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부석사 금동불상 500년전 행적 누가 알까

                                          출처: 한겨레신문 2017년2월21일자10면

 

[밥&법] 부석사 불상, 반환과 환수 사이

지난 2일 충남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도비산 자락.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올라가니 아담한 부석사가 눈에 들어왔다. 절 입구에 ‘고려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 신앙의 결정체, 금동관세음보살’이라고 적힌 세움간판이 있었다. 만약 관세음보살좌상이 계속 부석사에 남아 있었다면 자리했을 극락전 안에는 도금된 삼존불이 놓여 있었다. 극락전 한쪽 벽에는 관세음보살좌상에 관을 씌워놓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극락전 앞에서 만난 한 신도는 “법원 판결로 보살님이 곧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 길이 다시 막혔다니 심란하다”고 말했다. 부석사 신도들에게 관세음보살좌상은 그저 ‘문화재’가 아닌 듯했다.

지난 2일 충남 서산 부석사의 모습. 관세음보살좌상의 부석사 환수를 주장하는 내용의 세움간판이 눈에 띈다. 최예린 기자

  지난 2일 충남 서산 부석사의 모습. 관세음보살좌상의 부석사 환수를 주장하는 내용의 세움간판이 눈에 띈다. 최예린 기자

 

 

 

서산 부석사는 극락전 보수 과정에서 나온 상량기를 토대로 의상대사가 677년 창건하고 조선 초기 무학 스님이 중창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서산 부석사와 금동관세음보살과의 관계가 적힌 기록은 뜻밖의 장소에서 나왔다. 1951년 5월 일본 쓰시마(대마도) 관음사의 안도 주지는 관세음보살좌상을 들어 올리다가 불상 안 복장물(불상을 만들면서 속에 넣는 사리나 불경 등 부장품)을 발견했다. 복장물 중에는 불상의 기원을 적어놓은 결연문도 있었다. 결연문에는 천력 3년(1330년) 2월 불상을 만들어 고려 서주 부석사에 모셨다는 내용이 시주자 32명의 이름과 함께 적혀 있었다. 서주는 서산의 옛 명칭이다. 관음사의 안내문에도 관세음보살좌상이 고려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고려 불상이라고 적혀 있다. 관음사에선 1526년에 불상이 봉안됐다.

 

 

 

 

 

 

 

 

 

관음사에 봉안돼 있던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 안에서 발견된 불상의 조성 내력을 밝힌 결연문. 김현구 전 서산문화원장 제공
관음사에 봉안돼 있던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 안에서 발견된 불상의 조성 내력을 밝힌 결연문. 김현구 전 서산문화원장 제공

관세음보살좌상 안에서 발견된 복장물 모습. 김현구 전 서산문화원장 제공
관세음보살좌상 안에서 발견된 복장물 모습. 김현구 전 서산문화원장 제공

■ 쓰시마에서 대전으로…불상 반환 환수 논쟁 시작

관세음보살좌상
관세음보살좌상

약 700년 전 부석사에 있던 이 불상이 분명치 않은 이유로 일본으로 갔다 약 500년 만에 국내로 돌아왔다. 2013년 1월29일 오후. 기자회견이 열린 대전지방경찰청 브리핑룸 한쪽에 불상 2점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불상은 절도범들이 일본 쓰시마에서 훔쳐왔다. 둘 중 크기가 작은 동조여래입상은 38.2㎝ 높이에 몸매가 드러나는 얇고 선이 굵은 가사를 입고 있었다. 높이 50.5㎝의 관세음보살좌상은 머리 관이 없는 상태로 오른손을 비스듬히 들고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당시 기자회견장에 온 문화재청 관계자는 “동조여래입상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것이고, 관세음보살좌상은 14세기 고려시대 것이다. 이 불상들은 국내 학계에서 고대·중세 불교미술의 수작으로 평가해왔다. 1974년 일본에서 동조여래입상의 가치를 1억엔으로 평가한 점을 생각하면 현재 시가로는 수백억원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관세음보살좌상은 국내 학계에서는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이라고 부른다. 불상 안에서 나온 복장물에서 ‘천력 3년(1330년) 고려 서주 부석사’라는 명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자리를 뜨려는 문화재청 관계자를 붙잡고 물었다. “절도범이 훔쳐온 것이지만, 애초 우리 문화재인데…. 불상을 돌려줄 수밖에 없나?” 문화재청 관계자의 답변은 단호했다. “국제법에 따라 훔친 문화재는 돌려줘야 한다. 어쩔 수 없다.” 1970년 유네스코 총회가 채택한 ‘문화재 불법 반출입 등에 대한 협약’은 ‘불법 반출된 문화재는 본래 소장처가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당시 브리핑룸에 있던 몇몇 기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절도범 손에 돌아온 고려 불상 반환’ 논란의 시작이었다.

■ 500년 만에 절도범 손에 돌아온 고려 불상…법정 공방

2012년 10월3일 김아무개(74)씨 등은 쓰시마에 도착했다. 3일 뒤 이들은 쓰시마의 가이진 신사에 있던 동조여래입상과 관음사에 있던 관세음보살좌상, 이즈하라마치 신사에 보관 중이던 대장경 1점을 훔쳤다. 훔친 문화재는 운반책에게 넘겨졌다. 운반책들은 출국자 엑스선 검색대가 없는 후쿠오카현의 하카타항으로 이동한 뒤 10월8일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도난 사실을 확인한 일본 사찰 쪽의 신고로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절도범의 덜미는 생각보다 쉽게 잡혔다. 일본의 중요문화재를 훔쳤으면 경찰 수사망을 피해 상당 기간 숨어 지내야 하는데 절도범들이 범행 직후부터 불상을 팔아보려 여기저기 흥정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전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문화재 불법 유통 경로를 조사하다가 불상 절도단의 흔적을 발견했고, 2012년 12월22일 일당을 체포했다. 경찰은 절도단이 경남 마산의 한 창고에 숨겨뒀던 불상도 압수해 가져왔다. 이렇게 쓰시마에 있던 불상은 대전까지 오게 됐다.

‘500년 만에 돌아온 불상의 거취’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1330년 관세음보살좌상이 만들어졌다고 복장 기록에 나온 충남 서산 부석사가 ‘불상의 일본행’에 제동을 걸었다. 부석사의 주지인 원우 스님은 “교류 등 정상적인 방법으로 불상을 일본에 넘겨줬다면 불상 안에 있는 복장물을 비우고 주는 것이 맞다. 불상 안에서 복장물이 그대로 발견됐다는 것은 불상이 약탈됐다는 중요한 증거”라며 “관세음보살좌상이 본래 있던 서산 부석사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석사 신도와 서산 주민들이 ‘관세음보살좌상 제자리 봉안위원회’를 만들어 불상 환수 운동을 시작했다.

2013년 2월 대전지법은 부석사가 낸 반환 중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법원이 정한 불상의 반환 유예 가처분 기간이 지난해 2월로 끝나자 쓰시마의 관음사는 한국 법무부와 외교부, 문화재청에 조기 반환 절차를 진행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맞서 부석사는 지난해 3월 대전지법에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관세음보살좌상 인도 청구소송’을 냈다. 지난달 26일 대전지법 민사12부는 “정부는 이 불상을 부석사에 인도하라. 가집행도 허용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검찰은 항소했고, 5일 뒤 대전지법은 불상 인도 가집행을 막아달라는 검찰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여전히 관세음보살좌상은 대전 유성구의 국립문화재연구소 유물수장고에서 5년째 긴 겨울잠을 자고 있다. 절도범이 훔친 2점의 불상 중 동조여래입상은 ‘불법 유출 증거가 없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도 없어 도난 당시 점유자인 일본 신사에 전달한다’는 대검의 결정에 따라 일본으로 돌아갔다.

■ 약탈 문화재냐 장물이냐?…불상 반환 논쟁 2라운드

부석사 극락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넓은 간척지가 도비산 바로 밑부터 펼쳐져 있다. 간척 전에는 부석사가 있는 도비산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온 왜구가 노략질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왜구가 불상을 약탈해 갔느냐’를 따질 때 부석사가 있는 서산 지역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했는지는 불상 인도 소송의 쟁점 중 하나였다. 1330년 부석사에 불상이 봉안됐고, <고려사>에는 1352년, 1375년, 1378년, 1380년, 1381년에 왜구가 서산 지역을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 2일 서산 부석사 극락전의 모습. 만약 관세음보살좌상이 계속 부석사에 있었다면 머물렀을 곳이다. 최예린 기자

  지난 2일 서산 부석사 극락전의 모습. 만약 관세음보살좌상이 계속 부석사에 있었다면 머물렀을 곳이다. 최예린 기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 행정상 서산에 붙어 있던 태안을 다시 예산군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1926년 간행된 <서산군지>를 보면 부석사에서 약 2㎞ 떨어진 왜현리(지금의 창리)의 지명 유래를 설명하며 “왜구가 침입해 노략질할 때 우리 군이 이를 붙잡아 매달아놓은 데서 연유해 마을의 명칭을 지었다”고 나와 있다. 한 마을의 이름이 ‘왜구의 목을 매달았다’는 뜻일 만큼 서산 지역에서의 왜구 침략이 심했다는 것이 부석사의 주장이다. 하지만 불상 약탈의 심증은 있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약탈·반출이 이뤄졌는지 등 실증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법조계와 학계의 견해도 만만찮다. 구체적인 약탈 증거가 드러나지 않으면 부석사가 소유권을 주장해도 불상을 환수하기 어려울 것이란 주장이었다.

 

 

 

 

 

 

 

 

 

 

1926년 간행된 <서산군지>에 나온 부석면 왜현리(지금의 창리) 지명 유래에 대한 부분. 우리 군이 왜구을 붙잡아 매달아놓았다는 데서 왜현리라고 이름 붙였다는 내용이다. 서산문화원 제공

1926년 간행된 <서산군지>에 나온 부석면 왜현리(지금의 창리) 지명 유래에 대한 부분. 우리 군이 왜구을 붙잡아 매달아놓았다는 데서 왜현리라고 이름 붙였다는 내용이다. 서산문화원 제공

 

 

 

 절도범이 일본에서 국내로 훔쳐온 불상을 ‘장물로 볼 것이냐 약탈 문화재로 볼 것이냐’를 놓고 그동안 여론이 엇갈렸다. 지난달 1심 재판부는 “이 불상은 서산 부석사의 소유로 넉넉히 추정할 수 있고, 과거에 증여나 매매 등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도난이나 약탈 등의 방법으로 일본의 관음사로 운반돼 봉안됐다고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불상 안에 복장물이 그대로 들어 있던 점과 불상을 어떻게 옮기게 됐는지 적은 이안문이 없는 점을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불상의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이안문이 없을 경우 불상이 비정상적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본 학자의 글도 약탈 증거로 채택됐다. 기쿠타케 준이치 교수는 서일본문화협회가 발행한 <대마의 미술>(1978년)에 “관음사는 조선으로 건너가 악행을 저지른 고노씨가 귀국해 만들었다. 1330년 제작된 고려 불상이 존재하는 것은 왜구에 의한 일방적인 청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고 기고했다. 보통 관세음보살좌상과 한 묶음인 보관과 대좌가 없는 점도 약탈의 근거라고 법원은 판단했다.

하지만 1심 판결 뒤에도 논란은 여전하다. 쓰시마로 건너간 한반도 불상에 대한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정영호 단국대 석좌교수는 “훔쳐 온 물건이기 때문에 반환하는 게 원칙이다. 부석사에서 약탈해 갔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도난품을 일본에 돌려주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국외 반출 우리 문화재 환수 운동을 펴온 혜문 스님(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도 이 문제를 ‘문화재 반환’의 관점이 아니라 ‘도난품 반환’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혜문 스님은 “단순 도난 사건인데 이 문제를 문화재 반환 문제로 착각해 상황이 꼬였다. 1심 재판은 부석사와 한국 정부가 벌인 것이지 일본 관음사와 재판한 것이 아니다. 한국 재판에서 부석사가 이겨도 일본은 결국 이 문제로 국제사법재판소까지 가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일본은 쓰시마시의회가 불상 반환 결의문을 채택했고 관방장관, 문부과학상 등이 한-일 장관회담 때 불상 반환 요청을 한 바 있다. 2심 재판에 일본이 참여할지는 불투명하다. 대전고검은 일본대사관을 통해 일본 정부와 관음사 쪽에 2심 참여 절차를 편지 형태로 전달해놓았다.

500년 만에 다시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길을 잃은 고려 불상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2심 재판은 3월께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불상 반환 논쟁 2라운드 공이 울린다.

대전/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13년 전 관음사와 교류 통해 불상 환수하려 했지만…”

“왜구가 훔쳐 가면서 훔쳤다는 기록을 남기겠나?


관음상 환수운동 펴온 향토학자 김현구

 

2004년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이 있던 쓰시마 관음사를 찾은 김현구 전 서산문화원장(오른쪽)이 관음사 관리승인 무라세(왼쪽)에게 백제의 금동대향로 모형을 선물하고 있다. 김현구 전 서산문화원장 제공

  2004년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이 있던 쓰시마 관음사를 찾은 김현구 전 서산문화원장(오른쪽)이 관음사 관리승인 무라세(왼쪽)에게 백제의 금동대향로 모형을 선물하고 있다. 김현구 전 서산문화원장 제공

 
향토학자인 김현구 전 서산문화원장은 1983년부터 21년 동안 충남 서산문화원장으로 일하면서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에 관심을 가졌다. 1926년 간행된 <서산군지>에서 부석사와 가까운 왜현리(창리)의 지명이 왜구 약탈과 관계있다는 기록을 찾은 사람도 김 전 원장이다. 그는 2004년부터 2013년까지 3차례 쓰시마 관음사를 찾아 양쪽의 교류를 통해 관세음보살좌상을 찾아올 방안을 강구했다. 지난 6일 김 전 원장을 만났다.

-쓰시마 관음사에 관세음보살좌상이 있다는 사실은 언제 알았나?

“쓰시마 관음사에 서산 부석사 관세음보살좌상이 가 있다고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1980년대 초반이다. 서산문화원장으로 있으면서 ‘관외 반출 문화재 도록’ 작성을 했다. 언젠가는 우리 지역 문화재를 돌려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관음사의 관세음보살좌상을 처음 알게 됐다. 그 뒤 1980년대 후반에 불교미술사 전공인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가 쓰시마에 가서 학술조사를 하고 돌아와 내게 “쓰시마섬 관음사에 서산 부석사에서 만들어진 불상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국보급의 걸작으로 환수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말해 다시 한번 불상의 존재를 확인했다. ”

-그 뒤 직접 관음사를 찾았다고 들었다.

“2004년 10월에 부석면 출신 친목단체인 ‘부남친목회’와 함께 처음 관음사에 갔다. 그때 쓰시마시 부속실장과 쓰시마 향토사료관장이 관음사까지 친절하게 안내했다. 관음사 관리승인 무라세와 신도들이 나와서 우리를 환영했다. 절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절과 다르게 초라한 규모였다. 무라세로부터 절과 불상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한국에서 사 간 백제의 금동대향로 모형을 전달했다. 참배하고 안내에 따라 관세음보살좌상을 관람하는데 한눈에 반했다. 얼마나 매력적인지….”

-관음사 쪽은 불상에 대해 뭐라고 설명하던가?

“설명을 듣다가 무라세에게 불상이 어떤 연유로 관음사에 와 있는 것인지 물었더니 “모른다”고 답했다. 우리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주불로 모시고 있으면서도 이 불상이 왜 여기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선의로 주고받았다면 기록(이안문)이 있거나 아니면 구전으로라도 그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무라세가 “안도 주지가 복장물을 발견한 뒤 ‘이 불상이 한국에서 조성됐다면 불상을 돌려줘야 하는 것이 양심적이다. 하지만 불상을 일본의 문화재로 지정해놓아 우리 마음대로 줄 수도 없으니 똑같은 모양의 불상을 만들어서 한국의 부석사에 봉안하고 서로 왕래하며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2004년 당시 안도 주지는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직접 확인할 순 없었다. ”

-그 뒤 본격적인 환수 운동이 이뤄진 건가?

“안도 주지가 했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아 그 자리에서 우리가 “안도 주지의 뜻을 따라서 관음사와 부석사가 자매결연하고 쓰시마와 서산도 친교를 맺어 왕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관음사 쪽이 신도 회의에 안건을 올려 통과하면 그렇게 하겠다는 답을 받았다. 우리는 여기에 더해 “관음사 근처에 한국식 전통 사찰을 지어주겠다. 거기에 불상을 모시자”고 제안했고, 관음사 쪽도 반겼다. 이를 추진하던 중에 관음사 쪽에서 절 지어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한국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해주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다’며 반대하는 쪽이 관음사 내부에 생겼다고 하더라. 우리도 서산 출신의 법정 스님이 타계하면서 일 추진이 요원해졌다. 2010년 다시 ‘서산 문화비전21’ 회원들과 관음사를 찾아 관세음보살좌상을 부석사에 교류 보관하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2012년 절도 사건이 났다. 사건이 난 뒤 2013년에 한 번 더 관음사에 갔지만 아예 만나주질 않았다.”

-관세음보살좌상 반환 논쟁에 대한 생각은?

“왜구가 훔쳐 가면서 훔쳤다는 기록을 남기겠나? 그런데 왜 우리가 일본이 약탈한 증거를 내놓아야 하나? 입증하려면 일본 관음사가 불상을 가져간 경위를 밝혀야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다. 불상이 서산 부석사에서 만들어져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일본에 넘어간 것은 여러 정황상 사실이다.”

서산/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