는 한구를 유인케 하고 요동 일대에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한구를 大軍으로 완전 소탕하던 中, 한은 위급함을 벗어나고자 부여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고구려가 북부 중원을 점거하면 하남의 백제도 위태로운 것이다. 이때 고구려는 요동에 침입한 한구를 소탕하고 연하여 右北市 탁군에 침투한 한구를 격퇴시켜 漢은 장차 화북 전체가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백제는 부여王子 위구대로 하여금 정병 二萬을 황하 북류 고구려軍 후방에 침투시켜 한軍과 전후로 협공하여 고구려 군은 일진을 패하고 진격을 멈췄다. 여기 부여는 백제와 同一體다. 高句麗 太祖황제는 옛고리국 故土의 대부분을 회복하는 위업을 이루고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한구의 침입으로 여러 차례 親征에 나서야 했음으로 馬上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太祖황제가 붕어 하심에 한왕은 弔喪所를 차리고 백관을 거느리고 東郊 조상소에 나와 애곡하였다. 비록 서로 싸운 적국 황제이나 그의 위대한 인품에 경의를 표한 것이다. (帝爲 高麗王璉擧哀於城東行宮, 魏書) 처음 고구려 太祖 皇帝가 百歲의 장수를 누리고 붕어 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은 크게 흥분하여 한안왕은 백관을 모아 묘의를 열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지난 전쟁에서 요동 태수 광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었다. 요광이 아뢰었다. 고구려는 강대하여 정도로서 칠 수 없습니다. 지금 상중에 혼란이 있을 터이니 이때를 놓치지 말고 대군으로 음습하면 고구려는 파하고 요동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실로 동방불패의 고구려를 파할 수 있는 기회이오니 고구려를 파하면 그 다음은 요서의 백제를 파하고 하남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군신이 모두 찬동하여 한 王은 크게 기뻐하여 출사 준비를 서두를라 하였다. 이에 상서(尙書)진충이 간하였다. 신은 듣자온데 어진 인군은 남의 불행을 나의 행운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전일 요광은 고구려와 싸워서 패하였사온데 적의 상중에 습격하는 것은 오른 일이 아닙니다. 지난날 고구려는 중원에 깊이 침입하였으나 의리를 버리지 아니 하였사옵니다. 고구려는 강대하여 섣불리 대전할 수 없습니다. 만일 싸워서 성공하지 못하면 예절을 존중하는 고구려는 중국의 의리 없음을 멸시하고 깊이 원수를 삼을 것이오니 이일은 국가에 이롭지 못하오니 조문사를 보내어 지난날의 그들 잘못을 잊고 선린을 이루자고 하면 그들 또한 따를 것이옵니다 하였다. 여기 모든 백관이 고구려의 강력함을 두려워하여 반론하지 아니하였다. 안왕은 그 말을 따랐다.

 

고구려에 문상하는 조문사를 파견하여 수성황제(차대왕)를 위로하였다. 수성황제는 화이(和이) 표시로 수千名의 한인 포로를 석방하였다. 요동은 원래 중원 색위(국경요쇄)밖으로서 지광민희(地壙民稀)라 하며 땅은 거칠고 넓으며 거주하는 주민은 드물다 하여 돌아보지 않는 땅이 였는데, 한무왕이 중원의 四方을 정복하여 무위를 뽐내고자 하는 야심에 찬 무력 시위로 번 조선이 망하였으나 결과로 번 조선에서 요동으로 많은 피난민이 유입하고 만주에 건국한 고구려의 발전으로 요동이 개발되니 역대 중국王은 동이의 땅, 돌아보지 않던 요동을 東北 지방의 수장들을 시켜 요동을 계속 침공하였다. 그것은 정략적 통치자의 제후들을 다스리는 계책도 그러한 것이다.

 

고구려 신大王 四年 현도 태수 경림이 대군을 일으켜 침공하였다. 때에 현도 태수는 공손도 경림 등이고 요동 태수도 여러 명이다. 명예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통례이고 행직은 아니다. 고구려 조정은 묘의를 열어 의논하였다. 군신의 공론은 한구가 비록 대군이나 우리 군사는 날래고 용맹하고 견고한 요새가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우리가 지키고 나가서 싸우지 아니하면 겁을 먹고 있다고 업신 여길 것이옵니다. 한편으로 지키고 한쪽으로는 나가서 싸우면 능히 이길 것이옵니다. 하였다. 그러나 승상 답부가 말하였다. 적의 대병력을 쉽게 파할 수 없습니다. 千里운량에 대군을 먹여야 할 적은 결코 오래지 못할 것이옵니다. 굳게 닫고 싸우지 아니하면 적은 물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이것은 여러 번 경험한 것이옵니다. 하였다.帝는 그 의견을 따랐다. 그리하여 영성(?城)에서 지키고 나오지 아니하니 半年만에 한 군은 양식이 떨어져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승상 답부는 제장을 모아 놓고 훈령하였다. 지금 한구는 양식이 떨어져 굶주린 군사들은 앞을 다투어 돌아가고 있다. 그간 한구는 끊임없이 침략을 일삼았고 우리 영토를 계속 점령하고 있다.

 

天子께서 지금 친히 이곳에 행행하사 나라를 지키는데 노심 하시니 제장은 때를 놓치지 말고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라 하고 정예 기마 五千기로 한 군을 맹추격하여 좌원 평야에서 一大 소탕전이 전개되어 혼전중 후군이 당도하여 포위 섬멸하였다. 전하는 바 한은 이번 전쟁에서 필마불반(匹馬不反)이라 하여 한사람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中國사기는 패전한 전쟁이니 자세한 기록을 아니하였고 우리의 사기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졌다. 승상 답부는 대공을 세우고 百여세의 장수로 세상을 떠나니 신대王 백고 황제는 친히 상가에 나아가서 애곡하고 후이 장사 지내어 七日간 조의를 파하고 애도하였다. 동 十二月에 황제 붕어 하시고 고국 천왕 남무 황제가 즉위 하신 지 六年에 요동 자사 공손도가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였다. 이보다 앞서 先大王이 붕어 하신 후 太子 발기(拔奇)가 불초하여 국인의 공론으로 백관이 상의하여 태자를 페하고 차자인 남무를 황제로 추대하니 발기는 대노하여 휘하 장병과 三萬 호구를 들어 공손강에게 항복하여 돌아갔다. 이 사건은 다음에 그 내막을 자세히 서술한다.

 

공손도는 이러한 고구려의 변란으로 능히 파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대군을 일으켜 침공한 것이다. 제는 太子 계수를 시켜 적을 치게 하였으나 패하고 돌아왔다. 남무帝는 사태가 심상치 아님을 알고 친히 대군을 이끌고 적을 포위 공격하여 지난날의 전승지인 좌원에서 적을 섬멸하니 적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었다. 남무황제는 용맹하고 웅위한 체구의 거인이었다. 후덕한 품성이나 유덕 무모하였다. 황후는 제나부 우소의 딸로서 미모의 야심찬 여인이었다. 중위 대부 좌가려등 요직을 모두 황후의 친척이 차지하고 횡포를 부려 남의 집 전택을 마구 빼앗고 자녀를 납치해서 첩실 종복 등을 삼고 국인이 크게 반발하였다. 황제는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대노하여 이들을 모두 참수한다. 선포하고 잡아 들이라 명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해들은 좌가려등 일당은 반란을 일으켜 왕검 성을 공격하였다. 제는 충의군을 징모하고 기내 병마를 일으켜 반란군을 토평 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후 제는 백관을 소집하고 사후책을 의논하였다. 천자 가라대 간신 소인배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조정을 어지럽혀 백성을 잔휼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짐의 부덕한 소치라 이제 국정을 쇄신코자 하니 경등 四部는 난국을 수습할 현량을 추천하기 바라오 하였다. 이에 四部에서는 모두 안류(晏留)를 추천하였다. 이에 제는 안류를 불러 국정을 바로잡도록 위임하였다. 안류가 天子앞에 나아가 아뢰었다. 臣이 용열하와 국정을 바로잡을 능력이 없사옵니다.

 

신이 한사람을 천거하여 폐하를 도와 사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하옵니다. 서압녹골작이 좌물촌에 을파소라는 사람이 있사온데 유류선황제의 (臣下乙素)외손자 이옵니다. 품성이 강이하고 지려가 깊으며 세상에 나서지 아니하고 스스로 노력하여 살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이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이 사람을 쓰지 아니하면 성공을 거둘 수 없사옵니다 하였다. 帝는 기뻐하여 그를 청하는 정중한 계서를 내려 사자로 하여금 예물을 갖추고 가서 짐의 바람을 전하고 데려 오라 하였다. 帝는 그를 맞아 예로써 대하고 중위 대부를 제수하고 우대의 작위를 더하였다. 그리고 가라대 짐이 선조 열성의 대업을 이어 받아 백성을 다스림에 덕이 박하고 재주가 모자라 밝게 다스리지 못하니 경의 높은 인덕으로 오랜 고생 속에 살아오는 민초를 구해 주기 바라오. 지금 짐의 바람을 버리지 아니하고 이와 같이 나와 주니 이는 비단 짐의 행운이 아니라 사직과 만민의 복이오, 짐의 어두움을 일깨우고 성심으로 나라 위해 봉사하기 바라오 하였다.

 

파소는 비록 충성을 다하여 天子를 받들고자 하나 그 직책이 그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는 책임을 지는 자리가 못되는 지라 天子에게 아뢰었다. 臣은 우둔 하와 감히 폐하의 엄명을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원컨대 어진 사람을 구하여 그 일을 맡기게 하옵소서 하였다. 帝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다시 파소를 승상에 제수하고 大小국정을 위임하였다. 이에 백관 황족들은 파소가 아무런 국가 공훈이 없으면서 승상의 자리에 올라 영지 정사(令知政事)의 대임을 겸하니 불안과 질투가 심하였다. 사태가 이러함에 帝는 하교하여 가라대 인권에는 귀천이 없음이라 짐은 반드시 개혁을 단행할 것인바 국상을 비방하거나 命을 따르지 않는 자는 참하리라 하고 엄명을 내리었다. 파소는 퇴조(退朝)하여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선비는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지내고 때가 오면 출사(出仕)하는 것이 상도(常道)라 금상께서 후의로 나를 대하시니 내가 지난날 편하게 은거하던 것을 어찌 다시 생각하겠는가 하였다.  

 

그는 성심을 다하여 국정을 보살피고 밝은 정치를 펴서 나라에 봉사하여 상벌을 삼가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이면 그 어떤 고초도 앞장서 행하니 오래지 아니하여 나라가 안정되고 위적도 넘보지 못하였다. 제는 안류에게 이르기를 짐이 그대가 파소를 천거하지 아니하였다면 어찌 오늘의 성공을 거두었겠는가 이것이 경의 공이로다 하고 안류를 대사자에 제수 하였다. 제는 재위 十九年에 붕어 하시니 산상왕 연우(延優)가 뒤를 이어 황제 위에 오르니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람을 보니 그의 증조부와 닮았다하여 별명 궁이라 하였다. 선재가 무사(無嗣)하여 둘째 동생이 嗣位(사위) 한 것이다. 처음 故國川王이 붕하심에 우황후는 주위를 단속하여 상사를 감추고 밤에 황제의 첫째 동생 발기(拔奇 )를 찾아갔다. 후는 발기에게 말하였다. 황제께서 無嗣하니 아즈버님 (큰아우)께서 대위를 계승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발기는 아직 兄이 죽은 줄 모르는지라 형수에게 일렀다. 하늘의 역수는 절로 돌아가는 곳이 있는지라 경솔하게 입에 담을 일이 아니옵니다. 하물며 황후께옵서는 사사로이 야간에 부인의 몸으로 사문에 나와 이런 말을 입에 담으니 이 무슨 예법이오 하고 못마땅해하였다. 우후는 무안하고 부끄러워 아무말도 못하고 나와서 다시 다음 시동생 연우(延優)집을 찾아갔다. 연우는 의관을 정제하고 우황후를 맞이 하였다.

 

주석을 차려 좌정한후 우후는 입을 열었다. 大王께서 붕어 하신후 嗣子가 없으니 발기가 뒤를 이어야 할 것이나 내가 그 일로 가서 의논하였든 바 그는 나를 두 마음을 품었다고 모욕하고 무례하니 내가 작은 시숙을 찾아 왔습니다. 마땅히 大位를 이어 주기 바라오 하였다. 연우가 이 말을 듣고 숙연히 자세를 고치고 예를 올린 후 스스로 칼로 주찬을 뵈어 올리었다. 그는 고기를 자르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황후는 직접 상처에 붕대를 감고 친절하게 치료하였다. 밤이 깊어 황후는 궁으로 돌아갈 때 연우에게 일렀다. 밤이 깊으니 혹여 무슨 사고가 날까 두려우니 나를 전송해 주기 바라오 하였다. 그리하여 연우는 함께 궁으로 돌아가 손을 잡고 입궁하여 정분이 각별하였다. 밤이 새고 황후는 백관을 모와 天子붕어 하심을 선포하고 유명(遺命)으로 연우에게 후사를 전한다고 발표하고 즉일로 즉위식을 거행하고 연우는 황제 위에 오른 후 선재의 국상을 거행하고 故國川王이라 일호 하였다. 발기는 이에 대노하여 군사를 이끌고 궁을 포위하였다. 帝는 門을 닫고 일체 부름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발기는 소리쳤다. 

 

너는 어찌 兄을 제치고 황제가 될 수 있느냐? 위계질서를 어기고 황제 위를 차지한다면 내 너의 가족을 몰살할 것이다. 하고 부르짖으나 帝는 三日을 소리쳐도 응하지 아니하였다. 발기는 국인이 따르지 아니하고 힘으로 싸워서 이길 수 없으니 그 길로 처자를 데리고 공손도에게 가서 항복하고 공손도에게 고하였다. 아우가 지금 선제 붕하신후 兄인 나를 제치고 제위에 올랐으니 이것은 천리를 어김이라 형수의 간사한 술책으로 그리된 것이오니 원컨대 일시군을 빌려주면 대위(大位)를 찾고 그 은혜 잊지 않게 사옵니다 하였다. 연王 공손도는 현인 군자라 그 말을 듣고 고구려王이 옳지 못하다 하여 보기 三萬을 빌려주었다. 파기는 三萬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급습하였다. 파기는 고구려에 당도하면 옛 부하들이 자기에게 호응하여 줄 것을 믿었으나 대응하여 주지 아니하였다. 한편 天子는 이 소식을 듣고 끝에 아우 계수(喬須)로 하여금 일지군을 이끌고 응전하였다. 발기는 기대 하였던 동조 장수가 없으니 三萬군으로는 고구려와 싸울 수 없어 패하고 달아나니 고구려 군이 대장 계수를 선두로 추격이 급하니 발기는 감당할 수 없는지라 계수를 돌아보며 외쳤다.

 

너는 늙은 兄을 죽일 것이냐? 이 말을 들은 계수는 兄弟간 우애의 情이 어찌 할 수 없었다.  兄을 보고 말하였다. 황제가 순위를 어기고 兄을 제치고 황제 위에 오른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도 兄은 일시적 분을 참지 못하고 적에 의지하여 종묘 사직을 망치려드니 장차 죽어서 저 세상에 가서 선조를 어떻게 대할 것이오 하였다. 발기는 부끄럽고 할말이 없어 그 길로 배천(요하지류)으로 가서 빠져 죽었다. 계수는 兄의 시체를 거두어 초원에 장사 지내고 통곡하였다. 계수는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고하니 天子는 一喜一悲하였다. 이어 대연을 베풀어 출전 장병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계수는 가만히 天子에게 고하였다. 제가 兄弟간의 가정사로 兄님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기를, 발기가 남의 나라 군대를 빌려 조국을 치고자 한 것은 실로 대죄 옵니다. 그러나 兄을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天子가 물었다. 그대가 전쟁에 이기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고 풀어 주어 그가 자살함에 심히 애통하고 통곡하였으니 이것은 나를 무도하다고 원망함인가 하였다. 이에 계수가 초연히 눈물을 흘리며 아뢰었다. 제가 이제 한 말씀 올리고 죽겠 사옵니다 하였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고 天子가 물었다. 계수 가라대 황후께서 선제의 유명으로 大王을 大位에 오르게 하였으나 大王께서는 사양하는 예의를 차리지 아니 하였습니다. 이미 있어 온 兄弟간 공경하는 의리가 없습니다. 신이 大王의 미덕을 나타내고자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냈사옵니다. 

 

이것이 어찌 大王의 노여움을 사고자 할 생각이 있겠습니까 大王께서 어진 마음으로 지난날의 미움을 잊고 예를 갖추어 죽은 형을 장사 지낸다면 이 어찌 세상 사람들이 大王을 옳지 않다 하겠습니까. 이것으로 臣은 할말을 다하였사오니 죽어도 한이 없사옵니다. 청컨대 유사로 하여금 신을 참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엎드려 죄를 청하였다. 帝는 그 말을 듣고 삼연히 눈물을 흘리고 가까이 다가가서 앉자 아우의 고개를 들게 하고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말하기를 내가 불초하여 미처 생각지 못하였도다. 이제 그대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과오를 알겠노라. 그대는 잘못이 없느니라 하고 위로 하니, 계수는 일어나 절을 올리니 天子 또한 함께 절하여 兄弟간의 우의를 회복하고 한때를 즐겼다. 帝는 그해 九月에 발기의 시신을 다시 거두어 왕후예로 장사 지냈다. 帝는 새로 황후를 들이지 않고 형수 우씨를 황후로 맞이하였다. 고구려의 친가나 처가의 형제간 미망인의 상혼은 간혹 있었으나 우리 나라 三國時代 후기부터 이것이 미풍양속에 어긋나고 사회 풍기에 좋지 못하다 하여 차츰 사라지고 이조에 와서는 큰 범죄로 간주하여 엄금되었다. 이조에 와서 극단적 사대주의에 빠졌으나 조선 제국의 군자국 자존심은 이어졌음이다. 일본과 중국의 일부에서는 지금도 이 풍속이 유지해 오고 있다. 황후 우씨는 후일 임종에 그가 누려 온 황후의 영광이 허무한 것임을 한탄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의 비행을 저 세상에 가서 선대 종실 종친 앞에 무어라 말할 고 하며 한탄하여 마지않았다. 비록 수숙간 혼사를 법으로 금하지는 아니 하여도 도덕적 제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二十七. 高漢 大戰에서 光武帝를 敗退시키고 中原 北部 故土를 回復한 후 歲幣(朝貢)를 徵收

 

大武神王 혹은 대주류왕, 무휼 皇帝는 在位 27年에 遼東과 遼西의 一部 및 山東 河北의 中原 北部 地域 및 東北 地域을 占據하여 中原 故土 回復의 轉機를 마련하는 大功을 이루었다. 高句麗 大武神王 11년 漢王 光武는 高句麗가 扶餘를 倂呑하고 개마국을 征伐하여 威勢가 떨치니 中原 北部에 駐屯하고 있는 高句麗軍과 百濟軍의 中原 攻略이 激化될 것을 우려하여 10萬 대군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수십만 대군이라 선전하며 대거 입구하였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근간에 없었던 대군이 공격해 옴에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였다. 帝는 이르기를 "漢나라 光武가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대군으로 우리를 공격해 오고 있으니 경들의 대책을 듣고자 한다." 이에 우보 송옥구가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를 어진 德을 崇尙하는 자는 繁盛하고 힘을 崇尙하는 자는 亡한다 하였습니다. 中原은 지금 도적 떼가 4방에서 일어나고, 光武왕은 자체 보전도 어려운 상태에서 대군을 일으켜 虛張聲勢로 강함을 과시하니 이는 漢王의 軍部 統制 能力 喪失로 인한 邊防 將帥들의 强要한 장난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放恣(방자)한 行動은 천리를 어김이니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東北과 渤海를 지키고 있는 군사는 부르면 안되고 여기 있는 병력으로 지형의 험함의 이점으로 굳게 지키고 있다가 적이 피폐한 후 기습하면 적을 피할 수 있으니 폐하께서는 마음놓으셔도 될 것입니다." 이어서 좌보 을지두가 아뢰기를 "강하고 큰 적을 잡는데는 신이 요량하건대 폐하의 군사는 일찍이 한나라의 많은 군사와 싸운 적이 있습니다. 가히 모략으로 칠 것이고 힘으로 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帝는 물었다. "그러면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이에 대답하기를 "지금 漢兵은 멀리 와서 필사적인 대적이니 맞서 싸우는 것은 옳지 못하옵니다. 성문을 굳게 닫고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 그들을 치면 크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帝는 위나암성에 들어가서 굳게 지키고 적이 성을 공격하면 막는 것에만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적도 포위망을 뚫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니 아군도 오랜 싸움에 지치고 帝는 두지에게 하문하였다. "싸움은 계속되고 적은 성을 포위하여 풀지 않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적이 지금 약식을 가져다가 먹는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성을 포위하고 계속 공격하는데 지치고 있사오니 무리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우리 성중에 물이 떨어져서 스스로 목말라 무너지는 날이 멀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물 기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 적은 낙담하여 계책이 없어져 싸울 기력을 잃을 것이오니 계곡에 잉어를 잡아 안주로 삼고 약간의 술을 가지고 적장에게 보내 우리가 어려움이 없는 것을 보여 적을 조롱하면 적이 戰意를 상실할 것입니다. 때를 틈타 공격하면 전승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帝는 그 의견을 따라서 계서를 내려 약간의 안주와 술을 가지고 사자를 적장에게 보냈다. 적은 크게 놀랐다. 이제는 물이 떨어져 항복할 것이라고 막대한 死傷者를 내면서 고전하던 중에 성안에서는 물이 충분하다고 하는 것을 보고 전의를 잃었다.  

 

계서가 말하기를 大高句麗國皇帝招諭于漢國將兵矣夫王者之道則通達天理以善治於爲民草之苦樂信勉義焉今漢王秀者弗量天命以放恣無節乎今中原各地之混迷危難則濫發出兵之所致也至此無名之出師於數千里遠征以加惡危害於後邦又出戰士卒橫死於到處暴骨戰野者皆貪欲之果也朕問如此之實?誠憐憫不己也玆以應當投降以保生命爲幸乎今此去使者依送酒饌若干則爲慰幸也 漏錄補記 (大高句麗國 皇帝는 漢나라 장병을 招諭하노라 무릇 임금된 자는 天理를 通達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의 苦樂을 헤아려 부지런히 옳은 길로 이끌어야 하는데, 지금 漢나라 王 秀는 天命을 헤아리지 않고 放恣하여 절제하지 않고 中原 各地에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軍士를 마구 일으켜 화를 불러올 뿐이다. 이제 또 이름 없는 군사를 일으켜 만리 遠征으로 시체가 황야에 흩어져서 白骨이 쌓이니 이것은 貪慾서러운 무리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에 朕은 漢의 無辜한 군사들을 불쌍히 여김에 항복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음식을 보내니 노고를 풀게 하라) 하였다. 한군은 험난한 요새에 웅거하고 성문을 굳게 지키고 있는 고구려를 힘으로 치다가 성은 함락하지 않고 사병의 전사자는 쌓이니 포위하여 성안의 물이 고갈하면 항복할 것이다. 믿고 있다가 그것이 아닌 것을 보고 크게 당황하였다. 수천리 밖에서 운반해 오던 군량미는 점점 여유가 없게 되고 군사는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더 이상 싸울 수 없음에 본국에 表를 올려 사태를 보고한 후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은밀히 요소 요소에서 고구려군의 추격에 대비하고 야음을 틈타 퇴각하였다. 고구려 첩자는 漢軍이 退却을 준비하는 것을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帝는 급히 조회를 열어서 "한군이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으니, 이제 때가 왔다. 전군을 총동원하여 漢軍을 추격하여 섬멸하고자 하니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이에 우보 송옥구가 아뢰기를 "한군이 비록 피폐하였다 해도 계속 지원군이 와서 그 수가 아군의 배에 이릅니다. 

 

그들은 수만의 병력을 잃었으나 크게 구애받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돌아가는 길에 매복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추격해서는 안됩니다. 면밀히 경계를 하면서 추격하면 성과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서 고구려를 능히 칠 수 없음을 그들 스스로 널리 알려주는 것이 십만 군을 섬멸하는 것보다 더 큰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좌우의 여러 將相들이 모두 "우리는 한사람도 손실 없이 승리를 거두는 일이다." 해서 찬성하였다. 이 때 樂浪王 최리가 고구려에 不服하고 특히 漢王光武의 침입으로 낙랑국과의 서로 밀통하는 것이라고 추측하여 그 대비책으로 왕자 好童을 시켜서 樂浪國을 염탐케 했다. 이에 호동은 沃沮國에 들어가 정보 수집에 노력하던 중 樂浪 國王이 沃沮候를 만나러 갔다가 호동을 보고 그 소년이 이목이 수려하고 풍채가 귀인상으로 가히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고구려 황제의 의혹을 풀지는 못하였다. 낙랑은 그 위치로 보아서 반드시 고구려 제국의 산하 열후로 들어가야 할 형세였으나 낙낭은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중원의 한나라의 사주를 받아 그를 믿고 있었을 것이다. 한은 요동 요서를 고구려와 백제가 분리 통치하면서 하북 산동의 여타 동이족과 상통함으로 항상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배후에서 고구려의 제후가 아닌 하나의 복속국 연계를 유지하여 만일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 일관된 정략 이였다. 왕자 호동은 많은 군사 정보를 가지고 본 국에 돌아가서 부왕에게 보고하였다. 帝는 백관을 모아서 상의하였다. "짐이 보위에 오른 후 항상 낙랑후가 짐의 봉작을 받지 않은 것은 고구려의 화근이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 왔다.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고 믿어 왔으니 이제 그 때가 왔음이라 즉시 진군할 준비를 갖추고 불시에 공파하라. 비록 적은 그 세력이 적으나 미리 준비하면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하였다." 백관이 아무런 이의가 없이 준비하여 선두로 정예 1만 輕騎로 급습하여 평양성 주위 요새를 분쇄하여 위부(한나라)와의 교통을 차단한 후 대군이 음습하니 낙랑왕이 항거할 겨를이 없이 항복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중원 출병에 추호의 두려움이 없어졌다. (註. 여기 평양이란 지금의 봉황성으로 추측되나 확실한 기록이 없음, 낙낭은 요하 西南의 발해 변이다.)  

 

이 싸움의 혼란 속에 낙랑 공주는 나라의 神器라 불리는 북을 찢었다는 죄로 죽음을 당하였다. 왕자 호동은 大武神王의 後妃 소생으로, 그녀는 미모의 賢德 婦人으로써 帝가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리고 그 소생인 호동 또한 출중한 호남자로 황후가 적자인 자신의 소생을 제치고 왕위를 넘볼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황제에게 허황된 무고를 하였다. 즉 자기에게 음심을 품고 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大怒하여 호동을 꾸짖었다. 주위에서는 그 억울함을 아는지라 호동에게 억울함을 변명하지 않고 그대로 누명을 쓰고 있느냐고 묻자 호동이 답하기를 "내가 이 일을 억울하다고 해명하면 모후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것은 또 부왕을 근심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곧 부모에게 불효의 죄를 짓는 것이니 어찌 하랴 내가 죄를 덮어쓰고 죽는 것이 옳다."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자 고구려의 백성들이 그 인물이 너무 아깝다고 해서 슬퍼하고 혹자는 그것이 반드시 효도하는 길이 아니라고 여겼다. 실로 고구려조의 잇따른 비극이다. 이와 같은 왕자 호동과 낙랑 공주의 비극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오랫토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漢王은 遼東에서 高句麗를 치다가 敗退하고 그들의 橋頭堡로 樂浪을 이용하고자 해서 파병했는데 그를 구하러 간 구원군이 무위로 돌아오니 이 사실을 후세에 그대로 전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史記}를 왜곡하였다.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장병을 이끌고 가서 고구려를 치고자 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왕이 書信을 보내 왔다. 그 말이 심히 순하고 공손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하고 낙랑을 구하려고 갔다가 미쳐 구하지 못하고 돌아갔음에도 낙랑을 멸하고 돌아왔다.' 라고 하였다. 그 당시는 요동은 고구려가, 요서는 백제가 점유하고 있는 시기인데 요동 태수가 무엇인가? 낙랑국은 대무신왕 15년에 고구려에 항복하여 국왕 취리를 낙랑 후에 봉하였다가 다시 불복하자 20년에 멸망시키고 고구려 직할지로 편입하고 없어졌는데 10년 후인 27년에 다시 한왕은 없어진 낙랑군을 정복하여 현을 두었다고 하는 것은 이 무슨 망발인가! 후세 중국 {史記}는 이런 식으로 위조한 것이다.  

 

遼東 10城築造

 

중원에서 용맹을 떨친 太祖 大王 宮은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람을 보며 크면서 지략이 탁월하여 기상이 웅위하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7세에 등극하니 太后가 垂簾聽政하였다. 한 광무왕 말기에 광무가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패퇴하고 요서에서 철수하여 한군이 우북평지역을 버리고 패수 이남으로 후퇴한 훗일 일것인즉 十城의 완성은 태조 대왕 궁황제의 초기이나 착공은 대무신왕대일 것이다. 10성의 완성은 宮 皇帝 登極 때이고 太后의 垂簾聽政 바로 이 시기이다. 大武神王은 漢나라와 百濟를 효과적으로 막기 위하여 하북 산동의 접경인 요서에 10성을 쌓아 방위와 동시에 河西 30洲의 기지를 마련한 것이다.  

 

(註. 태조 대왕 궁의 연기는 {삼국사기}를 참고한 것이나 궁황제의 실지 年代는 이보다 30∼60년 앞설 것이며 따라서 요동 축성도 궁황제 즉 태조 대왕의 업적으로 추측되며 고구려 기년 축소로 인한 {삼국사기}의 오착이 아닌가 한다. 참고로 이 시기에 서역 불교가 백제와 고구려에 전해졌다. 중원에서 각국 민족에게 연하여 전해진 것이며 중원에서 한의 광무왕 초기 기원전 32년에는 한나라 정부에서도 불교를 연구하기 위하여 天築國에 사자를 파견하였다고 후한서에 기록하고 있다. 西域有神其名曰佛因遣使之天笠國求其道得其書及沙門以來其書大抵以虛無爲宗貴玆悲不殺以爲人死精神不滅隋後受形生時所行善惡皆有報應故所貴修練精神以至爲佛善爲宏闊勝大之言以勸誘愚함精於其道者?曰沙門於是中國始傳其術圖其形象而王公貴人獨楚王英最先好之 (서역에 신이 있는데 그 이름은 부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자를 천죽국에 파견하여 그 도를 얻고 그 서적과 사문 이래의 그 글은 대저 세상 허무를 주로 하여 자비로움을 귀하게 하고 살생하지 말고 사람이 죽어도 정신은 불멸하여 다시 형상을 받아 태어나니 착하고 악한 것이 거행함에 따라 응분의 갚음이 있고 정신 수양을 귀히 하여 광활승대한 부처의 말을 깨달아 그 도를 행하는 자를 사문이라고 한다. 때에 중국에도 그 술법, 그림 형상이 전해져서 왕공귀인 중에도 초왕이 가장 맞서 추종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에도 전해졌다. 이 무렵 요동과 요서 그리고 하북 산동의 일부를 고구려와 백제가 점유하고 있을 때이고 광무왕은 그 지역에 잔류해 있는 변방 장수들을 총동원하여 요동의 한 요충지를 점유코자 시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중원은 群雄 割據(군웅활거)로 皇帝라고 자칭 한자는  

 

一. 邯鄲皇帝(감단황제) 王郎
                     감단에서 기병하여 담양에 입도 하였다가 3년만에 성황제 공손술에게 항복하였다.
一. 梁皇帝 永(양황재 영) 대양황제
                     휴양(紙陽)에서 기병하여 황제 위에 올라 패초 임후지역을 점거하였다.
一. 光武 皇帝 秀(광무황제 수) 대한 황제
                     한종친(漢宗親)으로 형제간에 일어나 춘능에서 기병하고 신시평림에서 정부군을
                     파하고 황제위에 올랐다.
一. 成皇帝 公孫述(성황제 공손술) 대연황제
                     성도에서 기병하여 무릉 서안 등을 점거하고 감단왕제를 항복 받고 장안 낙양에
                     입도하고 한중을 점거하였다.
一. 赤眉皇帝 劉盆子(적미황제 유분자) 대진황제
                     원명은 번승이며 청주부 영주에서 기병하여 당시 관동 대 기근으로 일어난 폭도를
                     도와 정부군 장군을 주살하고 용맹을 떨쳐 황제위에 올랐다.
一. 蘇皇帝 蘇(소황제 소)   일찍 토벌되고 황제 영광을 누리지 못하였다.

 

등으로 각기 분립하여 쟁패하고 한편으로 조선족이 중원 동북으로부터 대거 진출하였는데 紀元前 22년 전후이다. 사이가 구름 띠 같이 모여들어 광야에 싸움을 벌렸다.

 

(四夷雲集龍鬪野 {鑑鋼}15) 여기 사이(四夷)라 한 것은 한서에 조선족을 사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사이라고 한 것은 동이 구종중 부여족인 고구려 백제 예맥 선비 등 중원 동북 지역을 점거한 조선족을 지칭한 것임) 그 유래는 동이족왕은 왕위에 오를 적에 삼신재를 지내서 하늘에 고하고 풍악을 울리며 춤추고 노래하여 천하만민에게 화합의 환심주는 행사를 하는데 그것을 사이음악이라 불렀다. 이에 사이는 조선족의 대명사가 되었다. (四夷樂之別名王者必有作四夷之樂以定天下之歡心祭神明和而歌之以管樂爲之聲) 紀元前 14년에 관동 一帶의 대 기근으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서로 잡아먹고 큰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婉城에서는 광무왕이 왕망군을 포위하여 몇 달이 되니 성중에 먹을 것이 없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關東大饑蝗關東人相食完城漢兵攻之數月城中人相食 {綱易})

 

당시 한은 식인 풍속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皇帝 王莽(왕망)은 全中原에 확산하는 혼란을 막을 길이 없어 반란군 속에 죽고 30여년 만에 다시 劉氏 皇帝시대로 되돌아갔다. 王莽이 패한 후 고구려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왕이 바로 光武였다. 그러므로 요동의 고구려에 침공한 자가 광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후세에 중국 역사 기록에 광무가 요동 태수를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당시 漢 王 秀는 皇帝位에 올랐다 해도 다른 여러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중원을 통치하는 일급 황제는 아니었다. (註. 이들 황제는 모두 같은 시기에 황제위에 올랐으나 광무는 그 형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였다. 세가 미약하여 군웅들을 제압할 수 없어 서 일단 적미왕에게 항복하여 세를 확장한 후 황제 위에 오르기로 하고 백관을 모아 의논하여 모두 찬성은 하였으나 중국 황제가 조선족 황제에게 항복하여 칭신하는 것을 부끄럽다고 하여 땀을 흘리고 손을 들지 못하였다고 고사 기록이다.) 아직 정식으로 황제위에 오르기 전 일이다.) (光武帝未能朔平四方 {綱易}) 그 시대 중원에서 가장 강한 자는 成帝 公孫述이였다. 유일한 중원 중부에 있는 동이족 황제로서 성도에서 기병하여 서안에 도읍하였다.

 

요서에 있는 백제와는 善隣之交를 맺었으나 요동에 있는 고구려와는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고구려와 제휴하지 않고는 중원 본부에서 황제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다른 한족 황제들보다 우월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불과 30여년에 망하였다. 한과 오의 연합군에 의하여 동이족인 황제 公孫述은 멸망되고 그 처자와 성을 들어 항복한 동족인 연잠까지 모조리 죽였다. (延岑以城降吳漢夷述妻子盡滅公孫氏幷族延岑) 같은 동이족인 공손씨의 잔당이 고구려 백제와 연계할까 봐 이와 같이 일족을 항복한 자까지 몰살한 것은 중원 동북에 웅거하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왕망은 중원 동북을 점령하고 있는 고구려군 일부 항복한 자들을 서북의 흉노 정벌에 출전시켜 양측을 상호 자멸케 하는 전략을 썼으나 고구려 군은 되돌아 와서 왕망정권을 공격하여 멸망으로 몰았다. 인솔자 자칭 赤眉王(적미왕)이라고 하는 자는 式候 萌의 아들로서 청서(靑洲 徐洲)에서 일어나 그 무리 수 10 萬에 이르고 정예 군사만도 10 만 명을 넘어 지나는 곳에 방종하고 조선말을 썼다. (別由是?曰赤眉匡丹合將銳士十餘萬人所過放縱東方爲之語)

 

한 광무 건무 원년에는 그들 二部가 합하여 홍농에 모여 장안을 공략코자 하니 왕망 정부군 경시 소무 등이 막다가 대패하고 적미군은 그 무리가 불어서 萬名을 한 개 營으로 나누어 30 營으로 편성하니 위세가 점점 커지니 삼월에는 다시 승상 松을 파하여 한군 死者가 三萬餘名이였다. 그러나 싸우면 이기는 고구려인도 피폐하여 싸움을 싫어하고 밤낮으로 고향이 그리워 동쪽으로 돌아가고자 울었다. (一部赤眉雖數戰勝而疲弊兵皆日夜愁思欲東歸) 이에 적미왕은 하루 빨리 장안에 입성하여 군사들이 방종하면 위로가 될 것으로 보고 장안 공략을 서둘렀다. 秋八月에 적미는 고릉에 이르니 장묘 등이 항복하고 구월에 적미는 장안에 입성하였다. (九月赤眉人入長安 {鑑紀}) 적미왕은 서선을 승상에 제수하고 번승을 어사 대부에 봉안을 좌대사마에 사록을 우대사에 기여는 모두 장군 공경등 서열을 정하여 제수 하였다. 이가 적미왕 유분자다. 후에 광무가 모반하여 그가 섬기든 적미왕을 파하였다.

 

옛 고리국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부여족 해모수왕의 후예 고구려 백제는 BC 170 년경부터 요동의 千여里의 땅에 다같이 나라가 있었으며 그후에 고구려는 요동을 공략하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였다. 백제가 다스리는 땅은 진평군이다. (百濟國本與高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麗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晋平郡平縣 {宋書}) 진평군은 하남에 있다.

 

高句麗 太祖 大王 宮은 幼年에 皇帝位에 등극하였으나 成長함에 智모 卓越하고 謀事가 非凡하였다. 그러나 요동 요서에서 백제와 전술한 황용국의 연왕 빙발은 고구려의 중원 진출에 있어 충돌을 면치 못하였다. 그들 또한 중원 정벌을 꾀하고 있었습이다. 그 후 중원에서는 조조의 위나라가 한을 제압하고 서촉의 유비와 강동의 손권이 각각 야심을 품고 있었다. 위나라는 위왕의 봉작을 거부하는 연왕 빙발을 치고자 대군으로 황용성을 포위하여 맹 공략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고구려는 요서에 10개성을 쌓아 항구를 막고 발해에 있는 동옥저를 희유하여 병탐하고 동으로 창해까지 영유하고, 패수에서 위왕 조조와 접하였다.

 

(위왕 조조가 한의 국정을 전담하여 서는 유사에서 동은 창해까지 그 손에서 임명되었다. 專制令檀威福者西流沙東極滄海莫不授館於東門)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으며 창해는 발해군이고 고구려는 전술한 바와 같이 왕망이 그 대장 음우를 시켜 화친하자고 유인하여 고구려 장군의 목을 베여 長安 城中에 달아 놓고 高句麗를 征服하여 縣을 설치했다고 布告함에 高句麗 大武神皇帝는 大怒하여 中原 고리국 故土를 攻掠하고 대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향하여 진격 명령을 내리고 31년 고구려 太祖 大王 宮은 본격적으로 中原 故土 回復에 착수하였다.

 

한왕은 前事를 사죄하고 고구려국과 우의를 복구하고자 수호를 청하였다. 그러나 한왕은 지난번 과오는 왕망의 과오로 돌리고 아무런 성의 표시도 없었다. 이에 제는 군사를 재촉하여 패수가의 방채를 일거에 분쇄하고 패수를 건너 유주를 공략하고 만여 가구를 요동으로 이주시켰다. 이어 우북평을 포위 공격하여 당년에 함락하였다. 여기에 요서의 10성과 유주 우북평에 30만 군을 각기 分屯하여 치중을 補完하고 越冬 準備에 들어갔다. 光武는 中原의 皇帝들이 각기 야심을 품고 있어 공동 항전에 응하지 아니하니 비록 百萬大軍이라 하나 실전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4 50만의 烏合之衆에 불과하였다. 한왕의 군사는 정예 고구려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여 극심한 사상자와 군수 치중을 잃고 성지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한왕은 장안의 방위를 여러 겹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각지 요새를 수축 강화하였다.

 

이 전쟁에 貊人이 참전한 기록이 나오는데 貊人이란 {後漢書}에 '高句麗 別種' 즉, '고구려에서 갈라진 바'라 하였다. 이 貊人이 용맹을 떨쳤다. (是貊人寇邊愈甚 ) 추위가 지나고 새해 들어 帝는 다시 태자 수로 하여금 정벌에 나서게 하였다. 제1군은 어양을 공격하고 제2군은 上谷을 공격하고 기마 정병 5萬으로 적의 병참기지 太原을 습격하였다. 어양 상곡은 태원기지와 중간에서 차단되어 보급이 두절되고 장차 식량 보급이 끊어질 형편에 이르렀는데 태원이 함락하였다. 어양 상곡은 식량이 바닥나고 군사는 사기가 떨어져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그리고 태원을 점령한 (三十五年春句麗寇右北漁陽上谷太原 {後漢書}) 원정군은 우북평 어양 상곡의 주민 절반이 동이족임으로 병역 보충에 힘입었다. 한편 數 10 萬의 전사자를 내고 달아난 한군은 장안으로 집결하여 준비를 새로이 하고 군량을 쌓았다. 병마의 휴식을 취한 고구려는 만리 원정에 군량 준비를 위하여 공격을 중단하고 월동하여 충분한 준비를 갖춘 후 고구려 군은 장안으로 진격하니 장안 성중에 이 소식이 전해짐에 피난민이 단체를 만들어 떠나갔다. 

 

황급한 한 광무왕은 백관을 모아 모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모든 장상들의 의견이 고구려 군의 銳鋒(예봉)을 꺾을 수 없으니 성을 굳게 닫고 지키고 싸움에 응하지 말 것이며 고구려 군은 수천리 원정에 양식과 여러 치중 운반에 전비를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변화를 보아 역습하면 고구려는 가히 파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은 태원에서 탈취한 군량과 그간 보충한 것으로 별 어려움이 없었다. 이러한 첩보를 접한 한나라 조정은 거침없이 진격해 들어오면서 전초 방위 진지를 마구 유린하고 쇄도하는 고구려 군을 보고 전율하였다. 한은 다시 백관을 모아 묘의를 열었다. 한왕은 말하였다. 짐이 즉위하여, "초기에 국난을 맞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하니 군신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들은 안전에 닥친 충격이 너무나 컸던 것이였다. 겹겹이 구축한 방위선이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고구려 군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방위 병역의 대부분이 종횡무진으로 추격하는 고구려 군 말굽 아래 짓밟히고 中南 中原을 영유하고 있는 다른 황제들도 위험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음에도 각 주군을 휩쓰는 고구려 군에게 감히 항거할 생각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장안을 구하려 하지 아니할 것임에 광무 홀로 고구려를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당시 낙양도 이미 연나라 황제 공손술과 백제의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어 파괴된바 가 있었고 패망의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哀皇帝三年燕陷洛陽 {鑑易}) 이미 수십만 병역을 잃은 한왕은 장안을 잃으면 갈 합당한 곳이 없었다. 다른 곳에 있는 황제도 그가 의탁할 곳은 못 되었다. 일부 신료들 이 최후 결전을 주장하나 아무런 승산 없는 주장이였다. 광무왕은 요동 태수 蔡尤에게 하문하였다. 경은 그 동안 요동에서 오랜 세월 고구려와 여러 번 싸운 경험이 있으니 고구려에 관하여 아는 것이 많을 것인즉 무슨 묘책이 없는지 말해 보라 하였다. 채동이 입을 열었다. "지금 저들의 출사 명분이 고토 회복이옵니다. 하북의 하남군(河北省 河南郡) 옛 고리국 영토와 산동 평주지역이온데 그 곳은 고구려 발상지로서 옛 고조선 땅이옵니다. 지금 그 일부를 우리가 점유하고 있사오니 이 곳 주민 또한 동이족이오니 이것을 돌려주면 침략 명분이 없어질 것이오니 은이로 달래면 화친에 응할 것이옵니다."하였다. 채동은 요동에서 고구려에게 패하고 패잔군을 이끌고 이곳 광무의 휘하에 와 있었다. 그는 이어 말하였다. "지금 고구려는 화북을 휩쓸고 위엄은 화하에 진동하니 이르는 곳에 호령을 받들지 않은 자가 없사옵니다. 

 

우리가 싸우다 패하면 진시황의 중원 정복 再版(재판)이 될 것이옵니다.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지난날의 고조 황제가 모돈에게 행한 은이의 전래로써 고구려왕 궁을 달래면 난국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여겨집니다. 싸우다 패하고 성이 함락되면 저들 또한 희생이 클 것임에 항복을 수용하지 아니하고 지난날의 왕망의 과오를 구실로 복수할 것이오니 이 점을 헤아려 주시옵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이는 예절을 존중하오니 흉노 모돈과 같은 공주의 헌납과 같은 요구는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신이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패하를 위하여 고구려 왕을 만나서 화의를 성사케 하겠습니다."하였다. 만조 백관이 비통한 마음으로 반박하는 자도 있으나 조용하였다. 광무왕은 이름은 수라하며 재능이 출중하고 현명하여 요동 태수의 직언을 책하지 아니하고 수용하였다. 그는 원래 유방의 후예로써 지방에서 자라서 28세에 신왕 왕망 말기 지방 호걸들이 모여서 한고왕의 후손인 수가 현명하다 하여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세상에서 알아주는 인물은 아니고 文書上에 보이는 황제인지라 하물며 황제를 일컫는 자 여러 사람이 있다.(融等召豪傑議之其中識者皆曰皇帝姓名見於圖書?今稱帝者數人)

 

그러나 광무 수는 사람을 끄는 수단이 있었다. 명장 馬援은 황제 공손술의 고구인대도 더욱이 원래 출신은 동이족인데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마원이 한 번은 공손술 황제 측으로부터 광무를 보러 갔다. 광무는 반가이 맞아 인사를 나누고 좌정한 후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은 두 임금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마원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하고 말하였다.

 

"지금 세상에 임금이 신하를 얻는데는 사람을 가려서 들이는데 신하 또한 임금을 섬기는 데는 가려서 섬기나이다. 공손술은 같은 고향으로 어려서부터 같이 컸으니 친한 사이옵니다. 이제 신이 먼 곳에서 찾아왔는데 어찌 폐하께서는 혹여 자객이 아닌지 의심하지 아니하니 혹시 간사한 자객이면 어쩌자고 이와 같이 쉽게 대하나이까?"하였다. 광무는 "경이 자객이 아님에 공론함이요"하니 마원이 말하기를 "천하에 반복하여 이름을 날리는 자가 부지기수인데 이제 패하의 큰 도량은 高祖와 같음을 알 수 있으니 참으로 왕이옵니다."하였다.

 

마원은 친구 효를 만나 東方事(고구려)를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전에 조정에서 광무왕은 나에게 수 10번을 의논하면서 매 번 연나라 말(조선 말)로 접하니 아침부터 밤까지 명철하고 용기는 적이 없고 마음을 털어놓고 성의가 보인다." 하였다. (?與援共臥起問以東方事曰前到朝廷上引見數十每接燕語自致旦才勇略非人敵也且開心見誠 {鑑易}) 여기 마원이란 북파장군의 작위를 받고 훗날 조조가 한나라 황제 핍박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조조를 죽이려다 모살 당한 마등의 고조인데, 고구려가 광무를 칠 때에는 연로하여 출전하지 못하였다. 광무는 이러한 인물이였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광무는 채동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요동 태수 채동이 한왕의 조서를 가지고 고구려 황제를 배알하고 국서와 함께 歲幣를 올리니 고구려 황제는 화친을 허락하였다. 여기 세폐란 매년 종주국이나 강자에게 바치는 세금이다. 중국 기록은 이것과 같은 선물등 타국왕이 보내는 것은 모두 조공이라 한다.

 

(二十五年春句麗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蔡尤以恩信招之皆復還塞後 {漢書}) 한왕 광무가 고구려 천자께 바치는 조공을 한서에 조공 혹은 세폐를 바쳤다는 것을 중국식 기록에 말을 바꾸어 '은신 초지'라하여 그들의 자존심을 달랬다. 요동 태수 채동전에 의하면 세폐는 2億 7千萬이라 하였으니 국가 재정에 큰 몫을 하였다. '개복환색후'라 함은 모두 요새 뒤로 물러가서 아이대로 복구하였다고 하였으니 여기 지칭한 요쇄는 하북은 함곡이고 산동은 패수니 옛 고리국은 회복하고 여타 색안은 아이대로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기원 49년이다. (註. 한나라에서 고구려에 恩信招之했다고 {한서} 등에 기록하였으니 한의 광무제가 고구려 황제에게 항복하여 稱臣한 것이 아니고 화친하고 그 대가로 歲弊를 바친 것이니 그것은 조공이 아님으로 은신 초지라는 묘한 문구로 대신한 것인데 그들이 받는 경우에는 무조건 조공이라 썼다. 한고조가 흉노 單于에게 황녀를 헌납한 것도 恩惠를 베풀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 필법으로는 중국 외에는 모두 오랑캐에게 바친 것은 상납이 아니고 은신이라는 것이다. 원래 은신이라는 문구는 한 나라가 북적 부족들에게 분활 통치 각개 격파 등의 전략적인 매수 자금에 관한 용어이다.)
 

 28.고구려(高句麗)와 위(魏)가 합작(合作)하여 공손연을 멸(滅)하고 모용광이 고구려를 공략

고구려 10대산상왕 延憂 皇帝는 후사가 없어 근심하고 山川에 제사지내고 王子를 점지해 줄 것을 빌었다. 어느 날 꿈에 三신이 나타나서 이르기를 '장차 소후의 몸에서 太子를 얻을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하였다. 다음날 天子는 국상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하고 , "짐이 小后가 없는데(고구려는 황실의 기강이 엄격하여 소후 비빈 등을 두는 것을 자제하고 중국의 수백명 수천 명씩 후궁을 두는 제도를 오랑캐라 멸시하고 형편에 따라 후궁을 두어도 한 두 사람에 그치고 天子의 행동은 항상 백성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관습이 있었다. 그러므로 남녀 불륜 사건도 엄격하게 다스렸다.)그러한 꿈을 꾸었으니 이 무슨 꿈이요."하고 물었다.

 

국상 을파소는 말하기를, "하늘의 뜻은 헤아릴 수 없사오니 두고 보십시오." 하였다. 그 해 八月에 을파소가 세상을 떠나니 온 나라 사람들이 크게 슬퍼하였다. 그는 오랜 세월 天子의 특별한 신망으로 국정을 처결하고, 天子는 인사와 재정을 그가 하는 데로 따랐다. 그가 죽고 喪家는 초라한 집에 약간의 책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나라에서 내리는 녹봉이나 상금은 나라 안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모두 구휼하는데 쓰고 없었다. 그리하여 국고는 항상 차고 군사는 강성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 제사에 쓰는 돼지가 달아나서 주통촌이라는 마을까지 추적하였다.  

 

그러나 사나 와서 잡을 수가 없었고 특히 제사에 쓰는 돼지는 잘못 상하게 하면 엄벌을 받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다루게 된다. 더욱이 전일에는 달아나는 제수용 돼지를 잡다가 다리를 부러뜨렸다. 이에 관리자는 정성이 모자란다 하여 처형된 일도 있었다. 그래서 관리자는 잡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노라니 한 묘령의 미녀가 나타나서 보고 웃으며 쉽게 돼지를 달래며 잡아 주었다. 하도 신기하여 그 처녀를 보니 참으로 미인이며 품위가 있어 보였다. 관리자는 궁으로 돌아가서 이일을 이야기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天子는 호기심에 한 번은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방에 좌정후 그 처녀를 불러 그처녀와 하룻밤을 보내고자 하였다. 그녀가 말하기를, "소녀가 어명을 거역할 수 없어 왔사오나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 인가하면, 혹 자식이 생긴다면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여주옵소서." 하였다. 帝는 허락하고 하루 밤을 지내고 환궁하였다. 다음해 봄에 황후가 이 말을 듣고 질투하여 군사를 보내어 죽이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그 주통촌 처녀는 남자 복장으로 갈아입고 달아났으나, 추격하여 온 군사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리하여 군사가 칼을 뽑아 들고 찌르고자 하니 처녀는 크게 소리지르며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은 누구의 명령이냐?"하였다. 군사가 말하기를, "우리는 황후 마마의 명을 받들어 너를 죽이려 하니 그리 알라."하고 칼을 쳐드니 "잠깐만!"하고 소리쳤다. "지금 나의 뱃속에는 王子가 계시느니라. 너희가 나를 죽이는 것은 곧 왕자를 해치는 것이니 그러고도 장차 너희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 하였다. 군사들은 주춤하고 서로 돌아보고 그대로 돌아가서 황후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황후는 질투 시기가 심한 사람이라 분노하여 언젠가 죽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天子께서 이일을 전해 듣고 다시 주통촌 그 처녀 집에 납시었다.

 

 帝는 물었다. "네가 임신한 것이 누구의 자식이냐?" 그녀가 답하여 말하기를, "소녀가 오늘까지 형제간에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아니하옵니다. 어찌 감히 외간남자를 가까이 하오리까? 살펴 주옵소서." 하였다. 은밀히 알아본 바에도 그녀는 행동거지가 정숙하고 단정하여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帝는 그녀를 위로하고 상을 후하게 주어 보신을 잘하라 이르고 돌아와서 황후에게 일러 그를 질투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그후 황후도 다시는 해치지 못하였다. 그후 주통촌女는 생남하여 帝는 크게 기뻐하여 과연 꿈대로다 하고 그녀를 소후로 들이고 그 아이를 太子로 봉하니 그가 후일 동천왕 憂位居황제다. 산상왕이 붕어 하신 후 大位를 이은 憂位居 황제가 즉위하고 八年에 魏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우북평 하북 산동일대에서 오랜 싸움끝이였다. 帝는 이를 허락하고 화해가 성립되었다. 조조의 손자 조예의 시대였다. 이 ?는 위나라는 서촉의 제갈 량이 중원에 침입하고 강남의 손권이 양자강을 사이에 대치하고 있어 고구려가 동북을 치면 감내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한편 10年 봄에는 오왕 손권이 또한 사신 호위를 보내어 통호를 청하였다.  

 

고구려는 그 사자를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의 공손氏와 모용氏가 단군 제국 분열 후에 계속 고구려와 통합을 거부하고 동족상잔을 계속하고 강동 손권이 공손씨의 고구려 침공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제 고구려는 위 나라의 제의를 받아들여 공손씨를 멸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나라 사자의 목을 베어 漢나라에 보냈다. 공손씨는 하남 요서의 백제국과 연합하여 오히려 고구려를 멸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十一年 고구려는 위에 사신을 파견하여 요동의 공손연을 멸할 구체적 논의를 끝내고 고구려는 東北에서 위는 西南에서 공손연을 협공하기로 하고 고구려는 주부 대가로 하여금 十萬군을 이끌고 나아가 공손연을 치게 하였다. 위는 태부 사마애로 하여금 4萬의 군사를 이끌고 서남에서 공손연을 공격하였다. 공손연은 앞뒤로 적을 받아 불과 반년에 패망하였다. 공손연은 공손강의 아들이고 공손도의 손자다. 위가 요동 태수에 봉하여 고구려를 막게 하고 강동 손권은 공손연을 연王에 봉하여 고구려를 막게 하였다. 물론 허명의 봉작이나 공손연은 고구려와 합쳐 중원 고토를 회복하는 聖業에 고구려와 함께 할 생각은 아니하고 위와 오의 조종을 받아 고구려를 적대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고구려의 타협을 모르는 강성적 정책도 한 가지로 동족 화합의 묘미를 발휘하지 못하는 조선족의 단점이 한족의 유연하고 타협적 유난성에 열등함을 들어낸 것이라 하겠다. 위장 사마애는 능수능난한 모략가였다. 그는 공손연을 파멸하지 아니하면 언제 또다시 지난날의 위험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를 것임을 조정에 일깨웠다. 하남에 자리한 백제는 강성하여 공손연의 후원을 받고 있으며 백제와 인접한 서하국과도 친밀하니 공손씨가 고구려와 화친하면 그것은 곧 위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지난 광무 초기 동이가 중원을 석권하던 것과 같은 사태가 불원 닥쳐올 형편이다. 선수로 고구려를 회유하여 화친을 이룩한 것이였다. AD 238년이다.

 

그때 상항기록을 보면 120年전에도 다시 조선은 국경을 넘어 수관 장병을 살해하고 항주 서하 四郡을 점령함을 두고 보고만 있었으니 효안 황제 열성조 대업을 이어받아 백성의 재난을 구하고 평화를 누리도록 선정을 베풀지 못하고 적의 침략은 종횡무진으로 황하를 활거하여 그치지 않는데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한 바 (恭宗孝安皇帝五年夫余夷犯塞殺復吏人閏月丁酉赦?洲河西四郡戊戌詔曰朕以不德奉郊廟承大業不能與和降善爲人祈福災異蜂起寇賊縱橫夷狄猾夏戌不息 {鑑易}) 지난날의 大禍를 사전에 방지코자 조정을 설득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공손연의 연나라를 파한 것이다. 여기 하남 백제국과 인접한 하서 四군은 낙양과 불원하고 하남은 수도와 불원하여 위는 항상 위협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곳을 점유한 부여란 고구려 백제 선비 오환등 옛 부여 출신 조선족의 총칭이다. 여기가 곧 西河國이다. 공손연을 파한 사마애는 요동의 요지를 점령하고 있는 부대는 철수하지 않고 위는 모구검을 요동 태수로 임명하여 지키게 하여 요동의 주권을 장악코자 하였다. 고구려는 이에 요동의 요충 서안평을 공격해 온 위군을 축출하고 요동을 점령하였다. 위지는 위 사마애가 요동을 정벌하는데 고구려가 군사 수 천명을 보내서 지원하였다고 하였다. 

 

요동을 점령한 위의 당위성을 입증코자 고구려 군을 축소하여 기록한 것이다. 위의 존망을 위협받은 공손연의 연나라를 단지 사마애 군사 4萬名으로 멸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삼국지의 僞作이다. 위는 母丘儉으로 하여금 數十萬名을 이끌고 가서 현도군을 공략케하였다. 고구려는 步騎二萬을 선봉 부대로 출동케하여 불류수상에서 위군을 大破하였다. 帝는 제장을 모아 영을 내렸다. "모구검은 위나라 명장이라 그를 사로잡아 위의 威勢를 꺽을것이니 모구검이 지금 주력군을 잃고 어려운 지경에 있으니 분투하여 섬멸토록 하라.”하고 帝는 친히 中軍진영에 나가서 군대를 지휘하여 대가로 하여금 五千철기병을 이끌고 위군을 추격하였다. 이에 "모구검은 과연 기장이였다. 그는 초전에 두 번 패하여 많은 전사자를 내고도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였다. 모구검은 말하였다. 적이 두 번 이기고 우리의 사상자가 지대하니 적은 이제 교만하여 반드시 우리를 추격할 것이다. 각장은 여차여차히 포진하라. 내전면에서 적을 항전하다 달아나면 적은 전력하여 나를 추격할 것이나 요수가에 이르러 완전 포위하라. 적병이 정예 하나 선봉군이 불과 五千이라 하니 후군이 당도하기 전에 반드시 몰살하여 적의 전의를 꺾어야 하나니 착오 없이하라. 싸우다 후퇴하는 자 있으면 현장에서 즉결하라." 대전의 승패가 이 일전에 달렸으니라 하고 각기 진지로 돌아가 준비를 갖추었다. 고구려는 二차의 전쟁에 전승함에 帝는 모구검이 멀리 달아나지 못하게 선봉 五千을 보낸 후 대군을 총동원하여 추격하다 보니 선봉 첩보에 아군이 몰사하였다 하고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다 하며 패잔 부상병이 또한 돌아와 고하였다.  

 

그리고 十萬위군이 물밀듯 들어오며 후군도 이미 포위되었다고 보고하였다. 帝는 대경하여 후퇴를 명령하였으나 이미 늦은지라 위군이 겹겹이 포위하여 나갈 곳이 없었다. 帝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과인이 적을 치는 것만 알고 적이 나를 치는 것을 생각지 못하였으니 옹렬한 王이로다."하고 한탄하였다. 이 전쟁에 전사자 萬八千이요 부상자는 부지기수로 十萬군이 파멸하여 帝는 남아 있는 수千여기를 이끌고 압녹원 요하 지류 지역으로 후퇴하여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던 중 위장 모구검은 환도성을 포위 함락하여 고구려 군의 재편 통로를 차단하였다. 한편 모구검은 장군 왕석으로 하여금 고구려왕을 추격하니 帝는 구원군의 집결을 기다릴 수 없어 남옥저로 달아나니 따르는 자 모두 흩어져서 장군 동부 밀우 한 부대가 곁에 남아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적의 추격은 급하고 남은 군사는 적으니 사태가 급하옵니다.

 

소장이 죽음으로 적을 막을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사잇길로 멀리 달아나소서."하고 "이중에 나를 따라 순국할 자 나오라."하니 수 千 여명의 군사가 따랐다. 그는 十여명의 결사대로 협로에서 위군 선발대를 막아 적군 백여 명을 사살하고 그 사이 帝는 탈출하여 산 속에 의지하여 모여든 패잔병으로 진을 치고 이산 장졸을 모아 방어 진지를 만들고 장졸들에게 이르되 "누가 능히 가서 밀우를 구하여 오면 후상하리니 용기 있는 자 나서라 하니 하부 부장 유옥구가 나와서 신이 사력을 다하여 구해 보겠습니다." 하였다. 유옥구가 진지를 찾아가니 적은 아황상이 멀리 달아나 추적 불능으로 단념하고 돌아가고 전장에는 시체만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밀우는 아직 몸이 식지 아니하였다. 그를 일으켜 업고 본진으로 돌아와 금침위에 눕혔으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기적으로 소생하였다. 한편 위장 모구검은 수하 장군에게 엄명을 내렸다. "지금 적도 환도성을 함락하였으나 고구려王을 잡지 못하였으니 승전의 성과가 없음이라 지금 고구려를 완파하지 못하면 불원 고구려는 재기하여 우리를 칠 것이니 기필코 끝까지 추적하여 고구려王을 잡으라."하고 계속 추격하여 남옥저의 피탄지를 포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패잔군은 위의 수만 군을 대항하기에는 너무 빈약하고 여타 고구려 군은 모구검이 요로를 봉쇄하여 집결이 불가능하였다 .帝는 세궁역진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동부인 유유가 나와서 아뢰였었다. "지금 아군은 약소하여 적의 大軍을 막을 수가 없사옵고 구원 군은 모구검이 막고 있어 오지 못하오니 이대로 싸워서 헛되이 죽을 수 없사옵니다. 신이 한 계교가 있어 성공하면 폐하는 가히 사직을 보전할 것이옵니다 하고 적진에 들어가 항복한다고 하고 적장과 함께 자폭하겠습니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얼마만의 술과 안주를 만들어 가지고 적장을 찾아갔다. 고구려 대장 유유가 고구려 황제의 항복서를 가지고 대위제국 원정 대장을 배알하러 왔으니 너희 대장에게 전하라 하고 위군 진지 앞에 와서 외쳤다. 비장은 즉시 저희 대장에게 이 말을 전하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저희 황제께서 항복코자 먼저 약간의 酒肴를 가지고 가서 이 뜻을 장군께 전하라 하옵기 여기에 왔사옵니다."하고 음식을 받들어 올렸다. 주위에서 받아 올리는 순간 감추었던 비수로 비호같이 달려들어 적장을 찔러 죽이고 그도 동시에 도륙을 당하였다.  

 

적은 대장의 갑작스런 변고에 혼란에 빠지니 고구려 군은 불과 三萬이니 비록 소수이나 결사적으로 창칼을 뽑아 들고 돌격하니 위군은 지리멸렬하고 도주하였다. 帝는 수만 명을 격살하고 군사를 수습하여 낙랑으로 돌아와 전열를 갖추고 위적에 대비하였다. 모구검은 숙진 경계까지 왔다가 '고구려는 과연 강국이다. 힘으로 멸할 수 없다.'하고 돌에 새겨 기공하고 다시 환도성에 이르러 不耐城이라 각석하여 전공을 기념하고 장병에게 영을 내려 일체 고구려 능을 파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 군의 추격이 급하여 부녀자를 석방하고 돌아갔다. 고구려 군은 호국 이념이 철저하여 위난 지경에도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는데 서슴지 아니하고 항복이나 도피하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였다.

 

帝는 유유의 죽음을 길이 빛내게 하고 그의 유족을 후대하고 유옥구 밀우에게 식읍을 봉하고 논공 행상을 하였다. 帝는 관인 후덕한 군주로 국민의 신망이 두터워 백성이 잘 따랐으나 전쟁의 경험이 부족하였다. 초전에 대승을 거두고도 승전 못하였으니 유능한 모사가 없었다.불행히도 지난 날 중원을 호령하든 명장 전략가도 없었고 위의 사마애나 모구검에 비길 만한 장수도 없었다. 그러나 충의 사절지사가 무수하여 나라를 보전하였다. 여기 不耐城은 한지에 동부도위치불이현위지작불이성이라(東部都尉治不而縣魏志作不而城)했으니 옛 황용국 영지인 황용城 즉 요하서북에 있다. 위는 모구검의 성과로 고구려가 상당 기간 중원 침공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서촉의 유선과 강동의 손권을 정복코자 나섰다. 고구려는 수도 환도성이 불타고 회복 불능임에 새로이 평양에 왕검성을 축조하였다. {사기}에 평양은 원래 옛 단군의 고택이다(平壤都本仙人檀君之宅)하였으니 평양은 여러 곳에 있음으로 어느 평양인지 분명치 않으나 世祖 時代(晋황제 사마염) 쇄의 증손 璉(고국양왕)이 처음으로 중원에 사마염에게 사신을 보내 왔음으로 산기시랑 이오로 하여금 절월을 가지고 가서 연을 도독 요해(발해)의 군사를 총괄하는 정동 장군으로서 요동군을 통치하는 고구려王이라 하고 이오가 평양에 가서 보니 고구려 황제가 있는 평양은 요동南으로 千여리고 東으로 가면 책성에 이르고 南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북으로 가면은 하얼빈-옛 부여에 이른다 하였다. (遣員外散騎侍郞李敖排璉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敎至其所居平襄城訪其方事云遼東南一千余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扶余 {鑑易})

 

이것으로 보아 이때의 평양은 심양 혹은 통화로 보인다. 이연 황제가 붕어 하심에 고조는 태화十년 東쪽 교위에 弔喪所를 차려 놓고 친히 애곡하였다.(太和十五年璉死年百余歲高祖擧哀於東郊 {鑑易}) 다른 기록에는 七日간 조회도 폐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행사는 종주국에 비유할 이웃나라 황제가 죽었을 적에 행하는 예절이다. 물론 조문사도 보냈다. 지금 세상보다는 인정이 있다. 태화는 페제 년기다. 이때 魏는 고구려의 속국은 아니 였으나 이와 같이 종주국에 대한 예를 행하여 정성을 표하였다. 東川王 二十二年 신라가 국세가 신장하여 비로소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친교를 맺었다. 고구려는 만주에서 국가 재건에 힘을 기우려 요동을 회복하고 요하 건너에서 세를 확장하였다. 요동에서 공손연이 망한 후를 이어 모용세가 일어나서 요동에서 세를 확장하기 시작하고 당시 새로 일어난 송나라도 중원의 남쪽에 있었다. 당시 중원에는 위나라와 서촉의 후한과 강동에는 오나라와 북에는 진나라와 남에는 송나라와 동에는 연나라와 기타 군소국이 있었는데 그중 위, 오, 촉의 三국이 강하여 三국시대라 하여 삼국지 소설이 후세에 나올 만큼 유명하나 연나라도 이에 못지 않았다. 

 

연은 요동에서 강국 고구려의 위협을 느꼈다. 모용귀는 사마애가 요동 공손연을 칠적에 선봉장으로 큰공을 세워 그 공로로 의왕(義王)의 봉함을 받은 막호발의 증손이고 모구검을 따라 고구려 정벌에 공을 세운 목연(木延)의 손자이며 좌현王의 봉함을 받은 섭(涉)의 아들이다. 고구려와 상당 기간 요동에서 승패를 거듭하였다. 모용귀가 죽고 아들 모용원진 일명 모용광은 연王을 자칭하고 고구려와 동족상잔을 계속하였다. 연王 모용광은 도업을 용성(龍城)으로 옮겨 고구려 국경으로 바짝 다가왔다. 광범한 첩보망을 고구려에 펴고 아비모용귀의 원수를 갚고자 만반의 공략 계획을 수립하였다. 연왕 모용광은 요동의 고구려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고 장차 중원을 공략코자 하나 강적 고구려를 그냥 두고 중원 출사는 위험하다는 결론임으로 고구려 정복을 최우선 목표로 하였다. 때에 연王 모용광은 중원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중원 통일을 꿈꾸고 있었다. 그들의 계획은 강력한 고구려가 배후에 있는 한 중원에서 대대적 군사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연장(燕將) 한이 연王에게 말하였다. "一차로 고구려를 치고 二차로 우문씨를 멸한 후 가히 중원을 도모할 수 있사옵니다." (入威將軍翰請先取高句麗侍滅于文烈后中原可圖) 고구려는 지금 전혀 우리의 의도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 불의에 습격하면 고구려를 가히 파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연장 한은 고구려 침입의 지리를 충분히 규명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두 개의 진입로가 있으니 그 北路는 평탄하고 南路는 험준하니 항상 北路를 엄수하고 南路는 소홀하였다. 대군을 움직이는데는 北路를 통하고 있으니 이번에도 주로 北路를 방어할 것이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리로 공격한다고 크게 움직이고 이면으로 南도 험한 길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고 정예 경기(輕騎) 五千으로 기습하여 적의 방책을 분쇄하고 大軍이 진격하여 적의 왕검성을 공격하면 적은 필연코 소수 병력으로 왕검성을 지키고 大軍은 北道를 방위할 것이니 왕검성이 함몰하면 적의 大軍은 미로에 설 것이오니 대사를 가히 정할 것이옵니다 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연이 침략해 온다는 것을 알고 상예대로 北道에 긴급히 대군으로 겹겹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南道에는 일지군을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연장한(燕將翰)의 작전은 적중하였다. 그해 十一月모용광은 모용한 모용패 두 장군으로 하여금 선봉 기습 부대의 뒤를 쫓아 전군(前軍)四萬을 이끌고 南도를 급습하고 장사 왕우(長史 王禹)등으로 하여금 장병一萬五千을 이끌고 北道로 진격하고 연王 광은 후군을 이끌고 총지휘하였다. 고구려帝는 황제(皇第) 무를 대장으로 하여 정병 五萬으로 北道를 방어하고 帝는 친히 후군을 거느리고 南道를 수어하였다. 연군은 前軍四萬이 총공격을 퍼부어 일거에 고구려 군을 격파하고 후속 하여 연王이 大軍을 이끌고 속속 진격하여 왕검성을 포위 공격하여 환도가 함락하여 연군은 황후 주氏와 太后를 포로하고 고구려 장수 아불과 도가는 연장 장사한수에게 참수되고 北도 방위군 五萬은 전후로 협공 당하고 환도성이 이미 함몰하고 황제의 행방이 묘연하니 戰意를 잃고 패주하니 北道守將 왕우도 전몰하여 고구려 二十萬軍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하여 죽는 자 무수하였다. 

 

帝는 적의 추격이 급하니 단기로 달아나 운곡에 숨어 들어갔다. 연군은 추격하다 놓치고 잘못 깊숙이 들어갔다가는 항상 고구려 군의 매복 전술에 패하는 전례로 미루어 추격을 중지하고 돌아와서 수도인 왕검성 즉 환도성을 철저히 약탈하여 부고에 싸여 있는 누세 보물 재화를 내어 싣고 환도성을 불살라 궁궐 민가 할 것 없이 소진하고 고구려 역대 왕묘도 모두 도굴하고 연王 모용광은 제장에게 회군 명령을 내리고 이르기를, "고구려王은 지금 멀리 험지에 숨어 있다가 우리 大軍이 물러가면 돌아와 흩어진 장병을 모으고 다시 나라를 재건할 것이다. 하지만 王은 패하고 백성은 피폐하고 국고는 빈털터리니 언제 다시 일어날 것인가? 또 고구려는 강하고 만주 땅은 넓고 험하여 힘으로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상당 기간 재기 불능케 하였음으로 우리가 중원 三국을 統一한 연후에는 고구려가 재건하여도 우리를 넘보지 못할 것이니 이제 은혜를 베풀어 항복케 할 것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하고 고구려 황후와 노모와 선王의 시체를 발굴하여 싣고 반사하였다. 帝는 연군을 추격 섬멸코자 흩어진 패잔군을 모아 왕검성에 돌아와 보니 그 처참한 모습은 형용할 수 없고 모용광은 이미 멀리 가서 추격할 수 없었다. 고구려는 전국민이 결속하여 국가 재건에 매진하였으나 帝는 노모를 돌아오게 하지 않고는 만민의 王이 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帝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라안에 있는 보화를 모두 거두어 화친하는 국서를 쓰서 보화와 국서를 가지고 사신을 파견하여 선재의 시신과 母后의 반환을 호소하였다. 연王은 이를 받아 들여 미천王의 시체와 生母 그리고 王妃 주씨를 모두 돌려 보내 왔으나 민가 五萬여 가구의 납치해 간 인구는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

 

 二十九. 故國原皇帝의 戰死와 廣開土太王의 中原 北部 征服 및 五胡十六國

 

 百濟는 近肖古王 26年 高句麗가 모용광에게 패하여 쇠약한 틈을 타서 3萬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아직 완전 수축이 안된 왕검성 공격에 나섰다. 그간 백제는 하남에 창업한 이래 고구려와 요서에서 여러 해를 충돌하여 왔다. 고구려 故國原天王(諱 斯由 혹은 釗)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제군을 막다가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백제군은 그를 쏘아 죽이고 철수하였다. 이 사실을 魏王에게 알렸다. (百濟盖肖王表魏曰梟斬釗首過辭也) '괴수 釗를 斬首했다고 하였으니 너무 과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그런 말로 통고했는지, {魏志}에 참수했다고 썼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高句麗天王의 죽음은 고구려와 백제간에 서로 깊은 원한이 깊어졌다.

 

이 전쟁이 전례대로 遼東의 遼水가에서인지 上谷(中原北部)에서 싸웠는지 알 수 없으니, 때에 조선 반도에 세운 백제 담울도 3萬軍을 동원할 수 있는 인구가 집결되었다고 여겨지는 시기다. 여기 담을이란 백제의 옛말로 분국의 뜻이다. 燕王 모용광은 반사(班師)하여 다시 우문씨를 대파하고 본격적 中原 공략에 나서서 南으로 中原에서 위를 공격하여 면남 주성(沔南 ?城)을 함락하고 예주자사 돈보(屯寶) 서양 태수 번준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 강에 몸을 던지고 죽고 때에 위는 내위를 계엄령을 내려 좌위화감 관술 등의 여러 부대는 무장으로 후퇴하고 모용광은 연왕을 자칭하였다. (胡賊大寇沔南陷?城予洲刺史王寶陽太守焚焌皆棄城投江死於是內外戒嚴左衛桓監匡術等諸軍至武昌乃退七年慕容簿自稱爲燕王 {宋書}) 모용광은 새로이 점령한 千里땅에 고구려의 만주에서 납치한 五萬가구를 입주시켰다. 때에 중원에는 사마애의 손자 사마염(晋世祖武皇帝炎)이 위주(魏主)를 폐하고 황제 위를 차지하고 晋나라라 하였다. 강동의 오나라를 정복하고 三國을 통일하여 위세가 중원에 떨쳤다.그러나 中原 東北의 東夷族과는 계속 대치 상태였다.  

 

중국의 {三國志}는 조조가 한을 멸하고 위나라를 세웠고 사마애의 진나라가 다시 위를 멸하여 진나라를 세워 天下통일을 했다는 것은 漢魏晋 三國이 모두 亡國의 外的 原因은 東夷族과의 쟁패에 있었고 중원을 통일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三國志}에는 魏王 조조 吳王 손권 촉왕 유비를 주요 인물로 三國 爭覇를 그렸으나, 中原의 三分之一을 점유하고 魏吳와 相爭한 동이족의 상관관계는 제외하였다. 하지만 사실 흥미로운 소설로 꾸며 흥미를 돋구어 그리기 위함이랴! 당시의 중원 여러 古史 記錄은 三國 爭覇가 아닌 四國五國 爭覇였음을 보여준다. 

 

魏가 漢을 멸하고 위나라 全盛期 사마애가 위나라 태부 직책에 있을 적에 하남 요서에 있는 백제가 화북을 점유하고 있는 공손씨와 손을 잡고 요동의 고구려와 상쟁하는 기회에 위는 고구려와 동맹하여 공손씨를 멸하였다. 이 시기에 같은 동이족인 모용씨는 제갈 량이 유비룰 도와 점령한 바있는 중원 南部를 점거하였다. 이 때에 진은 강동의 오나라를 정벌하여 國富 병강함에 위세가 등등하였다. 시어사 곽흠이 상소를 올려 가로되, "오랑캐가 땅이 넓고 강성하여 예로부터 우환이라 지금 오를 정복한 위엄과 모사 맹장들의 지략으로 중원 내의 여러 오랑캐의 변지에 주돈케하여 오랑케들의 침입을 준엄하게 막도록 하옵소서 이것은 밝으신 先大王이 횡포를 막는 제도였사오니 이는 만세에 좋은 정책이옵니다."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내전을 치룬 진주(晋主)는 또 다시 위험을 하고자 아니 하였다 (侍御史郭欽上疏曰戎狄彊廣域古爲患宜及平吳之威謀臣猛將之略漸徙內郡鏶胡於?地埈四夷出入之防明先王荒服之制此萬世長策也不聽) 여기 四夷란 {漢書}에 朝鮮을 四夷라고도 한다 중원 북부에 있는 옛 檀君 帝國의 諸侯國 中 東北 地域에 분포하고 있는 後裔들로서 扶余를 分하여 番韓 百濟 高句麗 선비 오환 肅鎭 沃沮 濊貊 靺鞨 契丹 등이다. 이들은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합쳐서 중원의 漢族(한족이 중원의 여러 민족을 동화한 상태)과 쟁패하였다. 연은 중국 사기에 중국의 열후로 편입 기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이족이 중원에 진출하여는 주로 연이라고 옛 국호를 사용하였다. 여기 공손씨도 燕王이라 하였고 그후 모용씨도 燕王이라 하였다. 모용씨는 고구려를 파한 후에는 고구려 황제를 高句麗王으로 부르고 자신은 大燕皇帝, 大王, 天王 등의 호칭을 가졌다. 진주 사마염은 오를 치고 돌아온 장병을 중원을 방위하는데 배치하고 싸움을 피하였다. 진주는 남고에 제사를 지낸 후 예를 마치고 사예四위 유이에게 물었다. "짐이 한나라의 어느 인군에 비할만한고?"하니 유이 가로되 "환제 영제에 비길 만합니다. 환재와 영재는 매관 매작하여 국고를 채웠고 폐하는 매관 매직(벼슬자리를 파는 부정행위)하여 사사로이 문중에 받았으니 이와 같이 말하여도 틀리지 않사옵니다."하였다.

 

진王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면서 이르되, "환재 영재는 이런 충고를 듣지 못하였고 짐은 이런 바른 말을 하는 신하가 있으니 짐이 더 나은 임금이라." 하였다. 진 무왕이 죽고 나니 왕후와 왕태후가 각기 권세를 장악하여 骨肉相爭의 소용돌이 속에 各 王族이 반란을 일으켜 중원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유연이 대단우(大單于즉 황제)를 자칭하였다. 유연은 흉노족으로서 漢王의 공주가 흉노에게 시집가서 그 사이 출생한 漢王의 甥姪이다. 漢은 그를 좌현왕에 봉하고 五部 감독으로 西北의 군사를 맡겨 흉노를 통제하고 조선을 막는데도 일익을 담당케 했다. 그의 아들도 총명하고 효용 하였다. 그의 종조부 宣이 족인 들에게 말하기를,

 

"한나라가 망한 후에는 우리에게는 단우라는 허명뿐이고 한 치의 땅도 없고 왕후의 지위도 낮추어졌다.우리가 쇠퇴하였으나 아직 二萬에 모자라지 않는다. 어찌 앉아서 망해 버릴 것이냐? 지난 백년 좌현왕이 영무초세(英武超世)하니 하늘이 흉노를 망하게 하려 하지 않다면 반드시 이 사람을 헛되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사마씨가 골육 상잔하여 사해가 들끓으니 우리가 일어날 때다. 그리하여 국난을 회복한다."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유연은 군사를 이끌고 조선족을 공격하여 색위로 몰아 내려고 출발하려 하였다. 그의 종조부 유선이 급히 달려와 말렸다. "진나라는 우리를 노예로 부리고 있다. 지금 진은 骨肉相殘하여 하늘이 그를 버리는데 우리를 시켜 다시금 선비와 오환을 백제와 서하국까지 쳐서 우리가 일어나는 것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우리 흉노족과는 기맥이 통하는 동류라 가히 우리의 도움이 될 것인데 어찌하여 공격한단 말인가?"하였다. 유연은 크게 깨닫고 그쳤다. "옛날 한나라와 오래도록 은혜로 맺어 왔고 나는 한나라와 생질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한이라 한다."하고 선언하였다. 연이 죽고 뒤를 이은 유총이 낙양에 이어 장안을 함락하고 진민제를 참수하였다.

 

이 전진(晋)은 모용광의 女를 황후로 맞아 고구려를 방비하여 왕조를 보전하고자 노력하였다. 증원 화북을 휩쓰는 동이족을 막지 못하고 망하였다. 흉노 유연을 앞장세워 동이 조선을 몰아내려 한 것도 아니 된 것이다. 그후 모용광의 子 준(俊)은 大燕帝國 황제 위에 나아가 업도로 수도를 정하고 연호를 광수라고 하였다. 그들은 집안싸움이 그치지 않아 문화적 수양이 모자란 사람들이었다. 고구려는 점차 국력을 회복하여 비록 모용씨의 절제는 받지 않았으나 요동의 일부를 상실하여 중원 고토를 회복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고국양왕 이연 황제(古國陽王 伊連 皇帝)에 이르러 사만의 군사를 일으켜 요동 회복에 나섰다.

 

그리하여 요동 현도 2군을 회복하고 만주서 끌려갔던 남녀1만여 가구를 귀환시켰다. 동년 11월 모용농이 다시 요동에 침입하였다. 3년 8월에는 남쪽 백제 분국의 잦은 침투를 징벌하였다. 9년에는 황제가 붕어 하시고 태자 담덕(談德) 廣開土大王이 18세에 즉위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고 생장함에 外貌 雄威하고 智貌 發群하여 사람들이 위복하였다. 제는 즉위 당년 7월에 선제가 추진 중에 있던 정벌군을 출동하여 남으로 백제를 쳐서 조선 반도 멀리 남쪽으로 축출하고 북으로 거란을 토벌하여 만여 가구의 陷沒民을 구하였다.

 

2년 8월에 백제가 남침하여 옴에 군사를 보내 막았다. {三國史記}에 3년 2월 백제가 내침 하여 제가 精騎 5천을 이끌고 격퇴하고 남쪽에 7개성을 축조하고 백제 침공에 대비하였다고 했으니 이때 한반도에 세운 백제 분국은 급격히 인구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4년 8월 제는 패수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8천의 포로를 잡아왔다고 하였다. 중원 하남에 있는 백제 본국과의 싸움으로서 패수 서쪽은 異洲 즉 하남이다. 제는 영락 5년AD 359년에 서북의 흉노 별종 과려가 자주 침입하여 변경을 노략질함으로 대군을 일으켜 서북으로 진격하여 부산(負山) 적을 파하고 염수에 이르러 일대의 7백부락을 정복하고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신채호 {조선 상고사}기록에 그 위치를 자세히 기록하였으니 원정군이 진격해서 들어간 거부산 부산 염수 등에 관하여 거부산(巨富山)은 {隋文備史}에 지금은 음산산맥의 와룡산이라고 했고, 부산은 감숙성 서북에 있는 선산이고 염수는 몽고 지지에 아라선산(阿拉善山) 下에 吉蘭泰(치란타이)라는 염수가 있어 소금이 六尺이나 응고된다고 하였다.

 

太王의 돌아오는 경로를 보면 양평도(襄平道), 동해빈(東海濱), 역성(曆城), 북풍(北豊), 오류(五廛),를 거쳐 국경을 살피고 돌아왔다. (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碑麗不息拉人躬率往討巨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丘部落六七百當群馬牛不可稱數於是旋?因過襄平道東海濱力城北豊五廛猶觀土境由而 {碑文}) 제가 정복한 땅은 흉노와 인접한 진나라 북부였다. 비문으로 미루어 보면 돌아온 길은 장장 3千0리의 원정이다. 가히 호태 황제의 웅지(雄志)가 엿보인다. 여기에 중국 사가들은 廣開土大王이라는 호칭을 부쳤다. 비려에 관한 확실한 위치 설명이 사기에 없으나 참고로 추정컨데 전왈(傳曰)모용연이 처음으로 강원쪽을 통하였으니 농서왕에 봉하고 태자궁을 새로 지었으며 무도양이 당할 수 없었고 하남토곡 모용연이 스스로 하남왕이라 하니 고려왕 고리 즉 고려왕 고연이다. 송무재 초기에 청업하였다.  

 

(慕容연 始通江左故封?西王新作東宮太子邵居也武都揚難當也案高麗王高璉宋武帝初踐祚)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하남백제와 서하국이 망한후 이곳을 고구려 태조황제가 관활하였는데 중간에 모반함에 광개토태왕 담덕황제가 정복한것이니 여기가 비려지역이다. 여기 토곡 모용연을 고구려 태조대왕 이연 황제로 지칭하였으니 그들은 부여족을 때에 따라 토곡희 모용씨 등등 호칭이 일정하지 않다.漢末 진열종(晋烈宗)시대에 등태위(鄧太尉)의 사당과 광무 장군(廣武將軍)의 사당을 지었는데 그 비문에 영락 5년이라고 고구려 광개토대왕 紀年을 새겼다고 후세 명나라 학자들이 오랑캐나라 年號라 하여 맹비난 한바 가 있어 그것을 명나라 시대의 영락 연호로 이치에 맞지 않는 변조를 한 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바꾼 것은 큰 다행한 일이라고 좋아하였다.

 

{魏志}에 고구려가 한나라 애평지제(哀平之際), 애제와 평제 시대에 중원 북반을 점유하고 중원을 호령하였다는 역사 기록은 지금은 전부 삭제하고 없으니 우리 역사에 단군 대제국에 이어 제 이의 동방 대제국 고구려의 정사를 찾을 길이 막연하다. 한나라 말기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동안 韓中日 삼국은 고구려 年紀를 일부 사용한 것은 확실하다고 생각되나 우리 나라 {三國史記}, {三國遺事}까지도 {당서}를 근거로 편찬한 것으로 인식됨에 당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기술을 하였으니 백제 신라에서 쓰여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구려 연호는 없고 당나라의 연호가 보인다. 9년 정월 제는 3만 군을 이끌고 요동에서 연나라 표기 대장군 모용희의 10만 군을 대파하고 요동에서 모용씨를 축출하였다. 이로서 지난날의 혹심한 모용씨로부터 받은 수모를 청산하였다. (모용희는 연의 선봉장으로 왔다가 고구려에 항복하고 고구려에 공을 세우고 돌아갔다.) 대왕은 신성과 남소를 공략하고 요동의 천리땅을 회복하였다.  

 

太王이 비려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의 당지 太守(태수) 內史(내사)들을 격려한 경로지로 기록된 동해빈의 위치에 관해서 밝혀 둔다. 동해빈과 창해에 관하여 종래 여러 우리 역사 서적에 이것을 조선 반도에다 같다 부치는 오류를 범하였다. 해빈과 창해는 지금의 천진 패수 지역 渤海?이다. 이곳은 원래 고구려 영토였음으로 발해는 고조선 시대부터 조선족의 內海 영토이다. {魏書}에 위나라 황제 조예(조조의 손자)가 동역을 순행하여 요서 황산 별궁에서 주연을 즐기고 갈석산(碣石山에서 크게 잔치를 벌리고 창해를 내려다보고 해빈에 단을 쌓아 순행을 기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옛날 그 시대에 조선 반도에 없던 지명을 후세 와서 갖다 부치는 것은 역사 오류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해빈(海浜)과 창해(滄海)가 모두 발해변 갈석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魏高宗文成帝曺叡遼西黃山宮遊宴登碣石山觀滄海大宴築壇行於海浜) 대연황제 모용수(慕容垂)는 모용광의 제5자인데 때에 중원에서 大魏 天王 요와 대진 황제 근신 대한제국 황제 유연(유연은 흉노 모돈의 자손 단우로써 한나라 공주와의 사이에서 나온 자로써 유씨성을 가졌다.) 등과 상호 충돌 견제하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여도 모용수는 요동으로 출병을 못하여 요동을 구하지 못하였다. 제는 11년 다시 일지군을 파견하여 요서를 공격하고 연의 평주 자사 모용귀(慕容歸)는 패전하고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평주는 山東省 수도이다. AD 407년에는 백제가 약속을 어기고 왜를 불러 신라를 치니 신라가 구월을 요청함에 제는 수륙군 5만을 이끌고 수륙 양로로 백제를 공벌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여 만 여명을 참수하고 백제의 항복을 받고 조선 반도의 소요를 안정시켰다. 이로부터 왜는 상당 기간 침입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후로 신라 백제 왜는 고구려 관할 하에 예속하였다. 이후부터 日本九주 대마도 등지를 통치한 高句麗人의 후예로 보이는 무내(宗)氏가 近世까지 통치하였으나 日本에 병탐되고 千九百年代에 와서 日本은 宗氏가 소장한 방대한 조선 관계 문헌을 수탈해 갔는데 무려 六만 六千四百六十九점에 이른다고 하였다. 

 

조선 영토라는 증거를 없애고자 한 것이다. 제는 이들의 항복을 수용하고 멸하지 않고 옛 단군 제국의 열후국제도를 본따서 동방 대제국의 재현을 성취하고자 노력한 것이 그 후 정책에도 엿보인다. 중원에서는 전술한 한 황제 유연의 아들 유총(劉聰)이 대를 이어 낙양을 함락하여 진휘제를 포로로 하고 세력이 확장됨에 유총황제는 사치가 극심하고 대소 정사를 비빈에게 맡기고 유흥에 몰두하였다. 다시 대장 유요(劉曜)가 추대되었다. 유요는 성정이 자상하고 용약관인하여 전일 유총황제?에 상국을 지냈고 어려서 난리를 피하여 조선에 와 있었다고 하였다. 한수(漢水)를 따라 적벽(赤壁)으로 와서 황제를 자칭하고 다시 장안으로 천도한 후 대조황제(大趙皇帝)라 하였다. 父와 처의 묘를 높혀 백척의 둘레 삼리의 석축을 하는 등 백성을 전휼하고 사방을 정복하였다. 그리하여 조 황제는 낙서에서 흉노별부 출신 석늑(石勒)에게 패하여 일당이 모두 참살되었다. 北晋 태부동해왕 월이 낙양병 삼십만을 이끌고 석늑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몰하고 진종실 26왕과 백관은 모두 屠戮당하였다.  

 

진원제 10년 석녹은 조황제(趙皇帝)위에 올라 군신을 모아 큰 잔치를 열고 국상 서광에게 물었다. "짐이 옛날의 어느 황제와 겨눌 만한고."하니 대답하여 가라대, "폐하의 신무 모략은 한고조 우방보다도 능하오니 후세 누가 따를 자가 있겠습니까?" 이에 조왕이 말하였다.

"대장부 치세하는 대는 당당하고 명명백백할 것이고 조맹덕(曺操)이나 사마중달과(司馬애) 같이 사람을 속이고 고아, 과부를 농락하여 천하를 얻는 것은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군신이 모두 이 말을 듣고 만세를 불렀다. 그는 학문은 못하였으나 독서는 좋아하였다. 이 시대를 가리켜 후세 사가는 중원 무주(中原無主)-중원에 임자가 없다-라 하였다. 군웅이 궐기하여 사방에서 황제를 참칭하였다. 한족아닌 타민족이 중원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晋書}에 진도는 낙양에서 영가 때에 와서는 남으로 건강에 옮기고 송 제 양 진 모두 건강에 와서 같은 지역에 있었고 양의 원제와 후연왕 소는 강능에 별거하였다. 성능은 유주왕 왕준의 수하 장수였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옴에 왕준은 석녹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술상을 크게 차려 놓고 대소 관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석녹은 문을 박차고 대청으로 올라왔다. 놀라는 왕준을 잡았다. 왕준이 석녹을 보고 꾸짖었다. "오랑캐가 감히 공무흉역을 하는가?" 그러자 석녹이 말하였다. "강병을 거느리고 본조가(晋나라) 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다가는 나라가 망하니 왕자 자리를 노리고 있음은 흉역이 아니고 무엇이냐?"하며 목을 쳤다. 후세 사람 우군 왕의지와 진태부 사안(右軍 王義之와 晋太傅 謝安)은 폐허가 된 진나라의 유적을 보고 그 감회를 읊은 시에 가라대,

 

'晋室昔黃潰 永嘉遂南奔 沙塵河?? 龍虎鬪朝昏 胡馬風漢草 天驕蹙中原

 

 진나라 사직이 여기서 무너지고 영가지년에는 남으로 다다랐네. 사진은 망망하고 군웅이 밤낮으로 다투니 오랑캐는 한나라 땅을 휩쓸고 창검은 중원 하늘을 휘두르네'

 

이때 중원에는 五胡16국이 있었고 각기 도읍을 정하고 진나라는 낙양에서 영가지년에 이르러 남으로 건강에 옮기고 송나라, 제나라, 양나라, 진나라도 함께 건강에 도읍 하였다. 양나라 원제와 후양의 소황은 강능에 별거하고 진나라가 난리가 일어나 16국이 각기 도읍을 정하니 수나라는 양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당나라는 장안에 도읍 하였다. (晋都洛陽至永嘉南居建康宋齊梁陳?居建康梁元帝及後梁蕭察文別居江陵晋亂有十六國各建都邑隋都長安煬帝遷洛陽唐都長安 {帝王紀}) 이때 연 황제는 요동에서 고구려와 싸움을 포기하고 중원에서 세력 확충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못난 자손들의 문중 싸움으로 소멸하고 그 자리는 새로이 일어나는 魏가 차지하였다. 趙皇帝를 李農과 함꼐 살해한 조민석(趙石閔)이 황제를 자칭하고 국호를 大魏라 하였다. 그리하여 조황제 석씨 一門을 모조리 죽였다. 魏王 석민은 동이족의 유능한 인물들의 도움으로 황제 위를 차지하였으나 차츰 방자하여 조정에서 조선말을 못하게 하고 조선말을 하는 자는 발견하는 대로 파면하였다. (魏主下詔不得魏北俗之語朝廷違者免所居官)

 

그리하여 차츰 조선족 고위관직자를 제거한 후 다시 국민 풍속을 한족풍으로 바꾸고자 명령을 내려 조선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국민들이 불만을 품고 옛날을 생각하게 되었다. (魏主欲變易舊風乃詔禁士民胡服國人多不悅 {鑑易}) 이로부터 국민의 불만은 쌓여 가고 이 나라 사직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낙양에는 조선옷과 조선말이 차츰 없어졌다. 이것은 또한 단군 제국 북방열후의 세태를 의미하고 중원을 영영 잃고 조선족은 만주로 또 한반도로 위축되어 가는 현상이기도 하다. 위황제 석민(석민은 흉노 성 석씨를 버리고 '再'씨로 바꾸어 제민이라하고 또한 흉노가 성할 때에 양자로 가서 흉노족이 되었다가 흉노가 망하니 다시 재씨로 돌아왔음)은 국민의 인심을 잃고 유능한 신료가 없음을 탐지한 연 황제 暐가 태재(太宰) 모용각을 정외 장군에 임명하여 위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위주 재민을 사로잡아 돌아와서 참수하였다. (夏四月燕慕容恪等擊魏大破之執其王閔以歸殺之 {鑑錄}) 조선족의 나라 황제가 되어 조선족을 천대하다가 조선족의 손에 죽었다. 이로써 위나라는 망하였다.  

 

조조가 세운 위나라는 사마씨가 멸하고 석민이 세운 위나라는 모용씨가 멸하고 위는 재기하지 못하였다. 살피건대 이?의 위나라 영토는 백제의 하남과 서하국의 일부 혹은 대부분을 포함한 것으로 보이는 바, 그곳 주민의 대부분이 부여족임음 명백하며 이때에 하남 백제 본국과 같은 부여족인 선비의 서하국이 趙의 석늑에세 망하였거나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중원에 오른 주인이 없고 소위 5호 16국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중원 북부의 강국이라는 백제의 이름이 나타나지 아니함이라.

 

三十. 河南百濟本國의 敗亡과 廣開土大王의 中原 占領과 崩御

 

사기에도 백제는 요서에서 요동의 고구려와 2백여년간 함께 존립하였다고 했으니 진나라 말기에 하남 기주 지역에서 군웅이 쟁패하였는바 이 때가 백제의 하남입국 2백여 년간에 해당되는 것이다. 광개토대호태왕비에 백제로부터 공취한 64성과 58성 중 대체로 조선 반도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을 후세에 와서 지명을 만들었다. {高句麗榮樂大帝碑考} 저자인 왕지수(王志修)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비에서 이르는 성들의 소재지에 관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80국 중 평양성은 애양국이고 아단성은 일사오단국이고 고리성은 고리국이며 모도성은 모로국이고 낙서성은 월지국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위는 고증하기 쉽지 않다. (碑所稱諸城名當在三國魏志東京傳三韓所屬八十國之中平壤城疑卽愛(爰)兩國阿且城疑卽日斯烏旦國古利城疑卽古離國牟盧城疑卽牟盧國樂(迎)彌城疑卽月持國其他則不易考矣)  

 

이것은 요동 요서에 있는 성으로서 조선 반도에 애초부터 없었던 지명이다. 하남 백제국이 중원에서 색외의 요서로 밀려나온 후에 일어난 사태로 보여진다. 식민 사관은 廣開土大王 碑文 까지도 중원에서 지명을 조선 반도에 가져다가 놓고 있다. 그리고 호태왕비의 무위에 대하여 지은 시를 보면 동진 시대 중원은 군웅이 할거하여 후연의 모용보는 자립하고 연합하기도 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두 나라 모두 군주가 되어 요동 요서에서 대방까지 접해 있다. 대방은 발해변 대방이고, (維時中原屬東晋粉割據旋更張後燕自立慕容寶聯合欲使兵威揚?以二國作君主遼方舊郡連帶方) 여기 二國 군주란 그 한 사람은 大燕帝國 皇帝 모용보니, 후연을 일으킨 모용수의 태자로서 읍군으로 천도코자 모용수가 二十萬 군사를 이끌고 읍군을 칠적에 공을 세우고 뒤를 이어 대연 황제가 된 인물이며, (王師衆二十余萬長驅向? {鑑易}) 하나는 好太王 廣開土皇帝로서 四方을 정복하고 위진사국이라 하여 百濟 燕 晋 宋에 위엄이 진동하여 중원과 중원 동북에서 두 사람의 임금이 병위을 떨쳤다는 것이다. 훗날 이태백은 이 상황을 본 감상문에 '조선의 명월이 중화를 비치니 삼광은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영웅은 회해를 진압하여 늠름하게 요사함을 물리치니, 유악지중에 모사한 것이 공을 세워 빛내기는 어려움이나 나는 연의 서릿발같은 함성은 모르나 모든 것이 부서져 버렸으니 다만 한 줄기 눈물뿐이다. 옛 도읍지에 간들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광무기적 옹이 가라대 "조선족이 구름 떼같이 모여들어 싸움을 버렸다."고 하였다. (李太白曰胡月人紫微三光亂天文高公鎭淮海(淮揚洲)談笑却妖氣採爾幕中?戡難光殊勳我無霜喊玉石俱焚但麗一行淚臨岐竟何云光武紀赤伏翁曰四夷雲集龍鬪野 {李太白詩集) 여기 그 시대의 동이족중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중원 한족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東夷高句麗國今治漢之遼東郡高句麗王高璉安帝義熙九年遣長史高翼奉表獻赤白馬以璉爲使持節都督營洲諸軍事征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高祖踐?詔曰使使節都營河諸軍諸征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璉使持節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暎?執義海外遠修貢職惟新告始宜荷國休璉可征東大將軍暎可鎭東大將軍持節都督王公如故三年加璉散騎常侍增督平洲諸軍使少帝景平二年璉遣長史馬累等諸闕獻方物遣使慰勞之曰皇帝問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年洲諸軍事征東大將軍高句麗王樂浪公纂戎東服庸績繼軌闕惠旣彰誠亦著諭遼越海納貢本朝朕以不德黍承鴻緖永懷先?思覃遣澤今遣謁者朱邵伯副謁者王邵子等宣旨慰勞其茂康惠政永隆闕功式昭王命稱朕意焉 {宋書}  

 

이것은 중원의 5호16국 시절 고구려 백제와 중원 중남에 위치한 송나라와의 교류 서신으로 황제가 제후에게 보내는 조서같은 문구이나 무슨 왕을 봉했느니, 무슨 주의 도독을 삼았느니 하는 것도 이미 점령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중국 사가들의 고정 필치이니 그런 것을 이해하고 또 서두에서 한의 요동군이라 한 것도 요동은 원래는 한나라 땅이라고 소위 한사군설을 강변한 것이니 그것도 기자조선 통치설과 함께 허망한 것인데도 알면서도 항상 역사 기록에는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한다는 망자존대사고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이해가 가는 것이다. 당시 송은 고구려같은 강대국에 비하여 미약한 나라로서 오래지 않아 수가 중원을 통일하였다. {송서} 원문(동이 고구려국이 다스리는 곳은 옛날 한의 요동군이라 고구려왕 고연[고국양왕]이 진 안제 9년에 장사 고익봉을 사신으로 하여 붉은 말과 흰말을 바쳤다.

 

이에 고연에게 절월을 가지고 가서 영주의 여러 군사 [요동군]을 총괄하는 도독으로서 정동 대장군 고구려왕 낙락공이라 하였다. 고조가 창업하여 [송나라를 창립한 자] 사신을 고구려에 절월을 가지고 가서 전자 진 안제와 같은 절차를 행하였다. [이것은 우리와도 진나라 시절과 같이 잘 지내자는 사절을 보낸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화친을 허락한 것으로 보여진다.] 백제에도 송 고조의 창업을 알리는 사신을 보내어 백제 제군-사진→동장군 백제왕 영 [直支王]이 의리를 지켜 해위에서 멀리 수교하고 새로이 화친을 통고하였다고 했다. [백제가 멀리 해위에서 사신을 보내여 세로이 화친한다 하였으니 이 때는 진이 쇠약하고 송 고조가 창업한 후이니 송과 백제의 교신 내용으로 보아 그 사이 백제가 하남에서 망하고 백제 국민이 모두 조선 반도로 넘어 오지는 못하였을 것임] 중원의 나라들과 교신이 끊어졌다가 백제분국이였든 조선 반도에 있는 백제가 백제로 자처하고 새로이 강남 월주에 남은 백제와 함께 중원의 송과 수교를 시작한 것으로 보여진다. 위서에 백제가 공손씨와 사돈을 맺고 강국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晋나라의 의희때에 백제도 여영(진지왕)이 진과 소교했다고 전한다. 晋나라가 망한 무렵 秦나라 부견(符堅)이 황제를 자칭하고 연의 모용위가 낙양을 점거할까 두려워 하남을 공격 침략하니 의리라고는 없다.

 

符秦旣??懼慕容暐先據洛故侵河南春秋之義無 {鑑易} 이것으로 보아 진은 백제의 도움을 받고 창업을 하였는데 은혜를 모르고 백제를 침략한 것으로 해석된다. 진과 연이 모두 접경 이였다. 어느 쪽이든 백제를 치는데는 이웃 그 상대와도 싸워야 하는 것이다. 진이 연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킴에 연은 정병 30만으로 항거하였다. 중위정병이라 했으니 백제가 참전함이 분명하다.

 

燕主暐命太傳評將中外精兵三十萬以拒之 {鑑易} 연은 이 전쟁에서 결국 패하였으니 백제가 이번 전쟁에서 연하여 패하고 하남에서 패망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것 같다. 진과 업군에서 연과 요서에서, 고구려와 요동에서 접하였으나 이 무렵 고구려가 호태왕 황제의 붕어로 화북 공략을 포기한 상태여서 백제는 고구려와 진과 연과 모두 적대 관계로 결국 패망하였다. 秦은 그후 백만 대군으로 晋을 공격하였는데 백제가 비록 强大하다고 해도 그와 동맹한 공손씨가 망하고 고구려와 적대하고 있는 상태에서 진을 당할 수 없었음이랴!] 고구려王 연을 정동 대장군에 백제왕 영을 진동 대장군에 절월을 가지고 가서 전례대로 왕과 공으로 수교한다 하였다. 3년에는 고구려王 연에게 산기상시를 더하고 평주 산동의 여러 군사를 감리하는 일을 더한다. 고구려 왕이 장사(長史) 마루 등을 방물을 가지고 파견하여 답례하였다.

 

송왕은 고구려 사신을 위로하고 송의 사신으로 하여금 절월을 가지고 가서 상기상시 도독 영평 (요동과 산동) 二주의 군국대사를 총괄하는 진동 대장군 고구려왕 낙랑공이 난적들을 토벌하고 잘 다스리어 은혜를 베풀어 그 정성이 이미 잘 나타나고 또한 강과 바다를 건너 방물을 보내니 고마우나 짐은 덕이 없어 선제의 흥업을 빛내지 못하고 옛 은덕을 생각하면서 여기 알자 [타국 황제를 배알하는 사신] 주소백 부사 왕소자 등을 파견하여 위로의 말을 올리게 하고 귀국의 강성하고 발전하는 그 공을 밝혀 짐의 뜻을 고하게 하오.)이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 전에 요동과 요서 산동을 이미 점유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송왕은 스스로 덕이 없이 선대의 융성함을 이어가지 못하고 중국의 종주국이 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고구려가 요동 요서와 산동을 점유한 강대국이 됨을 축하하는 국서이다. 이 때에 백제가 고구려와 적대 관계를 청산했더라면 동이족은 고리국故土를 회복하고 동이와 한은 중원에서 병입하는 나라로 아마도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민족 분열이 가져오는 비극은 當代의 지각없는 집권 집단들에 의하여 민족 통일의 성업을 미루어 온 결과이다. 당시 광개토 대황제께서는 선대에서 이루어 온 업적을 토대로 전술한 바와 같은 원정의 위업을 달성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리국 고토 회복의 전제 노력이다. 개선할 때에는 역성를 거쳐 양평도로 해서 돌아왔다고 하였다. 역성은 제남에 있다고 하였다. 양평도는 후일 수 양왕과 당이세민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통과한 길이다. 하남 대동부에서 사성 평주(北京城)로 이어지는 통로라고 알려져 있다. 제가 원정군을 친히 이끌고 개선 장군이 대동부에 이르니 연군 태수와 범양 대사가 멀리 나와서 영접하여 대연을 베풀어 원정군을 위로하였다. 천자는 그들이 원정군 군량 수급에 힘쓴 노력을 찬양하고 위로하였다. 출정군이 사주에 이르니 어양태수와 대군 내사(內史)가 출정군 환영을 준비하고 출정군을 위로하였다. 

 

천자는 태수와 내사의 그 동안 출정군 내왕에 수발과 군량 운송에 공을 치하했다. 제는 평주에 이르러 북평태수와 요서태수 창여태수 요동태수 현도태수를 소집하여 그간 국경 수비의 노력과 징병 수급에 노고를 치하하고 이제 회복한 고토 수호에 만전의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고구려가 요동 요서 산동을 領有한 경위를 보면 太祖 大王 때 요서에 十城을 쌓았다. ({高句麗 本紀} 所在) 하였으니 요동과 요서를 이때에 영유하고 漢寇를 막기 위하여 출정한 것인바 송 고왕의 국서에 난적들을 토벌하고 영평 2주를 영유하고 왔음을 축하한 내용과 일치하나 우리 나라 {삼국사기}에는 평주 즉 산동에 관하여는 기록이 없다. 당나라 숭배주의 결과이다. 중원 각국 고사 기록에 의존하니 축소했을 것이나 우리 나라의 남아 있는 史書에는 기록조차 안하였으니 고구려가 망한 후 '事大主義'의 팽배는 국민을 위축시킨 것으로 관습화해 버렸다.   

 

이 무렵 진나라와 연나라가 모두 고구려와 싸웠으니 진이 대병으로 요서에 침공하다가 대패하고 달아났으나 추격한 고구려 군에게 전멸 당하고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였다.(匹馬不歸)하였으니 진이 고구려와 이 전쟁에서 수 십만 군이 전멸함에 국력이 쇠하여 진의 멸망을 가져온 것 같다. 하남에서 패퇴한 백제도 요서에서 광개토대왕에게 패하고 항복할 것이다. 제는 요동 요서 산동의 방위를 철통같이 하고 침범자는 철퇴를 가하니 중원 열국들의 승패흥망이 무상하였으나 광개토황제의 위엄이 화북에 진동하여 감히 고구려를 침공하는 자가 없었다. 제는 18세에 즉위하여 재위 22년을 마상에서 지냈다. 제는 중원 다른 나라의 봉작 따위는 일체 받지 않았다. 백제가 왜구를 불러들여 신라를 공격하고 왜가 대방 지경까지 침입하니 제는 이를 섬멸하고 왜국(구주 대마도 등)을 영토로 관할하였다고 보여진다. 광개토太王 담덕황제는 치우천왕 병법을 깊이 익혀 大小 수백회 전쟁에서 百전 百승하고 한 번도 패한 일없는 용병의 귀재였다. 그러나 왜의 침범을 봉쇄한 것이며 목표는 중원의 고리국고토 회복에 있었다. 국내의 원정 여건을 정비하고 웅지를 펼 시기에 이르러 하늘은 이 동방의 게세(盖世) 영웅에게 수명을 주지 않았다. 

 

하늘은 어찌하여 이 세상을 평정하여 홍익인간 사회를 건설할 기회를 주지 아니하고 享年 불과 40세에 세상을 떠나니 이 무슨 운명인고, 온 국민이 호천망극하여 슬픔이 나라안에 가득하였다. 제는 신라 백제의 남계를 침범함에 대하여도 동족 지정으로 항상 강화하고 멸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백제는 북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국가 발전의 여지가 없어 항상 조금씩 북으로 영토를 확장을 시도하였다. 후세에 결과로 보아서는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의 왕조를 제어하고 통합을 이루었다면 조국의 영구 분열을 막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고구려는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통일의 대업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광개토대왕의 목숨이 길지 못한 불운으로 보아진다. 그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내란으로 고구려는 중원 영토를 잃고 다시 요서의 대부분을 잃고 만주 요동으로 후퇴하여 요하를 취한 후 방위선으로 삼았다. 광개토대왕은 당시 北魏 北齊 陳 周 隋 등을 대제국의 열국으로 봉작을 내린 것으로 보이나(비려 정복 위치로 보아)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고구려 역사 기록의 멸실은 실로 개탄하여 마지않는다. 고구려 양원제(陽原帝) 시대에 이들 나라와 교류하였으나 그 중 수나라가 통합하고 중원을 모두 차지하였다. 광개토대왕 시대에는 隋王은 大王, 帝 등의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였고 廣開土[太王]이란 상위를 의미한다. 신라 백제등은 국역이 고구려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통합에 불응하고 각기 자기 나라가 통일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고 모자라는 국역을 타민족의 후원에 의존하는 정책을 썼다. 그것은 국토를 타민족에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오고 타민족의 부용국으로 실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三十一. 隋文帝의 高句麗侵入과 姜以式總管의 隋軍殲滅

 

고구려 영양제(陽帝) 대에 이르러 수는 중원에서 열국을 정복하고 오호16국 시절에 막이 내려졌다. 수문왕(隋文王)은 중원열국을 멸하고 항복한 왕들을 축출하고 중원 황제로써 위세를 떨쳤다. 수왕은 고구려가 진이 패망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다음은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짐작하고 군사를 징모하는 한편 군량을 쌓아 국방에 분망한다는 첩보를 보고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책망하여 가라대, "고려가 번국(색위의 부용국)이라 하나 성의가 없으니 중원 변경의 작은 지방으로서 인구가 적고 땅이 좁다고 하여도 그 왕을 한 번 내치면 비워 둘 수 없고 새로이 통치자를 선정해야 하는데 있는 왕을 위무하니 왕이 말하는 요하가 크다고 하나 양자강과 같지 못하며, 고려인구가 많다하나 진나라 인구만 못하니 마음을 돌려 신복하면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아니할 것이니 짐이 만약 없으면 누가 보전케 하랴! 그대 왕의 지난 허물을 문책하고자 한다면 큰 힘을 들일 것도 없이 한 장수를 보내 문책할 것이나 은근히 이르나니 王號를 허락하는 바 그간 생각을 새로이 하기 바라오."하였다.

 

(隋文帝開皇十七年高麗王湯聞陳亡大懼治兵積穀爲拒守之策是歲上賜湯爾書責以雖稱?附誠節未盡且曰彼之一方雖地挾人少今若黜王不可虛置終須更選官屬就彼安撫王若酒心易行卒由憲章卽是朕之良臣何勞別遣方彦王謂遼水之廣何如長江高麗之人多少陳國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命一將軍何待多力殷勤曉示許王自新耳隋志) 이것은 고구려가 임이 중원 영토를 얻고 요동으로 후퇴한 小國이라 멸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는 군신을 모아 상의하였다. "수왕이 사자를 보내 이런 국서를 보내여 짐을 욕하였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군신이 고하되 수문왕이 근간 진을 멸하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니 의기양양하여 협박을 하는 것이오니 강박하면 필연 군사를 일으켜 침공할 구실을 삼을 것이고 응하면 미약하게 볼 것 이옵고 칭신을 강요할 것이오니 사자를 불러 좋은 말로 위로하고 돌려보냄이 옳을 것이옵니다."하였다. 그리고 수왕은 "지금 주황실을 찬탈한 후 진을 멸하여 중원을 완전 장악하여 위기 충전하니 그들에게 불복하는 적은 이제 우리 나라뿐이니 필연코 언젠가는 침범할 것이오니 서둘러 방위책을 강행하여야 하옵니다."하고 상국이 아뢰었다. 그것이 군신의 일치된 견해였다. 당시 수나라가 국세는 전국 190군 1255군현 890만호 5천만 인구에 육박하는 거대한 국가로 등장하였다. 이때 고구려 인구는 말갈 예맥과 합쳐 350만, 註. 백제와 신라는 각기 독립 정부가 있어 구별하나 말갈 예맥 물길 걸란 오손 선비 등은 고구려 열후로서 때로는 이탈하나 별도 취급이 필요 없는 동본 동족이나 사서에 별명을 붙여 기록하여 분열을 나타내니 그들 기록을 참고하였기에 따라 쓴 것임. 수나라에 관하여는 기록이 있으나 우리 나라의 그것은 여러 정황으로 추산한 것임. 조선 반도에 있는 백제 신라 50만으로 추산되나 백제 신라는 오히려 수나라 편이였다. 수는 다시 고구려 문제로 의논이 분분하였다. 

 

수왕이 서역을 순행함에는 서역27국이 길가에서 비단옷에 금옥 패물을 장식하고 향을 피우고 歌舞하며 수왕을 환영하고 수왕은 스스로 궁녀를 성장하여 둘러 모시게 하고 車馬를 장식하고 호위병이 수십 리를 시위하여 서역 수천리 땅을 이와 같이 행차하였다. 그리고 서남북의 색위 20여 국 사자가 배석하여 대연을 배설하고 구부악을 연주하고 그 호화 찬란한 연회는 筆說로 다하지 못할 지경이였다. 밤늦도록 호위하는 사병의 동사자와 마노의 동사 후궁비는 길을 잃고 낭패하여 군사 속에 섞여 산간에 잡숙하는 자 등 수왕의 시위하는 행차는 그치지 않고 동도에 초대하여 백가지 노름판을 벌리는 노름장이 5천보에 이르고 소리가 수십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수는 다시 사신을 보내 고구려왕 元(陽王 영양왕)을 요동근공 낙랑 고구려 왕을 봉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은밀히 고구려 정벌의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그것은 고구려는 봉왕하여도 사은입조를 하지 않고 수왕의 우위를 용납하지 않았으며 준비를 확충하였다. 이때 신입한 원황제는 백관을 모아 의논하였다. 

 

"수왕이 우리를 업신여겨 칭신을 강요하고 불응하면 침공할 것을 비추어 위협을 계속함에 선제께서는 그로 인하여 근심 끝에 병이 악화하여 붕어 하였으니 짐은 열성 조의 유언을 지켜 고토 회복에 힘 쓸 것이고 결코 수적에게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수는 우리 영토 요서를 점거하고 태수를 봉하여 요동을 넘보고 있으니 우리는 요서를 회복하여 태조 대왕이 축조한 요서 요동 10성을 회복하여 수를 막을 것이로다."하고 천자 친정할 새 말갈병 수만을 선봉으로 요서에 출정, 수의 요서 영주총관 위충(韋沖)을 공격 파하고 나왔다. 이를 수는 침략의 명분으로 하여 대군을 일으켜 수십만 치중군으로 군량과 전마를 동경 일대에 집결하고 출병에 착수하였다. 수문왕은 옛날 진시왕과 한무왕의 중원 사방 정벌의 진취적 거사를 흠모하였다. 이제 삼방이 수나라의 위세에 눌러 입조칭신(入朝稱臣)하고 조공을 바치는데 고구려는 태조 황제를 칭하고 입조를 거부하였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나 수 문왕 일당은 단군 대제국의 지난날의 은의나 신의를 모르는 무골(武骨)집단이였다. 다른 삼방의 미개족에 준하여 인국이 아닌 부용국으로 예속해야 한다고 망상을 버리지 못하였다. 수 왕은 천하 유일의 황제가 되겠다는 위대한 야심을 품고 동방 침략의 계책을 실행에 옮겼다. 

 

왕자 진왕 소(昭)를 장안을 지키게 하고 수십만 인부를 동원하여 용문에서 동으로 장평에 접하는 군(郡)의 물을 끌어들이고 임청관(臨淸關)을 쌓았으나 물을 건너 준의 양성에 도달하고 上洛에 關을 설치하여 고구려를 막게 하고 윤락에 동경을 새로이 건설하여 고구려 침략의 기지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수 문왕은 고구려 정복을 위한 방대한 계획을 수립한 후 본격적으로 침략전쟁을 시작하였다. 그의 아들 韓王 양(凉)은 전쟁 경험을 많이 쌓았음으로 양으로 하여금 원수(元帥)를 삼아(양은 隋文王의 第五子다. )水陸 30만 군으로 18년 6월 출사한 때 상서좌복사 고경(尙書左僕射 高傾)으로 장사를 삼고 주라후(周羅喉)로 수군 총관을 삼고 육군은 임유관(臨류關, 浿水?)으로 삼아 진출하여 물 건너 요동으로 진출하고 수군은 동내(東萊, 天津入口)로 모여서 평양성으로 향하여 수륙으로 공격을 강행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각 요새와 각 성을 굳게 지키고 응전하지 아니하였다. 수군은 한 달을 공격하였으나, 사상자만 늘어날 뿐 요하를 全軍이 건너보지도 못하고 피폐하여 전의를 상실하였다. 고구려 군은 수군이 차츰 군량이 어려워짐을 탐지하고 정예 경기병 만 명으로 적의 수송로와 창고를 급습하여 불태워 벼리고 적의 수송선을 급습하여 군량 수송선을 발해에서 불태워 버렸다. 적은 군량이 떨어지고 후속 보급이 오지 않으니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굶주리는 병사는 이미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명령을 듣지 않고 달아날 궁리만 하였다. 수나라 장수들은 회군의 불가피 함을 수왕에게 주달하고 회군을 시작하였다. 고구려 군의 추격을 경계하여 요소 요소에 매복하고 철군하였으나 고구려 군의 맹렬한 추격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때에 고구려 군 도원수 강이식(姜以式)은 삼군 욕살을 긴급 소집하여 적정을 토의한 후 명을 내렸다.  

 

"적은 지금 아군의 경기병이 그들의 군량미 보급로 차단으로 전의를 잃고 후퇴하고 있으나 굶주림으로 대오(隊伍)가 무너지고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적군은 아군의 포위망을 헤쳐 나가지 못할 것이다. 제장은 분발하여 대공을 세우라, 제일군은 精銳步騎 오만으로 적의 선발 퇴각군을 추격 섬멸하고 패수를 넘어 적의 임유관을 격파할 것이며 우북평으로 진격하여 그들의 보급창을 탈취하고 임유관을 점거하여 퇴각하는 적을 섬멸하라 우북평의 군량을 소각하되 때를 놓치지 말고 시일을 주지 말라 2군은 5만 정병으로 해빈으로 진격하여 해상에서 우리 수군에 패하고 풍파에 침몰한 패잔병의 집결을 완려하기 사전에 섬멸하라. 제 이군은 전군을 동원하여 각성에서 포위를 풀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라. 내 스스로 후군을 이끌고 삼군을 접응하리라."하였다. 이에 고구려군은 총공격에 나섰다.

 

요수가에 무수한 시체를 버리고 간 수군은 고구려군의 추격에 산산조각이 나고 발해의 수나라 출정 함정에서 살아남은 패잔병은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 군에게 섬멸되어 발해만에는 수나라 수군의 시체가 무수히 떠다녔다. 수군 대장군 한왕양(漢王凉)은 全軍에 퇴각 명령을 내리고 요소 요소에 고구려 군 추격을 저지하는 모든 조치를 마치고 요동성 전군 지휘소를 소각하고 퇴군의 길에 올랐으나 어느 사이 고구려군이 접근하여 오고 있었다. 그 추격이 너무나 급하여 후군이 대항할 겨를이 없었다. 한왕양은 본부군을 이끌고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군은 추격하여 오면서 외쳤다. '도적의 괴수가 저기 있다. 저 놈을 잡으면 천금의 상이 걸렸다.' 하고 급습하였다. 凉은 다급해졌다. 만군지중을 무인지경으로 해쳐오는 고구려 경기병의 습격에 수군 총대장의 근위대는 화살에 맞고 창에 찔리고 칼에 목이 달아나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근위대장이 한王凉에게 말하였다. "지금 우리 군사가 많으나 굶주리고 피로하여 적의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대장군께서는 근위 기병을 이끌고 사잇길로하여 동도로 달아나시면 소장이 죽음으로써 고구려군의 추격을 가로막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凉은 중군을 빠져나와 급히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량은 九死一生으로 동도에 도착하였을 때는 전상한 10여명의 수하가 따라왔다. 대군을 황야에 버리고는 총대장 凉은 패잔군이 속속 도착할 줄 알았다. 그러나 간간이 살아 돌아오는 수군의 패잔군의 입을 통하여 들리는 상황은 비참한 것 뿐이었다. 각군 지휘관은 퇴각명령을 한 번 내린후 다시는 소식을 알 수 없고 다만 저마다 살아서 돌아갈 궁리밖에 없었다. 대군이 굶주림속에서 주야로 행군하여 패수가에 이르렀으나 고구려군은 추격을 늦추지 않았다. 전군이 패수를 건너니 임유관은 고구려군이 먼저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군의 대부분은 이미 병장기도 버리고 달아날 궁리만을 하였다. 후군은 추격하는 고구려군에 의해 패수가에 섬멸되고 전군은 패수를 건너 수나라 땅에서 섬멸되고 싸우지 않고 달아난 자는 굶어죽고 패수가의 임유관 일대는 시체가 겹겹이 쌓였다. 수나라 군사는 많은 전쟁경험을 쌓았으나 고구려군의 용맹과 탁월한 용병술과 능수능란한 전술앞에서 30만 수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고구려군은 10만 보기정병으로 맹열히 탁록까지 추격하니 살아남은 적이 거의 없었다. [수서]에는 9월 기축 출정군이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十中八九였다. '九月己丑師還死者什八九'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쟁의 비참한 결과는 소수의 살아서 돌아간 자도 상이전상자뿐인 것으로 치중운량병도 모두 전사하여 총 100만이였다고 전해졌다. 다음 모병에도 요동출정군이라 하면 결사도피 했음을 알수 있다. 슬픈 노래들이 전해졌다. 수왕은 거의 전멸한 출전군의 비극을 감추고 '군사들이 운량관의 잘못으로 양식이 떨어져 죽고 수군은 풍파로 배가 가라앉아 죽었다.' 하고 싸워서 전장에서 죽은 자는 입이 없고 고구려군과 싸워본 일도 없는 것 같이 공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강력함은 민간에 널리 전하였다. 고구려군의 추격으로 패수를 건너지 못한 수군의 전사한 시체는 옛 진시왕이 설치한 空地에 흩어져 있었다. 수문왕은 화이의 국서를 보내왔다. 제는 계속 추격하여 동도에 있는 수문왕을 사로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征隋副總管 乙支文德은 패수를 넘어 수문제가 머무는 동도를 공략하기 위하여 시간을 늦추지 말고 수왕의 동도를 포위하면 그들의 구원군이 오기전에 수왕을 사로 잡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하고 表를 올린바 있다. 요대 욕살과 여러 도사도 찬동하여 군사 동태를 시찰하러 나온 天子의 특사에게 말하기를 이제 수군 30만을 멸하고 치중병마 수십만을 섬멸하였으니 아군의 패해 또한 심하오나 우리의 피해는 수에 비하여 극히 적은 편이옵니다. 아군 십만 정예는 수의 동도 수어군 20만을 격파하는데 어려움이 없사옵니다하였다.(여기 도사란 고구려군의 지휘관 계급 호칭이다.)천자가 결단을 내었으나 지난날 모구검이 침공시의 전철의 두려움이 있었다. 비록 진격명령을 내렸으나 불안하였다. 천자는 대대로를 돌아보고 물었다. "경은 국상으로서 어찌 말이 없는고?" 하자 대답하기를, "신은 병법을 깊이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옛 사람이 말하기를 병은 흉기라 하였습니다. 수가 비록 강하나 인국을 멸하고 홀로 천하를 차지하고자 하여도 병을 회롱하는 자는 그로 인하여 망한다고 하니 지금 수가 인국에 항복을 강요하고 남의 영토를 강점한 후 이름없는 군사를 일으켜 남의 나라를 침략하니 망국의 길을 걷고 있사옵니다. 

 

우리가 지금 군사를 내어 적도를 공격하다가 성이 빨리 함락하지 않으면 수천리 적지 군량을 감당할 수 없고 적의 授軍이 후군을 끊으면 진퇴양란에 빠지는 위험이 있아오니 이 틈에 백제가 배후를 침공하면 만사휴입니다. 이번에 적이 우리에게 당한 것과 같은 틀이오니 아군이 진격하여 일거에 멸할 만반의 준비가 없는 요행을 바람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은 즉 승패를 점칠 수 없는 전쟁이오니 폐하의 영단이 있을 뿐이옵니다" 하였다. 여기서 아무도 만전을 장담할자 없었다. 이에 천자는 말하기를 "적이 패하고 돌아갔으니 지금 곧 위험이 닥쳐올 것이 아님에 위험을 행할 것이 아니니 이제 전쟁을 종결하기로 원전군에 명령하리라" 하였다. 때에 고구려는 우북평을 공략하였으나 수문왕은 장안으로 달아나고 없어 잡지 못하고 다시 추격하던 중에 본국의 반사명령을 받았다. 신라 백제를 그대로 두고 원정군이 적국 깊숙히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내어 좋은 말로 위로하고 선린관계를 허락하였다. 

 

(大高句麗皇帝致書于隋文王麾下耳往時天道不順以天下大亂群雄厥起於四方而萬民陷墜塗炭之際貴王門?義伐凶終乃鎭壓海內一統乎此非但貴王室家之譽誠天下萬民之大幸焉朕亦如此蓋世之盛遠爲慶幸不己之念焉雖然今此不想侵功我彊境不法無謀之擧乎遼西之土本不隋地也我皇朝累世宗社絶不侵他邦往時魏妖將母丘儉犯境來侵以後連年兵擾于今矣昔旣漢高祖劉邦和朝鮮約定于浿水爲界詳悉故事之明然依考爲之如促王之察焉今番大戰於兩後而隋國軍兵橫死於遼西浿水之?者無數而朕亦憐憫不己是今接王表至此果見認前過之悔是幸則今擧者王之傍側妄臣之誤乎以慰朕慮兼且由望願後好以不咎先愆以垂深慮也留不具比平陽九年冬至大高句麗國皇帝 戒書. 漏錄補記) (대고구려 황제는 수문왕에게 글월을 보내노니 지난날 천도가 불순함으로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뭇 호걸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만민이 도탄에 빠진 때에 그대 왕문에서 대의를 잡고 일어서서 흉악한 무리들을 진압하고 해내를 안정하였는바 이는 비단 그대 왕문의 영광일뿐 아니라 천하 만방에 다행한 일이라. 짐 또한 이와 같은 세상을 덮는 대덕을 멀리서 경행한 바이오. 그러나 이번에 뜻밖에 우리나라를 침공함은 불법무도한 행동이라 요서는 본래 수나라의 땅이 아니며 우리나라는 열성조이래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아니하는데 지난날 위 나라의 요망한 장수 모구검이 우리를 침범한 후부터 지금까지 침략을 계속하였는바 옛날에 한고왕과 조선사이 패수를 국경으로 한다는 약정을 하였으니 자세히 그 사실을 살펴서 참고하여 주기 바라며, 이번 대전은 이웃나라끼리 싸워서 수나라군병이 요서와 패수에서 다수 죽어 짐이 또한 연민하는바이고 왕의 표를 접하여 보니 과연 전과를 뉘우침이라. 지난 일은 필연코 측신에 망령된 자가 있어 일을 그리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로써 위로하는 짐의 뜻을 전하는 바이요. 또한 이웃끼리의 친선을 위하여 지난날을 허물치 아니하며 앞날의 선린을 원하는 바이오.)  

 

이에 수문왕은 국서를 받아보고 부끄럽고 분하였다. 그러나 감정을 감추고 고구려에서 항복한다고 사신이 왔다고 공표하였다. 고구려국서에 계속 공격해올 뜻이 없는 것으로 보이나 그 진실을 믿기 어려워 수문왕은 공포에 떨었다. 그것은 조정 중신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중원을 통일하였다고 하나 아직 틈만 있으면 봉기할 반란의 소지가 남아 있었다. 다만 믿는 것은 백제였다. 때마침 백제는 수가 대패하여 점멸함도 모르고 고구려를 협공할 계책을 제출하였다. 수왕은 백제 사신에게 알렸다. "고구려가 항복한다고 하니 일시 징병을 중단하였으니 기회를 보아 출사할 것인즉 백제는 만반의 공격준비를 갖추어 고구려국경에 전군을 배치하고 다음 지시를 기다리라"하고 후한 상을 주고 격려하였다. 수나라는 원정군이 전멸했다는 소문은 널리 퍼지기 시작하여 수문왕의 위신이 말이 아니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의 배후 위협을 무시할 수 없어 수나라 정복의 의론을 파하였다.  

 

三十二. 隋 陽帝의 大運河建設과 戰爭 準備完了하고 運河로 軍需物資 大量으로 輸送과 三百萬 動員 高句麗로 出兵

 

隋王은 이번 敗戰으로 그 동안 天下 第 1 人者로 無所不通을 자랑하다가 오만이 꺾이니 性情이 殺伐해지고 反亂을 두려워하여 주위를 의심하였다. 그래서 太子 勇이 各地에 百官의 賀禮를 받는 것을 중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을 便用한 次子 廣이 近臣과 짜고 妃嬪을 買收하여 太子를 모함하여 隋 文왕이 좋아하는 독고 后를 시켜 왕을 움직여 太子를 廢하고 廣이 太子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신앙을 금하고 동이족의 三神像과 佛像 성황당 등을 모조리 파괴하고 祭壇 寺刹을 불태웠다. 敗戰이 하느님탓인양 이러한 폭행을 보고 監察御使 방원경이 친구보고 말하였다. "주상이 선량한 태자를 卑弱하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廢庶人하고 왕들이 저마다 권력을 남용하니 천하가 비록 평안하다 하나 爲難의 근심을 안고 있다."하였다. 그 아들 현영이 비밀스럽게 말하기를 "주상이 본래 공덕이 없는데 속임수를 써서 천하를 얻었고 그 자식들도 교만하고 사치하며 불안하니 반드시 장차 서로 다투고 죽일 것이니 지금 비록 평안하다 하나 망할 것이 뻔하다."하였다. 隋 文왕은 국내 사정이 다시 군사를 일으킬 형편이 못되니 고민으로 병이 되어 무절제한 생활 속에 태자 광이 양위를 공작하다 탄로되어 수문왕이 급사한 바 때에 문왕이 태자를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시 바꾸어 환원코자 하다가 급사하니 임종한 자가 아무도 없고 태자 광의 호위병이 수직하고 출입한 후이니 그의 소행으로 보여졌다. 광은 황제위에 나아가 그의 형인 전태자도 살해하였다.

 

양광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후일 중원에서 그 시대까지 역사상 최대 병력을 동원하고 최다 전사자를 낸 수양왕 광이다. 그가 집권 후 그의 아비 문왕의 죽음에 대한 의문으로 전일 고구려 원정의 도원수였던 문왕의 제오자 한왕 양이 변고를 듣고 그를 따르는 오초십구주 병력 수십만을 일으켜 경사로 진격하다가 패망하고 내란이 수습된 바 있다. 정국이 안정될 때 요서 국경에 돌궐과 사돈을 맺고 계민소를 설치하고 고구려를 정탐하며 군비 확충에 주력하였다. 그는 중원 변방이 모두 굴복하고 동방의 고구려만이 굴복하지 아니하니 천하에 유일무이한 황제의 존칭을 듣고자 하는 무한의 욕심을 충족하고자 함에 항상 고구려가 거슬렸다. 그리고 고구려는 항상 하남 동지를 그들의 고토라 하여 침략할 계책을 세우고 있으니 순종토록 회유하지 아니하면 화근이요 잘못 공격하다가는 화북 전체를 잃는 지난날의 한나라 전철을 밟는 것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지난날 진나라 목왕은 대병을 일으켜 환온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가 대패하고 도리어 화북의 전부인 사주, 기주, 옹주, 양주, 청주, 병주, 연주, 예주, 유주, 평주, 등 하북 산동 산서의 화북을 고구려가 병탐 하였다. (晋穆帝時桓溫北伐敗自夷狄亂華司冀?凉靑幷?豫幽平諸洲一時淪沒 {宋史}) 이 전쟁으로 진나라는 사마애가 창업한지 불과 4대에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모용씨와의 동족 전쟁에 패한 고구려의 비극은 요동뿐 아니라 이곳 주민의 비극 이였다. 진이 망하고 중원이 분열하여 이곳 위와 진에 있던 주민은 한족에 동화하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가 없었다.

 

위의 주민들은 옷을 바꾸어 입어야 하고 조선말을 아니 해야 하고 진에서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진의 양평공 융이 진(秦)왕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동녘 오랑캐가 육주에 웅거하여 남면하고 황제를 자칭하고 있는 터에(중국 분열 후 황제위에 오른지가 동이 조선족이 여러 명이라는 쪽이다) 폐하께서 여러 해를 전쟁으로 얻은 나라이지 그들이 의를 사모하여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 폐하 친히 그들을 돌봐 부자 형제가 조정에 가득 차고 권력을 잡고 해가 갈수록 훈구 대신으로 자리 잡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호랑이를 기르는 결과가 될 것임을 유의해야 할 것이 옵니다. 신이 천문을 보니 혜성이 나타나 그 꼬리가 십여 장이고 태미를 거쳐 동정으로 이르고 4월에서 시작하여 추동에 이르도록 불멸하였습니다. 참고하옵소서 하였다. 그러나 진왕 견은 듣지 아니 하였다. (秦陽平公融上疏曰東胡고據六洲南面稱帝陛下勞師累年后得之本非慕義而來今陛下親而行之使其 父子兄弟森然滿朝執權履職歲傾勳舊臣愚以爲狼虎之心終不可養星變如此願少留意孝武帝寧康元年有慧星出於尾箕長十余丈經太微掃東井自四月始見及秋冬不滅秦王堅不聽 {鑑易}) 이러한 상황에서 여기 사는 조선 고구려인과 백제인이 어찌 국적을 보전 할 수 있으랴 진이 하남의 백제를 공략함을 의리를 모르는 짓이라 한 것이 의미 있는 말이라 보여진다. 

 

(여기 말하는 진은 진시황의 진나라가 아님 ) 옛날 진시황이 연을 정벌한 후 당시 중원의 선진 지식층 이였던 연인즉 동이족은 한고왕 유방을 도와 진을 치는데 크게 기여하고 중원 열국의 지도층에 상당수가 조선족 이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고토 회복이 신라 백제와의 통일을 이루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 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 였다. 수나라의 계속된 고구려 침공도 수가 백제 신라와 연휴 하여 백제가 고구려의 배후를 위협하였음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고구려가 패주하는 수왕을 추격하여 잡지 못한 것도 백제의 배후 습격이 두려워 나라를 비울 수 없는 형편 때문에 추격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원의 옛 동이 열국민은 한족화로 그 생존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양왕은 지난 요동 패전을 설욕코자 계속하여 서서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백제를 통한 정보 수집에도 빈틈이 없었다. 그리고 탁녹에 이르는 병력과 군량 수송을 위한 대운하도 완성하였다. 이 운하 건설에 희생자만도 수십만명 이라 하였다. 수 문왕의 대를 이은 수양왕은 대업 삼년에 하북의 조위(동이족의 나라) 두 나라를 순방하여 위세를 보이고 안문을 지나서 패수의 유림관을 나와 신사 오십만의 기치와 치중은 천리를 이었고 관풍전을 지어 둘래 이천보의 성을 이루고 위엄을 떨쳤다. 

 

4년에는 하북의 여러 곳 군사 백여만을 동원하여 황하에 운하를 만들어 하북에서 탁군에 이르는 수로를 만들어 부역에 참가할 남자가 없는 집을 부녀자가 노역에 나왔다. 이와 같이 수육으로 신속히 전국 징병과 군량미를 탁녹으로 수송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한편 동경을 동도로 개칭 수축하여 금왕 자신이 장기 체류 할 수 있도록 하고 다시 이십만 부역민을 동원하여 유곡(패수지역)에 서동으로 장성을 쌓아 장차 있을 고구려와의 대전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수 왕의 무모한 전쟁 준비로 중국이 피폐하여 망하게 된 것은 배거가 창도한 것이다. (令中國疲弊以至於亡皆?之唱導也) 고구려 정벌을 수양왕에게 권한 자임)라고 하였다. 후일 중국 역사 기록은 색위의 여러 오랑캐들이 돈을 벌기 위하여 군현을 출입하는데 경비 과다 지출로 피폐 한 것이라 하여 침략 전쟁 준비 관계라고 쓰지 아니 하였다.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은 이상한 변명을 한 것이다. 수 왕은 이와 같은 원대한 계획의 성공으로 고구려 정벌에 삼백만의 대병역을 단시일에 동원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부왕이 삼십만의 적은 병역으로 고구려를 얕보고 싸우려다 실패하고 특히 지원 병력이나 군량의 운반 불편으로 패잔군을 구출하지 못하고 수수 방관하여 전체로 백만의 전사상자를 내는 비운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수 양왕의 동방 수송도 완성을 전해들은 고구려는 수의 동정을 살피고자 요서에 수의 계민소에 사자를 보내어 동정을 보고 오라 하였다. 수 왕은 마침 그곳을 시찰하러 왔다 계민소는 감히 고구려 사자가 와 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황문시랑 배거가 양왕에게 고자질하였다. "고구려 왕이 입조하지 아니하니 이곳에 온 사자를 친히 보고 교화하면 고구려는 본래 한 진의 군현에 불과한 소국이 오니 폐하를 두려워 할 것인바 사자를 위협하면 고구려 왕이 입조 할 것이옵니다."하였다. 수왕은 말을 바꾸어 고구려 왕을 초청 한다 하고 입조를 권하였다. 입조란 소국왕이 대국 조정에 황제를 배알하러 가는 절차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건국이래 자주 독립을 고수하고 대국 황제를 자처하였다. 수 양왕은 정실과 첩실 몸에서 난 수십명 자식을 모두 각 지방 왕에 봉하고 타성 왕후를 전해져 오는 왕후 봉작 제도를 이때부터 없애 버렸다. 천하에 고구려만을 왕으로 인정하고 달래였으나 고구려는 결코 동앢 황제의 위치를 굽히지 아니 하였다.  

 

배거는 다시 말하였다. "고구려를 멸하고자 함은 선제때 부터 오랜 숙원 이였습니다. 다만 양량이 불초하여 출정하였다가 실패하였으나 폐하께서 어찌 그냥 둘 수 있사오리까, 관대를 한다 하여도 오랑캐입니다."(군자의 의관) 하고 기다려도 고구려는 조공하지 아니하였다. 수 양왕 광은 천하에 영을 내려 돈 있는 자로 하여금 전마 십만 필을 구입하고 무기를 준비케 하였다. 명을 어긴 자는 참하고 칠년 봄에는 강도에 행차하여 유주총관 원홍으로 하여금 동래에 가서 전함 삼백척을 만들게 하고 주야로 쉬지안코 만들도록 감독하여 수중에서 조선공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하여 하체가 수중에서 불어 터져 썩어 죽는 자 부지기수이고 양왕 광은 탁군에 이르러 구품이상 문무백관을 집을 지어 안치한 후 천하 병력을 원근을 불문하고 징발하여 탁군에 총집결하라 명을 내리고 강희 이남의 뱃사공 일 만인 궁노수 삼만인 영남의 배참수(적은 창을 쓰는 자) 삼만 인을 징발하여 사방의 수송을 돕게 하고 하남 희남 강남에서 전차 오만을 만들어 고양으로 모으게 하여 동시에 군복 갑옷 만막을 싣고 군사들로 하여 끌게 하고 하남 하북민으로 하여금 군을 공양케하고 희남민을 동원하여 예양과 낙구에 있는 창고 양식을 탁군으로 수송케 하니 수송 선박이 천리를 잇고 병갑 및 여러 장비의 왕복하는 행열은 수십만 명이 길에 깔려 주야로 끊이지 아니하니 죽는 자도 무수하여 시체가 길가에 흩어져 악취가 코를 찌르니 천하가 소동 이였다고 {史記}에 기록하였다.

 

수송에 일년간을 쉬지 않고 준비하여 팔년 정월에는 사방의 병력도 탁군에 모두 모였다. 준비가 완려함에 수양왕은 말하였다. 고려의 무리는 우리의 일군도 당하기 어려울 것이다.(일군 병력은 이십만 정도이나 그 군비는 고구려보다 우월하니 비슷한 병력으로 한개군의 능력 밖에 안된다는 뜻이다) 수왕은 영유에게 "이번 전쟁에 경의 생각은 이길 것으로 보느냐?"하고 물었다. 영유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도 이길 줄 아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폐하께서 친히 출정하는 것을 원치 아니 하옵니다."하였다. 수왕은 얼굴 색이 변하면서 반문하였다. "짐이 대군을 거느리고 여기 와서 어찌 승전하는 것을 보지도 아니하고 돌아간단 말이냐 적이 먼저 후퇴하는가?"하였다. 대답하기를 "전쟁에 아직 이기지 못하였사오니 폐하의 위엄이 손상될까 두렵습니다. 어가가 여기 유하시면 장수들은 싸움의 방략을 지시 받아야 하오니 싸움은 주야 강행군하여 불의에 의해 습격해야 이기는 것인데 승부의 기틀이 빠르고 느리고 하는 자유 자재함이 있어야 하옵니다."하였다. 수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불쾌하여 "그대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너는 여기 머물고 있거라."하였다. 우상 방서 감사 경순 이 상소를 올려 같은 말로 간하였다.

 

수 양왕은 크게 노하여 좌우에 명하여 참수하라 하였다. 옆에 있던 하도가 누누이 간하여 겨우 살렸다. 각 군의 위치가 정해진 후 드디어 수양왕의 진군 명령이 내렸다. 좌십이군은 누수방 장잠, 명해, 계마, 진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등 열두길로 나누어 진격하고 우이십이군은 점선 함자 희니 임돈 후성 제계 답돈 숙진 갈석 동시 대방 양평등 열두 길로 진격하여 평양을 목표로 집결하라 하니 그 병력은 무릇 일백십삼만삼천팔백이니 호왈 이 백만이라 하고 군량 군 귀품 수송 병력이 또한 그 배수를 넘었다. (凡一百一十三萬八百人號二百萬其墩運者倍之宜社於南桑乾水 {隋書})

 

 三十三. 수(隨)나라의 水軍 대장군 내호아가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고구려 황제(皇弟) 건무태자에게 대패하여 전멸함

 

隨王은 高句麗와 戰爭에 그의 運命을 걸었다. 한편 高句麗 朝廷에서는 수 양왕 광의 출병을 전하는 파발마의 보고가 잇달았다.. 平壤의 皇帝는 廟議를 열고 백관의 의논을 들었다. 平陽皇帝는 후에陽(영양)皇帝로 불렀다.고구려 제25대왕 평원 황제의 장자로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성장함에 담대하고 명민하며 문무를 겸비한 명군으로서 일찍이 모용구와 모구검의 난리로 고구려 사서가 대부분 멸살함을 근심하여 대학 박사 제도를 두어 사기 편찬을 하고 『留記』 100권을 편수하였다. 이것은 백제와 신라의 건국이래 가장 완비된 삼국 사서이기도 하다. 영양황제는 지난 9년 麗 隨大戰을 승리로 이끄는데 대공을 세운 강이식장군을 병마 도원수로 삼고, 을지문덕을 서부총관 진서 장군에 제수하였다. 제는 백제와 신라가 연달아 수양왕에게 사자를 내여 고구려 국정을 염탐한 정보를 제공하고 전루에서 고구려를 협공할 것을 제의하고 있으니 수나라 실정에 보다 밝은 강이식을 측근에 불러 사후책을 의논하고자 함이였다. 수가 일단 패하여 심한 타격을 입었으니 가까운 시일내 재침을 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고 백제와 신라를 무력 통합할 것을 계획함이라.  

 

그러나 강이식 장군이 자신의 생각을 사뢰기를, "수나라가 한 번 패하였다고 하나 우리가 신라와 백제를 분국을 공벌하려면 반도 깊숙이 진격해야 하는데, 협소 험산에 각지 요새로 숨어들면 이를 토벌하는 데는 五年의 세월이 걸릴 것이옵니다. 그 두 나라 중 하나를 설득하지 않고서는 이것은 우리가 신라 백제와의 전쟁에서 깊숙이 들면 수가 침입해 올 것은 필연 지사이오니 그 일은 지금으로서는 아니되옵니다. 때가 오면 가능하옵니다. 그리고 수는 우리를 침공할 적에는 반드시 신라 백제가 우리의 배후를 공략하는 전략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그것이 우리의 우환이기도 하오나 신라는 동부의 물길 숙신이였으므로 우리의 동북영토 일부를 점령하는 것이 고작이고 반도의 백제는 압록수 (반도에 있는)을 건너지 못할 것이오니 유사시에는 압록수변을 굳게 지킬 수 있사옵니다."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수나라와의 전쟁이 오래가면 반도에 있는 남평양성 별궁은 최악의 경우 함락을 각오한 전략이다. 조선 반도에 있는 평양성은 고구려의 남쪽 전략 기지이며 백제는 항상 위협의 대상 이였다. 강이식은 발해변의 창해 근처에서 태어나 고구려 변방을 수호하는 직무에 오래 있으면서 인격을 도야한 문무를 겸한 장수였다. 한 무왕이 창해군을 만들어 한나라 영토로 편입했다가 고구려 개국 성조 주몽황제에게 패하여 군을(郡) 철파한 곳으로 주나라 강태공의 출생지로서 강이식은 그 가문의 출신이다. 그가 서북 총관으로 있으면서 수나라 문왕의 삼십만 대군을 파할 적에 부총관으로 있으면서 대공을 세운 을지문덕을 그의 후임으로 추천하고 영양 황제가 아직 서열이 낮은 을지문덕을 발탁한 것도 인재를 알아보는 현명함이 있어 그러한 것이다. 강총관은 재임시 契丹과 靺鞨 두 열후를 잘 사궈 친교를 하여 수양왕 부자의 꾀임에 넘어가지 말도록 하고 돌궐은 고구려 열후는 아니나 친선을 도모하여 최선을 다하여 수의 고구려 침공에 동참하지 못하게 했다. 

 

을지문덕도 이와 같은 외교 전략에 임무를 띠고 여러 차례 그들과 내왕하며 교류하였다. 契丹과 靺鞨은 고구려 열후로서 세가 크지 아니하나 수나라는 고구려 분열 정책으로 백제 신라와 같이 만들려고 갖은 계교를 부렸으나 강이식 을지문덕은 그것을 막았다. 돌궐은 수왕이 공주를 시집보내서 돌궐왕을 사위를 삼아서 서북 정복에 성공하고 마음놓고 고구려 침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돌궐은 을지문덕의 설득을 지켰다. 을지문덕은 천자의 입조하라는 명을 받고 수군의 동태에 관한 보고서를 가지고 평양에 입궐하였다. 백관이 도열한 후 제는 조서를 내리어 말하기를,  

 

"수문왕은 까닭 없이 우리를 침공하여 백성을 노략질하고 천도를 역행하다가 30만 군이 몰살되고 천벌을 받았거늘 이들은 北狄 돌궐로써 수문왕의 아들 廣은 잔인 무도하여 중원 백성을 잔휼하고 그의 본국 돌궐왕을 사위로 삼아 유대를 강화한 후 흉노를 물리치고 서북 일대의 각 이민족을 항복 받아 세를 과시하고 중원 열후를 진압하여 돌궐 諸國 隨를 창업한 자인바 오랑캐 廣은 그 아비를 모살 하고 형제도 죽여 황제를 참칭하니 짐이 일찍이 출사 벌주고자 하였으나 백제 신라가 용렬하여 거리낌없이 이를 행하지 못하고 있던 중 수왕 광이 이제 수백만 군을 일으켜 우리를 역공하려 하니 실로 분함을 참을 수 없는지라 만조 신료는 합심 전력하여 국난을 극복할 것이며 짐도 구룡산 별궁으로 나아가 출정군을 독려할 것이며 태자 건무는 유관수 장군과 어림군을 통솔하여 평양성을 지키고 발해에 침입하는 수나라 수군을 막고 을지문덕은 서부 총관 관내의 모든 성주 장수들을 전선에 동원하고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징발하는 일을 임의 수행할 것이며 군율을 어기는 자는 신분의 여하를 가리지 말고 임의대로 처리하라.  

 

이것으로 짐을 대신하여 군법을 시행하라"하고 보검을 전수하였다. 을지문덕은 사은 숙배하고 어전에서 제장을 모아 명령을 내렸다. "제1군 이민수 장군은 步騎 精兵 1만 8천을 이끌고 요하좌안을 수호하라. 제2군 정태구 장군은 보기정병 1만 5천을 이끌고 은 우측을 수호하라. 제3군 조학성 장군은 정병 1만5천을 이끌고 요하우측을 수호하라. 제4군 최일만 장군은 정병 1만 5천을 이끌고 요하우측 제3군의 우측을 수호하라. 아장 을서 삼용 장군은 제5군 정병 1만 2천을 이끌고 각 4군의 허실에 상응하여 적시에 접응하라. 각 군은 강변 요소 요소에 참호와 방책을 구축하여 적병의 도하를 막는데 전력할 것이며 착오 없이 세심한 주의를 하고 적이 요하를 건너는데 그 전력의 대부분을 소모해야만 요동 각성을 보전할 수 있고 각성을 지키지 못하면 왕검성을 보전할 수 없다. 내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는데는 신명을 국가에 바쳐 소임을 다 할 것을 이미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제장은 나와 함께 충성을 다하기 바라며 폐하를 대신하는 나의 호령은 일호의 사정도 용납함이 없을 것인즉 명심하고 착오 없기 바라오.  

 

나 또한 중군을 회동하여 전면에서 적을 섬멸할 것이오. 이제 제장은 즉시 출발토록 하라"하였다. 諸將은 본부를 하직하고 각기 요하변으로 군사를 이끌고 떠났다. 요서의 각성과 패수의 요새지를 수군 200만과 평지에서 항전할 수 없음으로 전략상 철수하고 요하를 방위선으로 설정한 것이다. 여기 고구려 장군들의 이름은 중국식으로 전해 온 것을 인용하였으나 당시 고구려 인의 이름이 우리 나라 옛날식 이였음으로 후세 사기에 음독 성명이며 본명은 불명하다. 고구려 장군들의 성명은 고사적으로 강여수저서 을지문덕에 상세하고 한단고기 신라, 백제, 고구려는 한반도에 없었다 등, 잃어버린 고대사 회고의 기풍이 일어남은 다행한 일이다. 한편 수군은 치중 산병(輜重 散兵, 군의 보급 물자 수송 병력)도 전투 병력과 같은 편제로 모조리 4방을 에워싸고 행군하고 돈영하는데 절차가 있고 1군이 출발하여 하루만에 사십리 간격으로 둔영하고 점진하여 40일에 首尾가 서로 이어져 고각이 서로 들리고 성기가 960리에 이어져 휘날리고 어영내에 12 위술소 3대 五성 9사에 나뉘어 내위전후 좌우로 6군이 차례로 출발하여 다시 80리에 이르니 고금에 보지 못한 출사지성(出師之盛)이라고 장관을 이루었음을 역사서에 기록하였다. 당년 十二月에 단문진(段文振)이 좌우위 대장군으로 출전하였다.  

 

과로로 병을 얻어 임종에 수왕에게 표를 올려 아뢰기를, "夷狄이 속임수가 많으니, 깊이 유의하고 속전속결로 불의에 수륙으로 평양을 공벌하면 나머지 여러 성은 힘들이지 아니하고 함락할 것입니다. 일시 지체하면 추위가 닥쳐와서 운량이 어려워지고 앞은 고구려 후는 말갈이라 전후로 협공 당할 것이니 지체하면 아니되옵니다."하고 죽었다. 수왕은 몹시 애석하였다. 그러나 수양왕 광은 이와 같은 전법이 고구려와 같은 강병에게는 통하지 아니함을 모르고 이러한 전법으로 싸우다가 도합 200만 군을 요하변에 장사지내고 끝내 수나라는 망하고 만 것이다.  

 

당시 말갈은 중원 하북과 몽고 사이에 있는 고구려 열후로서 고구려를 지원하였다. 수나라는는 출병한지 두달만에 요수가에 총집결하여 도하 작전을 강행하였다. 浮橋를 만들어 건너고자 하면 고구려군이 습격하여 파괴하고 또 만들면 불태우고 수나라 장수 전사웅 맹사 등은 전사하고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수왕은 전군에 명령을 내려 '강을 건너는데 공을 세운 자는 봉작을 하고 큰상을 준다.'하고 장병을 격려하였다. 좌돈의 대장군 맥철장이 자진해서 선두에 나서겠다고 청하였다. '대장부가 어찌 방안에서 부녀자의 간호를 받아 죽을까?' 보냐 하고 그의 세 자식들에게 국가에 목숨을 바칠 것을 명하였다. 수왕은 그의 세 아들에게 봉작을 내리였다. 수군은 다시 3개 부교를 만들어 도하를 강행 하였다. 맥철장은 선두에서 장금을 휘둘렀으며 시석이 비오듯 쏟아지는 부교를 건너 동안에 올랐다. 뒤를 따라 수군이 대거 상륙하였다. 강변에 진치고 있는 고구려 군은 상륙하는 수군을 닥치는 데로 격살하였다. 그러나 맥철장은 수군을 지휘하여 이제 우리는 물러가면 몰살하니 죽도록 싸워 고구려 군을 물리치는 수밖에 없다 하고 후퇴하려 하지 않았다.  

 

상륙한 수군은 아무리 죽어도 그 수는 점점 불어났다. 수군은 양왕의 독려 하에 아무리 죽어도 계속 도하하여 온 것이다. 고구려 총관은 역시 진두에서 각 군을 지휘하여 수군을 격살하였으나 점점 불어나는 수의 대군을 평지 접전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후퇴 명령을 내렸다. 질서 있는 후퇴 작전에 수군은 추격할 수 없었다. 이 도하 작전에 수군은 10만의 사상자를 내었다. 고구려 군도 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수군은 이것을 대승이라고 기록하였다. 이리하여 수군은 요동성과 ?城을 포위하였다. 을지총관은 각 성주에게 성을 굳게 지키고 절대로 출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중에는 모두 1년 양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총관은 굳게 지키고 있으면 공성군의 사상자는 수성자의 몇 배가되는 것이고 장차 엄동이 닥쳐오면 수군은 운량이 어려울 것임으로 저절로 총공격할 기회가 올 것임으로 추정하였다. 수군은 이 두성을 함락하지 않고는 평양성을 향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평양 왕검성을 공격하는데는 전군이 총공격을 해야만 이길 수 있는데 수도 평양성을 둘러싸고 있는 10여개성의 주성인 두 성을 함락하지 않고 평양을 공격하면 앞뒤로 적의 포위망에 들게 되니 어찌하여도 이 두 성을 공략해야 하는데 공성한지 3개월에 이르도록 함락하지 않으니 수 양왕은 초조하였다. 단문진의 유언대로 엄동이 닥치기 전에 평양 왕검성을 공략하지 못하면 큰 낭패가 닥쳐옴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수 양왕은 참다 못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요하를 건너 요동성밖에 행재소를 정하고 요동성 공격의 실태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각 군 공성 장수들을 소집하였다. 그는 장수들을 힐책하여 말하기를, "공등은 높은 벼슬자리에 가문의 명예에 의지하여 앉아 암약하게 나를 대하는가? 도성에 있을 적에 내가 여기 오는 것을 원치 않고 내가 직접 보는 것을 두려워함은 병패이라. 내 지금 여기 와서 공 등의 소위를 보니 죽이고 싶다. 지금 공등이 죽음이 두려워서 힘을 다하지 않으면 내가 공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가?"하니 제장이 모두 두려워 안색이 변하였다. 이에 수 양왕은 요하변 본진으로 돌아가지 않고 요동성 서쪽 수리밖에 있는 조그마한 두 성에 유숙하면서 독려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맹공격을 하여도 시일만 가고 전사자만 불어날 뿐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수 양왕이 생각대로 공성 장군들이 죽을힘을 다하면 함락할 것이라는 계산은 옳지 않았다. 고구려군은 엄청난 전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右翊衛大將軍 萊護兒는 강희 각 군 전함을 이끌고 수 백리 바다를 운항하여 浿水에 이르러 패수에서 평양 60리 해역까지 진격하여 고구려 군과 만나 크게 파하고 승리를 타고 평양성 공격에 나서고자 하니 부총관 周法商은 全軍이 집합하여 함께 힘을 모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으니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여도 萊護兒는 공을 세울 욕심으로 듣지 않고 정예갑병 4만을 선발하여 왕검성에 접근하였다. (萊護兒帥江淮水軍軸?數百里浮海先進入自浿水去平壤六十里與高麗相遇進擊尤破之護兒欲乘勝趣其城副總管周法尙止之請이諸軍至俱進護兒不聽簡精甲四萬直造城 {鑑紀}) 당초에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을 유인하기 위하여 패하고 달아나서 수군이 깊이 들어온 후에 복병으로 역습하여 섬멸하니 수군 대장군 내호아는 겨우 수천 명을 이끌고 달아났다. 당초 우문술의 9군이 도착하면 래호아의 수군과 함께 총공격을 가하고자 하였으나 오지 않고 내호아는 초전에 쉽게 고구려 군을 이겼음으로 한 번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하였다. 래호아는 혹여 복병이 있는지 진군을 중지하고 4방을 수색대를 보내어 조사하였으나 전혀 그러한 준비는 없었다. 이에 계속 추격해 가니 고구려 군은 평양성 위각에 있는 빈 절간에 들어갔다. 수군은 대군으로 공격하여 고구려 군을 또 한차례 격파하였다. 이어 수군은 평양성하에 다다랐다. 수군은 평양성을 서쪽에서 공격하였다.

 

부총관 주법상은 후군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수군 정병 4만은 평양성 위성의 고구려 군 방위진을 뚫고 외성안에 진입하였다. 성안에 진입한 수군 병사들은 민가를 뒤지어 노략질에 바빴다. 이 때에 주위에 숨어 있는 고구려군이 4방에서 에워싸고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대오가 흩어진 수군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萊護兒는 수습 불능의 혼란에 빠진 수군 장졸을 그냥 버리고 성을 빠져 나와 달아나기 시작했다. 성내를 빠져 나오지 못한 수군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고 수군 대장을 잡으라고 소리치며 추격하는 고구려군은 도처에서 수군을 섬멸하였다.

 

후군을 지휘하여 뒤를 따르는 부총관은 중도에서 복병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고 해로로 돌아와 패잔군을 수습하여 고구려군의 추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래호아의 6개(水軍) 군단이 파멸하는 동안 우문술의 9개(육군) 군단은 악전 사투로 요하를 건너 요동성과 영성을 공격하는데 수양제의 열화 같은 독전에 내호아의 휘하 군단이 무엇을 어찌 하고 있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이와 같이 9군이 요동성과 영성을 함락하지 못함에 수양왕은 평양성으로 갈 수 없었다. 요동성에서 발이 묶여 오지 않고 6군 20만의 병력을 잃고 대장군 래호아는 살아남은 수 천명을 이끌고 배로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는 부총관 주법상이 고구려 추격병을 물리치고 구하였다. (護兒大敗僅而穫魚士卒還者不過數千人高麗追至船所周法商整陳待之高麗乃退 수서) 내호아는 패잔병을 이끌고 海浦에 일단 돌아왔으나 고구려의 습격이 두려워 감히 다시 머물 수 없어 우문술 대장군의 접응으로 그곳을 떠났다. 해포란 요하입구 우안 포구이다. 

 

이 수륙 대전으로 수나라는 패수에서 요하 입구에 연하여 발해 안에 장관을 이룬 그들의 자랑하는 巨艦과 數千隻의 군소 선단은 파멸하고 말았다. 수서를 이용한 {唐書}에 당시 수나라 수군의 위용을 기록하되 등주(지금의 발해변 봉래시)를 동북으로 바다를 가서 남쪽 바닷가에 패강 입구를 지나면 숙도이고 신라의 서북이 된다. 또 수 양제의 동군이 인솔하는 12로 군중의 해군 돗대는 하늘 높이 솟고 크고 큰 전함은 구름을 나르고 패강을(패수)가로 막고 평양쪽을 멀리 바라본다. (登洲東北海行南傍海?過浿江口淑島得新羅西北又隨煬帝東征訴曰滄海道軍舟?千里高帆電逝巨艦雲飛橫絶浿江搖造平壤) 이와 같이 자랑하는 거함들도 발해를 지키고 있던 고구려 수군 도원수 황제(皇弟) 건무에게 패하여 화공에 불타고 기절해 태풍에 침몰하고 고구려 수군의 기습에 지리멸렬하여 맥없이 함몰하였다. 이러한 전함 건조에 수양제는 3년간에 막대한 인적 물적 큰 희생을 치르었던 것이나, 단 한 번 전쟁에 20만 명의 수군은 발해에 고기밥이 되었다. 수천 척의 수군 함대는 패잔병 기 천명을 태운 100 여척의 선단이 패수구에 머물고 있다가 내호아는 요하변 우문술군에 의지하고 감히 수왕을 가보지 못하였다. 이때 수군의 함대는 그들이 자랑한 것과 같이 국역을 기울여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년간 건조한 거대한 수천 척의 전함과 중원 전국에서 모은 수송 함대가 발해와 패수 어구에서 고구려에게 전멸되었으나 수군의 수군 대장군 내호아의 패전 기록은 우리에게는 없고 수나라 기록에 나오니 당시 고구려의 적은 수군(水軍) 함대가 이러한 대승전을 거두었다고 우리측 기록만 있다면 후세 사람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가 수군의 편제와 주도면밀한 전술은 그 전통이 후세에 이어져 임진왜란에도 이순신 장군의 1대 20의 기적을 이룬 승전을 기록하였거니와 고구려 수군의 돌격하는 용맹과 기발한 전술에 수나라 수군은 손을 쓰지 못하고 수십만 수군 장병과 수천척 거대한 전함을 포함한 함대는 불과 몇 달만에 함몰되었다. 전해 온 기록은 없으나 임진왜란에 실용한 잠수함에 비견하는 철감선이 이때부터 실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수나라의 수군 패멸은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 요하변에서 마음놓고 후고의 걱정 없이 수군 30만을 섬멸 할 수 있게 하였다.  

 

三十四. 隨 煬帝의 九軍 潰沒과 隨 煬帝의 敗走

 

수 양왕 광은 백제군과의 작전계획에 평양을 협공할 기일이 닥쳐오고 있었다. 백제의 첩자는 끊임없이 고구려 군의 동태와 평양성의 내부 정보를 수 양왕에게 보내 왔다. (百濟王璋遣使請討考慮帝使之觀考慮動靜璋內與高麗潛通隋軍將出璋使其臣國智牟來請師期帝大悅厚加賞賜遣尙書起部郞席律詣百濟告以期會及隋軍度遼百齊亦嚴兵境上聲言助隋實持兩端是行也) 수 양왕은 그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곧 바로 평양성을 공격키로 결심하였다. 수의 정동군 전진 기지 요동고성 즉 지금의 永平府 대정부의 예비군 4개 군단을 요하를 건너 요동의 영성과 요동성을 포위하고 그 곳 공성군 9군 30만 5천을 평양성 공격에 투입키로 하고 압록강 서편에 집결하라고 명령하였다. 평양성 주위에는 수 10개 위성이 있고 그 중에 요동성과 영성은 주전 요충으로 이 곳을 함락하지 않고는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후방을 끊으면 수나라 군은 포위 섬멸당할 위험이 있음에도 수 양제는 평양성 주위에 보위하는 고구려성들을 그대로 두고 평양성을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양도가 끊어진 것을 각오하고 군사들에게 백일 양식을 후대하고, 무리한 행군을 강요하였다. 

 

여기 죽음을 무릅쓰고 평양성 공격에 나선 수 장군들은 좌우위대장군 우문술 우우위대장군 우충문 좌요위대장군 형원항 우우위장군 설세웅 좌돈위장군 신세웅 우어위장군 장근 우무위장군 조효재 탁군태수 취홍승 호분낭장 위문승 등이다. 우문술 등은 노하 희원 2진에서부터 아마도 모두 백일 양식과 기타 전쟁에 필요한 무기 등 물자를 지급하고 중간에 짐이 무거워 버린 자는 참수하였다. 그러나 강행군에 그 무거운 양식을 운반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 十리를 가지 못하였다. 반이나 땅에 모르게 묻었다. 수군은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엄중하고 세밀한 주의를 하고 철저한 대비를 하면서 진군하여 압록강 서안에 집결하였다. (大將軍于文述出扶余道…衛文昇出增地道皆會於鴨綠水西) [註. 여기 나오는 패수 압록수 살수 평양 등의 지명이 조선 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며 다음에 설명을 할 것이나, 옛 중국 기록에 있는 것임으로 본문에서는 혼돈을 없애기 위하여 미리 주시하는 것임] 고구려 서부 총관 을지문덕은 요동의 각 성은 굳게 지키고 출격하지 말라. 이르고 대군을 수군의 진격에 맞추어 후퇴시키고 수군의 압록강 서안에 집결하는 것을 막지 않고 중간에 약간의 저항을 하다가 후퇴하곤 했다. 을지총관은 중도에 진을 치고 있는 우중문 장군에게 화친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大高句麗國西部總管鎭西大將軍乙支文德傳書于大隋國右翊衛大將軍于仲文麾下而凡治國之道則保衛民生之安危以國有憐交之信義焉今如大隋國出兵於無名之師以招萬民之苦因及橫死於編野以亦爲統兵之帥者省慮之信也公如出樂浪道以連捷至此也又爲何欲之加耶望願以此自制尊詣以班師則誠萬民之爲幸也留不俱矣倂添拙作短詩 謹拜 漏錄補期

 

神策究天文 - 모책은 천문을 통달하고

妙算窮地理 - 묘산은 지리를 궁달하니

戰勝功旣高 - 싸움에 공이 이미 높은지라

知足願言止 - 만족함을 알고 그만하시오

 

('대고구려국 서부 총관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대장군 우중문에게 서찰을 전하노니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국민의 안위를 보위하고 이웃과 신의로서 사귀어야 하는데 지금 수나라는 까닭 없이 전쟁을 일으켜 만백성을 고통받게 하고 마구 살육하니 군사를 지휘하는 자 근심해야 할 일이라! 공은 낙랑도로 출정하여 여기에 이르기까지 승전하여 왔는데 더 무엇을 바라오.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면 만백성을 위하여 다행한 일이오 겸하여 시 한수를 전하는 바이오'하였다.)

 

을지총관은 사자에게 은밀히 일러 수나라 군사들의 안색과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자는 말하였다. "저희 총관께서는 대장군이 좋으시다면 면담도 하실 용의가 있다 하였나이다."하였다. 이에 수군은 군영에서는 사자를 기다리게 하고 회의를 열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을지문덕을 면담차 초청하여 암살하기로 의논을 모았다. 그러나 상서 우승상 유사용은 慰撫使의 임무를 띠고 종군하고 있는 터이라 그러한 신의를 저버리는 암살 행위는 수나라의 정통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극역 만류하였다. 을지문덕은 사자의 희보를 보고 즉시 수군 진영으로 갈 준비를 명하였다.

 

부총관과 참모진에서 모두 말렸다. 잘못하면 화를 입을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였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화의를 제안하였으나 수나라 장수가 화의에 응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그치지 않고 이 기회에 수군의 동태를 살펴 실상을 파악해야만 마음속에 구상하고 있는 일대 결전을 실행할 수 있다고 단정한 것이다. 총관은 말하였다. "지금 우리는 수군 30만이 평양을 포위하면 단독으로 오래 지키기는 어려운 형편인데 각성 수장들은 각기 수군이 수십만이 포위하고 있음으로 평양을 후원할 수 없고 남으로 백제의 공격이 있어 남 평양 별궁도 주위에 수호하는 보조성이 하나도 없는 허술한 외로운 곳이다. 지금 형편으로는 오래 지탱하기 어려운지라 만일에 남평양이 백제에게 함락하면 수나라의 평양 포위군은 백제로부터 군량 보급을 받게 될 것인즉 우리 군사가 비록 날래나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저들의 허실을 확실히 살피고자 하는 것은 승패의 기틀이 바로 여기 있습이니라. 다만 내가 저들 진영에 들어가도 우리의 준비가 완벽하면 저들이 나를 감히 해치지 못 할 것이다."하고 호위 갑사 1개부대를 부관이 이끌고 가서 수군진영앞에 대기하고 을지문덕은 단신으로 우문술의 막사로 안내되었다. '일정한 시각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면 사고이니 즉시 행동하라.'라고 일렀다. 을지문덕은 우문술 우충문등과 인사를 나눈 후 말하였다. "우리는 수나라를 존대하고 인사를 다하는데 수는 군사를 일으켜 이와 같이 침략하니 이것이 무슨 까닭이오?"하였다. 우충문이 거드름을 부리며 말하였다. "우리 대수황제국은 사원(四苑)정벌하고 천하의 모든 왕들이 황제를 배알하고 충성을 맹세하였는데 그대 고구려국만이 이 세상에 홀로 신칭하지 않고 황제를 배알하로 입조하지 아니하니 어찌 두고 볼 수만 있겠소?"하였다. 을지문덕이 말하였다. "우리 대고려국은 창업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나라에도 칭신(稱臣)한 일이 없고 다만 중원 황제에게 존칭하고 사절을 교환하여 예절을 지켜 왔소. 그러므로 지난날 진대위황제나 대진 황제 대송황제는 우리 선황제폐하 붕어 하심에 조문 빈소를 차려 애곡하고 조문사를 보내 왔소. 隣國간의 신의를 이와 같이 두터이 함은 귀공께서 아는바 이온데, 어찌 칭신을 강요한단 말이오."하였다." 우충문은 詰難하였다. "이 세상에 수황제의 절제를 받지 않는 王候는 결코 용납할 수 없소. 돌아가 곧 고구려왕이 입조하여 사죄하지 않으면 평양성을 우리 백만 대군으로 포위하여 몰살할 것이오."하였다. 후세 중국사기는 을지문덕이 항복하러 왔다고 날조하였다. 을지문덕은 "되돌아가 수양제 폐하의 상견 요청을 전하겠소."하였다.우문술 등은 한 번 손을 들어 신호하면 숨겨 둔 도보수가 달려와 을지문덕을 생포할 계획 이였으나 유사용의 권유도 있고, 그 대비가 불확실하여 을지문덕의 기상에 눌려 잘못하면 고구려 호위군의 습격으로 함께 죽을 형편의 위험이 있어 결행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놓치고 나니 분하여 다시 파발마를 보내여 할 말이 새로 있으니 잠깐만 돌아와 달라고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손을 저어 뿌리치고 본진으로 돌아왔다. 을지총관은 돌아와 희색이 만연하였다. 제장이 물었다. "총관꼐서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총관은 말하였다. "수군은 굶주리고 있소. 그들은 수천리 운량에 지쳐 있는 것이오. 이제 그들을 파할 계책을 확정할 수 있소."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압록강변으로 점점 패하면서 후퇴하였다. 수군은 큰 손실 없이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강가에 다다랐다. 압록수는 부교 없이 건널 수 있는 적은 물이 흐르고 있어 요하와 같은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우문술은 도강을 주저하였다. 휘하 장병 10만 군이 이미 양식이 없어 하루 두끼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형편에 평양성을 포위한들 싸울 힘이 없었다. 우충문이 말하기를 이제 을지문덕이 연패하여 다달으니, "우리가 정병으로 추격하면 을지문덕을 대파할 수 있을 것이니 총력 추격하자." 하였다. 우문술이 말렸다. "이제 양식 공급이 어려우니 여기서 그만 돌아가자."하였다. 우충문이 노하여 큰 소리로 말하였다.

 

"공이 10만 군을 수하에 거느리고 적을 파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 폐하를 볼 것이오. 공이 따르지 아니하면 우리들 20만 군으로 싸우겠소."하고 형편을 수양왕에게 고하였다. 수왕은 우충문이 계책이 있는 것을 믿고 그의 말을 따르라 하였다. 우문술은 불길한 예감이 드나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대군이 큰 저항이 없이 압록수를 건넜다. 그리하여 달아나는 고구려군을 쫓아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이기고 살수를 건너 달아나는 고구려군을 쫓았다. 그러나 굶주리고 피로한 군사는 더 싸울 힘이 없고 수 양왕이 말한 백제군은 오지 않았다. 백제군은 남평양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三國史記}에 {唐書}를 인용하여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남평양을 점령하였다고 하였다. (至二十世近肖古王取高句麗南平壤)  

 

그러나 후에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정벌하여 이미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으면서도 남쪽 방어 기지로 별궁을 지어 쓰고 있었음으로 수군과 접선할 수 없고 따라서 군량을 수군에게 수송해 줄 수 없었다. 4.5만에 불과한 백제군은 남평양을 돌파할 수 없었다. 한편, 평양 왕검성 30리 지점에 있는 살수변에 진을 친 을지문덕은 명령을 내렸다. "이제 우리의 공격할 때가 왔다. 적이 비록 숫적인 면에서 우세하나 굶주리고 피로하여 싸울 힘이 없다. 적이 지금 반수가 살수를 넘어 왔으니 지처있다. 제1군운 우문술의 진영을 습격하라. 제2군은 우충문의 진영을 습격하라. 제3군은 형원황진영을 습격하라. 제4군은 신세웅진영을 습격하라. 제5군은 지금 곧 살수 상류 막아 놓은 제방을 헐어 일시에 물을 방류하여 강을 지금 건너고 있는 인마를 수장케하고 살수를 건너고 있는 수군의 퇴로 변에 매복하여 있다가 옆에서 사살하라. 내 전군을 몰아서 추격해 나갈 것이니라. 각 군은 반드시 고각을 크게 울리고 함성을 크게 질러 위세를 돋구어라."하였다.

 

수군은 진영을 치고 삼엄하게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밤을 세우는데 야심해서 고구려 기병이 진문을 습격하고 이어 고각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며 고구려군이 숩격해 오니 잠자는 군사뿐 아니라 진문을 지키는 수직 군사까지도 배고프고 피로하여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졸고 있다가 불시에 당하니 싸우고자 하는 자 없고 달아나는데 분주하여 병장기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다가 살수를 미쳐 건너지 못하고 있는 설세웅 장군 조호재·취홍승 등은 각기 군사를 이끌고 살수 주변의 수군을 구원하고자 살수에 이르니 되돌아오는 패잔군과 마주쳐 혼란에 빠지고 돌아서 달아나니 소리쳐 말려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이 소동 속에 우돈위장군 신세웅은 난군 중에 전사하고 달아나는 수군 장졸들은 추격하는 고구려 군에게 칼맞고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아 비명 소리와 함께 아수라장이 되어 각 군 대장들도 도망가기에 바빴다. 고구려군은 추격을 늦추지 않고 요하에서부터 신중하였다. 이 전쟁에서 요하를 건너온 수나라 군사는 9군 30만 5천명이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2천 7백명뿐이고 군기 물자 기계의 망실은 헤아릴 수 없었다. 호분낭장 위문승의 군사만이 온전하였다. (初九軍度遼凡三十萬五千及還至遼東城唯二千七百人資儲器械巨萬計失亡蕩盡 鑑易) 隋王은 大怒하여 우문술등 패군한 장수들을 모조리 묶어서 끌고 돌아갔다. 수군은 구군 위에도 치중 兵과 民間人 徵發과 人夫등戰死者는 백만이 넘었다.  

 

* 겸하여 지난날 필자가 요하변에서 옛날을 회상한 拙詩 한구를 첨함.

 

군사를 그대로 보전한 위문승은 금자괄록대부에 제수되고 패전의 책임을 유사용에게 씌워 참수하여 천하에 사죄하였다. 제장들은 모두 우충문이 무리한 진격을 요구하여 따라가 실패하였다고 책임을 미루어 모두 풀어 주고 우충문만 가두었다가 근심으로 병이 위독하여 귀가시켜 집에서 죽게 하였다. 이와 같이 패전의 책임을 출전장수에게 미루고 수양왕 자신은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수양왕은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부끄럽고 위신이 추락하여 어찌하든지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면 황제위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三十五. 高句麗 征隋軍의 班師와 隋나라의 內亂

 

高句麗 乙支文德 總管은 遼河 건너 遼東 고성에 있는 산과 같이 쌓인 수군의 군수 물자를 收獲하고 군사를 휴식시킨 후 천자에게 表를 올렸다. 西部總管征西大將軍臣乙支文德上表于皇帝陛下尊許耳今而隋王廣狂暴自慢滅趙國以來其放恣日益今至侵入我國以無禮不遜於皇上以犯陛下之虎威臣惟惶恐無至焉今幸爲天道垂恩德與陛下忠良赤子武威能滅難敵此陛下之洪福也我軍雖大勝於隋然隋王不降而遠遁矣由兒彼必敗軍整備後再侵可想也是今我軍士氣衝天以可呑中原之意氣臣愚料隋敵之況彼屢敗於遼東無數戰死者屍放山積棄於遼東曠野以彼國內疲弊國人背怨隋主國無余穀兵無戰意民無公信將必有變亂乎臣麾下將兵旣具整備只待國命眞天下進運之秋也吾使雄擧一決可圖中原楊廣雖還有百萬之衆彼士氣梢沈不可爲效用則必能破潰可期矣若如中原之民亦幸乎玆以專要本國之接應則後方兵站運糧以大事期必可成乎西部總管征西大將軍臣乙支文德頓首百拜伏願陛下之英斷伏惟上表矣 漏錄補記 西部 總管 征西大將軍 臣 乙支文德은 皇帝陛下 御前에 表를 올리나이다. 隋王 廣은 狂暴하고 自慢하여 趙나라를 멸한 후부터는 그 방자함이 날로 더하여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無禮 不遜하게도 陛下의 威嚴을 범하였사오니 황공함이 이를 때 없사옵니다. 이제 다행이 천도가 무심치 아니 하와 恩惠를 내리고 陛下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의 용맹은 능히 어려운 적을 멸하였사오니 이는 참으로 陛下의 洪福이옵니다. 우리 군사가 비록 대승을 거두었으나 隋 楊帝는 降服하지 아니하고 멀리 달아났사옵니다. 그러하옴에 그들은 필연코 敗軍을 다시 整備 收拾하여 敗戰의 수치를 씻고자 다시 침입할 것으로 추측되옵니다. 이제 우리 군사는 사기 충천하여 가히 중원 천지를 삼킬 의기가 있습니다. 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나라 도적은 그 형편이 여러 차례 요동 싸움에 패하여 무수한 전사자를 내고 산과 같이 쌓인 시체를 요동 벌판에 버리고 갔으니 그들의 국내는 疲弊하여 국민은 수왕에게 속으로 원망하고 나라안에는 양식이 여유가 없고 士卒은 싸울 의사가 없고 나라의 公信力이 없으니 장차 變亂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臣의 麾下 將兵들은 이미 遠征 準備를 해 놓고 다만 나라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실로 天下 運氣가 나아갈 때라 우리 대군이 한 번 蹶起하여 中原을 圖謀할 것이오니 隋 楊帝 廣이 비록 백만 군을 아직 가지고 있다 하나 사기 초침한 군사는 그 몫을 다하지 못할 것이오니 가히 壞滅시킬 수 있사오니 이같이 하면 중원의 만백성 또한 다행한 일이옵니다. 이에 오로지 後方에서 兵站 糧食을 보급하면 대사를 성취할 수 있사옵니다. 西部 總管 征西大將軍 臣 乙支文德 頓首百拜하옵고 陛下의 英斷을 엎드려 비옵니다.)하였다. 천자는 이에 백관을 모아 여러모로 공론하였으나 일단 을지총관을 소환키로 하고 사자로 하여금 고유문을 전하고 함께 입조하라 하였다.  

 

大高麗國皇帝告諭于西部總管征西大將軍乙支文德矣壯乎朕之忠義勇士矣將軍之神技勇武運疇智謀壓倒隋敵群將戰慄狼敗我使勇將强兵大軍到處隋軍百萬之衆潰滅我軍馬蹄之下以隋魁望風逃走而實萬世不朽之大功也朕願相見將軍則當入朝留照 漏錄補記 (高句麗大帝國 皇帝는 西部總管 征西大將軍 乙支文德에게 告諭하노라 장할 시고 짐의 충성스러운 용사들이여 장군은 神技 勇武로 용이 주도한 智慧 謀略으로 隋軍 將軍들은 戰慄하고 敗亡하였으며 우리의 强力한 將兵들의 大軍이 이르는 곳에 隋 나라의 百萬 大軍은 我軍의 말굽 아래 潰滅하여 隋 나라의 괴수 隋 楊王 廣은 망풍 도주하였노라! 실로 만세에 빛나는 대공을 세웠음이라 짐 또한 여러 신료들과 장군을 보고자 하니 즉시 입조하기 바라오.)하였다. 조정에서는 을지문덕 총관을 일단 입조하라 하고 전쟁을 종결하였다. 천자는 제장을 공적에 따라 포상하고 전사상자들을 구휼하여 전쟁의 상처를 고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짐이 자나깨나 잊지못하는 것은 고토회복이다. 수의 돌궐 괴수가 요서를 점령하고 그것도 모자라 중원의 수백만 백성을 징발하여 우리를 침략하니 하늘이 무심치 아니하고 열성조께서 돌보시어 오랑캐를 멸하였으나 우리 백성들의 고통이 너무 심하니 여기서 추격을 멈추고 휴전코자 함이니 제장은 짐의 뜻을 따라 주기 바라오"하였다.

 

전일 을지문덕은 요하를 넘어 수군을 추격하는데 급히 서둘지 않았다. 수양왕은 이미 멀리 달아나 잡을 수가 없고 요하를 건너온 수군을 9군이 전멸하였으나 요동고성에는 수십만이 남아 있다가 수왕을 호위하여 달아났다. 급히 추격하다가 수군의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함이다.그러나 패전으로 의기소침한 수군은 고구려군의 적수는 안되었다. 장차 수의 동도를 포위해서 함락하면 수양왕을 능히 사로잡을 수 있으니 수군이 고구려 원정군의 뒤를 끊지 못하도록 고구려 본국에서 후속 지원군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왕검성의 백제를 막고 있는 防衛 兵力은 十萬에 미치지 못하는 수도 방위군에 불과하였다. 수와 백제는 후방 병력의 감축만을 노리고 있는 터에 후방 지원군의 지원 출병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원수 강이식장군 등과 상의한 결과였다. 수 양왕은 고구려가 후방을 비우고 추격해 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전후 사태를 수습한 후 다시 고구려 원정군을 징발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다음해 9월 수 양왕은 위문승을 병부상서에 제수하고 서경에 머물러 代王을 보필하라고 하고 우문술은 전일 살수 대전에서 실패한 것은 군량관의 실수로 양식이 떨어져 패한 것이고 우문술의 잘못이 아님에 관직을 회복한다 하여 다시 대장군을 임명하여 楊義臣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진격하라 하니 광녹대부 곽영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랑캐가 신하의 예를 아니한다 하여 만승천지가 작은 적과 싸우는 것은 옳지 못하옵니다."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광녹대부 王仁恭은 부여도로 나아가 新城을 공격하라 하였다. 왕인공은 10萬軍을 이끌고 신성(평양을 수호하는 위성, 지금의 심양 北 百里 지점. 신성자)을 공격하니 고구려군 수만 명이 항거하다가 성을 버리고 영성으로 후퇴하였다. 장군 우문술과 상장군 양의신의 20萬군은 평양을 공격하기 위하여 선착으로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지난번과 달리하여 높은 누각을 성안을 볼 수 있도록 지어 거기 사다리를 걸쳐 사면에서 공격하여도 고구려군은 임기응변으로 방위하여 20여일 을 특별 연구한 방법으로 공격하여도 성은 함락하지 아니하고 사상자만 늘어났다. 요동성은 오래도록 아무리 공격하여도 함락하지 아니하니 수 양왕은 백만 개의 포대에 흙을 넣어 쌓아 올려 성벽보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보며 공격하여도 고구려군은 용감하게 방위하였다.

 

수 양왕은 이번에도 민부상서 樊子皆로 하여금 동도 수비를 도우라 하고 친히 요수를 건너 요동성 공격에 직접 참여하였으나 물자와 인명은 아끼지 아니하고 대량 투입하여 강공하였다. 그러나 피해만 누적할 뿐 어찌할 수 없었다. 1월에서 6월까지 같은 방법을 다하여도 성공을 못하고 40도의 뜨거운 여름 볕에 열병이 만연되니 수양왕은 이번 세 번째 출병에 앞서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고구려 조그마한 것들이 상국을 업신여기니 이제 바다를 말리고 산을 옮기는 일도 해치우는데 하물며 작은 것들이랴! (高麗小虜侮慢上國今拔海移山猶望克果?以虜乎)"하며 대군으로 깔아뭉개 버리겠다고 큰소리치고 총공격을 하여도 고구려는 끄떡도 하지 아니하였다. 지난날의 패전의 원인은 양식이 떨어져 진 것이고 군사를 배불리 먹이면 고구려를 파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더욱이 신라 백제의 배후 협공이 있음으로 고구려는 반드시 항복할 것으로 믿었으나 결과는 또 다시 패전의 비극이 닥쳐 왔다. 장차 추위가 닥쳐오면 군량미가 떨어질 형편이고 돌아가려 하니 고구려의 추격을 받아 또다시 전멸의 비극을 맞게 될 것이니 進退兩難이다.

 

그리고 이대로 패전하고 돌아가면 무슨 낯으로 백관을 대하며 고구려가 깊이 추격해 오면 나라안 인심이 급변할 것이니 사직을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근심에 잠겨 있노라니 본국 도성에서 사자가 와서 변고가 있다고 전해 왔다. 수 양왕은 퇴군할 명분을 얻었다. 이 때 중원에서는 거듭되는 징병과 식량의 징발로 이재민이 무수히 생겨 도적이 4방에서 일어나니 그 수가 많은 자는 10여만 에서 적게는 수 만 명에 이르니 산동민의 고통은 격증하여 평화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예부상서 초공 楊玄感은 항상 그 친지에게 수 양왕의 황음무도하고 백성을 혹사하고 무고한 전쟁으로 죽이는 자도 부지기수라 수나라는 오래지 않아 멸망할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하루는 그의 친지와 상의하였다. "지금 4방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양왕 광은 전쟁을 그치지 아니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고구려에 출정하고 없는 틈에 양왕을 토벌함이 어떠한가?"하였다. 李密이 말하였다. "천자는 멀리 출정하여 유주 천리밖 요동에 가 있으니 공은 불의에 군사를 일으켜 멀리 ?洲에 들어가서 그 인후를 끊으면 고구려가 이를 알고 추격해 올 것임으로 불과 수일에 양식이 떨어져 항복하지 아니하면 궤멸할 것이니 싸우지 아니하고 광을 잡을 수 있을 것이오." 

 

"그 다음은 어떠한가?" 이밀이 말하기를 "관중성지는 천부지 요새지라 비록 위문승이 지키고 있으나 그까짓 상관없으니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북을 울리며 나아가 서쪽으로 돌아 성을 치지 말고 곧바로 장안을 취하여 그 곳 호걸 인사들을 수용하고 그곳 백성들을 위무하여 험지에 의거하여 지키고 있으면 천자가 비록 돌아와도 그 근본은 잃었으니 가히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다음 또 어떤 계책이 있소." 이밀이 말하기를 "간병 배도하여 동도를 습취하여 4방을 호령하고 단지 고수하면 만일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와도 백일을 버티어 저들이 이기지 못하면 천하 병마가 사면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 다음은 이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오"하였다. 현감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지금 그 하계가 오히려 상책이오. 지금 백관 가솔이 모두 동도에 있으니 이 곳을 선취하면 족히 인심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요."하고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향하여 나아가 동도를 포위하였다. 양현감은 폭군을 축출하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백성을 잔학한 隋 楊王 廣의 폭력에 가담케 하는 것이 싫었다. 그는 높은 도덕성을 가진 학자이기도 한 인물 이였다. 이밀이 말한 첫째 계책이 가장 확실하나 남의 나라의 힘을 빌어 동족을 상하는 것을 꺼렸다. 동도를 포위하고 고구려로 하여금 양광의 뒤를 엄습케 함도 쉽게 대사를 정할 수도 있으나 그 일을 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수양왕이 본국의 반란으로 중도에 퇴군하는 것을 그들이 퇴군한지 3일이 지나서야 첩보를 받았다. 수왕은 경오 밤 2시경에 제장들을 모아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도록 명령하고 모든 물자를 버리고 조용하고 신속하게 철수하라 하니 버리고 간 수군 물자가 산과 같이 버려졌다. 고구려군은 수군이 회군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 않고 있었다. 수군은 양식이 충분하였고 그간 싸움에서 크게 손실을 입는 일도 없었다. 뜻밖에 후퇴하니 필연 무슨 사술을 부리는 것으로 추측하고 요하를 미처 건너지 못한 만 여명이 후군을 격살한 후 추격하지 않고 퇴군한지 2일이 지난 후에야 수 만 명으로 조심조심 시험적으로 추격하여 보니 벌써 8, 90리 앞서 갔고 요하는 건너지 못하고 뒤쳐진 낙오병 수 천명을 격살하고 돌아갔다. (隋軍詐之經二日乃出數千兵追?畏隋軍之衆不敢逼常相去八九十里將至遼水知御營畢度乃敢逼後軍時後軍猶數萬人高麗隨而招擊最後羸弱數千人爲所殺略 {鑑記})

 

이리하여 수왕은 자칫 휘하 수십만 군이 몰사할 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고구려군은 이번에야말로 수 양왕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감쪽같이 속이고 은밀히 조속 철수한 수양왕은 상상밖에 큰 인명 손실 없이 반란군에 대처하였다. 양현감은 수 양왕의 퇴각을 고구려에 알려서 즉각 추격케하면 수군은 전멸할 것이나 타민족과 손잡고 동족을 해칠 수 없었다. 수 양왕의 그와 같은 신속한 철수로 동도 공략에 실패한 양현감은 운명으로 체념하였다.  

 

양현감이 예양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유원진이 호응하여 기병하고 수양왕이 재차 삼오병(三吳兵)을 징발할 적에 그들은 서로 이르기를 '지난해 천하 전성시에 우리들의 부형들은 고구려 정벌에 나가서 태반이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이번 또 다시 징발하니 우리들은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이다.'하고 도피하였다. 그러다가 많이 잡혀 죽었으나 이번에는 유원진이 반란 거병한다 하니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帝再發三吳兵征高麗三吳兵皆相謂曰往歲天下全盛吾輩父兄征高麗者猶太平不返不己罷弊復爲以行吾屬無遺類矣由是多亡命郡縣捕之及聞元進擧兵亡命者雲集旬月間衆至數萬 {鑑記}) 수양왕은 돌아와서 출정군 장수 우문술 내호아 등을 시켜 양형감을 공격하게 하였다. 양형감은 동관에서 패하고 그 동생이 죽였다. 수왕은 唐公 이연을 홍화유수에 임명하였다. (帝引軍還遣于文述來護兒等擊楊玄感敗死以唐公李淵爲弘化留守 {綱易}) 수왕은 무자비하게 항복한 반란 가담자들을 학살하고 생매장한 자만도 3만여인이였다. 수왕은 공포 정책으로 모든 소요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양현감은 수양왕이 그와 같이 빠르게 돌아올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신라 백제에게 후방을 위협받아 수양왕의 뒤를 전혀 추격하지 못하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수양왕은 후고의 염려없이 고구려를 대비할 필요없이 마음놓고 반란군을 공격하여 진압에 성공하였다.

 

三十六. 고수대전장(高隋大戰場)의 위치와 수양왕의 죽음

 

국정이 안정된 후 갑술 10년 봄에 다시 천하에 징병령을 내려 고려 정벌에 나섰다. 태사령 유(庾)가 간하여, "백성이 너무 피폐하니 관내를 진무하고 三 五년간 농상(農桑)에 힘써 四海가 풍요로이 된 연후에 널리 살피시옵서."하였다. 수왕이 노하여 하옥하였다가 죽였다.

 

廟議에서 나온 백관은 요동 출병 명령에 며칠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十年春二月詔百僚議伐高麗數日無敢言者수서) 우후위 장군 주천 조재 간하여 가라대 "지금 백성은 피폐하고 창고는 비여 있고 도적은 점점 더 많이 일어나니 경사로 돌아가서 억조 창생을 편하게 하옵소서."하였다. 모든 신료들이 출정을 반대하였으나 수왕은 결의가 확고하여 더 이상 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정 백관은 아무도 전쟁에 이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수양왕을 둘러싸고 있는 장수들은 수차의 패전수치를 씻고저 출병을 서둘렀다. 앉아서 고구려군에게 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함이다. 그것은 그들군벌들도 수양왕과 같은 운명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고구려가 수를 침공해 오면 수의 인신은 거국적으로 고구려에 대항하여 싸우기 보다는 수양제가 망해야만 백성이 살아남을수 있다고 믿기 때문으로 四方에 내란이 일어날 형편에 있음은 필연적 사실이었다. 그러하니 수가 망하면 그 일당은 살아남지 못함을 인식하고 있음이다. 수양왕 일당은 고구려를 정복할 수 없음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선수로 침공하여 기세를 약화 시키는 것이 고구려 침공의 이유의 하나이오 수가 아직도 고구려를 침공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그 둘이요, 백제와 신라에 수의 강대함을 보여 게속해서 수를 두려워 하고 따르게하여 고구려와 함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 셋이다. 이러한 모략은 요동출병을 아니 할수 없는 것이었다. 건절위 임종(建節尉 任宗)이 상서 극간하니, 수왕은 즉시 조당(朝堂)에서 곤장으로 쳐서 죽였다. 봉신랑 취면성이 건국문에서 표를 올려 간하다가 수왕이 노하여 斬首하였다. 수왕 일행이 기수에 이르니 봉신랑 왕애인(奉信郞 王愛仁)이 다시 표를 올려 서경으로 돌아가도록 간하였다가 또 斬首하였다. 그해 7월에 수양왕이 희원진에 이르렀을 적에는 이미 천하가 어지러웠다. 징병도 제때에 요동으로 모이지 않고 내호아대장군은 필사성(畢奢城)에 이르러 포위한채 그냥 통과하고 평양성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수양왕은 징집한 각군 병력은 오지 않고 공성준비하는 병력을 준비도 다 하지 못한채 성을 치니 공성 병력은 사상자가 심하여도 보충이 안되니 수왕은 멀리 회원진(懷遠鎭)에서 백만 병력이 총집결한 후 요동으로 본거지를 옮겨 독전하고자 했으나 중원의 각지 반란으로 그가 계획한 공성군 백만은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수양왕은 來護兒 원수(元帥)를 반사하라 소환하였다. 중원내의 반전 세력이 심상치 않고 고구려 평양성 함락은 요원하니 불안하여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이 때 수양왕은 감히 수하에 있는 수십만 병력으로는 요동에 들어가지 않고 내호아의 일군 20여만이 철수하면 되니 큰 손실 없이 신속 철수할 수 있었다.

 

처음 내호아는 이제 공격하면 평양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 후군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철수하기로 했다하니 후속 부대의 도착하지 않는 사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철수를 주저하고 있으니 장사취숙군이 만일 반사하라는 어명을 어기면 문죄할 것이다 하고 여러 부장들에게 선언하니 내호아는 회군하였다. 내호아는 중원의 내란 사건을 점차 짐작하고 거기에 버티고 있다가 수양왕이 돌아간 후에 대세를 보아 처신하고자 반심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백만 대군으로도 평양성 함락을 못했던 것을 후군이 안 오는 형편에 외로운 단독 군단으로 고구려와 싸워 이기겠다고 장담하는 내호아의 태도에 장사(長史) 위숙은 그가 딴 마음이 있다고 짐작하고 설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 부장들에게 큰 소리로 그와 같이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중원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고구려 출병을 반대하는 반란과 분열이 시작되었다. 지난번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가 고구려와 통모하면 일거에 수 양왕을 잡을 수 있었는데도 일차 수양왕의 요동 정벌에 백만의 수나라 출정 인원이 수 양왕의 무모한 고구려 침공으로 목숨을 잃은 비극을 생각하니 이번에 수양왕을 잡기 위해 고구려와 협공하면 다시 지난번의 百만 대군이 몰사하는 비극이 재연될 것임에 남의 나라를 연합하여 동족을 죽일 수 없다는 선비 정신이 오히려 자신은 망하고 말았으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함께 거사한 이밀(李密)은 자기의 계책 중에 상책을 채택하지 않고 실패하니 다시 사방의 호걸을 모아 수왕의 무도하고 백성을 잔학한 부도덕을 들어 격문을 4방에 보내면서 말하기를, "양왕 광(煬王 廣)의 죄는 죽서에 쓰면 남산만큼 높고, 그 죄악은 파도같이 많아 동해로 흘러가도 못 다할 것이다."하였다. 산동 일대에 널리 불려지는 요동낭사가(遼東浪死歌)는 全中原에 퍼져 백만 生靈의 비극을 그 유족들이 불러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양왕은 이 노래를 부르는 자를 잡아 죽였으나 더욱더 퍼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수 양왕의 명분 없는 전쟁의 희생은 백성들의 반항으로 이밀의 거사에 너도나도 운집하였다. 낙양 북쪽에 있는 낙창(洛倉)의 동도병을 공파하고 자칭 위공(魏公)이라 하고 하남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고 양사도는 조음 홍화 연안등 여러 고을을 점령하여 양 황제라 자칭하고 이연(李淵)은 돌궐을 치라는 수 양왕의 명령을 받아 군사를 일으켜 병권을 잡고 돌궐에게 甘言利說로 화친을 청하여 돌궐과 손을 잡고 세를 확장하여 唐王을 자칭하고 이밀과도 연계하여 각지 군현을 공략하여 낙양 장춘궁(長春宮)에 웅거하고 세자 건성(建成)은 유문정을 장수로 하여 왕장해 등 여러 장군을 영풍에서 주둔하게 해서 군량창과 동관(東關)요세를 지켜 東方兵(高句麗)를 대비하고 이세민(李世民, 후에 당태종)을 장수로하여 유홍기 등 여러 군은 위북(渭北, 황하 상류)을 지키게 하고 고구려를 경계하였다. (淵遣世子建成劉文靜帥王長諧等諸軍屯永豊倉守潼關以備東方兵世民帥劉弘基等諸軍徇渭北) 당왕은 수 양왕은 망할 것을 전제로 무시하고 두려운 것은 고구려의 침입이었다.

 

수 양왕은 또 다시 요동 원정군을 일으키고자 군신들을 모아 징병을 강요하였다. 이 때는 수 양왕의 요동 출병은 고구려 군에 屠戮당하러 가는 것과 다름이 없이 가면 돌아오지 못하고 운량의 어려움과 직간접적 재해로 여름 혹서와 겨울 혹한에 굶어 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는 일이 허다했다. 그러므로 인명을 초개와 같이 죽음으로 몰아 넣고 출병을 말리는 신하는 곤장으로 쳐죽이고 목을 잘라 죽이고하여 군신의 간하는 입을 막고 출병을 강행하였으나 수 백만 명의 생령과 수천 척의 대소 선박과 수만 대의 전차 기계와 산과 같이 쌓아올린 피복 군량의 전지 비축 물량을 모두 괴멸당하고 탕진하여 당시 인구의 큰 비중에 해당하는 중원 장정을 잃고 물자는 고갈하여 민간에서 징발한 차용 물자도 갚을 길이 없고 하여 인심이 흉흉한데 고구려의 침공이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였다.  

 

백제 신라의 후방 견제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안심할 수가 없었다. 고구려에 출병하는 것은 그것이 곧 고구려 군의 보복 침입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수 양왕은 이제 고구려에 대한 무력 정벌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백제 신라가 강성하여 삼면 협공을 할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고구려가 백제 신라와 통일 화해하고 군사를 일으켜 수를 침공한다면 수는 4방에 반란이 일어나서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중원 정복은 쉽게 이루어질 것임으로 수 양왕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다. 수 양왕으로서는 고구려 정벌 명목의 징병은 불가피한 것이였다. 한편으로는 신라 백제에 위엄을 보임으로서 조선 통일을 막아야만 했다. 이에 국민은 반발하였다. 민간에 이르기를 '임금이 사람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으니 천하 만민이 또한 죽음으로 반대한다. 저 요동의 구슬픈 노래는 애처로와 발해의 맑은 밤에 꿈을 깨어 잠 못 이루니 서합의 인정이 이와 같으니 어찌 혼자서 천도라 할까!' 여기 천도란 군왕의 도리를 이른 것이다. (天子以人之死爲樂天下亦必以死反之彼遼東之歌哀淸夜江都之夢微於西閤人情實然豈獨天道 {隋書}) 이와 같이 민심은 완전히 이탈하고 요동에 출정하는 것은 그것이 곧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온 나라안에 퍼졌다. 관가에서도 처음 요동낭사가를 부르는 자는 잡아서 처형하였으나 널리 퍼져 부르는 국민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어 포기하였다. 여기서 그간 여수대전(麗隋大戰)에 관계되는 지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當初에 麗隋大戰은 요동 요서에서 있었고 조선 반도에 관하여는 신라 백제가 후방을 공격한 것뿐 수가 조선 반도에서 고구려와 싸운 기록은 없다. 다만 신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자는 표문을 수양왕에게 올려 이를 동의했다는 기록뿐이다. 이 때 신라 진평왕 30년 수양왕에게 군사를 일으켜서 고구려를 치자는 표를 올렸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고구려가 수와 싸우는 틈에 신라는 고구려땅 오백리를 약취 회복하였다.

 

一. 패수는 옛날 秦나라가 설치한 空地에 속한다.(浿水屬秦故空地) 여기 공지라는 것은 지금의 하북성 요서 지경에서 산동에 이르는 곳이다.

二.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에 요동은 멀어서 지키기가 어려워 요동의 옛 요세(要塞)를 수리하여 패수를 국경으로 하였다. 즉 진시황 당시 설치한 국경이다. (漢興爲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敗水爲界 한서)

三. 옛날 위만이 천명의 무리와 함께 국경을 넘어 진나라의 옛 공지에 있는 패수를 건너 도주하였다. 상하장(上下障) 가까이의 진번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에 속한다. (滿亡命聚黨千余人椎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屬秦故空地上下障梢役眞番朝鮮之都王儉城 {書傳}, {漢書}에 있는 기록) 상하장은 하북 운장이다.

四. 浿水의 支流인 ?水는 하남소현에 있다. (?水在河南召縣爲浿水的支流)

五. 패수는 요동 색위 임유관 유림관 서에서 나와 남으로 낙랑군현에 이르러 서로 바다에 들어간다. 낙랑에는 운장과 요동험독현 조선왕 옛 도읍지가 있다. (浿水出遼東塞外西而至樂浪郡縣西入海 樂浪有雲障遼東險察縣朝鮮舊都也 {東越列傳}) 險察은 山東省 平洲이다.

이것은 浿水와 樂浪郡의 位置를 동시에 서술한 歷史 地理志 記錄이다. 따라서 지금의 난하가 浿水이다.

 

다음은 살수를 살펴보자

 

一. 살수는 요동군 사성동북오백육십리 지점에 압록강 동쪽이며 평양서쪽에 있다. (薩水在遼東郡司(蛇)城東北五百六十里鴨綠江東平壤西)

二. 압록강을 건너간 수나라 군은 동으로 나아가서 살수를 건너 평양성을 삼십 리터에 이르렀다. (進東濟薩水去平壤城三十里以土 {隋傳}, {鑑記}) 이와 같이 살수는 평양성 서쪽에 있고 수군은 동으로 나아가서 살수를 건너 평양성으로 향하였다.  

 

다음은 압록강이다.

 

一. 옛날 유명한 시인 주희 가라대 여진은 압록강을 근거로 일어났다. (女眞起據鴨綠江)

여진 숙진 오손 오환 선비등으로 불리는 동이족의 대표격인 부여족의 발상지가 흑룡강에서 송화강에 이르는 지역임은 여러 사서에 나타난 사실이며 흑룡강 송화강의 본류 혹은 지류를 압록강 압록수로 지칭하고 요하 또한 그러하였다. 마자수를 압록수로 지칭한 것과 같이 전술한바 압록은 푸른 강물을 형용한 것이 였음인데, 요동에는 당시 漢式 지명이 드물었고 강들의 漢式 명칭이 없음에 그들의 역사 기록에 어느 강이든 필요에 따라 압록강이라 지칭한 것이다. 조선 반도에는 그러한 지명은 아직 없었던 시절인 것으로 조선 반도는 중원의 여러 민족간에 이해 관심밖에 있는 벽지였고 새로이 탄생한 신라와 백제 분국은 수당이 고구려와 싸우는데 후방 교란의 이이제이(夷以制夷) 정책에 이용한 것뿐이고 그 위에는 중원의 각 민족과 북적으로 불리는 여러 민족들도 고구려의 동족이 조선 반도에 약간 있다는 인식뿐이었다. 조선 반도에 있는 지금의 압록강도 조선 초기까지 확정된 강명이 없고 위화강, 압록강 등으로 임의 호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양의 명칭도 역시 허다하다. 조선 반도에 있는 지금의 대동강변 평양은 당나라 이전의 중국 역사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 수나라 당시의 평양 위치를 본다.  

 

二. 평양은 곧 왕검성이다. {漢書 集解}에 심흠한이 가라대 '명지 해주위는 본래 옥저국의 땅인데 봉천 행성현 또 봉천 계평현 고려국 계모성 또한 그 땅이며 낙랑군 옛 조선국이다. 여기 봉천이란 심양의 별칭이고 개평은 개원이며 개모성은 개원 옆에 있는 수호성, 즉 건안성이다.'

 

三. {삼국사기}에 '평원왕 28년에 평양을 환도성에서 장안성으로 옮겼다.'하는 기사가 있다. 지금의 평양을 장안성이라 한 적은 없다.

 

四. 전술한 바 '백산에서 나온 물의 色이 오리머리같다'하여 '압록이라 하고 나온 압록수가 염난수와 합쳐 安市城을 거쳐 바다로 들어가는데 평양은 압록강(마자수) 동남에 있고 서남으로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간다.'했다. 환도성이라고도 한다. 서안평은 요하의 서류변이다. 안시성은 사평시와 개원시 사이에 있다. 安市城은 개평 북70리 故墟에 있다. (四曰 {史記} 地理志)

 

五. 엄류수는 압록강 상류이다. 불류수 보술수 모두 명나라 시대에는 파저강이라 하였다. 지금의 훈강이다. (奄流水 鴨綠江 上流 불流水 普述水 明代 稱婆猪江今日之渾江, 魏書 叢書)  

 

六. 요동군 사성 동북 560리의 압록 강변에 평양이 있는 것으로 역지록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의 요양시가 평양이다. 上記二項平壤則王儉城漢書集解沈欽韓曰明志海洲衛本沃沮國地今奉天海城縣又奉天盖平縣高麗國盖牟城亦其地樂浪郡故朝鮮國也上記四有馬?水西北入鹽難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鴨綠水歷國內城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而平壤在鴨綠東南西南至西安平入海

 

이상은 隋가 高句麗를 치고자 數年間 高句麗 地理를 연구하고 輸送路를 改設하여 철저한 조사와 실측을 거쳐 개전한 것으로 이설(異說)의 餘地가 없는 것이다 . 지명은 확실한 고증없이 추상적으로 적당하게 꾸며 넣으면 그것은 곧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양상을 사실이 아닌 방향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으로서 과거 식민 사관을 고구려의 영토와 국력을 축소표현하기 위하여 고수대전장을 조선반도에 끌어들어 마구잡이로 요동에 있는 고구려 지명을 조선반도에 갖다 부치는 어처구니 없는 오류를 범하였다. 당시의 수나라 출병 상황에 수반한 시간관계 수송일정 등등을 수나라의 기록과 기타 여러 역사기록을 살펴보아도 조선반도서 전쟁했다는 것은 지명 관계를 떠나서라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불가능 한 일이다.  

 

패전으로 수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통치 능력을 잃었다. 그의 옛 동족인 돌궐도 등을 돌렸다. 수 양왕이 군사를 징발하면 요동 사지로 간다 하여 회피하고 도적떼로 변하고 집합지인 탁군으로는 결사적으로 모이지 않았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다만 이 시기에 다음 당나라 시대를 열고자 하는 이연과 이세민의 무리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나 두려운 것은 그들 또한 고구려였다. 고구려가 백제 신라와 손을 잡고 통일한 후 중원을 공략하면 분열 상태에 있는 중원 동북의 고구려 고토는 말할 것도 없이 중원 전체를 점령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였다. 당시 중원에서 황제와 왕을 일컫는 군벌들 중에서도 唐王 이연과 이세민이 가장 동북 사정에 정통하고 그 역시 북적(北狄) 출신으로 중원에서도 문무의 학업을 닦고 출세를 하였으나 고구려 조선족과 옛날에 접촉이 많았고 수 양왕 부자를 따라 요동 출전도 하였기에 고구려의 강함을 인식하고 누구보다도 東方 방위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그간 우리나라 역사 기록의 地名과 地域의 位置에 관한 기록의 오착된 原因이 된 三國史記의 기록을 잘못 해석함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古記에 이르기를 평양을 장안으로 천도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처음 중국 북쪽에 있었는데 점차 東으로 옮겨가서패수가로 천도 하였다. (즉 요동의 영주) 또 당나라가 신라의 원조와 협역으로 고구려를 정복하여 발해 말갈 등의 그 많은 땅이 당나라 영토로 들어왔다. 신라도 역시 그 남쪽 영토를 점령하여 한주 삭주 명주의 삼주 및 그 군현을 설치 함으로서 九주를 갖추었다. 古記云 自平壤移長安高句麗始居中國 北地則 漸東遷于浿水之側 渤海人武藝曰昔 高麗盛時士三十萬抗唐爲敵則可謂地勝而兵强至于季未君臣昏虐失道大唐再出師新羅援助討平之其地多入渤海靺鞨 新羅亦德其南境以置漢朔溟三州及其郡縣以備九州焉 이와같이 [고구려는 패수이동 발해변과 요동 만주의 광할한 영토를 영유하고 당나라의 침략에 三十萬정예군사와 지리의 잇점을 가지고 당나라의 침략자를 파멸 시겼다.] 

 

이와같이 고구려는 그 국토가 혹한 혹서의 기온차가 많은 지방이였으나 산이 험준하고 물이 깊으며 평야가 넓어 지키기에 좋은 여건이 구비되고 농업과 목축에 유리한 광활한 평야를 갖어 남자는 어려서부터 마상에서 적과 싸우는 훈련을 쌓았다. 한서 지리지에 기록하기를 요동군은 낙양에서 三千六百里 지점에 있고 속현으로 무려가 있으니 즉 주례 북진이 무려山이다. 대요(大遼)제국 시대에는 그 밑에 의주(?州)를 두었다. 거기 현(縣) 이삼개가 있는데 그 하나가 고구려 현이다. 즉 주몽이 도업지로 정했다는 휼승골성 졸본이며 현도군계(界)이고 훗일 대요국 동경의 서쪽이다.(漢書志云遼東郡距洛陽三千六百里屬縣有無慮則周禮北鎭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玄?郡距洛陽東北四千里 所屬三縣高句麗是其一 焉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 卒本者蓋漢玄?郡之界大遼國東京之西  

 

옛날 대요제국이 망하기전 대요 황제가 연경에 있을 적에 우리가 초빙되어 입조하는데는 동경을 거처 요하를 건너 이 틀길을 가면 이주에 도착한다고 하였다.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京則五入朝撞者過 東京涉遼水一兩日行至醫州) 이상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원류인 부여국의 수도는 처음 창업지가 지금의 장춘이 합치하고 심양 근처에 있는 부여 고허(古墟)는 그 후 천도한 곳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 주몽天王의 창업지 휼승, 골성, 졸본은 지금의 봉천에 합치하고 당시의 평양성은 개원에 합치한다. 여기서 부여국의 위치를 살펴 보면 부여국은 현토 北쪽 千里며 南으로 고구려와 동으로 선비와 접하고 北에는 약수가 있다. (夫余國在玄?北 千里南與高句麗東與把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後漢書) 영주 유성현 동남에 요락수 즉약수 이다. (營州 柳城縣東南有饒樂水卽弱水也 通典) 심흠한이 가라대 일통지에 봉천부 개원현이 부여국 땅이다. 

 

(沈欽韓曰一統志奉天府開原縣扶余國地) 고구려는 개마산 동쪽인데 개마현은 현토군에 속하며 그 산에 지금의 평양성이 있고 서쪽에 평양 즉왕금성이 있으며 명지 해주위는 본례 옥저국 땅이라 지금의 봉천 해성현이고 또 봉천 개평현 고려국 개모성 역시 그곳이다. (高句麗蓋馬大山之東蓋馬縣名屬玄?郡其山在今平壤城西平壤卽險城也 [集解沈欽韓曰明志海州衛本沃沮國地今奉天海城縣又奉天盖平縣高麗國盖牟馬城亦其地] 북 부여는 장성 (萬里長城) 북이며 북에는 약수가 있고 즉 지금의 송화강유역 일대이다. (北扶余在長城北北有弱水卽北扶余當在今第二 松花江之地, 魏書 三國志) 지금의 부여국은 즉 예맥의 옛땅이며 장성의 북에 있다. 지금의 성경(長春)에 있으니 압록강 지역에 속하고 조선고성 만포성 지경안이다. [여기 압록강이란 송화강이 해당된다.] (今扶余國卽濊 故地也在長城北 在今盛京鴨綠江屬朝鮮高山城滿浦城境內, 山海? 郭璞注) 이와 같이 부여 고구려는 중원의 하북 산동의 동북지역과 요동 만주에 걸쳐 광범한 영토를 영유하고 있었다. 백제는 전술한바와 같이 중원의 하북에 있는 하남 지역에서 산동 절강의 월주(상해지역)에 걸쳐 공손도 왕국과 중원에서 병존하고 조선반도 서부지역과 왜국중부지역 (교도 나라)을 관활 하였다.
 

신라는 조선반도 동부지역에서 만주 동남부에 이르는 영토를 보유하고 고구려 백제에 비하여 적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한때 조선반도의 남평양까지 그리고 함경도까지 광개토대왕 시절 점유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조선반도를 관활 하기위한 일시적 현상 일뿐 고구려 영토라 할수 없고 조선반도에 있는 고분을 단군성조의 분묘로 단정하고 개촉봉현 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 진실을 믿기 어려운 처사이다. 그러한 문제는 보다 신중하고 깊은 연구가 있어야지 쉽게 민족적 대사를 경솔히 단정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여기에 그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유를 들어본다. 단군 성조는 그내력이나 치적에대한 기록이 없어졌다고 하나 고대 사기에 단편 적으로 나오는 기록 들과 단군기선 二百年전 시대의 치우천왕의 행적과 약 二千년전 위에서 기록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했다.
 

(이 시대에 조선반도에는 아사달이 없었고 지명자체가 없었다.)는 것과 우리 동이족은 시베리아 지역 즉 북방민족이였슴을 감안 한다면 도읍지 아사달이 만주 북녘임을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정착한 영토가 중원의 황하를 중심으로 한족의 우순과 조선의 단군제국이 東西로 갈라져 관활 하였다는 사실은 많은 고사 기록들이 명백히 하고 있는바 특히 황하변 기주 지역의 대부분을 단군에게 양도 했다고 우순의 四죄라고까지 비난한바 그 옛날에 인적이 없었던 것으로 추상되는 조선반도에 단군성조의 분묘가 어찌 있을 수 있으랴 이역시 조선반도에 다 동이 조선족의 본국을 같다 놓는 식민사관의 잘못된 발상이 아닌가 한다. 단군제국의 뒤를이은 고구려도 조선반도에는 없었는데 그 옛날의 단군성조 묘가 어찌 조선반도에 흔적인들 있을 수 있으랴 단군 제국은 약 二千年간 계속 되었으니 그 정확한 대수와 연대는 알수 없으나 누대 천왕이 모두 단군으로 통칭 하였으니 평양이나 강화도나 조선반도에 있는 유적이나 전설은 누대 단군중의 한위일 것이고 옛단군의 관경비가 요하변 서남쪽에 있었다는 기록도 참고이니 시조단군성조를 조선반도와 고정하여 연관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느 시대엔가 조선반도에 중원으로부터 이주한 조선족이 신위를 뫼셔와서 재향한 것으로 보여진다.
 

단군성조께서 백두산 단목하에 하강하사 건국을 선포했다는 것도 장백산 백두산도 압록강 평양등과 같이 북만주에 있는 지명이며 조선반도에 훗일 영산영지에 같은 지명으로 그곳에 와서 성스러운 산천에서 천재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요동에서 고구려에게 연이어 참패한 수양왕은 그의 陸海軍 모든 것을 걸고 고구려와 최후의 승부를 거는 결전을 할 각오를 하였다. 그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고구려와 대전에 임하도록 노력하여도 요동 출전을 기피하는 국민이 따르지 않았다. 불복하는 국민을 공포정치로 통제하였다. 그러나 이미 통제력을 상실한 수왕은 고구려가 일단 침공하면 항거할 능력은 없었다. 당왕은 이에 백제와 긴밀히 친교를 추진하여 고구려를 배후에서 위협하도록 조종하였다. 이러한 중원의 통제 불능 상황에 수양왕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주색으로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수왕은 강도에 머물고 있었다. 장안에서 그를 따라온 신료장상들은 패전으로 意氣銷沈하고 장차 고구려를 정복할 아무런 희망도 없고 언제 고구려가 보복 침공할지 모르는 위험 속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나 수양왕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大小 臣僚들 중에는 고향 처자가 그리워 도망가는 자가 많아 기마로 추격하여 참수하였으나 그치지 않았다. (多關中人久客思鄕里見帝無西意多謀反歸鄕將竇賢遂師所西走帝遣追斬之而亡者猶不止) 수왕은 그의 심복 호분낭장 사마덕감을 호위대장으로 삼아 거느리고 주위에 두었으나 국내에는 인심이 이미 수 양왕을 떠나 언제 수나라가 망할지 위험이 목전에 다가 오고 있었다. 이때 당왕 이연과 이세민 등은 능히 수를 멸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시군(弑君)의 오명을 면하고자 은근히 다른 손을 빌어 수왕을 처치할 것을 획책하고 있었다. 독고덕감은 수가 망하면 심복인 자신은 滅族之禍를 당할 것임으로 불안하였다. 
 

同僚輩友 이효상 원민 조행 맹병부 이복우 허홍인 설세랑 장계 양사랑 등 여러 장군들은 고구려가 쳐들어오기 전에 양왕을 처치해야만 살 수 있음으로 반란 모의가 계속되었다. 궁인을 통해 들어오는 반란 소문에 궁안이 떨고 있었으나 수왕은 그런 말을 하는 자를 斬首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군사 수 만 명이 성밖에 집결하였다. 성밖에 거화(擧火)하고 성내가 호응하여 반란이 실행되었다. 처음 수 양왕은 "성밖이 왜 이리 소란하냐?"고 물으니 성밖에 주둔한 군사들이 "실화입니다."라고 고하였다. 반란을 입에 담는 자는 모두 참하니 아무도 실상을 고하는 자가 없었다. 한 번은 술에 만취한 수 양왕은 거울을 보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의 좋은 머리와 목을 누가 자를 것인가?" 그 말을 들은 簫皇后가 깜짝 놀라 "그 무슨 말씀이오?"하니 수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인간은 귀천고락이 바뀌는 것이니 무엇을 상심하랴!"하였다.
 

이 때 어영군도 반란에 가담하였다. 낭장 사마덕감(郎將 司馬德戡)이 군사를 이끌고 현무문으로 들어가고 배우통이 칼을 빼어 들고 궁밖으로 수왕을 나오게 하여 시립하였다. 수왕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고!"하였다. 옆에 마문거(馬文擧)가 말하기를 "패하는 종묘를 버리고(수왕은 종묘가 있는 장안을 떠나서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항상 동도에 아니면 강도에 주류하고 있었다.) 돌아다니며 전쟁과 유흥을 그치지 않고 밖으로 남의 나라 정벌에 힘쓰고 안으로는 사치와 음탕하고 사방 민중은 생업을 잃고 도적떼가 일어나며 독재자가 되어 고구려 출병을 하면 안된다고 간하는 것을 막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는 말이요!"하였다. 왕은 "이것이 모두 백성과 너희들의 영화를 위함이다."하였다.
 

양왕의 愛子 조왕은 이때 나이가 十二세였다. 수양제가 사랑하여 항상 옆에 있었다. 놀라서 울부짖으니 배우통이 칼로 참수하여 목이 땅에 떨어지고 피가 수왕의 옷을 적셨다. 다시 왕을 참하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자고로 황제는 죽는 법이 있느니 독주를 가져오라."하였다. 문거 등이 허락하지 않고 목을 졸라 죽였다. 이와 같이 수양왕은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가 당시 불가능한 고구려 침공을 강행하고 불가함을 간하는 신하들을 모두 참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은 백제와 신라의 배후 공격을 기회 삼은 것이나 백제와 신라는 아직 효과적인 지원을 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전략 전술 등 용병술이 수군보다 우월하였으나 거기에 충성심이 투철한 호국 정신과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기적 같은 一當百이란 것을 사실로 증명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진취적인 국민정신에 대항하는 세력 즉 수를 이은 唐과 백제 신라의 정략은 어떠하였는가? 고구려와의 통일을 거부하고 남의 나라 唐에 칭신하고 충성을 바친 사연은 무엇인가? 당나라 군신들의 夷以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제도하도록 만드는 정책)사상과 대단군제국 이래의 천자위를 이제 당이 차지하기 위하여는 고구려를 정복해야 한다는 운명적 적대 관계에 있어 백제 신라의 고구려와 동족 분열은 아세아 대륙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독재자 수 양왕 광과 함께 그의 일족 수백 명도 남김없이 죽였다. 이를 계기로 唐王 이연은 정권 인수를 위한 활동을 강행하여 수왕의 잔당 건덕(建德)의 領地 山東 30 余洲를 平定하고 高句麗 侵入에 對備하고 李世民은 장안에 이르러 무장하고 이세운 등 35 장군을 이끌고 철기 萬匹과 甲士 3萬人이 앞뒤를 호위하고 북을 울리며 수의 잔당을 위압하였다.  수왕과 같은 돌궐 출신 왕세충(王世充)이 수 양왕의 뒤를 이으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산동의 건덕이 이세민에게 망하였음이다. 건덕은 이떤 인물인가? 의협심이 강하고 다역이 과인하고 용맹하여 고구려 원정군 200長으로 뽑혔다.


  한 고향 사람 손안조(孫安祖) 또한 용맹한 장사로서 함께 징집되었다. 손안조는 요동에 출정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니 집에 남은 처자도 비참한 굶주림으로 고생할 것임에 죽는 것이 낫다 하여 물에 던져 죽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현령이 그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그는 현령을 찔러 죽이고 도망쳐 건덕의 집에 숨었다. 관가에서 관원이 건덕의 집에 잡으로 오니 건덕이 안조에게 이르기를 수 문왕 시절 천하가 은성 부강하여 백만의 군사로서 고구려를 쳐도 도리어 패하고 지금 요동의 재난으로 백성은 곤궁한데 작년에 다시 출정한 군사도 전사하고 돌아오지 않고 곤궁은 더욱 심한데도 주상은 백성을 구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친다 하니 필연코 천하가 크게 어지러울 것이다. 대장부 세상에 나서 큰공을 세워 출세할 것이지 어찌 고구려 병에게 억울하게 죽을까 보냐? 하고 수백 명의 소년을 모아도 적으로 변하여 출정기피자를 모아 차츰 군세를 이루어 수가 망하는 틈에 수만 명의 군사로 산동을 점거하였던 것이다.(征士安祖辭以家爲水票妻子婚死縣令怒笞之安祖刺殺令亡抵建德?之官司遂捕踵迹至建德家逮德謂安祖曰文皇帝時天下殷盛發百萬之衆以伐高麗尙爲所敗今水僚爲災百姓困窮加之往歲西征行者不的瘡痍未復主上不恤乃更發兵親擊高麗天下必大亂丈夫不死當立大功豈可但爲亡虜耶易知錄)
 

수양왕이 비록 민심을 잃었으나 왕세충은 弑君의 불명예로 수 양왕의 잔당들이 왕세민은 수양왕을 모살하는데 관여한 불충한 인물이다하여 비난하고 이세민을 따랐기에 왕세민은 이세민에게 토벌되었다. 중원의 이러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이 기회에 승전의 여세를 몰아 失地 回復(회복)을 않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당왕은 이런 위기를 어떻게 넘겼는지 살피건대 唐의 用意周到함은 實로 謀事는 在人이고 成事는 在天이라 는 말 그대로다. 당은 수를 이어 중원에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미처 통일을 이루기 전에 재빨리 고구려 백제 신라에 사신을 보내 친선을 도모하였다. 당은 수양왕의 독재정치에 등을 돌렸던 유용한 인사들을 광범하게 포용하여 기용하고 역대로 군사정권은 오래지 못하여 반드시 비참하게 망하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을 강화하면서도 문화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전념하였다. 이무렵 고구려 또한 년년 계속된 계속된 전쟁으로 온국민의 희생이 너무 클 뿐 아니라 신라 백제와의 화합을 이루지 않고는 후방을 비우고 중원고토 회복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설수없었다. 그것은 백제뿐 아니라 신라도 이 때는 미약한 지난날의 신라가 아니였다. 三국은 통일 보다는 오히려 대립이 심화해 가고 있었다. 이 시기 三국의 국토 형태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만주 요동과 조선반도의 지금의 평양 대동강까지의 일부 지역에 진출하고 백제는 중원 하남을 잃고 중원상해 지역의 월주 지경과 조선반도 대동간 이남과 호남지역을 영유하고 신라는 조선반도 영남 강원도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 간도 연변 지역을 영유하고 있었다. 신라 영토의 일부가 발해변에 있었는데 그것이 고구려가 망한 후에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영토에 관하여는 하권에서 자세히 기술할 것이다. 그간 고구려 영토가 조선반도 북부모두였다는 인식은 잘못이다. 당초에 고구려는 그 본토가 만주요동 중원 북부이며 조선반도와의 인연은 백제 분국과의 전쟁으로 광개토대왕이 당시 남평양을 한 때 점령하여 병력을 주둔한 것이고 조선 반도의 북부가 고구려 영토는 아니다. 고구려는 요동과 만주의 광활한 영토를 영유하고 있었으나 나라안의 군신간의 분류로 내란이 일어나 혼란에 빠짐에 당에게 침략의 기회를 주어 당은 신라의 후원을 얻어 전후에서 협공하여 千년 간 중원에서의 패권 다툼에 종지부를 찍고 고구려를 파하였다. 당은 이로부터 천하에 유아독존으로 유일한 황제가 되어 안하무인의 독선이었다. 신라의 지원으로 성공 하였으나 당나라 황제만이 유일한 황제이고 신라는 부용국으로 취급하여 스스로 종주국 행세를 하고 조공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신라·백제·고구려는 같은 동족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남의 나라의 압제하에 들어가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사대주의의 뿌리가 생겼다. 수천년간 동방에 군림하여 중원을 통제하고 위세를 떨치던 동이조선족의 자존심은 살아졌다. 항거 능력없는 신라도 칭신하고 당을 종주국으로 추앙하였으나 자주독립의 기본의지는 굽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당은 신라가 요동에 조금이라도 영토를 가지면 고구려의 잔존세력과 합칠까봐, 계속 압력을 가하여 신라는 협소한 조선반도로 밀려나는 민족적 비극을 맞고 중원 북부 요동 만주의 모든 조선 영토는 고스란히 잃어 버렸다. 실로 민족 분열의 소산이다. 이리하여 동이 조선족은 고구려 패망기에 와서 국토를 모두 잃어버리고 험한 산악지대로 평야가 적은 조선반도로 몰려와서 반도인 小國人 등의 호칭을 감수해야하는 절제를 받게되었다. 화합과 타협의 기교를 모르는 완고일변도의 군사독재 정치의 비참한 결과는 그들 권력집단 자체의 멸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전체민족의 비극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동이족은 단념하지 아니하였다. 신라는 계속 옛 요동 영토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으나 완전 화해된 옛 부여, 고구려의 뿌리인 여진과의 오랜 단절로 연계가 어려워 쉽사리 고토회복의 기회는 오지 아니하였다. 차츰 서로 다른 생활권에서 장기간 살아왔기에 문화적으로 이질화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토 회복의 시도는 신라의 후에 입국한 고려에 와서는 더욱 적극화하였다. 그것은 고려 시조 왕검의 건국 이념이 국토 회복이고 고구려 정신을 이었다. 중원의 한족이 몽고족의 元에게 정복되는 과정에서 절호의 기회가 왔던 것이다.

                                            (以下次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